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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 여행기
○ 여행일자 : 2015. 7. 10 ~ 2015. 7. 13
○ 여 행 자 : 이형재 외 9인
2015년6월23일 여행사에서 백두산여행 특가가 나왔다는 연락이 와서 약간 망설이다 신청하였다. 왜냐하면 2013년7월24일~ 7월28일 여행을 갔다가 비가 오는 관계로 천지를 구경하지 못하였기에 가슴에 맺힌 한을 풀기 위하여 다시 가보고 싶은 곳이다.
드디어 7월10일 아침 8시30분 집에서 출발, 10시30분 청주공항에 도착하여 일행들과 인사를 나누고, 13시40분 비행기에 탑승하여 현지시간 15시에 연길공항을 도착하여 입국 수속 후 공항을 나오니, 연길공항의 한글과 한문의 간판 위로 펼쳐진 파란 하늘, 나의 가슴을 파랗게 설레게 한다.
여행 안내자와 가볍게 인사를 나누고, 월요일은 박물관이 휴관이라 연원장백산 축구장과 인접한 연길박물관으로 향한다. 1층과 2층은 조선족에 대한 유물전시관으로 촬영이 허용되고, 3층은 중국의 혼란시기의 유물전시관으로 촬영이 불가하다.
연길의 조선족이주사
조선족은 한반도로부터 중국 동북지역에 이주한 근면하고 지혜로운 단일민족이다. 조선족의 이주는 17세기 초의 명말 청초 시기부터 시작되었으며 19세기 중엽에 이르러 수천 수만의 조선인들이 두만강과 압록강을 건너 연변지역을 중심으로 광활한 조선족 집단주거지를 형성함으로써 황폐하고 망망한 동북의 흑토를 벼향기가 차 넘치고 물질이 풍요로운 고장으로 변모시켰다. 조선족의 이주역사는 여러 민족 인민들과 한마음 한뜻으로 서로 돕고 고락을 같이하여 몸바쳐 피 흘리며 일제에 항쟁해 온 과정이기도 하며 또한 아름다운 삶의 터전을 개척하고 중화문화와 융화되는 과정이기도 하였다.
조선민족전시 머리말
조선족은 우수한 문화전통을 갖고 있는 민족으로서 조선반도로부터 중국에 이주해와 삶의 터전을 마련하고 새로운 민족공동체를 형성하였으며 중화대지의 떳떳한 주인으로 부상하였다. 조선족은 중국에 정착해 백여 년간 지나오면서 본 민족의 문화전통을 전승한 동시에 새로운 사회문화적 환경에 적응해가는 과정에 한족과 기타 민족들의 문화를 적극 수용함으로써 독특한 조선족문화를 창출하고 발진시켜왔다. 우리는 이번 ≪조선족민속전시≫를 통해 한세기 남짓한 동안 중국의 광활한 대지를 활동무대로 독자적인 발전의 길을 걸어온 조선족의 생생한 삶의 흔적과 생활모습을 재현해본다.
위의 머리말과 같이 이 곳의 시골은 농산물의 생산풍속과 민속놀이, 설, 세시명절(청명, 단오 등), 상례, 출생례, 혼례 등 아직도 우리의 전통을 지키면서 살아가고 있는 지역이 많다는 안내자의 설명과 전시된 사진을 관람했다.
조선민족전시 맺는말
우연곡절 많은 이주과정을 거친 조선족은 장기간의 사회실천 속에서 갖은 난관을 물리치고 유족하고 문화적인 삶의 터전을 가꾸어 왔으며 조선족 특유의 민족전통과 민속문화를 온 세상에 홍보했다. 경제가 쾌속으로 발전하고 사회가 고도로 진보하는 오늘, 200만에 달하는 중국 조선족은 형제민족들과 어깨 나란히 신근한 노력으로 조화로운 삶의 보금자리를 넓혀가고 있으며 아름다운 삶의 이야기를 엮어가고 있다.
