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도바는 기원전 1183년경, 트로이 전쟁에서 살아남은 트로이 사람 안테노레의 지휘하에 일리리 베네치아족이 세운 도시라는 전설을 가지고 있다. 로마 제국이 이어지는 동안 파도바는 농업은 물론이고 모직 공장들을 통한 산업으로 경제적?문화적 중심지가 되었으나 그 후 롬바르드족을 비롯하여 무수한 외세의 지배를 받았다. 1405년 베네치아 공화국에 귀속되어 베네치아 왕국과 같은 운명을 겪어왔다.
중세도시인 파도바는 길이 좁아서 대형버스가 못 다니는 길이 많다. 힘겹게 길을 찾아 안토니오 대성당 옆에 내리니 비가 툭툭 떨어지고 종이 울린다.
흔히 '파도바의 성인 안토니오'라고 부르지만 포르투갈 리스본의 귀족 출신이었던 성인이 파도바에서 지낸 시간은 겨우 2년밖에 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의 설교와 기적적인 행위들은 파도바 사람들의 가슴에 깊이 새겨져 그가 36살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자 파도바 사람들은 지금의 파도바 대성당에 유해를 모셨다.
안토니오 성인과 관련된 이야기는 참으로 다양한데 한 수련자가 허락없이 성인의 시편집을 가져갔다가 성인이 꿈결에 나타나 돌려달라고하여 이를 돌려주었다고 해서 잃어버린 물건을 찾으려면 성인에게 기도하라는 전설도 생겼다.
성 안토니오 대성당
저녁을 먹고 유럽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가장 아름다운 광장 가운데 하나라는 프라토 벨라 발레에 잠시 갔다가 한두 방울 비를 맞으며 돌아온다. 까사델 펠레그리노. 순례자 숙소의 깨끗한 방에서 깨끗한 수건으로 하루를 씻는다.
순례자 숙소 - 그날 저녁 파스타와 숙소 벽에 걸린 대성당
프라토 델라 발레
다음날 성녀 아녜스 축일, 안토니오 대성당에서 미사를 드린다. 4세기 로마의 소녀들, 불멸의 신랑을 향한 순결한 그녀들의 사랑과 믿음을 기억한다. 그 성인전의 기억들. 어린 날, 아피아 가도. 그 기억 속에 아녜스 성녀도 있었다.
수도원 마당
수도원 제의실
독서에서 사무엘은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번제물이나 희생 제물 바치는 것을 주님께서 더 좋아하실 것 같습니까? 진정 말씀을 듣는 것이 제사 드리는 것보다 낫고 말씀을 명심하는 것이 숫양의 굳기름보다 낫습니다”라고 사울에게 경고한다. 말씀을 명심하여 사는 일. 그리하여 안토니오는 그 말씀을 그대로 살았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조차 주님의 말씀을 잊게 하지 못했다.
참회의 성당
수도원의 전형적인 뜰 앞을 지난다. 거대한 나무가 정원 한가운데에 서 있다. 큰 키 아래 새 가지들이 옹기종기 자라나고 있다. 여인들의 성가 소리 들리는 회랑을 지나 대성당 제의실을 들여다본다. 수백 년 된 이 제의실 가구에 성인의 유해가 모셔져 있었다. 성인이 리미니에서 물고기에게 설교하는 그림을 보고 성당 안으로 들어가니 성인의 유해 일부가 안치된 곳의 빗장이 열린다. 성인의 아래턱과 혀, 성대, 그리고 다른 성인들의 유해 조각들 앞에 숙연해진다. 미사가 끝난 성당은 고요하다. 순례자의 발자국 소리만 들릴 뿐이다. 성당 입구에는 지오토풍의 12세기 성모님 성화가 순례자를 바라보고, 콜베 신부님의 모습도 함께 있다. 이 성당의 그림도 모자이크가 아니라 벽화인데, 이는 청빈을 강조한 프란치스코 영성의 발현이다.
