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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동네 시인선 166, 나정호 시집, 『내가 새가 아니어야 하는 이유』
나정호 시집 | 내가 새가 아니어야 하는 이유 | 문학(시) | 변형국판 | 116쪽 | 2021년 12월 30일 출간
값 10,000원 | ISBN 979_11_5896_539_6 03810 | 바코드 9791158965396
미메시스 그리고 일상의 환상성
1999년 《월간문학》로 등단한 나정호 시인의 네 번째 시집 『내가 새가 아니어야 하는 이유』가 시인동네 시인선 166으로 출간되었다. 나정호는 대상보다 먼저 움직이지 않고 섣불리 접근하지 않는다. 사물과 풍경이 스스로 움직여 ‘언어’로 전환되는 순간을 기다린다. 함부로 대상에 의미를 부여하는 대신 빛과 소리와 냄새와 색채와 질감에 몸을 맡긴다. 그렇게 자신과 대상 사이에 놓인 간격, 그 주변 세계가 다채롭게 변화하는 제3의 국면까지 받아 적는다.
시집을 묶는다고 작업실을 뒤집어놓았다.
서랍에서 잡동사니가 쏟아지고 가방이 털리고,
옷가지들이 끌려 나왔다.
그때 작년 가을 코트 주머니에서 마른 풀씨 몇 알 쓸려 나와
출입문 쪽으로 굴렀다.
잘 가라,
가슴에 금이 간 사람에게로 가서, 꽃으로 묻히더라도
아니, 어느 칼바람에 꺾이고 부러지더라도
나는 정말 모르는 일이다.
2022년 1월
나정호
인간은 일평생 자기 이외의 것에 대해선 알지 못한다. 아니 어지간해선 자기 자신도 모른다. 고대 그리스 델포이의 아폴로 신전 기둥에 새겨졌다는 격언 “너 자신을 알라”가 소크라테스의 말로 널리 알려지면서 제 주제와 분수, 깜냥을 알라는 의미로 지금껏 통용된다. 하지만 이 말의 진의는 따로 있다. “너 자신의 무지함을 알라”는 것이다. 인간은 우주 만물과 세상 만상 어느 하나도 깨우칠 수 없으니, 섣불리 진리니 본질이니 논하지 말고 자기 마음이나 들여다보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무지한 우리는 세계를 알려는 시도조차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인가? 사랑이 끝내 대상을 내밀히 알고 싶은 욕망이라면, 아무것도 알 수 없는 우리는 타자에게로 건너가려는 도약을 중단해야 하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신은 불완전한 우리에게 ‘말’을 주었다. 우리는 ‘언어’를 통해 미지와의 간극을 좁힐 수 있다. 인간은 아무것도 모르지만 언어는 모든 것을 안다. 태초에 세상보다 말씀이 먼저 있었다. 말씀을 통해 세상이 창조되었다. 태초는 언어가 원관념이고 대상이 보조관념인 세계였다. 그때 언어는 대상을 묘사하고 수식하기 위한 외부적 장치가 아니라 대상을 직접 창조하고 진화시키는 내재적 힘이었다. 말씀이 부여한 기질에 따라 생명들은 세상에서 살아나갔다. 그래서 이 ‘말씀’을 로고스(logos), 원리와 법칙이라고 했다.
동양사상은 “말하여지는 순간 진리가 아니”라면서 개념과 언어 사이의 불일치와 왜곡, 굴절을 일찍이 수용했지만, 언어에 대한 이 엄격주의는 결국 말하여지지 않는 말, 말할 수 없는 말이 곧 진리라는 사실을 역설적으로 나타내준다. 궁극의 진리란 말이 닿을 수 없는 곳에 있다는 언어도단(言語道斷) 역시 마찬가지다. 언어도단이 지시하는 ‘말’이란 한계와 불완전함을 지닌 범인(凡人)들의 말이다. 그러므로 표현의 한계를 뛰어넘는 언어, 의미의 불완전함을 극복하는 언어라면 기꺼이 진리에 가닿을 수 있다. 이것은 불가능의 가능성이지만, 여기 도전하는 이들이 바로 시인이다.
