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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진면향우회 스크랩 명량대첩의 비밀 - 13척이 어떻게 333척을 이겼나?
김 흥상(22회) 추천 0 조회 74 14.08.24 22:36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역사스패셜>


명량대첩의 비밀

13척이 어떻게 333척을 이겼나?   



음력 9월 16일 아침 이 좁은 울돌목 해협에서 조선 수군은 수많은 일본함대를 맞아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었다. 양쪽 해안가에 몰린 피난민들은 응원의 함성을 보내고 있었다. 333척의 일본 전함에 13척의 조선 전함이 고전을 면치 못하고 포위되자 피난민들은 발을 구르며 통곡했다. 그러나 잠시 뒤 바다에는 13척의 조선 전함만이 남아 있었다. 13척으로 333척을 이긴 믿을 수 없는 승리의 순간이 것이다.


[들어가는 말]


여기가 바로 그 울돌목입니다.  이곳에서 13척의 우리 전함이 333척의 일본 대전단과 맞붙어서 승리했습니다. 우리는 이 싸움을 명량 대첩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어떻게 된 일인지 지금 우리는 13척으로 333척을 물리친 이 불가사의한 전투에 대해 그다지 큰 경외심을 갖지도 또 도대체 어떻게 싸웠을까? 하는 그런 의문도 별로 갖지 않습니다. 기껏해야 영웅 이순신 장군이 있었으니까 무적함선 거북선으로 싸웠으니까 하는 정도입니다. 그러나 명량 해전에는 거북선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이순신 장군은 이 해전을 승리로 이끌고 난 뒤 실로 천행이다라고 했습니다. 과연 천행뿐이었을까요?


물론 아닙니다. 들여다보면 이 싸움에서 조선 수군은 완벽하게 승리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300척이 아니라 천척이 쳐들어온다고 하더라도 조선수군이 승리할 수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습니다. 지금부터 명량 해전 신화의 비밀이 어디에 있는지 하나 하나 밝혀 보도록 하겠습니다.

 


일본 동경. 신주쿠 거리 한모퉁이에는 아오끼라는 작은 화랑이 있다. 이 화랑에 연대를 알 수 없는 그림 한 장이 소장돼 있다. 정유재란 때의 한 전투를 묘사한 그림으로 추정된다. 여기 '이'자를 단 깃발의 배는 아마도 이순신의 전함일 것이다. 이 배에 작은 일본 전함들이 달라붙어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다. 전투에 동원됐던 각양각색의 무기 사력을 다해 싸우는 조선 수군과 일본 수군의 표정이 놀라울 정도로 생생하다. 이순신의 기함과 일본 함대의 치열한 접전을 섬세하게 묘사한 이 그림은 어떤 전투를 그린 것일까?


아오끼(화랑주인) 

"이 그림은 이순신 장군이 실각한 뒤에 다시 복직하고 나서 싸웠던 1597년 무렵의 명량 해전을 그린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왜냐하면 이 그림이 일본 수군의 깃발이 명량 해전에 참가했던 구루시마 수군의 깃발이기 때문이다"


일본 수군의 깃발로 확인된 이 전투는 명량해전이라는 것이다. 현충사에 바로 이 전투의 순간을 묘사한 기록이 있다. 이순신 장군은 1597년 정유년 9월 16일의 일기에 그날의 긴박한 접전의 순간을 이렇게 적고 있다


'적에게 몇 겹으로 둘러 싸여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다. 군사들이 모두 사색이 되어 서로의

얼굴만 쳐다 볼뿐... 나머지 배들도 겁을 먹고 진격하지 못했다 ...'

 


숨 막히도록 위급했던 그날의 전투로 돌아가 보자. 전라도 해남의 어란진. 지금은 2백여호가 사는 작은 포구의 어촌 마을이다. 1597년 9월 7일. 이 어란진 앞바다에 333척의 전함과 보급선과 연락선 등 총 500여척의 대선단이 집결한다. 이곳에서 전열을 가다듬은 333척의 일본 대선단은 1597년 9월 16일 이른 아침 어란진을 출항한다. 일본 전투 선단의 목적지는 조선 수군이 진을 치고 있는 우수영.  지금의 진도 대교가 가로 놓인 울돌목을 통과하는 것이다.

 


같은 시간  우수영의 조선 수군 기지. 일본 대선단이 어란진을 출항했다는 정찰병의 보고가 들어온다.  조선 수군 전력의 전부인 13척의 함대는 333척의 일본 대선단을 맞아 싸우기 위해 우수영을 떠나 조용히 명량 해협으로 나아간다. 돌격해 오는 일본 대전단을 맞아 13척의 조선 수군 전함은 울돌목에 일렬로 포진한다. 조선 전함 13척 중 이순신 전함이 먼저 앞으로 나가 적선과 맞섰다. 명량해전 그 막은 이렇게 올랐다.


그렇다면 이 전투의 결과는 어떠했을까? 전라매일신문의 주필 양재숙씨 그는 10여 년째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의 전쟁사를 재조명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그가 분석한 명량해전에서의 우리측 피해 상황은 놀랍다.


"순천 감목관 김탁..."


난중일기에는 이순신 전함의 피해 상황이 기록돼 있다.


