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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창작론 과제 15001038 조민우
제목: 순수한 악의
1. 망자는 말이 없다
서울시 안에는 금천구라는 작은 동네가 있다. 유동인구가 꽤 되는 동네지만 곳곳에는 재개발이 시급한 건물들이 상당히 많다. CCTV는 어느 곳에나 있었지만 완벽한 것은 아니었다. 만약 완벽했다면 조광옥의 살인은 쉽지 않았을 테니까.
조광옥의 살인 후, 내로라하는 신문사들은 너나할 것 없이 조광옥의 살인사건을 다루었다. 사실 다루었다고 할 필요도 없었다. 세 명을 살해 후 그 자리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던 범인을 지나가던 시민이 제보함으로써 사건이 종결되었기 때문이다. 금천 경찰서는 범인의 살해동기를 묻기 위해 몇 차례 심문을 하였지만 조광옥은 “그냥 죽였다”고 답할 뿐, 더는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금천 경찰서 서장 최성영은 지난 2004년 왕건이파 사건 이후로 이렇게 커다란 사고는 없었다고 말하며 경찰로서 범죄를 막지 못한 점에 대하여 피해자들의 유가족들에게 사죄를 하였다. 그리고 이후 자세한 사건 경위는 기자 회견을 열어 밝히겠다고 답하였다.
조광옥은 구속 후 일주일도 채 안되어 재판장에 서게 되었고 반성하는 기미가 없다는 점, 그리고 사건이 매우 잔인하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징역 10년형을 선고 받았다. 일부 시민단체는 조광옥의 살인에 분노하며 고작 징역 10년 형이냐며 연일 형량 반대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조광옥은 형량을 선고받은 뒤 마치 해탈한 듯 보였다. 허기짐을 달랠 정도로만 음식을 먹었고 그 어떤 수감자들과도 말을 섞지 않으며 하루 하루를 보냈다. 구치소의 배식을 담당하는 소지는 약 몇 달 후 출소하며 가족들에게 그 때의 심정을 이렇게 밝히기도 했다.
“ 조광옥 그 사람은 사람이라기 보단 죽은 시체와 같았다. 더는 바라는 것도 없고 그저 죽을 날만을 기다리는...”
2.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다.
가람은 눈을 뜨고도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하였다. 그 느낌은 마치 허공에 붕 뜬 듯 하였다. 아직 해본적은 없었지만 마약을 하게 되면 이런 느낌이지 않을까 싶기도 하였다. 온 몸을 나른함이 감싸 안았으며 편안기는 어릴 적 부모님의 무릎을 베고 누웠을 때 만큼이나 편안해서 더는 소원이 없을 정도였다. 이렇게 푹 자본적은 없었다. 시간은 천천히 흐르기도 하였으며 동시에 빠르게 흘러가기도 했다.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일 것 같았으며 보이는 것이 전부 다 허상인 것만 같았다. 하염없이 무의식의 세계를 즐기던 가람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오늘 무슨 날이었던 것 같은데.’ 한참을 고민하던 가람은 지금 시간이 궁금해졌다. 팔만 뻗으면 닿을 거리에 휴대폰이 놓여있었다. 그것조차도 귀찮았지만 하는 수 없이 휴대폰을 들어서 시간을 확인했다. 오후2시 30분이 넘었다. ‘14시간 정도 잔건가.’ 휴대폰을 들어서 잠든 사이에 온 메시지를 확인하던 가람은 사수로부터 온 메시지를 확인하고 화들짝 놀라 일어났다. 사수는 매우 짧고 간결하게 ‘사건 발표 현장은 어때?’ 라고 보냈었다. 오늘은 금천구청장이 직접 조광옥 살인사건의 사건에 대한 질의응답을 하는 날이었다. 약 15년만에 벌어진 잔혹한 살인사건이기도 했고 피해자를 무참히 난도질 한 것으로 꽤 이슈가 되었던 사건이었다. 입사한지 약 1년, 여전히 견습 기자인 가람을 위해, 특종 하나 잡아보라고 가람의 사수가 등 떠민 일이기도 했다. 그런데 늦잠을 자다니.
가람은 전날 알람을 맞춰두었던 것을 기억해내고 휴대폰의 알람 설정을 확인했다. 청문회는 오후 2시 30분에 시작하며 가람의 집에서 세미나 홀까지는 약 30분이 걸린다. 그래도 혹시 모를 일에 대비해 12시에 알림을 맞춰뒀었는데 오전12시가 아니라 오후 12시로 했다니. 가람은 순간 치밀어 오르는 자신에 대한 분노와 열등감을 잠시 삭히고는 이제라도 출발하려 옷을 입었다. 머리는 감지 않았지만 떡진 부분 없이 멀쩡해보였다. 화장하고는 원래 거리가 멀어서 안하고 가려했으나 간단하게 비비크림 정도만 바르기로 했다. 계단을 허겁지겁 내려가 어찌저찌 택시까지 잡아 세우는 데에는 성공했으나 이대로 가면 최소 청문회 중간에, 최악이라면 청문회가 끝난 후에야 도착할게 뻔했다. 신을 믿지는 않았으나 정말로 신이 있다면 자신을 돕길 바랬다.
택시는 규정 속도에 맞게 달려 세미나 홀이 있는 건물에 도착하였다. 시간은 3시 10분이었다. 가람은 택시기사에게 천 원짜리 뭉치를 몇 묶음 던져주고 거스름돈도 채 받지 않고선 세미나 홀이 있는 3층까지 전속력으로 뛰어갔다. 잠시 문 앞에 서서 땀을 식히고 있는데 갑자기 문이 열리더니 여러 사람이 빠져나오기 시작했다. 끝났구나. 가람은 허탈한 심정으로 바닥에 털썩 주저 앉았다. 사람들이 대화하는 것을 한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앞으로의 처우를 고민하였다. 한참을 그렇게 멍하니 앉아있는 가람은 누군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택시기사였다. 택시기사는 아까 자신이 준 천 원짜리 뭉치를 들고선 자신을 찾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인파에 휩쓸려 잘 보이지 않았던 탓인지 가람을 찾을 때까진 한참이나 걸렸다.
“아가씨 여기 있었네. 이 돈, 내가 가지기엔 너무 액수가 많아서 돌려주려고 왔네. 자, 여기.”
가람은 푸근한 인상의 택시기사를 보면서 힘없이 양손으로 돈을 받았다. “아니 세상에, 요즘 누가 고무줄로 돈다발을 만들어 다니나. 젊은 사람이 돈의 소중함을 모르면 못써. 아껴 써야지.” 사실 가람은 돈의 소중함을 절실히 느끼고 있었다. 다만 이번에는 그것조차도 잊을 만큼 긴급한 상황이었던 것이다. 이제는 다 끝났지만.
