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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비스님 - 제16강 금강경 18.一體同觀分
무비스님 금강경강좌 - 제16강 금강경 18.一體同觀分(일체동관분): 분별없이 관찰함
一體同觀分 第十八
須菩提야 於意云何오 如來有肉眼不아
如是니다 世尊이시여 如來가 有肉眼이니다
수보리야 어의운하오 여래가 유육안부아
여시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가 유육안이니다.
須菩提야 於意云何오 如來有天眼不아
如是니다 世尊이시여 如來가 有天眼이니다
수보리야 어의운하오 여래유천안부아
여시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가 유천안이니다
須菩提야 於意云何오 如來有慧眼不아
如是니다 世尊이시여 如來가 有慧眼이니다
수보리아 어의운하오 여래유혜안부아
여시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가 유혜안이니다
須菩提야 於意云何오 如來有法眼不아
如是니다 世尊이시여 如來有法眼이니다
수보리야 어의운하오 여래유법안부아
여시니다 세존이시여 여래유법안이니다
須菩提야 於意云何오 如來有佛眼不아
如是니다 世尊이시여 如來有佛眼이니다
수보리야 어의운하오 여래가 유불안부아
여시니다 세존이시여 여래유불안이니다
須菩提야 於意云何오 如恒河中所有沙를 佛說是沙不아
如是니다 世尊이시여 如來說是沙니다
수보리야 어의운하오 여항하중소유사를 불설시사부아
여시니다 세존이시여 여래설시사니다
須菩提야 於意云何오 如一恒河中所有沙하야 有如是沙等恒河어든 是諸恒河所有沙數佛世界가 如是寧爲多不아
甚多니다 世尊이시여
수보리야 어의운하오 여일항하사중소유사하야 유여시사등항하어든
시제항하소유사수불세계가 여시영위다부아
심다니다 세존이시여
佛告須菩提하사대 爾所國土中所有衆生의 若干種心을 如來悉知하노니
불고수보리하사대 이소국토중소유중생의 약간종심을 여래실지하나니
何以故오 如來가 說諸心이 皆爲非心일새 是名爲心이니라
하이고오 여래가 설제심이 개위비심일새 시명위심이니라
所以者何오 須菩提야 過去心不可得이며 現在心不可得이며 未來心不可得이니라
소이자하오 수보리야 과거심불가득이며 현재심불가득이며 미래심불가득이니라
제18, 한 몸으로 동일하게 보다[一體同觀分]
“수보리야,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여래가 육안(肉眼)이 있는가?”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 육안이 있으십니다.”
“수보리야,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여래가 천안(天眼)이 있는가?”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 천안이 있으십니다.”
“수보리야,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여래가 혜안(慧眼)이 있는가?”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 혜안이 있으십니다.”
“수보리야,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여래가 법안(法眼)이 있는가?”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 법안이 있으십니다.”
“수보리야,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여래가 불안(佛眼)이 있는가?”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 불안이 있으십니다.”
“수보리야,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저 항하강에 있는 모래에 대해서 여래가 말한 적이 있는가?”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는 그 모래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수보리야,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예컨대 저 하나의 항하강에 있는 모래들, 그 모래 수와 같이 많은 항하강이 또 있고, 그 모든 항하강의 전체의 모래 수와 같은 세계가 있을 경우, 이러한 것을 참으로 많다고 하겠는가?”
“대단히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처럼 많은 세계 가운데 있는 모든 중생들의 갖가지 마음들을 여래는 모두 다 아느니라.
왜냐하면 여래가 말하는 모든 마음은 다 마음이 아니라 그 이름이 마음일 뿐이기 때문이니라.
