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주(石洲) 권필(權韠, 1569~1612)
나는 어떤 사람인가
나는 어떤 사람인가
시도 사랑하고 술도 사랑한다네....
내 붓은 내 손을 떠나지 않고
내 잔은 내 입을 떠나지 않네.
조선 당대 최고의 시인으로 인정받던 인물 입니다.
서울 서대문 밖 반송방에서 태어나 마포 현석촌에 살았습니다.
그의 호, 석주는 현석촌에서 딴 것입니다.
19살에 과거(소과)를 봐서 급제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합격이 취소됐어요.
그가 써낸 글 가운데 딱 한 글자가 문제가 돼서 최종 탈락한 것입니다.
절대 써서는 안 되는 글자,
이를테면 임금의 이름자 같은 걸 실수로 적었던 것 같습니다.
이후 평생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습니다.
합격 취소가 속상해서 과거를 포기한 것이 아닙니다.
조정 세력 간의 다툼, 분탕에 실망하고 좌절하면서 재야에 남기로 작정한 것 같아요.
그의 성정도 관직과 잘 맞지 않았습니다.
권필이 말했습니다.
“나는 성품이 소탄(疏誕)해서 세상과는 맞지 않는다.
그래서 자못 예법을 중시하는 인사들이 배척하는 바가 되었다.”
‘소탄’이란 ‘태생적으로 얽매임이 없고 자유로움’이라는 뜻입니다.
그는 또, 우러나오지 않으면, 그 누구에게도 숙이지 않았어요.
숙이는 척도 안 했습니다.
석주 권필 유허비는 백련사 가까운
강화도 송해면 하도리에 있다
권필이 강화와 인연을 맺은 계기는 임진왜란입니다.
전쟁이 터지자, 강화로 피란 와서 머물렀습니다.
이후 오가기를 반복하다가 1597년(선조 30)에 강화에 정착했습니다.
권필이 강화에 왔다는 소문이 나면서
곳곳에서 배움을 청하는 이들이 몰려들었습니다.
자연스레 선생님이 되었죠.
제자들을 열심히 가르쳤습니다.
또 강화 주민들 삶에 보탬이 되려고 애썼습니다.
시나브로 강화의 인물이 되었습니다.
명나라에서 사신이 온다네요.
고천준이라는 이가 대표인데 학문이 높고 시로도 명성이 자자한 사람입니다.
선조는 예조판서 이정구를 원접사로 임명합니다.
원접사는 사신을 맞이하고 접대하는 책임자입니다.
1601년(선조 34) 11월, 조정. 이정구는 선조에게 권필을 영접단원으로 데려가게 해달라고 청합니다.
선조가 허락해서 권필이 이정구 팀에 합류하게 됩니다.
선조, 허락은 했는데, 정작 권필이 누구인지 모릅니다.
모를 수밖에 없죠. 관리가 아니라 강화도 시골 마을에 묻혀 사는 선비였으니까요.
사신 맞이는 글 잘하는 이들이 해야 합니다.
조정에 문장가가 쌔고 쌨습니다.
그런데 왜 이정구는 벼슬도 없는 권필을 뽑아 올린 것일까?
호기심이 발동한 선조, 권필의 작품을 구해오라고 지시합니다.
아랫사람들이 권필의 시 몇 편을 베껴서 올렸습니다.
오마이갓! 선조는 깜짝 놀랐습니다.
권필 작품의 수준이 어마어마한 거예요.
기쁜 마음에 특별히 권필에게 벼슬을 내렸습니다.
말직이었으나 그렇게 관직 생활을 시작해서 커가면 되는 겁니다.
선조 마음에 쏙 들었으니, 앞날도 순조로울 겁니다.
권필은 가난합니다.
“남은 송곳 꽂을 땅도 없다
하지만
나는야 애당초 송곳도 없네”
이런 시를 남긴 권필입니다.
이제 살림이 좀 피게 됐어요.
그런데 웬걸. 권필이 벼슬을 거절했습니다.
하늘의 별 따기만큼 어려운,
그 벼슬을 준다는 데 길가 돌멩이 걷어차듯 차버렸습니다.
1603년(선조 36), 여전히 권필을 기억하는 선조가 다시 벼슬을 내렸습니다.
동몽교관! 아이들 가르치는 일입니다.
이번엔 권필이 사양하지 않았어요.
가장인데 집안 살림도 생각해야지.
부인은 속으로 만세를 불렀을 겁니다.
그런데 얼마 뒤에 사표를 냅니다.
관복 갖춰 입고 예조에 나아가 윗분들에게 인사드려야 한다는 얘기를 듣고 미련 없이 벼슬을 버렸습니다.
절은 고요해 중은 막 선정에 들고
산은 맑으니 달빛이 더욱 많아라
성근 반딧불이 어지러운 풀에 붙었고
어둑한 새는 깊은 가지에 모였어라
씩씩하던 뜻은 외로운 검만 남았고
곤궁한 삶의 시름에 단가를 부르노라
서울에는 형제들이 있건만
소식이 어떠한지 모르겠구나
‘절’은 고려산 백련사입니다.
권필이 자주 가던 곳이에요.
스님도 잠든 깊은 밤 백련사,
잠 못 들고 시름에 빠진 권필의 뒷모습이 보이는 듯합니다.
너는 아느냐, 백성의 고통을,
선조가 세상을 떠나고 광해군이 즉위했습니다.
