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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 성도(成道) 후 49일간의 사유>
부처님의 성도
싯다르타께서 6년 고행이 막바지에 이르러 부다가야에서 대각(大覺)을 이루려 할 즈음,
대각을 방해하는 마구니 파순(波旬)이 있었다.
이에 대해 <잡아함경> 제379경 <전법륜경> 등에 이래와 같이 전한다.
싯다르타가 대각을 이루어 붓다로 탄생하게 되면 자기네 마구니들은 힘을 못 쓰게 되는지라,
그리하여 마왕(마라/Māra) 파순(波旬)이 싯다르타에게 조심스럽게 다가와서 은밀하고 부드러운 말로써
유혹했다.
“당신 몸은 이미 쇠진해 죽음이 가까웠습니다. 세간에 생명만큼 소중한 것은 없습니다. 살아있어야만 수행도
온전히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당신은 이제 살아날 가망이 천에 하나도 안 됩니다. 그렇게 되면 깨달음을 얻기가
불가능해지는데 차라리 바라문과 같이 불을 섬기고 제사를 지내면 손쉽게 공덕을 쌓아 생명을 얻고 큰 과보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했다.
그러자 싯다르타는 파순에게 말했다.
“내가 오랫동안 수행해온
보시(布施),
지계(持戒),
인욕(忍辱),
정진(精進),
선정(禪定),
혜(慧),
방편(方便),
원(願),
력(力),
지(智),
열 가지 수행덕목이 나의 힘 있는 군사이며,
수신(守身)의 보도(寶刀)이고 견고한 방패이다.
이 힘으로써 파순을 분쇄하리라.
파순이여,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의 권속이여, 어둠의 아들아.
그대는 세속의 욕망으로 유혹해 나의 수행을 부수려 하지만,
나의 서원은 결코 허물어뜨리지 못하리라.
내 이미 죽음의 고통을 삶과 같이 보아 죽음의 두려움을 깨뜨려버린 지 오래이니라.
비록 중생계(衆生界)가 다 멸해 없어져도나의 서원은 멸하지 않으리라.
내 차라리 싸워 죽을지언정 패장이 돼 욕된 삶은 살지 않으리라. 명장은 두려움 없이
모든 적을 깨뜨릴 것이다.”라고 맞받아친 결과 파순의 유혹을 끝내 물리쳤다.
당시 싯다르타는 6년간의 허망한 고행으로 신체가 극도로 쇠약해지고 의식마저 혼미해져 있었다. 이에 싯다르타는 육체를 극도로 학대하는 고행은 괴로움의 해탈이 아니라 죽음에 이르는 길임을 깨닫고 수행방법을 바꾸기로 했다. 그리하여 싯다르타는 네란자라강에서 6년간의 묵은 때를 씻고 강가 언덕 보리수나무 아래 풀밭에 지친 몸을 뉘였다.
마침 우루벨라 세나니 마을 촌장의 딸 수자타(Sujata) 여인은 마을 주위에 있는 보리수나무의 목신에게 만일 아들을 낳게 해주면 우유죽을 바치겠다고 빌었고, 마침내 아들을 낳자, 하녀를 시켜서 목신에게 우유죽을 바치게 했다. 그날 싯다르타는 고행을 버린 뒤 그 나무 아래 계셨는데, 하녀는 그분이 목신의 화현이라 믿고 기뻐하며 수자타에게 일렀다. 수자타(Sujata) 여인은 황금 그릇에 우유죽(유미죽/乳米粥)을 담아서 싯다르타에게 공양을 올렸으며, 싯다르타께서는 오랜만에 처음으로 음식다운 음식을 드셨다.
수자타 여인은 싯다르타에게 다가와 유미죽을 바치며 다음과 같이 기원했다고 한다.
“이 우유죽을 받아 드시고 반드시 무상정등정각(無上正等正覺)을 이루소서!”
이렇게 해서, 우유죽을 드시고 기력을 회복해서 다음날 새벽에 정각(正覺)을 이루셨다.
그리고 부처님의 성도 후 49일간의 이야기가 근본경전에 전하고 있다.
남전대장경 <율장(律藏)>의 ‘대품(大品)’에 다음과 같이 전한다.