상수리나무는 너무 많은 가지를 내면
고생길에 든다는 걸 안다
서로 잎이 되려고
햇빛과 바람, 구름을 부둥켜안으려고 억지 부릴 때
위험한 줄 잘 안다 그걸 빤히 알고 있는 비바람은
누군가 기다릴 때는 쉬 걸음하지 않는다
상수리나무는 버리고 꺾어내야 할 것들을 알고 있다
그러므로 나무는 그냥 나무인 척 가만히 서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내가 상수리나무가 아니고
도토리 열매가 아닌 것이 마땅하다
겨울이 지났다고,
나의 생은 더 이상 춥고 몸서리칠 일 없다고
말하면 안 된다 말이 씨가 되기 때문이다
나는 세상에 너무 많은 말들을 씨앗처럼 뿌리고 잠재우며 살았다
그것들은 새가 되지 못한 채 어디론가 쓸려 다니고
밟히면서 흔적도 사라지고 없다
내가 무수히 지우고 뭉개며 터트려 놓은 무정란의 씨앗들,
이제 봄은 언제든 다시 온다고 노래하는 것도
모두 터무니없는 헛소리다
상수리나무가 꺾이지 않으려면 온몸으로 흔들리며
제자리에 서 있어야 한다
내가 도토리나무가 아니고 상수리나무는 더욱 아니고
새가 아니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 「내가 새가 아니어야 하는 이유」 전문
나정호는 말의 초월적 힘을 믿는 동시에 ‘나’의 불완전함을 아는 시인이다. “말하면 안 된다 말이 씨가 되기 때문”이라며 말이 지닌 주술적 힘, 옥타비오 파스가 “마법사의 행위”라 말한 ‘시적 작용’을 함부로 사용하길 경계하는 한편 “내가 도토리나무가 아니고 상수리나무는 더욱 아니고/새가 아니어야 하는 이유”를 ‘말’의 완전함과 대비되는 자기존재의 불완전성에서 찾고자 한다. 이러한 나정호의 태도를 종합해보면, 진리에 닿는 말이란 결국 ‘말’에서부터 ‘나’를 지워낸 말, 인위와 부조화를 벗어낸 말, 획일화된 의미와 낡은 관념에서부터 자유로운 말일 것이다.
로버트 저메키스 감독의 1997년 영화 〈콘택트(Contact)〉에서 과학자 역할을 맡은 주인공 조디 포스터는 우주선이 웜홀을 통과하는 순간 이렇게 외친다. “뭐라 표현할 수 없어. 젠장, 시인이 왔어야 해!”라고. 인간은 표현의 한계 앞에서, 어떤 말도 떠오르지 않아 침묵해야만 하는 절망 앞에서 시인을 떠올린다. 시인은 표현 불가능한 것을 표현해주는 언어의 구원자, 인간과 세계 사이의 괴리를 말로 이어주는 매개자이기 때문이다.
― 이병철(시인, 문학평론가)
나무 아래서 손 벌리면 별이 몇 점 열린다
그 별들이 덜컹거리며 으스러지기도 하고
나부끼다가 쏟아지기도 한다
별자리보다 먼 서쪽 하늘에 대고
입 벌리고 서 있으면
가지 사이로 별들이 뉘엿뉘엿 물들고
내 몸에 떨어져 뒹굴던 해거름의 잎사귀들
발등에 피어오르던 풀꽃 그림자들
어린 날 떫고 비리던 달새 울음도
황망히 들려온다 그런 깡마른 봄밤에
말랑말랑한 뭇별 한 점 꺾어다가
가지 끝에 걸어둔다
달밥이 둥실 떠오르는 봄밤
달동네 사람들은 달을 어디에 걸어두고 살아갈까
나는 배고픈 새들의 길을 하늘 꼭대기까지
환하게 열어둔다
그러다가 둥지에서 슬그머니 잠든다
― 「달밥」 전문
