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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 연수 시인의 시 중에, “잃어버린 것을 찾아서”라는 시가 있습니다. 소개해 드리면, “우린 자신도 몰래 / 잃어버린 것들이 너무나도 참 많은 것만 같소이다 / 우리가 지금 당장 찾아야 할 것들이 너무나도 참 많은 것만 같소이다 / 오늘, 시방 급히 곧바로 찾지 않으면 우리는 참으로 위험할 수도 있소이다 / 인륜, 도덕, 윤리, 사랑, 우애, 진실, 인간성, 정직성 너무나 급한 것들이 얼른 찾으러 오라 우릴 손짓하외다 / 우리는 서둘러서 잃어버린 것들을 얼른 후딱 찾으러 가야 만 하외다 / 상실의 회복을 위하여 지금 당장 그곳으로 찾아 나서야만 하외다 / 만약에 우리가 찾으러 가지 않는다면 어쩌면, 절대로 후손들마저도 찾을 수 없을 것이 외다 / 고로, 서둘러서 잃어버린 것을 찾아서 손에 손잡고 찾으러 나서야만 하외다”입니다. 잃어버린 것을 찾는 것에 대해서는, 대중노래에도 있습니다. 조용필 씨의 “어제, 오늘 그리고”의 가사를 보면, “오늘 우리가 찾은 것은 무엇인가 / 잃은 것은 무엇인가 / 남은 것은 무엇인가”라고 합니다. 여행 작가인 임운석씨는, 사막에서 찾는 것에 대해, 이런 글을 썼습니다. “사막에서 우리가 찾는 것은 무엇일까? 혼자 남았다는 외로움은 주변을 살펴볼 수 있는 깊이 있는 시력을 갖게 한다. 그 덕에 작은 것에도 감사할 수 있는 넓은 가슴을 가질 수 있다. 반면 허상을 쫓을 경우 끝없는 나락으로 떨어지는 좌절을 경험하게 된다. 삶이란 대사전에서, 희망이란 두 글자를 지워버린다면, 우리의 인생은 방향타를 상실한 배와 같다. 언제까지나 내가 나, 다울 수 있는 것은 지금의 현실이 아니라 미래가 있기 때문이다. 과거는 현재가 싹을 틔우는 터전이고, 미래는 그 나무에 열리는 탐스러운 과실이다. 열매의 달콤함을 원한다면, 지금의 아픔쯤은 참고 이겨내야 한다. 쓰디쓴 과정을 맛봤을 때, 달콤함은 침샘을 더욱 자극하게 되니까. 너와 내가 사막에서 찾는 것이 다르다 할지라도, 두려움과 고독을 이겨내는 이유는 크게 다르지 않다. 그 이유를 알기에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우리는 서로 사랑하며 살아간다”라고 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무엇을 잃고, 무엇을 얻는 가운데 있습니까? 잃은 것에 대해, 생각하는 가운데, 삿 16장의 삼손이 떠올랐습니다. 삼손은 출생할 때부터 “나실인”으로 출생했습니다. 그랬기에,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놀라운 은사를 받았습니다. 그가 나실인으로서 해야 할 사명이 무엇입니까? 이스라엘을 블레셋으로부터 구원하는 겁니다. 그랬기에, 그는, 하나님의 신이 감동하는 은혜를 맛보았습니다. 요즘에도 그렇지만, 구약에서도, 하나님의 신이 감동한다는 것은, 일반적인 은사가 아닙니다. 요즘에도, 똑같이 신앙생활을 하지만, 어떤 이는, 하나님으로부터, 신비의 은사를 받아, 은사를 행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은사는, 아무나 맛볼 수 없습니다. 출 36장을 보시면, 성막을 짓기 위해, 오홀리압과 브살렐이 선택됩니다. 이들에게도, 하나님의 신이 감동했다는 표현이 있습니다. 이렇게 귀한 은사를 받은, 삼손의 결말이 어떠합니까? 참으로 안타깝고, 비극에 가깝습니다. 그가 잃은 것이 무엇입니까? 그가 얻은 것이 무엇입니까? 그의 마지막은, 사울 왕이나 가룟 유다의 죽음과도 유사합니다. 여러분, 오늘의 우리는, 무엇을 잃고 있습니까? 본문을 통해, 우리가 성도로서, 다시 찾아야 할 것을 살피는 귀한 은혜가 있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먼저, 하나님은 우리에게서, 진실을 찾으십니다.
