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의 홍삼이 고려시대 숙삼으로부터 출발하여 조선조의 파삼 단계를 거치는 동안 발전된 기술축적의 결과로 지금에 이른 것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그러나 홍삼이란 이름이 언제부터 불려졌는지에 대한 정확한 고증은 어렵다. 또한 오늘날의 홍삼과 당시의 홍삼이 제조과정이나 성분에서 동일한 것인지, 다르다면 차이점은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명확한 기준을 제시하기 어렵다. 기록이 제대로 남아 있지 않은 때문이다.
○…그러나 여러가지 측면을 종합하여 홍삼의 등장시기와 배경을 살펴볼 수는 있다.우선 가공법의 발전과정에서 기존의 숙삼과는 조금 다른 형태를 갖는‘익힌 삼’이 등장했으리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구체적으로는 열탕에 쪄서 익히는(煮熟) 방법에서 증기로 쪄서 익히는(蒸熟) 방법으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홍삼이란 새로운 이름이 붙여진 것으로 보인다.
○…조선왕조실록에 등장하는 최초의 홍삼이라는 이름은 정조 21년의 일이다. 정조 재위기간은 고려인삼의 변혁기였다. 조선조초기부터 수요에 따르는 공급의 현저한 불균형을 보이던 자연생 삼의 산출은 임진란을 겪으며 급격히 떨어지기 시작하여 마침내는 고갈상태를 보이기 시작했다. 이같은 현상은 자연스럽게 재배삼의 등장을 부추겼다. 농민 사이에 자발적 재배기술이 축적되기 시작했고 조정이 재배를 독려하기도 했다. 현종2년(1660) 양직묘삼농법(養直苗蔘農法)을 파급시켜 인삼의 농작물화를 추진했던 정책이 그 대표적인 예다. 이같은 움직임은 숙종, 영조 때를 거치며 규모를 키웠고 마침내 영조, 정조 때에 이르러 인삼의 재배법은 일반화되어 대량 생산체제의 기반을 형성했다. 영조 원년(1724년)에는 일복식 삼농법(日覆式蔘農法)이정착되어 개성을 중심으로 삼농가가 확산되기 시작했다.
○…이같은 과정을 통해 이룩된 인삼의 대량 생산은 자연 그 가공체계의 변화를 이끌어 소규모 저숙시설이 대규모 증숙방식으로 발전했다. 이때 방식을 달리한 열처리과정에서 기존의 숙삼(파삼)과 색깔과 견고성 등에서 차이를 보이는 새로운‘익힌 삼’이 등장했고 이를 기존 삼과 차별하여 부를 이름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 색깔이 붉은 빛 도는 갈색이었으므로 붉은 색의 범박한 형용인‘홍(紅)’이 삼 앞에 놓였을 것이라 추론해볼 수 있다.
○…홍삼이란 단어가 처음 등장하는 <정조실록>의 기록을 살펴보면 홍삼이 자연삼보다는 인공재배된 삼을 원료로 했으며 가공법의 변화로 익힌 삼의 형태가 달라졌음을 시사하는 대목이 있다.