카메라를 들면 무언가 받아 적고 싶어진다 빈손으로 보내기에 미안했던 가을날의 나무와 새들, 이따금 내게 말 걸어주던 기억 속의 싱싱한 얼굴들, 한번 가서는 돌아오지 않을 이파리 같은 그녀의 이름도 몰래 적어둔다 짜릿한 순간들을 온몸으로 찰칵찰칵 받아 적으며 내게 이름 불러주던 사랑스러운 빛줄기들, 저기 깜빡이는 눈빛들이 부시게 소스라치는 울음 한 컷도 선명하게 받아 적는다 하늘가에 울먹이던 발목 삔 먹구름, 그 먹구름이 절뚝이며 걸어가다가 지우고 뭉개버린 모퉁이의 어스름, 별들의 눈짓도 가까이 당겨본다 아무리 벗어나려고 몸부림쳐도 자꾸만 벼랑 앞이던, 그래서 두려움에 떨던 어린 날의 촉촉한 눈망울, 그 가녀린 눈망울 너머로 그리운 아버지가 뭉게뭉게 걸어오시고, 저녁의 뭉게구름 너머로 새 필름을 갈아 끼운 내가 아버지의 한 생을 받아쓰기 한다
― 「카메라 일기」 전문
새 벽지를 바르려고 꽃송이를 뜯어냈다
땟물 흐르는 중천 하늘이 부욱, 갈라지더니
바닥에 널브러졌다
꽃들이 꺾어지고 부러지면서 바닥에 나뒹굴었다
가을은 세상 모든 얼룩이 꽃으로 돌아오는 계절,
발가벗겨진 방 안에
피 한 방울 흐르지 않고 꽃물이 낭자했다
내가 잠에서 깨어날 때
함께 울어주던 아침 새들
꽃송이들의 입술에서 흘러나오던 색 바랜 노래들
그러나 언젠가 한 번은 내게서 멀어져 갈
잎사귀만 한 바람들,
벽에는 가을걷이 끝난 들판의 이삭처럼
곰팡이 구름이 알록달록 피어났다
나는 해묵은 가을 하늘을 걷어내고
새 얼룩을 피워 올릴 꽃벽지를 발랐다
― 「벽지」 전문
나무가 물감을 만들고 있다는 것은
처음부터 거짓말이라고 아들이 말했다
나뭇잎은 물드는 게 아니라
추워서 제 몸에 불을 피우는 거라고 나는 고쳐 말했다
단풍나무 몸에는 태양이 숨어 있는 거라고,
손대면 금방 화상 입는다고 나는 아들을 타일렀다
나무 몸에 굴렁쇠가 있다고,
뒹구는 나뭇잎을 가리키며 아들이 일기장을 펼쳤다
어쩌면 나무 몸에 해가 뜨고 바람이 불고
구름이 햇살을 밀어내기 때문에
저녁은 꽃잎처럼 물드는 거라고,
그런 날 저녁에는 가지에서 어린 새들이
몇 번이나 쓰러졌다 일어서며 날갯짓을 한다고
아들에게 말해줬다
밤새 나무 밑동을 파고 들어간 잎새들이
꽃등을 켜고 있다고,
빈 가지를 가리키며 아들은 일기에 따라 적었다
― 「아들의 일기」 전문
마지막 출근 버스를 타고 가다가
이 버스는 왜 자꾸만 나와 같은 길을 돌아 나올까,
생각하다가
마지막 퇴근 시간에 서랍을 정리하다가
왜 내가 걸어온 길에는
버리기 아까운 물건들이 많이 떨어져 있을까,
주섬주섬 생각들을 집어 들었다가
다시 놓아주다가
책상의 물건들을 상자에 쓸어 담다가
텅 비어가는 서랍을 살살 어루만져주다가
이다음 책상의 주인은 어떤 얼굴로
내가 걸어온 길을 따라와 줄까
곰곰 되씹어보다가
그 사람을 위해 나는 무슨 말을 적어놓을까
빈 책상 서랍에 무언가를 주섬주섬
주워 담아 보다가,
문득 빨간 볼펜을 떠올렸습니다
이다음 책상의 새 주인도 빨간 볼펜을 들고
내가 걸어온 길을 따라오면서
마디마디 빨간 밑줄을 그어주기를 바라며
― 「마지막 퇴근」 전문
숲은 하얗게 뼈를 비우고 있다 돌배나무 가지 사이를 막 돌아 나온 바람이 잠들지 못한 잎새 울음을 가을날의 능선으로 밀고 간다 숲은 마주하기를 즐겨 하고 돌배나무와 칡넝쿨이 서로 부둥켜안고 맨살 비비며 입맞춤한다 그늘의 온전함과 무심히 지나가는 바람의 무늬들, 나이테와 옹이 박힌 나무들의 꿈은 그지없이 고요하다 숲은 한순간 이별 직전의 침묵처럼 무겁기도 하다 열매와 꽃을 떠나보내고 안으로 푸른 그늘의 고요를 뿜는다 숲에 이르면 이끼들의 초록 돌기의 꿈이 보이고 웃자라는 가지들의 소란함이 보이고 가지 사이에 얹어놓은 둥지가 보이고 밤마다 대책 없이 외출하는 새가 보인다 흙속에서 근심 많은 뿌리들의 잔기침이 들려온다 때로 숲길에 이르면 주술에 걸린 한 남자가 돌배나무로 서 있고, 그 남자의 육체 안에서 나이테를 감아올리는 한 그루 나무가 자란다
