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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상 숭배에 대한 재경고
이사야 57:3~13
오늘 본문 말씀은 지난 주일 저녁에 살펴본 이사야서 57장 1~2절에 이은 하나님 백성의 죄악에 대한 날카로운 책망의 말씀의 연장입니다. 1절과 2절에서 하나님은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의인이 죽을지라도 마음에 두고 경각심을 갖는 자도 없고 의인이 재앙 전에 하나님께 취함을 입어 먼저 데려감을 받는 것을 보고도 사람들이 아무런 위기감도 느끼지 못하는 영적 나태함의 풍조에 대하여 경종을 울리고 있습니다. 그 의인들은 평안함으로 들어갔고 재앙을 보지 않고 데려감을 당했기에, 이제 곧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과 진노가 남은 악인들에게 임할 것이 임박한 것입니다. 실제로 그렇게 깨달음이 없고 선지자들의 경고에 대한 무감각함 때문에 북 이스라엘은 앗수르 제국에 망했고 남 유다 역시 바벨론 제국에게 끝내 망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다시금 바벨론에서 돌아오는 은혜를 입는 주의 백성들 역시 고토로 돌아와서 과거의 그러한 죄악들을 답습할 위험이 컸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고토로 돌아오도록 은혜를 베푸실 것을 계속 약속하시면서 믿음을 가지라고, 소망을 가지라고 권면하는 동시에 그들이 돌아와서 다시금 그들의 옛 조상들처럼 동일한 범죄를 범치 말라고 또 다시 강력한 경고를 그들에게 베풀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읽은 이사야 57:3 이하의 말씀은 또 다시 우상 숭배의 죄악에 대하여 환기시키며 이사야 선지자가 활동할 당시의 남 유다 왕국의 지도자들과 일반 백성들이 저지르고 있고 그들의 조상들이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온 이후에 계속하여 범해온 우상 숭배의 죄악을 낱낱이 지적하면서 그러한 우상 숭배가 무익한 행위이며 멸망의 길로 떨어지는 패망의 길이라고 여기서 일깨워주고자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성령의 감동을 통하여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날카롭게 증거하는 우상 숭배의 죄악이 얼마나 당시 심각했는가를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3절과 4절을 먼저 함께 읽겠습니다.
“무당의 자식, 간음자와 음녀의 자식들아 너희는 가까이 오라 너희가 누구를 희롱하느냐 누구를 향하여 입을 크게 벌리며 혀를 내미느냐 너희는 패역의 자식, 거짓의 후손이 아니냐”
여기서 보면 하나님은 선민 이스라엘을 향하여 처음부터 매우 신랄한 어조로 그들을 비난합니다. 너희는 ‘무당의 자식, 간음자와 음녀의 자식들이다’라고 질타합니다. 그들의 조상들이 무당을 좇아다니고 영적으로 간음하는 우상 숭배자들이라는 것이며 현재의 그들은 바로 그러한 악하고 음란한 우상 숭배의 죄악을 답습하고 있는 그 자손들이라는 것입니다.