비변사가 삼포절목(蔘包節目)을 올렸다. (중략) 처음의 절목에 홍삼(紅蔘)이니 조삼(造蔘)이니 하는 등의 말이 있었고 또 방외(方外)의 15인으로 계(契)를 만들게 하였는데, 임금이 그것을 보고 우의정 이병모(李秉模)에게 이르기를, “삼포의 절목에 대한 일을 일전에 빈대(賓對)에서하문하려고 하였다가 그렇게 하지를 못하였다. 대저삼이 귀해지면 은을 사용하고 은이 귀해지면 삼을 사용하는 것이 명분도 올바르고 일도 편리하니 행하기에 어려움이 없다.(중략) 요즘에는 은이 귀하고 삼이 천하다 해서 은과 삼을 서로 통용하도록 하였으니 이는 물정에 따른 것에 불과하다. 묘당(廟堂)이 만들어 낸 절목은 응당‘구례(舊例)에 의거하여 다시 삼포를 사용하되 은 또한 지난 날 징색(徵索)하던 시기와는 다른 만큼 삼포만을 사용할 필요가 없다. 하교대로 은과 삼을 아울러 충포(充包)토록 허락한다’고 했어야 하는데 지금 갑자기 홍삼이라는 명색(名色) 및 방외 15인에게 계를 만들게 한다는 등의 말을 주어(奏御)하는 문자에다 올렸으니, 이 절목은 은과 삼을 통용하게 하는 절목이 아니고 바로 가삼(假蔘)을 조작하여 저 나라에 속여 파는 절목이다. 체면으로 헤아려 보면 어찌 형편없는 것이 아니겠는가.삼의 빛깔은 누르고 흰데 지금 붉다고 하는 것은 가짜로 만든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리고 그
캔 것을 직접 충포하게 한다면 무엇 때문에 별도로 하나의 계를 설치해야 하는가. 더구나‘방외의 사람운운’한 것은 틀림없이 근래에 가삼(假蔘)을 조작한 무뢰배와 간세배(奸細輩)일 터인데 연못 속의 물고기속은 알 수 없다 하여 조정에서도 알면서도 모른 체하고 있다. 설령 법을 만들어 금지할 수는 없다 하여도 도리어 이익을 함께 하며 그 형세를 조작할 수 있겠는가.”(하략) -<정조실록>(정조 21년 6월 25일)
○…이 기록에서 홍삼의 등장배경을 알 수 있다.
우선‘요즘에는 삼이 천하다’는 말은 생산량이 급증했음을 뜻한다. 고갈상태인 산삼이 갑자기 많이 채굴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이 무렵에는 인공재배기술이 발전하고 대량 생산체제에 돌입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지금 갑자기 홍삼이라는 명색(名色) 및 방외 15인에게 계를 만들게 한다는 등의 말을 주어(奏御)하는 문자에다 올렸으니, 이 절목은 은과 삼을 통용하게 하는 절목이 아니고 바로 가삼(假蔘)을 조작하여 저나라에 속여 파는 절목이다.’는 구절에서‘갑자기 홍삼이라는 명색을 주어한다’는 표현은 홍삼이라는 낯선 이름이 왜 갑자기 수출품목에 올랐는가 의문스럽다는 뜻의 표명이다. ‘15인에게 계를 만들게 한다’는표현은 그해 3월 조정이 거상(巨商) 몇 사람에게 홍삼전매권을 주는 것을 골자로 한 시행책을 말한다. 이방침에 따라 송삼계(宋蔘契)가 조직되었다(송삼계는뒷날 조합 조직으로 발전하는 기반이 되었다). 이는 홍삼이 대량 가공됨에 따라 새롭게 형성된 절목에 대한 조정의 일괄적인 관리 필요에 따라 진행된 것으로보인다.
○… ‘삼의 빛깔은 누르고 흰데 지금 붉다고 하는 것은 가짜로 만든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라는 정조의 의심은 그 전에 제조되던 숙삼과 전혀 다른 삼의 등장을 입증한다. 그래서 임금은‘누르고 희어야 진짜 삼인데 어떻게 붉은 삼이 있는가, 그 삼은 가짜’라고 단정적으로 말하는 것이다. 처음 보는 명색(名索)에 임금은 조삼(造蔘)으로 의심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 전후의 문맥은 홍삼이 그 이전에 민간에서 제조되어 이름을 새로 해 불리기 시작했고 그 무렵에는 이미 많은 양이 유통되고 있었음을 드러낸다. 그렇기때문에 수출 품목을 충당하는 방안에 올려진 것이다.
○…이 기록에서 보듯 홍삼이란 이름은 조정이나 관리에 의해 붙여진 이름이 아니라 그것을 가공 제조하기시작한 민간에서 시작된 것으로 추론할 수 있다. ‘누르고 흰’삼에 대해‘붉은 빛’을 띤 삼의 가장 간명한 이름은‘홍(紅)’이었다. 인삼 재배와 홍삼의 본격 유통이 정조대를 전후해민간에서 성행하기 시작했다는 기록은 그 외에도 여러 곳에 나온다.
