흉년을 맞이한 엘리멜렉과 나오미의 가정은 두 아들과 함께 베들레헴을 떠나 모압으로 갑니다. 그런데 이 가정은 흉년이 왔다고 하나님께 묻지도 않고, 약속의 땅 베들레헴을 떠나 우상숭배의 땅 모압으로 이사를 간 것입니다. 특히 ‘거류하였는데’(룻1:1) 라는 단어는 ‘잠깐 있으려고 머무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즉 상황이 좋아지면 다시 돌아오겠다는 생각으로 떠났는데 어느새 10년이라는 세월이 지나갔습니다. 그런 가운데 가장 엘리멜렉이 죽고, 한참 후에 장성한 두 아들까지 세상을 떠납니다. 두 아들의 이름은 말론(병약한 자)과 기룐(상실한 자, 잃어버린 자) 인데 이 이름의 뜻대로 죽고 말았습니다. 참으로 10년의 세월은 질병과 상실의 세월이 되고 만 것입니다.
그러다가 이 가정은 다시 기쁜 소식을 접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셔서 고향 땅에 ‘풍년이 왔다’는 것입니다(룻1:6). 그래서 나오미는 영적인 안목으로 이 상황을 판단하고 지난날의 잘못을 돌이키고 베들레헴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합니다. 나오미와 두 자부는 중대한 선택의 결정 앞에 직면합니다. 그런데 이 선택은 단순한 선택이 아니고 역사의 주인공이 되느냐 아니면 역사에서 아예 사라지느냐는 선택이었습니다. 그런데 시어머니인 나오미는 두 자부에 대해서 그냥 그들의 고향에 머물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시어머니 나오미가 며느리들의 장래를 생각해서 인간적으로 제안한 것입니다(룻1:11-13). 즉 신앙적으로는 대단히 잘못된 제안입니다. 왜냐하면 단순히 고향 땅에 머물게 되는 정도의 삶이 아니라, 그나마 지켜왔던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버리고, 그들의 옛날 우상 신앙으로 돌아가도록 하는 제안이기 때문입니다(룻1:15). 사실 나오미의 제안은 감상적이고 육신적이고 불신앙적인 제안이었습니다.
이때 큰며느리 ‘오르바’는 시어머니 나오미의 권고를 받아들여서 영원한 이별을 예상하는 입을 맞추고(룻1:14) 우상의 땅 고향으로 돌아가는 선택을 합니다. 결국 이 오르바의 선택은 영원히 역사 속에서 사라지는 선택이 되었습니다. 반면에 둘째 며느리 룻은 영원에 대한 신앙적 선택을 합니다. 즉 고난이 와도 끝까지 견디면서 포기하거나 주눅 들지 않고 끝까지 영원을 선택하여 시어머니 나오미를 붙좇았습니다(룻1:14). 여기에서 붙좇았더라는 말은 ‘굳게 결합하다’‘붙들고 늘어지다’는 뜻입니다. 즉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라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우리도 룻처럼 영원에 대한 신앙의 선택을 하여 하나님을 온전히 붙쫓는 복된 하루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오르바는 그의 시어머니에게 입 맞추되 룻은 그를 붙좇았더라’(룻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