진달래광장
말 그대로 진달래 꽃을 형상화한 탑과 표지석이 벌판에 세워져 있어 황량한 느낌이 들고 저녁식사 후 숙소 내 여장을 풀고 시민탑 광장에 나가보니 군경이 마련한 시민들의 위안 공연에 많은 시민들과 소고를 든 시민들의 공연과 군인들의 공연, 남녀가 춤을 추는 스포츠댄스에 이어 한복을 곱게 차려 입은 합창단의 아리랑 및 우리 국악 합창 및 농악놀이에 약12m정도의 상무돌리기 등 이러한 우리의 전통공연을 이제는 우리나라에서도 쉽게 접할 수 없는데 이 곳 연길에서의 공연은 가슴 벅차게 하는 감동이었다.
백두산여행(둘째날)
현지 시각 아침 4시에 기상하여 창문 밖을 보니 해가 뜨고 있다. 옅은 구름 사이로 떠오르는 해는 힘이 넘쳐 보이고 백두산을 가려면 7시20분 출발, 아침 7시 숙소 현관에서 안내자 왈 일행의 사모님 한분을 가리켜 한국의 TV연속극에 못된 시어머니 얼굴형이라고 직설적인 표현에 박장대소하고 버스에 오른다.
이번 여행 안내자는 여자로서 체구는 작지만 목소리는 우렁차고 자기의 표현을 숨김없이 내어 뱉은 성격이다. 출발하면서 안내자 본인 소개를 하는데 이름은 김화이고, 키는 한메다 육십센티이고 부모는 한국의 청주에 있다고 소개한다. 이렇듯 이곳의 아이들은 본의 아니게 조손가정이 많고 본인도 조손가정에서 자라 방황이 많았으며 또한 이러한 환경으로 인하여 아빠둘, 엄마둘이란 유행어가 생겨났다며 눈물을 흘린다.
이번 안내자는 안내를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은 바 여행지 설명 지식이 바닥나 자기가 반갑습니다 노래를 하고 돌아가면서 노래를 시킨다고 하면서 금번 장춘에서의 공무원연수 버스사고로 인하여 하루 차량운전시간이 7시간 이상이면 기사 2명이 있어야 한다는 정부의 발빠른 시행으로 차량운행시간은 여행버스 모두 7시간 이내로 한단다.
가는 길의 차창 밖은 평지는 아니지만 끝도 없이 이어지는 옥수수 밭의 풍경이 새롭고 점심식사를 위한 식당은 깔끔하게 보인다.
이윽고 백두산 북파 입구에 도착.
중국에서 백두산을“장백산화산국가지정공원”으로 지정하여 중화인민공화국 국토자원부에서 2009년 8월에 세운 표지석이 장승처럼 서있고, 공원 입구는 오후라 그런지 비교적 한산하고 하늘은 하얀 구름으로 덮여 마음을 가볍게 하고 약간의 기다림에 중간 기착지에 도착하니 달문쪽의 장백폭포 계곡이 선명하게 보이고
좌측의 천활봉(2620m), 철벽봉(2560m), 천문봉(2670m)과 우측의 관일봉(2510m), 금병봉(2590m)이 조망되며 파란하늘에는 하얀 솜털구름과 조각구름이 떠 있는 것이 천지를 볼 설레임에 마음이 들뜨기 시작한다.
봉고차에 올라 북파로 가는 길에 야생화가 만발하고 하늘의 바위구름에 그늘진 원시림 넘어 끝도 없이 지평선을 연출하고
몽실몽실 피어오르는 구름,
주걱으로 크림을 겹쳐 놓은 듯한 구름, 그동안 보아온 구름인데 오늘은 더욱 신비롭고 화사하게만 느껴지고 산장에 도착하니 수많은 인파에 구름이 관중이 된 듯이 떠있다.
나는 우리 민족의 영산 백두산을 2011년6월25일 트레킹 기회에 집안일 때문에 오지 못하고 2013년7월24일~28일에 와서 북파-서파-북파로 모든 일정 포기하고 추가비용 부담하면서 보지 못한 것을 하느님이 보우하사 이렇게 맑고 깨끗하게 보여주는구나 감격에 겨워 혈압이 올라 헛구역질까지 하며 눈이 부시게 바라본다.