즉, 부처님은 우루벨라 마을 네란자라 강 옆 언덕에서 한 나무에 7일간 7그루의 나무를 옮겨가며
49일간 법락(法樂)의 기쁨을 누리셨다.
부처님의 행적 어느 하나 중요하지 않은 것이 있으랴마는 특히 부처님의 49일간의 사유는
불교가 있게 되는 계기가 됐으므로 우리 불자들에겐 더욱 뜻 깊은 일이라 하겠다.
부처님께서 6년 고행 끝에 고행을 버리고 중도(中道)에 새로운 길을 발견하시어,
그에 따라 용맹정진 하셔서 마왕(魔王)의 유혹을 물리치고 마침내 깨달음을 얻으셨다.
모든 번뇌가 사라지고, 모든 고뇌가 사라지고, 모든 속박에서 벗어나는 대 자유인이 되셨다.
그리하여 인간과 신과의 모든 굴레로부터 벗어나서 인간과 신의 스승의 지위에 오르셨다.
그래서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의 존재가 되신 것이다.
그리고 그 49일 간의 행적은 아래와 같이 전개된다.
• 첫 번째 7일 - 연기(緣起)의 이치를 사유하시다.
천인들의 찬탄을 받은 부처님은 보리수 아래에서 7일 동안
움직이지 않은 채 해탈의 즐거움을 누리셨다.
마지막 밤이 끝날 무렵, 부처님은 일어나는 것을 일어나는 그대로,
사라지는 것을 사라지는 그대로 명료하게 사유하셨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나므로 저것이 일어난다.
이것이 없으므로 저것이 없고, 이것이 사라지므로 저것이 사라진다[사성제(四聖諦)].
사실 그대로 알지 못하는 무명(無明)으로 인해 행(行)이 있게 된다.
의욕을 일으키고 조작하는 행으로 인해 식(識)이 있게 된다.
분별하는 인식작용인 식으로 인해 명색(名色)이 있게 된다.
관념과 물질인 명색으로 인해 육입(六入)이 있게 된다.
외부 대상을 받아들이는 육입으로 인해 촉(觸)이 있게 된다.
외부 대상과 만나는 촉으로 인해 수(受)가 있게 된다.
좋고 싫은 느낌인 수로 인해 애(愛)가 있게 된다.
애타는 욕망인 애로 인해 집착하는 취(取)가 있게 된다.
고집하고 집착하는 취로 인해 유(有)가 있게 된다.
삼계를 윤회하는 존재인 유로 인해 생(生)이 있게 된다.
태어남인 생으로 인해 늙음 ‧ 죽음 ‧ 슬픔 ‧ 눈물 ‧ 고통 ‧ 근심 ‧
갈등이 한꺼번에 있게 된다.
이와 같이 괴로움의 무더기가 모두 일어나는 것이다[12연기(緣起) 순관].
사실 그대로 알지 못하던 것에서 탐착을 떠나 어리석음이
남김없이 사라지면 끊임없이 일어나던 의욕과 조작이 사라진다.
의욕과 조작이 사라지면 분별하던 인식작용이 사라진다.
분별하던 인식작용이 사라지면 관념과 물질은 사라진다.
관념과 물질이 사라지면 외부 대상을 받아들이던 기능은 사라진다.
외부 대상을 받아들이는 기능이 사라지면 외부 대상과의 접촉도 사라진다.
외부 대상과의 접촉이 사라지면 좋고 싫은 느낌 등이 사라진다.
좋고 싫은 느낌 등이 사라지면 애타는 욕망이 사라진다.
애타는 욕망이 사라지면 고집과 집착이 사라진다.
고집과 집착이 사라지면 삼계를 윤회하던 존재가 사라진다.
삼계를 윤회하는 존재가 사라지면 태어남이 사라진다.
태어남이 사라지면 늙음 ‧ 죽음 ‧ 슬픔 ‧ 눈물 ‧ 고통 ‧ 근심 ‧
갈등이 모두 사라진다.
이와 같이 괴로움의 무더기가 모두 사라지는 것이다[12연기 역관].」
• 두 번째 7일 - 자리를 옮겨 아자빨라(Ajapāla)나무 아래에서 법의 즐거움을 누릴 때였다.