"탄환을 맞아 전사했다"

 


전사자가 2명, 부상은 3명, 사상자는 모두합해서 5명밖에 되지 않는다.


"역시 탄환을 맞아 중상에 ..."


이순신이 사상자의 이름, 부상의 정도까지 직접 기록할 만큼 우리측 피해는 적었다는

것이다.


양재숙 씨 그 당시 전라매일주필

"남은 13척 전 전함에다 추정을 해 보면 전사 30여명 부상 40여명 무두 합해 70명 많이 잡아서 100명 미만의 전사자가 났던 걸로 추산이 됩니다. 그에 비해서 일본 수군은 그 피해가 어마어마합니다."

 

 


각종 기록을 종합해서 추정한 명량해전에서의 일본 측 피해 상황은 다음과 같다. 불타고 부서져서 격침된 배는 31척 90여척이 심한 파손을 입고 달아났다. 격침된 배의 사망자는 최소 3천 5백여명으로 추산, 도주한 배에서의 사상자는 얼마나 될까. 


양재숙 씨 

"거기에 따른 일본 수군의 병력 피해가 구체적으로 기록으로는 전하고 있지 않고 있습니다만 원래 중선급 수군의 전함 정원은 100명입니다. 추산을 해보면 일본 수군 9천명이 그 배에 탔었는데 조선군 포격에 맞아서 혹은 화살에 맞아서 절반 정도 약 사천오백명이 전사하거나 바다에 빠져 익사한게 아니냐 그렇게 추정이 됩니다. 모두 일본군 피해는 최소한 팔천여명으로 추산이 됩니다"


조선 수군의 전함은 단 한척의 피해도 없었다. 13척대 333척의 불가능한 전투 그것을 승리로 이끈 신화적인 전쟁이 바로 명량 해전인 것이다.


지금 보시는 섬을 현지 주민들은 피섬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피섬! 명량 해전 때 일본군이 흘린 피로 이섬의 온 일대가 붉게 물들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일본군의 피해가 얼마나 컸는지 짐작이 가시죠. 일본군에게는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사상자와 씻을 수 없는 대참패의 오역을 남겨주었고 우리에겐 통쾌한 승리를 가져다 준 명량 해전은 세계 해전 사 에서도 그 예를 찾기 힘든 그런 전쟁 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때 우리의 전함 13척뿐이었습니다. 이것은 조선 수군이 가지고 있던 전력의 전부였습니다. 이 명량 해전 전에는 우리 조선 수군의 전함도 300여척이 넘는 그런 배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명량 해전 바로 직전에 오직 13척만이 남게 됩니다. 그 많던 전함이 도대체 어디 가고 천하의 명장 이순신에게 어떻게 겨우 13척의 배밖에 남지 않은 걸까요?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일본 해군사의 권위자, 사토씨, 그는 임진왜란에 대해 기록한 희귀한 책의 원본을 소장하고 있다.


사토 가즈오(일본군사사학회 이사)

"이 책은 일본 에도 시대에 만든 것으로 임진왜한과 정유재란을 일본의 입장에서 기록한 역사책이다. 제목이 <정한>이라고 되어 있어서 당시 일본이 한국을 보는 시각이 나타나 있지만 조선, 중국, 일본의 자료를 정확하게 인용했기 때문에 당시의 사정을 정확하게 알 수 있다"

 

 


정한 위략, 총 다섯권으로 묶여져 있는 이 책은 임진 왜란 7년을 연구 하는 귀한 사료가 되고 있다. 여기에 칠천도. 지금의 거제도 앞바다에서 벌어진, 원균이 이끈 조선 수군의 대참패에 대한 기록이 있다. 칠천량 해전에서 승리한 일본은 이때의 대전과를 의기양양 하게 적어 놓았다. '일본 장수 시즈마 160여척 격파, 도도 60여척, 야스하루 16척, 목을 벤 수만도 수천 명에 이른다.'


익해자불가지(溺海者不可知). 물에 빠져 죽은 사람의 수는 이루 헤아릴 수 없다'. 조선 수군을 전멸로 몰아넣은 칠천량 해전 참패를 거듭하던 일본수군은 어떻게 이런 대전과를 올릴 수 있었을까.


사토 가즈오(일본 군사사학회 이사)

"처음으로 일본군이 통합적인 전투력을 발휘 했다는 점이다. 수군과 육군이 따로따로 싸운 것이 아니라 공동으로 펼친 작전이었던 것이다. 이 작전으로 조선 수군을 섬멸하였다. 조선 수군은 수군 단독으로 싸웠기 때문에 패배했다"


거제도 앞바다의 좁은 포구에 정박 중이던 조선 수군은 일본 수군의 기습을 받자 배를 버리고 육지로 도망간다. 이때 육지에 미리 매복하고 있던 일본 육군에게 원균을 비롯한 수 많은 조선 수군은 죽임을 당해 전멸하고 만다.


최두환(해군 충무공 수련원 연구실장)

"칠천량 패전은 우리에게 있어서는 안 될 전투였습니다. 우리가 가졌던 수군 전체 전선이 134척이었는데 도망간 배 12척 이것 빼고는 전부 다 수장이 됐습니다. 수군의 존재가 거의 없어졌다 이렇게 됩니다. 수군의 존재가 없어졌다는 것은 국가 기능이 상당히 마비됐다고 볼 수 있습니다. 대단한 전투의 의미를 가질 수 있습니다."


