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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서대장
그리스도를 겸손을 본 받으라 빌2:5-11
빌리보서 2:1-11에서 복음에 합당한 성도의 삶에 대해 권면하고 있는데,
이는 교회의 협력과 일치가 복음 사수에 절대적으로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이 하나로 연합하는 원리를 1절에서 그리스도 안에서의 권면, 사랑의 위로, 성령의 교제, 긍휼과 제비를 제시한 후 2절에서 이런 원리에 기초한 성도들의 마음의 태도를 제시합니다.
3-4절에서 성도들이 하나될 수 있는 구체적인 자세가 겸손이라 말합니다.
오늘 본문인 5-11절에서 그러한 겸손의 모범으로서 그리스도를 제시하며 본받으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그리스도의 겸손의 모범을 본받을 수 있을까요?
첫째로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라.(5)
교회의 일치를 위해 겸손을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입니다.
그 겸손의 본보기로 그리스도를 제시하면서 교회의 일치를 위한 성도의 겸손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겸손을 의미합니다.
물론 예수님의 마음은 겸손의 마음뿐만 아니라, 본받아야 할 마음이 너무 많지만, 우리가 신앙의 본으로 삼아야 할 마음은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마11:29)는 겸손의 마음입니다.
우리 주님의 겸손의 마음을 본받기 바랍니다.
주님은 본래 하나님이십니다. 그런 하나님이 인간들의 죄를 대속하여 구원하기 위하여 사람으로 낮아져서이 땅에 오셨습니다.
창조주로써 피조물을 섬기는 삶을 사셨고, 피조물을 위해 창조주가 십자가에서 희생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겸손의 극치입니다.
우리 주님의 이러한 성육신으로 표출된 지고지순한 희생의 겸손을 본받아 늘 낮은 자리에서 설줄 아는 성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란 착한 마음을 말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행10:38에서 말하기를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듣 하셨으매 저가 두루 다니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치셨으니.”
그렇습니다,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모든 일들은 다 착한 마음입니다.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일은 영혼을 구원시키기 위해 전심전력을 다했으며, 굶주린 자들에게 먹을 것을 줘 구제하고 병자를 고치고 죽은 자를 다시 살리셨습니다.
착한 일은 착한 마음을 가진 사람만이 할 수 있습니다.
독한 마음은 성도에게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처럼 착한 마음을 지니고 이웃을 돌볼 줄 아는 성도되기 원합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은 주는 마음입니다.
주님은 행20:35에서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셨습니다.
주님은 이 땅에 오셔서 고쳐주고 가르쳐 주고 성령을 주시고 ,천국의 영생의 영광까지 나누어 주셨습니다.
사람은 본성적으로 남에게 자기의 것을 주려하지 않고 도리어 빼앗고 훔치려 합니다.
그러나 성도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본받은 자들이므로 이기적인 마음은 성도에게 어울리지 않는 것입니다.
줄 것이 없으면 이웃을 위해 기도해 주고, 따뜻하게 손잡아주며 위로의 말이라도 주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은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는 마음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벧전2:21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셨느니라.”했습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받는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사도들은 그리스도의 이런 두려워하지 않는 마음을 본 받아 장렬하게 순교했습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고난 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을 때 온전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성도가 복음을 전하고 교회의 직분을 감당하고 이웃을 구제하는 이 모든 일은 우리의 수고와 희생이 없으면 할 수 없는 일들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처럼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고난을 받아야 영광도 받는 다는 사실을 잊지 말기 원합니다. NO Cross NO Crown! 십자가 없이는 면류관도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은 자기를 비우는 마음입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동등된 분이시지만 사리사욕 없는 빈 마음으로 오셔서 오직 사랑으로 하나님 아버지의 뜻만을 행한 것이 그리스도의 마음입니다.
이 땅의 물질에 대한 욕심이나 영광이나 정치적인 야망이 조금도 없으셨습니다. 무덤도 타인의 무덤을 빌리셨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이런 빈 마음을 가진 성도를 찾고 계십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은 겸손한 마음, 착한 마음, 주는 마음, 사욕없는 빈마음을 주님의 제자된 성도들이 본받기 원하십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이란 이런 마음을 품고 사는 사람을 말합니다.
어떻게 하면 그리스도의 겸손의 모범을 본받을 수 있을까요?
둘째로 그리스도의 낮아지심을 본 받으라. (6-8)
6-8절은 그리스도의 자기 비하에 대한 설명입니다.
6절에서는 그리스도의 본질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바로 하나님의 본체이십니다.
하나님의 본체라는 말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본질적인 속성과 성품을 지니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그리스도가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말입니다.
그리스도는 본질이 하나님이십니다. 삼위일체 하나님 가운데 제2위이신 성자 하나님이십니다. 즉 그리스도 속성과 영광과 능력에 있어 하나님과 동일하신 분입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란 증거는 성경에 풍부히 나타나고 있습니다.
우선 그리스도께서 친히 자신을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요 10:30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라 하신대”
요12:45 “나를 보는 것은 나를 보내신 이를 보는 것이니라.”
그리스도의 행사를 보고 그 분이 하나님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먼저 그리스도는 생명을 살리는 창조적인 능력을 보이셨습니다.
열두살된 회당장의 딸을 살리셨고(막5:35) 죽은 지 나흘이나 된 나사로도 살리셨으며(요11장)나인성 과부의 아들도 살리셨습니다.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일은 생명의 주되신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다음은 죄를 사해 주시는 일을 하셨습니다.
