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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변화의 원리
나는 어떤 책이나 글을 읽었을 때 무슨 소린지 도무지 알 수가 없는 경우, 나는 나의 무지나 이해력 부족, 또는 공부의
미진함을 탓하지 않는다.
그 글을 쓴 사람이 글을 쓸 줄 모르거나, 국어 공부가 안 된 사람이거나, 또는 자기가 말하려고 하는 대상에 대해서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본다. 글을 읽고 이해를 못하는 것은 내 탓이 아니라 글을 쓴 사람의 탓이다.
글이나 말을 할 때는 읽고 듣는 사람이 알아듣도록 해야 한다.
그럴 생각이 전혀 없는 사람은 혼자말을 하는 것이지 언어생활을 영위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교육에 있어서 서양과 동양의 차이가 무엇인가 하면 서양의 경우 전문지식의 수준과 언어구사의 능력이 대개 비례
하는데 반해 동양의 경우 전문분야에 대한 깊이와 언어능력의 불균형이 극심한 인간들이 양산된다는 점이다.
때문에 한의학이건, 점술이건, 풍수건 한경지에 간 것 같기는 한데, 언어능력은 전혀 구비되어 있지 않아서 자기가
깨달은 바를 제대로 표현할 능력이 없는 사람이 많다.
선불교의 조사들도 물론이요, 음양오행론의 교과서라는 "우주변화의 원리"를 저술한 한동석이라는 사람도 내가 보
기에 이 범주에 들어간다.
아마도 천하의 한동석을 두고 언어구사의 능력에 문제가 있다고 폄하하여 말하면 구름을 보고 너무 건방지다고 야단
칠 사람이 나올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한동석씨의 문장력과 표현력은 문제가 많은 것이 사실이다.
얼라들이 옹아리를 해도 엄마는 뭘 원하는 소린지 알아듣는 법인데.
그러나 한동석씨는 그 두까운 책 한권 속에서 상대가 알아들을 수 있는 소리를 몇마디도 못한 사람이다.
그 나열해 놓은 단어들의 절반 이상은 국어대백과 사전에도 없는 단어들이다.
사람들이 전혀 모르는 단어를 그야말로 현란하게 늘어놓으면서 그 단어들의 의미에 대해서는 설명을 생략하고 있다.
한동석씨는 자기 혼자 알고 자기만 사용하는 단어들을 엄청나게 동원해서 책을 저술하였는데 이것은 언어의 구사라
고 보기 힘들다. 이런 문장의 구사는 유식함의 증거가 아니라 국어를 제대로 못 배운 것에 가깝다.
서양의 철학자나 과학자들을 보라, 그들의 저작을 읽어보면 그야말로 난해하고 복잡한 현상이나 대상에 대한 심오한
연구의 결과를 전문지식이 없는 보통의 독자들이 읽어도 다 이해할 수 있도록 서술해 놓는다. 이것이 저술이다.
한동석의 "우주변화의 원리"는 그런 면에서 볼 때 저술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책이라고 보기 힘들 정도로 난독증을 유발시킨다.
그러면서도 지금까지 "우주변화의 원리"는 음양오행론에 대한 권위있는 저작물로써 동양학의 교과서로 여겨져 왔다.
많은 사람들이 단 한줄도 이해하지 못하면서 이 책을 읽은 척을 해야 했다.
과연 그런 정도의 가치가 있는 책인지 가족들과 함께 검토해 보려고 한다.
부분부분의 발췌가 아니라 그 책의 전문을 하나하나 같이 읽어보고 이해하기 위한 노력을 해보려고 한다.
"우주변화의 원리"라는 책에 대한 검토는 동양학을 공부하는데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라고 나는 본다.
왜냐하면 이 책에는 동양학의 제문제가 숨김없이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 책을 충분히 여러번 읽지 않아서 이해를 못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책은 한번 읽으나 만번 읽으나 이해가 불가하기는 차이가 없다.
언어의 규칙과 약속에서 벗어난 것은 만번을 읽어도 언어가 되지는 않는 때문이다.
서양의 철학서들을 보면 한번 읽어서는 그 진미를 알기 어려운 책이 많다.
읽으면 읽을 수록 그 뜻이 분명해지는 책이 있고, 한 구절을 이해하기 위해서 오랜 사색을 해야 하는 글들도 많다.
그러나 "우주변화의 원리"라는 동양의 씨나락류는 난해한 성격에서 그런 책들과는 많이 다르다.
독자들이 저자의 심오한 사유를 소화하기 위해 거듭 읽고 다시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이 책은 문장 자체의 의미를
알 수가 없어서 불필요한 고민을 하게 만든다.
이 책을 백독을 하고 천독을 해야 문리가 터져서 깨칠 수 있는 것이 음양오행이라면 음양오행은 과학도 아니고,
학문도 아닌 일종의 주술이라 할 것이다.
내가 지금부터 "우주변화의 원리"를 소개하는 이유는 동양학이나 한의학을 공부하려는 후배들에게 이런 것이 동양
학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동양학을 이렇게 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가르치려는 것이다.
자기가 알아듣지 못할 소리를 진리인 것처럼 떠받들거나 모르면서 안 것처럼 위선을 떠는 짓을 물려받지 말라는 것
이다.
이해가 안되는 것은 이해가 안 된다고 말해야 한다.
한마디도 알아듣지 못하면서 마치 알아들은 듯이 연극하고 쑈하는 짓은 이제 때려치울 때가 왔다.
그런 동양학은 사기이고 그런 의술은 속임수이다.
지금부터 "우주변화의 원리"라는 책의 원문을 같이 살펴 보자.
이게 과연 학문인지 이것이 어떤 원리에 대한 설명이 될 수 있는지를 같이 보자.
“우주변화의 원리”에 대해 본격적인 정독에 들어간다.
게시판을 통한 그룹리딩이다. 모든 사람들이 하나의 글을 같이 보면서 같이 생각하고 같이 토론하고 같이 공부하는
새로운 스타일의 독서다. “우주변화의 원리”라는 책은 골방에서 조용하게 땅콩 씹어가면서 혼자서 독서의 희열을
탐닉하기에는 너무나 수준이 높고 심오한 책이기 때문에 이런 다중이 함께 하는 집단독서 외에는 읽어낼 방법이 없
는 책이다.
나는 이 책을 혼자서 끝까지 다 읽어낸 사람이 있다면 이해 여하에 관계없이 완독 자체에 크나큰 존경을 보낸다.
그리고 미리 밝혀두는 것은 동양학에 관심이 있거나 음양오행론을 알고자 하는 사람은 이 책을 이번 기회에 일독해
야 할 중요한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끝까지 읽는데 한 1년은 걸리겠지만 그만한 값어치가 있다는 것은 구름이 보증할 수가 있다.
이번 기회를 놓치지 마시기 바란다. 그리고 이 정독이 끝나는 날 구름과 함께 읽어온 검토와 토론의 내용은 텍스트인
“우주변화의 원리”를 훨씬 뛰어넘는 동양학의 이해와 사유를 담고 있게 되리라는 것도 의심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우주변화의 원리를 제대로 읽어보고 싶은 사람은 구름타운에 가면 된다”는 것이 동양학계의 통설이 될지 모른다.
그리고 이 책이 어느 정도 수준의 독자를 예상하고 쓰여진 책인지 저자의 생각을 알 길은 없으나 이 책이 요구하는
독자의 지식과 사전공부의 양이 상당한 수준과 양에 달하기 때문에 그런 바탕이 마련되지 못한 사람은 아무리 읽어
도 흰 것은 종이요, 검은 것은 글자라는 것 말고는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러한 지식과 사전에 필요한 공부를 구름이 주해와 각주로서 해드릴 것이기 때문에 이제는 이 책이 주는 어마무시
한 두려움과 공포에서 벗어나서 한번 읽어보는 데 도전할 생각을 품어도 좋을 것이다.
같이 읽어나가다 보면 왜 혼자서는 도전해봐야 안 될 일이었겠는지 아시게 될 것이다.
지금부터 같이 해나갈 “우주변화의 원리”라는 책의 정독에 대한 안내말씀을 드리면, 이 그룹리딩의 리더인 구름의
주해는 지금 읽고 있는 브라운 색깔로 하며, 책의 원문은 청색 글자로 하기로 하고, 내가 참고자료로 인용하는 다른
문헌의 내용은 녹색글자로 하기로 한다.
이 책에는 워낙 어려운 용어들이 많이 나오기 때문에 일반인들이 잘 알지 못하는 어려운 고어나 전문용어에 대한
각주는 붉은색으로 달기로 한다. 각 단락의 큰 제목은 검은색 글자이다.
한자의 표기는 괄호 없이 쓰거나 한글 표기에 괄호를 붙여 한자를 병기하거나 간에 한동석씨의 원문을 그대로 따른다.
책의 내용은 목차만 제외하고는 전문을 그대로 다 소개하기로 한다.
특별히 구름이 주해를 할 만한 내용이 없는 부분이라도 가족들이 전부 다 같이 읽어본다는 의미에서 생략하지 않기로
한다. 제일 먼저 소개하는 부분은 저자인 한동석씨가 쓴 책의 서문이다. 같이 보자.
緖論 1
사람은 변화무상(變化無常)한 지구 위에서 살고 있다. 지구는 인간과 만물을 가득히 안고서 陰陽이 교차하는 日月과
서로 맞물려 돌아가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궤도(軌道)를 어기지 않고 불문율(不文律)인 자연법칙에 의해서 돌고 있
다. 그런데 만일 일월과 지구가 그 운행의 질서를 잃고 제멋대로 돌고 있다고 하면 우리는 안심하고 지구 위에서 살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지구와 일월은 아무런 사심(死心)도 없이 다만 돌기 위하여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사리사욕(私利私慾)의 함정(陷穽)에서 헤매고 있다. 오히려 무정한 금석초목(金石草木)
마저 자연과 같이 호흡하고 있지 않은가?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라면서 정(精) 없는 자연보다도 오히려 인색(吝嗇)한 것이다.
이것이 인간에 주어진 유일한 시련이므로 철학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수천 년의 세월을 소모했건만 아직까지
도 자연 그대로의 신비로서 남아있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관심은 크다. 인간이 만일 이 위대한 숙명적(宿命的)인 문제에 무관심하였더라면 역사는 신비의 장막
(帳幕) 속에서 아직까지 깨어나지 못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관심은 자연과 투쟁하는 데 있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 태어날 때부터 자연과 싸웠고 또 싸우는 동안
에 경험과 지각이 생겼다.
이것이 이념과 결합됨으로써 지식이 발전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인간의 욕구심(慾求心)과 의혹(疑惑)은 자기의 生成과 變化에 대한 문제에까지 미치게 되었다.
이와 같이 철학과 인간은 수레(車)의 양륜(兩輪)과 같아서 서로 떨어질 수 없는 것으로 되었다.
그리하여 인간은 태란초목(胎卵草木)이 生成變化하는 현상과 그 본질을 밝혀내는 일에서 유리(遊離)될 수 없었다.
태란초목(胎卵草木) : 새끼를 배는 짐승과 알을 낳는 짐승과 풀과 나무, 즉 모든 생명체를 아울러 표현하는 말
이와 같은 인간의 노력은 필경은 우주로 하여금 그 신비의 열쇠를 내던지게 할지도 모른다.
진실로 인간이 이러한 능력의 소유자인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능력이란 것은 다만 수동적이며 묘사적(描寫的)이다.
다시 말하면 인간은 우주가 자기의 운행법칙을 상(象)으로써 드리워(垂象) 줄 때에 한하여 자기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다.
수상(垂象) : 북송시대 도서역파의 인물인 유목이 쓴 “역수구음도(易數鉤隱圖)에 ”무릇 괘라는 것은 하늘이 스스로
그러한 상을 드리운 것이다“라는 구절을 저자가 인용한 것으로 보인다.
만물에 내재된 법칙이나 원리가 밖으로 드러나 비치는 것을 묘사한 말이다.
치마를 길게 드리우는 것은 수상(垂裳)이라고 한다.
그런데 상(象)은 형이 아니므로 정욕적(情慾的)인 인간의 혼탁한 이성작용(理性作用)으로써 상을 알아내기는 결코
용이한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세속적인 인간이 자기의 지능으로써 현상계의 모든 존재를 인식(認識)한다는 것은 바로 경험적인 오성작
용(悟性作用)의 구사(驅使)에 불과하므로 이것으로는 물질계의 현상은 영사(映寫)할 수는 있을는지 모르지만 진정
한 실상을 파악하기는 어려운 것이다.
왜냐하면 물질계라는 객관적인 대상은 주관적인 변화의 실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일반적인 이성으로써 형이상(形而上)에 속하는 변화의 실상을 연구하기 위해서, 즉 천수상(天垂象)
한 상을 알아내기 위해서는 선배들이 복사(複寫)해 놓은 우주의 象을 먼저 연구함으로써 우주의 불문율인 실상을
연구해 낼 수 있는 기반을 닦아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정직한 자연이 드리워주는 우주의 계시를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이것은 볼 줄 몰랐다. 때로는 복희(伏羲)와 문왕(文王) 같은 성철을 기다려서 상을 바로
포착(捕捉)해서 유형의 그림을 남기게 했으니 이것이 바로 하도낙서가 복희괘도와 문왕괘도로 옮겨져서 비로소
문자화하게 된 상수원리(象數原理)의 창조인 것이다.
하도, 낙서와 복희, 문왕 : 복희가 황하를 건널 때 물 속에서 튀어나온 용마의 등에 그려져 있었다는 신비한 무늬를
하도(河圖)라 하고 문왕이 낙수가에서 건져올린 거북의 등에 찍혀있던 점을 낙서(洛書)라 한다.
이에 대해서는 뒤에 가서 자세히 설명할 때가 있을 것이다.
상수원리(象數原理) : 중국의 역학은 크게 의리역(義理易)과 상수역(象數易)의 두 가지로 나누는데 상수원리는
상수역의 하도낙서에서 출발하는 상수의 변화원리를 말한다.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책에서 한동석씨가 주역에 대한 언급을 할 때 자세한 설명을 보태기로 한다.
19세기의 말에 이것을 다시 금화교역(金火交易)의 실상인 정역괘도로 옮겨놓은 것이 김일부(金一夫)의 특출한 계발
(啓發)인 것이다.
오호라! 문왕 이후 3천년의 공업(功業)이 간방(艮方) 일우(一隅)에서 이루어질 줄을 누가 알았으리요.
복희도(伏羲圖) 3천년에 문왕도(文王圖)가 나왔고 문왕도 3천년에 정역도(正易圖)가 나옴으로 인하여 천수상(天垂象)
물수형(物垂形)하는 우주의 원리는 변화의 모습을 노출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으므로 黃帝 이후 5천재(載)의 “수수께
끼”였던 “내경(內徑)은 드디어 비밀의 장막을 거두게 되고 五運과 六氣의 법칙은 드디어 象과 數를 開發하는 역군(役
軍)으로 등장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宇宙變化의 상수가 비록 도서(圖書)로써 나타났다고 할지라도 이것만으로써 우주개발의 수단이 완성된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하면 이와 같은 기본법칙의 구비(具備)는 우주의 상을 찾기 위한 설계에 불과한 것이다.
실제로 우주의 상을 찾으려면 그 설계에 의하여서 가장 찾기 쉬운 대상을 먼저 선택하여야 한다.
즉, 우주에서 직접 찾는 것보다는 오히려 인체에서 찾는 것이 빠르고 또한 용이한 것이다. 왜냐하면 우주의 법칙과
상(三掛圖의 象)을 인체에 비겨서 볼 때 어느 하나 할 것 없이 그 범주의 밖에 있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육체적인 동정(動靜)은 형(形)으로 나타나지만 정신적(精神的)인 동정은 상(象)에서 나타나기 때문이
다. 다시 말하면 인간의 육체 속에 숨겨놓은 칠정육욕(七情六慾)은 상으로만 표현되는 것이므로 우리는 이 상(象)을
통하여 사람의 정신을 알 수 있는 것인즉 부득이 인간의 象을 포착하는 방법을 먼저 배우는 것이 가장 용이하고 또
빠른 방법인 것이다. 그러므로 공부자(孔夫子)가 근취저신 원치저물(近取저身 遠取저物)하라고 한 것은 바로 이것을
가르친 만고불멸의 법칙인 것이다.
서론이 꽤 길기 때문에 둘로 나누어 나머지 부분은 다음 회에서 같이 읽기로 한다.
서문의 절반만 보아도 이 책은 사람이 읽을 책이 못된다.
동양학의 전반에 걸쳐서 방대한 지식을 머리 속에 담고 있지 않은 사람은 단 한 줄도 무슨 소린지 알아들을 수 없다.
씨나락에 평생을 바친 꾼들끼리나 알아들을 소리로 시종일관 점철하고 있는 책이다.
금화교역이 도대체 무슨 소린지 알고 이 책을 읽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 것인지 나는 궁금하다.
김일부가 어떤 사람인지, 그의 정역괘도가 뭔지 누가 알고 본다는 소릴까?
이 책의 서문을 읽은 사람은 일단 여기서 책을 덮고 30년 정도 동양학에 몰두하여 한경지에 이른 다음에 다시 돌아와
본문을 읽어야 한다. 수많은 사람들이 서론만 보고 덮은 책이다.
청년기에 서론을 읽고 결국 백발의 노인이 되어 관 속에 들어갈 때까지 다음 페이지를 들추지 않은 사람도 부지기수다.
김일부는 19세기 초에 태어나 20세기를 2년 앞둔 시기에 죽은 사람이다. 76세를 살았다. 본명은 항(恒)이다.
역학에 깊은 조예가 있었다고 하는데 정역(正易)이라는 개념을 주창한 사람이다.
정역이 뭔가 하면 지구의 역은 지축이 23.5도 기울어진 것에서 비롯된다는 사상이다.
김일부는 조선시대 말기에 나라가 개화되면서 서양의 문물이 밀려들어올 때에 신학문도 귀동냥을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지축이 기울어져 있고, 그것 때문에 사철계절의 순환과 지구의 기후변화가 지금 세상과 같이 정해져 있음을 알았던 것
인데, 여기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이 지축이 바로서면 새 세상이 도래한다는 끔찍한 황당사상을 만들어내기에 이르런
것이다. 23.5도 기울어진 지축이 똑바로 서는 날 선천시대는 가고 새로운 후천시대가 열린다는 사상이 정역사상이다.
이게 바로 개벽의 개념이다.
한동석은 이런 황당무비한 정역사상을 하도 3천년 낙서 3천년의 총결실로서 이 땅에서 열린 위대한 사상이라고 설파
하고 있다.
지축이 바로 서면 지구는 그 날로 끝이다. 개벽이고 후천세계고 바랄 건덕지가 없다.
지구상에 다시 생명이 문명을 건설하려면 10억년의 세월이 흘러야 할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정역을 제대로 설명하지도 않으면서 이 책은 교묘하게 정역에 기반한 개벽이라는 비과학적인
몰아의 경지로 독자를 끌고 간다.
그리하여 동양학이 미신이나 다름없는 황당무계한 요설이라는 것을 더없이 효과적으로 전파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나는 한동석을 한의사나 동양학자로 보지 않는다.
미신적인 비결과 학문을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당연히 “우주변화의 원리”라는 책은 원리와는 전혀 상관없는 책이다.
공자의 근취저신, 원치저물은 일부의 정역과 같은 혹세무민하는 요설을 얻는데 인용할 소리가 아니다.
가까이에 우리 몸의 어디에서 멀리에서 만물의 어디에 지축이 바로 서는 따위의 황당한 씨나락이 있다는 말인가.
서론부터가 환상적이고, 갈 수록 점입가경이다. 화회를 보자
緖論 2
그러나 인간은 칠정육욕에 사로잡혀서 자연법칙에 순종(順從)하는 데 인색(吝嗇)하다.
인색은 욕심에서 생겨나고 욕심에는 목적이 따른다.
그러므로 목적을 대상으로 하는 것으로써 욕심이 없는 것이 없고 욕심이 있는 것으로서 인색하지 않는 것이 없다.
그렇다면 무정한 초목은 오히려 인색하지 않는데 유정한 인간이 오히려 인색한 것은 왠일일까 하는 문제를 풀어내고
또 그 오점을 시정하는 것이 바로 신비의 문을 여는 방법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아무리 자연법칙에 정통하고 또 근취저신하는 방법을 안다고 할지라도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고
하면 그것으로써 도문(道門)을 열어낼 수는 없는 것이다.
칠정육욕(七情六欲) : 황제내경의 철학적 요결은 마음과 몸의 관계를 규명하는 데 있다. 그래서 오운육기(五運六氣)
와 칠정육욕이 설명된다.
내경의 질병관은 장부의 기운이 감정을 일으키고 이에 따른 마음의 굴곡과 요동이 병을 부른다고 보는 것이다.
칠정(七情)은 즐거움(喜), 노함(怒), 슬픔(哀), 두려움(懼), 사랑(愛), 미움(惡), 욕심(慾)이며, 육욕(六欲)은 생사(生死)
와 이목구비(耳目口鼻)의 여섯 개 문을 말한다. 동양의 수련관은 이 칠정육욕에서 벗어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러므로 오인(吾人)은 제일 먼저 인간에 대한 본질부터 연구하고, 따라서 천지자연의 법칙대로 행하는 것만이 도통
(道通)의 기반을 이루는 “열쇠”가 된다고 생각하는 바이다.
그런즉 이 문제를 탐구하는 방법은 우선 인물의 생성변화를 알아야 하고 인물의 생성변화를 알려면 우주변화의 법칙
을 알아야 하고 그 다음으로는 그 법칙과 변화에 의해서 인체의 비밀을 따져 나가면 인체와 정신의 활동을 알게 되는
것이므로 자연히 선악과 정욕(情慾)의 소자출(所自出)을 알게 될 것이다.
이러한 원리를 알게 된 인간은 불교가 말하는 바의 법신(法身)으로 화(化)하게 되어서 그의 이성은 순수 본연의 경지
에 이르게 되므로 모순대립은 지양(止揚)되고 다만 유정유일(惟精惟一)한 평화의 경지에 서게 되므로 칠정육욕(七情
六欲)의 포위망(包圍網)을 벗어나게 되어서 정신은 “明”으로 통일되는 것인즉 그 때 만상의 변화는 바로 장중(掌中)
에 있게 된다.
유정유일(惟精惟一) : 정일(精一)이라는 말의 사이에 유(惟)를 넣어 나눈 말이다.
티없이 맑고 고운 것이 정(精)이니 정일하다 함은 오직 순백함을 의미한다.
생각할 유(惟)는 의지태가 가미된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지고지순한 상태를 추구하는 마음이다.
그렇다면 明으로 들어가는 門, 즉 순수이성(純粹理性)의 경지가 과연 어디인가 하는 것을 연구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지구 위에서 만물이 움직이게 되고 인간이 역사를 창조하기 시작한 이후 희세(稀世)의 성인들이나 역대의 철인들은 모
두 이 문을 두드렸던 것이다.
그러나 문고리를 잡은 이는 진실로 드물었다.
바로 이것이 석존(釋尊)의 극락(極樂)의 문이요, 공자의 시중(時中)의 문이요, 예수의 십자가의 길인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일부(一夫)의 十十一一之空도 바로 그 문인 것이다.
그러나 이 문은 우리의 형체를 담는 가실(家室)의 문이 아니고 만물의 상을 실은 우주의 문인 것이다.
만물의 지각이나 감각이 출입하는 형이하의 문이 아니고 이성과 통각(統覺)이 출입하는 형이상의 문인 것이다.