조정의 명령에 따라 억지로 거제도로 나아갔던 원균의 수군, 그것을 격파한 승리는 일본에게 그 의미가 각별하다.

 

사토 가즈오

"이 전투로 일본이 제해권을 가지게 되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일본군이 해상권을 획득

했다는 것은 보급이 보장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로써 육군과 수군이 상호 협력해서 서울까지 진격할 수 있게 되었다. 바로 그 점이 이 전투의 가장 큰 의의라고 할 수 있다."


그동안 조선 수군에게 차단돼 있던 한반도의 서해 진출의 길은 일본의 승리로 뚫리게 된 것이다. 일본이 전라도는 물론 충청도를 뚫고 한양으로 올라가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대신들은 왜 말이 없는가? 이대로 있으면 왜적이 저절로 물러난단 말인가? ......그러나 대신들은 말이 없었다.' 선조실록 30년 7월.


조선 조정은 아무 대책 없이, 그저 무능하게 혼란에 빠져 허둥대고 있을 뿐이었다.


이 책은 이순신 장군에 관한 모든 기록을 충무 전서 글자 모아 놓은 '충무공 전서'입니다. 여기에 이순신에게 부산포로 진격하라고 강요하는 이 조정의 명령문이 있습니다. "가토가 대군을 이끌고 온다고 하니 수군은 부산포로 세로로 글자 나온다 진격해서 적의 수군을 무찌르도록 하라". 이 칠천량 해전이 있기 전에 이순신장군도 원균과 똑같이 부산포로 진격하라고 강요하는 이 조정의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 명령을 받은 이순신 장군은 어떻게 했을까요. 여기 이책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상세히 기록한 조선역수군사란 일본책입니다. 여기에 기록이 있습니다. 한번 찾아보겠습니다. "그러나 이순신은 일본군의 속임수를 두려워하여 출격 나온다 하지 않았다. 권율은 이순신이 명령에 따르지 않았다고 해서 죄를 주어 조정에 보고했다." 그 유명한 이순신의 백의종군이 부산 진격을 둘러싼 수군과 조정간의 알력으로 말미암은 사건인 것입니다. 부산포로 진격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이순신은 수군에서 쫓겨 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조선 수군이 전멸할 때 이순신은 과연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당시의 위급한 상황 속에서 그 나름대로 숨 가쁘게 움직이고 있었던 이순신의 궤적을 ?아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권율 휘하에서 백의 종군하던 이순신은 조선 수군이 전멸했다는 비보를 듣고 다시 수군을 수습하기 위해 정찰을 돌던 중 진주 운계리 마을 손경례라는 사람의 집에 잠시 머물게 된다.


손도근(손경례의 12대 후손)

"그 당시 여가 오지 중에 오지거든 그러니까 이 근방 에서 밥이라도 잡숩는 집이 이 집었던 모양이여 그 당시에 비가 많이 왔는데 충무공이 여기 오셔가 백의종군할 때 오셔가 계실 때가 없기 때문에 우리집에 와 계시다가"


이곳에서 이순신은 조정에서 내려 보낸 한 장의 교지를 받게 된다. 백의종군 상태인 이순신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 로 다시 재임명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원균의 패배로 허둥대던 조정이 찾은 방책인 것이다.


'지난날 그대를 백의 종군케 해서 오늘 이런 패전의 욕됨을 입었으니 무슨 할 말이 있으리오..... 그대는 부디 충의를 굳건히 하여 다시 나라를 구해 주기 바란다.'

'무슨 할말이 있으리오. 무슨 할말이 있으리오.'(上何言哉 上何言哉)


교서는 그야말로 조정의 솔직한 사과문이기도 했다. 교서를 받은 그날 밤 이순신은 바로 길을 떠난다. 칠천량 해전에서 겨우 남은 전선을 수습하고 조선 수군을 재건하기 위한 강행군이 시작된 것이다. 고내리.  창고안 마을이라는 뜻 그대로 이 마을 에는 조선시대 때 세곡을 보관하던 ‘조양창’이라는 창고 터가 있던 곳이다. 지금은 주춧돌의 흔적만 남아 있는 조양창터. 이순신이 이곳에 도착했을 때 병사들은 도망가고 창고만 덩그렇게 남아 있었다.


마을 주민, 임형남(그 당시 75세 보성군 조성면 고내마을) 

"창고터에 와서 보니까 창고의 자물쇠가 그대로 남아 있어서 열어 보니까 곡식이 가득 찼더라 손을 안대고 그래서 우리 마을 김씨 집에서 자고 그래서 수병들을 모아서 곡식을 실어 가서 군사들을 먹이고 쓰셨다는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이름만 수군 총사령관이지 그에게는 아무것도 없었다. 버리고 간 곡식을 줍다시피 모으고 다녀야만 했던 형편이었다. 하물며 무기의 보급이야 말할 나위가 없었다. 지금 보성의 군청 자리에 보성관아가 들어 서 있었다. 보성 군청의 군기 창고 역시 다행히 버리고 간 무기가 남아 있었다. 이순신은 여기서 무기를 수습한다.