왜냐하면 수보리야, 과거의 마음도 찾을 수 없고, 현재의 마음도 찾을 수 없고, 미래의 마음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니라.[過去心不可得 現在心不可得 未來心不可得]”
분별없이 관찰함
일체동관( 一體同觀)은 ‘모든 존재를 일체로 동등하게 본다’ 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의 다섯가지 안목으로 일체동관의 내용을 이야기 하고, 유명한 금강경 이야기인 ‘과거심불가득 현재심불가득 미래심불가득’이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須菩提야 於意云何오 如來有肉眼不아
如是니다 世尊이시여 如來가 有肉眼이니다
수보리야 어의운하오 여래가 유육안부아
여시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가 유육안이니다.
세존께서 수보리에게 ‘여래에게 육안이 있는가’ 물으십니다.
수보리는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 육안이 있으십니다.’라고 답합니다.
육안(肉眼)은 육신에 딸린 눈입니다. 보통 사람들이 다 가지고 있지요. 육안이 기본입니다. 육안이 있고나서 천안이 있고 혜안이 있고 불안이 있고 법안이 있는 것입니다.
須菩提야 於意云何오 如來有天眼不아
如是니다 世尊이시여 如來가 有天眼이니다
수보리야 어의운하오 여래유천안부아
여시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가 유천안이니다
천안(天眼)은 오신통이나 육신통 중의 하나입니다. 천리 밖을 본다는 천리안보다도 훨씬 더 멀리 보는 신통의 눈입니다.
교리상에 보면 천안은 아무리 장애가 있어도 산하석벽을 꿰뚫고 그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다 볼 줄 안다고 합니다.
부처님께서는 수보리에게 여래에게도 그러한 천안이 있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수보리가 답했습니다. ‘여래께서 천안이 있으십니다.’
須菩提야 於意云何오 如來有慧眼不아
如是니다 世尊이시여 如來가 有慧眼이니다
수보리아 어의운하오 여래유혜안부아
여시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가 유혜안이니다
혜안(慧眼)은 지혜의 안목입니다. 잘 쓰는 말이지요.
천안은 고사하고라도 우리에게 지혜의 눈은 정말 필요한 것입니다. 천안이 신통에 가까운 눈이라면 혜안은 그 사람 심성의 문제이고 영혼의 문제이고 또 지혜의 문제이지요. 세상을 사는 슬기라고도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말하는 것은 우리들 입장에서의 혜안입니다.
부처님의 혜안은 ‘일체 존재를 꿰뚫어 보는 안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체존재를 어떻게 꿰뚫어 보느냐, 혜안을 갖춘 분은 우리처럼 육안으로 비쳐지는 대로 일차적으로 판단하지 않지요.
혜안은 꿰뚫어 본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눈이 여래에게 있느냐고 부처님은 수보리에게 묻습니다.
‘물론 여래께서 혜안이 있으십니다.’
수보리가 답합니다. 수보리도 대단한 것 같습니다. 여래가 혜안이 있는지 천안이 있는지 그것까지도 다 아니까요.
須菩提야 於意云何오 如來有法眼不아
如是니다 世尊이시여 如來有法眼이니다
수보리야 어의운하오 여래유법안부아
여시니다 세존이시여 여래유법안이니다
법안(法眼)이라고 하는 것은 ‘진리의 눈’입니다. 진리의 눈이란 특별히 모든 존재의 본성을 꿰뚫어 보는 눈이고, 실상을 보는 눈이지요. 부처님께서 이번에도 여래에게 ‘법안이 있는가’ 물으시자 수보리는 ‘여래께서 법안이 있으십니다’라고 답했습니다.
須菩提야 於意云何오 如來有佛眼不아
如是니다 世尊이시여 如來有佛眼이니다
수보리야 어의운하오 여래가 유불안부아
여시니다 세존이시여 여래유불안이니다
불안(佛眼) 부처의 눈, 이런 말입니다. 이 눈은 성불한 사람에게만 있다고 보아도 좋습니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물으셨습니다.
‘여래가 불안을 가지고 있는가’
그러자 수보리가 답합니다.