선지자 당시의 유다 백성들이나 훗날 고토로 돌아온 유다 백성들은 다 자신들을 대단한 존재로 생각하곤 하였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하나님이 택하신 아브라함의 혈통적 후손이라고 생각하면서 자기들을 자유인이요 하나님께서 택하신 선민이라고 자부심을 가졌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들의 자부심에 뒤집는 치명적인 독설을 퍼붓는 것입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공적 사역을 펼치실 때에 그를 시험하려고 모여든 바리새인들과 유대인들을 향하여,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요한복음 8:44)
고 질타했던 것과 같습니다. 이렇게 강한 독설의 말로써 그들의 자존심을 무너뜨리고 그들의 위선을 벗겨내고자 하였으나 그들은 절대로 듣지 아니하고 오히려 예수님을 잡아 죽이려고 더 이를 갈면서 애를 썼으니, 그들은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바 진리의 말씀을 받을 수 없었기 때문에 그들이 마귀의 자녀들이었기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에 기록된 무서운 책망의 말씀과 죄를 지적하는 말씀들을 읽거나 들을 때에 귀에 듣기는 너무 힘들지 모르지만 우리 영혼에 좋은 줄로 알고 그 말씀을 달게 받는 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사도 바울도 에베소서 5:11 이하의 말씀에서 이르기를
“너희는 열매 없는 어둠의 일에 참여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 그들이 은밀히 행하는 것들은 말하기도 부끄러운 것드이라 그러나 책망을 받는 모든 것은 빛으로 말미암아 드러나나니 드러나는 것마다 빛이니라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너에게 비추이시리라 하셨느니라”(에베소 5:11~14)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거룩한 성령의 감동이 깃든 하나님의 말씀을 읽거나 듣거나 묵상할 때에 우리 영혼이 깊이 찔림을 받고 마음에 괴로움이 생기고 눌리고 답답할 때에 얼른 그 말씀을 내던지고 마음을 즐겁게 하려고 딴 생각으로 달려가지 말고 도리어 그 주님의 말씀을 꼭 붙들고 놓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바로 그 책망은 성령으로부터 온 것이요 내 영혼을 살리고 씻기고 세우고 회복시키고 내적 생명을 강하게 해주는 것이기 때문에, 도리어 그 말씀을 사랑하여 마음에 깊이 두기를 힘써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 요한복음 16:8 말씀에 성령이 오시면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으니, 그 책망의 말씀들이 우리 영혼을 잠에서 깨어나고 거짓된 안전감에서 건져내고 정신을 차리고 죄를 떨쳐내고 의롭고 거룩하고 경건의 능력을 덧입도록 우리를 새롭게 해줄 것입니다.
그 반대로 악인들은 선지자들이 아무리 열렬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고 경고한다 해도 그들은 도리어 하나님과 선지자들을 희롱합니다. 입을 크게 벌리고 혀를 내밀며 조롱합니다. 그럼으로써 그들이 패역의 자식이요 거짓의 후손임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예레미야 18:11~12 말씀에 보면, 이사야 선지자 후에 유다 왕국 말기에 사역한 예레미야 선지자 시대에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통하여 통렬하게 바벨론 침략을 앞둔 당시 유다 백성들의 마음의 완악함을 잘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이제 너는 유다 사람들과 예루살렘 주민들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보라 내가 너희에게 재앙을 내리며 계책을 세워 너희를 치려 하노니 너희는 각기 악한 길에서 돌이키며 너희의 길과 행위를 아름답게 하라 하셨다 하라 그러나 그들이 말하기를 이는 헛되니 우리는 우리의 계획대로 행하며 우리는 각기 악한 마음이 완악한 대로 행하리라 하느니라”
예레미야 당시의 유다 백성들은 선지자 예레미야의 경고대로 계속하여 바벨론 군대가 쳐들어오고 그들에게 압박을 하고 있는데도 끊임없이 하나님의 말씀에 거역하면서 자기 식대로 살아갔던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선지자의 경고와는 상관없이 자기들의 계획과 생각대로 움직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헛되고 무익할 뿐이고 믿어봐야 헛 것이고 기도해보아야 쓸모없을 뿐이고, 그러니 우리가 짠 계획대로 움직이겠다고 마음을 완고하게 먹습니다.