김용환(당시 보성 문화 부원장)

"이순신 장근이 8월9일날 보성에 오셔 가지고 조양 에서 양곡을 얻고 보성군 관아에서 병기를 검열해 4마리의 말에 싣고 수군 120여명을 확보해서 바로 명량 대첩을 이룰 수 있는 그러한 기반을 여기서 닦으셨던 곳입니다."


수군의 기반이라고는 하나 불과 4마리의 말에 실은 분량의 무기와 120명의 군사 그게 전부였다. 그러나 미약하지만 해전을 치를 준비를 해 나가고 있던 이순신은 추석날 저녁 뜻밖의 어명을 받는다. 군사를 합쳐 육전에 참가하라는 것이었다. 조정에서는 왜 느닷없이 수군을 없애라는 명령을 내린 것일까?


이종학(서지학자, 충무공 연구가) 

"배도 다 깨지고 무기도 없고 군인도 도망가고 그러니까 그냥 있는 병력 갖고 권율이 한테 가서 협조해라 밀령을 내렸던 겁니다. 근데 이장군은 그게 아니거던요, 자고로 바다의 적은 바다에서 막아야 한다. 그래서 옛날부터 해군이 있는 거란 말입니다 그래서 전부 계획을 세워 놓고 있는데 어디서 싸우겠다는 계획이 다 있는데 뜻밖에 해군 폐지하라는 명령을 받으니까 아주 실망해서 보성서 장계를 바로 올립니다, 안된다..."


이순신은 수군 철폐를 반대하는 비장한 결의가 담긴 장계를 올린다.


'지금 신에게는 아직 전선 12척이 남아 있습니다. 죽기를 각오하고 싸운다면 막을 수 있습니다. 지금 수군을 폐지한다면 이는 적이 바라는 바로서 적은 호남을 거쳐 쉽게 한강까지 진격할 것입니다. 오직 그것이 두려울 뿐입니다. 비록 전선의 수가 적으나 신이 아직 살아 있으므로 감히 무시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 장계로 조선 수군의 명맥은 유지 될 수 있게 된다.

 


1597년 8월 18일. 이순신은 장흥 회령포에 도착한다.  지금은 작은 항구의 어촌 마을인 회령포. 조선 시대에는 남해안의 중요한 수군 방어 기지 가운데 하나였다.


"객삽니다, 객사텁니다.

이부근에 는 뭐가 있습니까

무기고가 있었어...

무기고...

그러고 여기가 성터가 요래 있었지. 여가 성터 "

 


"뺑둘러 성이 있고 배대는 곳이 이 자리고 예..."


이 포구에서 이순신은 남은 12척의 배와 새로 합류한 배 한척,  모두 13척으로 조선 수군을 새로 만들어 냈다. 그러나 문제는 땅에 떨어진 병사들의 사기.


윤수옥 전남 장흥군 문화원장

"8월 18일 이곳에 들어오셔 가지고 배 12척을 인수하셨습니다만 배가 많이 상해서 이것을 다시 수리하고 그러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선 모두 사기가 떨어져 가기고 사기 진작을 어떻게 하든지 시키려고 크게 노력을 하셨습니다."


결전을 앞두고 이순신은 휘하 장수들은 군사들을 모아 놓고 최후의 결의를 밝힌다.


'임금의 명을 받았으니 함께 죽는 것이 마땅하다. 나라 위한 한 목숨이 무엇이 아까우랴…  오직 죽음만이 있을 뿐이다'


'명공육전' 충무공에게 육전을 명령했다! 생긴다 즉 수군을 없애고 육군에 합류하라는 말입니다.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는 조정의 결정이었습니다. 이때의 심정을 노래한 것이 바로 그 유명한 <한산도가>라는 새로운 설이 있습니다. 자, 여기 보시면 이것이 최근에 새로 발견해 낸 한산도가 입니다. 여기 정유년 중추라고 적여 있는데 이날은 이순신이 조정으로부터 조선 수군 철폐 명령을 받던 날입니다. 이때 <한산도가>를 읊었다는 것입니다.


"한산 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올라

큰 칼 어루만지며 깊은 시름하는 차에

어디서 일성호가는 다시 시름을 더하네"


조선수군이 없어질지도 모른다는 참담한 심정으로 이순신 장군은 <한산도가>를 읊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순신은 시름에만 빠져 있지 않고 대책을 찾아 나섭니다. 그에게 주어진 것은 오직 13척의 전선! 거북선도 없이 13척으로 일본 전함 333척을 쳐부숴 버린 놀라운 우리 전선, 그렇다면 과연 어떤 배였을까요? 조선 수군의 전선과 일본 전함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일본 큐슈의 북쪽 해안에 있는 나고야성.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 침공의 출병기지를 이곳에다 정하고 쌓았던 거대한 성이다. 이 성터 옆에 나고야성 박물관이 있다.  여기에는 임진왜란 때의 나고야성의 모습을 알 수 있는 귀중한 병풍이 하나 있다. 이 병풍에는 나고야 성 안의 사람들과 가옥구조 등이 묘사되어 있다. 이 거대한 군사 기지 나고야성 안 한쪽 구석에 그려져 있는 이배는 안택선 임진왜란 때의 사용됐던 일본의 주력함선 이다.