‘그렇습니다. 여래께서 불안이 있으십니다.’
육안, 천안, 혜안, 법안, 불안, 이 다섯 가지 눈을 오안이라고 합니다. 이것을 가지고 조사스님들은 ‘오안을 다 가지고 있다고 하지만 그것이야말로 바로 눈썹 밑에 있는 그 눈을 떠나있지 않다.’라는 표현을 합니다.
눈썹 밑에 있는 눈은 우리도 가지고 있는 육안이지요. 육안에서부터 혜안도 천안도 법안도 불안도 다 파생되고 발전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오안을 통해 부처님은 ‘이와 같이 여러 가지 남이 갖추지 못한 것을 갖추신 분’이라고 요약해도 좋습니다.
須菩提야 於意云何오 如恒河中所有沙를 佛說是沙不아
如是니다 世尊이시여 如來說是沙니다
수보리야 어의운하오 여항하중소유사를 불설시사부아
여시니다 세존이시여 여래설시사니다
부처님은 이렇듯 오안에 대해서 물으셔 놓고 말을 돌려서 ‘갠지스강 모래이야기를 내가 하더냐’ 하고 묻습니다.
항하강이 갠지스강이지요. 인도는 농업사회입니다. 강을 따라 농사가 많이 발달해 있고 강주변으로 도시도 형성이 되어 인구가 밀집합니다. 부처님은 당연히 사람이 많이 사는 곳을 따라서 교화를 펼치셨지요.
때문에 항하강 유역이 교화의 주된 영역이었습니다.
설법에서도 항하강 모래 이야기를 수없이 많이 했지요.
금강경 뿐만 아니라 다른 경전에서도 많이 하셨습니다.
이것은 모두가 다 이미 잘 알고 있는 이야기인데 새삼스럽게 부처님은 수보리에게 ‘내가 항하강의 이야기를 하더냐’하고 물으시는 것입니다. 수보리가 답합니다.
‘여래께서는 그 모래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須菩提야 於意云何오 如一恒河中所有沙하야 有如是沙等恒河어든
是諸恒河所有沙數佛世界가 如是寧爲多不아
甚多니다 世尊이시여
수보리야 어의운하오 여일항하사중소유사하야 유여시사등항하어든
시제항하소유사수불세계가 여시영위다부아
심다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다시 묻습니다.
‘내가 항하강 이야기를 했다고 하는데, 하나의 항하강에 있는 모래수와 같은 항하강이 있고 또 그 항하강의 모래숫자와 같이 많고 많은 세계가 있다고 한다면 그 세계가 얼마나 많겠는가.’
하나의 항하강 모래수만큼 세계가 있다고 해도 말할 수 없이 많지요. 그런데 그 모래숫자와 같은 항하강이 또 있고, 또 그 강의 모래수만큼의 세계가 있다고 하니 수보리는 ‘무수히 많습니다. 세존이시여.’라고 답했습니다.
佛告須菩提하사대 爾所國土中所有衆生의 若干種心을 如來悉知하노니
불고수보리하사대 이소국토중소유중생의 약간종심을 여래실지하나니
부처님은 수보리에게, 그렇게 말한 그 많고 많은 나라 국토중의 모든 중생들의 마음마음을 여래는 다 안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한사람 마음만도 얼마나 많습니까. 마음은 하루에도 수천수만 가지가 일어나고 사라지지요. 하물며 헤아릴 수 없이 많고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여래가 다 안다고 말씀하십니다.
마음
불교는 마음을 중시합니다. 육신을 분석하고 육신의 실상에 대한 이야기도 많이 하지만, 마음에 대한 이야기는 그 열 배 백 배를 더 많이 했다고 보아도 좋습니다.
그래서 단순하게 표현하면 불교는 마음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여기서도 부처님이 그 마음을 다 안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다 안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이것이 문제인 것이지요.
