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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 열전(27) 원효성사
황원갑<역사소설가>
원효성사(元曉聖師)의 일대기는 <삼국유사> 권 제4 ‘의해(義解)’ 편에 나온다. 이차돈이 고귀한 순교로써 신라불교의 새벽을 열었다면 원효성사는 중생의 바다에 기꺼이 몸을 던져 상구보리(上求菩提) 하화중생(下化衆生)의 보살행으로 서민불교의 새 길을 닦은 선구자였다. 원효는 삼보(三寶)에 귀의했다고 해서 대중을 멀리 하지 않았고, 삼장(三藏)에 통달했다고 하여 자만하거나 오만에 빠지지도 않았다. 그는 ‘부처의 경지에는 온갖 미덕이 갖춰져 있지만 그것은 오직 대비(大悲)를 그 힘으로 삼는다’면서 ‘한 사람의 중생이라도 버림이 없이 고해에서 구제하자’고 외쳤다.
원효가 태어난 때는 난세였다. 북쪽에는 고구려, 서쪽에는 백제, 동쪽에는 신라가 정립하여 수시로 혈전을 벌이며 패권을 다투던 때였다. 원효는 진평왕 39년(617년) 현재의 경북 경산시 자인면인 압량군 불지촌(佛地村)에서 태어났다. 속성은 설씨(薛氏)로서 원래 화랑의 집안이었다. 그의 증조부 설원(薛原)이 화랑도의 우두머리로서 화랑 중의 화랑인 제7세 풍월주를 지냈으나 그 뒤 가세가 기울었다. 부친 담날(談捺)은 신라 17관등 중 제11위의 하급 관리인 내마(柰麻)였고, 조부는 잉피공(仍皮公) 또는 적대공(赤大公)이라고 불린 사람이었다.
원효의 본명은 불분명하다. 어떤 기록에는 어릴 때 이름이 서당(誓幢), 커서는 신당(新幢)이라고 했다는데, <삼국유사>에 ‘당(幢)은 우리말로 모(毛)라 한다’는 주석이 붙어 있다. 또한 그의 조부 잉피공을 적대공이라고 부른 것은 키가 크고 머리카락이 붉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원효의 본명이야 분명하지 않지만 그는 뒷날 자신이 태어난 곳 - 밤골을 따서 율곡(栗谷)을 아호로 삼았고, 밝은 새벽을 뜻하는 원효를 법명으로 삼았다. 또 서당화상비에 따르면 고선대사(高仙大師), 만선화상(萬善和尙)이란 별칭과 구룡(九龍), 백부론주(百部論主)라는 존칭이 바쳐졌으며, 고려 때에 대각국사(大覺國師) 의천(義天)은 그를 추앙하여 ‘원효보살’ 또는 ‘원효성사’라고 부르고 왕에게 청해 화쟁국사(和諍國師)라는 존호를 바쳤다.
<삼국유사>는 그의 모친이 유성이 품속으로 들어오는 꿈을 꾼 다음 태기가 있었으며, 해산할 때는 오색구름이 주위를 덮었다고 전한다. 그때 그의 모친은 남편을 따라 어딘가에 다녀오는 길이었다. 부부가 밤골에 접어들었을 때 갑자기 산기(産氣)가 일어나 더 이상 걸을 수 없었다. 남편은 황급히 웃옷을 벗어 나무에 걸고 주위를 가린 뒤 자리를 잡아주었다. 그리하여 먼동이 어슴푸레 터오는 새벽에 위대한 한 인물이 태어났다. 오색구름이 뒤덮은 가운데 모친은 그를 낳자마자 이내 숨을 거두고 말았다. 오로지 한국불교의 새벽을 밝힐 큰 인물 원효를 낳아주는 한 가지 소임만을 위해 이 세상에 왔다가 가는 듯했다.