길이가 30여미터인 안택선은 다른 배와 달리 갑판위에 가옥이 안치돼 있다. 그래서 붙여진 이름이 바로 안택선. 이 배는 2층 구조로 전투원은 위의 갑판에 노꾼은 아래 갑판에 각각 배치됐다. 뱃 앞머리가 뽀죡한 것이 특징이다. 노는 90여개. 여기에 노군은 120명 여명이 필요했다. 갑판에서 전투를 벌이는 전투원은 약 200여명, 안택선에는 300여명이 승선할 수 있었다.


사토 가즈오

"역시 안택선은 일본 수군의 주력선으로서 이순신 장군이 말했던 것처럼 조선의 판옥선에 해당하는 대형 전투선이다."



그렇다면 일본에 주력선인 안택선의 맞서는 조선의 판옥선은 어떤 배일까. 판옥선의 크기는 30여 미터 배 앞머리가 둥글어 거친바다를 항해하기 쉽게 만들었다는 게 특징이다. 갑판은 역시 2층 구조로 노꾼과 전투원을 따로 배치했다. 300여명 가까이 승선할 수 있는 이 판옥선은 겉으로는 안택선과 별 차이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배를 만드는 방식에서는 굉장한 차이가 난다. 판자를 어떻게 연결하느냐에 따라 배의 견고성은 결정된다. 판옥선의 가장 큰 특징은 나무못으로 연결한다는 것이다. 판자의 한 모서리를 ‘ㄴ’자로 턱을 깎아내고 그 위에 판자를 붙인 다음 참나무 못을 윗 판자에서 아래 판자로 비스듬히 ‘S’자로 박는다.


반면 안택선은 쇠못을 박아 판자를 연결시킨다. 판자 2개를 그대로 나란히 붙이고 못은 쇠못으로 판자와 판자 2개를 똑바로 박아 연결한다.


이원식 소장

"이게 소나무, 참나무 팽창 계수가 큽니다. 그래서 집어넣으면 팽창이 되가지고 그 구멍으로 물이 들어가지 못하죠 동시에 이것은 썩지 않습니다. 쇠못을 쓰게 되면 어떤 충격이나 갖다 됐을 때 이완 되고 빠지는 경우도 있고 또 하나는 쇠가 부식이 되니까 녹이 쓰니까 쇠가 녹스는 것 뿐 아니라 주위의 나무들이 같이 부식이 돼서 썩죠"

 

 


두꺼운 판자를 이어 붙여 바닥을 만들고 반듯하게 깎은 판자 이어서 옆면을 세운다. 갑판은 2층 구조지만 옆으로 부터의 충격이 약한 구조다. 돛대는 하나, 이것이 일본의 안택선이다. 조선의 판옥선은 두껍고 네모난 판자를 이어서 평평한 바닥을 만들고 7개의 판자로 배를 세운다. 배가 옆으로 찌그러지지 않게 장쇠로 골격을 단단히 한다. 2층 갑판에 가옥이 하나, 2개의 돛대를 단 모습이다.


배를 만드는 제작 방식과 구조의 차이가 배의 성능과 견고성을 결정짓는다. 여기에서부터 차이가 비롯된다.


안재철 국립해양유물전시관 학예관

"일단 밑이 뾰족한 경우는 물에 들어가는 부분이 깊기 때문에 돌리는 회전하는 문제가 좀 힘들 것 같구요. 우리배 같은 경우는 밑이 평평하기 때문에 물에 닺는 부분이 낮기 때문에 빠른 회전력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토 가즈오

"이순신 장군의 판옥선은 일본의 안택선에 해당한다. 그러나 안택선은 구조적인 측면에서

볼 때 판옥선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약했다."


세끼 부네라고 부르는 일본의 관선은 중형선으로 일본 전력의 상당수를 이루던 전투함이다.관선의 기본 구조는 일본의 안택선과 같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 판옥선에 비해 너무 작다는 것. 이것은 조선과 일본 수군의 전력 차로 연결된다. 조선과 일본의 배를 만드는 기술의 차이, 이것은 해전의 한 승리 요인으로 작용한 것이었다.


조선 수군이 승리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또 있습니다. 조선 수군들이 사용한 무기입니다. 여기에 있는 이 곶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왜적이 사용하던 조총입니다. 한번 불을 댕겨 보겠습니다. 이 엄청난 위력으로 조선 육군은 커다란 피해를 입고 대 혼란에 빠졌습니다. 그러나 조선 수군은 달랐습니다. 조선 수군에게는 조총을 무색케 하고 일본 수군을 떨게 했던 무기가 있었습니다. 도대체 조선 수군은 어떤 무기들을 사용했던 것일까요?


조선 수군의 가장 큰 특징은 함포에 있다. 배에 포를 장착하고 다니면서 사격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당시 수전의 양상이 이미 근대적 해전의 단계로 들어섰음을 뜻한다.