오르는 길 우측을 바라보니 철벽봉, 천활봉이 손에 잡힐 듯하고 장백폭포 계곡을 넘어
관일봉(2510m), 금병봉(2590m), 지반봉(2603m), 선명하다 못해 검푸른 능선을 바라 볼 수 있게 하고 천문봉(2670m)에 오르니
장백산(백운봉2691m), 옥주봉(2664m), 마천봉(2631m) 5호경계비를 지나
제운봉(2543m), 와호봉(2566m), 제비봉(2549m), 관명봉(2528m), 단결봉(2561m), 해발봉(2712m),
백두산(장군봉2749.6m), 시루봉(2580m)의
봉우리를 천지를 바닥으로 손으로 잡힐 듯 보여주고 천지는 하늘의 구름이 가려 검은 물감을 풀어 놓은 듯 검푸르고, 구름이 없는 부분은 새파랗게 보여주는 것이 어떠한 말로도 표현이 어렵지만 주마등처럼 다가오는 백두산의 봉우리와 천지 및 봉우리들은 신비롭고 장엄하고 경의로운 황홀한 무아의 경지로 접어들게 하는 것이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다.
천문봉에서 내려와
등소평기념비(天地 1983년에 세움)를 지나
백암봉(화개봉2618m)에 올라 바라보니
삼기봉(2670m), 고준봉(2511m), 자하봉(2618m), 비류봉(2428m)까지 천지를 보호하듯 우뚝 솟아있는 백두산의 모든 봉우리를 감상하게 한 날씨는 나에게 행운의 날이다. 내 인생에 이 아름다운 모든 봉우리와 천지의 수변을 언제 한 번 두발로 걸어 볼 수 있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보며, 감격에 겨운 백두산 천지 관광을 마치고 하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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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백산16봉(안내표지서)
백두봉(白頭峰)(장군봉) 2749m
화개봉(華蓋峰) 2670m
옥주봉(玉柱峰) 2664m
자하봉(紫霞峰) 2618m
용문봉(龍門峰) 2595m
와호봉(卧虎峰) 2566m
제운봉(梯云峰) 2543m
고준봉(孤隼峰) 2511m
백운봉(白云峰)(장백산) 2691m
삼기봉(三奇峰) 2670m
천활봉(天豁峰) 2620m
지반봉(芝盤峰) 2603m
금병봉(錦屏峰) 2590m
철벽봉(鐵壁峰) 2560m
관면봉(冠冕峰) 2528m
관일봉(觀日峰) 2510m
백두산의 산기슭으로부터 산꼭대기로 오르는 길은 네 곳으로 나눈다.
동쪽으로는 조선 량강도 삼지현, 동남쪽으로는 회산시로 오른다.
북쪽으로는 안도현 이도백하로 오르고, 서쪽으로는 류수하로 오른다.
남쪽으로는 장백현으로 오른다.
여기에 모두 몇 십㎞밖에 안 되는 수평거리에서 온대로부터 한 대에 이르는 4개의 부동한 자연경관대를 뚜렷하게 관찰할 수 있다. 이런 경관을 평지에서 관찰하려면 남에서 북으로 수천㎞거리를 지나가야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백두산의 수직거리는 5㎞도 안 된다. 장백산의 자연경관 생태계는 비교적 완전하게 보전되어 세계의 생물권보호지역으로 확정되었고 세계의 많은 학자들과 관광객들의 인기를 끌고 있다.
그 연구가치와 관광가치는 세계에서도 보기 드물다.
