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연의 비상한 필법과 빠른 시상에 놀란 훈장은 마음을 가다듬고 다시 한 번 읽고는 병연을 쳐다보며 칭찬에 말을 잊지 않았다.
"정말 달필입니다."
"뭘요. 좀 전에 학동들이 만지작거리는 것을 보고 생각나는 대로 써본 글입니다."
훈장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말하는 병연을 바라보며 시상도 시상이려니와 그가 쓴 글의 필법이 고아하고 능숙한 필체를 보았을 때 학문과 시문이 보통이 아님을 직감했다.
"지금 선비께선 한성으로 가는 길인가요?"
"아닙니다. 지금 한성에서 떠나 살고 있는 평창으로 가는 길입니다."
"평창이라면 부지런히 걸어도 이삼 일은 더 걸어야겠군요."
훈장은 잠시 병연의 표정을 살피다가 말을 이었다.
"오늘도 많이 걸었소이다. 오늘은 우리 집에서 쉬고 내일 떠나십시오."
"하지만 초면에 어찌 폐를 끼치오리까."
"원 별말씀을, 시나 한수 더 가르쳐 주시고 시문에 대해서 논해 봅시다."
훈장은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안채로 들어가자고 한다.
이에 병연은 마지못해 일어나는 척 하지만, 딱히 오늘 밤의 잠자리를 어디서든 물색해야 하니까 은근히 고맙기만 했다.
병연은 훈장을 따라 긴 담장의 대문을 들어서니 집 우측으로 조성되어 있는 연못 위쪽에는 두 아름이 넘는 느티나무가 있는데, 속이 댓속같이 비어 동남으로 비스듬히 선채 봄을 맞아 몇 가지만 한쪽으로 검푸른 잎이 나있어 처참하기가 이를데 없었다.
"여기 서있는 느티나무가 우리 집 가보인 셈이랍니다. 천년이 넘은 고목인데 속은 텅 비었어도 새잎이 돋아나니 생명력이 대단하지요. 이 고목나무가 팔백년은 성장하다가 이백년은 서서히 사양(斜陽)길로 기우나 봅니다."
석양빛이 드리운 고목의 그림자가 연못의 깊은 물속에 누어있어 마치 용이 물속에서 승천하려는 듯 그림자의 위용이 음산했다.
병연과 훈장이 사랑방으로 들자 곧이어 저녁밥상이 들어왔다.
진수성찬이었다.
반주를 몇 잔 곁들인 병연이 저녁상을 물리고 나서 붓을 찾으니 훈장은 잽싸게 먹과 붓, 종이를 가져다 그의 앞에 놓았다.
그는 붓을 잡고 먹물을 듬뿍 찍고는 화선지에 고목(古木)이라 쓰고 거침없이 시를 써 내려갔다.
古木千年枝二三
天然悽愴向東南
老去中心通似竹
春來一面碧如藍
魂依烏鵲長留壑
影作蛟龍半在潭
平生風雨多經過
一不回首說苦甘
천년이나 묶은 고목의 가지는 겨우 두 세개
처참한 모습이 동남을 향해 섰구나.
늙은 나무속은 댓속같이 비어 있고
봄이 왔어도 반쪽만 검푸르구나.
혼은 까막까치와 함께 구렁에 머물고
용처럼 서린 그림자 연못 속에 음산히 누었네.
평생 비바람을 수많게 겪어 왔으련만
지난날의 괴로움 한마디도 말하지 않는구나.
병연은 단숨에 시 한 수를 쓰고 붓을 내려놓았다.
이 시는 조금 전에 보았던 고목이 아닌가.
그를 지켜본 훈장은 병연의 시상과 필체에 놀라 혀를 내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