한편 금천경찰서의 막내인 장성우는 청문회의 뒷정리를 하고 있었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것이겠지만 그 어떤 누구도 자신을 돕지 않고 먼저 떠나버렸다. 막내생활 어연6년차, 온갖 사건을 겪었고 나름 베테랑이 되었지만 희한하게도 자신의 밑으로 오는 후임은 며칠 안 되어 전근을 가거나 그만두기 일쑤였다. 덕분에 6년이 넘은 지금까지도 온갖 궃은 일을 도맡아 하고 있는데, 처음에는 자신을 불쌍하게 여기며 도와주던 선배들도 이제는 그러려니 하고 자연스럽게 모든 잡일을 자신에게 떠맡긴다. ‘때려칠까.’ 마음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까지 들기 시작했다. 경찰이 되기 위해 수년을 단련하고 노력했지만 고작 이런 일로 그만둘 생각이 들다니, 퍽 우스웠다. ‘기자라는 것들이 쓰레기를 아무렇게나 버리고 가네.’ 바닥 곳곳에 나뒹구는 페트병이며 유리병을 한 병 한 병 손으로 치우고 있자니 서러워서 눈물이 다 날 것 같았다. 이럴 때 누군가 도와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가람은 우선 사무실에 가서 사수에게 조언을 구해보기로 했다. 돈 다발을 핸드백에 집어넣으려는 순간, 휴대폰 벨소리가 울렸다. DJ doc와 춤을, 가장 좋아하는 노래였으나 지금 들으니 그저 시끄럽기만 하였다. 발신자는 사수였다. 먼저 전화를 걸려고 했으나 막상 통화를 하려니 떨렸다. 이번에야말로 잘리는 게 아닐까. 손을 부들부들 떨며 통화버튼을 누르려는 순간 가람은 세미나 실에서 나오는 누군가를 보게 되었다. 익숙한 얼굴이었다. 너무도 예상치 못한 만남에 가람은 잠시 말을 잊었다. 그건 상대방도 마찬가지였다. 성우는 밖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기에 누군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나 살펴보았는데 거기엔 웬 여자가 땀범벅인 채로 구부정하게 서있었다. 심지어 익숙한 얼굴이었다. 어릴 때부터 함께 자란 소꿉친구였고 고등학교 3년 동안 사랑했으며 여전히 잊지 못한 그 얼굴, 가람이었다.
두 사람은 한동안 서로 마주보고 있었다. ‘몇 년 동안 소식도 없더니 왜 여기서 나오지?’ 가람은 의아한 눈초리로 성우를 바라보았다. 벨소리는 어느덧 뒷전이었다. “너..왜 거기서 나와?” 가람은 너무 힘들어 헛것이 보이나 싶어 성우의 볼을 찔러보았다. 예전만큼은 아니지만 여전히 찐빵같이 쫀득한 맛이 있었다. 성우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이 너무 억울하고 힘들어 환각을 보는 게 아닐까 하고 가람의 머리털을 어루만져보았다. 여전히 개털이었다. 심지어 뭔지 모를 찝찝함 마저 느껴졌다. “나, 경찰이니까. 그런데 너는 여기서 뭐 해?” 성우는 저도 모르게 가람의 머리를 만진 코 밑에 가져다 대며 냄새를 맡았다. 가람은 화들짝 놀라 성우의 손을 잡아 세우며 말했다. “ 그걸 왜 냄새 맡으려고 해. 멍청아.” 성우는 가람의 행동을 보고 피식 웃었다. 오랜 세월이 지났지만 여전히 천진난만하고 사랑스러웠다. 가람은 순간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며 성우를 바라보았다. 어릴 적 그 모습에서 약간 나이든 티가 좀 났다. 경찰 제복도 꽤 잘 어울리고 있었다. 요 몇 년 보이지 않더니 어엿한 경찰이 되었구나. 가람은 성우의 손을 놓으며 활짝 웃어보였다. “아무튼 오랜만이다. 이렇게 만나냐. 와. 신기해라. ” 엄지 손가락을 척 올려 세우며 경찰복이 어울린다고도 칭찬하였다. 한번 세기 시작한 강둑의 물을 막기란 여간 쉬운 일이 아니다. 저마다 오랜 시간 참아왔던 울분과 서운함을 풀어내기 시작한 두 사람은 한참을 떠들었다. 온갖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는 와중에 성우는 아까 자신의 질문에 가람이 답하지 않았던 것을 기억하며 다시금 물어보았다. “그런데 있잖아. 가람아. 아까는 못 보았는데 오늘 청문회에 왔던 거야? 혹시 물어보고 싶었던 게 있으면 나한테 말해봐. 그 사건 내가 담당이라서 잘 아는 편이거든.”
3. 사람이 사는 법
가람은 성우의 말을 듣고 순간 마음이 놓여 주저앉고 말았다. 죽으라는 법은 없구나. 성우는 가람이 주저앉자 손을 내밀며 다정하게 물어보았다. “뭐야 왜 갑자기 그래. 어디 아파?”
아픈 것을 찾자면 안 아픈 구석이 없었으나 굳이 말할 필요는 없었다. 가람은 성우의 손을 잡으며 일어났다. “사실 오늘 청문회에 참석하려고 했는데..늦잠을 자서 못들어 갔거든. 나 이번이 정말 중요한 기회인데 다행이다. 네가 있어서.” 가람의 눈가는 어느새 촉촉해졌다. 화장을 하지 않고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마터면 오랜만에 만난 구세주에게 추한 모습을 보일 뻔했으니. 성우는 가람을 아련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일단은 마무리 좀 하고 난 후에 이야기 하자. 여기 앞에 카페 하나 있던데 거기 가는 건 어때?” 가람은 고개를 끄덕였다. 가람은 성우가 뒷정리를 마무리하는 동안 흐트러진 매무새를 가다듬었다. 몇 분 뒤 성우가 정리를 마치고 나오자 가람은 성우와 팔장을 끼고 카페로 향했다. 성우는 아까 쓰레기를 정리하며 손가락에 끈적거리는 이물감이 느껴졌지만 별로 개의치 않았다. 가람은 아이스티를 두 잔 주문하고 수첩을 꺼내서 몇 성우에게 몇가지 질문을 시작했다.
사건의 내용, 범인의 신상, 피해자들에 대한 간단한 정보와 살인 수법, 동기 등 뻔한 질문들이었지만 성우는 아는 내에서 최대한 많은 정보를 주려고 노력하였다. 오히려 가람이 묻지 않은 내용도 알려주고 싶어서 입이 근질거리기도 했다. 한편 가람은 성우가 말해주는 것을 적으면서 생각하였다. ‘생각보다 별로 특이한 내용은 없는걸. 아무리 봐도 평범한 범죄인 것 같은데.’ 성우는 가람의 표정이 시큰둥한 것을 보고 조바심이 들었다. 성우는 작은 것이라도 놓친 게 있을까 싶어서 서류 케이스 안에 있는 보고서를 꺼내 가람에게 보여주려고 하였다. 그런데 손가락의 이물질이 서류에 묻고 말았다. 성우는 급하게 이물질을 지워보려고 문대보았지만 그럴수록 글자는 오히려 더 보이지 않게 될 뿐이었다. “그건 뭐야?” 가람은 성우가 허둥대는 것을 보며 손을 내밀었다. 표준 형식의 보고서였으나 일부 글자가 지워져 보이지 않았다.
[피해자는 로 사망함. 신체 일부분은 피해자 사후 범행도구에 의해 훼손됨.]
“안 보이는 부분은 범행도구가 써 있었던 거지?” 성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중에 반장님한테 드려야 하는 건데..새로 만들어야겠네.”
가람은 지워진 부분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지워진 부분에 살인동기를 집어넣어도 말이 된다고 생각하였다. “이 사건, 묻지마 법죄로 분류된 이유가 뭐라고 했었지?” 성우는 아이스티를 홀짝이다가 순간 사례가 걸렸는지 켈록 기침을 하였다. “컥, 흠 흠. 그야 피해자와 범인은 안면식이 없는 상황이고 범인이 자기 입으로 화가 나서 죽였다고 했으니까.”
