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 쪽은 아니지만...
<새로운 시와 시민들의 합창>
지금 시단에서 벌어지고 있는 새로운 시도들은 새로운 시를 담보할 수 있을까? 문학평론가 세 명이 답했다.
문학동네 시인선이 시집 판형을 가로 255밀리미터, 세로 175밀리미터로 키우고, 가로를 더 길쭉하게 해, 위로 넘겨 읽는 형태로 바뀌었다. 문학동네 측은 '시의 실험성을 위한' 시도라고 밝힌다. 기획위원을 맡은 문학평론가 신형철은 "행과 연의 구분이 없는 산문시의 비중도 커지는데, 넓어진 판형 안에서 새로운 실험이 가능하다"며 "레이아웃 자체가 시의 한 실험이 될 수 있다"다고 말했다.
권혁웅(시인, 문학평론가) 시에 관한 한, 형식적인 실험이 유의미한 성과를 낳은 적이 많지 않다. 중요한 것은 내적인 실험이다. 이를테면 정형성을 부수고 나온 일상어의 실험, 공적언어를 깨뜨린 고백체의 실험, 관습적인 언어를 부순 과학성의 실험, 사적 고백을 넘어선 공적 언어의 실험 같은 것이 그렇다. 문학동네의 새로운 판형은, 최근 시의 장형화, 분절화를 담아내기 위한 시각적인 모색인데, 실제로는 읽기에 불편한 점이 없지 않다. 책 거치대를 무용하게 만들고, 들고 읽기에도 불편하다. 첫째, 잃은 것은 편의성이요 얻은 것은 시각적 효과다. 둘째, 새로운 시는 내적으로 새로운 시지 판형의 변화로 측정될 수 없다.
강계숙(문학평론가) 시는 언어 기호를 사용하며, 그 기호의 인위적 여백이 이미지 자체로 감각된다는 점에서, 시집의 새 판형은 시의 실험성을 배가시키는 효과가 있다. 기존의 시집이 시의 새로움을 부각시키지 못한다면, 낯익은 형태를 벗어난 시각적 자극은 혁신된 시의 면모를 더욱 각인시킬 수 있다. 다만, 그것은 보조 역할에 국한된다. 새 판형에 틀 지워진 시가 익숙한 감각과 인식에 기대 구태를 답습하고 있다면, 그것은 디자인의 외형을 바꾼 것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서정시학의 극서정시 시리즈에 조정권, 이하석, 최동호 시인이 참여, 각각 시집 <먹으로 흰 꽃을 그리다>, <상응>, <얼음 얼굴>을 나란히 내놓았다. 이들은"젊은 시인들을 중심으로 독자와 소통되지 않는 장황, 난삽, 기괴한 상상력이 유행하고 있다면서, 짦고 쉬우면서도 깊이와 아름다움을 아울러 갖춘 시를 표방한다"고 말했다. 이른바 '순수서정시의 正道'를 되살리겠다는 의지의 표명이다.
권혁웅 극서정시의 방향은 시가 품은 한쪽 좌표(산문에서 가능한 한 멀어지려는 좌표)로의 극단적인 추구에 해당할 것이다. 이런 시도, 언젠가 꼭 필요했다고 믿는다. 다만 그것이 최근의 약점에 대한 대안적 의의를 갖는다는 생각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최근 시들의 의의를 평가하기 위해서는 다른 잣대가 필요하다. 극서정시와 최근 젊은 시인들의 시는 상반된 지위를 갖고 있지 않다. 짧으면서도 환상적이거나 난해한 시가 있고, 길면서도 쉽고 깊이 있는 시가 있다. 극서정시는 서정시의 정도라기보다는(정도는 없다고 생각한다), 의미 있는 한 극단이다.
강계숙 시의 정도, '바른 길'이란 대개 옳고, 정당하고, 선한 길을 가리킨다. 언어의 한계를 언어를 통해 뛰어넘는 것이야말로 시의 본질이라 할 수 있는데, 만일 시에 그런 길이 있다면, 세상의 시는 모두 엇비슷할 것이고, 그래야만 할 터이다. 한계를 뛰어넘는다는 것은 오히려 정해져 있는, 혹은 너무나 자명해서 의심할 수 없는 것으로 여겨지는 논리, 형식, 범주를 거부하고, 부정하고, 배반하는 과정을 필요로 한다. 그래서 시는 때로 기존의 언어 형상으로부터의 이탈을 적극적으로 도모하는 형식이다. 바로 그렇기에, 시는 자유로울 수 있다. '순수'라는 가치 속에는 이미 순수/비순수, 옳음/그름의 명백한 이분법이 함축되어 있다. 공고한 이분법은 그 자체로 억압이다. 시는 그 억압과의 싸움이다. 시의 정도란, 결국 억압을 다시 만들어 세우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점에서, 역으로 시에 대한 부정이다. 서정성의 쇠퇴에 대한 염려가 서정성의 회복을 꾀하는 데로, 나아갈 수는 있다. 하지만 그것만이 시의 '바른 길'이라고 내세우는 것은 시의 본질을 부정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창비는 301번째 시집 나희덕의 <야생사과>부터 미술 작품을 표지로 사용하고 있다. 300번까지는 '띠 형태로 만든 패턴'으로 일정했지만, 알고 보면 더 이전에 미술 작품을 표지로 사용했다. 다시 돌아온 셈이다.
