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날 아침밥을 먹은 후 다시 봉고차를 타고 시내의 ‘토가족 민속촌’에 들렸다. 여기서도 80위엔이나 하는 입장료를 별도로 내야 했기에 우리 둘만 빠졌다. 하지만 나는 나중에 후회를 했다. 일행은 민속촌에 들어가고 우리는 시내 구경을 나섰다. 그런데 나팔소리가 요란하더니 어떤 행렬이 오는데 군복을 입은 악대들 앞으로 통돼지 잡은 것과 살은 양을 각각 두 사람씩 나무토막에 받쳐 어께에 메고 어디론가 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우리는 구경거리가 났다 싶어서 그들을 ?아가니 폭죽소리가 엄청 요란하다. 처음에는 무슨 결혼식이라도 있나 했는데 알고 보니 거기는 장가계의 토가족이 벌이는 장례식 장이었다. 중국에서는 원래 기쁜 일이건 슬픈 일이건 무슨 별난 일이 있으면 폭죽을 터트리는 것이 풍습인가보다. 노인 영정 사진이 일견 섬뜻함을 주었지만 특별히 슬퍼하는 사람은 눈에 안 띄었다. 다행히도 천수를 누리고 간 사람의 장례식었던 것이다. 그곳을 나오다 과일을 좋아하는 어 선생이 과일가게에 들려 망고스틱을 사는데 주인이 저울눈금을 속였지만 날카로운 어 선생이 그냥 넘어갈 리가 없다. 어 선생이 오히려 글자를 가르키며 실제 무게 가격보다 적은 가격을 불렀지만 당황한 주인은 그냥 그 가격만 받았다. 그 주인은 혹 떼려다 오히려 혹을 붙인 셈이다. 중국서는 잠시라도 생각이 자리를 비우면 그냥 당하게 되어 있는 나라다. 민속촌 앞에서 차를 기다리다 그 망고 스틱을 먹는데 참으로 맛이 있었다. 내 기억에 전에 이 과일을 먹어 본 적이 없는 것 같아 더욱 맛이 있었다. 더군다나 약삭빠른 중국인을 한 방 먹이고 산 것이라 더욱 맛이 있는 지도 모르겠다. 이어서 천란하고 양저군 등 일행이 나오는데 그들은 내일 있을 래프팅 일정은 아예 처음부터 선택하지 않은 상태라 오늘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간 며칠 든 정이 이처럼 안타까움을 자아 낼 줄은 몰랐다. 친절하고 우리한테 특별히 잘 대해 준 그들이고 보면 아쉬움이 컸다. 그럴 줄 알았으면 민속촌이라도 같이 들어가 사진이라도 더 찍어 주는 건데 몇 푼 아끼려고 그러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다.
이어서 가이드는 시내의 대형 마켓에 우리를 풀어 놨다. 이번 여행 중 내내 나의 고민거리는 래프팅하는 동안의 카메라 문제였다. 사진을 안 찍을 수도 없고 우리나라 같으면 사람을 물에 빠트리기도 하는데 그러면 카메라가 성할 리가 없다. 그래 혹시나 싶어 천란을 시켜 직원에게 혹시 방수 주머니 같은 것이 있는 지 물어 보니 없단다. 나는 할 수 없이 유니랩이나 사려고 만지작거렸지만 그건 찍을 때마다 풀어서 다시 싸야 하니 거의 불가능한 거나 다름없다. 그런데 바로 그 옆에 속이 비치는 플라스틱 물 컵이 있는데 그게 뚜껑이 있고 고무패킹까지 있는 것이 아닌가? 중국인들이 차를 좋아하다보니 그런 희한한 컵이 있는 모양이다. 그것을 꺼내 카메라를 넣어보니 정말 기가 막히게도 삼지 사방으로 단 일 미리의 여유나 부족함이 없이 딱 맞는 것이 아닌가? 그 잔은 마치 내가 오기를 오래전부터 기다리고 있기나 했던 것처럼 딱 맞았다. 어 선생이 그것을 보더니 ‘궁즉통’이란다. 그러게 워낙 궁하다보니 하늘도 감명을 받았나? 그렇게 시장을 대충 보고 나오니 드디어 천란과 그 일행은 이별이다. 