가람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을 이었다. “그런 걸로 묻지마 범죄라고 말하기에는 조금 부족하지 않나? 제 3자가 보아도 수사가 급 전개된 느낌이 드는데?” 성우는 뜨끔하였다. 10년 만에 터진 대형 사건이다 보니 윗선에서 압력이 들어와 최대한 빨리 끝났다는 말을 할 수는 없었다. “너가 그렇게 느낀다면 그런 거겠지.” 비록 첫사랑 앞이라고는 하나 경찰로의 임무를 저버릴 수는 없는 성우였다.“ 한편 가람은 비록 범인이 바로 잡혔다고는 하나 이렇게 흐지부지 끝날 사건이 아니라고 생각하였다. 틀림없이 놓친 부분이 있을 것이다.
4.감
"조광옥은 금천구에 살고 있잖아. 그럼 피해자들은 왜 여기에 왔을까?" 가람은 성우를 바라보며 말했다. 성우는 가람의 말을 듣고 의아한 듯이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서류뭉치를 뒤적거리다 가람에게 보여주었다. "일단 한명은 서울에 사는 사람이 아니야, 경기도 화성 출신이지. 그리고 나머지 둘은 각각 잠실과 건대에서 살고 있어. 글쎼 잘 모르겠네. 이유가 있으니까 왔겠지." 가람은 성우의 수첩을 빼앗고 뚫어져라 관찰한다. "피해자 이성우, 나이 36세, 고졸, 사는 곳 화성시 홀어머니와 사는 중. 그리고 피해자 김장수, 43세, 중졸, 외동. 마지막 피해자 박재현, 나이 27세, 지방대 졸업, 가족관계 동생 한명. 피해자들간에 연관이 없어 보이네. 그나마 있다면 정상적인 가족 관계를 가지 사람이 없다는 점 뿐? 학교 선후배 관계도 아니지?" 성우는 가람이 들고 있던 자신의 서류를 돌려받으려고 손을 내밀었다. "아니야. 아무 연관도 없어. 그러니까 묻지마 살인사건이지. 조강옥 그 새..아니 그 놈은 미친 놈이라니까? 그게 아니면 왜 이 멀리까지 와서 사람을 죽였겠어."
"하지만.." 가람은 말끝을 흐렸다. 수상한 점이 있었다. 그게 무엇인지 지금은 알지 못하지만 기자의 감이 분명하게 말하고 있었다. '수상하다' 라고. "범인은 왜 살인을 저지른 뒤 도망치지 않고 그 자리에 있던 걸까?"
"그건 나야 모르지. 아무리 취조를 해봐도 화가 나서 죽였다고 할 뿐이니까." 성우는 별일 아니라는 듯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성우는 경찰이 된지 3년이 지났지만 나름대로 많은 사건을 경험했다고 자부하고 있었다. 이번 살인사건도 별 일 아닐 것이다. 피해자들은 안타깝지만 범인도 잡혔고, 3명을 제외하고는 추가 피해자가 없다고 하니 그나마 다행일 뿐이다. "혹시 말야, 조강옥이 한 말 그대로 화가 나서 저지른 범죄 아닐까?" 가람은 조심스럽게 떠보듯이 말했다. 제발 걸려라. 제발 걸려라.
"그게 무슨 말이야?" 성우가 미끼를 물었다. "그러니까, 피해자들과 전혀 관계없어 보이던 조강옥이 사실은 피해자들에게 원한을 품을 만한 일이 있었고, 그래서 죽였다는 거지. " 가람의 뇌가 팍팍 돌아간다. 예전에 보았던 서류들 중 묻지마 범죄에 관한 글이 있었던 것 같다. 재빨리 생각해본다."묻지마 범죄가 아니라 원한에 의한 살인이다? 그러면 왜 죽였는지 이유를 말했을텐데? 굳이 묻지마 범죄로 갈 이유가 있나? 만약 죽일만한 동기가 있었다면 조금은 참작이 될 여지도 있을텐데."
참작의 여지라. 가람은 그 말을 듣고 무엇인가 생각해냈다. "혹시, 피해자 세 명 말야, 셋 다 직업이 없는데 그 점을 살펴보면 무언가 나오지 않을까? 직업이 없고 나이차이도 꽤 나는 건장한 성인 남성 세 명이 멀리와서 이유 있는 살해를 당했다. 어디서 냄새가 나지 않아? 형사의 감 같은거 말야." 성우는 잠시 생각해보았다. 지금은 퇴사하고 없는 선배 중 한명이 이런 말을 했었다. '모든 범죄에는 이유가 있다. 이유가 없다면 그건 누군가 감추고 있을 뿐이다.'
"그러니까 니 말은 지금 피해자들의 신상정보를 조사하라 이거야?" 가람은 성우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아니, 피해자들에 대한 정보 뿐만 아니라 범인과의 인터뷰도.” 성우는 허를 찔린 듯 하였다. "나 아직 말단이야..그만한 힘은 없어, 게다가 피해자들을 조사하는 건 곧 두 번 죽이는 일이라는 거 알지?" 기자윤리가 무엇인가. 공정보도, 사생활 보호, 정당한 정보수집. 가람은 어린 시절부터 달달 외워온 강령들을 다시 상기해본다. " 만약에 피해자들에게 조금이라도 슬픔이 될 것 같으면 주저 없이 정보를 파기한다..그러면 되지 않을까? 그리고 우리가 하는 건 혹시 모를 억울할 일을 조금이나마 풀어주려는 거라구?"
억울함을 풀어주는 일이 맞기는 하였다. 단지 주어가 범인인지 피해자인지 명확히 밝히지 않았을 뿐. "인터뷰는 부탁한다고 무조건 되는 게 아니야. 자료 조사는.. 혼자서라도 알아볼게. 대신 너는 민간인 신분이니까 나서지 마, 알았지?." 가람은 성우가 기특했다. 약6년 동안 연락 없이 지내다 갑자기 불러서 사건에 관해 이야기를 나눠도 불만 없이 도와줄 줄이야. 언젠가 비싼 밥이라도 쏴야겠다고 생각했다. "오케이, 그러면 내가 연락 기다릴게. 오늘 고마웠어. " 가람은 어질러져있던 짐을 챙기고 손가락으로 하트를 만들어보이며 자리를 떠났다. 은근슬쩍 성우의 서류를 챙기는 건 덤이었다. 성우는 가람의 뒷모습을 한참동안 바라보았다. 이러면 안 되는데, 경찰이 피해자들에게 상처를 주는 행동이나 하고 멋대로 사건을 알리고. 나는 경찰로서 빵점이라고. 그렇게 생각했다.
. 5. 즐거운 죽음
다음날, 가람은 성우의 당부에도 불구하고 혼자서 알아낼 수 있는 부분은 알아내기로 하였다. 성우에게는 미안한 부분이 없지 않아 있었지만 그럼에도 할 수 있는 것은 하고야 말겠다는 그 의지를 꺾기란 불가능하였기 때문이다. ‘그래도 피해가지 않는 선에서만..’ 최소한의 양심은 있는 가람이었다. 가람은 전날 알아본 것을 토대로 범인의 지인들과 피해자들의 유가족들을 만날 계획을 세웠다. 다만, 피해자들의 유가족들은 통화 내내 별로 신 쓰지 않는다는 느낌으로 말하고 있었다는 게 조금 신경 쓰였다. 가족 간에 불화가 있던 걸까. 장예식장으로 향하는 택시를 타는 동안 가람은 그 점을 곰곰이 고민하고 있었다. 이윽고 도착한 곳은 독산 장례식장 앞이었다.