장백산
중국 십대 명산 중의 하나이다. 장백산은 200만 년 전에 이미 지금과 같은 산채를 형성하였으며 폭발형 화산으로써 여러 차례의 화산 분출이 있었는데 1597년8월, 1688년4월, 1702년4월에 분출이 최근의 기록이며 아직도 내열의 분출 현상이 있는 휴화산이다. 지구상에는 화산도 많고 자연호수도 많지만 산정호수인 천지처럼 크고 웅장하며 아름다운 호수는 없을 것이다. 백두산의 천지는 그 마지막 화산분출로 현저히 함몰되어 수면은 해발 2,189m에 이르며 동서의 길이 3.37㎞, 남북의 길이 4.85㎞이며, 수면의 둘레는 13.1㎞, 분화구의 둘레는 18.1㎞, 평균 수심은 204m, 최고 수심은 373m이며 담수량은 약20억톤에 이르며 연평균 수온은 –7℃이며 11월에서 이듬해 6월까지 얼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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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백폭포여행
폭포로 오르는 길은 잘 정돈되어 있으며 바닥정비공사로 자연미는 없어지고 샘솟듯 솟아나는 온천수가 신기하다. 폭포수의 수량이 많지 않아 웅장함을 더하고 폭포 옆으로 오르는 길로 가면 달문을 갈 수 있는데 지금은 통제하여 아쉬움을 뒤로하고 입구로 돌아와 온천수에 직접 삶은 계란에 진주 한 잔하고 (계란은 노른자위는 익고 흰자위는 덜 익은 상태라 껍질을 반 만 까서 먹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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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풍구
흑풍구는 일 년 내내 바람이 많이 불고 강풍이 대부분이다. 바람이 5~6급에 달할 때 광풍이 울부짖고 모래자갈이 날린다. 하지만 이 곳에서 장백폭포의 전경을 볼 수 있다.
장백폭포
장백폭포 천지의 맑고 푸른 물이 천지북쪽 천활봉과 용문봉 사이의 달문에서 흘러 1250메터 길이의 승사하를 이루고 지나 벼랑을 만나 장대한 폭포를 이룬다. 거대한 폭움이 몇 리밖에 까지 울리며 흰물보라를 흩날려 공중에 칠색무지개와 백룡이 날아다니는 듯한 전경을 이룬다.
그 낙차가 68.5메터나 된다. 폭포 밑면에 20메터 가까운 깊이의 호박형 못이 이루어져 있다. 여기에 시 한구절이 있다. (삼천척을 곧추 날아 내리니 구천에서 은하가 떨어지는가 의심했노라) 이와 같이 아름답고 장엄한 경치를 이루면서 이도백하와 송하강으로 된다. 북방의 모든 폭포는 겨울이면 물이 얼어 자취를 감추지만 백두산폭포만은 겨울에도 얼지 않고 계속 얼음 속으로 흘러 장관을 이룬다.
7월의 류량은 635만립방메터이고 겨울 1월의 류량은 218만립방메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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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아태하풍경구
지하수가 용출하여 계곡을 이루는 곳에 조경시설을 하여 야경관광을 즐길 수 있게 하였는데 나무와 물과 조명의 조화가 잘 어울리고 대만 관광객들이 강석희와 사진 한 장 찍자고 손짓하여 한 컷.
(선택관광 30)
아침은 계란이 귀한지 아주머니 한 사람이 삶은 계란 한 개씩만 나눠주고 밥에 무장아찌와 양배추절임이 전부이다. 특가가격이라 그런가?
윤동주 생가
윤동주 생가 가는 길에 일송정을 가보고 싶었지만 차창관광이라고 하여 멀리 쳐다보고만 가고 안내자가 나를 보고 “선구자”,“눈물 젖은 두만강”노래를 하라고 하여 일~송~정 푸른솔은~~~, 두만강 푸른 물에 노 젖는 뱃사공~~. 생음악이라 노래가 잘 되지 않지만 마무리하고, 윤동주에 대하여는 안내자대신 내가 설명을 하고 서시와 별 헤는 밤을 낭송했다.
윤동주 시인의 모교인 대성중학교를 방문하니 교문에 서시 시비, 동상, 교실 등을 관람하고 명동촌에 있는 생가로 향한다. 윤동주에 대하여는 안내자보다 내가 자세히 알수 있었던 것은 여기서 출발할 때 윤동주 일대기 및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해설이 담겨져 있는 책으로 공부를 하여 갔고,
또한 그 책을 안내자에게 전달식을 해야한다고 하여 윤동주 생가에서 전달식을 갖고 다시 한 번 서시와 별 헤는 밤을 낭송하였다.
교회와 생가는 옛모습 그대로이고, 중국정부에서 표지석을 중국조선족애국시인 윤동주라고 2012년8월8일에 세우고 담장과 많은 시비를 한글과 한문으로 세워놓았다는 현지 안내원의 설명이다.
