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편의 시가 혼자 날게 하려면
---김종겸의 시세계
최은묵
한 계절이 지나는 사이, 그즈음을 불온이라고 불러야 할까? 불안이라고 불러야 할까? 이렇게 형체가 불분명한 감정들을 표현하는 것은 마치 기댈 곳 없는 벌판에 서서 바람을 그리는 일과 비슷하다. 느낄 수는 있지만 보이지 않는 바람을 어떻게 그려야 하나. 한 손에는 물음을 들고 다른 한 손에는 붓을 들고 선다.
이제 바람에 집중할 시간이다. 얼굴에 부딪히고 귀를 스치는 바람을 느끼려면 감각을 끌어올려야 한다. 바람의 정체는 무엇일까? 흙먼지가 일고 나뭇가지가 흔들리고 풀이 눕고 그런 몸짓에서 일렁이는 소리들. 저쪽 어디에서 불어와 다른 저쪽 어딘가로 가버리는 바람의 결에서 들을 수 있는 소리는 무한하다. 하지만 이런 무한의 소리에서 접점을 이루는 감정을 만나는 건 쉽지 않다. 그러니 우우- 바람의 소리를 몸으로 받아들여 나만의 언어로 번역하기 위해 어떻게 붓을 움직여야 할까?
붓끝이 닿은 자리마다 새로운 소리가 피어난다. 이렇게 피어난 소리는 기교가 아니라 진솔해야 한다. 덧칠된 소리는 수식어로 치장한 문장처럼 헛된 무게를 지닌다. 이런 헛됨이 부피가 되지 않도록 하려면 부분에 치우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부분은 중심을 잃고 넘어지기 쉽다. 계절과 계절의 사이는 흔들림이 많다. 사람과 사람의 사이도 마찬가지다. 흔들리는 것은 바람처럼 왔다 간다. 그러니 어떤 순간을 붙잡아 전달하기 위해선 귀가 아니라 마음으로 소리를 들어야 한다.
「수담(手談) 사활편-앙코르와트에서」 외 4편이 보여준 터치는 민감하다. 이런 민감함이란 김종겸의 시가 불온을 표출하는 방식에서 불안함이 보이기 때문이다. 불안은 언어를 관념에 기대게 한다. 이미지를 이루지 못한 문장은 다른 문장과 충돌하며 흔들린다. 이것이 의도한 작법일 수도 있겠지만 독자는 흐린 이미지 안쪽의 스케치를 애써 들여다보려고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김종겸이 말하려는-발표한 작품을 많이 접하지 못했으므로, 그 점을 감안하더라도-일련의 메시지가 바람 소리에 묻혀 있는 상태로 읽히는 것도 부인하기 어렵다. 하지만 그가 시를 만나는 지점이나 표현의 방식 뒤에 슬그머니 내려놓은 진의를 따라가 보기로 한다. 벌판 같은 종이를 바둑판 삼아 펼친 대국을 한 수 한 수 더듬는 동안 뜨겁거나 냉정했을 김종겸의 호흡까지 상상하면서 말이다.
「수담(手談) 사활편」은 바둑 대국의 이미지에 앙코르와트의 이미지를 겹쳐놓았다. 앙코르와트는 앙코르 왕조의 수리야바르만 2세가 만든 사원이면서 자신의 무덤이다. 대지 위에 건물을 쌓고 연못으로 바다를 표현하고 건물 둘레의 벽으로 히말라야 봉우리를 상징하는 사원은 바로 신(神)과 합일(合一)을 위한 신앙의 표출이었다.
앙코르와트의 배경을 바둑에서 찾는다면 사원을 건립하는 과정에 빗댈 수 있을지도 모른다. 흑돌과 백돌이 부딪치며 벽을 이루고 그 돌들이 각각의 성을 만들고 마침내 거대한 집(사원)을 만드는 과정을 보면 그렇다. 바둑판의 천원(天元)은 앙코르와트 신전 정중앙에 있는 지성소로 비유되고, 또 스펑나무 뿌리가 벽을 감싸고 있는 모습은 마치 사활에 걸린 돌의 모양과 흡사하다. 그리고 사활은 “일 달러와 천 원만을 외치며” 살아가는 아이들의 까만 눈동자에서도 맞닥뜨린다.