가람은 장례식장이 피해자들이 살해된 현장과 멀지 않은 것을 보고는 조금 씁쓸한 감정을 느꼈다. 전에 보았던 정보대로라면 피해자 모두 가족 사정이 여의치 않은 편이었다. 때문에 장례식 또한 합동으로 진행됐다고 한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하면 피해자들의 유가족들에게 억대의 보험금이 들어갈 것이라는 점이다.
'유가족들에겐 안 됐지만 그래도 산 사람은 살아야지. 부디 그 돈이 새 출발을 하는데 도움이 되길.'
가람은 장례식장에 들어가기에 앞서 벽이 붙어있는 대형거울로 옷차림을 한 번 더 확인했다. 장례식을 염두하고 산 옷은 아니지만 다행히 집에 검정색 정장이 한 벌 있었다. 정장 재킷의 호주머니 속 조의금을 확인해보았다 빈손으로 오는 것은 예의가 아닌 것 같았기에 몇 푼 되지 않은 돈이나마 나름 알차게 넣었다. 다행히 어디 찢어진 곳도 없이 그대로 있었다. 가람은 조의금을 꺼내들고 주위를 두리번 거렸지만 그 어디에도 돈을 넣는 통은 보이지 않았다.
'안쪽에 있는 건가?' 가람은 조용히 신발을 벗고 장례식장 안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언제 피웠는지 모를 향이 곧 죽을 듯이 타오르는 것 말고는 사람의 인기척이 보이지 않았다. 장례식장 안은 지극히도 썰렁했다. 상주는 고사하고 직원들조차 없다니. 가람은 당황스러웠지만 아무도 보지 않더라도 고인에 대한 예의를 다하고자 영정사진을 향해 절하였다. 일어선 뒤 향에 다시 불울 붙이려 사진 앞으로 다가가는 순간, 담배꽁초 두 개피가 향 앞에 박혀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친구가 왔다 갔나? 그렇다고 해도 담배는..' 가람은 담배꽁초를 집어 보았다. 방금 전까지 누가 피웠던 듯 필터 부분이 축축했다. 아무도 없다니. 기다리기엔 좀 썰렁한걸. 가람은 나가기 위해 신발을 챙겨 신으려 했다. 그러다 문득 조의금을 아직 주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대로 가져가기엔 좀 마음에 내키지 않는 부분이 있었기에 그냥 노잣돈 같은 느낌으로 돈을 영정사진 앞에 두기로 했다.
밖으로 나간 가람은 근처를 돌아다녔지만 그 누구도 장례식장에 올 법한 복장을 한 사람은 없었다. 그렇게 한 오 분 돌아다니다가 아까 만진 담배꽁초를 그대로 두고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그래도 향 대신 담배 꽁초는 아니었다. 가람은 꽁초를 회수하기 위해 다시 장례식장 안으로 향했다. 그리고 안에 들어선 그때 한 여자가 영정사진 앞에서 담배를 피우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형형색색의 밝은 옷을 입은 여자는 침을 있는 힘껏 모으더니 향이 꽂혀있는 곳에다가 뱉었다. 그리고는 영정사진 앞에 놓인 조의금 봉투를 챙겨들어 뒤로 돌던 중 가람과 마주쳤다.
"당신 뭐하는 사람이에요? 유가족 아니죠? 돈은 왜 가져가요!!" 가람은 저도 모르게 소리를 빽하고 질렀다. 아무리 세상이 흉흉하다해도 눈 앞의 이 여자가 한 행동은 장례식장에서 해선 안 되는 일이었다. 설령 오래된 친구나 가족이라고 해도.
여자는 당황하는 기색 없이 봉투를 팔랑거리며 가람의 옆을 지나쳤다. 한없이 차가운 목소리가 가람의 귀를 사정없이 파고들었다. "이 봉투 그쪽이 놓은 건가? 화장실 다녀온 사이에 놓여있길래. 이 돈 말야 내가 좀 쓰면 안될까? 따지고보면 나도 피해자거든."
피해자? 가람의 머릿 속에 그 한 마디 단어가 맴돌았다. 어쩌면 저 여자야말로 사건의 숨겨진 비밀을 알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깐..피해자라구요? 고인들과 아는 사이신가요?" 가람은 눈으로는 여자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시선은 여자의 뒤를 향하고 있었다. 이런 타이밍에 누군가 들어오기라도 한다면 아주 큰 낭패가 될 것이다.
"응 맞아요. 알기 싫은데 어쩌다가 알게 됐네. 근데 누구시죠? 이런 일을 하는 사람처럼은 안 보이는데. " 여자는 봉투에서 돈을 꺼내더니 핸드백 속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다시 담배를 꺼내들어 불을 붙이려고 했다.
"이런 일이 무엇인진 모르겠지만 전 기자입니다. 여기 온 이유는 .."
여자가 가람의 말을 끊으며 말하였다. "뭣 좀 뜯어먹을 거 없나 온거 아니고? 기자라는 양반들은 특종에 목숨 걸었다던데~"
가람은 순간 울컥했지만 마음을 침착하게 다스리고 여자를 향해 최대한 상냥하게 말하려고 했다.
"그런 건 아니고..이 사건에 수상한 점이 있어서요. 마치 피해자들에게 숨겨진 뭔가가 있다거나...?" 가람은 말끝을 흐리며 상대방의 반응을 살폈다. 하지만 눈 앞의 이 여자는 감정을 잘 다스리거나 드러내지 않은 편인 것 같았다. 마치 그런 일이 아주 익숙한 것처럼.
여자는 담배를 깊게 들이마쉬더니 나직하게 말하였다. "아 그러니까 저 ㄱ새끼들 ㅈ되게 해보려고 왔다? 잘 왔네. 내가 할 이야기가 좀 많은데."
가람은 상대방의 말본새에 짜증이 치밀어 올랐지만 다시 한번 호흡을 가다듬었다. 어쩌면 피해자들에게 명백한 악의를 보이는 저 여자가 사건의 진실을 밝히는데 도움을 줄지도 모른다.
6. 우리 모두는 누군가에게 악연이었다.
