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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즈미술관(根津美術館)
네즈미술관(根津美術館)은 도쿄도 미나토구(港区) 미나미아오야마(南青山)에 있는 미술관이다. 1941년, 네즈 가이치로(根津嘉一郎, 1860-1940)의 고미술 수집품을 소장한 네즈 미술관(根津美術館)에서 저택을 개조하여 개관했다. 후지이 사이세이카이 유린칸(藤井斉成会有鄰館), 오쿠라슈코칸(大倉集古館), 하쿠츠루미술관(白鶴美術館), 오하라미술관(大原美術館) 등과 함꼐 2차대전 이전에 세워진 몇 안되는 미술관이다.
철도왕(鉄道王)으로 알려지기도 한 실업가로, 정치가, 다인(茶人)으로도 잘 알려져 있는 네즈 가이치로(根津嘉一郎)가 소장했던 일본 및 동양 고미술품 총 4,643점을, 보존, 전시하기 위해 건물을 지으면서 시작되었다. 그 후, 소장 유물의 수는 2009년에 6,874점, 2016년 7,420점, 그 중 국보 7점, 중요문화재 87점, 중요미술품 94점이 포함되어 있다.
네즈 가이치로(根津 嘉一郎, 1860-1940)는, 정치가, 실업가로 네즈재벌(根津財閥)의 창업자이며, 도부철도(東武鉄道), 난카이철도(南海鉄道, 현재의 난카이전기철도(南海電気鉄道)) 등, 일본 내 다수의 철도 관련 사업을 일으켜, 일명 철도왕(鉄道王)이라 불렸다. 또한, 현재의 무사시 대학(武蔵大学)・무사시 고등학교(武蔵高等学校)・무사시 중학교(武蔵中学校)의 창립자이기도 하다.
가이노쿠니(甲斐国) 야마나시군(山梨郡) 쇼토쿠지무라(正徳寺村, 현재의 야마나시현(山梨県) 야마나시 시(山梨市))에서 태어났다. 네즈 가문(根津家)은 잡곡상(雑穀商), 전당포(質屋業)를 겸했던 호상(豪商)으로 아부라야(油屋)라는 옥호(屋号)로 불리기도 했다.
네즈오덴(根津翁伝)에 따르면, 1877년 야마나시(山梨) 군청 서기로 일하면서 민원운동(民権運動)에도 가담했었다고 한다. 1889년 손카이기인(村会議員)이 된 후, 도쿄로 진출했다. 정치가이자 은행가였던 와카오 잇페이(若尾逸平, 1821-1913), 실업가 마메미야 케이지로(雨宮敬次郎, 1846-1911)와 알고지내면서, 코슈 재벌(甲州財閥)의 일원이 되었다. 1891년 와타나베 마코토(渡辺信, 1840-1911), 오다기리 켄메이(小田切謙明, 1847-1893), 사타케 사쿠타로(佐竹作太郎, 1845-1915) 등 명망가들과 함께 철도기성동맹회(鉄道期成同盟会)를 결성하여, 쥬오혼센(中央本線) 부설운동을 펼쳤다.
제일징병보험회사(第一徴兵保険会社), 제국화재보험(帝国火災保険), 후코쿠징병보험(富国徴兵保険) 등 보험회사 자금을 운용하여, 도쿄전등(東京電燈) 매수를 추진하였다. 1905년에는 도부철도(東武鉄道) 사장으로 취임하여, 경영재건에 힘썼다. 그 외에도 가이치로(嘉一郎)는 경영에 어려움을 겪던 회사를 다수 매입하여, 재건을 도모함에 따라, '불속에서 밤을 줍는 사나이' 등 별명을 얻기도 했다. 경영에 직간접으로 참여했던 철도회사만 25개에 달하였고, 많은 회사에서 명예사장에 오르기도 했다. 그 중 몇 회사에는 동향의 고슈(甲州) 출신의 하야카와 토쿠지(早川徳次, 1893-1980)을 보내 경영을 맡겼다.