뒷날 출가한 원효는 자신의 본가를 절로 삼아 초개사(初開寺)라 불렀고, 자신이 태어나고 모친이 돌아간 그 밤나무 - 사라수(裟羅樹) 곁에도 사라사라는 절을 세웠다. 사라수란 석가모니가 열반에 들던 곳에 있던 나무 이름 사라쌍수에서 따온 것이다.
원효가 불문에 들 때까지 유년기에서 청년기까지를 어떻게 보냈는지는 정확한 사료가 없다. 단지 ‘나면서부터 남달리 뛰어나게 총명해서 스승을 따라 배우지 않았다’는 기록에서 그의 자질이 천부적으로 출중했으며 매사에 탐구적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출생시 모친을 여읜 원효는 12세에는 부친마저 잃었다. 그해 629년 8월 진평왕의 명령으로 김춘추의 부친 김용춘과 김유신의 부친 김서현이 고구려의 낭비성을 칠 때 전사했던 것이다. 그래서 원효는 조부와 함께 살아야만 했다.
그 조부도 5년 뒤인 17세 때에는 돌아가 원효는 완전히 홀몸이 되었다. <송고승전> ‘원효전’ 머리에는‘총각 나이에 불문에 들어와 스승을 떠나 학문을 닦았으며 노니는 곳이 일정하지 않았다. 교학자(敎學者)의 진영을 쳐부수니 그 앞을 대항할 자가 없었다. 이미 삼학(三學)을 남김없이 통달하였다’라고 했다. 20세 전에 삼학에 통달하고 교학자들을 제압할 정도면 그의 학문의 깊이가 어떠했는가를 짐작할 수 있겠다. 삼학이란 탐(貪)ㆍ진(瞋)ㆍ치(癡), 즉 탐욕ㆍ성냄ㆍ어리석음의 삼독(三毒)의 번뇌를 여의기 위해 닦아야 하는 불교의 가르침인 계(戒)ㆍ정(定)ㆍ혜(慧)를 가리킨다.
원효의 출가 시기는 조부가 돌아간 직후인 17세 때로 추측된다. 원효가 17세에 출가했다면 선덕여왕 2년(633년)이다. 그해는 뒷날 원효가 주석하던 분황사가 창건되기 전 해이고, 영묘사가 창건되기 2년 전이며, 자장율사가 당에서 귀국하기 3년 전이었다. 당시 신라불교는 ‘화랑 세속5계’를 만든 원광(圓光)이 대국통(大國統)으로 이끌어가고 있었다.
또한 밖으로는 고구려ㆍ백제 두 선진국에 맞서기 위해 당과의 외교 관계를 굳게 다지고 있을 때였다. 이런 난국에 귀국한 자장은 호국불교의 위세를 과시하고 백성의 사기를 높이기 위한 서원(誓願)의 상징으로서 황룡사 구층탑을 건립하기 시작했다. 백제인 아비지(阿非知)가 황룡사에 구층탑을 세울 무렵 원효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출가한 원효는 황룡사에서 일정한 스승을 정하지 않고 당에서 전래된 수많은 불교 문헌과 사상서를 섭렵하고 줄기차게 파헤쳐 독자적으로 불교사상 이론의 체계를 세워나갔다. 원효는 어느 종파 어떤 이론에도 치우치지 않고 무엇이든 끈기 있게 깊숙이 파고들어 심오하고 오묘한 부처의 가르침을 깨우치기에 애썼다.
선덕여왕의 뒤를 이어 진덕여왕이 즉위한 지 4년째 되던 650년 원효는 34세였다. 그는 보다 넓고 새로운 지식의 바다에서 불법을 연구하기 위해 당나라 유학을 결심했다. 자신보다 8세 연하인 의상(義湘)과 함께 육로를 통해 고구려를 거쳐 요동으로 들어갔는데 고구려의 국경수비대에 붙잡혔다. 첩자로 물려 수십일 간 갇혀 조사를 받다가 가까스로 풀려난 두 사람은 신라로 돌아오고 말았다.