― 「숲으로의 산책」 전문
동백이 꽃망울 만드는 일은 사람의 몸을 빚어내는 일과 흡사하다. 동백이 꽃망울 버리는 일은 어미가 제 핏덩이 잘라내는 일과 다르지 않다. 동백나무가 꽃망울 빚어내는 일과 자르고 버리는 일 사이에서 햇빛과 바람은 도구로써 자기 도리를 다했다. 새 울음도 동백꽃 피고 지는 일을 거들었다.
그날도 등 떠밀어 주는 사람 대신 동백꽃 흐드러지고 있었다. 해가 저물도록 물끄러미 동백꽃을 바라보다가 왔다. 여기까지 돌아오는 동안 나는 몇 번의 벼락과 폭우에 부서지고 깨졌다. 이제 나는 사람에게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사람이 사람에게 돌아가는 일은 참 멀고 아득하다.
나정호 시인
광주 송정리 원동에서 태어나 1999년 《월간문학》으로 등단했다. 무크지와 사외보 꽁트 작가로 활동하였고, 시집으로 『나는 지금 백제로 간다』 『그대, 다시 그리움으로』 『불안한 꿈』, 육필 시선 『달콤한 흔적』이 있으며, 희곡 「첼로, 「밤길」 외 다수의 공연 작품을 발표했다. 종합
예술지 《Art & Art》, 미술평론지 《magazine art》 객원작가로 활동했다. 현재 롯데백화점 문화센터 〈사랑의인수분해〉 시 창작 강사로 활동하고 있다. 〈신라문학대상〉, 〈해양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atopos〉 동인.
제1부
달밥•13/썸•14/멍•16/공공미술•17/할롱베이•18/카메라 일기•20/팬티와 자작나무•21/따로따로•22/밥•24/중얼중얼, 봄•25/안경•26/치과에서•28/벽지•29/즐거운 토스트•30/미안하다, 릴케여•32
제2부
별똥별•35/구름 모자•36/형•38/손•39/가방의 나이•40/할인마트에서•42/아들의 일기•43/나의 무릉도원•44/교복 입은 성자(聖子)•46/빨래•47/옛날에 내가•48/무화과•50/살얼음•51/갸우뚱•52/명함•54
제3부
달밤•57/내가 새가 아니어야 하는 이유•58/궁리•60/빵으로 시를 노래하는 저녁•61/마지막 퇴근•62/풍경(風磬)•64/빈집•65/배앓이•66/눈치•68/입춘•69/소금•70/저녁이었다•72/노란 슬픔•73/구름 이불•74/산중 담화•76
제4부
외설과 예술•79/춘자다방•80/소리가 꽃을 피울 때•81/커피 애인•82/줄•84/눈물 관광•85/시월의 아침•86/숲으로의 산책•88/울음•89/출사•90/봄밤•92/잠•93/사랑이 가네•94/꽃피는 애인•95/흐린 날•96
해설 이병철(시인, 문학평론가)•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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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나정호 선생님 축하드려요
늘 건강하시고 평안하세요
정영호샘 도 축하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