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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디기형이 종보에 뭘 실어보래서 『여헌선생제자급문록』을 하나씩 되는대로 연재하기로 했습니다.
그 가운데 맨 처음에 나오는 미수 허목이 지은 여헌신도비명을 싣습니다.
여헌의 후손으로서 이 정도는 한번쯤 일어서 알아두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올려봅니다.
다음에 만나더라도 시험은 보지 않을 것이니 부담들 갖지 마시고 한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 첨부 파일이 열리지 않는다는 사람을 위해 한글 번역문 옮겨 놓습니다.
여헌 장선생 신도비명
선생의 휘는 현광이며, 자는 덕회, 별호는 여헌이며, 성은 장씨이다. 고려의 상장군인 금용이 비로소 옥산에 적을 두었다. 12세에 부윤 안세라는 분이 계셨는데, 부윤은 좌윤 중양을 낳았고 좌윤은 장령 수를 낳았는데, 곧은 도로 알려졌으며 이 분은 선생께 6세조가 된다. 증조는 좌승지에 추증된 준이며, 조부는 이조참판에 추증된 계증이고, 부친은 이조판서에 추증된 열이다. 어머니는 정부인에 추증된 경산 이씨로 제릉 참봉 팽석의 따님이시다.
명나라 숙황제 가정 33년(1554) 정월 계해일에 선생께서 나셨다. 나신 지 8년 만에 선부군께서 돌아가셨다. 17, 8세에 학문이 깊고 통달하였으며, 경술에 침잠하여 『우주요괄십도』를 지었다. 23세에는 재학으로 천거되었다. 허잠1) 공이 성주목으로 나가게 되었는데 한강 정선생2)을 찾아뵙고 남방의 학문을 좋아하는 선비에 대하여 물어보았다. 정선생이 말하였다. “공자의 문하에는 학문을 좋아하는 사람이 안자 한 사람뿐이었으니 이 일을 어찌 쉽사리 말하겠소. 장현광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학문을 추구하고 도에 뜻을 두었으니, 훗날 우리의 스승이 될 사람은 이 사람일 것이오.” 28세에 모부인이 돌아가셨는데 상제를 손수 기록한 것이 있다. 류문충공3)이 일찍이 누차 주상께 천거를 하였는데, 서로 만나보고는 아들 진을 보내어 취학하게 하였다. 만력 22년(1594) 봄 예빈참봉에 제수되었다. 가을에 또 제릉참봉에 제수되었지만 모두 출사하지 않았다. 이듬해 특별히 보은현감으로 서임되었다. 문인 정사진이 출처의 올바른 도리에 대하여 여쭈니 선생께서 말씀하셨다. “학문을 하고서 여력이 있으면 벼슬을 하고,4) 예의로 대하는 뜻이 있으면 벼슬하며, 집안이 가난하고 양친이 늙었으면 벼슬한다. 벼슬을 하지 않는 경우에는 두 가지 부끄러움이 있다. 그 몸을 깨끗이 하고자 큰 인륜을 어지럽히는 것이 첫 번째 부끄러움이다.5) 그 명성을 이루고자 성가를 추구하는 것이 두 번째 부끄러움이다.” 이미 현으로 가자 부로들과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모임을 갖기로 언약을 하고 각자 백성의 병폐와 과실을 말하게 하여 바로잡는데 보탬이 되도록 하였다. 효제를 돈독히 하고 염치를 면려하였으며, 덕행을 높이고 나쁜 풍속은 물리쳤으니 이는 모두 풍속을 변화시키고 풍속을 아름답게 한 큰 법도였다. 2년째 되던 해에 벼슬살이를 즐거워하지 않아 사직하고 돌아갔다. 함부로 관직을 버린 일 때문에 법대로 다스리고자 하였으나 경연관이 임금께 아뢰어 풀려나게 되었다. 여름에는 영양과 입암의 천석에서 노닐었다. 29년(1601)에 주상께서 경서를 교정하라는 명을 내려 선생께서 부름을 받았다. 현과 도에 명하여 말을 대주어가며 또한 연이어 부름을 받았으나 그때마다 모두 취임하지 않았다. 울에 공조좌랑에 제수되어 주역을 교정하는 일에 참가하였다. 