가람은 그대로 밖으로 나가 여자와 대화를 나누었다. 사실 대화라고는 해도 거진 피해자들에 대한 험담을 듣는 것뿐이었지만. 감정을 숨기는 것과는 별개로 여자는 말이 꽤 많은 타입이었다. 자신을 이혜지라고 소개한 여자는 이야기를 나누는 도중 술을 마시자고 했다. 가람은 낮술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눈앞의 이 여자와 더 많은 대화를 나누고 싶어 어쩔 수 없이 혜지가 잘 안다는 술집으로 향했다. “낮에도 영업을 하나 봐요?” 가람은 새삼 신기하다고 생각하였다. 술집은 보통 밤에만 열지 않던가.”요즘은 24시간 내내 열어요. 손님들이 뭐 시간 맞춰서 오는 것도 아니고.” 혜지는 작은 상가로 들어간 뒤 지하로 향하는 계단을 내려갔다. 음침한 계단은 빛 한 줄기조차 들어오지 않았다. 밖에 잘 보이지도 않는 작은 간판이 걸리기는 했었지만 이 정도로 낙후된 환경일 줄이야. 가람은 어쩌면 식품 관련 폭로 기자인 최 선배를 호출해야 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였다. “다 왔어요.” 혜지는 철장 뒤에 있는 작은 문을 보며 말했다. “이게 술집?” 가람은 당황했다. “왜요, 아닌 거 같아 보여요?” 혜지는 철장 위에 달린 cctv에 손을 흔들었다. 이윽고 문 안에서 중년의 부인이 나와 철장 문을 열어주었다. “그 아이는 누구니? 아, 혹시 일하고 싶다던 그 애?” 중년의 부인은 세련된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그녀의 말투는 매우 중후했고 포근했으며 그 속에서는 산전수전 다 겪은 노련함이 느껴졌지만 그것은 결코 거칠지 않았다. “아니요, 그 앤 다른 곳에서 채갔어요. 이 사람은..그러니까 하늘이 보낸 천사?” 가람은 천사라고 불리는 것이 얼마만인지 생각해보았다. 마지막으로 기억나는 건 11살 때 아빠에게서 들은 ’우리 공주님, 천사님, 사랑해요.‘ 가 전부였다.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들어 오거라. ” 가람은 혜지를 따라서 철장 안 문으로 향했다. 안에 들어서자 접객용 테이블과 술이 가득한 진열장들이 보였다. 별다른 특이한 점은 없었지만 생각보다 규모가 꽤 컸다. “혜지야, 저분은 어떤 술을 좋아하시니?” 중년의 부인은 바 안에 들어가 진열장에 가득한 술들을 하나씩 손으로 만져가며 말했다. 가람은 조용한 목소리로 “맥주 부탁드립니다.” 라고 말했다. 혜지는 언제 자리를 잡았는지 바 바로 앞자리의 테이블로 가 앉아 있었다. “이리 오세요. 이제부터 진짜 이야기를 해줄게.” 가람은 혜지의 손짓을 못마땅하게 바라보았다.
‘한참을 욕만 하더니 이번엔 진짜 들려주는 거겠지?“ 가람은 일단 혜지가 있는 테이블에 갔다. 혜지는 그곳에서 후후 웃더니 이야기를 시작했다. ”사실 굳이 이곳까지 온 이유가 있어요. 내가 일하던 곳이기도 하고, 뒤진 그 놈들 여기서 꽤 알아주는 진상이었거든요. 저기 있는 마담이 특히 호되게 당했죠. 그쵸 마담?” 마담은 안주를 준비하는 도중 고개를 들며 상냥하게 대답했다. “나 불렀니? 왜, 뭐 더 줄까?” 혜지는 술을 흔들었다. “술 조금 더 주시고 ,그 이야기 해주세요. 따개비 닮은 놈들이요. 이 아가씨가 그 이야기 듣고 싶대요.” 마담은 혜지의 입에서 따개비라는 단어가 나온 순간 얼굴이 굳어졌다. 가람은 뭔가 있다는 걸 깨달았다. “따개비라는 건 그..피해자들 말하는 거죠?” “기자님 생각보다 촉이 좋으시네. 우린 걔네들 따개비라고 불러요.” 마담은 과일이 담긴 접시를 테이블로 가져오더니 가람을 향해 말했다. “그 녀석들 이야기는 왜 궁금한 거죠? 그쪽이랑 관계가?” 가람은 마담의 말에서 묘한 혐오의 냄새를 느꼈다. “저는 기자입니다. 혜지 씨하고는 이번 조광옥 사건 피해자의 장례식장에서 만났고, 피해자들에 대한 증언을 해주겠다고 해서 왔습니다. 작은 단서라도 좋으니 말씀해주세요.” 마담은 그 말을 듣자 조금 누그러진 듯한 표정을 짓더니 다른 테이블에서 의자를 빼와 가람의 옆에 앉았다. 마담은 잠시 차분하게 생각에 잠기더니 이내 테이블 위에 놓인 술을 잔에 따라 마시기 시작했다. “마담, 웬일로 술을 마셔요?” 혜지는 그런 마담이 신기하다는 듯 말했다. “나도 그 녀석들이랑은 악연이 깊으니까. 말해볼래요? 뭐가 궁금한지.” 가람은 이때다 싶어 수첩과 펜을 꺼내들었다. “말씀하시는 것을 들으면 피해자들과 불화가 있는 것 같은데, 거기에 대해 자세히 말씀해주시겠어요?” 마담은 씁쓸하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 녀석들하고 알게 된지 5년이 넘었죠. 아마. 그 녀석들은 우리 가게 단골 진상이었어요. 우리 가게는 외롭고 지친 사람들의 마음을 포근하게 안아주는 곳인데, 그 무뢰배들은 술에 취하면 우리 직원들을 더듬기도 하고 폭력을 휘두르기도 했죠.” 가람은 새로운 사실에 조금 놀랐다. “우리 가게가 예전에는 아가씨들하고 2차고 나가는 곳이었다고는 하는데, 제가 사장이 되고나서부터는 절대로 그런 일은 허락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그 녀석들은 그런 것 따윈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굴었죠.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저도 한 때는 화류계에서 일했답니다. 그래서 그때의 고통과 외로움을 잘 알고 있어요.” 가람은 문득 궁금증이 들었다. ’불법적인 일이 아닌 보통 술집이라면 경찰에 신고하면 되는 일 아닌가?‘ 가람의 속내를 다 읽었다는 듯 마담은 말을 이었다. “그 녀석들을 경찰에 신고하려 해도 일이 쉽지는 않았어요. 뒤를 봐주는 조폭이 있는건지 거만하게 굴기도 하고, 또 협박을 하기도 했죠.” “협박이요?” 마담은 고개를 끄덕였다. “ 그 녀석들은 우리 직원들을 잘 알고 있죠. 직원들 대부분은 제가 사장이 되기 이전부터 일하던 아가씨들이니까요. 한 녀석은 실장으로 일했다고 하는데, 그 때문에 우리 직원들이 매일 곤란해 했답니다.” 가람은 마담의 이야기를 적는 한편 일이 생각보다 커지게 될 것이라고 예감하였다. “ 화류계에서 일했다는 사실로 협박했다는 말이군요. 혹시 영상 같은 불법 촬영물도 가지고 있었을까요?” 마담은 고개를 저었다.
“그 건은 제가 책임지고 전부 회수했답니다. 몇 개는 아직 회수 못한 것도 있겠지만요.”
“어떤 이유 때문에 회수하지 못하셨나요?”
“개인 서버에 저장된 파일이나 usb에 담긴 경우에는 어쩔 수가 없죠.”
“회수 방법은 디지털 장의사를 이용하신건가요?”
“그것도 생각해보았지만 가장 좋은 방법은 인력을 부리는 것이죠.”
“인력이요?”
혜지가 가람을 손가락으로 쿡쿡 찔렀다. “ 흥신소요.”
“아..!”
“돈은 좀 나갔지만 우리 직원들이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 위해선 어쩔 수가 없었죠. 고인 된 사람에게 할 말은 아니지만, 그 녀석들은 잘 죽었다고 봐요.”
가람은 그 이후에도 마담이 해주는 이야기를 받아 적었다. 그리고 피해자들과 악연이 깊은 해수라는 여자의 연락처를 받기도 하였다.
“이 분은 누구신가요?”
“우리 가게에 잠깐 일했었던 아가씨죠. 지금은 다른 일을 하고 있다고 하는데 한번 찾아가보세요.”
“특히 피해자들과 악연이 있는 분이라고 하셨죠?”
“네, 맞아요, 그 놈들은 유독 이 아이한테 집착이 심했었죠. 아직 새하얀, 백지 같은 아이니까요. 이런 일을 하기엔 지나치게 착하고, 순수했던 아이였어요. 그 순수한 얼굴에 눈물이 나게 만들다니, 나쁜 놈들이죠.”