오늘날 우리가 겪는 국토 분단의 쓰라림을 원효는 이미 1300년 전에 절실히 맛보았을 것이다. 그는 뒷날 <법화경>의 진리를 설법하면서 “고구려나 백제, 신라는 모두 일시적인 것에 불과하다.”고 갈파했으니 그는 참으로 먼 앞날까지 내다본 선지자요 선각자였다.
서라벌로 돌아온 원효는 다시 독학으로 불도를 닦는 한편 구법을 위한 행각에 나섰다. 양산 영취산으로 낭지대사(郎智大師)에게 찾아가 <법화경>을 전수받고 <초심관장>과 <안신사심론>을 지었으며, 고대산 경복사로 찾아가서는 보덕화상(普德和尙)에게서 대승불교인 <열반경>과 <유마경>을 깨우쳐 익혔다. 원효의 구법 수행에서 낭지와 보덕의 영향력은 매우 커서 그로 하여금 진골 출신으로 불법에 의한 통치를 꾀한 자장이나, ‘화랑 세속5계’를 통해 사회 교화를 도모한 원광과는 달리 왕실과 귀족 중심인 불교를 서민을 위한 대중의 불교로 승화시키는 데에 정신적 밑바탕을 이루었다고 할 수 있다.
세월은 쉴 새 없이 흘렀다. 원효가 44세 때 백제가 멸망하고, 그 이듬해에는 무열왕이 죽고 문무왕이 즉위했다. 문무왕은 계속된 전쟁으로 백성은 지칠 대로 지쳐 있고 국상중임에도 당군과 협력해 고구려 정복에 나섰다.
이때 원효는 다시 의상과 함께 두 번째 당나라 유학길을 떠났다. 이번에는 망국 백제 땅을 가로질러 서해안에서 배를 타고 황해를 건너갈 계획이었다. 그들이 지금의 경기도 화성군 남양만 어느 포구에 이르러 배가 뜰 때만 기다리던 어느 날 밤이었다. 다 쓰러져가는 움막 안에서 밤을 보내던 그는 잠결에 갈증을 느껴 어둠 속을 더듬다가 바가지가 손에 잡히자 거기에 담긴 물을 단숨에 들이켜고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이튿날 새벽 눈을 떴는데 이게 웬일인가.
간밤에 그렇게 맛있게 들이킨 물바가지가 실은 사람의 해골이었던 것이다. 보통 사람 같으면 오장육부가 뒤집힐 정도로 구역질이 났을 법도 한데 그는 다음 순간 이렇게 노래하며 춤추고 돌아갔다.
“한 생각이 일어나면 갖가지 법이 일어나고, 한 생각이 사라지면 온갖 법이 사라지도다!”
원효는 놀란 눈으로 쳐다보는 의상에게 이렇게 말했다.
“마음 밖에 법이 없거늘 어찌 따로 구할 것이 있으랴. 나는 당에 가지 않으리라.”
이 순간이 바로 원효가 대각오도- 크게 깨우침을 이룬 순간이었다. 원효는 의상과 헤어져 다시 서라벌로 돌아오고 말았다. 서라벌로 돌아온 원효는 알천(閼川) 상류 암곡리에 있는 고선사에 머물렀다. <삼국유사>가 전하는 뱀복이(蛇福)와의 설화도 이곳에 있을 때의 일이다. 서라벌 만선북리에 사는 과부가 태기가 있어 아이를 낳았는데 열두 살이 되도록 말도 못하고 일어나지도 못하므로 뱀복이라고 불렀다. 어느 날 그 과부가 죽었다. 고선사로 원효를 찾아온 뱀복이가 말했다. “옛날에 그대와 내가 경(經)을 싣고 다니던 암소가 죽었으니 함께 장사지냄이 어떻겠는가?”