1904년 이후, 중의원의원(衆議院議員)을 4연임하였고, 1912년에는 제국화재보험주식회사(帝国火災保険株式会社)를 설립하여 초대 사장을 역임했다. 1926년부터 귀족원(貴族院) 칙선의원(勅選議員)이 되어, 연구회(研究会)에 속해 사망할 때까지 재임했다.
'사회에서 얻은 이익은 사회로 환원할 의무가 있다'는 신념에 따라, 교육사업도 벌여, 1922년 구제 무사시 고등학교(旧制武蔵高等学校, 현재의 무사시대학(武蔵大学), 무사시고등학교(武蔵高等学校), 무사시중학교(中学校))를 설립하였다. 1940년 79세로 타계하였다. 가이치로(嘉一郎) 사후, 유족에 거액의 상속세가 부여될 상황이었는데, 당시 도쿄재무국장(東京財務局長)이었던 이케다 하야토(池田勇人, 1899-1965)가 특례로 미술관 기증명목으로 상속세를 면제하자, 이에 감격한 유족은 이케다(吉田)를 대장대신(大蔵大臣)에 추천하였고, 이후 이케다 내각(池田内閣)의 발판이 되었다.
가이치로(嘉一郎)는 다인(茶人)으로도 잘 알려져 있어 아오야마(青山)라는 호로 불렸으며 많은 다도구, 고미술을 수집하였다. 고슈 재벌(甲州財閥)을 구성하는 인물들은 다인들이 많았고, 이들은 고미술 감상 이외에도 정보 교환의 장으로 다도회를 이용하기도 했다.
에도시대, 현재 미술관 부지는 가와치노쿠니(河内国) 단난번(丹南藩) 번주 다카키 가문(高木家)의 에도 시모야시키(江戸下屋敷)가 있었다가, 막부가 물러난 후, 다카키 가문(高木家)은 1869년 도쿄에 머무르지 않아도 된다는 허락을 받고 고향으로 물러나버려, 집터는 완전히 황폐해졌다. 이후 1906년, 도쿄에 정착한 네즈 가이치로(根津嘉一郎)가 이 땅을 매입하여, 저택과 함께 수년 간에 걸쳐 정원 조성에도 착수하였는데, 2세 때 저택을 미술관으로 개축하면서, 본채를 본관으로 하였다. 정원 내에는 4동의 다실이 있다.
고닌테이(弘仁亭)・부지안(無事庵) - 본관 정원쪽 출구를 나와 계단 아래 바로 나타나며, 메이지 말기에 지어진 쇼인즈쿠리(書院造)의 다실을 이축한 것으로, 욘죠한(四畳半)의 부지안(無事庵)을 포함하고 있다.
간츄안(閑中庵)・우시베야(牛部屋) - 정원 동쪽, 네즈카페(NEZUCAFÉ) 근처에 있으며, 원래는 이카루가안(斑鳩庵)에 붙어있었던 고죠다이모쿠(五畳台目) 시모자도코(下座床) 형식의 다실로, 1991년 현재의 위치로 이축되었다. 욘조한(四畳半) 이로리(囲炉裏) 구성의 우시베야(牛部屋)가 붙어 있다.
히킨사이(披錦斎)・이치쥬안(一樹庵) - 정원 남쪽, 야쿠시도(薬師堂) 근처에 위치하고 있으며, 1899년 오사카 후시미쵸(伏見町)에서 이축한 이치쥬안(一樹庵) 다실이 붙어 있다.
이카루가안(斑鳩庵)・세이케이테이(清渓亭) - 정원 남쪽, 텐진(天神)의 히바이시(飛梅祠) 근처에 있으며, 에도 초기의 건물로, 마츠다 가츠노리(益田克徳, 1852-1903) 저택에 있던 것을 1955년 이축한 것이다.