“ 감사합니다. 이야기도 들려주시고, 공짜로 술도 주시고, 음식도 만들어주시고.”
“공짜라곤 안했는데?” 혜지는 입 꼬리를 살짝 올리며 새침하게 말했다. 가람은 사실 이야기를 듣는 내내 술을 한 방울도 마시지 않았다. 안주만 몇 개 주워 먹었을 뿐이지만 혹시 술값을 내게 될까봐 은근하게 쐐기를 박은 것이었다. 그런데 그마저도 들통이 날 줄이야.
“아, 물론 계산해야죠.” 마담과 가람은 계산대로 향했다. 혜지는 테이블에 남아 남은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얼마인가요? ” 가람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카드를 내미는 한편 이번 달 월급까지 얼마나 남았는지 속으로 세고 있었다. 공과세, 월세 등등 내야 할 돈은 한없이 많았으나 인턴 월급은 너무도 적었다. “술도 안 마셨잖아요, 안주는 서비스 주는 셈 칠 테니까 나중에 또 와줘요, 해수한테 안부 전해주구요.” 가람은 마담의 아량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우리 혜지가 말은 저래도 속은 참 여린 아이예요, 그 놈들 때문에 늘 울상이었는데 이렇게 또래 친구랑 가게에 오더니 참..보기 좋네요.” 가람은 꾸벅 인사하며 다시 한 번 감사하다고 말했다. 문을 열고 나간 가람은 철장이 어느새 사라졌다는 걸 깨달았다. 철장이 있던 자리에는 작은 구멍 몇 개가 나 있을 뿐이다. ‘아마도 방법 목적에서 설치한 것일 테지.’ 건물 밖으로 나오자 해는 어느덧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벌써 이렇게 시간이 지날 줄이야, 가람은 내일 해수와 연락해야겠다고 다짐했다.
7. 영원한 비밀은 없다.
이틀 뒤, 가람은 성우의 메시지를 받았다. 메시지에는 힘들게 면회를 잡았다는 말과 함께 조광옥과의 인터뷰 날짜가 적혀 있었다. 단, 조건이 있었는데 면회는 혼자 오되 다른 신문사 기자들한테는 알리지 말 것, 그리고 범인을 자극하는 말을 하지 말 것 이라는 사항이 적혀있었다.
당연하겠지만 일개 신문사 기자가, 그것도 인턴이 세간을 떠들썩하게 만든 범인과 당당하게 인터뷰 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성우의 고됨을 아는 탓인지 서장에게서 허락이 떨어졌고 간신히 면회 날짜가 잡히게 된 것이다. 오후 세시, 서울 구치소. 가람은 절대로 늦지 않겠노라 다짐하며 짐을 챙겼다. 점심은 간단하게 해결하고 약속 시간보다 1시간 가량 미리 도착했다. 의자에 앉은 가람은 어젯밤 해수와의 대화가 담긴 usb가 잘 있나 확인해 보았다. 노트북 배터리도 충분했고 범인에게 질문할 거리고 잔뜩 만들어 두었다. 시간이 지나 가람은 구치소 소장의 안내에 따라 면회실에 들어갔다. 잠시 기다리고 있으라는 말과 함께 떠난 소장은 수척해 보이는 사내와 함께 맞은편에 들어섰다. 조광옥은 사진으로 보는 것보다 말라 보였다. 병에 걸린 건지, 잠을 자지 못한 건지 모르겠으나 그에게선 살아있는 사람의 기운이 보이지 않았다. “면회 시간은 규정상 네시까지로 제한되어있으니 그때까지 하시면 되겠습니다. 보안 상의 이유로 단독 면회는 불가능 하다는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가람은 혹시 성우의 도움으로 특별혜택이 있을까 기대했으나 아쉽게도 별다를 건 없었다. “기자님이시니까 따로 소지품 검사는 하지 않겠으나 범인과 주고받는 물품이 있을 경우에는 상황에 따라 최대 형사처벌까지 받을 수 있다는 점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그럼 즐거운 면회 되시길.”
유리 벽을 사이에두고, 작은 방 안에 조광옥과 나란히 마주보는 가람은 잠시 할 말을 잊고 말았다. 조광옥의 눈동자에서는 생기가 없었으며 피부는 말라죽은 나무의 그것과 같았다. 어떤 절망이 그를 이렇게 만든 걸까. 혹은 삶의 목표를 이룬 자의 말로는 이러한 것인가. 가람은 우선 자기소개를 하기로 했다. 자신의 이름과 직업, 그리고 조광옥 살인 사건에 대한 관심까지 모두 표현하였다. 하지만 조광옥은 가람이 하는 말에 별다른 관심이 없는 듯 보였다. 가람은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고 광옥에게 몇 가지 질문을 하였다.
“조광옥씨, 이번 살인 사건의 동기가 무엇이냐는 경찰의 질문에 화가 나서 라고 답하셨는데 사실인가요?‘
“...”
“화가 나신다면 구체적으로 어떤 점이 화가 나신 건가요? 피해자들을 보니 갑자기 화가 났다거나?”
“...”
“피해자들과 처음 본 사이라고 하던데 사실인가요?”
“...”
“피해자들을 보면 사후에 신체가 훼손되는 등 노골적인 악의가 보이는데 혹시 처음 만난 사이가 아닌 것 아닌가요? 혹은 일이 있다거나?”
가람은 방금 전 질문에 광옥의 눈동자가 조금 흔들렸단 걸 확실히 볼 수 있었다.
“저는 경찰의 견해와는 달리 이번 살인사건의 중요 포인트가 피해자들이 누구이고, 왜 죽었는지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피해자들을 알고 있는 몇 몇 지인들과 인터뷰를 해보았는데 다들 조광옥씨를 모른다는 말을 하더군요. 단 한명만 빼고요.”
순간 가람은 광옥의 목에서 핏대가 일어나는 것을 보았다. 무언가 부러지는 듯한 굉음이 나더니 가람과 광옥을 가로막는 유리 벽에 핏방울이 맺히기 시작했다. 보이지는 않았으나 광옥의 주먹이 가람에게 닿을 뻔 했다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었다.
“조광옥 씨, 법정에서 왜 피해자들에 대한 진술을 하지 않았나요? 그들의 평소 행적을 보면 살해 동기와 범죄행위를 참작할 만한 여지가 있을 텐데도 불구하고 한사코 묻지마 법죄로 몰아가게끔 유도한 이유가 무엇인가요?”
가람은 마지막으로 광옥에게 질문했으나 광옥은 어느 샌가 들어온 경찰들에 의해 끌려나가버렸다. 마지막 질문에 대한 답은 듣지 못했으나 가람은 광옥의 표정에서 단 한가지 메시지를 읽을 수 있었다. 더 깊이 파고들면 다음엔 너가 죽는다.
.8. 두 사람의 입장
며칠 후, 가람과 성우는 예전에 만났던 카페에서 다시 만났다. 성우는 살짝 화가 난 듯 보였고 가람은 아랑곳하지 않는 듯 팔짱을 끼고 있었다. 성우는 가람의 태도를 보고 그럼 그렇지 라는 표정으로 말했다. “이야기는 들었어. 조광옥하고 인터뷰를 나눌 때, 맞을 뻔 했다면서?”