한 바라문이 다가와 베다(veda)의 시구를 콧노래로 흥얼거리며 거만하게 물었다.
“고타마여, 어떤 사람이 바라문이고, 바라문의 특징은 무엇이라고 봅니까?”
“스스로 악을 멀리하고, 신분을 뽐내는 콧노래를 부르지 않으며,
번뇌에서 벗어나 자기를 다스릴 줄 아는 사람, 그가 바라문입니다.
청정한 삶을 살며 베다를 깊이 공부하는 사람, 그가 바라문입니다.
그런 사람이라야 바라문이라 할 수 있고,
세상 어디를 가도 비난받지 않을 것입니다.” 바라문은 무안해서 떠나갔다.
• 세 번째 7일 - 보리수 주변을 포행(布行)하셨다.
보리수나무 곁을 열아홉 발자국씩 천천히 오고 가면서 깊은 선정에 드셨다.
• 네 번째 7일 - 마왕(마라/Māra)이 다시 나타나 부처님에게 속삭였다.
“세존이여, 길고 긴 세월 고행하다 부처님이 되셨으니 이제 편히 반열반에 드소서.
지금이 바로 그때입니다. 부처님, 반열반에 드소서. 부처님, 반열반에 드소서.”
부처님이 마왕에게 말씀하셨다.
“마라여, 그대는 열반의 뜻을 잘못 알고 있다. 혹시 그대는 중생을 교화하지 않고
침묵하는 것을 열반이라 생각하는 것은 아닌가? 더 이상 아무것도 하지 않고
죽음을 맞이하는 것을 열반에 드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닌가?
마라여, 일체중생이 아직 나의 법 가운데서 이익을 얻지 못했는데,
그대는 왜 나에게 반열반에 들라고 하는가?”
• 다섯 번째 7일 - 무짤린다(Mucalinda)나무 아래에서
법의 즐거움을 누릴 때였다. 한 바라문을 만났는데, 바라문은 부처님께 질문을 올렸다.
“이 세상에서 제일 고귀한 것은 무엇입니까?”
부처님께서 “마음이 청정한 자가 고귀합니다.”라고 하자, 그 바라문은 자리를 떠났다.
이 바라문은 부처님을 처음으로 만났으나 부처님의 진실의 말씀을 들을 수가 없었다.
그는 자기의 사상, 가치관, 기득권, 자기의 이념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에 진실을 볼 수가 없었다.
그런데 때 아닌 폭풍이 불고 폭우가 쏟아졌다. 그러자 나무에 의지해 살던 무짤린다(Mucalinda) 용왕이
나타났다. 무짤린다는 자신의 몸으로 부처님의 온몸을 감싸고 머리를 부채처럼 폈다.
거센 비바람과 추위도 철갑 같은 무짤린다의 비늘은 뚫지 못했고, 빈틈없이 살피는 매서운 눈매에
짐승과벌레들도 얼씬 못했다. 이레 동안의 폭풍우가 그치자 무짤린다는 부처님을 감쌌던 몸을 풀었다.
폭풍우가 지나자 용왕이 청년의 모습으로 바뀌어 합장을 하며 부처님 앞에 섰다.
이에 부처님이 따스한목소리로 말씀하셨다.
“법을 깨달아 마음이 기쁜 자는 홀로 있어도 행복하단다.
이 세상 어떤 생명에게도 적의를 품지 않고 자비로운 마음을 갖는 자는 행복하단다.
모든 욕망의 굴레에서 벗어나 ‘나’라는 교만한 마음을 던져 버릴 때, 그 누구보다 행복하단다.”
• 여섯 번째 7일 - 다시 자리를 옮겨 라자야따나(Rājāyatana)나무 아래에서 법의 즐거움을 누릴 때였다.
땁뿟사(Tappussa)와 발리까(Bhallika)라는 두 상인이 소 수레에 물건을 싣고 근처를 지나고 있었다.
오백 대의 수레를 앞장서 이끌던 두 마리 소가 갑자기 멈추더니 꼼짝도 하지 않았다.
당황해 주위를 살피던 두 상인은 숲 속 나무 아래에서 햇빛처럼 찬란한 성자를 발견했다.