형조좌랑으로 옮기어 제수하였는데 사직하고 돌아갔다. 31년(1603)에 용담현령에 제수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또한 의성현령에 제수되었으나 몇 달 만에 고을에 변고가 생겨 스스로 탄핵하고 돌아갔다. 36년(1608)에 광해군이 새로 즉위하자 합천군수에 제수하였다. 38년(1610)에는 사헌부지평에 제수하였으나 모두 취임하지 않았다. 43년(1615)에는 관의를 편수하였다. 48년에 정선생께서 돌아가시자 선생은 여러 제자들과 함께 상례를 강하였다. 가을에 현황제가 붕어하시자 선생은 거리에 모여 울면서 말씀하셨다. “우리 동국의 백성들이 임진년과 계사년의 난리 때부터 아비와 자식이 각자의 도리를 다하여 오늘에까지 이를 수 있게 한 것은 황제 폐하의 힘이었다.” 천계 3년(1623)에 인조대왕께서 큰 국난을 극복하자 제일 먼저 유일을 찾았다. 선생은 지평으로 부름을 받았으나 늙었다는 이유로 사퇴하였다. 특별이 성균사업의 관직을 내렸는데, 국조 초기에는 이 관직이 없었으나 임금께서 즉위하면서 특별히 징사들에게 설치하여준 것이다. 또한 지평으로 바뀌었으나 중도에 병으로 사직하였다. 이듬해 봄에 장령으로 승진발령이 났다. 이때 이괄이 난을 일으켜 임금께서 남쪽으로 피신하셨다가 이괄이 패하여 죽자 어가가 환도를 하였다. 선생은 행재소에 미치지 못하였다가 나중에야 도읍에 이르렀는데 또한 관직을 제수하는 명이 있었다. 임금께서 즉시 불러서 만나보고 정치하는 법을 물으셨다. 선생이 대답하였다. “이는 전하께서 한 마음으로 진작시키어 날로 새롭게 하는데 있습니다.”6) 임금께서 훌륭하다고 칭찬을 하고 특별히 예물을 두터이 내리셨다. 얼마 후에 집의에 임명되었는데 선생께서는 상소를 올려 사퇴하였다. 인하여 공손하고 검소하며 기용을 절약할 것과 덕을 도타이 하고 형벌을 줄일 것을 아뢰었다. 이미 나아가 사례를 하니 임금께서 또 불러서 만나보고는 사람의 마음과 세상의 도가 합치되기 어려움을 말하였다. 선생께서 말씀하셨다. “예로부터 변화시킬 수 없는 사람의 마음은 없으며 또한 돌릴 수 없는 세상의 도도 없습니다. 이는 성군과 현명한 재상이 더불어 해나가는데 있을 따름입니다.” 임금께서 말씀하셨다. “안팎의 사람의 마음이 원망함이 많으니 이를 어쩌면 되겠소?” 선생께서 대답하여 말하였다. “사방은 이미 지난 날의 잔폭한 정치로 곤핍해졌사와 근심과 고통이 아직 되살아나지 못하였습니다. 도성은 막 큰 난리를 겪은지라 소란스러워져서 아직 안정되지 못하고 서로 의심만 생겨나고 있습니다. 임금님께서는 슬프고 측은히 여기는 교시를 내리시어 부지런히 구휼할 뜻을 보이신다면 사람의 마음은 안정될 것입니다.” 임금을 모시는 사람 가운데 모반자를 가지고 말하는 사람이 있었다. 선생께서 말씀하셨다. “어리석은 백성으로 하여금 큰 법도 안에서 은연중에 감화되게 한다면 모반자는 절로 안정될 것입니다. 도성은 사방의 근본이니 도성의 백성이 안정되면 사방이 안정될 것입니다.” 임금께서 존중하여 예물을 내림이 더욱 두터웠다. 특별히 공조참의에 임명하고 임금께서 말씀하셨다. “작은 관직이라고 사퇴하지 말라. 마땅히 크게 쓰리라.” 훗날 특별히 주강에 입시하라는 명이 내렸으며 강이 파하자 세자가 뵙기를 청하였는데 빈례로 대우하였다. 이미 물러나 상소문을 올리고 돌아갈 것을 아뢴 후 즉시 도성문을 나섰다. 임금께서 연이어 뒤쫓으라는 명을 내리셨으나 선생께서는 이미 떠나시니 경기의 관아에 말을 대주어 호송하라고 명하였다. 이후 연이어 이조참의와 동부승지에 임명되었는데 모두 취임하지 않았다. 6년에 형조참판에 임명되었는데, 당시 계운의 상을 당하였는데 마침 소명이 있었다. 이미 입조하여 사례를 드리고 상소를 올려 사직하니 대사헌으로 관직을 옮겨주었는데 잇달아 상소를 올려 극력 사퇴하여 세 번이나 아뢰어 겨우 허락하였다. 이미 졸곡을 끝나고 떠나려할 즈음에 상소문을 올려 건극의 근본을 아뢰었다. 말씀하셨다. “뜻이 낮으면 도가 낮고, 도가 낮으면 사업이 낮습니다. 