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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1023. 연중 제29주간 금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2026.10.22. 15:33
더 크고 더 아름다운 '하느님 나라'라는 우리 마을!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호명환 번역)
하느님의 왕국이 어떻게 우리 주변에 널리 펼쳐져 있는지를 알아보도록 합시다.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제국과 그리스도 영성
더 크고 더 아름다운 '하느님 나라'라는 우리 마을!
2026년 10월 22일 목요일
활동과 관상 센터(CAC)의 온라인 모임 "어떻게 제국으로부터 예수님을 되찾을 수 있을까?"에서 브라이언 맥라렌은 복음서 속 역사적 예수님을 받아들인 이후, 자신의 신앙이 어떻게 변화되었는지를 나누었습니다:
지난 수백 년 동안 수많은 신학자들과 그리스도인 사상가, 그리고 활동가들은 예수님을 우리의 협소한 신학적 틀에서 해방시키고, 복음서가 보여주는 역사적·사회적 맥락 속에서 다시 발견하려고 노력해 왔습니다. 그렇게 바라볼 때, 예수님의 핵심 메시지가 단순히 ‘죽은 뒤 천국에 가는 네 단계’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주님의 참된 메시지는 바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선포였습니다.
"가까이 왔다"는 말은 지금 이 순간, 우리의 손이 닿을 만큼 가까이 있으며 이미 우리에게 주어져 있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혁명적인 선포입니다!
이 진리를 깨닫는 이가 너무도 적습니다. 그 이유는 한편으로는 잘못된 교리적 전통 때문이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혼란스러운 번역들 때문입니다.
영어 단어 "kingdom(왕국)"은 그리스어 basileia(바실레이아)에서 온 말인데, 이는 "제국"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로마의 카이사르 제국이 지중해 세계를 지배하던 역사적 순간에 등장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선포하십니다: "여러분, 카이사르의 제국은 더 크고 참된 나라—곧 하느님의 나라—안에 있는 작은, 왜곡된 동네에 불과합니다. 여러분의 삶을 그 좁고 추한 인간 제국의 틀 안에 가두지 마십시오. 로마 중심의 모든 전제를 허물고, 새로운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십시오. 왜냐하면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우리 곁에 있고, 손에 닿을 만큼 가까이 있기 때문입니다!"
안타깝게도 너무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정반대로 해 왔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인간 황제의 모습으로 축소시켜, 지배적이고 권위주의적인 독재자로 바라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제국’이라는 언어를 전복시키시며, 그 의미를 완전히 뒤집어 새로운 빛으로 드러내십니다.
세속의 제국은 무엇을 합니까? 사람을 죽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폭력으로 맞서지 않으시고, 오히려 제국에 대한 비폭력적 증언으로서 당신 자신을 내어주십니다.
세속의 제국은 사람들을 고문하고 감옥에 가둡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병든 이를 치유하시고, 억눌린 이들을 자유롭게 하십니다.
세속의 제국은 사람들을 강제로 이주시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있는 그 자리로 찾아가시어, 그들의 삶의 현장에서 만나 주십니다.
세속의 제국은 지배의 위계 구조를 만듭니다. "이 사람들이 저 사람들 위에 있고, 또 그 위에 다른 사람들이 있다" 식으로 권력의 사다리를 세우지요.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종의 자리를 취하시어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십니다. 주님은 무릎을 꿇고 섬김으로써, 아래에서부터 이끄십니다. 이는 인간의 지배 체계를 완전히 뒤집는 놀라운 역전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시지만, 그 아버지가 로마식 가부장적 아버지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느님은 그 반대이십니다. 하느님은 자비로운 부모로서, 불순종한 아들을 벌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를 집으로 맞아들이며, 돌아온 것을 기뻐하여 잔치를 베푸십니다.
이제 눈이 열리면 모든 것이 새 빛 속에서 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국가나 그들의 위계적 지배 체제를 정당화하지 않으십니다. 말씀과 행동으로 주님은 그 피라미드 전체를 드러내시고 뒤집으십니다.