원효가 좋다 하고 둘이 뱀복이의 집으로 가서 장사를 지냈다. 원효가 말했다. “세상에 나지 말지어다. 죽는 것이 괴로우니라. 죽지 말지어다. 태어남이 또한 괴로우니라.” 하고 빌자 뱀복이 너무 번거롭다면서 “죽는 것도 나는 것도 모두 괴로우니라.” 하고 고쳐 말했다. 둘이 시체를 메고 활산리 동쪽 기슭으로 갔다. 이때 뱀복이 “옛날 석가모니 부처님이 사라수 사이에서 열반하셨네. 지금 또한 그 같은 이가 있어 연화장(蓮花藏) 세계로 들어가려 하네.” 하고 띠풀의 줄기를 뽑으니 그 밑에 밝고 청허(淸虛)한 세계가 나타나는데 칠보로 장식한 난간에 누각이 장엄하여 인간 세상은 아닌 듯했다. 뱀복이가 시체를 업고 그 속으로 들어가니 갑자기 땅이 본래처럼 합쳐졌다.
원효가 신라 십현(十賢)의 한 사람인 설총의 부친이요, 설총의 모친이 무열왕의 과부 딸 요석공주(瑤石公主)라는 사실은 누구나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삼국유사>에 이렇게 나온다. 원효가 어느 날 상례를 벗어난 짓을 하며 거리에서 노래를 부르고 다녔다.
“그 누가 자루 없는 도끼를 빌려주려나. 내가 하늘을 떠받칠 기둥을 박으리라.”
자루 없는 도끼란 여자의 옥문(玉門)을 가리킴이요, 기둥이란 자신의 ‘연장’을 가리킴인데 아무도 무슨 뜻인지 새겨듣지 못했다. 무열왕이 그 노래를 전해 듣고 말했다.
“이 스님은 필시 귀한 아들을 낳고자 하는구나. 나라에 큰 현인이 있으면 이보다 더 좋은 일도 없을 것이다.”
하고 요석궁에 있는 과부 공주와 원효를 짝지어 주었다. 그래서 태기가 있어 설총을 낳았다고 한다.
파계한 원효는 그때부터 속인의 옷으로 바꾸어 입고 스스로를 ‘소성거사(小姓居士)’ 또는 ‘복성거사(卜姓居士)’라 일컬으며 산수와 저자 간을 정처 없이 떠돌기 시작했다. 복(卜)이란 아래 하(下) 자의 아래에 있는 것이니 자신을 한껏 낮게 여겨 세상을 살겠다는 표시였을 것이다. 그러나 원효의 파계 환속은 민중의 거대한 물결 속에서 보다 참된 수행의 길을 걷고 불법을 널리 펴고자 하는 방편에 지나지 않았다.
때로는 가야금을 뜯고 때로는 술집에 들어가고 때로는 저자에서 자는가 하면, 때로는 산수간에서 좌선을 하는 등 일정한 행적이 없었다. 그러면서도 사람들이 모이면 설법 강론도 하고, <화엄경>의 내용을 소재로 노래를 만들어 가르치기도 했으니 그것이 곧 원효의 중생제도를 위한 새로운 포교 교화 방식이었다.
- 모든 것에 거리낌 없는 사람만이
한길로 세상의 번뇌를 벗어나리.
(一切無碍人 一道出生死) -
그래서 스스로를 무애(無碍)라고 부르기도 했다.
당시 원효가 교유한 선구적 고승으로는 혜숙(惠宿)ㆍ혜공(惠空)ㆍ대안(大安) 등이 있었다. 그들은 모두 원효와 마찬가지로 왕권에 빌붙어 안주하며 헛된 이름이나 날리려는 속물인 귀족적 승려들과는 달리 불교의 서민화ㆍ대중화로 중생제도에 힘쓴 참된 진리의 도사(導師)였다.
대안은 원효의 선배였는데 용모가 괴이했고 언제나 장터를 떠돌아다니며 “대안, 대안이오! 대안!” 하고 동발을 두드리며 소리치고 다녔으므로 대안이 곧 법명이 되었다.
