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킨과 두루 선교사의 군산 선교부 설립
1895년 3월, 전주 선교부 설립이 진행되고 있을 때 남장로교 선교부는 두 번째 선교부를 열기로 하여 전킨과 드루 두 내외에게 군산선교부를 개척할 사명을 주었다.
1895년 3월, 그들은 군산을 답사하가 위해 떠났다. 그들은 네 명의 선원이 운행하는 삼판호를 세내서 약과 책, 생필품을 적재하고 인천을 출발하여 120마일의 해안 여행을 떠났다. 평소 나흘쯤 걸리는 여행이었으나 그들은 비와 안개로 인하여 열하루 만에 금강하구에 도착하였다. 그들은 수주일 동안 군산과 그 주변 지역에서 매일 아친 9시에서 10시 반까지 설교를 하고 그 뒤로는 환자들을 돌보았다. 때로는 50명에 달하는 환자를 돌보았는데 치료를 받은 환자들이 생선, 굴, 달걀과 미역 등을 감사의 표시로 가져왔다. 답사여행으로 그들은 주민들과 친밀해졌으며 군산선교부를 열수 있는 용기와 힘을 얻었다.8)
1895년 가을 전킨과 드루 선교사는 다시 군산을 방문하여 군산 해변에 인접하고 있는 수덕산 자락 (월명공원 일대)에 초가 2채와 땅을 구입하였다.
1896년 4월 5일에 전킨 선교사와 드루 의료선교사는 함께 작은 일본 돛배를 타고 군산으로 이주하였다. 얼마 후에 린니 데이비스 선교사가 합류를 해서 군산은 호남선교의 두 번째 거점이 되었다.
조지 톰슨은 ⎾한국 선교 이야기⏌의 70쪽에서 당시 군산을 이렿게 묘사하고 있다.
1896년 당시 군산은 약 100채 정도의 초가로 구성된 작은 어촌이었다. 부두도 없었고 우체국, 진신국도 없었다. 길은 좁고 구부러졌으며 더러웠다. 사람들은 무지하고 미신을 숭배하여 남자들은 술에 취하고 노름에 빠져 있었으며 여자들은 다투기나 하고 영혼을 숭배하는 자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모두 외국인들을 진심으로 환영했다.
1896년 여름은 군산 가족들에게 길고 덥고 먼지투성이 시련의 시기였다. 언덕에는 나무가 없었으며 들에는 풀이 없었고 집에는 유리창이 없었다. 전킨이 살고 있는 집은 해변에 가까웠기 때문에 끊임없이 홍수가 났다. 증기선들이 계획대로 움직이지 않아서 서울에서 가져오는 공급물자가 끊겼다. 그들의 음식은 고기, 살, 닭고기와 달걀 등 지방에서 살 수 있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모든 요리는 숯불 화로에서 해야 했다. 이것이 군산 가족들이 보낸 그 뒤 삼년 동안의 일과였다.
전킨 선교사는 그는 이사 온 다음 날인 4월 6일에 송영도와 김봉래, 차일선 등의 방문을 받았다. 그들은 1895년 군산 방문 시 만났던 사람들로 세례 받기를 원하였다. 그리하여 전킨은 수세를 원하는 예비신자 훈련을 3개월 동안 주제별로 시켰으며 드루 선교사는 두 달 간의 준비 작업을 거쳐 6월부터 훗날 군산 예수병원이 되는 의료사역을 시작하였다.
1896년 7월 20일 전킨은 김봉래와 송영도에게 세례를 베풀며 군산선교의 문을 활짝 열었다. 그들은 남장로교의 선교지인 호남에서 결실한 최초의 열매가 되었다.
그런데 1896년 가을 제5회 남장로회 선교부가 연례대회에서 군산 선교부를 폐쇄하고 남쪽에 보다 나은 선교부의 땅을 찾기로 결의를 하였다. 당시 선교부는 나주를 새로운 선교지역으로 지목하였으나 드루 선교사의 맹렬한 반대로 군산선교부 폐쇄가 유예되었다.
전킨 선교사는 1896년 11월부터 자신의 집에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하였다. 이것이 호남에 세워진 최초의 교회 군산교회(개복교회)의 출발이다.
같은 해 11월에 서울에서 활동하고 있던 린니 데이비스가 군산으로 내려와 여성반 두 개와 소녀반 두 개 소년반 하나를 만들어 여성교육과 어린이 교육에서 놀라운 발전을 이루었으며 여성반은 군산교회 여신도들의 주축이 되었다.9)
같은 해 드루 선교사가 일본에 다녀오면서 제물포에서 의료선교선으로 황포돛대 배를 구입하였다. 전킨과 드루 선교사는 선교선을 타고 고군산열도의 섬들과 금강변의 위치한 충청도 서천, 화산, 한산, 옥포, 임포, 청송을 지나고 궁멀에서 서포, 나포, 웅포, 용안을 지나 강경과 부여까지 올라갔다. 또한 만경강 줄기를 타고 월포, 옥포, 동자포, 신창포구, 목천포, 남참나루터, 송지동까지 지경을 넓혀서 전도활동을 활발히 벌였다.10)
1897년 제 6회 남장로회 선교부는 연례 모임에서 군산선교부의 복음전도사역이 매우 성공적이었음을 확인하며 군산 선교부를 계속 유지하기로 결의하였다.
전킨 선교사의 1897년 5월의 보고서에 의하면 군산선교부에는 주일예배에 정규적으로 참석하는 40명의 신도가 있었고 한 주 헌금이 530전이었으며 헌금을 위해 두 사람의 회계가 임명되었고 헌금은 가난한 사람과 설교하러 나가는 형제의 경비로 쓰기로 하였다. 헌금이 남을 경우에는 시골교회의 필요와 교회 건축 시 쓸 수 있도록 종자돈으로 모으기로 하였다고 한다.11)
4부로 계속 됨
군산선교부의 궁멀로 이전과 전천후 복음전도
전킨 선교사는 쪽 복음서를 돌리며 전도를 하였고 드루 선교사는 환자들의 병을 치료해주었다. 그들은 배편을 이용해 멀리 군산 앞 바다의 섬들과 금강 상류 변에 있는 충청도에 까지 복음을 전하러 다녔다.
2021.10.6
우담초라하니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