두만강 뗏목관광
가는 길은 끝없는 옥수수 밭이 펼쳐져 있고 북한 초병을 보면 손가락으로 가리키지 말라는 안내자의 주의를 들으며 도착한 도문시는 중국은 활기찬 도시 형태이나 북한 쪽은 벌거벗은 산과 인적이 없는 밭에는 황량하기만 하다. 강을 사이에 두고 형성된 도시는 양쪽이 함께 발전되는 것이 내가 아는 상식인데 여기는 그렇지 않다.
뗏목을 타고 한바퀴 돌아 오는데 철교와 일반교량의 페인트 도색으로 국경이 표시되고 일반 교량의 중국측은 사람들이 기념사진 찍느라 분주하고 북한쪽은 사람들이 모이지 않는다. 이곳에는 안내자의 설명이 없어 이곳에 쓰여 있는 설명문을 적는 것으로 대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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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문정신
례의숭상, 개방포용, 착실혁신
도문지명의 유래
도문이란 지명은 두만강에서 유래하였는데 옛날에는 희막동이라 하였고 하전자, 애호전자라고도 불리웠으며 1933년6월1일에 도문이라고 개명하였다. 도문은 만족어 “도문색금”에서부터 나왔고 도문은 “만”이고 색금은“하천”이며 “도문색금”은 즉 “많은 물이 모인 곳”이라는 뜻이다.
옛말에 “산은 사람을 흥하게 하고 물은 재산이 쌓이게 한다”고 하였는데 도문은 “재물을 모으고 복을 누린다”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중국 도문시
장백산기슭 아래로 굽이쳐 흐르는 두만강변에 눈부신 명주-도문시가 있습니다.
삼면이 산에 에워싸이고 한면이 강기슭에 있어 풍경이 수려하고 경치가 아름답다하여 예로부터 “두만강변 첫도시”라고 불리우고 있습니다.
도문은 중국, 조선, 러시아 삼국의 접경지대에 자리잡고 있으며 조선과 두만강을 사이두고 마주보고 있는데 장길도 개발개방선도구의 최전방입니다.
도문은 중국조선족의 주요 집거구역의 한 곳으로써 찬란한 조선민족문화와 짙은 조선족 민족풍정을 가지고 있으며 예로부터 “가무의 고향”,“례의의 고향”으로 널리 알려지고 있습니다.
도문시 소개
도문시는 중, 조, 러 삼국접경지대에 위치해 있으며 중로변경과 100㎞, 일본해와는 150㎞ 떨어져있고 유엔개발계획서에서 확정한 동북아 “대소금삼각”의 기하중심에 자리잡고 있다. 조선 함경북도 온성군(남양로동자구역)과 강을 사이두고 있으며 길림성에서 건립역사가 가장 오랜 “백년통상구”를 갖고 있는데 길림성에서 유일하게 철도, 도로가 조선으로 통하는 통상구도시이기도 하다. 도문시는 중, 조, 러 삼국을 이어주고 동북아로 복사하는 교통중추로써 훈춘-울란호트 고속도로, 동북동부철도, 장춘-훈춘 고속철도의 중요한 전초지이며, 동북지역의 대조선 철도운수의 중요 창구로써 “조국의 동대문”,“두만강반첫도시”라고 널리 알려져 있다.
도문지역은 청초시기에는 황실 사냥터였으며 1931년에 이르러 백여호 인가가 있는 작은 도시를 형성하였다. 1933년 돈화-도문 철도가 개통된 후 인구가 급속히 늘어나면서 화물이 집산하고 여객이 찾아오는 상업성 소비도시가 되었다. 1965년5월1일 건시를 비준받았으며 지금은 국가 갑급변경개방도시이다. 총면적 1142.65㎞이며 신화, 향상, 월궁 3개 가두와 석현, 량수, 월청, 장안 4개 진을 관할하고 있다. 총인구 13만명으로 조선족, 한족, 만족, 회족 등 13개 민족이 있는데 그 중 조선족이 56%를 차지하여 중국 조선족의 주요한 집거지로 되어있다.