중풍병자의 병을 고쳐 주시면서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십니다 (마9:2-)인간이 하나님 앞에 범한 죄는 오직 하나님만이 사해 주실 수 있습니다.
또 음식물을 창조하시고 자연을 지배하셨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막6:38-)칠병이어의 이적을 행하여 오천명 사천명을 먹이셨습니다.
식물을 지배하시어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니 죽었고, 물고기를 모아 두 배가 가라앉을 정도로 만선을 만들어 주셨습니다(눅5:5-)
사도들의 증거가 예수님은 하나님 이심을 분명히 합니다.
요1:1-“태초에 말씀이 계시니 그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니라.” 합니다.
이들 사도들은 자기의 목숨을 아낌없이 주님을 위해 순교의 길을 걸으면서 기쁨으로 죽음을 맞이했다는 것은 착각이나 환상으로 이룰 수 없는 참진리만으로 이룰 수 있는 길이었습니다.
창조주요 전능하신 하나님이신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으로서의 자존심과 영광을 유보하시고 피조물인 인간의 모습으로 낮아지시어, 피조물인 인간을 섬기는 삶을 사셨을뿐 아니라, 마지막엔 죄인된 피조물인 인간을 위해 창조주의 몸까지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온전히 내어 주신 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낮아지심은 겸손의 극치입니다.
겸손이란 남앞에서 단순히 자기를 낮추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힘과 권세가 있어도 그것을 자랑치 않고 자고하지 않고 도리어 하나님과 이웃을 위하여 선용하는 것이 바로 성경적 겸손인줄 믿기 원합니다.
어떻게 하면 그리스도의 겸손의 모범을 본받을 수 있을까요?
셋째로 높아지기 위해 낮아지는 묘수를 배우라.(9-11)
9-11절은 그리스도의 승귀에 대한 증거입니다.
여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게 하셨다 하였습니다. 이것은 높아지심의 극치입니다.
이보다 더 높아 질 수는 없습니다.
참으로 그리스도께서는 높아질 수 있는 최고로 높아지신 것입니다.
9절에서 높아지심의 비결을 [이러므로]라 말합니다.
인간은 누구나 높아지기를 원합니다.
얼마 전 경찰서장이 시위대 속으로 정복을 입고 들어가다가 폭행을 당했습니다. 공권력이 위협을 받는 것은 국가권위의 실추이므로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계급 사회에서는 그런 돌출적인 행동을 하므로 스스로 공을 만들어 여론을 호도해 높아지는데 이용하고자 하는 유혹을 물리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경찰서장이 그랬다 단정할 수 없는 일입니다. 좋은 의도였겠죠.
어떤 이유로라도 공권력은 존중되고 보호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나의 생명과 자유 권리를 보장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야당에서 말하는 것처럼 휘발유(섶)를 가지고 불속으로 들어가면서 휘발유(섶을)를 태웠다고 비난하지 말고 비난 받을 만한 빌미를 주어선 안 됩니다.
그래서 시민운동을 하는 사람들의 도덕성과 질서의식이 높아야 합니다.
경찰이 정복을 입고 시위대 속으로 들어온다면 그 사람을 야유는 할지언정 일체의 폭력을 행사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국회에서 체류탄을 터뜨린 어리석은 국회의원 때문에 비난 받아야할 *나라당이 도리어 비난하는 자리에 서 있는 것을 봅니다.
왜냐하면 시위의 본질이 아닌 것 때문에 방향이 진정성이 왜곡되고 체류탄이란부수적인 문제가 논란의 중심에 서게 되어 날치기 통과의 폭겨라는 본질을 희석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갑니다.
[이러므로]가 무엇입니까? 바로 6-8절에서 언급한 그리스도의 비하입니다.
그리스도의 극도로 낮아지심으로 인해 극도로 높아지신 것입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높아지심의 비결은 낮아지심에 있었던 것입니다.
약4:10“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 합니다.
유교의 체면문화 때문에 높아지기 위해서는 없어도 있는 체 하고 약해도 강한체 하고 배고파도 배부른 척 물마시고 잇발 쑤시며 팔자걸음 걷곤 합니다.
섬기려 하기보다 섬김 받으려하고 누군가에게 지시하려 하고 솔선수범하지 않습니다. 그런 자리에 다툼만이 불화만이 싸움과 투쟁만이 있어 서로를 물고 뜯고 피흘리게 할뿐 높아지지 않습니다.
진정한 높아짐은 낮아짐으로 이루어집니다.
자기를 극도로 낮출 때 비로소 높아지는 것입니다. 자기를 낮추는 섬기는 삶을 산 사람들이 사람들에게 오랫동안 진정한 마음의 존경을 받습니다.
하나님은 주 안에서 그리스도처럼 자기를 낮추는 사람을 높여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하게 하시는 줄 믿으시기 원합니다.
겸손의 삶, 섬김의 삶이 주님을 내 안에 모시고 천국상급에서 영원토록 왕 노릇하는 성도 여러분 되시기 원합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어떻게 하면 그리스도의 겸손의 모범을 본받을 수 있을까요?
첫째로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라.(5)
둘째로 그리스도의 낮아지심을 본받으라. (6-8)
셋째로 높아지기 위해 낮아지는 묘수를 배우라.(9-11)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겸손을 본받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본받고 , 그리스도의 낮아지심을 본받고, 높아지기 위해 역설적인 낮아짐의 비결을 바로 깨달아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는 성도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 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