사업이 낮으면 사람들이 복종하지 않고, 사람들이 복종하지 않으면 이웃나라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천지의 귀신도 또한 보우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튿날 임금께서 불러다 보니 또한 하늘의 덕과 왕도에 대하여 수백 언을 올렸다. 사직하고 나가는데 임금께서 전송을 하면서 “세자를 만나 교회하도록 하라.”고 하셨다. 선생이 세자에게 아뢰어 말하였다. “세자께서는 연세가 옛 사람이 학문에 뜻을 둔 나이에 이르렀사오니 학문에 힘써 뜻을 세우는 것이 급선무라 하겠습니다.” 이듬해에 오랑캐의 침략이 있자 영남호소의 직책에 임명한다는 명이 있었다. 오랑캐가 물러가자 상소를 올려 정치가 피폐해졌음을 아뢰고 이어서 사리(私利)와 편사(偏邪)를 경계하는 글을 지어 올렸다. 8년에는 이조참판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상소를 올려 말하였다. “전하께옵서는 위급함을 잊지 말고 환란을 잊지 않으며 망함을 잊지 않을 수 있은 연후라야 임금의 도를 다할 수 있습니다. 정신들은 자신을 잊을 수 있고 자기의 집을 잊을 수 있으며 그 사적인 것을 잊을 수 있은 연후라야 신하의 도를 다할 수 있습니다.” 임금께서 말씀하셨다. “그대는 덕망이 오래 된 원로로 매번 조정에서 함께하려 하나 그리 될 수 없으니 어찌 과인이 어둡고 정성이 박한 소치가 아니겠는가? 그대를 상하의 본보기로 삼아 세자에게 교훈을 주고자 하는 것이니 직무를 지우고자 함이 아니다.” 10년에는 또한 대사헌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그때 이귀와 최명길 등이 장묘를 추존하자는 논의를 내었는데 선생이 상소문을 올려 추존하는 것은 예가 아니라면서 말하기를 “손자가 조부를 잇는 것은 끊어진 것을 잇는 상도입니다.”라 하였다. 12년에 또 대사헌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그해 5월에 인목대비의 상을 당하자 상소하기를 “양음(亮陰) 중에는 지극한 덕을 채우고 길러 큰 근본을 세워 하늘에 영원한 명을 비는 근본으로 삼아야 합니다.”라 하였다. 이듬해 7월에 인정전에 지진이 일어나니 선생께서는 상진(上震) 하진(下震)의 16괘를 바쳐 수양하고 반성할 경계를 진술하였다. 14년에 특별히 자헌대부가 더하여지고 얼마 후 공조판서에 임명되었으나 또한 병으로 사퇴하였다. 이때 장묘를 합사하는 예를 가지고 논쟁을 벌인 사람들이 모두 죄를 입으니 선생이 상소를 올려 말하였다. “전하께옵서는 낳아주신 분에게 효성을 드린 것이 이미 극진하였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또한 그것이 예의에 지나친 것이 아닌가 의심하고 있사옵니다. 하물며 종묘에 들이는 것은 옛날에도 근거할 만한 예가 없사옵니다. 이는 효를 행하고자 하면서도 효를 상하게 하는 것이며, 인을 행하고자 하면서도 도리어 인을 해치는 것입니다.” 임금께서는 그 말을 듣지 않으셨다. 또 이듬해에 우참찬에 임명되었다는데 취임하지 않았다. 16년에 지중추에 임명되었으며 소명이 있었다. 예우하는 뜻이 매우 지극하였으나 선생은 중도에서 상소를 올리고 병으로 사퇴하였다. 임금께서 약과 물자를 내리니 선생께서는 또 상소를 올리어 사례하였다. 아울러 조정의 화해롭지 못한 폐단을 누백 언 말하니 대강은 이러하다. “우주 사이에는 하나의 도리가 있을 따름입니다. 선과 악이 각기 하나의 무리를 이루고, 사(邪)와 정(正)이 각기 하나의 무리를 이루며, 옳고 그름이 각기 하나의 무리를 이룹니다. 선과 악, 사정, 옳고 그름이 함께 서고 함께 짓고 함께 행하여지며, 이 도와 이 이치가 어긋나지 않는다는 것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전하께서 궁극적인 것을 세운 것이 미진하와 뭇 신하들이 그 귀의할 곳을 얻지 못한 것입니다.” 