일부(一夫)의 十十一一之空 : 이런 소리를 막 뱉어내니까 독자들이 어떻게 대처를 할 수가 없다.
지만 아는 소리를 읽는 사람이야 알던 말던 신경도 안 쓰고 그냥 흘리고 가 버린다.
일부의 십십일일지공이라? 무신 소린지 감이 잡히나?
이 말은 김일부의 정역사상을 한마디로 표현한 십일음(十一吟)인데, 아주 대표적인 씨나락이다.
일부는 지구상의 모든 모순과 대립은 지구의 공전궤도가 비뚤어져 있고 지축이 기울어져 있기 때문이라고 보고
공전궤도가 정상화되고 지축이 바로서면 1년이 정확하게 360일이 되고 사계절이 없어지면서 용화세계가 시작된
다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의 세상이 1,2,3,4,5,6,7,8,9,10으로 움직이므로 역생도성(逆生到成)하여 분열하는 세계라고 한다.
이게 “一十의 시대”다. 반면에 정역시대에는 10,9,8,7,6,5,4,3,2,1의 순서로 세상이 움직이므로 도생역성(到生逆成)
하는 “十一의 시대”라는 것이다.
“十一”은 김일부의 정역시대를 상징하는 숫자이다.
1에서 10으로 가는 세계와 10에서 시작해서 1로 끝나는 세계의 차이점을 설명하는 것은 일부의 정역을 다 말하는
것이 된다. 이 책의 본문 곳곳에 정역사상이 나오므로 서론에서는 이 정도 소개로 끝내고 자세한 것은 본문에서
다루기로 한다.
공자가 “역계사(易繫辭)”에 “형이상(形而上)을 위지도(謂之道.)요, 형이하(形而下)를 위지기(謂之器)”라고 한 것은
실로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은 物과 象의 문을 구분하여 놓은 것이다.
그렇지만 이 경지를 찾는 데는 문호(門戶)가 많다. 비록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것들은 모두 이명동질(異名同質)의
문에 불과하다. 극락(空)에서 찾아도 좋고 시중(時中)에서 찾아도 좋고 십자가에서 찾아도 좋다.
그러나 인간은 극락이나 시중(時中)의 문이 어디 있는지 모르며 십자가의 길도 알지 못한다. 그야말로 “지재차산중
(只在此山中)에 운심부지처(雲深不知處)”일 뿐이다.
지재차산중(只在此山中)에 운심부지처(雲深不知處) : 산속에 있다는 것만 알 뿐 구름이 깊어서 어딘지를 모른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할 수 있다. “저 흰구름을 헤치라. 그 속에 극락도 時中도 십자가도 있으리라.”고.
왜 그런가 하면 거기에(흰구름) 바로 청명(晴明)의 부고(府庫)가 있고 정토진경(淨土眞境)의 空이 있고 예수가 못박
힌 십자가도 바로 여기에 있으리라.
그것이 변화의 문이요 모순대립이 지양되고 신명(神明)이 통일되는 기토(己土)의 문인 것이다.
청명(晴明) : 비가 온 뒤에 맑게 개는 것. 청명(淸明)과는 다른 말임.
부고(府庫) : 관청의 창고. 보물이 가득한 곳.
기토(己土)의 문 : 개벽의 문이라는 뜻이다. 일부의 설명에 따르면 선천세계는 일십미토(一十未土)의 시대요, 후천
세계는 십일기토(十一己土)의 시대이다.
미토와 기토의 차이 역시 일십과 십일의 차이처럼 설명하는데 책 한권의 말이 필요하다. 본문에 가서 자세히 다룬다.
※ 흰구름을 헤치면 답이 있다”는 한동석의 말은 맞는 소리다. 구름을 헤치면 뭐든 다 있다.
그러므로 이것은 주자(周子)가 제창한 十無極의 문이며 예수가 못박힌 십자가의 상이기도 한 것이다.
우리들이 찾고 있는 신명의 문은 바로 이것인즉 이것이 곧 도통의 길잡이인 것이다.
그러므로 철학도는 반드시 우주의 법칙을 알고 이 문에 들어가야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십자가의 형상을 한번 연구해 볼 필요가 있다. 가령 사람의 형을 한마디로 말한다면 이것은 바로
십자의 형상인 것이다. 십자는 본시 음양이 교회(交會)하는 상을 취한 것이다.
그런즉 “─”과 “|”이 상교(相交)하는 점에 만물의 정신이 있다는 것을 뜻(象)한 것이니 이것이 바로 정신이 교역하는
금화교역(金火交易)의 문이다. 무극(無極)의 中이며 己土의 心이며 十十一一의 空을 창조하는 곳인 것이다.
대저 철학의 대본(大本)은 하나이므로 아라비아 數를 창조함에 있어서도 十字를 “10”으로 표시한 것을 보면 東西가
모두 우주의 大本을 동일점에 두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좀더 풀어 말하면 “10”은 “1+0=10”인즉 이것은 1이 9까지 가서는 數가 다하므로 第十位에 이르면 다시 1로 환원하고
그 불어나게 되는 바의 행위(行位)에 空(0)이 맞게 되므로 十爲을 “10”으로 표시한 것이다.
그런데 동양에서 “十”으로 표시한 것은 十자가 내포한 무극(無極)의 정신인 태극(太極)에 주안(主眼)을 두었지만
서양에서는 수(數)가 발전하는 모습인 바의 현상면(現象面)에 주안을 두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이 點(無極)이 진실로 악(惡)과 선(善)이 모순을 지양하여 통일로 돌아가는 곳이며 私利와 私慾이 公利와 公慾으로
변화하는 우주의 기본이며 또한 인도(人道)의 바탕인 것이다.
그런즉 우주의 변화와 인도(人道)의 소장(消長)이란 것은 동일체 속에 있는 두 개의 일측면(一側面)으로서 우주
자연의 전체적인 법칙에 종속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象을 연구하는 데 있어서 인도(人道)를 중시하는 것은 이것이 모든 존재 중에서 우주를 가장 잘 본뜬
신기지물(神機之物)이므로 연구를 용이하게 할뿐만 아니라 반면(反面)으로는 형체가 동정하는 사이에서 나타나는
象을 엿보기에 가장 알맞은 우주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변화원리를 논하려는 것은 위에서 논한 바의 상수의 법칙으로 인물의 象을 파악하는 것을 목적의 제1단계로
하는 것이나, 만일 지고(至高)한 明의 단계에까지 이르려면 신명(神明)을 정화(淨化)하여 무극(無極)과 空의 진경
(眞境)에까지 이르러야 하는 것이다.
그러고서야 우주의 모든 신비를 인간의 明 앞에 굴복시키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 점은 역대의 성인들도 다만 골자만을 내세워 후학의 나갈 길만을 열어놓은 것뿐이고 신묘의 경지는 유의
이불개(留意而不開)한 곳이었고, 반면에 범부(凡夫)들은 욕발이미개(慾發而未開)한 곳인데, 필자가 감히 此를 논하
려는 것은 당돌하기 한량(限量) 없는 줄을 모르는 바 아니다.
그러나 다만 이 글이 동양정신의 신기운(新機運)을 열 수 있는 계기(契機)만이라도 되었으면 하는 생각으로 붓을 든
것이다.
유의이불개(留意而不開) : 뜻한 바 있어 알리지 않음(알지만 말하지 않음)
욕발이미개(慾發而未開) : 욕심을 내지만 아직 알지 못함(몰라서 말하지 못함)
지금까지 “우주변화의 원리” 서론을 모두 읽어 보았다. 구름과 가족들의 소감이 다 다를 것이다.
그러나 이 서론으로서 우리 모두 “우주변화의 원리”라는 책의 성격은 짐작되는 바가 있었을 것이다.
이 책은 저자가 명백하게 밝힌 바와 같이 김일부의 정역사상(正易思想)에 몰입되어 그에 부화뇌동한 비정(非正)의
동양학이다. 개벽사상에 끼워 맞춘 왜곡된 음양오행론인 것이다.
앞으로의 강독을 통해 이와 같은 사실을 우리는 확인하게 될 것이다. 하회로 가 보자.
이제부터 본문이다. 이 책은 크게 전편 법칙편(法則篇)과 후편 변화론(變化論)의 두 부분으로 나누어지는 데 제일
먼저 나오는 내용은 서양철학의 세계관에 대한 비판이다.
그다지 심층적인 분석이나 비판은 아니고 서양철학사의 대강을 흝고 있다. 일종의 도입부이고 이 책의 주제하고는
크게 관련이 없기 때문에 구름이 주해를 할 만한 부분이 많지 않다.
서양철학사를 한번 상식선에서 짚어본다는 기분으로 가볍게 읽으면 될 것이다.
제1장 총론(總論)
제1절 서양 철학의 세계관 비판
변화원리란 변화하는 본체가 무엇이며 또는 그 본체가 어떻게 움직여서 현상계를 형성하는가 하는 우주변화의 현실
과 그의 본질을 연구하는 원리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과거나 현재를 통해서 진리를 탐구하려는 사람들
의 일대숙제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인간의 지혜는 이와 같은 신비를 알아내려고 총동원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것으로써 인간된 의무를 다하는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인간의 고상한 탐구욕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우주의 본체는 무엇이며 또한 그 본체는 어떠한 작용으로 인
하여 화려한 현상계를 나타내는가 하는 문제를 목표로 연구를 거듭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동양에서는 陰陽의 체(體, 본체), 용(用, 작용)관계로써 상수학원리(象數學原理)를 세웠고, 서양에서는
본체론과 우주론으로써 이 문제를 연구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이것을 변화원리라는 명제로써 이하(以下)에 논하려고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주변화의 본체와 작용은 다만 “변(變)”과 “화(化)”의 종합과 분열작용에 불과하므로 吾人이 소위 변화라
고 하는 개념은 그 속에 본체와 작용의 개념이 이미 포함되어 있는 복합개념이므로 변화원리라고 하는 것이 간단하
면서도 또한 반면으로는 철학의 본질적 의미를 포함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논하려고 하는 바는 우주의 본체와 현상을 연구하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선 서양철학의 연구방향을 관찰함으로써 그것을 동양철학적 입장에서 비판하고 아울러 변화원리에서
전개시킬 바의 방향을 제시하려는 것이다.
1. 본체론 비판(本體論 批判)
서양철학은 본체를 연구함에 있어서 양적(量的) 고찰(考察)과 질적(質的) 고찰의 두 개의 면을 택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선 양적 고찰부터 살펴보면 우주의 본체를 단원(單元)이라고 주장하는 학파와 다원(多元)이라고 주장하
는 학파가 있다.
단원론(單元論, Singlarism)을 주장하는 학파로는 우주의 본질을 “물”이라고 본 탈레스(Thales), “무제한자(無制限者)”
로 본 아낙시만드로스(Anaximandros), "유(有)“로 본 파르메니데스(Parmenides), 유출설(流出說)을 주장한 플로티
노스(Plotinos), 자기원인(自己原因)으로 본 스피노자(Spinoza) 등이 있다. (물론 그 외에도 있지만)
그러나 吾人이 가장 숭배하는 것은 그리스의 최고의 학자이며 또한 서양철학의 창시자라고도 볼 수 있는 탈레스인
것이다. 그가 본체로서 제창한 “물”(本體)은 상수학이 주장하는 운동의 본체와 동일하다는데서만이 아니라 그것이
비록 간단하기는 하지만 “물”이 운동의 본체가 될 수 있는 기본적인 논지가 잠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을 현대철학류로서 생각하면 미흡하다고 할 것이다.
본체(本體) : 그리스철학의 우주론은 “아르케(arch)”의 탐구였다고 할 수 있다.
아르케는 “시작”이라는 뜻을 가진 말이다. 아르케를 탐구한다는 말은 즉 “우주의 시작”이 무엇인가를 찾는다는 말과
같다. 그래서 아르케는 우주의 시작이라는 뜻과 함께 우주를 이루는 가장 근본적인 요소라는 의미도 갖는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이 아르케를 “불”이라고 생각하고 태양을 만물의 근원이라고 보았다.
반면에 탈레스는 아르케를 “물”이라고 생각했는데, 탈레스의 물은 물질적 요소로서의 물이 아니라 증발했다가 다시
비가 되어 내리는 운동의 주체로서 본 것이었다.
탈레스가 본 “물의 운동”과 상수학에서의 “물의 운동”이 동일한 것이라는 주장은 상당한 비약이긴 하지만 “물”을
우주만물의 근본적인 요소로 보았던 동서양 철학의 대비는 그런대로 무의미하지는 않아 보인다.
한동석이 이 책에서 “본체(本體)”라는 말로 사용하는 것이 바로 “아르케(arch)”이다.
탈레스 : 탈레스는 7현인의 한사람이고 서양철학의 아버지라고 불리우지만 그의 글이나 말이 전해지는 것은 없다
아리스토텔레스나 아폴로도로스를 비롯한 몇몇 학자들의 언급에 의해서 우리는 그의 사상을 짐작해 볼 따름이다.
그가 피라밋의 그림자를 재서 그 높이를 계산해 냈다는 이야기나 일식을 정확하게 예언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는 기하학의 다섯 가지 정리를 하기도 했다.
태어난 일시는 불명하나 죽은 것은 제58회 올림픽 대회 기간 중(BC 548~545)이었다고 하며 그때 나이 78세였다고
한다.
아낙시만도로스와 아낙시메네스는 그의 제자인데 아낙시만도로스는 아르케를 “무한자(無限者)”라고 주장했고,
아낙시메니스는 “공기”라고 주장했다.
탈레스 이후에 수많은 학자들이 아르케를 서로 다르게 주장했는데, 이것들은 모두 탈레스가 탐구했던 우주의 시작과
근본물질에 대한 연구의 소산이라 말할 수 있다.
그래서 탈레스를 서양철학의 아버지라고 말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서양철학의 본질을 발견할 수 있다.
탈레스로부터 호킹에 이르기까지 서양철학의 관점은 바로 “우주의 시작과 근본물질이 무엇인가를 찾는 것이었다.
이것을 요소환원주의적 사고라 말한다
그러나 그 시대의 모든 철학적 경향은 동서를 막론하고 전부 그랬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그 시대의 철학을 평가하는 표준은 그 속에 진리의 골간이 있는가 어떤가 하는 점뿐이다.
만일 고대의 소박한 철학이라 할지라도 진리로서의 골간만 구비하고 있다면 거기다가 화장(化粧)하는 정도로 용이
하겠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골간이란 것은 바로 “물”에 영원성(永遠性)과 자동성(自動性)과 변화성(變化性)이 있다고 본 그것을 말하
는 것이다. 후일 탈레스의 학설을 부정하게 된 것은 탈레스가 어떤 법칙적인 象에 의해서 말했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 다음은 플로티노스의 “─”이고 그 “─”에서 이성-영혼-물질이 되어서 유출한다고 한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탈레스처럼 골간만 세운 것은 아니고 “─”에서 이성-영혼-물질로 발전한다는 데까지 살을 붙여놓았다.
그럴 바에는 그것이 어떻게 하여서 그렇게 발전하는 것인지 그 과정만이라도 설명했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것으로써 중단하였기 때문에 후인의 비판을 받게된 것은 실로 안타까운 일이라고 할 것이다.
스피노자는 우주의 본체를 자기원인(自己原因)이라고 설명하고, 이어서 현상계가 나타나는 것은 소위 자기원인, 즉
능산적 자연(能産的 自然, Natura naturans)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것도 역시 능산적 자연인 자기원인이 어떻게 변모되어서 만물로 되는가 하는 점을 설명하지 못하였다.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은 불비(不備) 때문에 대두(擡頭)하게 된 것이 다원론(多元論)이다.
다원론자들은 단원론만으로서는 단원인 본체에서 현상계가 어떻게 이루어질 것인지를 생각할 수 없기 때문에 현상계
의 다양다단(多樣多端)한 것을 중심으로 본체를 생각하기 시작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주의 본체를 넷으로 본 엠페도틀레스(Empedokles), 원자로 본 데모크리토스(Demokritos) 등이 그의
대표자라고 할 것이다.
이들이 주장하는 다원론은 분석적인 면과 개별적인 면에 치중하였기 때문에 진정한 의미의 본체와는 점점 거리가
멀어지게 되었다.
첫째로, “본체”라는 개념 자체에서 나타나는 모순이다. 본체라는 개념은 변화하는 다양적인 현상이 산출되는 기본,
즉 스피노자가 말한 바 능산적 자연과 같은 것이다.
그런즉 만물 발생의 근원이 바로 본체일 것인데 근본인 본체가 어찌 다원일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점이다.
다시 말하면 本이란 것은 만물의 시초이며 조종(祖宗)이므로 만사(萬事)의 종말(終末)과 多의 양상(樣相)은 모두
단원인 본체에서 전개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물구하고 만일 근본을 다원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벌써 본체일 수는 없고 지체(支體)일 뿐인 것이다.
그런즉 여기에서 말하는 소위 다원적 본체(多元的 本體)라는 것은 그 개념 자체에서부터 이율배반적(二律背反的)
모순을 범하게 되고 마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원(多元)이라는 개념 속에는 벌써 단원(單元)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둘째로, 가령 다원을 본체로 인정한다고 할지라도 서로 독립된 다원이 어떻게 분열과 통일을 조화하면서 병행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세계는 상부상조와 모순대립으로써 이루어지는 세계인즉 반드시 다원적 본체가 이 문제를 조화시킬 수 있는 이론적
근거를 발견하여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을 해결하기 위하여 엠페도클레스가 애(愛)와 증오(憎惡)로써 통일을 설명하려고 하였지만 그것으로
써 자연 전체의 모습을 설명해낼 수는 없었다.
또한 원자론자들이 “다원(多元)의 본체가 일원의 공간내에서 운동한다”고 하는 것도 공간이 일원인 한 다원의 본체
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이 “본체란 성질상 동일한 무차별의 세계인 원자 자체의 기계적 운동”이라고 하는 점으로 보면 이것은
본체가 단원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다원일 수는 없다.
또한 “성질상 동일한 무차별의 세계”가 바로 원자 자체라고 하였으니, 그것은 원자의 운동요인이고 우주의 본체는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주의 본체를 원자라고 보고 또한 그것을 “성질상 동일한 무차별의 세계”로 본 것은
우선 양자(陽子)와 전자(電子)의 차별성마저 무시한 것이 된다.
그뿐만 아니라 “우주의 본체인 원자는 자체의 근본속성에 의해서 운동한다”고 하지만 그 근본속성을 설명하지 못하
는 한, 즉 어떻게 움직이며 또 어떻게 환원되는가 하는 점에 있다.
다시 말하면 원자가 우주의 본체라고 하는 한 이것으로써 일월성신(日月星辰)의 운행, 춘하추동의 성립, 주야(晝夜)
의 교대, 만물의 생사 등의 제반 철학적 문제를 해명할 수 있어야만 할 것이다.
그렇지만 원자론으로써 여기에 해답을 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상수(象數)의 변화원리는 이와 같은 신비에 대해 법칙적인 해명을 할 수 있다.
여기서 단원론과 다원론을 요약해 보면 다원론은 다원(多元)이란 개념 자체부터 인정하기 곤란하다.
그렇지만 탈레스가 제창한 바의 단원론 같은 것은 가장 특출하다 할 것이다.
물론 본고는 앞으로 “물”이라는 우주의 본체가 어떻게 변화하며 또한 어떻게 운동하는가 하는 것을 논하겠지만 여하
간 탈레스가 “물”을 본체로서 입론(立論)한 것은 가치가 있는 것이다.
그 다음에는 단자론(單子論, monadologie)이 있는데 이것은 쿠자누스(Cusanus), 라이프니쯔(Leibniz), 브루노
(Bruno) 등에 의해서 제창된 학설이다. 이 학파에서는 우주의 본체를 단자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브루노는 “多의 세계는 神인 ─에서 나온 양면적 현상”이라고 한다. 즉 물질이 극미(極微)로 분화(分化)되어서 또다
시는 분화할 수 없게 되면 그것이 바로 단자인 바 단자는 물심(物心)의 양면성을 띠고 있다고 하는 것이다.
라이프니쯔는 성질적으로 차이를 가지고 있는 단자가 자기를 표현하는 것이 바로 우주의 표현이며 또한 그것이 동일
한 내용을 표현하는 점에서는 일치된다고 하였다.
이상의 두 학설을 볼 때 브루노의 설은 만물이 무한 분열하게 될 때 형체는 이미 없어지게 되나 그 형체가 소멸된 바
의 무형인 象이 바로 단자(單子)라고 하였다. 이러한 단자는 물심 양면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즉 이것은 吾人이 논하려는 바의 無이며 또한 空의 창조과정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볼 때 브루노의 사상은 고차적인 경지에까지 이르렀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다만 유감스러운 것은 그가 주장하는 바의 극미(極微)로 분열된 물심양면(物心兩面)인 단자가 어떻게 통일
하여 하나로 돌아가며 또 하나는 어떻게 현실세계를 나타내는가 하는 법칙적인 논리를 제시하지 못하였다.
단자가 동일한 내용을 표현하면서 일치한다고 하는데 이것은 브루노와는 다른 면이 있다.
브루노가 말한 바의 단자는 물질이 다시 분할할 수 없는 극미의 상태인즉 이것은 무형이므로 여기에는 성질적 차이
란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그가 성질적 차이를 가진 단자가 자기를 표현한다고 한 것은 잘 납득되지 않는 것이다.
왜냐하면 성질이 있다는 말은 유형이라는 의미이고 성질이 없다는 말은 무형의 象을 뜻하는 것이다.
그런즉 상은 무형이기 때문에 동일한 내용을 표현하며 또 일치시킬 수가 있지만, 만일 성질적 차이를 가진 것을 단자
라고 한다면 그것은 곧 유형을 의미하게 될 것인즉 그것으로써 내용의 일치를 기(期)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런즉 그가 말한 바와 같이 성질적 차이가 있는 단자가 자기를 표현한다고 하면 그가 말하는 단자라는 것은 바로 有
의 形을 가리키는 것이므로 반드시 “이러한 극미세(極微細)의 분화작용을 함으로써 그것이 동일한 내용을 표현한다”
고 하는 것은 후속이 있어야만 할 것이다. 그렇게 되어야 브루노와도 일치될 것이며 또한 상수원리와도 부합될 것이다.
여기서 이상을 요약 고찰하여 보면 탈레스의 본체론에는 법칙의 결여라는 결점이 있었고, 플로티노스나 스피노자도
그들이 설명한 바의 현상적 이론이 미흡하였기 때문에 겨우 본체의 일면을 제시함에 불과하였고 브루노는 토화작용
의 성립은 약견(略見)하였지만 그 작용의 내용을 밝히지 못하였다.
이와 같은 결과는 오로지 본체론적이며 또한 우주론적인 법칙이 결여한 서양철학 자체가 지닌 바의 모순에서부터
이루어진 고질(痼疾)이었던 것이다. 이상은 양적으로 본 본체의 고찰인즉 다음에는 질적인 면에서 본 본체를 고찰하
여 보기로 하겠다.
저자는 서양철학의 본체론을 두 가지 측면에서 비판하고자 했는데, 여기까지가 양적(量的)인 측면에서의 본체론에
대한 고찰이었다.
하루분의 양이 너무 많으면 가족들이 읽고 따라오는데 힘이 들지 모르기 때문에 이 정도에서 한번 자르고, 본체론의
질적(質的)인 측면에 대한 비판은 내일분에서 소개하기로 한다.
한동석이 양적인 본체론이라고 말하는 것은 단원론이냐 다원론이냐 하는 면을 말함이다.