본문 1절을 보시면, “이스라엘 자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여호와께서 이 땅 주민과 논쟁하시나니 이 땅에는 진실도 없고 인애도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고”라고 합니다.
“진실”을 히브리어로는, “에메트”라고 합니다. 그 의미는, “신실과 확실”입니다. 즉, “자신이 약속한 것이나 맹세한 것에 대해, 철저하게 지키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민 23: 19을 보시면,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고 인생이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하지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하지 않으시랴”고 합니다. 또, 삼상 15: 29을 보시면, “이스라엘의 지존자는 거짓이나 변개함이 없으시니 그는 사람이 아니시므로 결코 변개하지 않으심이니이다”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참으로 진실하지만, 이스라엘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그들은, 하나님보다 우상 앞에 있을 때가 더 많았습니다. 그들의 이러한 행위는, 하나님으로 하여금, 질투를 일으키기에 충분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은 후, 성실하게 그 언약을 이행했습니다. 이스라엘이 여러 번, 그 언약을 파기했지만, 하나님은 파기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하나님께, 이스라엘은 철저하게, 진실의 자세를 가졌어야 했습니다. 그들이 해온 경험의 토대 위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실감되든 실감되지 않든, 마치, 다니엘의 세 친구들과 같이, 하나님께 대해, 변함없는 진실의 자세를 취했어야 했습니다. 단 3: 18을 보시면,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믿음 속에 있는 진실입니다. 그런데, 본문의 이스라엘을 보면, 진실이 없습니다. 그들에게서, 종교성을 찾을 수도 있고, 경건한 분위기도 있었지만, 하나님 앞에서의 진실은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언약을 지켰지만, 이스라엘은 언약을 파기했고, 거짓을 행하고, 범죄하는 일이 더 많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보다 우상을 더 사랑했고, 더 섬겼고, 더 좋아했습니다. 이러한 행위가 예수님 당시에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진실이 없이 행동하는 바리새인들을 향해,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과 그 진리가, 우리의 지식영역에만 머문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의 마음을 적셔야 합니다. 말씀을 들을 때, 전심으로 들어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정착하는 과정이나 그 곳에서, 살아가는 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출애굽하여, 가나안에 도착하기까지, 행한 것은, 하나님께 대한 원망과 불평한 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들의 조상인 아브라함에게 언약했던 것을 성실하게 이행해 오셨습니다. 오늘의 우리도 마찬가집니다. 우리 역시,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는, 신본주의보다, 사람을 중심으로 하는 인본주의를 더 추종한다면, 하나님 앞에서 진실하지 못한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충실하지 못한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조심스럽게,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항상, 내 자신을 돌아보며, “나에게, 하나님을 향한 진실이 있는가?”를, 자문하며, 점검해 봐야 합니다. 영국의 대표시인 제프리 초서는, “진실은 사람이 가지고 있는 것 중 최고의 재산이다”라고 했고, 도산 안창호는, “꿈속에서라도 진실을 버리지 마라. 꿈에라도 거짓말을 했거든 애통하며 회개하라”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서 찾는 것은, “신앙의 진실”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진실, 기도의 진실, 예배의 진실이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진실이 없다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아무 것도 아닙니다.