짧은 기간의 만남에 별리의 아픔을 논하기는 그렇지만 그래도 그들을 생전에 다시 만난다는 것이 기약이 없는 노릇이고 또한 그들이 베푼 친절함을 세상 어디에서든 다시 만날 수 없을 것이란 생각에 그들이야 금방 잊을 정일지 모르지만 나한테는 가슴을 저미는 아픔이었다. 우리는 장가게 시내의, 이제는 낚을 대로 낚아서 일성 호텔이나 겨우 됨직한 ‘동방삥관’에 도착해서 방을 정하고 늦은 점심을 옆 식당에서 먹었다. 참하게 생긴 주인아주머니를 닮아서인지 음식들도 맛깔스러웠다. 드디어 래프팅을 가기 위해 버스를 기다리니 다마스 같은 미니 봉고가 한대 와서 우리를 싣고 갔다. 차장 밖으로 이제까지 우리를 가이드했던 중국인 여자가 ‘바이바이!’하길래 무슨 말인가 했더니 어 선생 말이 그녀와도 이제는 땡이란다. 그녀를 생각하면 차에서 내내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 중국어로 지껄이던 모습만 생각난다. 인원이 네 명으로 줄어서 딱 그에 맞는 차가 온 것이다. 여행 중에 내내 차가 바뀌었다. 차는 움직일 때만 타고 다시 다른 장소에서 다른 차를 타고 해서 경비를 최소한으로 줄이는 모양이다. 당연히 인원이 줄면 차도 크기가 줄었다. 근 한 시간 정도를 가는데 중국인 기사가 연신 차장 밖을 대고 손으로 코를 풀었다. 바로 뒷자리인 내 자리로 그 물방울이 다 튀었다. 중국에서 그런 것들을 쉽게 접하다 보니 그러려니 했는데 나중에 그게 크게 잘 못 된 것을 알았다. 왜냐면 여행 다음 날부터 그 친구의 코감기가 나한테로 옮겨 왔기 때문이다. 그 친구가 중간 어디에선가 우리들의 래프팅 표를 받아 쥐었는데 어 선생 말로는 분명 할인 표일 것이란다. 나중에 안 내용으로 우리는 180위엔이지만 중국인은130위엔이고 또 후에 탄 이들은 110위엔이라고 했으니 그 가격이 정확히 얼마인지는 그들만이 알 뿐일 것이다. 이번 여행가격도 모르긴 해도 다 다를지도 모른다. 물론 어 선생이 싸우다시피 해서 여행 가격 중 래프팅 비용을 깎았다 해도 우리가 제일 비싸게 온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 중에 이익을 건지려는 그 들의 경비 줄이기 방법은 너무도 다양해서 도저히 감을 잡을 수가 없다. 이어서 우리는 래프팅 장에 도착해 인원이 차기를 기다려 바나나 보트 두개를 연결한 모터가 달린 고무보트를 타고 래프팅을 시작했다. 강물은 깊고 보트도 우리나라처럼 손으로 젓는 것이 아니어서 특별히 신경 쓰이는 일은 없었다. 가끔씩 급류를 만나면 물이 옷에 튀어서 옷은 다 젖었지만 나의 카메라 구출작전은 아무런 문제가 없었고 가끔씩 잽싸게 그것을 꺼내 사진도 찍을 수가 있었다. 경치는 우리나라 동강과 비슷했다. 중간에 나무를 나르는 팬티 차림의 뗏목꾼들도 만나면서 한 삼십분 쯤 가다 아름다운 폭포를 만나니 거기가 쉬는 장소인 모양이다. 우리가 그 곳에 배를 대기 직전에 열심히 우리 모습을 찍던 여자가 있었는데 나중에 보니 그 곳에 컴퓨터가 있어 그것을 프린터로 뽑아주고 돈을 받는 것이었다. 어 선생은 그것을 시디로 주면 사겠다고 했지만 그런 시설까지는 없어서 아쉬워했다. 아무튼 중국인들의 돈 긁어내기 작전은 혀를 내 두를만 하다. 이어서 다시 내려가다 어느 지점에 도달해서 우리를 또 내려 주는데 거기서부터 엔진이 꼭 경운기 엔진 같은 조그만 통통배를 타고 가야하는 모양이다. 잠시 쉬었다가 통통배를 타고 한참을 하구 쪽으로 내려가니 강 양 옆으로 경치들이 펼쳐지는데 엄청나게 아름답다고까지는 할 수 없지만 그런대로 운치가 있고 통통배를 타고 잔잔한 강물을 가르는 맛이 좋았다. 