두 상인은 양식으로 사용하던 곡물 가루와 꿀을 존경의 뜻으로 바치며 귀의했다.
“성자시여, 저희가 올리는 곡물 가루와 꿀을 받으소서.”
부처님은 수자타(Sujata) 여인이 바친 유미죽을 드신 후 처음으로 두 상인의 공양을 받으셨다.
• 일곱 번째 7일 - 다시 아자빨라나무 아래에서 보내시던 그때, 범천왕(梵天王)의 권청이 있었다.
<맛지마니까야> 주석서에 의하면, 부처님께서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음을 성취하신 후 일곱 군데
장소를 옮겨가면서 한 장소에서 7일 동안 선정에 드셨다고 한다. 그렇게 49일 동안 깨달음의 기쁨을
누리시고 당신이 깨달은 진리를 사유하고 나서 아자빨라 니그로다 나무 아래에 앉아 있을 때,
부처님께서는 중생들의 실상을 보고 부처님 자신이 깨친 진리를 설파하려던 마음을 주저하고 계셨다.
“어렵게 도달한 이 깨달음은 완벽하고 결함이 없다.
깊은 선정에 들어 수없이 재고해 봐도 완전하고 원만한 최고의 진리이다.
그러나 이 진리는
깊고,
보기 어렵고,
깨닫기 어렵고,
섬세하고,
고상하고.
단순한 사려를 넘어서는 것이다.
오직 지혜로운 자라야 알 수 있는 것이다.
과연 받아들일 사람이 있을까?
세상 사람들은 자기가 배우고 익힌 것만 고집한다,
그런 그들은 이 깊고 미묘한 인연의 법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집착을 즐기고,
집착을 좋아하고,
집착을 기뻐한다.
그런 그들은 집착을 떠나고,
집착을 없애고,
집착이 사라진 진리의 세계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집착을 넘어선 열반을 가르쳐 주어도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에 물든 그들은
혼란스러워하고 번거롭게만 생각할 것이다. 그건 그들에게도 이익이 되지 못한다.
세상사와 반대되는 나의 가르침을 그들은 도리어 비방할 것이다.”
어리석은 사람들에게 그 진리를 가르친다는 것은 피로하고 성가시고,
가르침의 성과도 없을 것 같았다. 매우 심오하고 이해하기도 어렵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에게 가르칠 필요가 없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리하여 중생구제를 위해 붓다가 되겠다고 서원을 세우고 수 억겁을 수행한
그 동안의 노력과 결심을 포기하고 그냥 대열반에 들려고 한 것이다.
그런데 그 때 범천왕(梵天王) 사함파티(Sahampati)가 멀리서
이런 붓다의 의중을 살피고 급히 부처님 앞에 나타나 법을 설하시라고 간청했다.
부처님은 범천(梵天)이 권청(勸請)하는 이러한 말을 듣고도 침묵하셨다.
지켜보던 범천왕(梵天王)은 답답했다. 그 정도 말로 움직일 세존이 아니었다.
다급해진 범천은 힘센 장정이 팔을 굽혔다 펴듯 재빠르게 자신의 세계에서
사라져 부처님 앞에 현신해서 나타났다. 그는 한쪽 어깨에 상의를 결치고
오른쪽 무릎을 꿇은 다음 합장하고 간청했다.
“부처님이시여, 법을 설하소서. 여래시여, 법을 설하소서.
세존께서 법을 설하지 않으시면 탐욕의 강물에 떠밀리고 분노의 불길에 휩싸인
이 세상은 결국 파멸로 치닫고 말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이 세상에는 그래도
때가 덜 묻은 이들이 있습니다. 여래시여, 이 세상에는 그래도 선과 진리 앞에
진실한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을 버리지 마소서, 그들마저 기회를 놓치는 건
참으로 슬프고 애석한 일입니다.”
여전히 침묵을 지키는 부처님 앞에서 범천은 간절한 마음으로 노래했다.
「악마의 군대를 물리치신 그 마음 월식을 벗어난 달과 같습니다.