예수님은 더 크고 더 아름다운 것을 가리키십니다. 우리도 그렇게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공동체 이야기
리처드 로어 신부님과 "활동과 관상 센터(CAC)"를 알게 된 이후, 저는 한때 강하게 붙들고 있던 애국주의적 신념을 내려놓고, 그것을 "온전한 하나됨"으로 변화시킬 수 있었습니다. 제국을 뒤로 하고, 하느님의 창조가 모든 곳과 모든 사람 안에 드러나는 것을 바라보는 경험은 참으로 큰 은총이었습니다.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 Bob J.
Reference
Adapted from Brian McLaren with Randy Woodley and Edith Woodley, “How Can We Reclaim Jesus from Empire?” (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July 10, 2026). Unavailable.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Richard Bell, untitled (detail), 2022, photo.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마치 오래된 돌들이 서서히 언덕으로 되돌아가는 것처럼, 제국의 구조물들은 사라져 가지만, 땅에 뿌리내린 예수님의 길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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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1023. 연중 제29주간 금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http://www.ofmkorea.org/ofmhomily/586690
2026.10.22 20:49
2026년 10월 23일 금요일 아니마또레 평화기도 학교 말씀기도
✝️ 오늘의 복음 말씀 묵상 ✝️
루카 12,54-59
사람들은 날씨를 잘도 읽습니다.
서쪽 하늘에 구름이 오르면 “비가 오겠다” 하고,
남풍이 불면 “더워지겠다” 합니다.
농사와 뱃길이 달린 일이니, 온 마음으로 하늘을 살핍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안타까워하십니다.
“너희는 땅과 하늘의 징조는 풀이할 줄 알면서,
이 시대는 어찌하여 풀이할 줄 모르느냐?”
눈여겨볼 것은 그분께서 그들을 ‘무지한 자’가 아니라
‘위선자’라 부르신다는 점입니다.
몰라서가 아니라, 알고도 모른 척한다는 것입니다.
내 이익이 걸린 일에는 밝은 눈이,
내 삶을 바꾸어야 할 진실 앞에서는 슬며시 감깁니다.
성 아우구스티노가 고백했듯,
우리는 진리를 사랑하면서도 진리가 나를 찌르는 것은 싫어합니다.
그러면 ‘이 시대의 표징’이란 무엇입니까?
바로 눈앞에 계신 예수님 자신입니다.
그분의 말씀과 치유와 자비 안에서
하느님 나라가 이미 시작되었는데,
사람들은 그것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곧바로 아주 구체적인 표징 하나를 주십니다.
“너를 고소한 자와 재판관에게 가는 ‘도중에’
그와 합의를 보도록 힘써라.”
아직 길 위에 있을 때, 아직 늦지 않았을 때
먼저 손을 내밀라는 것입니다.
일단 법정에 서고 옥에 갇히면,
‘마지막 한 닢까지’ 치러야 합니다.
평화·인내 주간의 눈으로 보면
여기에 평화의 실천이 있습니다.
어제 주님의 불은 우리 안의 거짓과 미지근함을 태웠습니다.
그 불을 통과한 사람이 맨 처음 하는 일은 ‘화해’입니다.
그런데 화해에는 ‘때’가 있습니다.
서운함이 굳어 원한이 되기 전에,
말이 칼이 되기 전에, 관계가 법정에 서기 전에 ―
‘도중에’ 화해해야 합니다.
평화는 미룰수록 값이 비싸집니다.
개인 사이도, 가정도, 나라와 나라 사이도 그러합니다.
그러니 시대의 표징을 읽는 지혜란 거창한 것이 아닙니다.
‘지금이 화해할 때임을 알아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왜 올바른 일을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느냐?” 하시는
그 물음 앞에서, 미루지 않고 먼저 일어서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조용히 묻습니다.
나는 날씨는 읽으면서 ‘내 삶의 표징’은 외면하지 않는가?
나는 알고도 모른 척하는 위선에 익숙해지지 않았는가?
나는 지금 누구와 ‘길 위에서’ 화해해야 하는가?
나는 옳은 일을 스스로 판단하고 곧바로 행하는가?
주님,
알고도 모른 척하는 위선에서 저를 건져 주소서.