드디어 그 코풀기 명수가 운전하는 미니 봉고가 기다리는 지점에 도착을 하니 5시 반 경이다. 근 세 시간은 배를 타고 내려 온 것 같다. 그 사이 젖은 옷은 거의 마르고 몸의 한기도 완전히 가셨지만 여전히 그 기사는 밖에다 대고 코를 풀었다. 하긴 휴지도 돈이니 아껴야 할 것이다. 중국인들의 절약 정신은 타고 난 것 같다. 아니면 내가 가난한 사람들만 만난 지도 모를 일이고. 호텔에 도착해서 우리는 구내식당으로 안 가고 점심 먹던 그 식당으로 다시 가서 음식을 시키고 점심에 어 선생이 산 52프로짜리 ‘빠이주’를 한 잔씩 했다. 여유 잇게 저녁을 먹고 우리는 방으로 돌아와 텔레비젼을 조금 보다 나는 귀마개를 하고 역시 깊은 잠에 들었다. 장가게 마지막 날 눈을 뜨니 6시 반이 지났고 밤새 텔레비전을 보던 어 선생은 늦잠이시다. 나는 카메라를 들고 밖으로 나가 어제 낙조를 잠시 찍었던 뚝방 길 산책에 나섰다. 한 쪽은 강이고 한 쪽은 말하자면 장가게의 ‘후통’이다. 아침 산책을 하는 사람들 사이를 걸으며 그,들의 사는 모습, 강가에서 빨래하는 모습과 풍경 등을 찍는데 날이 흐려서 아침 햇살에 비친 모습은 찍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가다 길 옆 공중 화장실 근처의 어느 집 문지방의 의자에 걸터앉은 여자가 나의 흐릿한 생각의 터널을 부시면서 날 부른다. 아침 산책길에 날 부르는 여인이 하필 창녀라니 역시 씁쓰름하다. 그녀의 행색은 직업여성치고는 화려함이 전혀 없는 오히려 수수한 차림이고 나이는 30대 중반은 되어 보이는 말하자면 ‘퇴기’련만 그처럼 이른 아침부터 호객 행위를 해야 하는 그녀의 지난한 삶에 동정심이 갔다. 한바퀴 돌아 숙소에 도착해서 아침을 식당에서 간단히 먹고 나니 12시쯤에 떠나는 기차시간까지 어디선가 시간을 보내야 하는 숙제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 선생은 식사 시간에 맞은편에 앉았던 중국인 일행이 어제 우리가 래프팅하는 사이 갔던, 비행기도 들락거릴 만큼 커다란 자연석 구멍으로 유명한 '천문산'을 가고 싶어 했다. 그런데 문제는 거기 가는 비용이 만만 한 것이 아니었다. 그 곳은 특이하게도 걸어서는 갈 수가 없고 무려 7키로 미터나 되는 거리를 시내부터 오로지 케이블카를 타고 가야 하는 곳이다. 그러니 자연히 비용이 268위엔으로 시골 산하나 보는 비용으로는 컸다. 유명한 장가계를 보고난 마당에 또 돈까지 들여 그런 산을 볼까 싶어서 내가 포기를 하니 의리가 출중한 어 선생도 대뜸 포기하신다. 그래서 어 선생과 나는 시내를 둘러 볼 심산으로 길을 가다 마침 동산으로 오르는 길이 있어 그곳으로 오르니 길가에 점쟁이 몇이 쭈그리고 앉아 애를 데리고 있는 아줌마를 붙잡고 점괘를 보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아마 그들의 고단한 삶이 끝나고 언제부터 멋진 삶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지를 점쟁이한테 묻고 있을 것이다. 나도 쭈그리고 앉아서 묻고 싶었지만 말도 안 통하고 그렇게 신통해 보이지도 안했다. 동산에 오르니 오죽잖은 5층짜리 시멘트로 만든 누각이 있는데 그곳에 올라야만 시내를 조망할 수 있는 곳이었다. 하지만 입구에는 영락없이 ‘일 위엔’이 붙여 있었다. 허름한 차림의 일가가 그 안에 살고 있었는데 아마 그 입장료가 그들의 삶을 지탱해 주는 것 같았다. 하루 종일 입장객이 몇 명 안 될 테니 그들의 삶도 불을 본 듯 뻔했다. 어 선생이 동전을 내니 뭐라고 하면서 안 받는다. 