何以故오 如來가 說諸心이 皆爲非心일새 是名爲心이니라
하이고오 여래가 설제심이 개위비심일새 시명위심이니라
여래가 어떻게 그렇게 무수한 마음을 다 아는가, 그 이유가 나왔습니다.
‘왜냐하면 여래가 말한 그 많고 많은 마음이 다 마음이 아니고, 이름이 마음이다.’
시명위심이라고 나왔지요. 즉비의 논리입니다.자주 말씀드렸습니다만 금강경에는 스무 번도 넘게 ‘즉비’가 나옵니다.
‘마음은 곧 마음이 아니라 그 이름이 마음이다.’
말만 바꾸지, 똑같은 논리입니다.
우리가 마음이라고 이름을 지었으니까 마음이지 심(心)이라고 하면 또 심이고 마인드(mind)라고 하면 마인드이지요. 이름 짓기에 달린 것 아닙니까? 그런데 그 실체는, 무실무허(無實無虛)입니다. 무실무허란 실다움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지요.
마음이 헛된 것이라 하면, 그 마음 하나 두어서 우리가 책도 읽고 강의도 듣습니다. 또 실다운 것이라 실상을 찾아보면 아무 데서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마음은 실다움도 아니고 그렇다고 없는 것도 아닌 것, 무실무허가 딱 맞는 것이지요.
‘이 이름이 마음이다’라는 말은 그러므로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그것을 이해시키려는 것이지요.
이것은 말장난이 아닙니다. 마음이 실상이 그러하므로 그렇게 이해라는 뜻입니다.
마음만이 아닙니다. 육신도 부도 명예도 그 무엇도 사실은 그렇게 무실무허로써 있는 것입니다.
‘있는 것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이름이 있는 것이다’
그렇게 있는 것이기 때문에 놓을 수도 잡을 수도 없어요.
잡자니 늘 잡혀있는 것도 아니고, 놓아버리자니 또 현실 생활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이 이치에 달통해서 살면 문제가 없습니다. 무엇을 해도 얽매이지 않습니다. 집착하지 않고 가볍게 유유자적하게 사는 길이 열립니다. 그것이 해탈이라고 할까요. 자유자재라고 할까요. 그렇게 사는 길이 열립니다.
세상을 보는 불교의 관점
마음은 보통 우리 생각들의 모체가 됩니다. 그래서 한자에도 이 마음 심자가 들어가는 글자가 무수히 많습니다. 한 예를 들어도 마음을 바탕으로 해서 푸른색이 칠해져 있다 하면 정(情)이 되고, 밭 전자 밑에 마음 심을 두면 생각한다 하는 뜻의 사(思)가 되고 모양 상자 밑에 마음 심자를 쓰면 생각 상(想)자가 됩니다.
정(情)이나 사상(思想)이라고 하는 것은 마음 바탕에 건립된 것이지요. 그런데 이것이 참 문제가 많은 것입니다.
정이나 사상의 바탕이 되는 마음도 ‘모든 마음은 다 마음이 아니라 그 이름이 마음을 뿐이다.[諸心 皆爲非心 是名爲心]’라고 했는데, 그 위에 건립된 정이나 사상은 정말 조작배기이지요.
사랑이라고 한다든지 미움이라고 한다든지 기쁨이라고 한다든지 근심이라고 한다든지 기타 무슨 주의주장이나 사상 이라고 하는 것, 마음 위에 건립된 이 모든 것들은 사실은 하나도 의지할 바가 못 됩니다.
우리가 이데올로기 속에서 오랜 생활동안 살아왔고 물론 앞으로도 인류역사가 지속하는한 그런 것은 없을 수가 없겠는데 그것들의 실상을 제대로 꿰뚫어 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불교의 지혜입니다. 불교의 관점이예요.
불교의 관점을 우리가 갖추고 있으면 어떤 사상이나 어떤 주의 주장에 그렇게 흔들리고 끄달릴 까닭은 없다, 하는 것입니다.