나종우 교수 원광대학교 사학과

"해전에서 화약 무기가 사용된 것은 고려말부터지만 근대적 의미의 함포 함대라고 하는 것은 이순신 시대부터라고 할 수 있다. 이순신 함대의 경우 250여척의 배에 함포가 탑재돼 있었고, 300여문 이상의 예비 포도 가지고 있었는데 실제적으로 기술의 개량, 양적인 증가 그런 것은 오늘날 개념에서 볼 때도 근대적 함포 함대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조선 수군이 사용한 가장 대표적인 함포는 천자총통, 길이가 130㎝로 포 가운데 가장 크다. 구경은 15㎝며 무게는 298㎏이나 된다. 한번 발사하는데 사용되는 화약은 1.1㎏, 화약을 넣은 다음 격목을 바치고 탄환을 넣는다. 이 탄환대신에 무게 30㎏의 대장군전을 쏠 수도 있다. 400여 미터를 날려 보낼 수 있는 위력을 가지고 있다.


김주식 해사박물관 기획실장

"이것은 지자총통인데요, 지자 총통의 탄환 종류가 2가지가 있습니다. 보시면 이것이 장군전이고 그냥 나무 화살입니다. 터지면 폭탄이 아니죠. 여기 나무 화살 대신에 작은 탄환을 수십정, 수백발을 놓고 쏘는데 그것을 조란환이라고 했죠 그것은 목적이 적의 인명을 살상하기 위한 목적입니다. 이것이 한번 터지게 되면은 적선 위에 있는 많은 인원들이 순식간에

부상, 사망을 많이 하게 되는 거죠, 잘 아시는 바와 같이 한산대첩에서 이장군께서 일시에 적을 제압했다는 기록을 남기시는데 바로 그때 조란환을 이용한 총통의 위력의 큰 효과를 봤던 겁니다."


한꺼번에 발사되는 탄환의 양은 300발, 엄청난 살상력을 발휘했던 조란환은 일본 수군에게는 가장 무서운 무기였다. 여기에 맞서는 일본 수군의 무기는 조총이다. 서양에서 들여온 우수한 조총은 중세의 전투 모습을 완전히 바꾼다. 복잡하게 쪼개져 싸우던 일본을 하나로 통일시킨 조총은 일본의 가장 대표적인 무기였다. 여기 주목할 점이 있다. 조총 역시 화약 무기라는 점이다.



히로세(나고야 성 박물관 학예원)

"이것은 임진왜란때 실제로 사용된 조총입니다. 여기 이 부분에 화약을 넣게 됩니다. 이 부분에 도화선을 달고 이 방아쇠를 당기면 이것이 내려와 여기를 치게 됩니다. 그러면 이 부분의 화약에 불이 붙어서 총안에 있는 화약을 터지게 하니까 탄환이 발사되는 것입니다."


조총을 들고 상륙한 일본군은 육지전에서 그 위력을 유감없이 발휘한다. 활과 창으로 맞섰던 조선 육군은 화력이 우수한 조총에 상대가 될 수 없었다. 그렇다면 이런 화력을 대포에는 적용시키지 않았을까.


히로세 

"일본은 대포를 만들 수가 없어서 서양에서 수입해서 썼다. 자체적으로 대포를 만들 수 있게 된 것은 임란이 끝난 뒤 에도 시대에 들어서이다."


일본은 대포를 만들 기술이 없었던 것이다. 설사 대포를 서양에서 들여온 대포를 사용한다고 해도 일본 수군에게는 문제가 있었다. 그림에서처럼 일본 수군은 배의 들보에다 포를 메달아 놓고 써야만 했다. 여기에는 이유가 있었다.


사토 가즈오

"대포를 배에 싣기 위해서는 선체가 매우 튼튼해야 하는데 일본의 전선은 도저히 그럴만한 배가 못되었다. 그것이 대포를 활용하지 못한 이유이다."


배의 구조상 일본 배는 포를 거의 장착할 수가 없었다. 조선의 판옥선은 사방에다 많은 포를 배치할 수 있다. 비교할 수 없는 화력의 차이, 바로 해전에서 일본 수군이 조선 수군에게 맥을 추지 못했던 전력의 차이인 것이다.


이렇게  배를 살펴보고 또 무기를 살펴봤는데요. 이렇게 강력한 화력을 갖춘 전투력이 뛰어난 판옥선에 일본선은 맥을 출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아무리 우수한 배, 우수한 무기라고 할지라도, 13대 333이란 정말 감당하기 힘든 전력의 차이입니다. 그렇다면 이순신 장군에게는 또 다른 무기가 있었을 겁니다. 흔히들 명량 즉 울돌목의 엄청난 조류를 그 무기라고 합니다. 일본 수군이 우리 수군의 유인 작전에 말려 모르고 덤벼들었다는 거죠. 과연 그럴까요? 명량 해협으로 가 보도록 하죠.


해남과 진도를 잇는 진도 대교 아래가 바로 울돌목이다. 암초에 빠른 물살이 부딪쳐 소리가 날 정도로 물살이 세기로 이름나 있다. 물살이 빨라 요즘도 웬만한 배는 물살을 거슬러서 올라가지 못한다. 남해안에서 서해안으로 넘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지나야 하는 이 울돌목. 이곳의 물살이 센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나라 해양의 지형 물의 흐름을 연구하는 국립 해양 조사원. 이곳에 울돌목의 해저 지형과 유속을 분석해 놓고 있다.  