지금이 화해할 때임을 알아보게 하시고,
굳어지기 전에 먼저 손을 내밀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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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1023. 연중 제29주간 금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6.10.23 04:12
- 일치의 성소와 분열의 성소
오늘 에페소서는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라는 권고로 시작됩니다.
“여러분이 받은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십시오.”
그렇다면 우리가 받은 성소는 무엇입니까?
오늘 에페소서는 하나가 되는 성소를 얘기하고,
어제 복음은 분열의 성소를 얘기하고 있습니다.
“성령께서 평화의 끈으로 이루어 주신 일치를 보존하도록 애쓰십시오.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부르실 때에 하나의 희망을 주신 것처럼,
그리스도의 몸도 하나이고 성령도 한 분이십니다.”
“나는 평화를 주러 온 것이 아니라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우리는 두 가지 성소를 받았습니다.
상반되는 두 개의 성소인 것입니다.
일치의 성소와 분열의 성소.
그래서 잘 살아내기 힘든 성소이고,
사실 우리는 일치의 성소도 분열의 성소도
둘 다 제대로 살아내지 못하는 얼치기들입니다.
어떻게 하면 두 개의 성소를 다 잘 살아낼 수 있을까요?
그 전에 왜 두 개의 성소를 다 잘 살아내지 못할까요?
서로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고,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며
내가 죽는 사랑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둘이 하나가 되는 일치는 나도 없고 너도 없는 우리가 되어야만 이루어지고,
나도 없고 너도 없이 우리가 되는 것은 사랑 때문에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사랑 때문이 아니면 절대 자기를 죽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가 둘로 갈라지는 분열도 사랑 때문에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사실이지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둘로 갈라질 이유가 없습니다.
나는 사랑하는 주님을 따르려고 하는데
누가 자기만 사랑하고 주님을 따르지 말라면
그때만 우리는 갈라지는 것이고 그것 때문에만 갈라져야 합니다.
프란치스코가 아버지와 갈라선 것은 아버지를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고,
하늘 아버지 뜻을 더 완전히 따르고 주님을 자유롭게 따르기 위해서지요.
결국 서로 일치하는 것도 하느님 사랑 때문이고,
서로 분열하는 것도 하느님 사랑 때문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서로 완전하게 일치하는 것도 하느님을 사랑할 때뿐이고,
두려움 없이 완전하게 갈라설 수 있는 것도 하느님을 사랑할 때뿐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을 사랑할 때만 내가 완전하게 죽어 너와 하나 될 수 있고,
하느님을 사랑할 때만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를 수 있음을
다시 한번 가르침 받고 작은 결심도 봉헌하는 오늘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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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1023. 연중 제29주간 금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숨영성 묵상글
2026.10.23. 05:05
"너희는 어찌하여 지금의 징표들을 무시하느냐?"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사목헌장 Gaudium et Spes 4항에서 오늘 복음을 우리 시대와 연결해 줍니다. "교회는 언제나 시대의 징표를 살피고 그것을 복음의 빛으로 해석해야 하는 의무를 지니고 있다. (…)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 그 설명과 갈망, 그리고 종종 극적인 특징들을 인식하고 이해해야 한다."
역사를 돌아보면, 교회가 자신이 살던 시대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해 놓친 기회들을 쉽게 떠올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현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주님께 지금 이 시대에도 우리가 복음의 빛으로 오늘의 도전을 살아내지 못함으로써 당신의 현존을 알아볼 수 있는 기회들을 얼마나 많이 놓치고 있는지를 질문해 볼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너희는 왜 올바른 일을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느냐?"(루카 12,57).
우리는 매일 좋은 소식보다는 나쁜 소식을 접하면서 살아가고 있긴 하지만, 이 세상은 본질적으로 악하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여전히 당신께서 창조하신 세상을 절대 버리지 않으십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의 가르침처럼, 우리는 하느님께서 직접 걸으셨던 땅, 아름다움으로 가득한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너희는 땅과 하늘의 징조를 풀이할 줄 안다"고 말씀하실 때, 우리는 오늘날의 기후 변화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구름은 비를, 남풍은 더운 날씨를 알려줍니다. 우리는 징표를 알아볼 수 있지만, 때로는 그것을 외면하거나 무시합니다.