우주의 근본 물질이 오직 하나로 귀일(歸一)하는가 아니면 복수의 다양한 요소인가 하는 점이다.
이다음에 논하는 질적인 면이란 우주론의 또 다른 두 가지 해석방법인 유심론(唯心論)과 유물론(唯物論)에 입각한
고찰이다. 이것은 내일 보기로 하자.
읽다 보면 골이 지끈거리고 머리에 쥐가 나는 가족들도 있으리라고 생각되는데 이런 글도 자주 읽어야 머리가 계발
된다.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정독하면서 따라오시기를 부탁드린다.
오늘 내용은 제1장 제1절 1.본체론 비판의 뒷부분이다.
여기서 다루는 내용은 서양철학의 유심론(唯心論)과 유물론(唯物論)에 대해서이다. 같이 보자.
질적 고찰에 있어서는 유심론(唯心論)과 유물론(唯物論)이 주류가 된다.
그밖에 일원론(一元論)이나 이원론(二元論)의 구별도 있으나 이것은 양적 고찰에서 이미 언급한 바의 단원론과 다원
론 속에 각기 포함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며, 또한 일원(一元)이나 혹은 이원(二元)이라는 개념은 개념 자체부터가
양적인 면에 부합되는 것이므로 여기서는 논외로 할 것이다.
유심론(唯心論, spirituaalism)은 우주의 본체는 정신이고 자연계의 모든 현상은 정신의 표현이므로 물질을 정신의
산물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물질은 독립적인 존재가 될 수 없고 정신의 파생물(派生物)이거나 혹은 정신에
예속되는 현상에 불과하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유심론자들(唯心論者)은 만물은 항상 주관적(主觀的)인 인식(認識)의 제약을 받는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데 유심론(唯心論)은 플라톤(Platon)의 이데아(Idea)에서부터 시작하여서 플로티노스의 유출설, 즉 “물질은 정
신인 일자(一者)의 대원(大原 )에서 유출된다”고 하는 설을 위시하여 라이프니쯔, 버클리(Berkeley), 피히테(Fichte),
헤겔(Hegel) 등 많은 학자들이 있다.
그러나 만물은 情神에서 파생되거나 예속된다고 하는 점에 있어서는 모두 동일하다.
그런데 이들의 주장은 반대학파의 많은 비판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첫째로 정신에서 이질적인 물질이 어
떻게 생길 수 있는가?
둘째로 인간정신을 주(主)로 하고 거기에서 유추함으로써 우주정신을 합리화할 수 있는 이론적 근거는 무엇인가?
셋째로 만물이 인간의 생리적 혹은 환경적 상태 여하에 따라서 인식되는 현상이 달라진다고 하는 사실만으로써 과연
만물은 인간정신의 제약을 받는다고 할 수 있겠는가 하는 문제들에 대하여 철저한 대답을 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유심론(唯心論)이 정신을 우주의 본체라고 함으로써 반대에 봉착하게 된 것은 첫째로는 이 학파에서 우주
변화의 법칙을 납득하지 못한 데 큰 원인이 있었고, 둘째로는 정신의 개념을 구명(究明)하지 못하고 다만 전제에서
정신을 본체로 정하여 버렸다는 데 큰 결점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반면 동양철학은 우주운행의 법칙과 정신의 개념부터 철저하게 따짐으로서 철학(情神硏究)의 기본을 삼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철학의 지상목표였기 때문이다.
물론 정신문제는 “정신론”에서 자세히 다룰 것이지만 다만 여기에서 말해 둘 것은 정신이 우주운동의 본체가 된다고
하는 점이다.
그 이유는 정신은 우주의 본체인 태극이 무극작용(無極作用)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공(空)”에서 창조가 완성되는 것
인즉, 우주정신이나 태극정신은 동일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만물의 발현이란 것은 정신의 외향과정(外向過程)에서
일어나는 정신의 운동 때문에 변화하는 종속적인 존재인즉, 이것이 바로 우주의 본체이며 또한 목적일 수밖에 없다.
서양철학의 본체론을 비판해 오던 것은 괜찮았는데, 갑자기 동양철학에 대한 언급을 하자마자 한동석의 문장은 갈지
자 걸음을 한다.
앞 문장에서 씨는 “정신이 우주운동의 본체다”라고 말하였다.
이것은 유심론을 지지하는 결론이다. 그런데 다음 문장에를 보면 그 이유가 나온다.
씨의 문장은 동양철학만 나오면 꽈배기처럼 꼬여서 어느 것이 주어이고, 어느 것이 술어인지 도저히 알 수 없는 해괴
망측한 꼴을 보이고 만다.
한번 꽈배기 문장의 극치를 감상해 보자. 글을 절대로 이렇게 써면 안 된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악문의 표본이다.
다음 문장은 “이유는...”하고 시작한다.
문장 전체의 주어는 “이유는”이다. 그렇다면 술어는 “~이다”가 나와야 한다.
그러나 이 문장에는 “~이다”가 없다. 그 대신 “우주 정신이나 태극정신은 동일한 것이다”라는 술부가 있는데 이것을
주어와 연결하면 이렇게 된다.
“(정신이 우주운동의 본체가 된다고 하는)이유는 우주정신이나 태극정신은 동일한 것이다”라는 문장이 된다.
주어와 술어가 안 맞을 뿐만 아니라 문맥이 연결되지도 않는다.
이유라고 하는 것과 술부가 전혀 엉뚱한 소리다.
우주정신과 태극정신이 동일하기 때문에 정신이 우주운동의 본체이다“라는 말이 이해가 되는가? 그
중간에 삽입구가 들어있어서 읽는 사람을 더 헛갈리게 만든다.
"정신은 우주의 본체인 태극이 무극작용(無極作用)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공(空)”에서 창조가 완성되는 것인즉"이라
는 부분인데 이 문장은 전체가 “우주정신과 태극정신이 동일한 것”이라는 이유가 된다.
그러니까 앞 문장의 이유는... 하고 시작해놓고 그 이후는 앞문장과 전혀 관계없는 뒷문장 내의 술부에 대한 이유를
나열하고 끝나버린 것이다.
주어와 술부가 증발하고 있고, 이유와 설명이 전혀 연결되지 않으며, 앞문장과 뒷문장이 논리적인 인과관계를 보이
지 않는다. 이런 것은 말이 아닌 것이다. 물론 글도 아니다.
내가 한동석을 초등학교 국어공부가 필요한 사람이라고 보는 이유는 씨의 문장 대부분이 이러하기 때문이다.
서양철학에 대한 비판을 읽어보면 꽤나 그럴듯하다는 감을 받는다.
그러나 씨의 전공인 동양철학으로만 들어오면 바로 문장이 꼬이고 말이 헛나오며 횡설수설의 연속이다.
사람의 말이라는 것은 약속이 있고 규칙이 있다. 그것이 문법이고 단어에 대한 정의이다. 이런 것을 무시하고 지
쪼대로 단어를 아무렇게나 늘어놓는 인간은 초등교육을 새로 받아야 한다. 다음 문장도 역시 마찬가지다.
“다시 말하면 만물의 발현이란 것은 정신의 외향과정(外向過程)에서 일어나는 정신의 운동 때문에 변화하는 종속적
인 존재인즉, 이것이 바로 우주의 본체이며 또한 목적일 수밖에 없다.”
만물은 정신의 운동에 따라 변화하는 (정신의)종속적인 존재라는 말인 듯 한데 주부와 술부가 따로 놀기 때문에 역시
알아듣기 어려운 건 마찬가지다.
이 문장의 주어는 “만물의 발현”이다. 그런데 술부는 “우주의 본체이며 또한 목적일 수밖에 없다”이다.
주부와 술부를 결합하면 이렇게 된다. “만물의 발현이라는 것은 우주의 본체이며 또한 목적일 수밖에 없다.”
우주만물의 본체가 정신이라는 것이 유심론이다.
정신의 작용으로 해서 만물이 존재하게 된다는 학설이다.
그런데 여기서는 정신작용의 결과인 만물의 발현을 우주의 본체요 목적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씨의 사고 수준이 이와 같이 지리멸렬하다.
문장력은 사고의 수준보다 더 조악하기 때문에 국어교육을 제대로 받은 사람은 씨의 글을 읽고 이해하지 못 한다.
한글로 구사하는 개발괴발의 극치를 보여준다.
다음은 유물론을 고찰하기로 하겠다.
유물론(唯物論, Materiaism)에는 형이상학적 유물론과 변증법적 유물론의 두 가지가 있다.
이들은 모두 물질이 우주의 본체이고 정신은 그의 예속물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정신은 공간을 점령하고 있는 물질, 즉 "에테르(ether)"의 활동이거나 혹은 원자의 양-전자운동이라고 보
는 것이다.
그런데 형이상학적 유물론을 주장하는 학파로서는 고대의 스토아학파에서 시작하여 근대의 홉즈(Hobbes)에 이르
러서 가장 저명하였다.
그 다음으로는 독일, 프랑스 등에서 많은 유물론자들이 나와서 더욱 발전시킨 것은 사실이나 유심론이 반드시 진리
가 아니었던 것처럼 유물론도 반드시 진리일 수는 없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번잡은 다만 학설의 증산(增産)에만 공헌하였을 뿐이고 반면에서 모순은 점증(漸增)하게 되었던 것이다.
첫째, 정신은 물질에서 파생되는 것이므로 정신은 물질 자체라고 하는 점이다.
물론 정신과 물질은 불가분리(不可分離)의 호근(互根)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이므로 그의 변화과정을 설명함에 있어
서 물질에서 정신의 기원을 유도해 낼 수는 있다(唯心論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법칙이 없는 유물론의 주먹구구식 사고방식이나 과학적 실험수단만으로써 만일 어떠한 체계를 세웠다고 할
지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물질일변도의 반쪽 체계일 뿐이고 결코 그것이 우주본체의 설명으로 될 수는 없을 것이다.
왜 그런가 하면 우주에는 정신과 물질이 호근운동을 하면서 연면 계승(連綿 繼承)하게 하는 일사분란한 진리로서의
법칙적인 본체가 엄존(儼存)하기 때문이다.
둘째로는, 물질의 운동을 원자나 에테르의 운동으로 볼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바로 정신일 수는 없기 때문이
다. 예를 든다면 인간이 정자와 난자의 결합으로 인하여 탄생된다고 하여서 정자와 난자가 곧 사람이라고 우겨대는
것과 같은 넌센스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만일 원자나 에테르의 운동 현상을 물질계와 정신계의 상호작용으로 인하여 일어나는 우주운동으로 본다
면 그것은 오히려 가치있는 관찰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물질을 본체라고 본다면 이것은 우주의 운동현상은 반드시 일정한 본체, 즉 “성질상 동일한 무차별의 세계”
인 “태극”의 속성이라는 것을 모르기 때문인 것이다.
씨의 꽈배기 문장이 또 나온다. 마지막 문장은 정리를 하면 “물질을 본체로 보는 것은 우주의 운동 현상이 태극의
속성이라는 것을 모르기 때문이다”가 된다.
그런데 이 문장에서 삽입구가 문맥상 연결이 되지 않는다. “즉”이라는 접속사로 문장을 연결할 때는 즉 이하를 생략
해도 바로 연결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이 문장에서 즉 이하를 생략하면 이렇게 된다. “우주의 운동현상은 반드시 일정한 본체라는 것을 모르기 때문
인 것이다.” 보다시피 전혀 말이 되질 않는다.
“일정한 본체”=“성질상 동일한 무차별의 세계인 태극의 속성”인데 이 양자는 논리상 치환되지 않는다.
그리고 “성질상 동일한 무차별의 세계”와 같은 말은 강아지 풀 뜯어 먹는 소리다.
당췌 문장들이 기본적인 요건을 구비하고 있지 못하다. 머리에 쥐가 나지만 인내심을 갖고 읽어 나가 보자.
셋째로, 정신을 물질적 조직인 육체의 소산으로 보거나 혹은 그의 파생물로 보려는 것은 바로 과학적 전제(前提)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생의 순환”을 저술한 몰레쇼트(Moleschott)는 사상(思想)은 뇌(腦)에 있는 인소(燐素)에서 생기는 것이
므로 만일 인소라는 물질이 없다면 사상은 성립될 수가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는 인소가 어떻게 사상이라고 하는 정신활동을 산출하는가를 설명하지 못했다.
그러는 한 그것은 전제와 실험을 주로 하는 과학적 진리는 될 수 있을지언정 현묘(玄妙)중의 현묘인 우주변화의 본체
를 규정할 수 있는 철학적 진리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그 다음에 변증법적 유물론을 주장하는 학파로서 데보링(Deborin), 포이에르바하(Feuerbach) 등이 나와서 자연을
객관화된 정신이라고 보는 헤겔 학설을 뒤집어서 정신을 외화(外花)된 자연이라고 하여 헤겔의 관념적 변증법을 유
물적 변증법으로 고쳐 놓았고, 마르크스(Marx)와 엥겔스(Engels)에 의하여 양적 변화가 질적 변화를 일으키는 것이
며 운동하는 물질의 모순대립의 비약(飛躍)과정에서 통일된다고 하는 학설로서 변증볍적 유물론을 더욱 발전시켜
놓았던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사적(史的) 유물론을 저술하여 변증법적 유물론의 원리를 사회현상과 사적 발전에 적용시키면서 물질
적 우위를 설명했고, 또 그 것으로서 우주의 본체라고 규정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변증법적 유물론이 제아무리 심혈을 경주한다고 할지라도 형이상학적 유물론이 범했던 바의 모순을 바로잡
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다만 애석한 것은 헤겔이 자연을 객관화된 정신이라고 보았다던가, 또는 마르크스가 양적 변화가 질적 변화를 일으킨
다고 한 점 같은 것은 진실로 달관인 것 같으면서도 횡관(橫觀)인 것이다.
왜 그런가 하면 모든 物質의 분열이라는 것은 정신의 객관화에 불과하며(제7장 “정신론”에서 상술) 또한 사물은 그의
질적 변화가 양적 변화를 일으킴으로써만이 통일의 바탕을 이루는 것이기 때문이다.
(제7장 1절 “헤겔의 정신론 비판” 참조)
횡관(橫觀) : 한쪽 방향으로만 봄(橫은 가로방향)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서양철학의 사고방식은 맹목적이며 무법칙적이기 때문에 본체를 구명할 수 없었고 다만 이론
의 대립과 모순의 역사만을 남기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본체의 변화현상을 연구하는 우주론에 있어서도 변화하
는 바의 실상을 해부해 내지는 못하고 다만 “우주의 변화는 인과적(因果的)이냐, 그렇지 않으면 목적적(目的的)이냐?”
하는 변화의 피상에서만 헤매고 말았던 것이다.
그런즉 변화작용의 대상인 우주론은 진실로 무엇이 어떻게 변화하며 또는 어떻게 되느냐 하는 근본과 현상을 연구하
여야만 할 것이다. 그러므로 다음에는 서양철학의 우주론을 약견(略見)함으로써 동양학을 연구하는 데 참고로 하겠다.
저자는 탈레스로부터 헤겔, 마르크스에 이르는 서양철학의 대강을 전부 언급한 후에 서양철학의 사고방식이 맹목적
이고 무법칙적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한동석의 사자후를 기대하게 된다.
맹목적이고 무법칙적인 서양철학을 일거에 압도할 수 있는 찬란하고 위대한 동양철학의 진수를 보게 되리라는 기대
를 갖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다만 한 가지 걱정은 이미 보아온 바와 같은 저자의 국어실력으로 과연 그런 심오한 대우주론의 설파가 가능할까 하
는 점이다.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다음 페이지를 연다.
제1절 서양 철학의 세계관 비판
2. 우주론 비판
우주론(Cosmologie)이란 본체가 어떠한 존재냐 하는 것을 묻는 것이 아니라 우주의 삼라만상이 어떻게 변화하느냐
하는 변화현상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다시 말하면 인물(人物)의 생장소멸작용(生長消滅作用)이 어떠한 원리에서 일어나는 것이며 또한 어떠한 법칙에 의
하여 동정(動靜)하는가 하는 것을 연구하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필자는 이것을 변화원리라고 한다. 일반적으로 변화라는 말은 만사나 만물의 부침소장(浮沈消長)하는 불
가사의적 현상을 지칭하는 것이다.
그러나 철학적 개념은 좀 더 세밀하여야 한다. “변(變)”이란 것은 만물이 화(化)하였다가 다시 내용을 충실시키는 과
정을 말하는 것이요, “화(化)”라는 것은 일정한 형태에서 다시 분열무화(分裂無武)되어 가는 과정을 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화(化)하는 과정에서는 생장을 촉진시키고 변(變)하는 과정에서는 성숙이 매듭을 맺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을 본체면에서 보면 변화요 작용면에서 보면 생성인 것이다.
저자는 “철학적 개념은 좀 더 세밀하여야 한다”고 말하는데, 유감스럽게도 저자가 설명하는 철학적 개념은 조금도
세밀하지가 않다.
한자는 글자 하나하나가 철학적 함의를 담고 있기 때문에 한자의 의미를 파악하는데 대충하거나 소홀하게 되면 동양
철학의 내의(內意)는 결코 포착되지 않는다.
“형상(形象)”이나 “변화(變化)”와 같은 말은 두개의 철학적 개념이 합성된 복합어이다.
“형(形)”이라는 말은 우리말로 번역하면 “꼴”이다. 모양이라고 옮겨도 무방하다.
반면에 “象”이라는 것은 꼴에서 엿볼 수 있는 내면의 모습이다.
비유해서 말하자면 우리는 사람의 외모에서 그의 성품을 볼 수 있다.
착하고 순진하고 청순한 외모를 가진 여자가 있다고 하자.
대개 외모와 내면적인 품성은 일치한다. 만약에 한눈에도 지성적이고 교양 있게 생긴 숙녀가 천박한 말투와 경망스
런 행동을 해댄다면 사람들은 형상을 가늠할 수 없어서 당황하게 된다.
형과 상이 어울리지 않는 것이다. 형상이라는 말의 의미를 알아야 변화라는 말의 의미를 알 수 있다.
“변(變)”은 “형(形)”이 바뀌는 것이고, “화(化)”는 “상(象)”이 바뀌는 것이다.
그런데 변화에 대한 한동석의 정의는 어렵다 못해 신비롭기까지 하다.
“변(變)이란 것은 만물이 화(化)하였다가 다시 내용을 충실시키는 과정을 말하는 것이요, 화(化)라는 것은 일정한
형태에서 다시 분열무화(分裂無武)되어 가는 과정을 말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변(變)과 화(化)는 두 가지 각기 다른 철학적 개념을 함축하고 있다.
당연히 각각이 독립적으로 설명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저자는 화의 개념을 가지고 변을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이어서는 또 화를 별도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씨의 논리대로 가자면 형이 바뀌는 것은 “상이 바뀌었다가 다시 내용을 충실시키는 과정”이 된다.
도무지 이해불가능한 소리요, 납득할 수 없는 설명이다.
그리고 일정한 형태에서 다시 분열무화되어 간다는 건 무슨 소릴까?
이게 과연 세밀한 철학적 개념일까? 황당한 씨나락적 궤변으로 보인다. 한자어에 대한 통관(通貫)의 결여가 이런
허술한 철학적 삽질을 하게 만든다.
마지막 문장을 보자. “그러므로 이것을 본체면에서 보면 변화요 작용면에서 보면 생성인 것이다.” 이 글을 같이 읽고
있는 가족들에게 한번 물어보고 싶다.
이 문장에서 말하는 “이것을”이라는 목적격지시대명사가 가리키는 것은 무엇일까? 아래에서 한번 골라 보자.
가. 변화원리를 본체면에서 보면 변화요 작용면에서 보면 생성인 것이다.
나. 변화라는 것을 본체면에서 보면 변화요 작용면에서 보면 생성인 것이다.
이전의 문장을 아무리 살펴봐도 “이것을”에 대입할 수 있는 단어는 “변화원리” 또는 “변화”의 두 가지 뿐이다.
그런데 이 두 가지를 대입하여 문장을 만들어보면 골 때리는 소리가 되분다.
“가”와 “나”의 두 문장을 한번 보라. 얼마나 웃기는 소린지.
우리 가족들은 글을 이렇게 쓰면 안 된다는 것을 지금 배우고 있다. 글을 잘 쓴다는 것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다.
훌륭한 문장의 첫째 조건은 주어가 가리키는 것이 명료한 것이다.
모든 악문은 독자들로 하여금 주어가 뭔지 한참 생각하게 만드는 글이다.
이런 글은 쓸데없이 뇌를 피로하게 만든다. 한동석의 글은 아예 독자의 골을 노가다를 하게 만든다.
우주론은 이와 같은 변화과정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 시간적 계기(繼起)와 필연적 관계라는 두 개의 조건을 제시하였
던 것이니 이것은 우주론의 연구에 있어서 진실로 위대한 발견이었다.
만일에 이와 같은 요건이 발견되지 못하였더라면 저 인과율(因果律)이나 목적률(目的律)마저 제창할 수 있는 근거를
잃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면, “만물의 변화는 인과적이냐, 목적적이냐? 하는 소박한 것으로써 우주변화를 알려고 하는 인과율부터 살펴보
기로 하자.
인과의 법칙으로서 인과율(law og casuslity)이 있다.
즉, 어떠한 결과는 반드시 그 결과 이전에 원인이 있다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인과관계는 필연적 법착 아래서 이루어진다고 보아서 이것을 인과율이라고 한다.
그런데 흄(Hume)은 이것을 객관적 신앙이라고 하였다.
그 까닭은 두 개의 현상이 서로 계기(繼起)하는 것을 지각할 수는 있지만 거기에 필연적 관계가 있다는 것을 인정할
수는 없는 까닭이라고 말하였다.
칸트는 인과율을 선험적 오성(先驗的 悟性)의 형식에서 구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인과율이라는 것을 경험을 통일하여 성립시키는 범주의 하나라고 말하였다.
빈델반트는 인과관계의 필연적이며 종합적인 근거로서 이것을 “시간적 계기의 일반성”이라고 하였다.
그밖에도 많은 학설들이 있으나 특기할 만한 논거가 없다.
다만 여기서 구명(究明)하여야 할 것은 이와 같은 인과율이 자연법칙에서 생긴 것이냐 혹은 인위적인 법칙이냐 하는
것이다.
만일 이것이 인위적이라면 인간의 인식은 부정확한 것이므로 그 법칙의 진리성을 믿기 곤란할 것이고 이것이 자연
법칙 그대로라고 하면 민간이 이것을 일일이 증명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철학은 아직 이것을 증명하지 못하고 있는 듯 하다.
뿐만 아니라 심신(心身)관계라는 비근(卑近)한 예에 있어서도 제설이 분분한 것이다.
그러므로 다음에 열거하면 “정신이 육체를 지배하는가, 육체가 정신을 지배하는가, 그렇지 않으면 사람은 심신의
교호운동(交互運動)으로써 살고 있는가? 하는 것마저 규정짓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처럼 문명이 발달한 시대에 있어서 아직까지 이러한 허점이 남게 된 주요한 원인은 생리학이나 심리학이 매양
전제에서 시작하였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인간은 형이상계와 형이하계의 혼합적 구성체로서 오직 두 개의 기능의 조화작용에 의하여 정신적
영위와 육체적 활동을 하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철학이나 생리학은 항상 편파적인 일면적 관찰만 하였기 때문에 인간
의 정체를 완전히 투시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동양의 의학은 그 출발부터 우주변화의 기반인 상수학(象數學)에 뿌리를 박았기 때문에 우주의 본체 규정에
있어서나 그의 변화작용의 관철에 있어서 자연법칙적인 엄격한 규범을 세워 놓고 출발했던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세계의 삼라만상도 동일한 자연법칙하에서 동정하는 것이므로 예외는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연법칙이 곧 우주의 법칙이며 인간과 만물의 법칙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은 인간을 “소천지(小天地)”라고 하는 고철(古哲)들의 입론(立論)을 전폭적으로 지지하는 것이
며 따라서 인과관계를 우주의 동정법칙이라고 규정하는 것이다.