"이 넓은 해역에서 물이 마로해를 통해서 좁은 수로를 따라서 울돌목으로 통과하게 돼 있습니다. 이 좁은 수로를 통하는 많은 물이 울돌목에서는 자연히 수면의 높이가 올라가고 압력이 생깁니다. 이렇게 됐을 때 여기는 ...상태가 되기 때문에 요물이 진도대교 밖을 빠져 나가서 우수영 남쪽이 넓은 해역으로 빠져 나갈 때는 마치 봇물이 퍼져 나가 듯 굉장히 강한 유속을 형성하게 되는 거죠 .이때 최강 유속이 11노트 1초에 5,7 메터..."


밀물 때 넓은 남해의 바닷물이 좁은 이 울돌목으로 한꺼번에 밀려오게 된다. 그것이 울돌목에 좁은 목에 막혀 수위가 1.5미터 이상 높아지고 그 수위차가 빠른 물살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울돌목의 물살의 특징은 또 있다. 국립 해양 조사원 연구팀이 지형을 분석해 그려낸

해저 지형도를 보면 울돌목에 수십 개의 크고 작은 암초가 솟아 있다. 급조류로 흐르던 물살이 암초에 부딪쳐 방향을 잡지 못하고 소용돌이치게 되는 것이다. 일본 수군은 울돌목의 강하고 빠른 물살을 모르고 이곳을 건너려고 했던 것일까.

 


일본의 시코쿠의 미야쿠보지역 - 일본 수군의 탄생지다. 이곳에도 울돌목처럼 강한 조류가 있다고 해서 확인해 보기로 했다. 울돌목의 형태와 놀라울 정도로 흡사하다. 진도 대교와 같은 다리도 놓여 있다. 넓은 바다에서 좁은 바다로 들어가는 곳에는 엄청난 조류가 흐르고 있었다. 유속은 10노트, 물의 속도 또한 울돌목 못지않게 빨랐다. 이 물살을 가로질러 건너면 바로 명량 해전에 참전했던 구로시마 수군의 본거지가 있었다. 그렇다면 그들은 이런 빠른 물살에는 익숙하지 않았을까?


무라카미 무쯔시(미야쿠보 문화재위원)

"이 바다에는 예로부터 수많은 해적과 수군이 있었다, 이 물살 자체가 그들의 강력한 무기였는데 이 물살을 이용해서 능숙하게 항해도 하고 각 영주를 위해서 수많은 전투를 벌이기도 했다."


명량 해전에 참전한 일본 수군에게는 울돌목의 빠른 물살은 위험이 아니었을 것이다. 오히려 전투 경험을 살려 이 이 울돌목의 물살을 건너려고 했을 것이다. 1597년 9월 15일. 울돌목은 결전의 날을 맞이할 준비를 한 채 저물어가고 있었다.


일본 수군은 적어도 그런 물살을 이용한 전투에는 자신이 있었다는 뜻입니다. 오히려 빠른 물살 이용해서 단번에 조선 수군을 밀어 붙일 수 있다고 판단했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일본 수군이 미처 몰랐던 것이 있습니다. 바로 지형지세를 이용할 줄 아는 뛰어난 전략가인

이순신이 좁은 급조류의 울돌목을 활용할 작전을 미리 세워 두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불가능한 전쟁을 승리로 이끈 명량 해전. 그 누구도 따라 올 수 없는 전략가 이순신의 비장의 카드는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전남 완도군 고금도. 훗날 노량대첩에서 전사한 이순신 장군의 시신을 안치 했던 충무사. 이곳 사당에는 귀한 자료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조선시대 수군의 전투 진법을 그려 놓은 수군 전진도다. 여기에는 조선 수군이 구사했던 각종 진법이 소개돼 있다.

 


마치 학이 날개를 편 듯 하다는 이 진법은 이순신이 즐겨 썼다고 한다. 적선을 유인해 일시에 쳐부수는 학익진은 배를 다루는 고난도의 기술 필요한 전법 이다. 적진을 향해 진격하다가 갑자기 180도로 회전을 해서 반대 방향으로 도망가면서 적선을 유인한다. 적선이 최대 사정 거리 안에 들어오기 직전 다시 180도로 회전해서, 따라 오고 있던 적선을 에워싸는 것이 바로 학익진법인 것이다.


그러나 울돌목에서는 이 놀라운 학익진법도 소용이 없었다. 빠른 물살 때문에 진법을 제대로 쓸 수 없었을 것이다. 울돌목 현지 주민들에게는 이순신이 어떻게 싸웠는지 전해지는 얘기가 있다.


홍순덕 주민 명량대첩유적사업회.

"진도하고 해남 우수영하고 쇠줄 쇠줄로 바다 밑으로 해 가지고 왜적이 오면 격파시켰다고 해 가지고... 왜선을 많이 격파했다고 우리 어렸을 때 많이 들었다."


가장 폭이 좁은 지점에다 쇠사슬을 걸어 뒀다가 당겨서 배를 걸리게 했다는 것이다.


"쇠고리가 언제 까지 있었습니까?


정금식 소장 우수영 명량대첩기념관.