가람은 일부러 배 째라는 태도를 취했다. 그렇게 하면 성우가 싫은 소리를 하지 못할 것이라고 예상했기에. “조광옥씨, 인터뷰 하는 내내 반응이 없었어. 해수씨 이야기를 돌려서 말하니까 그제서야 그렇게 화낸 거야. 난 잘못하지 않았어.” 성우는 가람의 인터뷰 후, 구치소 소장과 경찰서 서장에게 한소리를 들었다. “장 순경을 믿고 인터뷰에 응해줬건만 범인을 자극하고 폭행사건까지 일어날 뻔 하다니, 우리 경찰서의 위상이 떨어졌네. 만약 이번 일이 외부로 알려지면 좋을 게 뭐가 있겠나?” 서장의 쓴 소리에 성우는 깊이 반성하는 태도를 보였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성우가 피해자들에 대한 정보를 찾는 것은 서장도 이미 알고 있었다. 단지, 스스로 멈춰주었으면 싶었기에 말하지 않았을 뿐. 성우는 피해자들에 대한 정보를 대략적으로 알아냈다. 피해자들이 조폭과 관련이 있었다는 사실과 몇 몇 여성들에게 접근해 지속적으로 협박을 해왔다는 사실. 가람이 알아낸 정보까지는 아니었지만 꽤 많은 정보를 수집하였고, 그것을 위해 흥신소에 의뢰하는 등 다소 불법적인 일도 저질렀다. 가람에게 따로 움직이지 말라는 말을 하였지만 가람이 듣지 않을 것이란 걸 알고 있었다. 다만, 개인으로 움직인다면 민간인 신분보다는 경찰이 더 많은 것을 알아낼 수 있고, 민간한 정보를 수집할 때에도 상대적으로 덜 위험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만약, 가람이 접촉한 인물이 조금이라도 나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면 가람은 멀쩡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무 일 없어서 다행이지, 만약에 네가 크게 다쳤다면 나는 어떻게 고개를 들고 살아.”
가람은 성우의 마음도 이해가 갔다. 하지만 기자의 입장에서 제 몸 하나 망가지더라도 사실을 밝히는 것이 더 중요할 뿐이었다.
“ 난 여자 박가람보다 기자 박가람이 더 좋아. 그리고 봐봐, 내가 결국 진실을 알아냈잖아?”
가람은 해수와의 대화가 녹음된 테이프를 꺼내서 흔들었다. 녹음을 위한 기기로는 휴대폰이 더 간단하지만 어쩐지 이쪽이 더 기자다운 느낌이 났다. “그러고 보니 아직 그 이야기는 못 들었네. 말해줄래? 어떤 이야기가 오갔는지.”
가람은 테이프를 녹음기에 집어넣고 재생했다. 레트로 느낌의 카세트 테이프는 중간 중간 잡음이 들리긴 했으나 멀쩡하게 작동했다.
“안녕하세요, 자기 소개 먼저 부탁드립니다.”
“아,,자기 소개라고 해도.. 전 우리 헤어에서 일하는 미용 디자이너 박해수라고 합니다.”
“네, 저는 경찰이고 이름은 박가람입니다. 사실 이곳에 온 이유는 박해수씨가 조광옥 살인사건의 피해자들과 아는 사이라고 해서 취재차 온 것입니다. 기억 나시죠? 따개비..”
성우는 속으로 ‘경찰 사칭은 중범죄인데’라고 생각하였다. 현행범이 눈 앞에 있다.
“기억나죠. 저, 근데 그..정말 광옥씨가 살인을 저지른 건가요?”
“네, 맞습니다. 그 점에 대해서는 명백한 증거가 있어요. 아 참, 조광옥씨하고도 인연이 있다면서요?”
“네네, 저희 미용실에 단골로 오시던 손님이세요. 특히 제가 그분의 머리를 많이 손질하곤 했죠.”
“그러시군요. 조광옥씨하고는 일 외적으로도 친하셨나요?”
“ 아뇨, 아뇨, 다른 손님들하고는 달리 저와는 그저 손님과 직원의 입장이었어요.
“다른 손님들하고는 달리?”
“그, 몇몇 손님들은 과한 서비스를 요구하기도 했거든요. 가끔은 작업거시는 분들도 계시고.”
“그러면 상대적으로 평판이 좋은 손님이었겠네요. 조광옥씨는.”
“그렇죠. 게다가 한번은 다른 손님이 난동을 부릴 때 말려주시기도 했으니까요. 모두들 내색은 안하고 있지만 고마워할 거예요.”
“그러면 뉴스에 조광옥씨가 나왔을 때 많이 당황하셨겠네요? 점잖은 인상의 손님이었는데 살인사건의 범인이기도 하니까.”
“조금..말이 안 되잖아요. 누명을 쓴 게 아닐까 했어요. 심지어 그 죽은 사람들도 제가 아는 사람이었으니까..”
“혹시 뭐 미심쩍은 일은 없으시고?” 성우는 녹음을 듣던 중 테이프 속 가람의 목소리에서 경멸이 담겨있다는 걸 느꼈다. 성우는 잠시 녹음을 중지하고 가람에게 물어보았다.
“무슨 일 있었어? 말투가 좀 공격적인데?” 가람은 고개를 저었다. “무슨 일은 아니고, 내 생각에는..일단 녹음부터 끝까지 들어봐.”
가람은 다시 테이프를 재생했다.
“미심쩍은 일이라면 어떤 일 말하시는 건가요?”
“그냥 뭐, 조광옥씨가 죽었다. 그런데 그 피해자가 미용사를 많이 괴롭혔다. 그리고 조광옥씨는 그 미용사와 친하게 지냈다 이런 정보로 얻을 수 있는 결론은 몇 가지 없거든요.”
“예를 들면요?”
“살인교사”
성우는 순간 가람이 낯설게 느껴졌다. 고등학교에 다닐 무렵 가람은 조금 이기적이고 고집불통이었으나 늘 마음만큼은 따뜻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저런 소리를. 오랜 시간이 지나도 외모는 변하지 않았지만 속은 내가 좋아했던 그 가람이 아닌 건가, 성우는 마음이 조금 아팠다.
“제가 살인을 시켰다 그 말씀이세요? 그럴 리가 없잖아요!! 제가 어떻게 그 이한테..감히..”
“그러면 말해보세요. 짐작 가는 거라도 없는지.”
테이프 너머로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그 사람은 절 어떻게 생각했는지는 몰라도 저는 그 사람을 좋아했어요. 그런데 복수해달라고 말하다니, 그러면 안 되는 거잖아요.”
“혹은 또 다른 가설이 있긴 하죠.”
흐느끼는 소리가 점차 줄어들었다.
“조광옥씨가 스스로 해수씨를 위해 복수를 했다던가.”
“그게..그건...설마요. 그 사람이 왜 저를 위해..”
“조광옥씨도 해수씨를 좋아한다면 말이 돼죠. 찾아보니 조광옥씨는 금천구에 살긴 하는데 좀 멀리 살더라구요. 그리고 집 근처에도 미용실이 있었구요. 조광옥씨는 매번 해수씨를 보러 이곳까지 온 거예요.”
“하지만 그 사람은 아무 것도 모르는 걸요. 제가 잠깐 화류계에 있었다는 것도. 그 사람들이 절 협박했다는 것도,”
“조금만 관심을 가지면 알게 되기 마련이죠. 피해자들이 매장에 온 적은 있겠죠?”
“있어요..”
“그때 조광옥씨도 있었고?”
“네...”
“피해자들이 범행 전에 광옥씨와 접촉한 적이 있네요. 어떤 종류의 협박을 하던가요?”