어제도 민속촌 앞에서 포도를 사고 그것을 냈는데 안 받더니 오늘도 그러는 것을 보면 뭔가 동전이 문제가 있는 모양이지만 분명 잔돈으로 중국에서 받은 것이기에 도통 이해가 가지 안했다. 중국에서는 때로 무엇을 이해하려면 머리가 아파오기 때문에 얼른 잊어야 한다. 지폐로 바꿔주고 쇠로 만들어 매단 볼 폼 없는 종만이 지키는 운치 없는 누각에 올라 사방을 둘러 본 후 내려와 다시 옆길로 접어드는데 방정맞은 내 속이 갑자기 불편한 심기를 드러낸다. 나는 늘 그러하듯이 준비성 많은 어 선생한테 손을 내미니 그도 이번에는 다른 때와 달리 갸우뚱하더니 겨우 뒷주머니에서 휴지 몇 조각을 건네주는데 어제 래프팅할 때 젖은 것이 아직도 안 마른 채 납작한 상태였다. 어 선생은 겸연쩍어 하면서 건네주었지만 그래도 그거면 감지덕지다. 그저 구멍이 날 정도로 세게만 누르지 않는다면 오히려 부드러워서 좋기만 하다. 이미 앞선 사람들의 흔적이 많은 적당한 곳을 찾아 해결을 하고 내려오다 구멍가게 같은 절간에 들려 나무 판 부적을 종이에 찍어내는 것을 구경했다. 어떤 아줌마가 앉아서 먹을 쓱쓱 문지른 후에 종이를 대고 찍어 내는데 아주 간단했다. 그 종이조각들이 어느 집엔가 흘러 들어가 문지방에 혹은 부엌 기둥에 붙여져 ‘일생평안’을 기원해 줄 것을 생각하니 예술치고는 아주 값진 예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 그림이 남의 평안을 빌어 주기는 턱도 없는 소리다. 결국 나는 한낮 손바닥만한 크기의 부적만도 못한 그림을 그리다 평생을 끝내는 것은 아닐까? 우리는 열사 묘가 있는 그 공원 입구를 빠져나와 다시 숙소로 돌아가 짐을 챙겨 밖으로 나왔다. 좀 있으니 우리를 데리고 역까지 갈 승용차와 미니 봉고가 나타났다. 그런데 이상하게 역으로 바로 가지 않고 역 근처 여관 앞으로 가더니 다른 중국인 5명의 표는 12시 48분으로 떠나는 것을 주고 우리 둘만 2시에 떠나는 기차표를 주고 그때까지 여기서 휴식을 취하고 가라는 것이다. 당연히 우리의 ‘전사’ 어 선생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다. 언성을 지르고 난리를 치니 표를 나눠주던 친구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다른 친구가 우리를 역까지 데리고 간다. 역에 도착했더니 아까 표를 나눠주던 친구가 있고 자기들 끼리 뭐라고 하더니 한참 만에 나와 다시 2시 표를 준다. 역시 안 된다고 하니 이번에는 둘이 같이 역 안으로 들어가더니 나오지를 않는 것이 아닌가? 이러다간 차도 놓치고 가지도 못하는 것이 아닐까 나는 초조하기만 한데 어 선생은 천하태평이다. 아니면 비행기 타고 가서 청구하면 된다는 것이다. 제 시간에 떠나는 표를 다 못 산 상태에서 우리를 우습게 알고 얼렁뚱땅 넘어가 보려고 한 것이지만 분명히 자기들이 어떻게 해서든지 표를 구해 올 것이란다. 암튼 어 선생이 없다면 나는 중국 여행은 꿈도 못 꿀 판이다, 이제 그 양반이 한국으로 돌아가고 나면 나는 그냥 국으로 핑구 숙소에서 죽치고 있다가 집으로 돌아가야 할 판이다. 아니다 다를까 어 선생 예상대로 그 중국인이 표를 구해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주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시간은 원래 계약대로지만 자리는 모두 이층이고 칸은 같지만 같은 호수도 아니다. 그러나 방법이 없다. 약간의 불편은 중국이니 감수하는 수밖에 다른 방도가 없다.