제목으로 쓰인 ‘사활(死活)’은 돌들의 삶과 죽음을 다루는 용어다. 사활은 긴박한 단어다. 잠시도 손을 뺄 수 없는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수읽기 끝에 놓는 한 수는 승패를 가를 정도로 중요하다. 이러한 긴장감은 “흰두교의 얼굴을 조각한 상징물들은 나를 심판대에 올렸다.”라는 문장에서 볼 수 있듯이 천국과 지옥의 모습을 조각한 앙코르와트 회랑부조의 이미지와 맞닿아 있음을 알 수 있다. ‘사활’은 커다란 화두이며 ‘앙코르와트’ 또한 거대한 역사를 지니고 있다. 두 단어가 지닌 상징은 스스로 무겁다. 이런 무거움은 마치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세력”에 의해 갇혀 “사방으로 닫힌 문은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는” 삶의 모습과 흡사하다.
‘실리냐 세력이냐’ 이 말은 바둑에서 흔히 쓰인다. 그리고 우리는 사각의 세계에서 펼치는 한판 승부를 인생에 빗대 자주 말한다. 시도 크게 다르지 않다. ‘대마’를 살리기 위해서 과감히 버려야 할 ‘돌’이 있다.
「이유」는 “옷장” 속 오래된 옷을 “입어보지 않은 생각들”로 비유한다. 그러므로 옷장을 정리한다는 것은 생각을 정리하는 것이다. 이것이 이 시의 발상이다. 타자(아내)에 의해 수동적으로 정리해야 하는 옷(생각)을 살펴보는 과정은 지나온 삶의 기억을 돌아보는 행위가 자발적이지 않다는 의미다. 어쩌면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을 소환하는 동안 현재의 “나”는 얼마간 과거의 “나”와 달라졌는지 비교해보기도 했을지도 모른다.
입어보지 않은 ‘생각’이란 입어보지 않은 ‘옷’이고, 옷장 속의 옷은 화자의 울타리 안에 있는 사물이므로, 이 시에서 “생각”이라는 단어는 옷장 같은 과거의 ‘기억’으로 좁혀진다. 화자는 “얻어온 외투를 걸쳐 입고 좋아하던 아이”를 통해 옷으로 명명된 지난 삶을 돌아보기도 하는데, 이 시에서 “생각”은 ‘추억’이라는 다른 호칭으로 불러도 무방하다.
하지만 화자는 옛 기억을 회상하는 것에 머물지 않고 무슨 생각을 버리고 무슨 생각을 남길 것인가를 고민한다. 그러나 “생각”이란 “옷”과 달리 버릴 수 없는 무형이다. 버릴 수 없는 “상념들”은 “때깔 곱”지 않았던 과거와 “때깔 곱게 패 한번 만들고” 싶은 미래와 충돌한다. 이런 갈등은 곧 “아내의 성화”와 상관없이 독립적으로 발생한 화자의 미련일 수도 있다. 그리고 이 시가 말하는 “이유”는 「중고서점에서」 보여준 품절·절판된 도서에 눈길을 두는 화자의 마음과 일부 상통한다.
「그리움」의 배경은 따뜻한 늦겨울이거나 초봄으로 계절이 바뀌는 즈음일 것이다. 겨울이 가고 봄이 올 무렵 “눈”이 내린다. “눈”은 떠나지 못하고 다시 찾아오는 “그리움”이며 동시에 “너”이다. 어느 특정한 순간을 떠나보낸다는 것은, 그것이 계절이든 시간이든 사람이든 마찬가지로 아쉬움과 미련이 남을 것이다. 그때 그 대상이 뒤돌아보는 순간은 떨림이 발생하기에 충분한 지점이다. 하지만 이미 계절은 겨울에서 봄으로 바뀌는 중이고 “눈꽃”의 시간은 그리 길지 않다. 화자는 “너”로 치환된 어떤 순간을 강제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이때 “오늘 밤”이라는 한정된 시공간은 감정을 극대화시킨다. 이런 감정은 조심스럽다. “그리움”을 “그리움”이라는 말로 전달하는 순간 다른 말은 부수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움”이라는 관념을 어떻게 형상화할 것인가? 시 앞에서 이런 물음은 언제나 유효하다.
「중고서점에서」에 쓰인 “이 광활한 우주에서 이미 사라진 책을 읽는다는 것”은 ‘알라딘 중고서점 품절·절판도서’ 코너에 적힌 문구다. 그리고 이 문장을 이 시의 씨앗으로 봐도 좋다.
책장에서 책장으로 사람에서 사람으로 숱한 시간을 거치는 동안 한 권의 책은 누군가의 삶과 함께했음이 분명하다. 이런 삶의 모습들을 상상하는 일은 즐겁다. 책을 단순한 사물로 볼 것인가? 아니면 거대한 상징으로 볼 것인가? 김종겸은 어느 세계를 거쳐온 책의 과거를 ‘중고’라는 정지된 시간으로 읽지 않고 회상을 통해 현재로 끌어온다. 책장에 빼곡히 꽂혀 있는 과거의 시간을 바라보고 만져보는 동안 화자가 느꼈을 미세한 떨림을 떠올려보자.
