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마다 신우회 없는 곳이 없다. 그리고 인사에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기도 한다. 그래봐야 보직을 누가 맡는가, 탐내는 자리를 누가 차지하느냐 하는 자기들끼리는 목숨 걸 일이지만, 내가 볼 때는 별 영양가 없고 쪼잔하고 웃기는 일이다. 삶의 목표가 다르니 뭐 할 말은 없다만.
참 이상한 일이다. 신우회가 없는 학교는 처음이다. 작년까지는 있었다는데, 올해는 없는 것 같다가 정확한 표현이다. 지난 여름방학 연수 때 청량사 유리보전에 삼배를 올리러 들어온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음에 서로들 놀라 그 자리에서 급결정 했다.
중간고사 기간 중 하루 날 잡아 가까운 절에 다녀오자고... 불교파가 결성되며 종교 전쟁이 시작됐냐하면 물론 아니다. 종교에 관계없이 누구나 원하는 사람 다 모여라, 절로 생각하지 말고 문화 답사, 장소와 시간을 공개했다. 교직 25년 만에 신우회 없는곳도 처음이고, 함께 절에 놀러가는 것도 처음이다.
하여 몇이 흥국사에 갔다. 한번도 대웅전에 들어가 삼배를 해본 적이 없어 청량사에서 망설이다가 사람들이 하길래 아무도 없을때 했봤단다. 불자라고 말하기 뭣한, 단지 교회보다는 절이 편해 급조성해 나들이 간 사람들이다.
서울순환외곽도로 완전 개통으로 인해 딱 25분, 전에는 한시간쯤 걸리던 곳이어서 내비게이션이 고장난줄 알았다. 파헤쳐진 별내 지구에 들어서며 잘못 온줄 알았다. 이제는 더 이상 건들 곳이 없겠지 했던 것은 얼마나 시대에 뒤떨어진 순진한 생각인지. 별내는 난장이었지만 흥국사는 여전히 고졸하고 옛모습 그대로다.
남양주 별내면 흥국사, 어머니 문정왕후의 뒤치다꺼리를 끝낸 뒤 후사를 남기지 못한 명종이 세상을 뜨고 졸지에 왕이 된 선조는 피세탁이 필요했다. 생부인 덕흥대원군을 위해 건립한 흥덕사가 흥국사로 바뀌어 오늘에 이른 것이다. 그래서 왕실의 보호와 적극적인 지원을 받으며 궁궐에서만 볼 수 있었던 지붕 위의 잡상과 대방채 같은 건물들이 들어서며 거의 준궁궐급 모습을 갖춘 것이다.
성리학을 국가 이념으로 불교를 철저하게 박해했지만 왕자의 탄생이나 죽음 같은 인생사 앞에서는 부처님의 원력에 의지했다는 사실이 참으로 역설적이다. 세종의 영릉 신륵사, 세조의 광릉 봉선사, 성종의 선릉 봉은사, 정조와 사도세자의 융건릉 용주사 등이 모두 왕릉 옆에서 능참 사찰의 역할을 했던 절들이다. 서울 근교에 있는 흥*사, 봉*사 같은 이름을 가진 절들은 거의 다 왕실의 원찰 노릇을 하며 왕가의 여인들이 드나들던 곳이다.
흥국사 경내에서 처음 만나는 건물은 대방채, 왕가의 여인들이 일반인들과 함께 불공을 드릴 수는 없는 일 아닌가. 궁궐이나 대갓집에서만 볼 수 있는 양 날개가 달린 대방채가 대웅전과 영산전 앞에 떡 버티고 있는 이유이다. 왕실의 귀한 손님들이 오면 대방채에서 맞고, 이곳에서 불공을 드렸다. 예나 지금이나 개인의 욕망과 집착은 모든 이념과 사상을 뛰어 넘는다. 왕족이든, 서민이든. 나도 예외일수 없겠지만...