왜 그런가 하면 인과란 것은 動靜, 變化, 陰陽 등과 동일한 내용의 개념이면서 다만 관점을 달리한 것뿐이기 때문이다.
그런즉 인과율이란 것은 “시간적 계승(繼承)의 일반적 필연성”인 것이다.(繼라는 것은 生하는 방향으로 이어주는 것
이요, 承이란 것은 成하는 방향으로 이어주는 것이며 일반이란 것은 통일하는 象을 말하는 것이고 필연이란 것은
규칙적으로 그렇게 되고야 마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연법칙이 곧 우주의 법칙이며 인간과 만물의 법칙인 것이다”라는 소리는 “나라가 곧 국가이다”라는
소리나 같다. 이런 말꼬리나 잡자고 시작한 강독이 아니기 때문에 이런 소리는 그냥 넘어가기로 하자.
그런데 다음 문장은 그냥 넘어가주기 좀 그렇다.
다음 문장은 “그렇기 때문에...”라는 말로 시작된다. 그래서 바로 앞 문장에 그런 이유가 있나 찾아보는데, 전혀 눈에
안 보인다. 뭐가 그렇기 때문이란 소린가? 앞과 뒤를 또 이어보자.
가. 동양의 의학은 그 출발부터 우주변화의 기반인 상수학(象數學)에 뿌리를 박았기 때문에 우리들은 인간을 “소천지
(小天地)”라고 하는 고철(古哲)들의 입론(立論)을 전폭적으로 지지하는 것이며 따라서 인과관계를 우주의 동정법칙
이라고 규정하는 것이다.
나. 우주의 본체 규정에 있어서나 그의 변화작용의 관철에 있어서 자연법칙적인 엄격한 규범을 세워 놓고 출발했기
때문에 우리들은 인간을 “소천지(小天地)”라고 하는 고철(古哲)들의 입론(立論)을 전폭적으로 지지하는 것이며 따라
서 인과관계를 우주의 동정법칙이라고 규정하는 것이다.
다. 세계의 삼라만상도 동일한 자연법칙하에서 동정하는 것이므로 예외는 있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들은 인
간을 “소천지(小天地)”라고 하는 고철(古哲)들의 입론(立論)을 전폭적으로 지지하는 것이며 따라서 인과관계를 우주
의 동정법칙이라고 규정하는 것이다.
라. 자연법칙이 곧 우주의 법칙이며 인간과 만물의 법칙인 것이기 때문에 우리들은 인간을 “소천지(小天地)”라고 하
는 고철(古哲)들의 입론(立論)을 전폭적으로 지지하는 것이며 따라서 인과관계를 우주의 동정법칙이라고 규정하는
것이다.
앞 문장의 어떤 부분을 “그렇기 때문에”의 “그런”에 대입시켜 문장을 이어보아도 “...규정하는 것이다”라는 말의 이유
가 될 만한 것이 없다.
가, 나, 다, 라의 문장 네 개가 모두 논리적인 인과관계를 갖지 않는다.
나는 세계의 철학사상서 중에 이런 책은 처음 본다.
우주론 비판의 뒷부분은 내일 또 같이 보기로 하자.
2. 우주론 비판-2
그런데 인과론이 기계관으로 흐른 후에 이것이 과학의 발전에 기여한 것은 사실이나, 그렇다고 이것이 유물론이나
과학만의 법칙은 아니고 철학 자체의 법칙인 것이다. 또는 인과율은 자유를 말살한다고도 한다.
그러나 진실한 자유란 “시간의 일반적 계승작용”을 하는 인과법칙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그런데 자유란 것은 비방종적(非放縱的) 일반성인 토화작용(土化作用)에만 있는 것이므로 자유의 기본인 인과율이
바로 자유의 모체인 것이다.(제7장 2절. “인간정신과 자유”를 참조)
토화작용(土化作用) : 저자는 우주의 변화를 세 가지 측면으로 나누어 고찰한다. 이것은 이 책의 논지이기도 하고
변설의 요지이기도 하다.
제5장(214쪽)에 보면 “우주의 변화란 것은 土化作用으로써 본체가 되고 相火作用으로써 객체를 이루고 金火交易作用
에 의하여 완성된다고 대답할 것이다”라는 말이 나온다.
土化作用, 相火作用 그리고 金火交易作用의 세 가지는 한동석이 말하는 우주 변화의 핵심 이론이다.
이 중 토화작용에 대해서는 제5장 1절에 설명이 나온다.
그런데 이 토화작용의 설명부분은 난해하고 어지럽기 짝이 없는 본고의 내용 중에서도 가장 골 때리는 대목이다.
아이큐 180 이하는 이해하지 못한다.
아인시타인의 “상대성이론”을 한번 보고 이해하는 천재라도 한동석의 “토화작용”은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나는
본다. 이에 대한 강독은 본문에서 차례가 오면 하기로 하고 일단 크나큰 기대를 남겨두자. 여기서 이 책이 참 지랄같
다고 생각되는 점은 사전설명이나 주석 한마디 없이 “비방종적(非放縱的) 일반성인 토화작용(土化作用)” 같은 뜬금
없는 소리를 내지른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토화작용이라는 것에 대한 설명이-이해가 되던 안 되던-제5장에 있다는 안내조차 없다.
그런데 인과율이란 것은 인위적인 법칙이 아니고 우주 자체의 운동법칙인 것이다.
이와 같이 인과율이 우주 자체의 운동법칙인 한 우리는 이것을 알아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이며 또한 변화원리를
연구하는 목적도 바로 여기에 있거니와 진실로 우주의 운동은 인과적인 법칙에 의한 것인데 이것이 바로 五運과
六氣의 운동이며 또한 자유창조의 법칙인 것이다.
인과적인 법칙(인과율)이 五運과 六氣의 운동이라고 하는 것은 차후 살펴볼 일이겠으나 이것이 자유창조의 법칙이
라고 말하면 상당히 웃기는 소리가 된다.
자유창조란 자유의지의 발로이며, 이것은 인과율이 지지하는 기계적인 세계관에 대립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과율적 세계에는 자유의지가 개입할 여지가 없다.
따라서 인과적인 법칙이 자유창조의 법칙이라고 말하는 것은 사유재산제도가 공산주의라고 우기는 것과 같다.
그 다음은 서양철학의 목적관을 논하여 보기로 하자.
인과관계란 “먼저 이러한 원인이 있었기 때문에”라고 하는 선행상태에서 후에 이러한 결과가 나타난다고 하는 후기
상태로 전진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목적관계는 미래에 일어날 후기상태가 목적이며 현재에 하고 있는 상태
는 후기상태인 목적을 위한 수단이라고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목적율(目的律)은 우주의 만상은 어떠한 목적 밑에서 움직이는 것이라고 보는 데서 일어난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신(神)이나 혹은 외부에서 부여되는 목적에 의하여 만물이 생장된다고 하는 초월적 목적관(宗敎的
宇宙觀 같은 것)과 목적이 외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만물 자체 속에 내재한다고 하는 내재적 목적관(汎神論과 같
은 것)의 두 가지가 있다.
그런데 목적관(目的觀)을 세계해석에 최초로 도입시킨 학자는 아낙사고라스(Anaxagoras)였다.
그 뒤에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과는 목적에 종속된다고 하였고, 칸트는 자연계를 기계관으로 보고 정신계는
목적관으로 보았던 것이다.
현대에 이르러서 베르그송(Bergson)은 우주의 창조적 진화는 생명의 비약에 의하여 가능하며 생명의 비약은 순간
순간 그 내면에 존재하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제 여기에서 위에 소개한 제설(諸說)중에서 특별히 눈에 띄는 것은 칸트의 소론(所論)이다.
즉, 자연계를 기계관으로 보고 정신계를 목적관으로 본 점은 대철(大哲)의 관록을 여실히 나타냈다고 할 것이다.
우주의 변화현상을 대별하면 자연계는 다만 인과적 법칙에 의하여 기계적으로 움직이는 것이다.
이것들을 다만 한서온냉(寒暑溫冷)의 영향에 의하여 생장소멸의 규칙적 반복을 되풀이하는 것뿐이고 개별적인 자기
의지는 전혀 개입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소문(素文)”에는 이것을 기립지물(氣立之物)이라고 표현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반면 정신계는 자연계와 마찬가지로 기후의 영향을 받는 것도 절대적 요건이기는 하지만 그것보다도 더욱
중요한 것은 자기의지, 즉 정신의 작용이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면서 생(生)을 유지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인간이나 동물은 육체와 정신의 이대형상(二大形象)으로써 生을 영위하는 것이다.
무릇 형상(形象)을 보유하고 생활하는 인간이나 동물은 끊임없이 형상간에 모순과 대립을 나타내면서 자기를 보존
하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육체와 정신의 공동체적 사회생활이다.
그런데 이러한 육체와 정신의 공공생활(公共生活)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감정과 욕심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만일 인간이나 동물이 육체와 정신의 이원적(二元的) 조직체가 아니라고 가정한다면 여기에서는 욕심이 생길 수가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육체란 사욕의 주체이므로 무욕(無慾)인 정신에 항상 도전하려고 한다(이 내용은 제7장 “정신론” 참조).
그리하여 욕심은 목적의 원인이 되고 목적은 욕심의 결과가 되는 것이다.
그런즉 자연계는 형상이 구존(俱存)하지 못하므로 단순히 기계적 운동만을 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여기에서 자연계는 기계적으로 정신계는 목적적으로 움직인다고 본 칸트를 숭배하는 것이다.
(위에서 말한 영항계라는 것은 정신계를 가리키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할 때 인과율과 목적률은 별개의 개념이 아니라 전일개념(全一槪念)이면서 다만 적용되는 대상에 차이가
있는데 불과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인간이나 동물은 형상을 함께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인과율과 목적률이 병행되는
것이고 자연계는 형체만의 존재이기 때문에 인과율만이 적용되는 것이다. 혹자(或者)는 반문할지도 모른다.
자연계도 생명을 인정하는 한 약간의 정신이라도 있을 것이 아닌가라고, 물론 그렇다.
그러나 정신인 상(象)이 형체인 체와 서로 대립할 만한 실력이 없을 때에 그것은 동물이 될 수 없으므로,
즉 신기(神機)가 아니므로 욕심이 생길 수가 없는 것이다.
필자는 위에서 인과율을 “시간적 계승(繼承)의 일반적 필연성”이라고 한 바 있다. 그
렇다면 목적률은 “시간적 계승의 이율적 우연성(二律的 偶然性)”일 것이다.(제1장 2절 “동양철학의 우주관” 참조).
그러므로 필자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인과율은 목적율에 종속된다고 말한 것에 의혹을 가지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인과나 목적관계는 어디에 종속된 것도 아니고 다만 전일개념으로서 그의 적용대상에 의하여 구별 호칭하는 것뿐
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목적을 우주 목적으로 본다면 종속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상에서 우주론의 개요를 살펴보고 사소한 비판을 가하여 보았다.
그러나 여기에서 다시 한 번 살펴볼 것은 우주론이란 우주의 생성변화관계를 연구하는 것인데, 서양철학의 우주론
에서 고찰하여 본 바에 의하면 그의 논설의 정부(正否)는 별도로 하고라도 그 내용을 따져 보면 겨우 우주의 변화는
인과적이냐, 그렇지 않으면 목적적이냐 하는 정도였다.
그렇다면 그것을 가지고 과연 변화현상을 설명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은 문제점이 아닐 수 없다.
만일 백보를 양보하여서 그와 같은 내용의 우주론으로써 이 문제를 해명할 수 있다고 할지라도 인간의 인식 자체가
문제되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이성적 기능을 발휘할 수 있을는지 문제될 것인데 이왕 아무런 법칙도 없는, 그야말로
적수공권(赤手空拳)으로써 우주의 변화를 논하려는 것은 거의 무모에 가깝다고 할 것이다.
이와 같이 생각할 때 동양철학의 음양론(陰陽論)과 상수(象數)의 법칙에 부하된 바의 임무는 실로 귀중하면서도 크
다 할 것이다.
서양철학은 우주의 변화원리에 대해서 크게 두 가지 학설이 대립하여 왔다.
하나는 인과론적 세계관으로서 이것은 기계적 세계관이라고도 한다.
원인에 의하여 결과가 나오고 결과는 곧 다른 결과의 원인이 되며 원인에 의한 결과는 비선택적이라는 개념이다.
때문에 최초의 원인들이 발생한 순간 그것들이 가져올 영원 이후의 최종결과는 결정되어 있는 것이 된다.
즉 우주는 태초에 이미 종말까지의 진행순서가 기계적으로 결정되어 있다는 소리이다.
이에 반해 목적률적인 세계관은 자유의지에 의한 선택이 변화를 이끈다고 본다.
여기서 자유의지의 주체가 무엇이냐 하는 것이 문제인데, 절대자, 전지전능한 신만이 그러한 자유의지를 가지며
그의 의지와 목적에 따라 우주가 변화한다고 하는 기독교적 신학도 목적률에 기초한 세계관이다.
다른 하나는 모든 만물 속에 자유의지의 정신적 주체가 심어져 있다는 사상으로 이것을 범신론,
또는 만신사상(萬神思想)이라고 한다.
정신이 없는 순수한 물질, 즉 인과율에 의해서 기계적으로만 변화하는 물건은 없다고 보는 것이다.
모든 존재는 그 자체 내에 정신을 가지며 변화의 목적을 갖는 주체로 보는 것이다. 칸트의 입장은 이분적이다.
비생명체는 인과율적이고, 생명은 목적률적이라고 나누어 본 것이다.
그렇다면 저자의 입장은 어느 쪽일까? 인과율과 목적률을 전일적(全一的) 개념으로 보고 있다.
全一性이란 전체가 하나에 포함되고 하나는 다시 전체에 포함되는 환원적 통합의 개념이다.
우주의 변화는 인과율도 아니요 목적율도 아니며 그 적용대상에 따라 인과적이기도 하고 목적적이기도 하다는 가치
중립적인 자세를 보이고 있다.
그러면서 우주적 차원에서는 목적률이 인과율을 포섭하고 있다는 쪽에 선 듯하다.
보다 선명한 우주의 변화에 대해서는 이 책의 주요논지이니 만큼 앞으로 수없이 되풀이 설명이 되어 질 것이다.
기대를 버리지 말고 한 장 한 장 넘겨보자.
제2절 동양철학의 우주관-1
우주에서 삼라만상이 무궁한 변화를 일으키고 있는 것은 陰과 陽이라는 이질적인 두 기운이 지닌 바의 작용으로 인
하여 모순과 대립이 나타남으로써 일어나는 현상이니, “一陰一陽之爲道”라고 한 것은 바로 이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주가 이와 같은 변화작용을 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은 그와 같이 추진하는 역원(力源)이 있기 때문이니
그것을 가리켜서 변화작용의 본체라고 하는 것이다.
필자는 위에서 서양철학의 불비점(不備點)과 그의 무법칙적(無法則的)인 바를 지적한 바 있으므로 여기에서는 당연
히 동양철학의 법칙을 소개하고 또 그의 진리를 밝혀놓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 법칙이나 진리란 것은 거기에 뿌리박은 모든 원리를 의미하는 것이다.
즉 日月의 규칙적 운행은 무엇이 그렇게 하게하며 인간이나 만물은 어떻게 화생(化生)하였다가 무엇 때문에 죽는가
(死) 하는 문제를 비롯하여 정신의 본질은 무엇이며 칠정육욕은 왜 생기는가 하는 문제 등은 진실로 우주변화의 결
과이므로 그 결과를 인도적(人道的)인 면에서 요약하여 보면 선악의 투쟁인 것이다. 그
런즉 그 결과를 순수이성에 의하여 가장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이 철학의 목적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변화의 본체와 그 작용을 연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 물론 이것은 본론에 들어가서 상술할 것이지만,
문제의 방향을 바르게 제시하고 또는 일반적인 예비지식을 제시하여 두기 위하여서 그 줄거리만이라도 우선 소개하
여 주려는 것이다.
그런데 본고에서는 본체와 변화를 구별하지 않고 논하려고 한다.
왜냐하면 변화를 설명하면 본체는 저절로 해명되어지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현상계의 변화를 설명하지 않고는 본체를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 변화하는 본체란 과연 어떠한 것일까? 우주는 본래 지정지무(至靜至無)한 상태에서 생겨났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삼라만상을 장식하는 모든 유형물체는 그 시초(始初)부터 형체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최초의 우주는 적막무짐(寂寞無朕)하여서 아무런 물체도 없었던 것이다.
다만 연기(煙氣) 같기도 하여서 무엇이 있는 듯 하기도 하고 없는 듯 하기도 한 진공(眞空) 아닌 허공(虛空)이었던
것이다.
이 상태가 바로 “불”이라고 생각하면 “불” 같기도 하고 “물”이라고 생각하면 “물” 같기도 한 상태였던 것이다.
이러한 상태를 象이라고 하는 바 그 상이라는 개념은 形의 반대인즉 有의 반대인 無와 상통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象이란 것은 아무 것도 없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형상계에 있어서의 “無”와 “有”의 개념은 절대 “有”와 절대“無”라는 개념이 아니다.
왜 그런가 하면 우주 안에는 절대적인 “無”라던가 절대적인 “有”라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유형은 언젠가는 무형으로 소멸될 운명에 놓여있는 것이요, 무형의 象도 언젠가는 형체를 갖추게 되는 것
이므로 형상 속에 있어서의 “有 ” “無”의 개념은 절대“有”나 절대“無”로 될 수는 없다.
저자는 形과 象의 개념을 有와 無의 개념에 빗대어 말하고 있는데, 이것은 대단히 어긋난 비교이다.
有와 無는 서로 반대되는 말이다. 有는 無가 아니고, 無는 곧 有가 아니다. 있다면 없는 것이 아닌 것이고, 없다면
있는 것이 아니다.
불교의 중도철학은 有와 無의 양쪽을 다 인정하지 않는다.
그래서 불교의 중도론적 입장에서 보면 이 세계는 “있다”고 해도 틀리고, “없다”고 해도 틀린다.
저자인 한동석씨의 존재론적 입장은 이러한 불교의 중도관에 기초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이런 중도가 有와 無라는 두 단어를 양립할 수 있게 만들어주지는 않는다.
중도는 결코 “有가 無이고 無가 有이다”라는 소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有와 無는 어떤 철학적 목적의 수사로 쓰이더라도 언제나 반대되는 말이며 동시에 양립하지 못하는 것이다.
반면에 形과 象은 결코 반대되는 말이 아니며, 대립하는 개념도 아니고, 분리될 수도 없는 것이다.
形과 象은 동전의 양면이며 분리불가능한 것이다.
形이 있으면 반드시 象이 있고 象이 있다면 반드시 形도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보면, 미스코리아 같은 미인선발대회는 여자의 形을 본다.
미스코리아선발대회의 심사위원이 출전자들의 외형을 가지고 채점을 하는 것은 形의 아름다움만을 재는 것이다.
그런데 관상가가 미스코리아의 얼굴을 본다면 이때는 形이 아니라 그 얼굴로서 짐작할 수 있는 象을 보게 된다.
즉 形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形 속에 숨어있는 귀천부빈(貴賤富貧)과 길흉화복(吉凶禍福)을 보는 것이다.
미스코리아 심사위원이 보는 얼굴과 관상가가 보는 얼굴은 같은 여자의 얼굴이지만 차이는 대단히 큰 것이 된다.
아내를 고를 때 形을 보고 고를 수도 있고 象을 보고 고를 수도 있다.
가장 이상적인 방법이 形象을 동시에 보는 것이다.
形과 象의 개념은 이와 같은 것이어서 서로 반대되거나 양립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상보적이며, 동시적이며
양면적이다.
形이 없는 象이 존재할 수 없고, 象이 없는데 形이 홀로 있을 수 없다. 반대로 말해도 마찬가지다.
形이 있다면 반드시 象이 있고, 象이 있다는 것은 바로 形이 존재한다는 말과 같다. 저자는 아마도 아직 形이 없는 데
象이 홀로 존재하는 어떤 시기를 염두에 두고 있는 듯 하다.
즉 太極이나 無極으로 말해지는 우주의 태초를 아직 形이 없는 象만의 시기라고 가정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이것은 태극이나 무극의 본질을 오해하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形과 象은 나타나는 순서에 선후관계를 가질 수 없다. 언제나 동시성을 갖고 출현하는 것이다.
태극이나 무극의 단계에 무엇이 있다면 그것은 아직 形도 아니고 象도 아닌 것이다. 다음을 계속해서 보자.
우주에 미만(彌滿)한 물상(物象)이 이와 같이 절대가 아닌 유무의 形과 象으로 되어 있는 것은 바로 우주를 창조하던
적막무짐(寂寞無朕)한 상태가 그와 같은 유무(有無)의 화합체(化合體)였기 때문이다.
註 : 상수학의(象數學)의 연구대상은 형상 속에서 일어나는 변화상태에 있는 것이다.
형상계(形象界)라는 개념은 공기층을 뜻하는 것이므로 有無의 개념도 상대적이고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다만 이목(耳目)의 개념에 느껴지지 않는 것을 無라고 하는데 그 개념을 바르게 하기 위하여서 이러한 성질의 無를
象이라고 하고, 有를 形이라고 하는 것이다.
녹색으로 표기하는 "註"는 저자가 책 속에 직접 넣어놓은 註이다.
형상계(形象界)가 공기층을 뜻한다는 저자의 말은 아리송하기 짝이 없다.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한 註가 오히려 더 헷갈리게 만든다. 공기층이라니.
우리가 숨 쉬는 공기가 둘러싸고 있는 범위 내를 형상계라고 한다? 이건 아주 웃기는 이야기다.
저자가 말하는 공기층이 도대체 뭔지 이 책의 어디에서도 그 힌트나 단서조차 찾아볼 수 없다.
그리고 象이라는 것이 이목으로 느껴지지 않기 때문에 無라고 표현할 수 있는 그런 것은 아니다.
形이나 象은 모두 인간의 이목으로 느껴지는 것이다. 만약에 인간의 이목으로 감지할 수 없는 것이 象이라면 인간은
무엇으로 이 象을 잡아 우주변화의 원리를 알 수 있다는 말일까?
인간의 이목으로 느낄 수 있는 有를 形, 그렇지 못한 無를 象이라고 시작하게 되면 나중의 결론이 어떻게 날른지 대
단히 흥미롭다. 첫 단추를 잘못 끼운 철학적 추론이 어디로 흘러가는지를 살펴보는 것도 이 강독의 즐거움이라 할
수 있다.
미만(彌滿) : 세상에 널리 충만함, 彌는 두루彌.
이와 같은 象(우주창조 初의 象)이 바로 우주의 본체인 것이다. 그 상(象)을 송대의 성리학은 적막무짐(寂寞無朕)이
라고 하였고, 一夫 金恒 선생은 “묘묘현현 현묘중(妙妙玄玄 玄妙中)”이라고 하였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寂寞無朕이라는 말은 아무런 동(動)하는 것도 없기 때문에 그 내용을 알 수 없다는 의미이고 “妙妙玄玄
玄妙中”이라는 말은 우주의 본체가 통일(統一)하였다가는 분열(分裂)하고 분열하였다가는 다시 통일하는 그 “中”인
즉 이것은 우주운동의 본체인 것이다.