중국 조선족
중국 조선족은 조선반도에서 발원하였다. 1677년 청정부는 장백산과 압록강, 두만강 이북 천여리 땅을 금지구역으로 정하고 사냥터를 설치하여 타민족의 이민을 금지하였다. 17세기 말에 조선사람들이 금지령을 무릅쓰고 들어왔는데 초기에는 아침에 와서 밭일하고 저녁에 돌아갔고 후에는 봄에 왔다가 가을에 돌아갔으며 나중에는 가족을 거느리고 집을 짓고 장기적으로 농사하였다. 1869년 조선 북부에 흉년이 들어 대량의 조선사람들이 중국 동북으로 들어왔다. 19세기 80년대에 청정부가 사람을 모집하여 개간하는 정책을 실시하면서 조선이민을 받아들였고 모집에 응하여 이주한 조선사람은 중국신민이 되었다. 1910년에 조선이 일본의 강점기가 되면서 또 대량이 조선사람들이 중국 동북으로 이주하였다. 1931년 일본이 중국 동북을 침점한 후 조선사람들을 강박하여 동북으로 이민시켰다. 1945년 조선이 광복된 후 적지 않은 조선사람들이 조선으로 돌아갔고 중국에 남은 사람은 중화민족 대가정의 일원으로 되었다.
중국 조선족의 인구는 약192만명이고 그 중 97%가 흑룡강, 길림, 료녕 삼성에 분포되어있다. 길림성에는 조선족이 약115만명이 있는데 주요하게 연변조선족자치주와 백산시 장백조선족자치현에 분포되어있다. 조선족이 약80만명 살고 있는 연변조선족자치주는 중국에서 제일 큰 조선족 집거지역이다.
전세계에 조선족이 약8000만명이 있는데 중국 외에 주요하게 한국(5000만명),조선(2500만명),미국(205만명),일본(66만명), 러시아 및 원 쏘련가맹공화국(49만명), 카나다(11만명), 브라질(10만명) 등 국가와 지역에 분포되어있다.
조선족의 전설
전설에 의하면 5000여년전 천제의 아들 환웅은 3000 충복을 거느리고 태백산신단수 아래에 내려와 신시를 건립하였다. 그 때 곰 한 마리와 호랑이 한 마리가 있었는데 매일 신단수 앞에 와서 사람이 되기를 빌었다. 이에 감동한 환웅은 그들에게 영험있는 쑥과 마늘을 주면서 백일동안 이것을 먹고 동굴에 피해있으면 사람이 될 수 있다고 알려주었다. 호랑이는 견디지 못해 사람으로 되지 못했지만 곰은 분부대로하여 스무하루만에 여인으로 되었으며 웅녀라고 이름을 지었다. 하지만 그녀와 혼인할 사람이 없었으므로 매일 신단수 앞에서 아이를 낳게 해달라고 빌었다. 이를 가여히 여긴 환웅은 사람모양으로 변하여 웅녀와 결합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단군이라고 이름지었다. 단군은 기원전 2333년에 고조선왕국-단군조선을 건립하였는데 조선은 평온한 아침햇살의 나라라는 뜻이다. 이로 인하여 단군은 조선민족의 시조로 존경을 받고 그 후대들은 조선인으로 자칭하였다.
아리랑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십리도 못 가서 발병난다...
≪아리랑≫은 조선족의 유명한 민요이고 뜻은 “나의 낭군”이며 조선 고려시기의 사랑이야기에서 발원하였다. 한 쌍의 금술 좋은 부부가 있었는데 남편은 아내의 험담을 듣고 집을 나갔고 남편을 만류하기 위해 아내는 뒤에서 따라가며 노래를 불렀는데 노래내용이 바로 “나의 낭군” 즉 ≪아리랑≫이었다. 일본통치시기 조선사람들은 ≪아리랑≫을 구호로 봉기를 일으켰고 ≪아리랑≫도 이 때문에 널리 불러져 지금은 이미 조선민족의 가장 대표적인 고전가요로 되었다.