1946년 교회박사로 선포된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1195~1231. 6. 13)는 포르투갈 리스본에서 태어났다. 아우구스티노수도회에 입회하여 성직 교육을 받고 신품성사를 받았지만 1220년 마드리드 분원에 있던 당시 모로코에서 순교한 프란치스코회 수사들의 유해를 만난 것을 계기로 순교의 열망에 불타 프란치스코수도회로 옮기게 되었다. 1230년부터는 파도바에 자리를 잡게 되었는데, 그때부터 이곳은 안토니오의 도시가 되었다. 1231년 사순절 강론은 크나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는 롬바르디아에서 고리대금과 빚 때문에 사람을 옥에 가두는 것을 공격하였고, 무산자들을 변호하였다. 자신의 생애가 마지막에 이른 것을 안 그는 다시 은수자의 삶으로 돌아가기를 원했으나 그의 설교를 듣기 위해 끊임없이 밀려오는 수많은 군중들 때문에 번번이 좌절되고 말았다. 그는 그들을 피해 결국 나무 위에 집을 짓고 지내다가 1231년 6월 13일 3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는데 그의 장례식은 개선과 다름없는 성대한 것이었다. 그 후 10개월 만인 1232년 5월 30일 그레고리오 9세 교황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살아있을 때부터 성인으로 불렸던 그는 성 프란치스코에게 “이토록 박식함에도 그토록 겸손한 형제”라는 인식을 심어줌으로써 지식이 십자가의 여정에서 결코 방해가 되지 않을 뿐더러 오히려 그 길을 도와준다는 새로운 가르침을 주었다. 교황은 시성식에서 “지극히 착하신 박사여” 하는 ‘대송찬미가’를 읊었는데, 이것은 현재 교회박사들을 위한 찬미가로 불리고 있다. 그레고리오 9세 교황은 안토니오를 교회박사로 정한 비오 12세 교황의 공식적인 선언을 미리 시작한 분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탈리아에서 안토니오 성인이 누리는 인기는 대단하다. 특히 가난한 이들의 주보성인으로 친구를 구하기 위해 바친 애긍은 ‘성 안토니오의 빵’을 사는 데에 사용된다. 물건을 잃어버렸을 때에도 안토니오 성인에게 도우심을 청하는데, 그것은 아마도 성인의 성무일도서를 훔쳐 달아났던 한 수련자가 성인의 기도로 인하여 그 책을 돌려주게 된 까닭일 것이다. 성상이나 상본에는 성 안토니오가 책을 들고 있는데, 이것은 그의 성서 지식이 해박하다는 뜻이다. 중부 이탈리아에서는 거기에 불꽃을 덧붙였으며, 15세기부터는 심장을 그려 넣었는데 이것은 그의 뜨거운 신심을 상징한다. 백합은 그의 정결을 표시하며, 포르투갈에서는 백합에 십자가를 덧붙여 넣는다. 또한 17세기부터는 그가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그가 나무 위에서 살던 어느 날 밤 사람들이 그의 말씀을 듣기 위해 달려왔을 때 그가 아기 예수님과 대화하고 있었다는 데서 유래한다.
안토니오 성인의 성화
아침부터 한두 방울 세우가 떨어지고 있다. 밥을 먹고 올라와 잠시 앉으니 종소리가 들린다. 파도바, 한 사람의 온전한 사랑이 수백 년을 위로하고 안온하게 하는 이 고장이 눈물겹기도 하다. 성인에 대한 시민들의 사랑은 오늘날도 여전하다. 성당은 세월의 흔적을 느낄 수 있는 낡은 프레스코화와 금박으로 장식된 화려한 유해함 등이 공존한다. 어둠 속에 끝이 보이지 않는 천장. 그것은 도리어 신의 심연을 반영한다. 상승 혹은 하강. 신은 헤일 수 없이 높이 거하시지만 예수는 가장 낮은 밑바닥에 임했다.
잃어버린 것들의 주보성인이라는 안토니오, ‘잃어버린 지향'도 찾아주시나요? 파도바, 파도바. 당신은 땅의 고향을 떠나, 낯선 곳에서 오히려 ‘본향'을 살았는데, 난 본향을 그리워만 하며 이방인으로만 살고 있군요. 이 땅을 사랑하지도 못하며! ‘잃어버린 마음', ‘잃어버린 그리움', ‘잃어버린 본래의 사랑'을 회복할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간밤의 광장을 다시 지나 주교좌 성당을 지나 파도바를 떠난다.
파도바를 떠나 베네치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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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푸른 무화과나무의 집 원문보기 글쓴이: 세큐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