그런데 염계(濂溪)가 말한 무극은 그와 같은 “中”을 의미하는 것인즉 이것은 우주창조의 “中”이며 천지의 본체다.
그러므로 일부(一夫)는 삼극지도(三極之道)를 세워서 우주동정의 本을 논리화하여 놓았던 것이다.
(제8장 “우주의 본체”를 참조)
註 : 일반적으로 宇宙와 天地를 구별하지 않고 혼합하여 표현하는 수가 많으나 그것은 천지와 우주는 다만 체용
(體用)의 구별에 불과하기 때문이니 이런 점을 자세히 살펴야 함.
염계(濂溪) : 송대의 성리학자이며 태극도설의 저자인 주돈이(周敦頤)의 호이다. 염계(濂溪)는 만년에 주돈이가 은퇴
하여 머무른 곳이 염계서당(濂溪書堂)이어서 그를 염계선생이라고 부른다.
주돈이의 자는 무숙(茂叔)이다. 주돈이의 학설에서 중요한 것은 “우주생성의 원리”라는 극히 자연적이고 과학적인
주제에 선악이나 인간의 품성과 같은 도덕적 개념을 결부시켰다는 데 있다.
주돈이로부터 동양의 우주론은 한편으로는 도덕론이 되었다.
한동석이 우주변화의 원리를 설명하면서 계속 선악의 개념을 끌어오는 것도 이런 성리학의 영향을 받은 때문으로
보인다. 그러나 사실 우주의 생성과 변화의 원리에는 선과 악이라는 개념이 끼어 들 여지가 없다.
그런 인간적 요소가 가미됨으로써 동양의 우주론이 과학적 설명에서 벗어난 씨나락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리고 이 책이 동양학에 대한 전반적인 지식이 갖추어져 있지 않으면 읽을 수 없는 책인 이유가 이런 데서도 드러
난다. “염계” 같은 사람 이름이 아무런 설명 없이 그냥 튀어나온다는 것이다.
보통사람은 염계가 누군지 모른다. 주돈이라 해도 잘 모른다.
동양학을 전공한 교수나 알고 있을 이름을 단 한 줄의 설명도 없이 그냥 써 버린다.
보통사람들은 자기가 전혀 모르는 사람의 이름이 설명 없이 계속 나오면 뇌가 꼬이게 마련이다.
자꾸 책을 덮고 싶어지는 것이다. 이 책은 여러 가지 면에서 독자의 인내심의 한계를 시험한다.
앞에서 저자는 변화와 본체를 구별하지 않고 말하겠노라고 미리 밝혔다.
이 두가지는 구별되어야 하는 것인데도 저자는 구별하지 않겠다고 선언을 하고 있다.
이에 대해 불평을 해봐야 소용이 없고 그것은 저자의 권리니까 우리도 구별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다.
“寂寞無朕”이나 “妙妙玄玄 玄妙中” 같은 소리는 노자가 우주의 본체를 엿보고서 “홀(惚)하고 황(恍)하도다!”하고
감탄한 것과 마찬가지로 현묘하고 신비로운 우주의 본체에 대한 형용이다.
수식어인 것이다. 그런데 저자는 이런 형용사를 바로 본체라고 말하고 있다.
노자가 “황홀하다”라고 말한 것을 가지고 황홀이 우주의 본체라고 주장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지적을 하기는 하지마는 애시당초 변화와 본체를 구별치 않겠다고 했으니 더 이상 시비는 할 수 없다.
그냥 넘어가기로 하자.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은 무극은 천지창조의 본체인데 이것이 어떻게 현실을 창조하는 것인가 하는 것을 연구하여야
한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무극의 본질인 無는 절대적인 것은 아니고 상대적인 無인즉 그것은 순수한 無일 수는
없고 다만 象일 뿐인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것이 바로 吾人의 촉각이나 시각에 느껴질 수 있는 形은 아니다.
그러므로 무극의 성질을 엄격하게 따진다면 形의 분열이 극미세(極微細)하게 분화(分化)하여서 조금만 더 응고하
여지면 形이 될 수 있는 직전의 상태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이질적이었던 두 개 이상의 성질이 서로 융화(融和)되어서 아무런 투쟁이나 반발도 없이 공서
(共棲)하고 있는 것이니 그것은 무극이 불편부당(不偏不黨)한 중화(中和)의 본체이기 때문이다. 그
런 의미에서 혹은 “無”라고 하며 혹은 “中”이라고 한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한동석의 순차적 창조론을 확연하게 엿볼 수가 있다.
즉 한동석은 무극이라는 것을 아직 아무런 形도 생기지 않아 形의 모체(母體)인 象만이 있는 상태라고 보고 있는 것
이다. 그리고 이 象을 상대적인 無라고 설명하고 있다.
있긴 있지만(象) 아직 없으므로(形) 無라고 하는 것이다. 한동석은 여기서부터 설명을 잘 못하고 있다고 나는 본다.
우주에 처음으로 나타나는 象이 뭐냐 하면 바로 陰陽이다.
이 象이 나타난 것이 바로 태극이다. 그러니까 무극이 象만 있는 無였다면 이 象이 무엇인가가 설명되어야 한다.
그러나 象이 될 수 있는 최초가 바로 음양이기 때문에 음양이 아직 드러나지 않은 무극에는어떤 象도 있을 수 없다.
그래서 무극인 것이다. 그리고 음양이라는 象이 최초로 나타난 태극의 단계에서는 동시에 최초의 形이 나타난 것
으로 보아야 한다. 아무런 形도 없다면 음양이라는 象이 어디에서 놀 것인가? 하회를 보자.
이와 같이 무극은 中이며 또한 空의 모체로서 중용지덕(中庸之德)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무극이 태극으로 변화하는 과정에서 또다시 동질적인 분파작용을 일으키면서 음도(陰道)의 세력권을 이루게
되는 것이 바로 土(未)작용의 결과이다.
이와 같은 세력권의 형성은 중립성을 변화시켜 소위 후천적인 통일과정(統一過程)으로서의 소투쟁(小鬪爭)을 일으
키게 되고 투쟁의 결과로서 土가 지녔던 바의 陽氣는 포위당하게 되고 陰氣는 이것을 포위하게 마련인 바 이것이
바로 상화(相火)의 과정인 것이다.
그리하여 淸氣가 완전히 포위당하게 되면 무극은 율려운동을 완성하면서 태극으로 변하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변성(變成)한 태극은 다시 투쟁의욕을 내포하게 된다.
거기에서 태극은 자기자체의 본성을 발휘하여 현실계의 모순대립을 나타내게 되는 것이니 이 작용을 음양작용(陰陽
作用)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 음양작용이란 것은 비단 태극이 이루어진 다음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무극이 태극으로 변할 때에 중탁지
기(重濁之氣)로써 경청지기(輕淸之氣)를 포위하던 때부터 이미 음양작용의 발판을 쌓았던 것이다.
그런데 태극이 이루어지는 과정에서는 그 성질은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변하거니와 그 형태적 변화는 말하지 않았다.
드디어 여기서부터 본격적인 귀신씨나락이 시작된다.
위의 본문을 읽고 저자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은 없으리라고 나는 확신한다.
글의 내용을 이해할 수 있는 어떤 구조적 통일성이나 논리적 흐름을 갖고 있지 않은 횡설수설이기 때문이다.
이 책의 문제는 저자가 주장하는 바의 논지가 맞느냐 틀리느냐, 혹은 타당하냐 불합리하냐의 문제가 아니라 대부분의
문장이 성립되지 않는다는데 있다. 맞고 틀리고를 떠나서 아예 이해자체가 불가능한 소리라는 점이다.
앞에서 저자는 무극을 가리켜 形이 없이 象만 있어서 無에 비교할 수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다시 말하면 전혀 아무 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이목으로 감지할 수 없는 象이라는 것이 있는 단계가 바로 무극이었다.
그렇다면 이것은 억지로 갖다 붙인다면 불교에서 말하는 “空”이라고 우길 수도 있겠다.
본시 불교의 “空”이란 “아무 것도 없는 상태”가 아닌 때문이다.
그런데 저자는 여기서 象이 있는 무극을 空의 모체라고 말한다. “空”이 “象”에서 나왔다는 소리다.
우주만물의 象이라는 것이 空 이전에 있었고, 오히려 空이 그것으로부터 나왔다고 하는 소리다.
내가 앞에서 첫단추를 잘못 끼운 철학적 추론이 어디로 가는지를 보자고 말했다.
이미 다음 발걸음부터 위태롭기 짝이 없다. 성룡의 취권(醉券)이 나오고 있다.
이어서 말하기를, “무극이 태극으로 변화하는 과정에서 또다시 동질적인 분파작용을 일으키면서 음도(陰道)의 세력
권을 이루게 되는 것이 바로 土(未)작용의 결과이다”라고 한다. “또다시”에 밑줄을 긋자. “또다시”라면 이미 이전에
했던 것을 되풀이한다는 소리다.
동질적인 분파작용을 일으키면서 陰道의 세력권을 이룬 일이 이전에 있었는지 설명이 있어야 하는데, 앞에서 이에
대해 말한 바가 없다.
그런데 여기서는 “또다시”라 하니 이게 무슨 반복의 의미인지 가늠할 길이 없다.
“동질적인 분파작용”이 무슨 소린지도 알 수 없고, “陰道의 세력권”이란 또 무슨 날벼락 같은 소리란 말인가?
그리고 “후천적인 통일과정(統一過程)으로서의 소투쟁(小鬪爭)”은 도대체 무슨 뜻일까?
이게 土(未)의 작용이라고 하는데, 아직 오행도 나타나기 전의 무극에서 태극으로 변하는 단계에 왠 토(土)가 있어서
벌써로 장난을 친단 소릴까?
그리고 토 뒤에 괄호 열고 (未)라고 넣어놓은 건 무슨 깊은 뜻이 있어서일까?
“토가 지녔던 바의 陽氣가 포위당하고 陰氣가 이것을 포위한다는 것은 어디서 갖고 온 이론일까?
저자는 이런 알 수 없는 소리들을 정신없이 내 뱉으면서 이런 주장들에 대해 필요한 설명은 단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
이것이 서양철학의 불비점과 무법칙적인 바를 지적한 사람이 그것을 바로잡는다고 내놓는 동양철학이다.
위의 본문을 어떤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천독을 하고 만독을 한다고 해서 그 의미를 깨칠 수 있는 것일까?
횡설수설이 읽는 사람의 정성과 읽는 횟수에 의해서 고도의 철학적 사유로 둔갑할 수 있을까?
더 이상 골치 아프게 따지거나 묻지 말자. 천하의 한동석이 하는 소리니까 그냥 외우고 넘어가자.
무극이 태극으로 변하는 과정은 대철학자이신 한동석선생님의 설명에 따르면 “토(土)가 뭔지 왜 여기서 토가 튀어나
오는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토의 작용으로 동질적인 분파작용을 일으키면서 음도(陰道)의 세력권을 이루게 되어 토
가 갖고 있던 양기가 음기에 포위당하는 것”이라고 하니까 그냥 외우고 넘어가자.
이게 相火라는 것이고 하여간에 淸氣인가 뭔가가 완전히 포위를 당해야 머시기 율려운동이라는 것이 완성되면서
무극이 태극으로 둔갑을 하는 것이니라“라는 황홀한 설법이니까 이것도 그냥 달달 외우자.
외우고는 싶은데 솔직히 이 설법에 대해서 해 줄 소리는 한마디로 ”지랄육갑을 하고 자빠졌다“이다.
이건 철학도 아니고 과학도 아니고 우주론도 아니고 그냥 잡소리다. 일고의 가치도 없는 횡설수설이다.
“청기(淸氣)가 완전히 포위당하게 되면 무극은 율려운동을 완성하면서 태극으로 변하게 된다”는 소리로 미루어보면
토가 지녔던 양기가 바로 청기(淸氣)인 모양이다.
토의 양기=청기. 왜냐하면 앞에서 포위당한 것은 토의 양기였으니까.
그렇다면 저자가 말하는 중탁지기(重濁之氣)라는 것은 陰氣로 볼 수 있겠다.
이 중탁지기가 경청지기를 포위하는 것에서부터 무극이 태극으로 변하는 과정이 시작된다고 하는 설명인 듯 하다.
그래서 이 포위가 완전히 끝나야 비로소 태극이 완성되고 그것을 또 음양작용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변성을 끝낸 태극은 투쟁의욕을 내포하게 된다고 한다.
그리고 태극이 자기 본성을 발휘하면 현실계의 모순대립을 나타낸다고 한다.
그렇다면 태극의 본성은 모순과 대립을 나타내는 성질이라는 말이 된다. 태극이 기가 막힐 소리다.
태극의 본성은 모순과 대립이 아니라 조화와 순응이다.
살펴보다시피 그다지 길지도 않은 문단속에서 앞뒤 말들이 하나도 연결되지 않는다.
초등생의 글짓기도 이렇게 하면 야단을 맞는다. 글을 이렇게 쓰는 사람이 460쪽이나 되는 책을 완성했다는 사실이
나는 놀랍다. 이런 글을 그만큼 쓰고 나면 뇌가 꼬이고 골의 위치가 바뀌어야 정상이다.
글을 쓰는 사람은 독자가 알고 있으리라고 짐작되는 단어들로 문장을 구성해야 한다.
그리고 그 단어의 의미들은 언어로서 약속된 것이어야 한다. 어쩔 수 없이 독자들이 모를 것이라고 짐작되는 새로운
용어나 단어를 사용할 때는 먼저 그런 용어에 대한 이해부터 시켜주어야 한다.
그리고 저자와 독자 사이에 그 용어의 의미에 대한 약속이 선행되어야 하는 것이다.
“나는 앞으로 이 단어는 이런 의미로 사용하겠습니다” 하고 독자에게 미리 설명을 해야 한다.
약속되거나 정의되지 않은 단어, 지 혼자만 뜻을 아는 용어를 아무런 설명이나 합의 없이 지 맘대로 글 속에 집어넣
는 것은 글짓기의 기본을 모르는 작태이다.
이런 사람은 초등학교에 입학해서 국어교육을 받는 것이 더 급하다. 음양오행을 떠들 때가 아닌 것이다.
위와 같은 글을 처음 접하게 되면 대부분의 독자들은 뒤에 가면 지금은 설명없이 튀어나온 이런 말이나 개념에 대한
설명이 나오겠지 하고 기대한다. 당연히 나와야 하고 나와야만이 책이라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우주변화의 원리”라는 책에는 이런 친절함이나 성의가 없다.
독자들이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소리들을 지 혼자 던져놓고는 그 뿐이다.
책을 끝까지 다 읽어도 그에 대한 설명이 안 나온다. 윗글에서의 중탁지기와 청탁지기가 뭔지는 독자의 상상에 맡긴다.
윗글의 土가 어디서 튀어나온 것인지도 독자가 알아낼 문제이다.
도올의 노자나 논어보다 씨나락의 차원에서는 훨씬 윗길이다. 씨나락의 극치를 우리는 여기서 볼 수 있다.
이 정도는 약과요 새 발의 피다. 가면 갈수록 저자는 황홀한 경지를 보여준다. 조금 더 보기로 하자.
무극은 形이 아니고 象이었다. 그 象이란 것은 청탁(淸濁)이 화합(和合)한 비청비탁(非淸非濁)의 중성적 존재였다.
그것이 바로 “시간적인 계(繼)”의 작용에서 “승(承)”의 작용으로 옮겨지는 것이니, 즉, “일반적 작용”이 그의 필연성에
의하여 형체를 이룰 수 있는 소질(素質)을 만드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필자가 위에서 말한 바의 인과관계란 시간적 계승의 일반적 필연성“이라고 한 것이다.
이와 같이하여 象에서 有가 창조되는 것이므로 易은 이것을 감위수(坎爲水 坎卦)라고 한다.
다시 말하면 “감(坎)”자의 개념은 “土”의 작용이 결핍(缺乏)되어서 “水”가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水는 有의 기본이며 형상계의 母體인 것이다.
한동석이 생각하는 무극의 정의가 여기서 다시 나온다.
무극은 象이며 象은 “청탁(淸濁)이 화합(和合)한 비청비탁(非淸非濁)의 중성적 존재였다”라는 것이다.
그러나 象에 대한 이 정의는 틀린 것이다.
象이란 形을 가진 존재의 내면적인 본성이나 그 존재가 활동하는 바탕이 되는 근원적인 힘이나 원리를 말한다.
형에 내포된 존재의 품성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때문에 象이라는 것은 청(淸)이던 탁(濁)이던, 중(重)하던, 경(輕)하던 어떤 속성을 가진 상태이다.
아무런 속성이 없는 비청비탁한 중성적 존재는 상이 될 수 없음이다.
철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용어의 개념에 대한 정의이다.
象이라는 글자가 갖는 의미자체가 특정한 존재의 고유한 성질이라는 것인데, 한동석은 이 象을 비성질적이고, 비
고유하며, 성질을 드러내기 이전의 어떤 것으로 상정하여 쓰고 있다.
그리고 象은 본시 形과 분리할 수 없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한동석은 象을 形에서 떼어내서 形 이전의 선물질적(先
物質的) 존재로 가정하고 있는 것이다.
形과 象을 다시 한 번 정의하면 어떤 존재의 모양이 形이요, 성질이 象이다.
어떤 특정한 존재의 고유한 성질을 象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때 “어떤 특정한 존재”에 “우주자연”을 집어넣어도 상관없다. 우주자연의 고유한 성질이 바로 우주자연의 象인 것
이다.
그럼 여기서 저자가 말하는 비청비탁(非淸非濁)이 어디서 나오는 소린가 알아보자.
공자가 지으신 십익(十翼)의 총론에 해당하는 계사전에 보면 “역(易)에는 태극(太極)이 있으니, 이것은 양의(兩儀)를
생하고, 兩儀가 4상(四象)을 생하고, 四象이 팔괘(八卦)를 생하였다”라는 원문이 있다.
그대로 옮기면 “易有太極, 是生兩儀, 兩儀生四象, 四象生八卦”이다.
이 계사전에 나오는 태극과 양의와 사상, 팔괘에 대해 많은 학자들이 저마다 한마디씩 주를 달았는데, 그 중에서 유
목이 말하기를 “태극의 원기는 청탁(淸濁)이라는 두 개의 기로 나누어지니 이것을 양의라 하고, 그 중 맑은 기운(淸
氣)이 하늘이 되고 탁한 기운(濁氣)이 땅이 된다”고 한 것에서 인용한 소리다.
한동석은 이 유목의 설에서 역추하여 무극을 청탁이 나누어지기 전의 상태, 즉 비청비탁의 단계라고 말하고 있는 것
이다.
그러나 무극이 비청비탁인 중성인 것과 그 뒤에 나오는 저자의 “시간적 계승의 일반적 필연성”과는 별 문맥상 연결이
안 되는 소리다.
더구나 유목의 설명에 따르면 맑은 기운은 위로 올라가 하늘이 된다고 했으니 이것이 양의로 보면 곧 양이다.
탁한 기운은 아래로 가라앉아 땅이 된다고 했으니 이것이 곧 음이다.
유목은 경청지기를 양기로, 중탁지기는 음기로 본 셈이다.
그런데 한동석은 무겁게 가라앉아 땅이 될 음기가 가볍고 맑아서 하늘이 될 양기를 포위한다고 말한다.
무겁고 탁한 기운이 가볍고 맑은 기운을 둘러싼다는 것이다.
나는 이 이론이 어디서 나온 것인지 과문하여 알지 못한다.
한동석은 이러한 동양학의 고금이론들을 그 출처를 밝히지 않으면서 그냥 자기가 깨달은 학설인 것처럼 마구잡이로
써먹고 있다.
그래서 어떤 전문가, 학자도 한동석의 주장 중에서 어느 것이 전래된 것인지 어느 것이 저자의 독창적인 이론인지
판별할 도리가 없다.
고금의 모든 동양철학을 전부 줄줄이 꿰고 있는 대천재나 엄청난 슈퍼컴퓨터로 검색을 해보지 않으면 알 도리가 없다.
나 역시도 이런 것을 가려보기에 무척 힘이 든다.
이 사람이 도대체 어디서 이런 이론을 끌어온 것일까를 한참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눈치채고 나서 보면 그냥 끌어온 것이 아니라 자기 맘대로 구기고 덧칠하고 변형시킨 것을 알 수 있다.
내가 보기에 이 책은 성리학의 제반 학설에, 주역의 이론들, 그리고 일부의 정역사상, 한국 고유의 도참설, 개벽설을
짬뽕해서 저자가 비빔밥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 체계도 없고 논리도 없이 그냥 닥치는 대로 끌어다 모아 놓은 것이다.
한 가지를 더 보자. “易은 이것을 감위수(坎爲水 坎卦)라고 한다”고 인용하고 있다.
역의 어느 부분에 이런 소리가 있다는 것인지, 그리고 역의 이 말과 저자가 앞서 말한 것이 어떻게 연결이 된다는 소
린지 알아보자.
고대의 역에서는 오행이 세상에 출현한 순서를 쫓아서 수화목금토라고 나열하는 게 일반적이다.
역에서는 수(水)를 제일 먼저 나온 물건으로 치고 이것을 하늘에 대입한다.
즉 水는 숫자로는 1이고, 하늘이며 방위는 북이다. 제일 첫 숫자인 “1”을 의미하는 괘의 이름을 감(坎)이라고 한다.
그래서 “감위수(坎爲水)”라는 계사전의 말은 “감괘(坎卦)라는 괘 이름은 숫자 1을 의미하며 하늘을 가리키고, 五行
으로는 水를 말한다”는 소리다.
“웅덩이 감(坎)”자는 흙토(土)와 부족할흠(欠)이 결합된 글자이다.
흙이 부족하면 뭘까? 바로 웅덩이다. 흙이 파내져서 부족한 빈 공간인 웅덩이에는 흙 대신 뭐가 고일까? 바로 물이
고인다. 즉 흙구덩인즉슨 저수지인 것이다. 그래서 水를 감(坎)이라는 글자로 표현한 것이다.
역에 나오는 이 말은 象인 무극에서 形인 有가 나오는 변화의 원리나 과정과는 별 상관없는 소리다.
감위수가 나올 계제가 아닌 것이다.
뜬금없는 소리가 나왔을 뿐 아니라 더 문제는 역을 전문적으로 공부한 사람이 아니면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한다
는 데 있다. 역을 전문적으로 공부하지 않은 독자는 전혀 모를 소리고, 공부를 한 사람에게는 황당무계한 소리를 하
고 있다는 점이다.
물이 고이는 웅덩이로서 물의 의미를 차용하여 괘의 이름을 붙인 것을 가지고, 흙이 결핍되면 물이 된다는 포복이
절도할 소리를 하고 계신다.
흙이 결핍되는데 어찌 물이 생기나? 이런 식으로 음양오행을 설명하니까 동양학이 왼통 미신이나 비과학적인 귀신
씨나락으로 취급되고 마는 것이다.
저자의 결론을 보자. “그러므로 水는 有의 기본이며 형상계의 母體인 것이다” 놀고 자빠졌다. 지 멋대로 씨부린다.
유목은 계사전의 양의를 청탁(淸濁)이라고 보고 청기가 하늘이 되고 탁기가 땅이 된다고 설명했다.
반면에 주돈이는 양의를 음양이라고 보고, 양이 하늘이요, 음이 땅이라고 설했다.