품절·절판된 도서를 매만진다는 것은 책의 시간과 화자의 시간을 함께 돌아보는 일이다. 시곗바늘은 멈춰도 시간은 멈추지 않는 것처럼 책은 분명 시간을 품고 있는 사물이다. 역사를 ‘중고’라고 부르지 않는 이유는 역사가 지닌 무게와 그것이 현재로 이어지고 미래로 나아가는 생물이기 때문인 것처럼 책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이런 무게감 앞에서, 게다가 시간의 문장을 품고 있는 사물 앞에서 서툰 설명은 불필요하다. 광활한 우주를 담고 있는 ‘책’을 ‘종이 뭉치’라고 말할 수는 없는 일이니까 말이다.
「엑스레이 촬영실에서」는 엑스레이 광선이 “뼈”뿐만 아니라 “마음”까지 찍어낸다는 이야기다. 엑스레이 촬영실은 들키고 싶지 않은 마음과 들켰으면 좋을 마음이 혼재하는 공간이며, “나약한 마음까지 보여줘야 하는 서툰 삶”은 갑과 을로 대변되는 세계의 한 단면을 제시한다. 금 간 갈비뼈는 쉽게 찾아낼 수 있지만 금 간 마음은 쉽게 찾아내지 못하는 세상에서 압박붕대를 가슴에 두르듯이 속내를 꼭꼭 감추고 살아야 하는 삶은 주변에서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이들은 바로 가족이고 친구이며 또 나 자신으로 대입해도 무방하다.
한 편의 시가 객관적 공감대를 형성하기 위해서는 특정 사건의 서사보다 그로 인해 발생하는 사유에 더 비중을 두어야 할 것이다. 충분히 공감을 일으킬 수 있는 공간을 사적으로 장악하는 순간 자칫 누군가의 시선은 다른 곳으로 옮겨갈 수도 있다. 어디에 방점을 찍을 것인가? 어떻게 사유를 끌어낼 것인가? “옹이”를 만들기 위해서 “나”는 언제쯤 ‘나무’가 되어야 할까? 아픔을 아픔이라고 말하지 않고 엑스레이 광선을 통해 어떻게 아픔을 보여줄 수 있을까?.
한 편의 시가 오롯이 혼자 날게 하려면 깃을 붙여주는 것에서 끝나지 않고 날아야 할 이유를 알려줘야 할 것이다. 기교는 진솔함에 미치지 못하고, 입에서 나오는 소리와 몸에서 녹아 나온 소리는 분명 그 농도가 다르기 때문이다.
‘사활’은 바둑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시에 쓰인 문장 하나하나가 모두 사활이다. 축(逐)에 걸린 돌에 미련을 두면 형세를 놓칠 수도 있다. 대국이 시작되면 한 번 놓은 돌은 무를 수 없다. 바둑판 위에는 언제나 예측할 수 없는 바람이 분다. 이 바람을 어떻게 할 것인가? 호구(虎口)로 바람을 가둘 수는 없다. 미생(未生)의 언어에게 집을 만들어 주는 게 시인의 역할이다. 그러니 붓으로 바람을 그리는 일이야말로 시인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즐거움이 아닐까. 느낌대로 붓을 움직여 보자. 한 손에는 세상에 던지는 물음을 들고 다른 한 손에는 붓을 쥐고 말이다. 그 붓은 오롯이 ‘나’의 붓이어야 한다. 결이 다른 붓이 지나간 흔적은 숨길 수 없다. 어떻게 그릴 것인가보다 무엇을 그릴 것인가를 먼저 생각하자.
이제 이번 대국은 끝났다. 「수담(手談) 사활편-앙코르와트에서」 외 4편의 시적 발상이나 표현이 사유에 가닿기까지 소비된 언어가 무엇인지 복기해보면 좋겠다. 그리고 다시 돌을 들어 2선과 3선과 4선 어느 곳에 돌을 놓을 것인지 시간제한 없이 생각해보면 어떨까. 들어오는 곳은 있지만 나가는 곳이 없다면 그 안에서 살아도 겨우 두 집이다. 사활에 치중하다 대국을 놓치지 않았으면 한다.
시가 지닌 언어는 불온에 가까운 것일까? 아니면 불안에 가까운 것일까? 이 물음에 김종겸은 어떻게 대답할 것인지 이후의 시편을 기다리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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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은묵
2007 월간문학, 2015 서울신문 신춘문예. 수주문학상, 천강문학상, 제주4·3평화문학상 수상. 시집『괜찮아』, 『키워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