오랜 세월은 부동한 형식의 ≪아리랑≫을 탄생시켰는데 그 중 ≪본조아리랑≫,≪신조아리랑≫,≪밀양아리랑≫,≪강원도아리랑≫ 등 12가지 ≪아리랑≫이 제일 대표성이 있으며 가장 많이 불리우는 것은 ≪본조아리랑≫이다.
두만강
두만강은 장백산천지에서 발원하고 중조량국의 경계선이 되는 하천중의 하나이며 연변경내에서 제일 큰 강이며 간류 전체 길이가 525㎞이고 주로 화룡, 룡정, 도문, 훈춘 네 개 도시를 경과하며 훈춘 방천의 토자비석 앞을 지나 일본해로 흘러 들어간다.
두만강의 전설
전하는데 따르면 옥황상제께서는 장백산 천지를 몹시 좋아하여 그곳을 천부의 물로 정하고 시위 백룡신더러 지키게 하였다고 한다. 하루는 백룡신이 옥황상제가 하사한 보물병에 천지물을 가득 담고 산아래로 내려가 놀고 있던 도중에 보물병이 그만 미끄러져 떨어지고 병안에 있던 천지물이 산세를 따라 바다로 흘러들어가 동쪽으로 흐르는 두만강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장백산천지는 옛적에 “두만박”이라 불리웠고 송화강, 압록강과 두만강 “세갈래 강의 발원지”이며 세갈래 강물중에서 두만강이 바다와 제일 가깝다고 하여 두만강은 “장백산천지의 적자”로 불리웠고 두만강도 이로하여 유명해졌다고 한다.
조선족 민간전설중에서 두만강에 대한 또다른 해석이 있는데 발원한 곳에서 한 구간의 물줄기가 갑자기 보이지 않았다고 하는데 조선어에서 “두만”은 “도망”과 음이 비슷하여 “도망강”이라고 불리웠다고 한다.
두만강과 해양진출
1886년, ≪중국훈춘동쪽국경조약≫에서는 중국국기를 단 선박이 두만강을 지나 일본해에 진입하는 것을 러시아가 “막을 수 없다”고 규정하였다.
1964년, 중국은 조선측에 두만강 해양진출문제를 제출하였고 조선은 중국선박이 두만강 하류를 통과하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답복하였다.
1990년5월28일, 길림성에서 두만강하구 한 구간의 과학고찰을 성공적으로 진행하였다.
1994년, ≪중쏘동쪽구역변경협의≫에서는 중국국기를 단 선박이 두만강 하류에서 자유로 항행할 수 있다고 규정하였다. 쏘련이 해체된 후 러시아측은 중국과 쏘련이 서명한 일체유효협의를 존중한다고 표시하였다.
1991년6월3일, 우리나라는 제2차 두만강 바다 진입 과학고찰을 성공적으로 진행하여 52년동안 중단되었던 두만강해양진출권을 행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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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식당(유경주점, 추가비용00,000원)
산천어, 부침개, 제육볶음, 더덕무침, 묵무침, 야채사라다, 닭볶음, 오징어볶음, 닭날개튀김, 잡채, 김치, 옥수수튀김, 냉면이 나오고 종업원은 음식 나르는 것과 공연을 병행한다. 여기서 원주에서 오신 000님이 들쭉술 2병을 산다. 술 잘 먹었습니다.
냉면(추가비용10,000원)
안내자가 연변대학 앞에 있는 복무청사 연길냉면을 입이 마르도록 추천하여 가기로 하였다. 여기 냉면은 음식이 코다리조림, 미역줄기, 도라지무침, 탕수육, 감자채무침, 냉면이 나오는데 계란이 통째로 올라있고 꿩고기 다식이 들어있으며 냉면을 먹을때는 감자채무침을 곁들여 먹는 것이 우리와 다르다. 육수의 맛은 감칠맛이 있으며 나무로 된 국자를 주는 것도 특이하다.
이와 같이 특가 투어로 모르는 사람이 만나 저녁 만찬 시 여행소감을 돌려 들으며 함께 한 여행이 특별한 여행으로 기억될 것이다.
비오는 연길공항에서 청주공항으로 보람찬 여행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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