(전략) 가삼(家蔘) 성행 후로부터 경상(慶尙), 원춘(原春강원도) 양도의 봉진(封進)에는 대개 가삼이 많다.-<정조실록> 14년 7월 내의원 제조 홍억(洪億)이올린 계(啓)에서. 가삼이란 산삼에 대하여 재배된 삼을 일컫는 말이다. ‘가삼 성행 후로부터’란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시기보다 약간 앞선 시기에 시작되어 급속히 번지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전략) 영남은 예로부터 산삼(産蔘)의 향(鄕)이라 칭하는 곳. 그러나 산삼(山蔘)은 점차 귀하고 가종(家種)이 풍을 이룬다. 지금 본향(本鄕)에 착임(着任)하여 춘등삼(春等蔘봄가을로 두번 나눠 공납하는 삼중봄철분)은 3회나 검사불합격되어 약원(藥院)으로부터 퇴거당함을 듣고 그 이유를 힐문한 바, 이를 취급하는 관원이 삼상(蔘商)에게 속아 산삼과 가삼을 합쳐서 조작한 것을 상납시킨 때문이었다. - <정조실록>14년 8월, 양산군수 남학문(南鶴聞)이 올린 상소 중에서
(전략) 아동(我東)의 가삼은 정묘(正廟,정조)의 초년부터 창시되어 순묘(純廟, 순조) 중엽에 이르러 비로소 성행되어 일역(一域)에 보편화되어(하략) - 이규경(李圭景)의 저서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헌종 때)에서
위에서 보듯 이 시기를 전후해 가삼, 즉 재배삼이 일반 영농화되어 전국 각지에서 생산되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다.
○…이같은 양산체제로부터 홍삼이 등장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기록도 많다.
관하(管下)의 백성은 인삼 재배를 업으로 하는 자가 많고 매년 북경으로 들어가는 홍삼은 오로지 이고장에서 산출된다. 지금 만약 포삼 200근으로써 본부에 할당하고 사역원(詞譯院)의 수세제칙(收稅制則)에 의한다면 관민이 모두 이롭고 백성의 민생도 바랄수 있다. -<순조실록> 21년 11월 개성 유수 오한원(吳翰源)의 상소에서 이와 아울러 홍삼의 밀조와 밀무역이 성행하여 조정이 골치를 앓고 이를 금하는 법령과 단속이 점차 강화되어가는 과정을 기록한 예는 수시로 등장한다. 인삼 재배와 홍삼의 기원에 대한 기록 중에 김택영(金澤榮)의 저서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중경지(中京誌)>가 있다.
○…그러나 이 기록은 구전되어 오는 전설을 토대로 기록한 것으로 신뢰할 수가 없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다. 그 내용은 이렇다.
전라도 동복(東福)에 한 여인이 산에서 산삼 종자를 얻어 이를 밭에 심었다. 최성인(崔姓人)이 이를 전(傳)하여 번식(藩殖)했다. 이 것이 가삼의 시초라. 최성인은 동삼(東蔘)은 천하에서 존귀하는 바라 은밀히 청인(淸人)에게 팔았다. 청인 중 아편 연기에 중독된 자는 삼을 복용하여 약으로 한다. 그러므로 우리 삼을 진중(珍重)한다. 그러나 이를 복용하면 왕왕 부작용이 있다. 최성인은 그 까닭을 알고 이를 증숙하여 팔아서 거리(巨利)를 얻음에 그 부(富)는 일도(一道)에 제일이라. 이것이 홍삼의 시초다. (하략)
정조 때의 재배삼 양산과 홍삼의 가공기술 발달은 다음 대인 순조(純祖)대에 이르러 한강변에 증포소(蒸包所)를 설치하여 대량 가공체제에 들어갈 정도로 급격히 발전했다. 인삼 무역을 통해 조선 최고의 거상으로 군림한 임상옥(林尙沃)은 바로 이 시대가 낳은 인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