가구점 목공출신으로 16살에, 신앙을 개종한 “에드워드 모트”라는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영접한 후, 열심히 일해서, 가구점 하나를 경영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경영에 있어서,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가구점 뒤에 있는 홀본 언덕에 올라가 기도했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가구점 경영”이라는 성공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그가 기도하는 곳에 있으면, 자신이 있는 마을의 아름다운 정경이 한 눈에 들어왔습니다. 이러한 정경을 보며, 그 마당바위에서, “주님, 제가 조금 성공했지만, 저는 이런 성공은 언제라도 흔들릴 수 있다는 것을 잘 압니다. 저의 인생의 흔들릴 수 없는 반석은, 주님 한 분뿐이십니다. 저의 평생에, 저의 반석이신 여호와만을 의뢰하고 살겠사오니, 제가 한 평생 여호와를 찬양하고 예배하는 자로 살게 하소서”라며, 눈물의 기도를 하곤 했습니다. 그러던 중, 귀가하는 길에, 마음에서 솟아나는 글을 메모했습니다. 그것이, 찬488장의 “이 몸의 소망 무언가”입니다. 그는, 55살이 되면서, 가구점을 정리하고, 목회자의 길로 들어서서, 남은 생애를, 복음 전하는 일에 헌신했습니다. 77살에, 그가 섬기던 교회의 강단에서, 마지막 예배를 인도하던 날, 마지막으로 불렀던 찬송도, 이 찬송이었다고 합니다. 여러분, 에드워드가 이렇게 살아갈 수 있었던 이유가 뭡니까? 약 40년의 신앙생활 속에서, 그는 하나님을 경험했고, 이에 대한 그의 믿음이 진실했기 때문입니다. 이 시간, 우리 자신을 되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 열심은 있지만, 신앙의 모양이 빠지지는 않았습니까? 성경에 대해, 믿음에 대해, 기도에 대해 말은 잘 하지만, 하나님에 대한 진실이 부족하지는 않습니까? 잃어버리고 부족한 진실을 회복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 하나님은 우리에게서, 인애를 찾으십니다.
본문 1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여호와께서 이 땅 주민과 논쟁하시나니 이 땅에는 진실도 없고 인애도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고”라고 합니다.
“인애”를 국어사전에서 찾으면, “어진 마음으로 사랑함”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 낱말을 히브리어로는, “헤세드”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단어에서, 예수님의 새 계명을 볼 수 있습니다. 요 13: 34을 보시면,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합니다. 이 사랑은 어떤 사랑입니까? 눅 10: 27을 보시면,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고 합니다. 성도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자입니다. 이것을 실천하는 자를 가리켜, “헤시드”라고 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누구나가 십자가 앞에서, 은혜를 입었습니다. 십자가의 은혜가 아닌들, 우리가 어찌,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며, 우리가 사후에, 천국에 입성할 것을 확신하겠습니까? 십자가에서 당하신 고난은, 나를 위한 고난이었고,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는, 내 죄 때문에, 흘리신 피입니다. 내 몸이 찢기지 않고, 내 피가 흐르지 않았다고 하여, 십자가와 나는 별개라고 생각한다면, 그에게는 십자가의 은혜도 별개입니다. 십자가를 통한 구원도 별개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갈망하는 은혜가 무엇이며, 그것은, 어디에 있습니까? 잃어버린 인애를 다시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없으면, 울리는 꽹과리에 불과합니다. 우리의 믿음에, 인애를 더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혹시,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고백이, 우리의 입술에만 머물러 있지는 않습니까? 인애의 모습은 마땅히, 우리의 신앙 가운데서 나타나야 합니다. “외스터레이”는, “구약에서 헤세드란 말이 나오는 본문을 살펴보면, 이 말이 얼마나 다각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이 말은 히브리어가 우리에게 알려 주고 있는 가장 위대한 말의 하나이며, 영어로서는 이것을 도저히 올바르게 번역해 낼 수가 없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이는, 구약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가장 완전하게 표시하는 단어가, “헤세드”이기 때문입니다. 창 9장을 보시면, 하나님이 다시는, 물로 세상을 심판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얼마 전에, 어떤 분에게서 들으니, 우리 조상들이 말하기를, “불보다 물이 더 무서워”라고 했답니다. 물은 그 흔적까지도 없애기 때문입니다. 제가 이 말을 들을 때는 이미, 설교를 준비하는 과정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세상을 물로다 심판하지 않겠다”는 말씀이, 더 이상의 참혹한 심판을 하지 않겠다는 하나님의 확신으로 들렸습니다. 그 증거가 무지개입니다. 이 무지개가 왜? 우리에게 희망이 됩니까? 하나님의 언약이 있기 때문입니다. 창 9: 11을 보시면, “내가 너희와 언약을 세우리니 다시는 모든 생물을 홍수로 멸하지 아니할 것이라 땅을 멸할 홍수가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고 합니다. 이것은, 창 15: 17의 언약과도 같습니다. 보시면, “해가 져서 어두울 때에 연기 나는 화로가 보이며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더라”고 합니다. 쪼갠 고기사이로 지나는 것은, 약속의 이행입니다. 그렇다면, 계약에 있어서, 둘 이상이 지나야지 혼자 계약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횃불 하나만 지났다고 합니다. 즉, 하나님 혼자만 지났습니다. 사람들의 경우, 이 계약을 어기면, 어기는 자에 대해서는, 고기를 쪼개듯, 그의 생명을 취한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생명을 걸고, 이 언약을 체결하신 겁니다. 그러기에, 우리에게서, 하나님을 향한 인애를 찾으십니다. 호 6: 6을 보시면,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라고 합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만난 하나님, 성경에서 보여지는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그의 피조물인, 우리와 한 약속에 대해, 자신의 목숨을 걸고, 반드시 지키는 분입니다. 그 댓가가 “하나님의 죽음”이라 할지라도, 지키는 분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 앞에서, 우리의 믿음과 신앙이 어떠해야 하겠습니까?