공산주의니 민주주의니 사회주의니 보수주의니 진보주의니 그거 다 허망한 거예요. 고정된 것이 없어요. 그런데 거기에 그만 우리가 그 허상에 끄달려서 그 아까운 생명까지 잃기도 하고 그 많은 고통을 자아내서 많은 사람들을 그렇게 괴롭게 만들기도 합니다.
금강경의 이 이치를 만인이 공부해야 합니다. 그래서 가끔 저는 그렇게 말합니다. ‘이 금강경은 대한불교 조계종의 교과서가 아니라 전 인류의 교과서가 되어야 된다.’
금강경에는 누구 믿으라는 말 한 마디도 없습니다. 부처님 믿으라는 말 한 마디도 없어요. 믿으면 천당 간다 극락 간다 그런 말도 한 마디도 없습니다.
다만 ‘모든 존재의 실상을 냉정하게 꿰뚫어 보라’는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금강경은 어느 종교단체의 교과서가 아니라 전 인류의 교과서가 되어야 한다’라는 소신을 저는 갖고 있습니다.
금강경은 글도 짧지만은 그 내용도 간단합니다. 그러면서도 인간의 가장 무서운 상병, 무슨 보수다 진보다 그거 다 상병이거든요. 그런 것에 병든 사람들의 병을 아주 정말 제대로 통쾌하게 고칠 수 있는 특효약입니다.
다음으로 또 중요한 말이 나옵니다.
所以者何오 須菩提야 過去心不可得이며 現在心不可得이며 未來心不可得이니라
소이자하오 수보리야 과거심불가득이며 현재심불가득이며 미래심불가득이니라
부처님께서 마음을 마음이라고 하지 않고 그 이름이 마음이라고 하는 까닭을 밝히십니다.
‘수보리야 과거의 마음도 얻을 수 없고, 현재의 마음도 얻을 수 없고, 미래의 마음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니라.’
과거심은 이미 다 지나가 버렸지요. 지나간 과거의 마음은 말할 것도 없이 잡을 수가 없어요.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이 목숨 걸고 사랑했노라’하지만 한 번 찾아봐요. 뭐가 있는가, 없어요. 그러니까 우리들은 사실 과거에 내가 생각했던 마음에 연연해서 제일 힘들어하는데, 따지고 보면 허망한 환영에 사로잡혀 있는 것입니다.
과거는 이미 존재하지 않는데 내가 만든 그 허상에 사로잡혀서 인생을 완전히 엉망으로 만드는 것 아닙니까.
과거심이 불가득이라면 현재심 역시 불가득입니다. 현재심이라고 하는 것은, ‘내가 이 말을 듣고 있는 것이 현재의 마음이다’ 하는 순간 이미 과거가 되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찾아봐요. 없어요.’ 그래서 이 현재는 말이 있을 뿐입니다.
과거도 물론 말 뿐이고 현재의 마음이라고 하는 것도 결국 말 뿐입니다. 미래심은 아직 오지 않았으니까 당연히 없는 것이지요.
그래서 부처님은 ‘내가 모든 마음은 마음이 아니라 그 이름이 마음이다’ 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마음에서 건립된 보수도 불가득이고 진보도 불가득이고 어떤 사상 이데올로기도 다 불가득입니다.
과거심불가득 현재심불가득 미래심불가득
이 대목에 상당히 재밌는 이야기가 있어서 소개해드리면, 과거에 덕산(德山)선사라는 분이 있었습니다. 평생 수승한 근기와 뛰어난 두뇌로 금강경 박사 학위 논문이 여러 수 백편이 있을 정도로 금강경 연구를 아주 많이 했습니다. 그래서 금강경에 대한 논문이라고 할 수 있는 소초들이 한 걸망이 넘어설 정도로 많았어요.