대안과 원효는 이른바 ‘각승(角乘)의 인연’으로 얽힌 사이이다. 당시 임금이 당에서 새로 간행된 <금강삼매경>을 얻었는데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어 황룡사에서 대규모 법회를 열고 이 경전의 설법을 듣기로 했다. 왕을 보좌하는 귀족 승려는 많았지만 아무도 강론을 맡을 정도의 실력이 없었다. 그래서 괴이한 용모에 괴상한 행동을 하고 다니지만 박식하다고 알려진 대안법사에게 부탁했다. <금강삼매경>을 뒤적거려보다가 대안이 이렇게 말했다.
“이 경을 강론할 수 있는 사람은 오로지 원효뿐이다.”
그때 원효는 고향의 초개사에서 논(論)과 소(疎)를 찬술하고 있었다. 왕의 부름을 받은 원효가 사자에게 일렀다.
“이 경은 본각(本覺)과 시각(始覺)으로 대종을 이룬 것이니 우차를 마련하여 책상을 두 뿔 사이에 얹고 그 위에 붓과 벼루를 놓아라.”
그렇게 하여 우차에 올라앉아 서라벌로 가면서 경의 요지를 간추려 지은 것이 <금강삼매경론> 5권과 약소(略疎) 3권이니 사람들이 이를 가리켜 ‘각승’이라고 일컬었다.
서라벌에 다다라 황룡사 경내에 들어선 원효는 왕과 대신을 비롯한 수천 승속이 운집한 가운데 법상에 올라 <금강삼매경>을 강론하기 시작했다. 원효의 <금강삼매경론>은 <금강삼매경>에 대한 주석서로서 그의 대승적 불교관을 명확 간결하게 요약한 걸작이다. 그는 경의 큰 뜻을 세 가지로 압축하여, “모든 것을 초월하여 피하지 못할 것이 없으므로 금강삼매라 이르며 세우지 못할 것이 없으므로 섭대승(攝大乘)이라 이르며 일체의 뜻을 간직하는 종(宗)이 이 두 가지 뜻을 벗어나지 않으므로 무량의종(無量義宗)이라고도 이름한다.”고 설파했다.
이렇게 원효는 방방곡곡을 누비고 다니며 왕생극락의 정토사상을 민중의 마음속에 심어줌으로써 신라의 왕실 불교, 귀족 불교를 서민대중을 위한 불교로 승화시켰다.
원효는 무슨 학파니 종파니 하는 것들이 결국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올바로 이해하려는 것밖에는 아무 의미도 없다고 하여 그 모두를 한 그릇에 담으려고 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후세의 길잡이를 마련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 원리를 서민사회에 옮겨 화합과 통일이 깃들이도록 몸소 실천하니 이렇게 이론과 실천을 일원화시킨 것이 바로 그의 유명한 화쟁사상(和諍思想)이다.
고려 때 대각국사 의천이 원효대사의 지혜와 학문과 생애를 존경하여 성사(聖師)라고 부르는 한편 임금 숙종에게 진언해 원효성사를 화쟁국사로 추존하게 만든 까닭도 거기에 있었다.
뿐만 아니라 원효성사의 명성과 <대승기신론소> <화엄경론>같은 불후의 저술은 우리나라는 물론 중국과 일본 및 서역까지 전해져 불교 발전에 크나큰 영향을 미쳤다.
성자요 보살이었던 원효대사는 686년(신문왕 6년) 3월 30일 서라벌 남산 기슭에 있는 혈사(穴寺)에서 법랍 41, 세수 70을 일기로 장엄한 서사시적 한 삶의 막을 내렸다.
그가 세상을 뜨자 아들 설총이 유해를 부수어 소상(塑像)으로 진용(眞容)을 만들어 분황사에 모시고 공경과 사모의 정을 표했다고 하는데 이제는 그 진용은 물론 분황사도 모두 사라지고 없다.
일연선사는 원효성사의 전기 끝에 그를 찬미하여 이런 시를 바쳤다.
- 각승을 지어 처음으로 삼매경의 요점을 짚었고
호로병 들고 춤추며 거리마다 돌아다녔네.
달 밝은 요석궁에서 봄잠이 옛일인데
문 닫힌 분황사 걸어온 길 허망하여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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