이처럼 인간의 완고함은 끈질깁니다. 어리석은 자는 하나님의 말씀에 겸손하라 가르치며, 자기를 절대로 지혜롭게 여기고 말고, 어리석게 여기라고 교훈하고 있는데도, 그들은 결코 하나님의 교훈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자기가 하나님보다 더 똑똑하게 여깁니다. 자기가 세상에서 가장 유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자기가 다른 사람보다 훨씬 지혜롭고 세상을 가장 잘 알고 있고, 자기 인생은 자기가 알아서 살 수 있다고 자부합니다. 그래서 남이 충고하면 듣디 않습니다. 어리석은 자는 자기 주변 사람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자기를 가장 사랑하는 사람의 말을 무시합니다. 자기 부모님의 말씀 안 듣습니다. 자기 아내, 자기 남편 말 안 듣습니다. 자기를 아끼는 형제 자매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주의 종의 영적 조언도 듣지 않습니다. 친구가 걱정해서 하는 말도 듣지 않습니다. 경고해도 안 듣습니다. 잠언 27장 22절에서도 이르기를
“미련한 자를 곡물에 함께 절구에 넣고 공이로 찧을지라도 그의 미련은 벗겨지지 아니하느니라”
고 하였습니다. 절구에 넣고 공이로 찧으면 곡식의 딱딱한 껍질은 다 벗겨지지만 미련한 자의 미련함과 완악함은 절대로 벗겨지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고난의 절구 속에 집어넣고 단단한 시련과 채찍의 공이로 계속 찧어대도 그의 미련함은 여전히 딱 달라붙어 있어서 절대로 배우려 하지 않습니다. 자기의 고집과 완악함을 내려놓지 못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완고한 악인들이 그러합니다. 죄인들이 그러합니다. 그래서 북 이스라엘이 수많은 시련의 공이질을 통하여 가르치려 했으나 듣지 아니함으로 앗수르 제국의 칼날에 완전히 망했고, 남 유다 역시 바벨론에 완전히 망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조상적부터 내려오는 패역함과 우상숭배와 미신 숭배와 하나님 말씀에서 고집스러움과 완악함과 미련함의 기질들이 깊이 배여 있음을 명심합시다. 그리고 하나님의 책망과 경고의 말씀들을 접할 때에 감히 입을 크게 벌리고 혀를 내밀면서 조롱하였던 옛 조상들과 달리 우리는 심히 두렵고 떨림으로 우리 자신을 쳐서 자신을 낮추고 겸손하게 그 말씀을 받고 깨어지고 부서지는 마음을 갖고 새롭게 되는 결단을 하는 복된 성도들이 됩시다.
이제 선지자를 통하여 하나님은 그 조상들이 범하였던 바 우상 숭배의 행실들을 낱낱이 지목하면서 주의 백성들을 환기시킵니다. 5절로부터 10절까지 함께 읽겠습니다.
“너희가 상수리 나무 사이, 모든 푸른 나무 아래에서 음욕을 피우며 골짜기 가운데 바위 틈에서 자녀를 도살하는도다 골짜기 가운데 매끄러운 돌들 중에 네 몫이 있으니 그것들이 네가 제비 뽑아 얻은 것이라 또한 네가 전제와 예물을 그것들에게 드리니 내가 어찌 위로를 받겠느냐 네가 높고 높은 산 위에서 네 침상을 베풀었고 네가 또 거기에 올라가서 제사를 드렸으ㅡ며 네가 또 네 기념표를 문과 문설주 뒤에 두었으며 네가 나를 떠나 벗고 올라가서 네 침상을 넓히고 그들과 언약하며 또 네가 그들의 침상을 사랑하여 그 벌거벗은 것을 보았으며 네가 기름을 가지고 몰렉에게 나아가되 향품을 더하였으며 네가 또 사신을 먼 곳에 보내고 스올에까지 내려가게 하였으며 네가 길이 멀어서 피곤할지라라도 헛되다 말하지 아니함은 네 힘이 살아났으므로 쇠약하여지지 아니함이라”
여기서 보면 이스라엘과 유다 백성들이 그 동안 저질렀던 우상 숭배의 각종 모양을 하나님께서 여기서 열거하고 있습니다.
5절 상반절에 보면, 상수리 나무와 푸른 나무 아래에서 음욕을 피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들은 제법 큰 나무만 보면 신령한 것으로 여겨 그 장소에서 우상 숭배를 했습니다. 절을 하고 복을 구하였습니다.
또 5절 하반절에 보면, 골짜기 가운데 바위 틈에서 자녀를 도살하였습니다. 여기서 많은 골짜기들이 있지만 예루살렘 서쪽 골짜기인 도벳 골짜기만 예를 들면 예루살렘 거민과 유다 백성들이 그곳 도벳에서 몰렉 우상에게 자기 아들을 죽여 바치는 못된 악행을 많이 저질렀습니다.