소장품은 주로 일본과 동양의 고미술품으로, 폭넓고 우수한 예술적 가치를 지닌 소장품으로 유명하며, 2차대전 이전 기업가의 다도구(茶道具) 위주가 많았지만, 네즈 컬렉션(根津コレクション)은 다도구(茶道具) 뿐 만 아니라, 불교회화, 사경, 수묵화, 근세 회화, 중국 회화, 칠공예, 도자기, 일본도 및 도장구(刀装具), 중국 고대 청동기 등다양한 종류의 일급 문화재가 망라되어 있다.
원래의 네즈가이치로(根津嘉一郎) 저택은, 메이지 유신(明治維新) 이후 황폐해졌던 다카기 가문(高木家) 에도 시모야시키(江戸下屋敷)를 1906년 매입하여 신축한 것인데, 1940년 가업을 이어받은 네즈가이치로(根津嘉一郎, 1913-2002)가 선대의 저택을 미술관으로 개장한 것으로 저택의 안채를 미술관 본관으로 삼았던 것인데, 1945년 전화를 피하기 위해 소장품을 소개한 직후 소실되어 본관은 사라졌다. 이후, 1954년 이마이 켄지(今井兼次, 1895-1987), 나이토 타츄(内藤多仲, 1886-1970)의 설계로 신축하여 재개관하였다.
이후, 2006-2009년에 걸쳐, 건축가 구마 켄고(隈研吾, 1954-)의 설계에 따른 개장공사를 거쳐 재개관하였다. 2009년 BCS 상 수상, 2010년 마이니치 예술상(毎日芸術賞) 수상하였다.
저택을 짓던 당시, 같이 조성되었던 정원은 현재 미술관 부속정원으로 남아 있는데, 자연의 경사를 살려 연못을 중심으로 조성한 일본 정원으로, 정원 내에는 4동의 다실(茶室), 야쿠시도(薬師堂) 등 건물 외에도, 석불, 석탑, 석등 등 석조유물이 산재해 있다.
나치타키즈(那智滝図) - 구마노(熊野)의 3대 곤겐(権現)의 하나인 히로곤겐(飛瀧権現)을 그린 것으로, 가마쿠라 시대의 스이쟈쿠가(垂迹画)의 걸작으로, 1281년 가메야마 상왕(亀山上皇, 1249-1305) 무렵으로 추측된다. 윗부분의 암봉에는 월륜(月輪)이 걸려 있고, 아래에는 삼나무 가지가 가로지르고 있는 배전(拝殿), 그 옆에는 거대한 소토바(卒塔婆)가 그려져 있다. 신체(神体)를 의미하는 폭포만을 그린 유일한 스이쟈쿠가(垂迹画)이며, 먹과 금니로 암벽을 묘사하는 수법에서 중국 송원 회화의 영향을 느껴지는 풍경화로 중요한 예이다.
가키츠바타즈(燕子花図) - 오가타코린(尾形光琳, 1658-1716)의 작품으로, 한 쌍의 육폭 병풍 그림으로 금지에 군청(群青)과 록청(緑青)의 농담 만으로 선열하게 묘사한 제비붓꽃(燕子花) 군락을 묘사했다. 좌우 군집의 대조와 리듬감, 형식미가 느껴지면서도 안료의 특성을 살린 통통한 꽃잎 표현도 우수하며, 에도시대 회화사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손색없다.