대합실에 들어가니 중국인 여행팀의 일원인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아마 처음부터 우리만 자기들과 달리 늦은 기차표라는 것을 알았을 것이지만 아무도 그것을 우리에게 말해 준 사람이 없었다. 그들의 겸연쩍어 하는 표정이 읽어졌지만 뭐 따질 수야 없는 일이다. 드디어 도착한 기차 칸에 들어가 짐을 풀어 놓고 창가의 좁은 의자에 마주 보고 걸터앉아 그 자리 뺏길 새라 화장실 가기도 거르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그런데 갑자기 어 선생이 “어! 뭐야?” 하길래 차장 밖을 보니 누군가 피투성이 몸뚱이를 부여안고 흔들며 울부짖는 모습이 정말 찰나처럼 보였다. 열차길 사고가 난 모양인데 사람들이 구경만 할 뿐 아무도 나서서 응급조치 등을 안 하는 것을 보면 사람은 이미 죽은 것 같고 기차길 사고가 대부분 그렇듯이 아마는 자살일 것이다. 누군가 결국 지난한 삶을 간단히 마감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저승이 있다면 저승에서나마 행복한 삶을 살기를 기원해 보지만 다 부질없는 노릇이고 그저 그 끔찍함만 계속 몸서리 쳐질 뿐이다. 그 부둥켜안고 흔들던 사람이 어 선생 말로는 여자였다고 하니 죽은 이가 그녀의 자식이 아니기 만을 빌 뿐이다.
점심은 어제 슈퍼에서 산 중국제 라면으로 해 치웠다. 중국제 라면이 근 우리나라 컵라면의 두 배 부피는 되는지라 그것 하나만 먹어도 배가 부르다. 저녁은 기차에서 파는 도시락을 사 먹고 역시 어 선생은 피곤하다고 일찍 들어가 잠에 들고 나는 가까스로 9시 반 취침시간까지 버텨 잠에 들었다. 아침에 깨서 저 번 여행 때도 가지고 갔다 못 먹고 남겨 두었던 비장의 한국산 컵라면과 잠시 열차가 선 사이 중국의 수수죽을 사들고 와 먹고 아침을 해결했다. 그리고 한참을 더 달려 정말 거짓말처럼 정시에 북경 서역에 도착을 했다. 이어서 어 선생 댁에 들려 저녁 모임을 같이 가자는 것을 뿌리치고 저번에 남겨 놓은 짐을 챙겨 핑구에 도착하니 아마 생애 마지막이 될 긴 장가게 여행이 드디어 끝났다.
장가게 시내의 구두 닦이. 구두 닦이 층이 다양하다. 아마 밑천이 안 드는 직업이다 보니 사람들이 쉽게 택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나도 언젠가 구두를 신고 나와 한 번 닦아 봐야겠다. 세모 구두라 잘 닦일 지 모르고 산 지 몇 년 동안 한번도 안 닦은 구두지만. 자예 행렬. 앞에 잡은 돼지가 보이고 뒤에 산 염소(양?)이 보인다. 왜 돼지는 잡고 염소는 그냥 메고 가는 지 모르겠다. 아마 돼지는 산 채로 메고 가면 난리 법석을 떨어서 메고 가기가 힘들기에 그런 것이 아닐까? 폭죽 소리가 고막을 찢을 만 하다. 폭죽 잔해. 돼지도 사자를 향해 절하고 있는 듯하다. 새끼 줄로 만든 의자. 가게에서 망고스틱을 사면서 어 선생이 실갱이 하는 사이 복숭아를 착칵! 망고 스틱 먹은 자리.