‘천하에 내가 불교로서는 최고다’ 이렇게 큰소리 탕탕치고 살았지요. 그런데 어느 지방에 선불교가 있어서 ‘즉심시불(卽心是佛)이다, 이 마음이 곧 부처다. 경전 그거 필요없다.’ 그렇게 주장하는 파가 있다고 해서 그 사람들을 항복받으려고 길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용담선사라고 하는 이를 찾아가는데 마침 점심 때가 되어서 요기를 하게 되었습니다. 중국사람들은 대개 점심은 마음에 점만 찍으면 될 정도로 간단히 먹으면 된다고 생각하거든요.
덕산스님이 걸망을 내려놓고 떡 파는 할머니에게 떡을 몇 개 달라고 하였어요. 노보살님이 보니까 스님이 아주 등치도 좋고 그릇이 남달라 보이거든요.
그런데 걸망을 아주 무겁게 짊어지고 왔기에 ‘스님 걸망에 뭘 그렇게 무겁게 짊어지고 다니십니까.’ 물었어요. ‘금강경 공부를 해서 내가 지은 금강경 논서가 이렇게 많아져서 자랑삼아 지니고 다닌다’고 덕산스님이 대답했습니다.
‘그래요, 금강경을 그렇게 잘 아신다고 하니까, 그러면 떡을 자시기 전에, 내가 금강경에 대해 한마디만 딱 물어보겠습니다. 만약에 대답을 하신다면은 떡을 그냥 드릴 것이고 만약에 대답을 못하신다면 저한테서는 떡을 자실 생각을 마십시오’ 노보살님이 그렇게 말했습니다.
금강경에 대해서 묻는다고 하니, 덕산스님에겐 앞으로도 외우고 뒤로도 외우고 거꾸로도 외우고 옳게도 외우는 금강경이니, 또 연구를 좀 했습니까, 얼른 물어보라고 하였습니다.
노보살님이 물었습니다.
‘금강경에 과거심 불가득이요 현재심불가득이요 미래심불가득이다 라고 했는데, 스님 어느 마음에다 점을 찍으시렵니까’
노보살님도 수준이 그쯤은 되어야 하는 것이지요.
점심(點心)의 심은 사실은 중심이라는 뜻입니다. 하루 중의 중심이라는 뜻이거든요. 그런데 어쨌든 공교롭게도 마음 심(心)자를 쓰지요.
‘금강경에는 과거 현재 미래 어느 마음도 찾을 길이 없다고 했는데, 어느 마음에 점을 찍을 것인가?’ 이에 대한 답은 금강경을 찾아봐도, 팔만대장경 어디를 뒤져봐도 없지요. 천하의 금강경박사인 덕산스님도 아무리 답을 찾으려고 끙끙대도 찾을 길이 없습니다.
‘스님 내한테는 떡을 사먹을 생각하지 마세요. 내가 떡 그냥 줄려고 했는데 금강경 박사가 되어 가지고 그 말도 대답을 못하니 떡을 줄 수가 없습니다’
덕산스님이 이렇게 노보살님에게 크게 한 방망이, 얻어맞았습니다. 평생에 처음으로 그런 경책을 당한 것입니다.
‘내가 두손 들었소, 하지만 용담스님 계시는 곳을 알려주시오’해서 덕산스님은 용담스님을 찾아갔습니다.
사실은 그 자리에서 눈을 뜨고 한발자국도 움직이지 말아야 했는데, 어쨌든 용담스님이 사는 절까지 당도를 했어요.
덕산스님은 장군출신에 체격도 크고 워낙 기가 펄펄 나는 분이니까, 들어가자마자 ‘용담(龍潭)에 왔는데 용도 보이지 않고 못도 보이지 않는구나’ 하고 우레 같은 소리로 고함을 쳤습니다. 용 용(龍)자 못 담(潭)자, 용담은 용이 사는 못이라, 용도 있어야 하고 못도 있어야 하지 않겠어요. 그런데 사실 용담은 그 이름이 용담인 것이지요.