이이첨이 떴습니다. 완전 실세 중의 실세입니다.
수많은 이가 이이첨에게 잘 보이려고 애씁니다.
이이첨의 줄을 잡으면 출세가 당연한 시기였습니다.
그런 이이첨이 권필을 가까이하고 싶어 했습니다.
한번 숙여주면 ‘인생 역전’이 될 터.
그러나 권필은 딱 잘랐습니다.
얼굴조차 마주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언젠가 마주칠 뻔했을 때 권필은 담장을 넘어 가버렸습니다.
권필,
세상에 대한 관심 끊고 자기 공부만 하며 그렇게 산 것은 아닙니다.
누구보다 치열하게 세상을 걱정했습니다.
특히 고달픈 백성의 처지를 염려했습니다.
민본(民本)을 외치며 백성 등쳐먹는 지배층의 위선과 부패를 날카롭게 공격했습니다.
그의 총칼은 붓이었어요.
그러다 언제 죽임을 당해도 이상하지 않은 세상,
그래도 권필은 시로 싸웠습니다.
고관대작 집들이 궁궐을 둘러싸고 있네
노래 부르고 춤추며 잔치만 일삼고
값비싼 갖옷에 살찐 말 다투어 사들이네
잘 사느냐 못 사느냐 영욕을 따질 뿐
옳으냐 그르냐는 문제 삼지도 않으니
어찌 그들이 알겠는가 쑥대지붕 아래에서
추운 밤 쇠덕석 덮고 우는 백성들을.
*갖옷- 오늘날 모피코트(짐승가죽으로 만든 옷-구의라고도 함)
궁류시를 남기고
1610년(광해군 2), 42세 권필은 강화도 생활을 정리하고 한양으로 거처를 옮깁니다.
강화와 인연을 맺은 지 거의 20년 만입니다.
그런데 강화 떠난 지 2년 만에 세상을 뜨고 말아요.
권필다운 마지막이었습니다.
그의 마지막을 따라가 봅시다.
■권필 부부 묘(경기 고양) - 임숙영
임숙영이라는 사내가 있었어요.
광해군 재위 3년 때인 1611년에 과거에 급제했는데,
그 옛날 권필처럼 합격이 취소될 상황입니다.
‘딱 한 글자’가 아니라 그가 써낸 글 전체가 문제가 됐습니다.
임숙영이 낸 답안지 내용이 대략 이러합니다.
“지금 조정은 비굴한 아부쟁이들이 등용되고 벼슬도 오르고 있다.
왕비와 후궁의 친척들이 특히 그렇다.
임금이 관직을 내리기도 전에 이미
궁 밖에서는 중전의 친척인 누가 임명될 것이다,
후궁 일족인 누가 임명될 것이다, 소문이 돈다.
그런데 소문에 오르내리던 그 사람들이 정말 그 관직에 임명된다.
해당 기관에서 이를 막지 못하고 대간들 역시 논하지 못하니
이것이 바로 정의가 행해지지 않는 까닭이다!”
아닌 게 아니라 외척의 횡포가 만만치 않았습니다.
왕비의 친오빠인 유희분이 특히 그랬어요.
분노한 광해군은 임숙영 급제를 취소하라고 명하고,
신하들은 안 된다고 버티고, 이런 상황이 되었습니다.
권필이 시를 지었습니다.
궁류시(宮柳詩)라고 합니다. 궁궐 궁(宮), 버들 류(柳).
직역하면 궁궐 버들입니다만,
내포된 의미는 궁궐의 유씨(柳氏)들입니다.
궁궐 버들 푸르고 어지러이 꽃 날리니
성 가득 벼슬아친 봄볕에 아양 떠네.
조정에선 입 모아 태평세월 하례하나
뉘 시켜 포의 입에서 바른말 하게 했나.
‘봄볕’은 광해군, ‘포의’(벼슬 없는 선비)는 임숙영을 빗댄 것입니다.
궁류시로 권필은 완전히 찍힌 몸이 되었습니다.
시는 널리 퍼져나갔습니다.
얼마 후 엉뚱한 역모 사건이 일어나고
그 사건에 연루된 사람 집에서 권필의 궁류시가 나왔습니다.
졸지에 권필이 역모 세력과 한패로 엮였습니다.
끌려갔습니다.
광해군이 직접 국문했습니다.
매는 가혹했고 몸은 속절없이 망가졌습니다.
사형을 겨우 면하고, 함경도 경원 유배형에 처해졌습니다.
유배길, 권필 보려고 벗들이 동대문 밖에 모였습니다.
타는 목 축이려 벗들이 내민 송별주를 마시다 쓰러진 권필,
그렇게 허무하게 생을 마감했습니다. 1612년(광해군 4), 그때 권필 나이 44세였습니다.
그가 죽던 날, 강화 송해 그의 집 마당, 만발한 도화 꽃잎,
붉은 비 내리듯 와스스 쏟아져 내렸습니다.
이제 권필의 시 한 편 더 소개하며 마무리합니다.
食吾田(식오전) 내 밭에서 밥 먹고
飮吾泉(음오천) 내 샘에서 물 마시네.
守吾天(수오천) 내 분수를 지키다가
終吾年(종오년) 내 삶을 마치리.
〈강화투데이〉 2023.8.15. 제44호.
권필 유허비와 묘갈명 해석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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