그해 12월에 남한산성의 변고가 일어났다. 선생께서는 행재소가 막히어 명령이 행하여지지 않음을 생각하여 주군의 부로들에게 통지하여 각기 군사를 일으켜 충성을 다하게 하고, 또한 힘껏 군량의 일을 도왔다. 17년 2월에 남한상성의 포위가 풀렸다는 말을 듣고 선생께서는 선영의 하직하고 입산에 들어가 거처하셨다. 입암은 동해가에 있으며, 입암을 고쳐서 입탁암이라 하였는데 대체로 뜻을 기탁한 것이다. 7월에는 문인들에게 심의를 만들라 명하셨다. 9월 임신일에 선생께서 만욱재에서 돌아가시니 향년 84세이시다. 전날 저녁에는 큰 우레와 비가 내렸으며, 산이 무너지고 냇물이 넘쳤다. 부고가 나자 임금께서 조회와 시장을 이틀 동안 파하게 하였으며, 본도에 명하여 상사를 돕도록 하였다. 을미일에 발인하여 고향으로 돌아갔는데 널을 따르는 선비가 오백여 명이나 되었으며, 주상께서 특별히 제사를 내려주셨다. 12월 계유일에 금오산 아래에 있는 오산동의 동쪽을 바라보는 언덕에 장사지냈다.
전취부인 정씨는 참찬에 추증된 괄의 따님인데 일찍 돌아가셨다. 딸을 하나 두었는데 사위는 참봉 박진경이다. 후취부인 송씨는 충순위 정의 따님이신데 선생보다 8년 일찍 돌아가셨다. 아들이 없어서 종제인 현도의 아들 응일을 데려다가 후사로 삼았는데, 대사성이 되었다. 박진경은 아들 다섯을 나았는데 기와 황,협, 징과 타인데, 황은 현감을 지냈다. 또한 세 딸의 사위는 임경윤과 이현,조하영인데, 이현은 교관이다. 응일은 아들 셋을 낳았는데 영과 건, 임이며, 영은 별좌이고 건은 지평이다. 선생께서 돌아가시자 임고와 천곡, 금오에서 모두 제사를 받들고 있다. 부지암과 입암, 원당에는 모두 사당이 있다. 효종 6년(1655) 경연관 오준이 임금께 아뢰어 좌찬성에 추서하였다. 3년 후에는 경연관 오정위가 다시 임금께 아뢰어 영의정이 더 추증되었다. 태상에게 명하여 문강이란 시호를 내리게 했는데, 도덕이 있고 널리 들은 것을 문이라 하며, 연원이 유통된 것을 강이라고 한다.
선생께서는 깊이 침잠하여 혼후함이 쌓이고 높고 깊고 넓고 컸으나 보이지 않게 감추고 숨기는 것을 귀하게 여기셨다. 이미 학문이 넓고 덕이 갖추어져, 가까이는 심술과 인도의 법도와 멀리는 만사와 만물의 타당함에서부터 미루어 하늘의 소리가 없고 냄새가 없음에 이르기까지 구하여 궁구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화하게 하여 덕을 이루고, 인으로 사물을 이롭게 하는데 사물을 이롭게 하는 데는 독신자보다 급한 것이 없다. 그러므로 “홀아비와 과부를 불쌍히 여기고 고아와 독신자를 구휼하는 것이 천지간의 큰 덕이며 내 마음의 전체이다.”라 하셨고, 또 말씀하시기를 “천지간의 일 가운데 사람이 당연히 해야 할 일이 아닌 것이 없다.”라 하였다. 경계하여 말하기를 “마음을 비우는 것은 만 가지 실함의 곳집이며, 고요함은 만 가지 변화의 터전이고, 곧은 것은 만 가지 사업의 줄기이며, 겸손은 만 가지 이익의 자루이고, 검소는 만 가지 복의 두터움이다.”7) 인조대왕 때 선생이 부름을 받아 서물에 이르렀는데 상국인 이 문충공이 선생을 찾아 뵙고 시정 중 급선무가 무엇인지 물어보았다. 선생께서는 다른 대답 없이 다만 말하기를 “한 마디만 하면 오늘날 나라의 큰 근심거리는 의심하는데 있습니다.”라 하였다. 상국이 물러나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어질도다! 시국을 살피는데 뛰어난 사람이라 하겠도다.”라 하였다. 당시의 공신들이 급작스레 대권을 잡다보니 마음속으로 두려워하고 미워하여 꺼리는 자들은 모두 죽여버렸다. 사대부들은 두려워하여 발을 포개고 곁눈질을 하였으며, 사람들의 마음은 크게 허물어졌다. 선생이 불리어 대면함에 바친 말 중에는 이런 뜻이 많다.