덕산스님의 큰 소리에 전대중이 쫓아나오고 진짜 용담스님도 나왔습니다. 용담스님이 덕산스님을 보아하니, 보통 그릇이 아니었지요. 그래서 용담스님은 ‘그대가 진정 용담에 이르렀다’ 그렇게 영접을 해드렸어요.
저녁에 두 사람이 불교에 대한 여러 가지 형편들, 불교에 대한 잡다한 소리를 의레적으로 주고 받다가 밤이 이슥했습니다. 덕산스님이 객실로 가려고 용담스님 방에서 나오니 캄캄해서 신을 찾을 수가 없거든요.
‘촛불을 좀 댕겨주면 신을 찾을 수 있겠습니다’
용담스님이 촛불을 붙여 주어서 덕산스님이 그 촛불을 가지고 막 신을 찾으려고 하였습니다.
그때 용담스님이 촛불을 확 불어서 껐습니다.
신을 찾으려니 덕산스님은 얼마나 촛불을 땅에 바싹 댔겠습니까. 그런데 그 불을 끈 이 순간, 그만 확 열려 버린 것입니다. 캄캄한 그것이 촛불에 의해서 밝아졌다가 다시 또 캄캄해진 것은 어둠과 밝음의 문제라. 덕산스님은 거기에서 확 깨닫게 된 것이지요.
덕산스님이 용담스님의 방에 다시 들어와서 큰 절을 하였습니다.
‘내가 이러한 도리가 있는 줄을 미처 몰랐습니다’
이튿날 덕산스님은 짊어지고 다니던 금강경과 금강경 소초, 논문 논서들을 대웅전 앞마당에 전부 모아서 불을 놓아놓아 책을 태웁니다.
그 책을 태우면서 ‘궁제현변(窮諸玄辯)이라도 약일호(若一毫)를 치어태허(置於太虛)요’ ‘이 세상에 있는 가장 현명한 도리를 내가 다 공부해서 그 현명한 이치를 이야기 한다고 해도 그것은 마치 털끝하나 머리털 하나를 이 허공에다 던지는 것과 같다.’
이 허공에다가 머리털 하나 던져봐야 무슨 표시가 있겠습니까.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지요. 이 큰 허공과 머리털 하나와 비교가 안 되잖아요.
‘갈세추기(竭世樞機)라도 사일적(似一滴)을 투어거학(投於巨壑)이라’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을 내가 다 했다고 해도 그것은 물 한 방울을 저 큰 구렁텅이에다가 던지는 거와 같다.’
말하자면 종정도 지내고 대통령도 지내고 온갖 도리를 다 아는 대학자이고, 그 모든 중심이 되는 일을 설사 내가 했다고 해도, 큰 구렁텅이에 물방울 던지면 무슨 흔적이 있습니까. 그와같이 하잘 데 없는데, 내가 그간 잘난 듯이 큰소리 땅땅 치고 살았다는 것이지요.
그동안 금강경 연구한 그 많은 논서들이 다 물방울 하나 같은 것, 털끝하나 같은 것이었는데, 한 생각 눈이 열리니까 자신은 온 우주와 하나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눈을 뜨고 보니, 온 우주가 바로 나인데 ‘털끝 하나가 내거다’‘나뭇잎 하나가 내거다’ 이렇게 좁은 소견으로 어리석은 삶을 살 일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화는 연극을 해도 좋을 것 같아요.
역사에 빛나는 용담스님과 덕산스님의 큰 만남이 있어서 후인들에게 큰 귀감이 됩니다.
금강경의 ‘과거심불가득 현재심불가득 미래심불가득’ 대목에는 반드시 용담스님과 덕산스님의 이 이야기를 짚고 넘어가는 절차가 있어서 소개해 드렸습니다.
출처 : 염화
[출처] 금강경 강좌 제16강 - 무비스님|작성자 단장중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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