함신주 목사님의 글에서, 이런 심방이야기를 보았습니다. 교통사고로 죽을 고비를 넘긴 경험이 있는 집사님과 대화를 하는 가운데, 그 분이, “목사님, 제가 얼마나 교만했는지, 그 사고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이 나를 살려주지 않으면, 손해라고 생각했어요”라고 했답니다. 이 분은 말은, 우리도 공감합니다. 우리도 줄곧, 이렇게 하나님께 베팅을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절대로 손해를 안 본다는 것도 기억하셔야 합니다. 그 집사님이 이어서 말을 합니다. “목사님, 그런데, 하나님은 손해를 보지 않더라구요. 내가 사고 이후로 살아온 것을 되돌아보면, 시간, 시간이 은혜였습니다. 그래서,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회개하라고 기회를 주신다는 겁니다. 제게 하루하루가 주어진다는 것은, 하루하루를 회개하며 살아가라는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저는, 함 목사님이 만난 집사님의 간증을 보면서, 이것을 굳이, 신학적으로 따질 이유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시편을 보면, 그 곳에 나오는 대부분의 고백들도, 개인의 신앙으로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죄인들이 회개하고 돌아오기만을 간절한 마음으로 기다리신다는 겁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인애가 나타난 곳을 보면, 요나서를 볼 수 있습니다. 또, 돌아온 탕자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계시록을 보면, 하나님의 심판이 행하여지는 곳보다, 행하여지지 않은 곳이 더 많다는 겁니다. 곧, 하나님은 그루터기를 남기십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기위한 “유예”라는 겁니다. 화란의 신학자 호마루스는 “호흡이 있는 한 희망이 있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믿고, 의지하는 하나님은, 인애하신 하나님입니다. 그러므로, 진실로 주님 앞에 우리의 마음을 드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믿음으로 살아가는 가운데, 하나님의 크신 복을 누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끝으로, 하나님은 우리에게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찾습니다.
본문 1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여호와께서 이 땅 주민과 논쟁하시나니 이 땅에는 진실도 없고 인애도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고”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정보적 차원에서 아는 것이 아닙니다. “지식”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다아트”입니다. 이는, “안다”라는 “야다”에서 파생된 것으로, 단순히 아는 것에 그치는, 사변적인 지식이 아니라, 경험적으로 아는 지식을 말합니다. 그래서, 엡 5: 10을 보시면, “주를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고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경험하라는 겁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가장 소중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에게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었습니다. 그들에게는, 멋진 성전이 있었고, 화려한 옷을 입은 제사장들이 있었고, 하나님의 율법이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었습니다. 파스칼은 “나는 생각한다”라는 이성 중심에서, “나는 믿는다”라는 신앙 중심으로, 하나님을 알고자 노력했습니다. 만유인력을 발견한 아이작 뉴톤이 말년에 치매에 걸렸습니다. 그는, 모든 것을 잊었습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제자가, “선생님, 지금 알고 계신 것은 무엇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웃으면서, “내가 죄인이라는 것과 그리스도께서 내 구주 되신다는 것 이 두 가지는 내가 확실히 알고 있지”라고 대답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다면, 우리의 모든 지식은, 헛됩니다.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지 못하던 이스라엘에게 내려진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이었습니다. 이러한 이스라엘을 바라보면서, 오늘, 우리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혹시, 우리의 모습이, 있어야 할 것은 없으며, 없어야 할 것으로 채워져 있지는 않습니까? 바라기는, 우리의 신앙생활 속에, 진실이 있기를 바랍니다. 인애가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기뻐하는 복된 신앙의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