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마 가는 길에 만난 설국
글무늬 문학사랑회 회장 최옥자
되풀이 되는 권태로운 일상은 새로운 삶을 추구하게 한다,
지난 시간 즉 ‘역사를 알아야 다름이 가능하다.’
오늘이 어제와 같지 않다 는 말이 채찍질이 되어 먼저 이 땅에 살다간 이들의 자취(세계문화유산, 자연유산)를 따라 자유여행 길에 올랐다.
일본 오사까 난바에 있는 호텔에 투숙하며 전철을 이용하여 나라, 교토, 고야산에 이어 고베에 있는 아리마 온천을 찾았다.
일본은 철도망이 시골 구석구석까지 들어가 있다.
신간선이 동맥이라면 전국 방방곡곡까지 스며든 지선은 실핏줄이다.
아리마 온천!
이 온천은 아무리 일정이 빽빽하다 해도 외면할 수 없는 곳이다.
일본의 3대 온천 중 하나로 이 지역과 인연이 깊던 다이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애용하던 찜질방을 복원해 놓았다니 그 시대의 풍취가 궁금하였다.
전철로 두어 시간 소요되는 이 길은 특히 등산열차를 방불케 한다고도 명성이 자자하다.
온천을 향하는 산요히메지 역에 도착하니 해피 트레인이라 불리는 내, 외장이 모두 정갈하고 아름다운 현대 판 전철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산을 굽이굽이 타고 오르며 창밖을 스치는 푸르른 산골 풍경이 무척 아름다웠다.
산골, 나는 이곳에 하얀 눈이 펄펄 내려 쌓이는 설경을 상상해 보며 문득 일본 소설 <설국>에 빠져든다.
설국!
"국경의 긴-터널을 빠져 나오자 눈의 고장 이었다” 로 시작되는 이 소설은 기와바타 야스나라가 에치고유자와 온천에서 쓴 중편소설로 1948년 간행되었다.
일본의 근대 서양문학의 정점을 이루는 대표작으로 노벨상까지 수상하였다.
주인공 시마무라는 부유한 가정에서 일본무용을 전공한 사람이다.
하지만 진보적인 서양문학에 눈을 뜨게 되자 일본무용이 편협하다는 생각에 공부를 그만두고 서양문학을 좀 더 익히기 위해 기차를 타고, 눈이 하얗게 쌓인 온천마을로 여행을 떠난다.
그곳에서 고마코를 만났고 그들은 각각 다른 상대를 가졌건만 서로에게 접근한다. 그러나 시마무라는 고마코와의 사랑이 현실적으로 다가오자 온천마을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시마무라가 추구한 것은 현실적 사랑이 아닌, 도회의 권태로운 일상을 벗어나게 해주는 환상이었던 것이다.
<설국>은 일본문학 전통을 그렸으며 그 속에 나타난 미의 의식은 일본의 전통미 라는 것이다.
일본이 전통에는 연결미학이라는 것이 있는데 일본인은 전혀 다른 것을 가지고 그것과 처음의 것을 대립시켜 새로운 것을 낳기보다 그 연계성에 더 초점을 맞춘다.
시마무라는 삶에 대한 허무의식으로 가득 차 설국 방문 후에 도쿄로 돌아가는 기차 안에서도 멍한 상태에 빠져 창문 사이로 내리는 함박눈을 바라본다.
그의 허무의식은 어디에서 나온 것인가.
당시 일본에는 서구 문물이 빠르게 유입되고 있었다. 이러한 근대화와 서양화의 과정에서 지금까지 없던 새로운 가치들이 부상하게 되고, 전통적 기존의 가치와는 점점 단절되어 갔다.
서구의 가치체계와 일본의 전통적 가치체제가 충돌함으로써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삶에 대한 허무의식이 생겨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원래 존재하던 전통문화를 뒤로 하고 새로운 서구의 근대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해 가는 과정에서 삶의 확고한 가치체제를 찾지 못하고 현실과는 동 떨어진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나오게 된 것이다.
시마무라가 바로 그러한 존재였다.
근대화와 몇 차례 전쟁을 겪으면서 일본 사회는 심각한 이념적, 가치관의 갈등을 겪게 되고 이러한 상화 속에서 쓰여진 <설국>은 일본 전통 문화의 계승을 유지하고 싶기 때문이라고 부언하며 과도기에 겪는 갈등을 등장인물들의 끊임없는 대화 속에 반영시키고 있다.
아이들 잘 키우고 살림 잘하는, 오로지 가정사에 온 가치관을 부여하고 살던 내가 어느 순간 한계점에 부딪히고 사회적으로 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을 겪으며 한 때 나도 허무에 빠져 허우적거린 적이 있지 않았던가. 확고한 가치체제 결핍의 결과였다.
아리마구찌 역에 내리니 아리마 온천가는 차량이 ‘부릉 부릉’ 시동을 걸어놓고 대기하고 있었다.
히데요시가 자주 애용했다는 찜질방은 찾을 길이 묘연했다.
우리는 차량이 안내해준 일본 유황 온천의 원조라는 금탕에 들어가 뜨거운 온천물에 몸을 담갔다.
“유황 온천물에 3번 들어가면 기절해요.” 현지에서 만난 한국 여행객의 말이 맞았는지.
황토를 풀어 놓은 듯 한 탕에 한번 들어갔다 나왔건만 어찔하다.
아리마 온천으로 향하면서 내내 설국 시대와 그 안에 존재하던 이들의 삶을 떠 올려 설국으로 찾아 드는 것만 같던 환상과 그에 따른 허무감을 그만 뜨거운 온천물에 활활 풀어내야 할까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