대방채를 돌아가면 영산전과 대웅전이 일렬로, 시왕전이 방향을 틀어 서 있고, 뒤 축대 위에 원통전과 만월보전이 자리를 잡았다. 대웅전과 만월보전 용마루와 지붕선을 장식한 삼장법사와 사오정, 저팔계 같은 잡상들은 완전 궁궐에 온듯하다. 잡상이 늘어선 기와지붕을 날듯한 선을 바라보면 이곳이 궁궐인지 절인지 도무지 구분이 안될 정도이다. 대웅전 뒷벽 시주자들의 명단이 써 있는데, 영의정 누구, **비, * 빈, 상궁 얼마 하는 식이다. 만원짜리 기와를 시주한 우리같은 사람들은 감히 이름 석자를 올릴 계재가 아닌 짱짱한 절이었다.
흥국사에서 영험하기로 소문난 만월보전은 궁궐 후원의 정자를 닮은 육각정에, 지붕은 역시 잡상으로 장식했다. 여기에서 전설 하나, 태조 이성계의 딸 중에 금강산 유점사로 출가한 딸이 있었단다. 아버지 태조가 병이 들자 정릉 봉국사에 약사여래를 봉안하여 아버지의 병이 나았단다.
태조의 병을 낫게 한 봉국사의 부처님이 어느날 홀연히 자취를 감추었다 한다. 한참을 찾은 후 어느 시냇가에서 발견했는데, 스님들이 아무리 용을 써도 요지부동. 그래서 궁리를 내어 나라 안 절 이름을 차례로 말했는데 흥국사란 이름에 번쩍 들려 이곳 만월보전에 봉안했다는 영험하신 분이다. 특히 신병, 홧병에 효험이 있다 하니 가슴앓이 답답증, 스트레스 만땅인 분들은 멀지 않은 흥국사에 한번 다녀오시길 앙망한다.
궁궐급 절, 만월보전 약사여래의 영험함과 함께 흥국사를 빛내는 것 하나가 바로 전각 벽마다 그려진 벽화와 신장상들. 흥국사가 근대에 화공들을 길러내던 교육기관을 겸했다고 한다. 그래서 불교를 주제로 한 심우도, 고승의 일화, 부처의 나라를 향하는 반야용선 같은 그림들과 산수화가 빽빽하게 그려져 있고, 그 솜씨 또한 유려하다.
부엌 문에 그려진 신장상은 아주 유명한데, 오년전이나 지금이나 기도 일시를 알려주는 현수막에 가려 제대로 된 그림을 지금껏 한번도 못 봤다. 범종각의 기둥들 역시 실험정신이 가득했던 젊은 스님이 그렸는지, 기둥을 천하대장군으로 조각하여 색을 입혔다. 범종각 안의 법고, 목어와 어울리며 그 해학에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참, 혹 흥국사가 궁금한 분들은 빠른 시일안에 다녀오시기 바란다. 곧 대웅보전과 만월보전을 해체보수한다니, 낡은 건물을 보존하는 방법으로는 그래야겠으나, 해체보수 후엔 고즈넉하고 퇴락한 편안함이 사라지는 것은 물 보듯 뻔한일이다. 선조의 아버지 덕흥대원군의 묘도 근처에 있는데 호젓하여 함께 둘러봐도 좋다. -2010.10.07
첫댓글 강남 봉은사도 왕실의 원찰 이었네요..ㅎ
투어 때 외국인 관광객들과 여러 번 가 보았는데
처음 알았네요..선우님의 이야기를 들으면
감수성 있는 사진들과 함께 유익한 정보 또한 많이
얻어 가는 것 같습니다..^^
그런 의미로 내일은 봉은사, 자주 갔던 곳인데 수년 안가 잘있나 문득 궁금하네요
@너도바람 봉은사 북극보전 뒤에 있는 오솔길이 마음챙김하며
걷기 좋았던 것 같아요..
요즘 일 때문에 도통 움직이질 못 하는데
마음만은 솔잎 향기나는 봉은사 오솔길을 걸어봅니다
잘 다녀오시고요..^^
@신상용 봉은사 올린다는 뜻었슴다.정말 조만간 봉은사 한번 다녀와야겠어요.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