또 6절에 보면, 골짜기 가운데 매끄러운 돌들 위에서 그들은 예물을 거기에다 놓고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들은 큰 돌만 보면 그 돌 위에 제물을 갖다 놓고 제사를 드리면서 절을 했습니다. 전제와 예물을 올려놓고 태워 신에게 빌었습니다.
또 7절에 보면, 높은 산 위에서 제사를 드렸습니다. ‘높고 높은 산 위’라고 한 것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흔히 있었던 산당을 가리킵니다. 산당 제사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한 후에 가나안 땅에 정착한 후에 오랫동안 고질적인 우상 숭배 방식이었습니다. 아무리 훌륭한 여호와르 경외하는 왕들조차 산당 제사는 허용하곤 하였습니다. 그래서 산당 제사와 예루살렘 성전 제사가 병존하곤 하여 하나님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였습니다.
나아가 8절에 보면, 그들은 자기 집안에까지 우상을 가져와서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들은 문과 문설주에 하나님의 말씀을 붙여 놓은 모세 율법의 명령을 뒤집어서 그와 비슷하게 다른 부적 같은 것을 문과 문설주에 붙여 놓았습니다. 은밀하게 사람들 모르게 문설주 뒤쪽이나 문 뒤에 붙여 놓았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식당에 가보면 당당하게 주의 말씀을 붙여놓은 상점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상점들은 한번 쓱 들러보면 명태와 실타래를 묶어 놓거나 부적이 붙어 있거나 달마 대사 그림이 있거나 하는 것들을 종종 보게 됩니다. 이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가정에 부적을 붙여놓고 기도하고 집안 은밀한 곳에 우상을 세워놓고 가정 제단을 만들어 가정의 복을 구하곤 했던 것입니다.
나아가 그들은 외국에까지 가서 원정 제사를 드리곤 했습니다. 9절에 보면
“네가 기름을 가지고 몰렉에게 나아가되 향품을 더하였으며 네가 사신을 먼 곳에 보내고 스올에까지 내려가게 하였으며”
라고 하였습니다. 그들은 모압과 암몬의 신 몰렉에게 가서 기름과 향품을 갖다 바치며 제사를 드렸고 국가적인 위기를 맞이하여 여호와의 성전이 예루살렘에 버젓이 있으나 그들은 사신을 보내어서 외국의 도움을 청하며 그곳에 가서 국가 의례라고 하면서 그곳에서 외국의 신전에 가서 절을 하고 제사에 참여하는 악을 범하였습니다. 북한에 가면 그곳에 김일성의 시신이 묻힌 태양궁전에 가서 경배하는 예를 요구한다고 합니다. 그것은 우상 숭배의 죄와 같습니다. 그들은 신으로 모실 만큼 절대적인 자리에 있기 때문에, 그곳에 참여하는 것은 일종의 우상 숭배와 같습니다.
조용기 목사님 설교에 들은 적이 있는데, 과거 교회 장로 중 한 사람이 북한에 가게 될 기회가 있어서 간다고 했을 때 목사님이 말렸답니다. 그곳에 가면 김일성의 시신이 놓인 태양궁전에 가서 절을 하는 요구를 당할 것이니 그것이 마음에 걸려서 말렸답니다. 그것은 우상 숭배적인 요소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장로님은 목사님 말씀을 듣지 않고 북한에 가서 사업을 할 기회를 얻으려고 갔다고 합니다. 그러나 돌아와서 그 장로님의 사업은 도리어 내리막길을 걸었고 망하게 되었노라고 목사님이 설교 중에 하신 말씀을 들었습니다. 목사님들 중에도 북한에 가서 이리 저리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다 보면 결국 북한 김일성, 김정은 사진 앞에 경배하는 요구를 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온갖 교묘한 술수로 약점을 잡아 꼼짝 못하게 하는 일을 요구하곤 한다는 말을 제가 이십년 전부터 들었는데, 그런 일이 실제로 있었다는 것을 최근 한 유트브 방송에서 확인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수많은 우상 숭배의 죄악을 범하면서도 그들은 도리어 잠깐 힘이 생겨납니다. 열심을 내고 힘이 나서 우상 숭배 행위를 열심히 합니다. 10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길이 멀어서 피곤할지라도 헛되다 말하지 아니함은 네 힘으 살아났으므로 쇠약하여지지 아니함이라”
그렇습니다. 우상 숭배 열심히 할 때 무엇인가 힘이 솟습니다. 부처 앞에 천번의 절을 하면 힘이 생겨납니다. 복을 받을 것 같습니다. 그러니 그들이 지치지 않고 열심을 냅니다. 하지만 그것들은 스스로 속는 것입니다.