성리학의 문파마다 태극과 양의와 사상과 오행의 설명이 다 다르다.
그런데 한동석씨는 어느 유파의 학설을 지지하는지, 어느 문파의 주장인지 밝히지도 않고, 지 편한 대로 마구잡이로
갖다 붙이고 있다.
水를 有의 기본이며 형상계의 母體라고 주장한 성리학의 종파를 구르미는 알지 못하고 역의 어디에 저런 소리가
있는지도 본 적이 없다.
이와 같이 무극이 태극을 이루어놓으면 그 속에 내포되었던 陽은 표면을 포위하였던 陰(形)을 확장부연(擴張敷衍)하
면서 세계는 陽의 주도권하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 때에 온갖 모순과 대립이 나타나서 이 세계는 선악과 희비의 결전장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세계는 이 때문에 발전하는 것이므로 이 과정에서 인물이 생장하고 인식이 성립되며 또한 이성을 창조하는
중대한 기반을 이루는 것이다.
이와 같이 죄악의 과정이 도리어 상여(賞與)의 덕(德)이 되는 세계를 음양세계(陰陽世界)라고도 하며 또는 율려세계
(律呂世界)라고도 하는 것이다.
이것을 좀 더 자세히 말하면 陽이 주도하는 때와 陰이 주도하는 때를 구별하게 되는 것이니 陽이 主하는 세계를 동적
세계(動的世界)라고 하고 陰이 主하는 세계를 정적세계(靜的世界)라고 한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세계의 운동을 음양동정이라고 한 것이니 이것이 소위 ‘음양설’이다.
또한 공자(孔子)가 “역계사(易繫辭)”에 “일음일양지위도(一陰一陽之謂道)”라고 한 것도 바로 이 길(道)을 말한 것이
며, 태극생양의(太極生兩儀)라고 한 兩儀도 역시 “一陰一陽之謂道”인 바의 음양법칙을 말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陽의 운동이 시간적 발전을 거듭함에 따라서 만물이 세분화되는데 그 세분화 작용이 極에까지 이르는 과정
을 황극이라고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무극에 이르는 준비과정의 끝이 바로 황극인 것이다.
즉 甲의 끝(先)이 황극이고 己의 시작이 무극인 것이다.
그러므로 만물은 황극에서 통일을 준비하고 태극에서 화생(化生)을 시작하는 바 무극이란 바로 그들의 주재자인 것
이다.
註 : 앞에서 필자가 무극에서 태극에 이르는 변(變)의 과정을 설명할 때에 단순히 氣의 통일작용에 관해서만 논했다.
그러나 이것은 우주운동이 어떻게 변에서 화(化)로 옮겨지는가 하는 형이상학적인 변만을 말했던 것이다.
왜 그렇게 말하였는가 하면 무극 이후는 氣로서 통일하는 성국의 길이요, 태극은 形을 분열시키는 생장의 길이다.
그러므로 陰作用을 主로 하는 무극에서는 그 목적이 氣의 종합이었기 때문에 그와 같이 말했던 것이다.
계속해서 저자의 우주론이다.
이 글을 1만 번 읽으면 어떤 우주창조의 모습이 연상될는지 모르겠다. 글을 이렇게 쓰기는 참 어렵다. 모든 문장들이
의미나 문맥상 서로 연결되는 것이 하나도 없다. 매 줄마다 제각각 논다. 앞의 줄과 다음 줄이 논리적으로 연결되지
않는다.
앞의 내용과 연결하여 생각해 보자. 저자는 무극에서 태극이 완성되는 과정은 중탁지기가 경청지기를 포위하는 것
이라고 말하였다.
여기서 중탁지기는 가라앉아 땅이 되는 것으로 음(陰)이라고 말할 수 있고, 경청지기는 위로 올라가 하늘이 되는 것
으로서 양(陽)이라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저자가 하는 말을 요약해 보면 무극에서 태극이 되는 과정은 처음에 음(陰)이 양(陽)을 포위하는 것에서
시작을 한다.
이때 음(陰)을 형(形), 양(陽)을 상(象)으로 치환할 수가 있다. 공자는 계사전에서 양의를 논할 때 이와 같이 설명하기
도 하였다.
그렇다면 형(形)이 상(象)을 포위한다는 소리이다. 저자는 지금 음양과 형상에 대한 확실한 개념이 정립되어 있지
않아서 대단히 혼란스러운 생각의 편린들을 수사에 의지해서 나열하려고 몸부림을 치고 있는데 머리속에서 정리
되지 못한 것이 글로 정돈이 될 리는 만무하다.
공자는 양의를 설명하면서 하늘에 머무는 것을 상(象)이라 하고, 땅에서 구현되는 것을 형(形)이라 했다.
하늘은 땅에 대해서 하늘이며, 땅은 하늘에 대해서 땅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하늘과 땅은 상대가 있어야 자기가 존재할 수 있는 대칭물이다.
땅이 없다면 하늘이 있을 수 없고 하늘이 없는데 어떤 것을 땅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천지는 논리적으로 항상 동시에 존재해야 하고 언제나 함께 페어로 있어야 하는 것이다.
“나홀로 하늘”이나 “나홀로 땅”은 없다.
음양은 이와 같이 동시적 존재로서만 파악해야 한다.
음이 형이고 양이 상이라고 하면, 형과 상도 역시 마찬가지로 동시적인 개념이다. 결코 분리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한동석은 이 형과 상을 떼어내서 상이 형에 앞서 존재했던 것으로 우주론을 시작해버리고 만 것이다.
그러니 이후의 단추들이 제대로 꿰어질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면서 뭔가 명료하지는 않지만 혼탁한 가운데 어렴풋
이 잡히는 바가 있어서 “중탁지기가 경청지기를 포위하고...” 같은 난해한 설명을 하려고 애를 쓰는 것이다.
지금 한동석이 어렵게 어렵게 말하려고 하는 것을 내가 좀 쉽고 명료하게 설명을 해드릴까 한다.
무극에서 태극으로 발전하는 과정은 공(空)과 허(虛)로부터 색(色)과 실(實)이 드러나는 것이다.
이때 처음으로 만물의 모체가 되는 어떤 것이 나타나는데 이것을 역에서는 양의(兩義)라고 한다.
양의는 공자로부터 수많은 학자들이 표현을 각기 달리하는데, 음양(陰陽)이라 하기도 하고, 천지(天地)라 하기도 하
고, 청탁(淸濁)이라 하기도 하고, 형상(形象)이라 하기도 하고 동정(動靜)이라 하기도 하고 율려(律呂)라 하기도 하
는 것이다.
천지의 개념에서 보면 양은 하늘이요 음은 땅이다. 만물의 존재적 측면에서 보면 음은 형(形)이요, 양은 상(象)이다.
천하의 모든 만물은 무겁고 탁한 기운이 형을 이루어 겉에 드러나고, 가볍고 맑은 기운이 상을 이루어 그 속에 자리
잡고 있다. 모든 존재는 겉으로 형을 드러내고 속에 상을 숨기고 있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모든 존재의 겉은 음이요, 속이 양이다.
이 말을 개념의 정리가 채 안된 탓에 무지무지하게 어렵고 난해하게 둘러대고 있는 것이 한동석이다.
음과 양이라는 양의가 모습을 드러낼 때 음으로서 형이 되고 양으로서 상을 이루어 비로소 삼라만상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어떤 존재가 출현을 하게 되면 겉을 이룬 음(형)에 둘러싸인 내부의 양(상)이 가만히 있느냐 하면 그렇
지가 않다.
형을 이루는 음은 중탁지기여서 그 본성이 무겁고 정적이며 가라앉고 조용하며 차가운 것이다.
반면에 존재의 상을 이루는 양은 가볍고 맑으며 동적이고 상승하며 뜨거운 것이다.
그래서 음이 주도권을 갖게 되면 존재는 변화가 더디어진다. 극히 보수적이고 안정적인 세계이다.
그러나 존재는 겉을 이루는 형(음)의 내부에서 치열한 상(양)의 동요가 있기 때문에 잠시도 머물러있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이게 바로 불교에서 말하는 제법무아, 제행무상의 이유이다.
존재는 한순간도 고정되어 있지 않으며 쉴 새 없이 변화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로 말할 수 있는 진아라는 것을 갖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음양론으로 설명하면 바로 청탁, 형상의 상호작용이며, 이것을 음양의 법칙이라고 말한다.
한동석은 이것을 쉽게 말하지 못해서 “陽은 표면을 포위하였던 陰(形)을 확장부연(擴張敷衍)하면서 세계는 陽의 주
도권하에 들어가는 것이다”라고 한 것이다.
그리고 “그 때에 온갖 모순과 대립이 나타나서 이 세계는 선악과 희비의 결전장이 되는 것이다”라고도 말한다.
철학적 수사로 보면 이런 말도 못 할 것은 없다.
그러나 이 글을 우주론이라고 본다면 선악이나 희비와 같은 개념은 어울리지 않는다.
음양의 조화에 선악과 희비 같은 도적적 가치관을 집어넣게 되면 언제라도 논지가 씨나락으로 흐를 가능성을 갖게
된다.
바로 다음 구절에 벌써 이런 위험성이 나타나고야 만다. “이와 같이 죄악의 과정이 도리어 상여(賞與)의 덕(德)이 되
는 세계를 음양세계(陰陽世界)라고도 하며 또는 율려세계(律呂世界)라고도 하는 것이다”라는 말이 바로 이런 범주
에 든다. 만물의 겉을 이루는 형과 내재된 법칙으로 존재하는 상의 상호작용을 어느 일방을 죄악의 과정으로, 다른
일방을 상여의 덕으로 보는 것은 우주론이 아니라 유치한 권선징악의 소설과 같은 감을 준다.
이 문단의 결론부를 보자. “이와 같이 陽의 운동이 시간적 발전을 거듭함에 따라서 만물이 세분화되는데 그 세분화
작용이 極에까지 이르는 과정을 황극이라고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무극에 이르는 준비과정의 끝이 바로 황극인 것이다.
즉 甲의 끝(先)이 황극이고 己의 시작이 무극인 것이다.
그러므로 만물은 황극에서 통일을 준비하고 태극에서 화생(化生)을 시작하는 바 무극이란 바로 그들의 주재자인 것
이다”.
이 부분도 역시 성립되지 않는 구조의 문장이다. 존재의 象을 이루는 양이 운동을 함에 따라 천지우주가 모습을 바
꾸면서 그로부터 온갖 만물이 세분화되어 그 실체를 드러낸다고 하는 개념으로 동양적 우주론을 이해하면 맞다.
그래서 시간이 흐름에 따라 현상계가 나타나고 실재하는(오감으로 인식되는) 우주가 마침내 완성되게 되는데 이것을
세분화작용의 극이라고 보면 황동석이 말하는 황극은 우주의 완성을 말한다.
혹은 완성해가는 과정을 말하는 이름일 수도 있다. 그런데 뜨악하게도 바로 다음 문장을 보면 황극을 무극에 이르는
준비과정의 끝이라고 말하고 있다.
앞 뒤 말이 논리적으로 도저히 연결되지 않는 횡수의 한 경지를 유감없이 보여준다.
이런 글을 남들에게 읽으라고 하는 것은 횡포이다. 그리고 갑(甲)은 천간의 처음이요, 기(己)는 여섯 번째이다.
여기서 갑의 끝과 기의 시작이 어떤 논리적 연관성을 갖는지, 그리고 갑의 끝이 어떻게 황극이 되고 기의 시작이
무극이 되는지도 설명이 없다.
설명이 없을 뿐만 아니라 이 문단 내에서 어떤 문맥적 통일성이나 논리적 일관성을 가지고 연결될 수 없는 소리이다.
다음에 나오는 註를 보면, “음작용을 주로 하는 무극”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무극의 단계에서 벌써 음의 작용이 나오
게 되면 동양적 우주론은 더 이상 전개할 수가 없게 된다. 하회를 보자.
그러나 태극은 형(形)의 분산을 목적으로 하므로 각각 그 목적하는 바에 따라서 논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음은 분산을 중심으로 하고 논하겠다.
이것은 본래 동양철학을 논하는 관례였기 때문인 것뿐만 아니라 또한 일면만을 열거함으로써 타면까지 이해하게
하려는 생략법의 이용방법인 것이다.
이와 같은 음양세계의 동정은 태극에 이르러서 氣의 통일을 완수하게 되면 그 태극은 다시 황극의 길로 접어들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는 무극이 氣를 통일한 것과는 반대로 태극은 形을 분산하면서 황극으로 향발(向發)하는 것이다.
무극은 氣만을 통일하는 것이 아니고 物도 성숙(成熟)했듯이 태극도 形만을 분산하는 것이 아니고 物을 생장(生長)
시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태극의 외화작용(外化作用)은 무극의 내변작용(內變作用)과는 반대로 형체(形體)와 氣를 확장(擴張)하면
서 분산(分散)하는 것이며 양도(陽道)의 작용이다. 다시 말하면 통일하던 때의 주정세력(主淨勢力)이던 음기(陰氣)
가 여기에 오면 그 세력을 잃고 도리어 분산되어야 할 운명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을 음양의 승부작용이라고도 하고 또는 相剋作用이라고도 한다. 이와 같이 陽의 압박으로 인하여 분열
되는 음기(淫氣)는 전진(前進)함으로써 분열의 극(極)에 이른즉 그 성질은 도리어 순화(純化)되어서 음양을 구별할
수 없는 경지에까지 이르게 되는 것이니 이것을 기토(己土)라고 하는 것이다.
반면에 분열지기(分裂之氣)가 아직 상존(尙存)하는 곳을 황극이라고 하는 것인즉, 황극과 무극은 실로 호리간발
(毫釐間髮)의 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주가 두 개의 극(極)을 필요로 하는 것은 황극은 무극과 동일가치(同一價値)의 “中”이 아니므로
“易 건괘(乾卦)”에 말한 바와 같은 항룡유회(亢龍有悔)의 경계(警戒)를 요하는 위험한 位인 것이다.
항룡유회(亢龍有悔) : 이 말에 대해 설명을 하려면 조금 길어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런 말이 나올 때 하나하나 배워두면 다 재산이 된다.
주역은 원래 여덟 개의 괘로 시작이 되었다. 그래서 팔괘라 한다.
괘는 각각 3개의 효로 구성되는데 태극기 둘레에 그려진 괘의 그림을 연상하면 될 것이다.
길게 그어진 선을 양효라 하고 가운데가 끊어진 선을 음효라 한다. 두 종류의 선 세 개를 가지고 만들어낼 수 있는
괘의 가짓수는 2의 3승으로 8개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3개의 효가 전부 양효로만 구성된 괘가 팔괘의 첫 번째 괘이다.
1과 0이라는 2개의 숫자 3개로 만들 수 있는 2진수를 나열해보면 000, 001, 010, 011, 100, 101, 110, 111의 8가지
이다.
여기서의 0을 양효, 1을 음효로 생각하면 된다.
양효만으로 이루어진 괘인 “000”의 이름을 건괘라고 한다.
이 팔괘가 나중에 64괘로 발전하게 되는데 이때는 하나의 괘를 6개의 효로 구성하게 된다.
즉 0과 1이라는 두개의 숫자 6개로 만들 수 있는 2진수의 가짓수가 64개인 것이다.
이때 양효로만 구성된 건괘인 “000”을 두개 합한 괘의 이름도 역시 건괘이다.
2진수로 나타내면 “000000”이다.
그림으로 그리면 길게 이어진 선 6개를 포개어 놓은 것이다.
이 건괘가 64괘의 첫 번째 괘이며 지극한 양의 정수(精髓)로서 하늘을 상징한다.
64괘의 의미를 풀이한 것을 괘사(卦辭)라고 하는데, 각 괘를 이루는 하나하나의 효의 뜻을 설명한 것을 효사(爻辭)
라 한다.
“항룡유회(亢龍有悔)는 주역의 효사(爻辭)에 나오는 말이다. 즉 효의 의미이다.
어떤 효냐 하면 건괘를 이루는 여섯 개의 양효 중 가장 꼭대기에 위치한 효의 뜻이다.
효는 포개어진 여섯 개 중 가장 아래에 있는 것을 제1효 또는 초구라고 하고, 제일 위의 것을 제6효 또는 상구라고
한다. ”항룡유회(亢龍有悔)“는 건괘의 제6효에 대한 설명인 셈이다.
참고삼아 건괘의 여섯 개 효에 대한 공자의 설명을 들어보면, 제1효의 의미는 “잠룡물용(潛龍勿用)”이라 한다.
아직 물속에 숨어있는 어린 용이라서 쓰임이 없다는 뜻이다.
다른 말로하면 개천에서 노는 이무기다. 마악 태동하는 양이기 때문에 마치 겨울에 쌓인 눈 밑에서 움트는 봄의 새싹
과 같다. 대단히 미숙하고 약한 양이다.
그래서 그다지 힘을 쓰지 못한다. 이 효가 점괘로 나왔을 때는 아직 때가 아니니 실력을 쌓으면서 더 기다려야 한다.
제2효의 의미는 “현룡재전(見龍在田)”이다. 용이 물에서 나와 밭에 엎드려 있다는 뜻이다.
이때 용이 대인을 만나면 크게 등용이 된다. 그래서 이 효의 점괘는 “대인을 만나면 길하다”이다.
견룡은 실력이 닦여진 상태여서 자기를 써줄 사람을 만나기만 하면 빛을 보는 단계이다.
제3효는 “군자(君子)”이다. 등용된 후에 힘써 실력을 발휘하는 단계이다. 이때는 온종일 낮에는 쉬지 않고 노력하며,
밤에는 반성하고 삼가는 부단한 성취의 단계이다. 사람이 가장 정열적으로 활동하는 시기가 바로 군자이다.
네 번째 효는 “혹약재연(或躍在淵)”이라고 푼다. 아직 연못에 있기는 하지만 한 번씩 창공으로 솟아오른다는 뜻이다.
아직 본격적인 승천을 한 것은 아니지만 물 밖으로 솟구쳐 올라 하늘 높이 도약하는 기세를 보이는 단계이다.
이때가 인생에서 대단히 중요한 고비가 된다. 승천을 하거나 다시 연못에 빠지거나 둘 중 하나가 된다.
그 다음이 “비룡재천(飛龍在天)”이다. 비로소 용이 물에서 나와 하늘에서 노닐게 된 것이다.
인생의 최고 정점이요, 부귀와 영광의 극치에 이른 상태이다.
능히 구름과 비를 부르니 천하의 인재가 그 발밑에 모여들고 여의주를 얻으니 조화의 용력을 과시하게 된다.
점괘로는 천하를 얻을 괘요, 인신의 극인 용상에 나아갈 운이 된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하늘을 나는 용이 결국 어디로 갈 것인가이다.
연못에서 뜻을 얻어 하늘로 올라간 용은 결국 다시 내려와야 한다. 용은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가장 크고 깊은 물을 찾아간다. 그것이 바다이다.
그래서 바다의 신을 용왕이라 하고, 용이 뜻을 이룬 후에 쉬는 곳을 용궁이라 한다. 그런데 하늘로 올라간 용이 다시
내려와 바다를 찾지 않고 끝없이 끝없이 올라가려고만 하는 용이 있다. 이것을 항룡이라고 한다.
내려올 줄 모르는 사람이며, 만족할 줄 모르는 사람이다.
그래서 공자는 효사에서 건괘의 제6효를 가리켜 "항룡은 너무 높이 올라갔기 때문에 존귀하나 지위가 없고, 너무
높아 교만하기 때문에 자칫 민심을 잃게 될 수도 있으며, 남을 무시하므로 보필도 받을 수 없다"고 했다.
끝없이 올라간 용은 반드시 후회하게 된다는 것이 바로 항룡유회이다.
예를 들어 보면 516 혁명 후에 두 번에 걸쳐 대통령직을 수행하면서 조국근대화를 지도했던 시기의 박대통령은 비
룡재천(飛龍在天)이었다. 그러나 무리한 3선개헌과 그 뒤를 이은 종신집권을 위한 유신통치는 이른바 항룡의 길이
었다. 그 끝은 심원한 대양(大洋)의 궁주(宮主)가 아니라 비참한 추락이요, 마른 땅의 토룡과 같은 최후였다.
나폴레옹도 결국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항룡이었다.
통령시절에 프랑스혁명을 완성하면서 나폴레옹법전을 편찬할 무렵의 나폴레옹은 그야말로 비룡재천의 풍운아였고
베토벤이 교향곡을 지어 받칠 정도의 영웅이었다.
그러나 황제의 관을 쓰고 영국에 대한 대륙봉쇄령을 내린 시기부터 그는 항룡이 되기 시작했고 러시아원정은 항룡
의 최후를 결정짓게 되었다.
세인트헬레나에서 고독하고 불행한 만년을 보낼 때 그의 가슴에 교차하던 만감의 회억이 바로 공자가 말하는 항룡
유회이다. 지금 구속되어 재판을 받고 있는 대우의 김우중회장 역시 항룡의 후회가 가득할 것이다.
노무현은 비룡재천을 해보지도 못한 토룡(土龍)의 몸부림이다.
태풍에 실려 뜻하지 않게 하늘로 휘말려 올라간 지렁이다. 노무현은 항룡의 후회가 무엇인지도 모른다.
지렁이가 하늘 구경을 했는데 무슨 후회가 있을 것인가?
주역은 그 본질이 점치는 방법에 대한 설명이고 점괘풀이집이다.
그러나 보다시피 심오한 처세의 철학과 고도한 우주의 원리에 대한 통찰을 담고 있다.
고대인에게는 점괘야 말로 인간이 따라야 할 하늘의 충고였던 것이다.
이제 본문의 내용을 보자. 역시 이해가 난망한 씨나락우주론의 끝없는 행진이다.
본문에서 한동석은, “그러나 태극은 형(形)의 분산을 목적으로 하므로 각각 그 목적하는 바에 따라서 논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음은 분산을 중심으로 하고 논하겠다. 이것은 본래 동양철학을 논하는 관례였기 때문인 것뿐만 아니라
또한 일면만을 열거함으로써 타면까지 이해하게 하려는 생략법의 이용방법인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지금 저자는 무극과 황극과 태극의 세 가지 개념을 설명하려고 하는 것 같기는 한데 워낙 난삽하고 비약이 심하며,
선후가 혼란해서 그 희미한 윤곽조차 잡아지지가 않는다.
바로 앞에서 뭐라 했는가 하면 “무극에 이르는 준비과정의 끝이 바로 황극”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황극이라는 준비과정이 끝나야 비로소 무극이 시작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황극이라는 준비과정은 무엇을 하는 것인가 하면 저자의 말에서 찾아보면 그것은 “통일의 준비”이다.
“만물은 황극에서 통일을 준비하고 태극에서 화생을 시작한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대단히 복잡하게 비비꼬아서 말을 하고 있는데, 저자의 난삽한 조각들을 모아서 정리를 해보자.
조각모음을 실행하고 나면 대충 다음과 같이 된다.
황극은 무극을 위한 준비과정이다. 그 준비라는 것은 통일을 위한 준비이다.
따라서 무극이란 기를 통일하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무극은 상이므로 음이 주도하는 세계이다.
이상에서 볼 때, 한동석이 생각하는 무극은 공자를 비롯한 옛 성리학자들의 그것과는 사뭇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동석의 무극은 음양이라는 양의가 처음 잉태되는 삼라만상의 근본자리가 아니라 이미 음의 주도하에 기가 통일되
고 있는 형이하의 세계이다.