“쇠고리가 그때 당시 연륙교 설치할 때 당시에도 있었으니까 한 84년,... 지금으로부터 15년 전까지 있었다니까... 얼마까지만 해도 있었네요... 예"


불과 10여년 전만해도 쇠사슬은 묶었던 고리가 남아 있었다고 한다. 정말 가능한 일이었을까? 이 이야기를 뒷받침하는 기록을 전남 강진의 금강사란 곳에서 찾았다. 명량해전에서 충무공과 함께 싸웠던 김억추 장군을 기리는 이곳 사당에 오래된 책 한권이 전해지고 있다.

.

"그러면 이 책에는... 원래 있던..."

 


명량 해전 때 전라 우수사 김억추가 자신의 행적을 직접 기록한 현무공실기. 여기에 '철쇄'라는 기록이 보인다. '철쇄 즉 쇠사슬과 철구로 적선을 깨뜨렸다', 어떻게 철쇄로 배를 걸어 깨뜨릴 수 있을까?


목포 해역 방어 사령부, 여기에는 지금도 수백 척의 배를 끌어당길 때 쓰는 막게라는 것이 있다. 조선시대 때도 배를 끌어당길 때는 이런 막게를 사용했다고 한다. 충무공 수련원의 최두환 실장. 그는 이순신 장군이 울돌목에서 이전 막게를 이용한 쇠사슬 전법을 썼을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다.


최두환 실장.

"수로의 폭이 좁은 데는 280미터 됩니다. 물어 들어서 좀 더 넓어진다면 320미터 정도 됩니다. 그러면 감을 수 있는 거리를 50미터 정도의 여유를 둔다고 해도 470미터면 충분히 이것을... 쇠줄의 무게는 얼마나 됩니까? 쇠줄의 무게는 배가 적어도 10척 정도가 와이어에

걸리더라 해도 장력이 유지 될 수 있는 무게를 계산해 보니까 한 4톤 정도 됩니다. 전체 쇠줄의 길이가 4톤..."


무게 4톤의 쇠사슬이면 60여명에서 100여명의 인력이 충분히 감아올릴 수 있는 무게다. 수중 철쇄는 바로 진도대교가 있는 자리. 폭이 가장 좁은 이곳에 걸었을 것이다. 양쪽에 막게를 박아 놓고 쇠줄은 물 아래에 잠기게 숨겨 놓고 일본 수군을 기다리는 것이다. 어란진에서 출발한 333척의 일본 대선단은 우수영으로 흐르는 밀물을 타고 빠른 속도로 울돌목에 들어선다. 거침없이 몰려오던 일본 전선들은 생각지도 않은 철쇄에 걸려 차곡차곡 쌓이며 서로 부딪혀 여지없이 깨진다.


오후 1시경 밀물이 끝나는 시간에 물길이 정지한다. 그러나 일본 수군들은 좁은 수로에 갇혀 오도 가도 못한 채 혼란에 빠져 있다. 이때 조선 수군이 전진하며 각종 화포를 빗발같이 쏘면서 맹렬한 공격을 가한다. 다시 썰물이 되는 순간 정지됐던 물길이 거꾸로 바뀌어 일본 수군 쪽으로 빠르게 흐른다. 유리하던 조류마저 불리해지자 일본 수군은 극도로 사기가 떨어진다. 조선 함선은 떠내려가는 일본 수군을 화포를 쏘며 추격해, 완전 섬멸해 버린다. 쇠사슬과 울돌목의 물길을 이용한 이 작전으로 일본 수군은 손도 써 보지 못하고 전멸하고 조선 수군은 단한척의 피해도 없이 대승을 거둔다. 한순간 빼앗겼던 조선의 제해권을 되찾게 한 값진 전투, 이것이 바로 명량해전 그 빛나는 승리인 것이다.



세계 해전사상 유례가 없는 명량 해전은 바로 이렇게 이순신 탄생했습니다. 막강한 화력과 뛰어난 전투력을 갖춘 판옥선, 명량이라는 해협의 조건, 이런 요소들을 잘 활용할 줄 알았던 뛰어난 전략가였던 이순신장군의 전략과 전술이 있었기에 이 명량 해전은 이길 수밖에 없는 그런 전쟁이었던 것입니다. 1905년 러시아의 함대를 궤멸시켰던 일본의 영웅 도고 제독은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습니다.


"나를 영국의 넬슨 제독과는 비교해도 좋습니다. 그러나 조선의 이순신 장군과는 견줄 수가 없습니다. 이 도고가 다시 태어난다고 해도 이순신 장군은 따라 갈수가 없습니다."


일본인들에게는 전쟁의 신으로 숭상 받았던 세계적인 해군 제독 도고가 했던 말입니다. 왜 수군이 필요한지, 또 전쟁에서 수군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 조차 알지 못했던 이 당시의 편협한 사고 아래서, 이순신 장군만이 바다의 중요성을 알았고, 또 수군을 절묘하게 운용할 줄 알았던 것입니다. 해역 분할을 놓고 이권을 챙기기 위해서 한국과 일본 중국 3국의 각축전이 벌어지고 있는 중요한 이 시점에서 지금 우리는 바다의 중요성을 잊고 있는지는 아닐는지요.


 

 

※ 저작권은 KBS <역사스페셜>에 있습니다. 상업적인 용도는 금합니다. 역사적 상식을 늘리기 위한 것이므로 꼭 이점 명심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한국사를 사랑하는 대한민국이여 영원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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