그래서 11절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질문합니다.
“네가 누구를 두려워하며 누구로 말미암아 놀랐기에 거짓을 말하며 나를 생각하지 아니하며 이를 마음에 두지 아니하였느냐 네가 나를 경외하지 아니함은 내가 오랫동안 잠잠했기 때문이 아니냐”
이 말씀대로 그들이 이렇게 열심히 우상 숭배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오랫동안 잠잠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내버려두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께서 오래 참고 기다려주신 것으로서 그들이 돌아오기를 바란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오히려 하나님의 오래참으심을 오해하고 하나님이 아니 계신 것처럼 생각하고 더욱 과감하게 악을 행하였으니, 그들은 하나님을 믿어봐야 소용없다고 말하며 더 완악해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실까요? 때가 이르면 하나님께서 그들의 그 헛된 신앙의 어리석음을 드러내실 일을 행하십니다.
12절과 13절 전반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네 공의를 내가 보이리라 네가 행한 일이 네게 무익하니라 네가 부르짖을 때에 네가 모은 우상들에게 너를 구원하게 하라 그것들은 다 바람에 날려 가겠고 기운에 불려갈 것이로되”
오랫동안 잠잠하시던 하나님께서 정한 때가 차니 더 이상 참지 아니하시고 개입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들의 악함을 드러내시고 심판하시어 그들의 우상 숭배가 헛되고 무익한 것을 드러내십니다. 그 날에 그들은 우상 앞에 절하며 간절히 부르짖을 것이나 헛될 뿐입니다. 그것은 바람에 날리는 겨와 같이 날아가고 마는 것입니다.
반면에 하나님을 신뢰하며 마음을 굳게 정하고 믿음을 지켜가는 자는 어떻게 될까요?
13절 후반절을 읽겠습니다.
“나를 의뢰하는 자는 땅을 차지하겠고 나의 거룩한 산을 기업으로 얻으리라”
우상 숭배가 가득한 세상 속에서도 하나님을 신실하게 의지하고 그에게 간절히 간구하는 자들은 세상이 흔들리는 중에도 그는 견고하며 땅을 차지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거룩한 산 곧 영원한 하늘의 기업을 상속하게 됩니다. 우상숭배자들은 다 멸절을 당하고 사라지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과 그 후손들은 굳건히 서서 하나님의 보호 속에서 평안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시대에도 우상숭배의 유혹이 많습니다. 보이는 우상도 많이 있고 잡신 숭배자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보이는 우상만이 우상이 아닙니다. 보이지 않는 우상들이 더 많이 있습니다. 재물, 명예, 세상의 성공, 자기의 쾌락이 오늘날의 우상입니다. 자기 자신의 성공과 행복이 강력한 우상입니다. 주의 종들도 목회 성공이 우상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진정한 성공은 주님을 진실하게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이 우리의 삶의 이유와 목적으로 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면 어떤 난관과 시련이 와도 “주의 뜻이 이루어지이다”라고 고백하며 순종하는 것이 진정한 신앙의 진면목입니다. 이 시대에도 여전히 우상 숭배의 무서운 유혹이 있지만, 우리 모두 진정한 신앙으로 무장하고 우상 숭배의 교묘한 유혹들과 맞서 끝까지 승리하여 참된 축복과 영원한 구원의 기업을 차지하는 주의 백성들이 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