인간 활동이 기후를 뜨겁게 만들었고, 그로 인해 가뭄·허리케인·홍수·산불과 같은 자연 재해가 더 잦아고 강해졌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여전히 기후 변화의 징표를 외면합니다. 예수님께서 "왜 현재의 때를 해석하지 못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오늘날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왜 지금의 징표를 무시하느냐?"라고 물으실지도 모릅니다.
기후 변화의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은 회심, 즉 우리 정신구조의 전환을 요구합니다. 우리는 더 이상 이기적인 "현상 유지"의 삶을 지속해서는 안 됩니다. 사실 말이 "현상유지"지, 우리는 실제로 지금 파멸을 향한 퇴보의 길을 걷는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하느님의 창조와 조화를 이루며 지속 가능한 삶을 배워가야 합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 사도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이렇게 권고합니다. "겸손과 온유를 다하고, 인내심을 가지고 사랑으로 서로 참아 주며, 성령께서 평화의 끈으로 이루어 주진 일치를 보존하도록 애쓰십시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기후 변화의 현실을 무시하며, 하느님의 창조와 우리의 공동의 집을 해치는 행위를 계속합니다.
오늘 복음을 다시 묵상하면서 우리는 예수님의 답답함을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 그분 마음 안으로 들어가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하느님께서 더불어 살며 그 안에서 당신의 얼을 알아보라고 창조해 주신 이 세상을 우리의 필요와 욕구 충족을 위해서만 허비하면서 살아오지 않았는지 성찰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게다가 요즘은 여러 사람이 인공지능(AI)의 위험성과 그것이 가져다 줄 파멸에 대해서도 경고하고 있지만, 우리는 우리의 편리를 위해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 그 경고를 대수롭지 않게 넘기고 있습니다. 물론 이 인공지능을 공동선을 위해 활용하는 것도 정말로 중요하고 필요한 일이지만, 그 이면에 우리 인간의 에고 때문에 그림자처럼 도사리고 있는 부정적인 측면들을 절대 외면하거나 무시해서도 안 됩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당시 사람들에게 복음을 선포하실 때, 많은 이들이 그 말씀을 외면하거나 무시했습니다. 하느님 사랑의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도 역시 마음의 회개를 요구합니다. 더 이상 이기적인 "현상 유지"의 삶을 지속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주신 것에 감사 드리며, 법정 스님이 당신 삶의 화두처럼 삼았던 것과 같이 "있는 것으로 만족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서로를, 그리고 하느님의 창조를 돌보고 사랑하는 삶의 길을 하나씩 하나씩 차근차근 배워가야 합니다. 그리고 이런 심각한 위기의 상황에서도 여전히 우리에 대한 사랑의 끈을 놓지 않으시는 하느님의을 온전히 신뢰하며, 그 사랑이 우리의 마음을 변화시키도록 우리 자신을 맡겨 드려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어느 정도의 불편함을 감수하는 삶, 느리게 사는 삶을 배우는 일입니다.
물론 저도 이런 회심의 삶을 제대로 살아가고 있지 못한다는 사실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만, 우리가 이를 더 이상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며 이 상황을 무시하는 삶을 살아가서는 안 되겠지요?!
"다른 많은 이들도 그냥 그렇게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하면서 변화를 마음의 전환을 포기하고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지 성찰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우리는 다른 이들과 비교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라는 식"으로 생각하며 살아가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우리 각자가 할 수 있는 만큼 노력하면서 차근차근 마음을 바꾸어 가야 합니다.
우리는 땅과 하늘의 징표를 해석할 줄 압니다. 인간이 공동의 집에 가한 해를 보여주는 징표도 인터넷이나 방송매체 등을 통해 아주 가깝게 접하고 있습니다.
동시에 우리는 하느님 사랑의 징표도 여전히 볼 수 있고, 모든 이를 향한 복음의 메시지가 무언지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까지 익숙해져 온 '에고'를 중심으로 하는 삶의 방식을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 고수하는 한 우리는 이 징표를 이해하고 받아들여 우리 삶의 방향을 수정해가야 할 사명을 우리는 까맣게 잊은 채 자멸을 향해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징표들을 외면할 것인가? 아니면 이 징표들이 우리의 마음을 변화시키도록 마음을 열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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