권혁웅 지극히 개인적인 견해로, 변화 가운데 통일을 추구한다(혹은 통일성 속에서 계열화된 변화를 추구한다)는 점에서는 의미 있는 시도라고 본다. 가끔은 감탄할 만한 표지들이 있었다. 문제는 개별적인 특성을 강조하다보니 천편일률적인 표지 디자인에서는 벗어났지만, 개별 시집마다 우열이 생겨났다는 것이다. 그래서 열에 하나쯤, 하이틴 소설이나 문예지 비슷한 표지가 나오고 있다.
조강석(문학평론가) 개인적인 얘기지만, 나희덕 시인의 그 시집에 해설을 썼다. 시집으로 출간되기 전에 작품을 먼저 읽고 해설을 쓰면서 그려본 시집의 이미지와 시집이 출간되었을 때의 디자인이 환기시키는 정서의 격차가 커서 놀랐던 기억이 있다. 모든 독자를 만족시키는 디자인은 없다. 시집은 독자들 개개인이 지닌 독서의 심상에 대해, 스스로 디자이너가 되어도 좋은 자유를 허용하기 때문에 시집이다. 시란 '이미지-폭탄'의 보고다. 모든 시집의 디자인은 누구에게는 반드시 불만족스러운 것이 될 수밖에 없다. 개인적으로 '별로'라고 생각하는 디자인은 시집의 제목을 한 땀 한 땀 고스란히 재현한 것이다.
'시를 읽는다'는 오랫동안 지속돼 온 감상 형태를 다른 차원의 감각으로 확장, 변용하는 작업이 시인들 사이에서 활발하다. 가깝게는 낭독일테고, <TEXT@MEDIA>전 같은 전시, 시인과 뮤지션이 함께 하는 공연도 그 예다.
권혁웅 여기에 대단한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시를 다른 매체로 번안하거나, 다른 매체를 감상하듯 읽히려는 시도는 번번이 실패했다. 달리 생각해보면, 그것은 시의 무용성, 약점, 무능을 너무 빨리 인정했기 때문이 아닌가? 처음부터 잘못된 방식으로 시에 접근한 건 아닌가? 시는 줄(시행)을 눈으로 줄줄 따라가며 소리 내어 읽는 문학이 아니다. 그것은 처음부터 공간적인 것이어서, 전체를 건물처럼 조감하면서 보아야 한다. 그 여백에서 떠오르는 이미지, 그 횡단에서 생겨나는 율격은 미술과 음악의 그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어서, 그것들을 그림이나 소리로 치환하는 순간, 시의 미감은 거의 대부분, 완전히 망가진다. 시를 읽는 가장 좋은 방법은 책상 앞에 조용히 앉아서 천천히 머릿속에서 상상하면서 읽는 것이다. 이 훈련이 안 되어 있으면 다른 어떤 매체와 연합해도 시를 감상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강계숙 과거 음유시인들이 낭송하던 서사시 및 구정시가와 활자화를 기반으로 창작자의 서명이 분명히 기입된 근대 이후의 시는 형식과 내용이 크게 다르다. 청중 혹은 독자가 그것을 받아들이는 지각 방식도 전혀 다르다. 이에 비추어볼 때, 최근의 실험적 작업은 장르의 경계를 벗어난 '다른' 예술로 보아야할 듯하다. 시와 미디어의 결합, 공연과 낭송의 결합, 미술+연극+시의 크로스-오버 등은 근래 주목받고 있는 '다원예술'의 한 예라 할 수 있다. 감각의 전이, 확장, 변용이 그 내부에서 일어난다는 점에서 더 이상 '시 읽기'의 다른 방식이라는 틀로 이해할 수는 없다고 본다.
웹이 대중화되기 시작할 무렵인 2000년, 김수영의 <풀>을 화두로 시를 이어나가는 하이퍼텍스트 실험이 있었다. 웹진은 시를 발표하는 또 하나의 창구로 떠올랐다. 웹 주도의 미디어 환경에 적응하려는 시도가 시단에도 있었던 것이다. 휴대용 미디어에 운영체제가 삽입된 '스마트 미디어'가 세상을 바꿀 것처럼 떠들썩하다. 시단의 특별한 움직임은 없어 보인다.
강계숙 시의 창작 방식이나 수용 형태가 미디어 환경 변화의 영향을 받을 수는 있다. 하지만 그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형태를 띨지는 예상하기 어렵다. 이-북의 대중화나 '읽는 시가 아닌 '듣는 시'로의 텍스트 변용 등은 휴대성을 이용해 시의 접근성을 높이는 방식이 될 수는 있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시를 읽는 독자층이 두터울 때 가능한 변화들이다. 가령 무료 애플리케이션 중 ' 시 감상하기'가 만들어진다고 해도, 그것을 이용하는 이들은 극소수에 불과할 것이다. 스마트 미디어에 시가 어떻게 적응해야 할 것인가가 관건이 아니라, 시를 읽는 대중 독자를 어떻게 늘릴 것인가가 더 큰 문제라 할 수 있다. 휴대용 미디어가 이를 위해 기여할 수 있는 측면이 있다면, 그것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더 필요하다.
조강석 보는 시, 낭송하는 시, 듣는 시, 던지는 시, 받는 시, 달리는 시, 기는 시, 나는 시, 어눌한 시, 스마트한 시 모두 가능하다. 다만, 창작에서 형태상의 변화는 재료의 요구에 부응하기 마련이라는 것을 말해야겠다. 스마트 미디어가 유행이니까 스마트 미디어에 맞춤한 시가 나오거나 필요한 것이 아니라, 스마트 미디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달라진 생활이 필요로 하는 언어가 절실해질 때쯤, 거기에 부응하는 언어 형식이 발생하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적응해야 한다'는 의무가 아니라 '표현해야 한다'는 절박함이 차오르면 새로운 말들이 독자들을 찾아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