선생께서 저술하신 것은 매우 많아 집안의 자제라도 또한 그것을 알지 못하였다. 『역학도설과 『도서발휘, 『역괘총설, 『경위설, 『만학요회』, 『우주설』과 같은 것들은 선생이 돌아가신 후에 곧 출간되었다. 또한 『우주요괄록』과 『의사질모계』, 『문집』 등 여러 책이 있다.
명문을 지어 말한다.
博達之學 널리 통달한 학문이요,
利物之仁 사물을 이롭게 하는 인이요,
深厚之德 깊고 두터운 덕이로다!
邃而通 깊고도 통하며,
和而敦 온화하면서도 도탑고,
儼而翼 근엄하시면서 삼가시도다!
嗚呼 아아!
可以權 공평하다 하겠으며,
可以動 옮길 만하며,
可以式 법도 될 만하네!
1) 허잠(許潛): 자는 경량(景亮)이며 호는 한천(寒泉). 본관은 양천(陽川)이다. 품행이 바르고 어진 것으로 천거되어 관직에 나섰으며, 성주목사가 된 것은 1595년의 일이다. 청백리에 녹선되었으며, 시호는 정민(貞敏)이다.
2) 한강정선생(寒岡鄭先生): 정구(鄭逑:1543~1620)를 가리킴. 조선 중기의 문신이면서 학자로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도가(道可)이며 성주(星州) 출신이다. 김굉필(金宏弼)의 외증손으로 판서 사중(思中)의 아들이다. 성주 이씨와 혼인한 인연으로 성주에 정착하였다. 남명(南冥) 조식(曺植)과 퇴계 이황(李滉)의 문하를 넘나들면서 성리학을 배웠다. 경서(經書), 병학(兵學), 의학(醫學), 역사(歷史), 천문(天文), 풍수지리(風水地理)에 통달하였고, 그 가운데 예학(禮學)에 특출하였다. 인조반정 이후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문목(文穆)이다. 성주의 회연서원(檜淵書院) 증에 제향되었다.
3) 류문충공(柳文忠公): 서래(西厓) 류성룡을 말함.
4) 『논어』「자장(子張)」편에 나오는 말.
5) 역시 『논어』「자장」편에 나오는 말.
6) 『대학』 전(傳) 1장에서 신민(新民)을 해석하면서 인용한 탕(湯)임금의 반명(盤銘)에 나오는 말.
7) 『여헌샌생속집(旅軒先生續集)』 권5 잡저(雜著) 「표제요어(標題要語)」에 나오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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엣글을 풀어쓰다 보니 문장이 약간씩 어색한 곳이 있지만 대단한 어른을 조상으로 둔 뿌듯함은 있네.
계속 요청하신 문서에 문제가 있어 열 수 없습니다 라고 나오는데....
아래쪽의 "첨부된 파일이 1개 있습니다"에 커저를 대고 누르면 한글 파일 "여헌선생제자급문록.hwp (41kb)"이 나타나고 그곳을 누르면 "바이러스 체크 후 파일받기"가 나오며, 네모 안의 파일받기를 누르면 "이 파일을 열거나 저장하시겠습니까?"란 말이 나옵니다. 그러면 "파일다운로드"가 나오고 열고 싶으면 "열기"를 저장하고 싶으면 "저장"을 누르면 됩니다. 사모누나는 되는 것 같은데... 그러니까 읽어봤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