뗏목이 보이고.
작은 폭포를 배경으로 촌스런 모습을. 잘 보면 허리 춤에 행운의 프라스틱 컵을 차고 있는 모습이 보일 것이다. 그게 정말 지금 생각해도 기가 막히다. 손잡이에 혁띠를 껴서 차기도 안성 맞춤.
물 싸움. 물 바가지며 대나무로 만든 물 총 등을 보트 타기 전에 판다. 뒤에 서 있는 사람이 팬티를 안 입은 것 같다고 어 선생이 한마디 한다. 에이~~아무리?
날은 서서히 기울어 가고 배는 물따라 흘러가고 내 근심은 멀리 하늘을 나르고 사공의 벌린 입 속 잇몸에는 피가 배어 있고....?
장가게 시내 뚝 방길의 낙조.
뚝방 길 옆의 오래 된 집 담.
뚝방 길 옆의 낡은 민가. 뚝방 길의 난간. 돌로 글을 새기고 그 옆으로 그림을 새겨 넣은 석판이 끝도 없이 이어진다. 도대체 중국인들은 엉뚱한 일을 반복적으로 하기를 좋아한다. 아마 노는 손이 많아서 일 것이다. 일 없이 노는 도공도 많은 모양이다.
아침에 빨래 하는 사람들. 이른 아침 장가게로 진입하는 다리가 멀리 보이는 강가에서 오로지 빨래에만 열중인 사람들. 시내의 건물. 이층이나 삼층 까지는 이해하지만 그 위층도 이처럼 철옹성처럼 창문을 쇠창살로 막는다. 중국의 도둑놈들은 패러그라딩이라도 타고 들어 오는 모양이다. 하긴 안에서 떨어지는 사람도 막아야 할 지도 모른다. 애들도 있고 치매 걸린 노인도 있고 삶에 지친 사람도 있을 수 있고. 작은 동산 누각에서 내려다 본 장가게 시내. 동산을 내려 오며 만나 게시판. 그 자체가 그들 삶의 흔적이면서 시간을 살아 숨쉬는 예술이다. 기차 속에서의 우리의 점심. 워낙 중국제 컵 라면이 크다 보니 친절하게도 그 안에 프라스틱 포크가 있고 저처럼 입구를 팍 꽂는 것은 장가게 올 때 기차 속에서 중국인들한테 배운 수법. 기차 속에서 어느 농작물을 지나며 한 장. 창문이 흐리지만 흐린 이른 아침이다 보니 별로 표시가 안나고 반사광도 잘 안 보인다. 덕분에 그런대로 사진의 분위기가 살았다. 사실 좀 더 일찍 일어사 일출을 찍었으면 더 좋았을 것을 잠이 웬수!
어느 만큼 오다 만난 기차역. 뒤로 돌들을 쌓아 놓은 모습이 보인다. 돌이 많은 지역인가 보다. 나 아는 분의 동생 내외가 한국서 돌 사업을 하는 통에 전 세계의 돌 생산지를 다 돌아 본다는데 여기도 돌 사러 와 봤을까? |
출처: artkim 원문보기 글쓴이: 김석환
첫댓글 너무 재밌게 읽었습니다. 글을 읽는 동안 나도 같이 여행하는 것 같은 착각속에 빠졌습니다. 넘 감사합니다. 어교수님이 곧 한국에 가신다니 너무 섭섭합니다. 저도 데리고 가 주시지 ㅋ. 김교수님이 쓴 글 모두 잘 읽었습니다. 사진도 여러상황을 놓고 찍어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감사~~
아름다운 사진과 좋은글 잘 읽었습니다. 한번 다녀오긴 했는데 더욱 새로운 모습을 보는것 같아 두번 다녀온 기분입니다. 이렇게 봉사하시는 모습이 참으로 아름답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