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이서의
애지카페에서
---서정화, 정하선, 최경선의 시
가장 느린 빛
서 정 화
붉은 방에서 놀라운 형상을 보았어요
지금까지 빛이 닿지 않은 가장 깊은 곳을 인화했습니다
그 밝기는 한낮보다 어둡고 자정보다 약간 밝은 정도로,
겨우 숨소리 정도만 들리더군요
세상에나 정말 캄캄해요
이런 짙고 독한 기억이 있을 수도 있군요
은염의 반응 속도가 매우 낮아서 윤곽은 극히 흐릿하다고 합니다
이제야 지워진 표정이 조금 이해되는군요
이 방의 시간은 매우 느립니다, 환기가 희박하죠
밖에서 보는 프레임 속 풍경은 눈부실지 몰라요
어차피 문이 열리면 하얗게 타버리겠지만
그래도 약품 냄새가 이만큼이나 배었으니 농도에 대해 얘기할 수 있군요
울컥, 하고 올라오는 그런 건 괜찮은 슬픔입니다
밝은 곳에서 어둠에 대해 말하면 안 돼요
다 안다는 것처럼 조도를 분석하지는 말아야죠
셔터 누르듯 위로를 쏟아내지 말아 주세요
차라리 침묵에 대해 써보는 게 어때요
기억의 선명도를 결정하는 요소는 여러 가지입니다
중요한 것은 수조 속을 더듬는 일이죠
붉은 안전등 아래를 서성거리는 현기증처럼 말이에요
여기 암실에서는 빛이 약해서 마음의 상당 부분이 잠상*으로 존재해요
모든 상처는 항상 밖으로 언제 노출될지 숨을 죽이고 있는 거죠
*잠상: 사진 필름에 빛이 닿아 생기는 눈에 보이지 않는 상. 현상액을 거쳐야만 비로소 눈에 보이게 됨.
애지 여름호에서
방음벽
정하선
천 개의 귀가 있어도 입이 없는 저 사람
소형차의 아양 떠는 목소리도 고급 승용차의 거드름 피우는 헛기침도 낡은 트럭의 고달픈 하소연도 대형 트레일러의 우락부락한 굉음도 귀 세워 듣기만 하고 입 다물고 있다
불평은 물론 맞장구 칠 줄도 모른다 격려의 말도 칭찬의 말도 할 줄 모른다 인색하다고 할 정도로 무표정하다 얼굴 표정이 없는 친구가 든 화투패처럼 속을 읽을 수 없다
매연 같은 말들 다 가슴에 담아두고 감추어두고
근질근질한 입을 허공으로 틀어막고 있다
사람의 귀는 두 개 밖에 없어도 화의 뿌리가 입으로 뻗어 자라나 톱이나 도끼를 맞기도 하는데, 수천 개의 귀로 듣고도 세상 사람들 길가는 얘기들을 소리와 고요의 경계로 막고 있는, 부처님의 미소마저 본 따지 않고 무표정으로 앉아있는 저 면벽
언젠가는 가슴에 담아두었던 말들 세상에 다 뱉어낼 것도 같은데, 그러지는 않으리라는 얇아도 두터운 저 믿음
--애지 여름호에서
폐업의 시대
최 경 선
쓰지 못하는 우산*이 있습니다
여기저기
공실이 점령군처럼 주둔하고 있는 골목
자고 일어나면 점포 임대 현수막이
투항하는 자세로 펄럭입니다
한때 네온사인 화려했던 자랑거리는 걱정거리가 되고
우산심벌이라 하지요
북적이던 사람들은 시나브로 줄어들고
폐업이 탈출구가 되어버린 어느 자영업자는
부러진 의자와 함께 어디론가 수거되어버렸습니다
어떤 이는 찢어진 우산을 쓰고
또 다른 이는 자루 빠진 우산을
어느 날엔
우산과 함께 통째로 날아가 버린 사람도 있지요
줄다리기를 하는지 자꾸만 뒷걸음치는 발길들
속을 게워낸 점포 몇 개는
거미줄에 걸린 하루살이처럼 속절없이 흔들리고 있네요
아웃도어 매장 점주는 비 오는 날을 싫어하지요
여름을 좋아하던 까무잡잡한 피부의 카페 사장은
돌아오지 못할 휴양지로 떠났는지 커피 머신만 덩그러니 남아
외국인들로 북새통을 이루던 금은방 주인이
낡은 파리채로 적막만 탁, 탁, 내리치고 있습니다
녹슨 간판을 붙잡고 소소리바람이 덜컹거릴 때
쇼윈도우는 자꾸만 창백해져 가고
어둠살 내린 골목마다 고양이들이 갸르릉 폐허를 핥습니다
지금은 우산을 잃어버린 시대
소낙비를 맞으며 가로수들이 우의처럼 추적추적 젖습니다
* 노란우산공제.
애지 여름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