그리고 음은 본시 중탁지기로서 형을 이루는 것이고 양이 경청지기로서 상을 이룬다고 볼 때, 형이 아직 없이 상만
있는 무극이 음이 주도하는 세계라는 것도 앞뒤 안 맞는 소리이다.
그리고는 여기에 와서 하는 말인즉, 무극의 다음 단계인 태극에서는 이 통일이 오히려 분산되고 분열되어 쪼개지는
상황이 된단다.
한동석의 생각을 유추해보면 우주는 애초에 상으로서 존재한 무극의 단계에서는 기가 통일되어 있었다가 이것이
태극으로 발전하면서 분산되고 쪼개지는 것이 아닌가 생각되어진다.
그러나 그렇게 이해를 하려고 하는 순간 한동석의 말은 백팔십도로 뒤집히고 만다.
앞에서는 희다고 했다가 바로 다음 글에서는 검다로 바뀌는 것이 한동석의 글이다. 정말 그런지 한번 보자.
태극은 형의 분산을 목적으로 한다고 한다. 이것이 동양철학을 논하는 관례였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이런 관례가 있다는 소리는 들어본 적이 없다. 그리고서는 또, “음양세계의 동정은 태극에 이르러서 기의 통일을 완수하게 되면 그 태극은 다시 황극의 길로 접어드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태극은 형의 분산을 목적으로 한다고 했다가 바로 다음 줄에서는 태극에 이르러서 기의 통일을 완수하게 된다고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형의 분산이 기의 통일인 셈이다. 형이 분산되는데 어떻게 기가 통일된다는 소릴까? 또 황극을 무극에 이르는 준비과정의 끝이라 해놓고, 여기서는 기의 통일을 완수한 태극이 황극의 길로 접어든다고 한다. 더 골 때리는 것은 바로 다음 줄이다. 바로 한줄 앞에서 “태극에 이르러서 기의 통일을 완수하게 된다”고 해놓고서 여기서는 “무극이 기를 통일한 것과는 반대로 태극은 형을 분산하면서 황극으로 향발(向發)하는 것이다”라고 한다. 이건 철학이 아니라 완전히 술 취한 사람의 오바이트다. 지독한 횡설수설이다. 종잡을 수 없는 소리를 지 입에서 나오는 대로 뱉어던지고 있다고밖에는 달리 표현할 말이 없다. 그리고는 또 말하기를 “무극은 氣만을 통일하는 것이 아니고 物도 성숙(成熟)했듯이 태극도 形만을 분산하는 것이 아니고 物을 生長시키는 것이다”라고 하니 그 주절거림의 혼란스러움이 끝이 어딘지 알 수 없다. 무극이 통일한다는 氣라는 것이 무엇인지도 설명이 없고, 형이 없이 象만 있었다는 무극에 무슨 氣가 있어서 그것이 통일이 되며, 어떻게 벌써 物이 있어서 성숙까지 시킨다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한동석이 생각하는 무극과 황극과 태극은 아무리 이 책을 수백 번 읽고 10년을 화두로 삼아 명상을 해도 이해가 불가능하다. 워낙 말이 왔다 갔다 하는데다가 여기서 하는 말과 저기서 하는 말이 백팔십도로 달라지기 때문에 일목요연한 개념이 잡히지가 않는 것이다. 다음 구절을 계속 보자.
그러므로 태극의 외화작용(外化作用)은 무극의 내변작용(內變作用)과는 반대로 형체(形體)와 氣를 확장(擴張)하면서 분산(分散)하는 것이며 양도(陽道)의 작용이다. 다시 말하면 통일하던 때의 주정세력(主淨勢力)이던 음기(陰氣)가 여기에 오면 그 세력을 잃고 도리어 분산되어야 할 운명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한동석은 여기서 변(變)과 화(化)라는 말을 처음으로 사용한다. 외하(外化)와 내변(內變)이라는 말이 그것이다. “화(化)”를 “외(外)”와 결합하고 “변(變)”을 “내(內)”와 짝하여 놓았다. 그러나 이것 역시 한동석이 얼마나 동양철학과 한자어에 대한 개념이 없는 사람인지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우리가 흔히 “변화(變化)”라고 쓰는 말도 “형상(形象)”이라는 말과 같이 복합어이다. 이 “변화”는 “형상”과는 뗄 수 없는 관계를 가진 하나의 철학적 개념에서 파생된 단어이다. 즉 존재의 “형상(形象)”에서 “형(形)”이 달라지는 것을 “변(變)”이라 하고, “상(象)”이 바뀌는 것을 “화(化)”라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형상의 변화”라고 말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기초적인 개념이 없다 보니까 짝짓기를 거꾸로 하게 된다. “형변상화(形變象化)”를 “형화상변(形化象變)”이라 하면 안 되는 것인데, “내화외변(內化外變)”을 “외화내변(外化內變)”이라고 말을 잘못 조합해서 쓰고 있는 것이다.
보다시피 한동석은 동양적 우주론의 이해에 선결이 되는 형상이나, 변화, 음양과 같은 기초적인 용어에 대해서도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 못하다. 그러니 어떻게 무극과 태극과 황극이 설명이 될 수 있겠는가 말이다. 차말로 나무관세음이다.
그 뒤에 하는 소리를 들어보자. “통일하던 때의 주정세력(主淨勢力)이던 음기(陰氣)가 여기에 오면 그 세력을 잃고 도리어 분산되어야 할 운명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이다. 여기서 “통일하던 때”란 무극을 말한다. “여기에 오면”에서 “여기는” 태극이다. 무극이 태극으로 바뀌게 되면 주정세력이던 음기가 힘을 잃게 된다는 소리다. 그런데 아까도 말했다시피 한동석은 무극을 아직 형이 없는 상만 있는 시기라고 했다. 상은 음이 아니라 경청지기로서 양이다. 한동석의 우주론이 얼마나 뒤죽박죽인가 여기까지만 봐도 충분할 정도이다. 이어서 “陽의 압박으로 인하여 분열되는 음기(淫氣)는 전진(前進)함으로써 분열의 극(極)에 이른즉 그 성질은 도리어 순화(純化)되어서 음양을 구별할 수 없는 경지에까지 이르게 되는 것이니 이것을 기토(己土)라고 하는 것이다”에 이르면 더 할 말이 없게 만든다. 이 이상 씨나락적일 수는 없다. 아니 더한 씨나락이 바로 다음에 나온다. 한번 보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주가 두 개의 극(極)을 필요로 하는 것은 황극은 무극과 동일가치(同一價値)의 “中”이 아니므로 “易 건괘(乾卦)”에 말한 바와 같은 항룡유회(亢龍有悔)의 경계(警戒)를 요하는 위험한 位인 것이다.
한동석은 참으로 대단한 사람이다. 내가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때 실로 탄복을 금치 못했다. “항룡유회(亢龍有悔)”를 이런 상황에서 써먹는 사람이 있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던 바다. 한동석이 지금까지 정의한 무극은 “象만 있으며, 음이 주도하고, 기의 통일을 이루는 무엇”이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청탁이 화합한 비청비탁의 중성적 존재라는 둥 헛소리를 한다는 점이다. 음이 주도한다고 했으면 이미 中이 아니다. 中이란 음도 양도 아니며 가치중립적인 무성(無性), 무질(無質), 무색(無色)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기의 통일이 완수된 것이 무극인데 반해 분열지기가 상존하는 단계를 황극이라고 여기서는 말한다. 분열지기는 양도(陽道)의 작용이기 때문에 아마도 양이 극성을 부리는 상태를 황극이라고 보면 되겠다. 무지무지하게 골에 쥐가 나고 머리에서 증기압이 급격하게 올라가는 중이지만 조금만 더 참고 끝가지 보기로 하자. 이런 분열지기가 상존하는 황극이 항룡유회의 위치라는 것인데... 양도가 음도를 압박해서 분열시키는 작용과 건괘의 제6효인 항룡유회가 어떤 맥락에서 연결될 수 있을까? 미리 항룡유회에 관한 설명을 해드렸으니 재밌는 두뇌개발용 게임이거니 하고 각자가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란다.
그러나 이것은 무극의 보좌역(補佐役)인즉 우주에 만일 황극이 없다고 하면 무극을 창조할 수 없고 무극이 창조되지
못하면 세계는 조화와 통일을 이룰 수가 없게 된다.
이와 같은 과정을 거쳐서 황극은 무극으로 변하게 되는데 이것을 우주라는 형이상적 입장에서 보면 氣의 종합과 분
열의 象이지만 인물(人物)이라는 형이하적 입장에서 보면 형체의 生長老死인 것이다.
세계의 모든 생명체를 소우주라고 하는 것은 모든 생명체는 우주의 음양작용이 변화하는 대로 자기를 변화시키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지칭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필자가 위에서 목적세계인 인물계를 “시간적 계승의 이율적(二律的) 우연성(偶然性)”이라고 한 것은 바로
이 세계에 대한 형질적 존재의 활동규범을 정의한 것이다.
註 : 승(承)이라는 것은 통일의 방향으로 연결하는 것이요, 계(繼)라는 것은 분산의 방향으로 연결하는 것이다.
이율(二律)이라는 것은 形 가운데서 동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요, 우연(偶然)이라는 것은 필연(必然)의 반대인즉
반드시 인과율대로 움직이지 않는 것, 즉 인과율에서 탈선(脫線)할 수도 있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여기서는 다시 황극을 무극을 보좌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즉 황극이 없다면 무극이 창조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또 바로 다음 줄에서는 “이와 같은 과정을 거쳐서 황극은 무극으로 변하게 되는데...”라는 말이 나온다.
보좌역이라는 것은 쉽게 비유하면 사장에 대한 비서와 같다.
사장이 있고 비서가 있다. 그런데 비서가 변하여 사장이 되는 것이라면 이때의 비서는 사장의 보좌역이 아니다.
아직 사장이 되지 못한, 되기 전의 어떤 사람이다.
어떻게 황극이 무극의 보좌역이었다가 이것이 무극으로 변할 수가 있다는 말인지 나같이 아둔한 사람은 도저히 이해
할 길이 없다. “A가 B를 창조한다(만든다)”는 말과 “A가 변하여 B가 된다”는 말은 전혀 다른 소리다.
철학자가 철학적 논증을 하는 자리에서는 이와 같은 허술하고 부주의하며 산만한 어법이 용납되지 않는다.
만약 이런 것이 허락된다면 철학자 못할 사람 아무도 없고 이까이거 우주론쯤이야 떠들지 못할 사람이 없다.
하물며 수 천년 서양의 철학과 우주론과 고금의 철학자들을 무법칙하다고 싸잡아 폄하한 후의 설법에서야 가당키나
할 소리겠는가? 이 정도의 개념적 차이도 무시하고 마음대로 떠들어대는 소리가 동양의 우주론이라면 실로 기막히
고 부끄러울 따름이다. 동양학을 왜 하는가? 차라리 무협소설을 읽음만도 못하지 않은가?
무극이 창조되고 안 되고 하는 물건이 아니라는 것은 동양적 우주론의 기본의 기본이다.
동양에서 말하는 우주는 무극이라는 것에서 시작된 것이다.
무극이 어디서 시작된 것인가는 묻지 않는다. 그것을 묻게 되면 어떤 우주론도 성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기독교의 창조주가 어디서 왔는가, 창조주를 창조한 사람은 누구인가 묻는 것은 기독교 신학의 범주를 벗어나는 것
이다. 빅뱅 이전의 우주알이 언제부터 있었고, 어디서 비롯되었는가는 우주물리학이 답해주지 않는다.
道가 언제부터 존재한 것인가 물으면 노자는 웃고 만다.
동양적 우주론에서 말하는 무극이란 그 기원과 유래를 묻지 않는 우주의 모체이다. 만들어지지도 않으며 파괴되지
도 않고, 생성되지도 않고 소멸되지도 않는 것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불생불멸, 부증불감, 불구부정하는 태초의 이전을 말한다.
그런데 한동석씨는 이런 우주론의 전제를 과감하게 혁파하고 있다.
무극은 창조되어지는 것이며, 무극의 창조에 필수불가결한 요소가 황극이라고 말한다. 그
렇다면 시간의 선후관계를 따지면 먼저 황극이 있고, 그 다음에 창조된 무극이 있다는 소리다.
더욱 황당한 소리는 그 다음이다.
“무극이 창조되지 못하면 세계는 조화와 통일을 이룰 수가 없게 된다.”
이 문장에 의하면 세계는 무극 이전에 이미 존재하고 있다는 소리가 된다.
다만 조화와 통일을 이룰 수가 없을 뿐이다.
한동석의 문장 구사가 얼마나 황폐하고 지리멸렬한 것인가는 모든 문장의 한 줄 한 줄에서 빠짐없이 확인할 수가
있다. 일부러 글을 이렇게 엉터리로 쓰고자 해도 쉽지 않은 일이다.
초등생들 글짓기 대회 제출작에도 이런 졸렬한 악문으로 된 작품은 보기 힘들다. 요즘 초등생들 수준이 장난이 아니
어서 이런 글은 장려에도 끼지 못한다. 하는 소리를 한번 보라. 무극이 창조되지 못하면 이 세계 자체가 존재할 수가
없는데, 무슨 조화와 통일이 언급될 이유가 있나?
무극이 창조되지 못한다면 우주론 자체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조화니 통일이니 하는 소리가 나올 필요조차 없는 것
이다. 그런데, 무극이 창조되지 못하면 그저 조화와 통일만 이루지 못한다는 소리다.
부조화하고 분열되어 있어도 우주는 우주고 존재는 존재다. 무극이 없는데 왠 조화, 왠 통일? 기가 막힌다.
짜증이 나지만 한 줄만 더 보자.
“황극은 무극으로 변하게 되는데 이것을 우주라는 형이상적 입장에서 보면 氣의 종합과 분열의 象이지만 인물(人物)
이라는 형이하적 입장에서 보면 형체의 生長老死인 것이다.”
황극이 무극으로 변하는 것을 한동석은 “기가 종합되고 분열되는 象”이라고 말한다. 암만 생각해도 나는 한동석이
라는 사람이 무극과 태극이라는 것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 것인지 수상스럽다.
“기가 종합되고 분열되는 象”이라고 말하면 이건 황극이 무극을 창조하는 과정에 해당되는 말이 아니라 현상계 자체
의 법칙에 더 어울리는 소리다.
우리가 오감으로 인지하여 그 존재를 감지할 수 있는 현실세계가 바로 기의 종합과 분열이 빚어내는 기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그 기가 종합되고 분열되는 법칙과 원리에 대해서 설명하는 것이 바로 음양오행론이다.
음양오행론은 황극과 무극의 법칙이나 원리가 아니라 바로 이 현상세계에 대한 설명인 것이다.
한동석이 여기서 말하는 형체의 생장노사도 당연히 시방삼세에서 벌어지는 일들이지 무극의 단계에서 말할 것이 못
된다.
무극이란 아직 어떤 형과 상도 생기지 않은 상태이다.
기의 종합, 분열이나 형체의 생장노사가 나올 계제가 아닌 것이다.
좀 더 거시적으로 동양적 우주론을 바라본다면 우리는 무극에서 출발해서 무극으로 돌아오는 우주의 순환을 가정할
수 있다. 빅뱅론의 순환과 흡사한 개념이다. 우주알(무극)이 어느 날 폭발하여 우주가 탄생했다가 언젠가는 팽창력
이 중력을 감당하지 못하여 다시 수축하게 되는 일대기를 갖는다.
우주는 결국 대폭발의 이전으로 되돌아가게 된다는 것이다. 동양적 우주론에서 무극이라는 것은 이 빅뱅론에서 말
하는 우주알과 비슷하다.
그곳을 우주물리학자들은 “특이점”이라고 말한다.
모든 물리학적 법칙이 현재의 우주 속에서와 전혀 다르게 작용할 것이라고 해서 붙인 이름이다. “특이한 상태”이다.
무극도 역시 태극 이후의 세계와는 전혀 다른 것이다.
불교에서는 이것을 열반적정(涅槃寂靜)의 세계라 한다. 성리학에서는 적막무짐(寂寞無朕)이라고도 한다.
노자는 홀황홀황(惚恍惚恍)하다고 했다.
氣 이전의 세계이며 생장노사에서 벗어난 세계이다.
기가 종합,분열되고 인물이 생장노사하는 법칙을 무극에 대입하여 생각한다면 이것은 특이점을 뉴튼의 물리학으로
설명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제 저자가 달아놓은 註를 보자. "승(承)이라는 것은 통일의 방향으로 연결하는 것이요, 계(繼)라는 것은 분산의
방향으로 연결하는 것이다."라고 하는데... 한자의 뜻을 자기 필요한대로 지어내서 갖다 붙이고 있다는 감을 받는다.
승(承)과 계(繼)는 둘 다 "잇는다"는 의미를 가진 한자이지만 “승(承)”은 받들어 모신다는 뜻이 있다.
즉 위에서 아래로 이어지는 것이다. 반면에 “계(繼)”는 수평적인 연결이다.
수직적인 전승(傳承)의 의미가 강할 때는 “승계(承繼)라고 쓰고, 수평적인 인계(引繼)에 가까운 뜻으로 쓸 때는 계승
(繼承)이라고 하는데, 그다지 문법상 구속력이 강하게 구분되어 쓰이지는 않는다.
承과 繼를 통일의 방향으로 잇거나 분산하는 방향으로 연결한다는 말은 한자의 의미를 자의적으로 확대하는 것이다.
그렇다 치고, “시간적 계승의 이율적(二律的) 우연성(偶然性)”이 무슨 말일까?
우리가 흔히 쓰는 “이율배반(二律背反)”이란 말은 두 개의 법칙이 서로 상반돼서 충돌함을 뜻한다.
헌법소원이 제기되면 헌법재판소에 판정하게 되는 것도 헌법과 법률이라는 두 가지 율(律)이 서로 상충되지 않는 것
인지를 가리는 것이다.
물론 이때 상위의 율(律)이 헌법이다. 그런데 저자는 이율(二律)의 의미를 註에서 “形 가운데서 동하는 것”이라고
한다. 어떤 이율(二律)을 설명하려면 반드시 두 개를 말해야 한다. 그래야 二律이니까.
그런데 “形 가운데서 동하는 것”이라고 하면 나머지 하나는 뭐라는 말인가?
“이율(二律)=形 가운데서 동하는 것” 이런 소리를 강아지 다꾸앙 먹고 트림하는 소리라 한다.
한동석이 설명하는 대로 “시간적 계승의 이율적 우연성”이란 골 때리는 철학적 경구를 한번 풀이해 보자.
어떻게 될까? “시간의 선후관계를 따라 통일의 방향으로 연결하고, 분산의 방향으로 연결하며 形 가운데서 동하고
인과율에서 탈피할 수도 있는 것”이 된다. 이게 무슨 소린지 이해되나?
이 글을 읽는 구름가족들 중에 한동석이 말하는 “시간적 계승의 이율적 우연성”이라는 말을 좀 알아듣기 쉽게 설명
해 줄 대철이 계시다면 구름이 돈수백배 가르침을 청한다.
이와 같이 우주운동은 무극에서 태극으로 반복하면서 일률일려(一律一呂)하는 과정인 것이다.
그러나 그 과정은 형극(荊棘)의 길(道)이므로 陰(惡)陽(善)之道라고 하거니와 이것은 만물이 생장수장(生長收藏)하는
부모(父母)요, 사리사욕(私利私慾)이 공리공욕(公利公慾)을 멸시(蔑視)하는 횡포의 바탕이요, 청명지원(淸明之源)이
혼암(昏暗)의 유동 속에서 방황하게 하는 길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을 속세(俗世) 혹은 진세(塵世)라고도 하는데 이것은 우주가 변성화생(變性化生)하기 위한 시점적인
필연인 것뿐이요 결코 우주의 죄악은 아닌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우주의 사리사욕의 소치가 아니고 다만 공리공욕이 행하는 도정(道程)에서 생겨난 일종의 부작용
이기 때문이다.
한동석류의 우주론이 황당할 뿐만 아니라 위험하기까지 한 이유가 이 대목에서 엿보인다.
동양적 우주론은 이 세계를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본다.
하나는 실체가 없는 상(象)으로서의 체(體)요, 다른 하나는 실체가 드러난 형(形)으로서의 용(用)이다.
전자를 노자는 도(道)라고 했고 후자를 덕(德)이라 했다.
도자(道者)들은 전자를 허(虛)라 하고 후자를 실(實)이라 한다.
불교는 전자를 공(空)이라 하고 후자를 색(色)이라 한다. 유자(孺子)들은 전자를 무극(無極)이라 하고 후자를 태극
(太極)이라 한다.
무극에서 태극으로 반복하는 것은 한 우주의 사이클을 말한다. 즉 하나의 우주가 생성되고 소멸하는 거대한 주기를
무극에서 태극으로, 태극이 다시 무극으로 순환한다는 개념으로 헤아린다.
이런 우주의 주기가 반복되는 것은 워낙 무한대의 시간과 무량한 공간의 차원이기 때문에 인간의 사유범위를 넘어
서는 것이며 우주론의 관점 밖인 것이다. 우주가 수도 없이 만들어지고 소멸되는 과정이란 철학이나 과학의 범주를
넘어서는 것이며 우리는 그것에 대해 떠들어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
공자의 “일음일양위지도”라는 말은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 속에서의 음양의 변화와 우주운동의 법칙을 말씀
하신 것이다. 우주 자체의 사이클에 적용시킬 얘기가 아닌 것이다.
그런데 한동석은 무극과 태극의 반복을 율려의 과정으로 말하고 있다.
씨가 이런 수작을 부리는 이유는 둘 중의 하나로 보인다. 하나는 음양론과 성리학에 대해 개념의 정립이 안 된 탓일
수도 있고, 아니면 정역사상에 잘못 탐닉하여 동양적 우주론을 개벽사상과 무리하게 결합시키려고 하는 것일 수도
있다.
증산과 일부 등 국내의 자생종교 창시자들이 주장한 교리들을 보면 반드시 우주의 주기라는 골 때리는 개념이 나온
다. 말도 안 되는 소리로 희한한 계산법을 동원한 끝에 한 우주가 시작되고 끝나는 주기를 129,600년이라는 둥 주섬
거리면서 지금이 우주의 주기로 치면 가을이니, 겨울이니 하고 헛소리를 해댄다.
그래야만이 선천시대와 후천시대로 나눌 수가 있게 되고, 그래야만이 세상의 종말과 개벽이라는 개념이 성립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우주의 주기를 계산하는데 그 기준으로 등장하는 것이 지구의 공전궤도와 자전하는 축의 기울기이다.
이 공전궤도와 지축의 각도를 가지고 지구의 종말시기를 계산한다.
그래서 나온 정역이라는 것은, 현재 타원 궤도를 이루고 있는 지구의 공전이 바로잡히고 23도 기울어져 있는 지축이
바로 서게 되면 1년이 정확하게 360일이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어야만이 모든 모순과 불합리가 제거된 올바른 역이 적용되는 세상이 온다는 주장이다.
그것이 정역이요, 그때 세상의 이름이 용화낙원이요, 그런 세상을 만들어 줄 인물이 바로 강세하실 상제님이다.
이 메시아들이 바로 증산이나 일부 같은 대성인의 부활인 것이다.
이런 삿된 종교적 관념과 개벽론에 필요한 것이 거시적인 우주의 순환주기이다.
그래서 무극과 태극이 반복되는 일률일려 따위의 망상이 나온다는 소리다.
황극 --> 무극 --> 태극이라는 삼극의 순환은 성리학의 내용이 아니라 일부의 정역사상에서 나온 소리다.