자, 어서 일어나십시오.지혜의 빛으로 세상의 어둠 비추소서.」
이와 같은 범천의 간절한 요청과
중생들에 대한 깊은 연민을
이기지 못해 부처님은
다시 세상을 살펴봤다.
중생들에게는 차이가 있었다.
먼지와 때가 적은 중생,
먼지와 때가 많은 중생,
두뇌가 총명한 중생,
두뇌가 무딘 중생,
품성이 좋은 중생,
품성이 나쁜 중생,
가르치기 좋은 중생,
가르치기 나쁜 중생이 있었다.
다음 세상의 과보를 두려워하며
자신의 허물을 살피는 중생도 있고,
그런 것을 무시하는 중생도 있었다.
마치 붉고 푸르고 새하얀 갖가지 연꽃들이 같은 연못 같은 진흙에서 싹을 틔워 같은 물에서 자라는 것과 같았다. 그중에는 물속에서 썩어버리는 것도 있고, 수면에서 위태로운 것도 있고, 물 위로 솟아올라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것도 있었다. 솟아오른 연꽃은 진흙도 묻지 않고 물에도 젖지 않은 채 화려한 빛깔과 은은한 향기로 수면을 아름답게 가꾸고 있었다. 부처님께서는 마침내 세상을 향해 사자처럼 늠름하게 선언하셨다.
「내 이제 감로의 문을 여나니
눈 있는 자 와서 보라, 귀 있는 자 와서 들으라, 내 이제 불사(不死)의 법 감로(甘露)의 문을 여나니…」
라고 깨달음의 사자후를 토하게 된다.
‘와서 보라’라는 말은 맹목적인 믿음을 내라는 말이 아니다. 명백하게 객관적인 것으로서 숨길만한,
어떤 신비로운 것이 없음을 말한다. 부처님 가르침엔 비밀이 없다. 그래서 부처님 가르침은 주먹을 꽉 움켜쥐고서 결코 주먹을 펴지 않는 스승의 주먹[사권(師拳, ācariya-muṭṭhi)]이 아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와서 믿어라’고
말하지 않고, ‘와서 보라’ ‘와서 들어라’고 말하셨다. 지금 여기 눈앞에 있는 것을 와서 보라고 하셨다.
그런 부처님 가르침은 시간을 초월한 것이었다. 이는 성스런 삶의 길을 실천하는 결과가
즉시 나타나는 것을 말한다. 시간을 요하지 않기 때문에 즉시 효과가 있고 또 시간을 초월한 것이다.
그리하여 부처님은 옛날 함께 했던 다섯 도반이 있는 바라나시(Varanasi, 현재의 베나레스) 근처
이시빠따나(Isipatana, 仙人住處)에 있는 녹야원(鹿野苑, 미가다야/Migadaya)으로 향했다.
대각을 이룬 부다가야에서 녹야원까지 1백 60km의 길을 걸어서 옛 도반들을 찾아갔다.
모든 사물의 실상을 밝게 깨친 부처님은 제자가 찾아오기를 기다린 것이 아니라 그들을 깨우치기 위해
먼저 먼 길을 걸어서 그들을 찾아 나섰던 것이다. 작열하는 태양 아래 원시림 속을 누비며 쇠약한 몸으로
홀로 걸식을 하면서 맨발로 긴 여행을 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더욱 상대가 “가르쳐 주십시오”하고 청하고 기다리는 것도 아니고,
스승이 먼저 제자를 찾아가서 “너희들은 배워라”고 한 사례는 인류역사상 그 유례가 없다.
예나 지금이나 자기가 조금만 잘나도 권위의식으로 상대를 무시하기 일쑤인데, 인류 역사상 최고의
스승이 제자가 오기를 기다린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맨발로 먼 길을 걸어가서 제자를 찾아가서 가르쳤다는 사실,
이것이 바로 부처님이 몸소 실천하신 자비정신이다.
법을 전하기로 결심하시고 녹야원으로 가서 당초 함께 했던
다섯 비구들을 다시 만나 다섯 비구에게 최초로 법을 전하셨고[초전법륜(初傳法輪)],
다섯 비구의 귀의로 교단(상가)이 형성됨으로써
불ㆍ법ㆍ승 삼보가 갖추어져 불교라는 종교가 시작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