“제..성애 동영상이 있다고 했어요. 돈을 준비하지 않으면 소문내겠다고..”
“그걸 조광옥씨에게는 말 했었나요?”
“아뇨. 그냥...좋아하는 사람에게 그런 일은 알리고 싶지 않아서..돈은 적금이 만기되면 줄려고 했구요.”
“어떻게 알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조광옥씨는 해수씨의 비밀을 알 거예요. 그 사람들이 힘들게 한다는 것도. 그래서 아마..”
잠시 침묵이 있었다. 어느 쪽도 먼저 말을 꺼내지 않았다. 테이프는 거기서 멈췄다. 성우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결론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대신 복수를 해주었다는 거네?”
“그렇지.”
“그러면 이 사실은 어떻게 할 건데?”
“숨겨야지. 그게 조광옥씨도 원하는 일일 테니까.”
“내 생각은..밝히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성우는 무슨 생각이었는지도 모르게 말을 내뱉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범죄자가 되는 것도 마다하다니, 이전이었으면 낭만적이라고 생각했겠지만 지금은 생각이 다르다.
“적어도 조광옥씨에게는 조금 여유를 줄 수 있겠지.”
"그러다 해수씨의 일상에 해가 된다면? 그게 경찰이 할 일이야? 게다가..네가 그랬잖아. 피해자들에게 상처 되는 정보라면 파기하라고. 뉴스에 살인사건의 피해자들이 협박을 일삼는 인간 말종이라고 방송되어야 속이 후련하겠어?“ 가람은 언성을 높이며 말했다. 성우는 가람을 진정 시키려는듯 제스쳐를 취하고는 조용하게, 하지만 분명히 들리도록 말하였다. "알아, 나도 뭐가 비도덕적이고 뭐가 옳은지는 안다고. 하지만 사건의 진실을 밝히는 것도 경찰이 할 일 중 하나야. 너는 기자잖아, 분명히 너도 뭘 해야 하는지 알고 있을걸?" 성우는 어느때보다도 이렇게 진지한 적이 없었다. 조강옥은 사랑을 대하는 면에서 과거의 자신과 꽤 닮았다. 그를 도와주고 싶었다. 그것이 조광옥이 원하는 일이 아닐지라도.
가람은 성우의 말을 쉽게 부정할 수 없었다. 피해자들은 모두 죽어도 싼 놈 들 뿐이었다. 하지만 썩 잔혹한 진실이 아닐 수가 없다. 감옥에 있는 조강옥씨는 분명 살인을 하였지만 그렇다고 무조건적인 악은 아니었다. 가람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하면 성우를 설득할 수 있을까. 괜히 들려주었다. 가람은 문득 사건의 진실을 파해친 것이 후회되었다. 특종을 잡으려고 이곳저곳 들쑤시고 다닌 결과가 이렇다니. '나는 기자로서 빵점이야 하지만..' 가람은 말없이 계속 고민하였다. 그러나 답은 나오지 않는다. 성우도 그것을 아는듯 대답을 채 기다려주지 않고 경찰서로 향하려 한다. "잠깐만..잠깐만 기다려줘." 가람은 성우의 옷깃을 잡아 세웠다. 성우는 가람의 눈에서 희미하지만 확고한 결단을 보았다.
“해수씨한테 말하자. 어떤 일이 벌어질 건지. 어떤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 해수씨의 선택대로 하는 게 어때?”
성우는 잠시 머뭇거렸다. 사실 제 삼자가 왈가왈부할 이야기도 아니었다. 선택은 관계자의 몫이었다. “그렇게 하자. 그러면.”
9. 선택
두 사람은 해수가 있는 미용실로 향했다. 마침 손님들도 없던 터라 미용실 실장도 흔쾌히 해수의 외출을 허락하였다. 해수와 두 사람은 근처 벤치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었다. 가람은 자신의 진짜 직업을 말하며 해수에게 성우를 소개해주었다. 그리고 둘 사이에 어떤 말이 오갔는지. 벌어질 일과 일어날 수 있는 일에 대하여 세세하게 말했다. 덧붙여서 선택은 오직 해수씨의 몫이라고도 말했다. 만약 선택하지 않겠다면 그것은 그것대로 또 하나의 선택이라고도 말했다.
해수는 두 사람의 말을 듣자 눈물이 벅차올랐다.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의 과거를 덮어주었다. 그리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그 사람의 현재를 도와주는 것뿐이다. 하지만 이 또한 쉬운 길이 아니니, 어쩌면 현재 누리고 있는 일상이 망가질지도 모르는 것이었다. 선택은 늘 쉽지 않았으나 이번 선택은 유독 더 힘들다. 해수는 마침내 입을 열었다
“ 그 사람이 저를 구원해줬어요. 그러니까 이번에는 제가 할 차례예요. 부디..그 사람을 구원해주세요.”
10. 그 이후.
조광옥 살인사건의 진실이 밝혀졌다.
‘사랑 때문에 발생한 범죄, 악은 누구인가’ 라는 제목으로 발행된 신문은 익일 수 십 만장이 팔리며 이로 인해 조광옥 살인사건은 재조명 되었다. 뉴스로 새로운 사실이 보도된 이후, 조광옥에 대한 옹호여론이 이따금씩 생겨나기도 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조광옥이 살인마라는 사실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일부 선을 넘은 네티즌들은 그를 영웅이라 칭송하며 시위를 벌이기도 했지만 그 열기는 며칠 가지 않아 금방 식어버렸다.
많은 사람들은 조광옥이 사랑하던 여인, A양이 누구인지 궁금해 하였으나 그 누구도 A양의 정체를 알아내진 못했다. 일부 포르노 사이트에는 ‘A양의 성애 동영상’ 이라는 제목으로 포르노가 올라오기도 했다. 물론 이는 저급한 합성물이었고 실제 동영상은 아니었다. 다행히도 A양에 대한 관심도 금세 묻혀버렸다.
가람은 이 일을 계기로 정식직원이 되었다. 잡일을 도맡아한다는 건 변함이 없었지만.
가람은 그 사건 이후로도 성우와 계속 연락을 하고 지냈다. 성우는 그간의 공로를 인정받아 한 계급 특진하였고, 후배들도 꽤 들어와 바쁘게 지낸다는 것 같았다.
가람은 이후에 마담의 가게에 몇 차례 더 방문하였다. 혜지는 전에 보여주었던 것과는 달리 꽤 멀쩡하고 야무지게 일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해수의 이야기를 듣고 감동받은 것 같았다.
해수는 그 이후로 미용실을 그만두었다고 한다. 아직 주위 사람들은 A양이 자신이라는 사실을 모른다고 하지만 그럼에도 마음이 편치 않아서 일을 그만두었다고 한다. 후회는 없다고 말했다. 이런 선택까지 예상했었다고, 충분한 벌이 될지는 모르겠으나 진심으로 반성하겠다고, 그렇게도 말했다.
나중에 전해 듣기론 가람과 성우의 방문 후, 해수는 매주 조광옥을 보러 간다고 했다. 처음에는 조광옥이 해수와의 면회를 거부했으나 점차 마음을 열더니 이젠 꽤 다정한 분위기의 연인처럼 보인다고도 한다. 해수는 가람에게 함께 면회를 가자고 요청했으나 가람은 거절했다. 성우는 이 이야기를 듣고 ‘쫄았구나, 인간다운 미가 남아있긴 하네.’ 라고 생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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