"우주변화의 원리"가 일부 자생종교의 이론서로 이용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책은 결코 순수한 동양학적 관점의 철학서도 아니고 한의학적 관점의 음양오행론도 아니다.
정역사상으로 혹세무민하는 날조된 우주론의 음습한 도그마인 것이다.
그래서 한동석의 우주론에는 도덕적인 관념이 결부되어 있다. “형극(荊棘)의 길(道)”이나 “陰(惡)陽(善)之道”, 또는
“사리사욕(私利私慾)”이나 “공리공욕(公利公慾)” 같은 도덕적 용어들이 나열되는 것이 그래서이다.
우주의 순환에 왠 형극의 길이 등장하나? 우주가 가시밭길을 걷는다는 소리다.
그리고 陰을 惡에 陽을 善에 대입하고 있다.
이것은 한마디로 우주론에 대해 아예 개념자체가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개념도 없는 사람이 그냥 나오는 대로 횡설
수설하고 있는 거다. 그러나 오히려 이런 삿된 요소들이 이 책을 종교의 이론서로 기능하게 하는 것이다.
일음일양을 일률일여로 둔갑시킨 후에 한 우주 내에서의 변화의 법칙을 우주 바깥에서의 사이클로 대치해 놓은 것
이다. 그 이유는? 종말론과 개벽론을 떠드는 정역사상을 알리고자 함이다.
내가 보기에 한동석은 일종의 미신적 동양학에 빠진 사람이다.
사주철학자, 운명철학자에 가깝다. 이 길지도 않은 글 중에 사용된 말들을 보자.
일률일려(一律一呂), 형극(荊棘), 陰(惡)陽(善)之道, 생장수장(生長收藏), 사리사욕(私利私慾), 공리공욕(公利公慾),
청명지원(淸明之源), 혼암(昏暗), 진세(塵世), 변성화생(變性化生)...
공자가 기죽어서 숨도 못 쉬겠다. 책 전체가 이 모양이다. 잘 쓰는 글은 가장 평이하고 쉬운 말로 가장 어려운 개념을
가장 알기 쉽게 설명하는 글이다. 동서고금의 양서는 모두 그렇다. 어렵고 희귀하고 전문적이고 고차원적인 단어로
도배하는 인간치고 제대로 아는 사람이 없는 법이다. 다음 원문을 보자.
그렇다면 우주의 본체가 어떠하기에 그와 같은 천지재변(天地災變)과 인물의 화복(禍福)이 쉴 새 없이 일어나며,
모순과 투쟁이 판쳐야만 하는 것인가 하는 것을 연구하는 것이 본고의 본체론과 우주론의 사명인 것이다.
그러므로 본론에 들어가기 전에 서두에서 이와 같은 개요를 논하는 것은 첫째 상수학(象數學)의 일반적 상식을 공급
하려는 것이요, 둘째로는 동양철학의 우주관이 목표로 하는 바를 제시하여 두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연구하는 데는 위에서 말하는 바와 같은 “명(明)”과 법칙을 필요로 하는 외에 또한 정명사상(正名思想
즉, 槪念)에 대한 연구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해둔다.
이 부분이 총론 제2절 “동양철학의 우주관”의 마지막 글이다.
여기서도 저자는 자기의 목적이 우주의 본체를 밝히는 것이라고 명토박고 있다.
그리고 이런 총론을 서두에서 늘어놓은 이유로 두 가지를 들고 있는데 지금까지 소개한 내용들을 아무리 되돌아봐도
상수학의 기본 상식에 해당하는 내용은 안 보인다.
그리고 동양철학의 우주관이 목표로 하는 바도 전혀 제시한 적이 없다.
저자가 지금까지 말한 것은 보다시피 밑도 끝도 없는 소리들이었을 뿐 상수학의 상식이나 우주관의 목표로 하는 바
와 비슷한 내용은 나온 적이 없다.
그리고는 느닷없이 정명사상의 연구가 선행되어야 한단다.
정명사상이 뭔가? 이름으로 본질을 구속하려는 사상이다.
다시 말하면 유교가 추구하는 사회질서의 확립을 위한 방법론이다. 즉, 이름이 사물을 정의한다는 사상이다.
왕이 왜 왕인가? 발가벗겨 보면 똑같은 사람이다.
왕이라고 태어날 때 이마에 왕자가 찍혀있는 것도 아니고, 등에 용의 비늘이 돋은 것도 아니다.
눈이 세 개인 것도 아니고, 힘이 천하장사인 것도 아니다.
그런데 왜 만백성들은 왕을 섬기고 충성을 다하고 심지어 목숨까지 바쳐야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유교의 답변은 간단하다. “그 사람의 이름이 왕이기 때문이다”가 유교의 답이다.
이 답 앞에는 백구가 무언이다. 이름이 왕이라는 데야 뭐라고 할 것인가? 앵겨들 도리가 없는 답이다.
신하는 왜 신하인가? 그 이름이 신하이기 때문이다. 그 이름이 신하인 사람은 신하된 자의 도리를 다해야 한다.
왜 남편은 하늘처럼 떠받들어야 하는가? 그 이름이 남편이기 때문이다. 정명사상을 골치 아프게 생각할 필요 없다.
모든 사물에는 알맞은 이름을 지어 붙이고 사물은 그 이름이 정해주는 역할과 도리를 다하면 되는 것이다.
왕질을 할 넘한테는 왕이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신하질 할 넘은 신하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지아비질 할 넘은 지아비
라고 붙여주고, 마누라 할 욘은 마누라라는 이름을 떠억하니 붙여주면 만사 땡이다.
세상은 그것만으로 질서가 잡히고 탈 없이 잘 돌아가는 것이다.
물론 내시한테는 내시라는 이름을 노비한테는 노비라는 이름을 붙여준다.
자기 이름에 만족하지 않는 넘이나 뇬은 지구밖으로 추방한다. 이게 유교다.
이 무시무시한 사상을 처음 창안하신 분은 공자다.
제양공이 공자에게 정치를 묻자 공자가라사대 “오직 정명을 행할 뿐”이라고 답했다.
제양공이 "워리즈 정명?"하고 되묻자 공자 가라사대 "정명이즈 군군신신부부자자데스요"라고 대답했다.
"君君臣臣父父子子" <----이게 正名이다.
그런데 노자는 이런 공자를 대단히 속물로 취급해서 눈 아래로 내려다 봤다. 우주자연의 도를 이름 따위로 구속하려
드는 것이 가소로웠을 것이다. 그래서 노자는 “이름이 무엇이던 이름은 신경쓰지 마라.
도를 도라고 부를 수는 있지만 굳이 도(道) 아니라도 상관없다. 대(大)면 어떻고, 이(夷)면 어떠냐.
이름이 어떠하던 도가 도 아닌 다른 것이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게 무위자연이다.
공자가 주창한 것은 입신양명이다.
이름 하나에 목숨을 건다. 이게 유자다.
이런 정명사상이 과연 우주변화의 원리와 상통하는 점이 있을까?
우주론에 정명사상을 갖다 붙이는 저 용감성에는 탄복치 않을 도리가 없다.
가장 반자연적이고, 비우주적인 인위적 사상이 정명사상이다.
우주론을 연구하는 데 정명사상에 대한 연구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주장에는 실로 어안이 벙벙할 따름이다.
그리고 이 뒤를 이어 정명사상에 대한 저자의 설명이 잠깐 나오는데 우주론과는 전혀 상관없는 엉뚱한 소리로 끝난
다는 것은 불문가지다. 한번 같이 보자. 그리고 또 한 가지 한동석이 언급한 상수학은 진짜로 골에 쥐내리는 학문이
다. 이것 역시 찬찬히 살펴보도록 하자.
제3절 사물(事物)과 개념-1(槪念)
지금부터 총론의 제3절이다. 앞에서 말한 정명(正名)사상에 대한 설명인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해서 논지를
구분하기 어렵다. 그리고 이 대목에서 말하는 내용이 앞으로의 사변의 전개에 두 번 다시 나오지도 않는다.
즉 이 책의 주제와는 동떨어진 파편이어서 이런 소리를 여기서 왜 하는지가 궁금한 대목이다.
뭘 말하려고 하는지는 오리무중이나 나름대로 뭔가 구체화시키려고 애를 쓴 것이 느껴지기는 한다.
그리 중요하게 소용되는 내용들은 아니니까 그냥 한번 읽어보자.
개념(Concept)이라는 것은 삼라만상(森羅萬象)이 다양다색(多樣多色)하므로 인간이 이것을 이해하기 쉽도록 하기
위하여 지각(知覺)이나 기억(記憶)이나 사상에 나타나는 개체적인 표상(表象)에서 그 공통된 속성을 추상(抽象) 결
합하여서 혹은 문장화하고 혹은 언어화된 사상의 통일체를 표식(標識)하기 위한 정명(正名)을 말하는 것이다.
개체적인 표상이란 낱낱의 사물에서 드러나는 속성을 말한다.
수많은 개체의 표상들 중에서 특정한 사물종의 공통된 표상을 추출해서 해당 사물을 정의할 수 있는 함축된 설명이
나 이름을 붙인 것이 개념인데 한동석의 설명은 역시 너무 어렵다.
예를 들어 “행성(行星)”이라고 하면 수성, 목성, 지구, 토성 등이 모두 해당된다.
각 행성은 모두 고유한 크기와 모양과 환경을 갖고 있어서 실로 천차만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각 행성의 개체적인 표상들 중에서 모든 행성이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성질을 추려내면 여러 가지 행성의 조건
이 나온다. 이런 공통적인 속성을 요약 정리하여 함축한 것이 “행성이라는 것의 개념”이며 그런 조건에 부합되는 천
체상의 어떤 존재를 우리는 “행성”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게 되는 것이다.
때문에 사물의 이름에는 그것의 개념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계속해서 원문을 보자.
그러나 여기에서 말하려고 하는 바는 그와 같은 논리학적인 연구를 대상으로 하려는 것이 아니고 다만 개념의 가치
와 필요성을 논함으로써 개념연구가 철학연구에 있어서 얼마나 중요하다는 것을 말해두려는 것이다.
개념(槪念)이라는 말은 동양철학적으로 말하면 “정명(正名)”이라고 하는 바 이것을 연구하는 학문을 정명학이라고
한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이성과 감정에 나타나는 개체적 표상에서 공통된 속성을 추출하여서 개념을 설명
하는 것은 서양철학의 경우와 일반이지만 그 개념이 바르지 못하면 사물의 전체관념이 어긋나므로 특별히 여기에
유의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문화의 발전과 지식의 통일을 위하여서는 불가무(不可無)의 방법인 것이다.
불가무(不可無)의 방법 : 없어서는 안 되는 방법. 더 쉬운 우리말이 있고, 그것을 쓰면 더 문장이 수려하고 매끈할
텐데도 굳이 어려운 한자어를 일부러 쓰는 것은 좋은 작문을 하고자하면 반드시 버려야 할 습관 중의 하나이다.
이런 방식으로 자기의 유식함이나 글의 전문성을 담보하려고 하는 시도는 반드시 실패하기 마련이며 오히려 저자
의 학문적 유치함을 부각시키는 효과만 거두게 된다.
저자는 정명(正名)의 의미를 개념, 즉 컨셉이라고 보고 있다.
사물의 컨셉이 바로 정명이라는 말이다. 컨셉... 공자님이 동의하실지 모르겠다.
공자가 말씀하신 정명은 사물의 컨셉보다는 포지셔닝에 가깝다.
우리가 만찬장에 들어갈 때 주최 측에서 나누어주는 명찰을 목에 걸고 들어가면 테이블 위에 명패가 있어서 자기
자리를 찾아가게 된다.
이때 나누어주는 명찰은 나라는 사람의 컨셉이 아니라 포지션을 결정해주는 것이다.
주최측의 판단에 따라서 귀빈은 로얄석에 자리를 준비했을 것이고, 각자의 지위와 계급에 따라 자리를 배정했을 것
이다. 각자에 가장 알맞은 자리를 배정하는 이름표가 공자가 말씀하신 정명이다.
물론 이렇게 가장 적합한 자리를 배정하기 위해서는 게스트의 신분과 주최측과의 관계, 사회적 비중 등을 모두 고려
해야 한다.
그러므로 컨셉이 정확해야 한다는 것은 맞다. 그러나 정명을 컨셉이라고 등치하는 것은 무리가 따른다.
정명은 포지션이며, 컨셉은 포지션을 정하기 위한 전제가 된다. 정명사상이 요구하는 것은 정확한 컨셉이 아니라 “
다운 것”이다. 임금은 임금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하고, 아버지는 아버지다워야 하고, 자식은 자식다워야
한다는 것이 정명사상의 핵심이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위계질서라고 한다.
올바른 이름은 올바른 위치이다. 때문에 이름에 걸맞게 살아야 한다는 것은 바로 자기의 위치를 정확하게 알고
그에 맞추어 살아야 한다는 뜻이다. 정명은 신분제 사회를 옹호한 공자사상의 근간을 이룬다.
그러므로 개념이란 무엇인가 하는 물음에 대해서 한마디로 대답한다면 사물(事物)의 명분(名分)과 이름(名)을 바르
게 하는 데 있다고 대답할 것이다.
사물의 명사를 정(定)하려면 우선 개념이 명확해야 할 것이고 개념이 명확해야만 사물의 내용과 의미가 통일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야만 사물 자체의 의미나 내용이 충실하게 될 것인즉 그것을 명분의 정확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 이유는 사물의 개념인 명사나 명분은 절대로 정확하게 그 사물의 내용을 반영하여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동양철학은 이것을 정명(正名)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 사물에 각각 이름과 명분(名分)을 붙이는 일은 오늘날에 있어서는 가장 중요한 일이지만 인구의 밀도가
희박하고 생활양식이 간단했던 고대에 있어서는 그만큼 개념설정의 필요도 적었으니 그것은 변화형태가 단조로웠
던 것과 정비례로 생겨난 무관심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진리탐구의 향상은 정명사상(正名思想)을 유발하기에 이르기는 하였지만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은 시대적인
제 요건이 여기에 영합(迎合)되지 못하였기 때문에 정명사상은 다시 타락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그것이 도리어 모순을 유발함으로써 오히려 사회악을 조장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정명사상은 진실로 사물의 이름을 바르게 하고 명분을 옳게 세우려는 중요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만에 하나라도 미
숙한 횡설수설(橫說竪說)이 개입되게 되면 명분은 군도(君道)를 위한 궤변이 될 것이고 인식은 타락의 구렁에서
헤매게 될 것이므로 도리어 도의(道義)와 사물의 발전에 막대한 폐해를 끼치게 되고 말 것이다.
이런 문장들이 다 악문에 들어간다. 한번 보자.
첫 문장을 바르게 고치면 “개념을 정립한다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인가 하는 물음에 대해서 한마디로 대답한다면
사물(事物)의 명분(名分)과 이름(名)을 바르게 하는 것이라고 대답할 것이다.”가 되거나 “개념이란 무엇인가 하는
물음에 대해서 한마디로 대답한다면 사물(事物)의 명분(名分)과 이름(名)이라고 대답할 것이다.”가 된다.
한동석은 문장에서 주어와 술어의 관계에 대한 개념이 없다. 이런 개념이 없이 쓰는 글을 악문이라고 한다.
씨의 글이 읽기 힘든 이유는 그 내용이 심오하거나 난해한 탓이 아니라 악문이 많고 글의 접속관계가 바르지 않기
때문이다. 독자들의 머리를 맑게 하고 상쾌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뇌가 꼬이게 만든다.
그리고 문맥상 이 문장의 다음에 와야 하는 이야기는 명분과 명에 대한 설명이어야 한다.
여기에서 사물이라는 주어와 관계를 갖는 네 개의 단어는 개념과 내용과 의미와 명분이다.
이 4자간의 관계를 저자의 논리를 따라 정리를 해보자.
(사물에 대한)명확한 개념--->(사물의)내용과 의미가 통일됨
(사물 자체의)의미나 내용이 충실해 짐--->명분의 정확
(사물의 개념인)명사나 명분--->(사물의)내용을 반영
보다시피 “A로서 B한다”가 “B로서 A한다”라는 말과 교대로 나온다. 주어와 형용사가 문장마다 자리를 바꾼다.
이런 문장은 읽고서 문맥을 잡을 수가 없다. 내용이 맞고 틀리고는 다음 문제인 것이다.
이게 가끔씩 발견되는 현상이면 그럴 수도 있겠으나 씨의 문장은 거의 대부분이 이렇다.
사실 문장과 표현이라는 측면에서는 수준이하라고 평가되어도 할 말이 없는 책이다.
문제는 내용이 그것을 보상해주고도 남을 만 한가이다. 그것은 두고 보기로 하자.
그리고 명분(名分)이라는 것은 명사에 붙이는 말이 아니다. “왕의 명분”이라고 쓰면 문법적으로 안 맞는 소리다.
“왕이 왕일 수 있는 명분” 또는 “왕이 왕노릇을 하는 명분”이 맞는 용례이다.
명분은 어떤 행위에 따르는 정당성이지 사물의 컨셉을 의미하지 않는다.
저자는 “개념=사물의 내용과 의미”라고 했다가 “개념=명분과 명”이라고 했다가 “의미나 내용=명분”이라고 했다가
“명사나 명분=내용”이라고 개념 없이 “A=B"를 갖다 붙이니까 뭔 소리를 하는지 종잡을 수가 없는 것이다.
무극과 태극과 황극이 그랬던 것처럼 한동석이 설명하려고 하는 대상들은 관계설정이 비논리적이고 일관성이 결여
되어 있다. 마치 “동양학은 원래 이런 것이여.”하고 말하는 듯하다.
위 원문의 장황한 얘기들은 이렇게 정리되어야 맞는 소리가 된다.
“명사는 사물의 컨셉을 반영하여야 하고 명분은 사물의 행위(존재 또는 위치, 자리)에 정당성을 부여해야 한다.”
그러므로 여기서 동양에 있어서의 정명사(正名史)를 일별(一瞥)하여 보면 그것은 孔子에게서 시작되었는데 공자는
춘추말의 부패와 타락이 전혀 정명(正名)되지 못한 데 있다고 보았던 고로 제자가 “선생이 만일 위국(衛國)의 재상이
된다고 하면 무엇부터 먼저 하겠습니까?”하고 물었을 때 “필야정명(必也正名)”이라 대답하였던 것이다.
그 때와 같은 난세에 정명부터 하겠다는 말을 들은 제자는 아연실색하였지만 공자의 뜻을 움직일 수는 없었던 것이
다. 왜냐하면 그 당시의 사회상이나 발전적 요건이 공자로서 볼 때에 그밖에는 다른 도리가 없었기 때문이었던 것이
다. 그 후에도 묵자(墨子), 공손룡자(公孫龍子), 순자(荀子) 등이 나와서 정명을 철학의 기본으로 삼았던 것이다.
그러나 진시황의 분서갱유(焚書坑儒)로 말미암아 선성(先聖)들의 정명학에 대한 유지(遺志)는 차차 매몰되기 시작
했고 철학의 심오성(深奧性 )도 점점 감추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다행히 송대에 이르러서 성리학이 발전되므로 인하여 숙취갱성(宿醉更醒)하는 듯한 분위기가 조성되기는 하였지만
정명사상이 타락한 지 어언 천년이라 그의 진리를 해득하는 자가 극소한데다가 그 시대는 또한 오늘날과 같이 문화
가 대중화 되지 못한 때였으므로 그 명맥을 유지하기도 오히려 바쁠 정도였던 것이다.
그 후 19세기말에 심부(河心夫)가 나와서 “정역주의(正易主義)”를 저술함으로써 정명정신은 갱생의 계기를 얻게
되었던 것이다.
심부(河心夫)와 “정역주의(正易主義)” : 하심부라는 사람은 김일부의 제자인 김정현을 말한다. 일부 사후에 자기
스승의 정역을 주해하여 “정역주의”라는 글을 지었는데, 일부의 “대역서(大易序)”가 난해하여 뜻을 알 수 없는 씨나
락인 것과 마찬가지로 그 주해라는 “정역주의”도 횡설수설로 시종하고 있다.
이 정역주의도 곧 소개하여 그 황홀한 궁극적 씨나락의 진수를 감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책에 계속해서 듣도 보도 못 한 희귀한 진인, 거사들의 이름이 수시로 등장한다는 것인데 단 한
줄의 소개나 설명도 없다는 점이다.
자고로 글이란 남에게 읽히기 위해 쓰는 것이요, 특히 철학적 논설은 어렵고 복잡한 사물의 개념과 원리를 일반인에
게 알기 쉽게 설명하고 가르치는 것이 목적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한동석이라는 사람은 사람들에게 어떻게 하면 더 어렵고, 어떻게 하면 더 못 알아먹게 글을 쓸 수 있을까 온
갖 궁리를 다한 사람으로 보인다.
이해를 시키고 가르치기 위한 글이 아니라 가능한 한 사람들을 골탕 먹이는 데 자기의 온 재주를 다 동원한 사람이
다. 그게 아니면 자신의 무지와 무식을 감추기 위한 수작인지도 모르겠다.
자기가 모르는 것을 설명하려고 몸부림을 친 사람일 수도 있다.
이 책은 내가 아는 한 가장 저급하고 졸렬한 저작의 베스트에 꼽을 만 하다. 아는 사람은 결코 이렇게 설명하지 않
는다.
여기서 한동석이 우주론을 말하는 자리에서 “정명사상”을 들고 나오는 이유를 알 수 있다.
즉 책의 집필목적과 의도가 바로 “정역주의”에 있다는 것이다.
공자의 제자가 “필여정명” 소리를 듣고 아연실색하였다는 것은 과장이겠고, 납득이 안 되어 의아한 표정이었을 수는
있다. 그러나 공자의 대답은 의아해 할 이유가 전혀 없다. 공자의 “정명”은 세상 만물의 개념을 살피고 그 내용을 헤
아려서 올바른 명과 명분을 부여하는 철학적 혹은 학문적인 노력을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공자가 노나라의 재상이 된 후에 한 정명은 그런 학구적인 탐구생활이 아니었고 현실정치에서의 개혁과 실천
적 방법론의 제시였다.
공자의 “정명”은 “위계질서의 확립”이요, “신분사회의 정착”이요 “계급의 세분화”와 “봉건사회의 안정”이었다. 정명
으로서 공자는 천하의 안정을 꾀했다. 결코 책상머리 이론의 천착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정명은 철학사상이 아니라
정치적 이념이고, 사회시스템의 이론적 토대였다는 점이다.
공자의 정명을 분서갱유까지 들먹여 아카데믹한 연구의 차원으로 끌고 가는 목적은 정역주의의 전통성과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함이다.
“우주변화 원리”가 설명하는 것은 전통적이고 순수한 음양오행론과 상수학이 아니다.
정역주의적 우주관의 피력인 것이다.
정역이란 소위 개벽사상의 모태이다. 원시반본의 근거이다.
이런 종교적인, 혹은 관념적인 우주론과 결부될 때 음양오행이나 상수학이 어떻게 타락하고 변질되고야 마는지를
보여주는 책인 것이다.
구름~~
첫댓글 잘읽었습니다
그런데, 먼저 이책 우주변화의 원리를 이해하려면 우주 1년은 어떻게 운행되는지부터 알아야 개벽을 알게되고
여기서 주장하는 바를 이해할 수 있다고 봅니다.
인그러면 거짓으로 보입니다.
'정명'이라는 말 자체가 철학적인 용어다. 대체로 정치적으로 쓰이는 것은 일반적인 해석이고. 본질적으로 그렇다는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