교손세키쇼즈(漁村夕照図) - 목계(牧谿)의 작품으로, 석양의 어촌의 풍경을 다채로운 수묵 기법을 구사하여 그린 그림으로, 눅눅한 공기와 명암을 빛으로 표현하여, 특히 그림 오른쪽 절반을 차지하는 사양(斜陽)의 표현은 극적이다. 중국 강남의 소수(瀟水)과 상강(湘江) 주변의 8군데의 경승을 그린 소상팔경도(瀟湘八景図) 중의 하나이다. 아시카가 요시미츠(足利義満, 1358-1408)의 '도유(道有)' 인장 이 찍혀있고, 규격도 동일한 작품이 다른 곳에 3폭 확인되고 있어, 원래 8폭 작품을 아시카가 요시미츠(足利義満)가 자시키카자리(座敷飾り)를 위해 잘라낸 것으로 보고 있다. 목계(牧谿)는 남송 말기의 선승인데, 중국보다 일본에서 오히려 높은 평가를 받았으며, 일본 회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우즈라즈(鶉図) - 빨간 열매가 맺힌 구기자(枸杞)와 이삭이 달린 왕바랭이(雄日芝)가 무성한 가운데, 메추라기 한 마리가 걷는 모습을 묘사했다. 메추라기는 정밀하게 날개를 묘사하였고, 풍부하게 표현된 양감이 특징적이다. 약간 부감(俯瞰)한 시야에서 본 메추라기의 운동감이나 공간의 깊이가 강조되어 있다. 화조화를 잘 그렸던 남송의 화원화가(画院画家) 이안충(李安忠)의 작품으로 전래된 경위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사실적인 표현은 송대 화조화의 명품이다. 아시카가 요시노리(足利義教, 1394-1441)의 인장이 찍혀 있으며, 쇼군가에 소장하여국화 그림을 두고 양쪽에 메추라기 그림을 놓아 장식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호테쇼우마몬도우즈(布袋蔣摩訶問答図) - 목유(牧谿)로 대표되는 선승 화가의 수묵화는 원대에도 독자적으로 발전하였는데, 작자인 인다라(因陀羅)는 인도 승려로만 알려져 있는 화승(画僧)으로, 주로 선종의 조사(祖師), 세속의 성인(聖人), 선승(禅僧)과 속인(俗人) 간에 나누는 대화의 장면을 그린 여러 작품이 전하고 있다. 원래는 화권(画巻)의 일부였다가 절단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포대(布袋)와 장마하(蔣摩訶)의 문답 장면을 그렸는데, 마치 독필(禿筆)로 그린 듯한 필치와 농묵(濃墨)이 가미된 특이한 화풍이면서도, 비범한 솜씨로 인물의 표정을 묘사하였고, 찬자(賛者) 초석범기(楚石梵琦, 1296-1371) 또한 원말명초의 선승으로, 글씨에 능하였다.
곤폰햐쿠이치콘마(根本百一羯磨) - 불교 교단 내 행사, 사건 처리 회의 등을 다룬 콘마(羯磨) 101권 중 10권부터 수집되어 있으며, 703년 기죠(義浄, 635-713)가 번역했다. 나라(奈良) 시대 필사된 권6은 당풍의 서풍이 볼만하고, 표지, 끈, 아카미츠다(赤密陀)를 바른 축수(軸首)까지 온전하게 원형을 유지하고 있어 귀중한 유물이다. 1행17자 필사의 예를 따르지 않고, 1행 12-13자로 필사한 희귀한 예이다. 권5는 효고(兵庫) 하크츠루 미술관(白鶴美術館), 그 외 8권은 쇼소인(正倉院) 쇼고조(聖語蔵)에 수장되어 있다.
무료기쿄(無量義経)・간후겐쿄(観普賢経) - 두 권 모두 같은 사람이 필사한 개결(開結) 장식경(装飾経)으로 금박을 떼어 붙인 박차(薄茶)색 취염(吹染) 안피지(雁皮紙)와 백차(白茶)색 안피지(雁皮紙)를 번갈아 붙여 금니 금 안에 1행17자씩 1장 26행 씩 필사하였다. 온아우미(温雅優美)한 필체를 보여주는 헤이안 시대 중기인 11세기의 뛰어난 필력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평가되며, 무료기쿄(無量義経) 권말의 료죠신노(良恕親王)의 발문에는 유키나리 필(行成筆, 藤原行成, 972-1028)이라 되어 있으나, 확실치 않다. 뛰어난 서풍의 화려한 장식경이 온전히 전해지고 있는 헤이안시대 중기의 몇 안되는 대표적 유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