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의 숙제 / 박선애
그날 나는 맞은편 옆자리에 앉은 박 선생님과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분이 말씀하시고 내가 듣고 있는 순간을 앞자리의 맹 선생님이 살짝 찍으셨다. 정수리 부분은 자르고 이마부터 어깻죽지까지로 화면이 꽉 차게 가까이 찍어서 큰 얼굴을 감추지 못한 데다 피부결까지 다 보여서 약간 민망한 면도 있다. 그러나 사진기를 의식하지 못해 듣는 데 집중한 왼쪽 옆얼굴이 자연스럽다. 눈빛이 제법 살아 있고, 옆에서 본 콧날은 오뚝하고, 꼭 다문 입술 선은 또렷해서 야무진 인상이다. 깊은 생각에 잠긴 듯한 얼굴이 이지적으로 보여 꽤 마음에 든다. 맹 선생님은 책날개에 넣을 사진이 준비됐으니 글을 쓰라고 하셨다. 어느새 20여 년이 흘렀지만 그 사진은 맹 선생님이 바라던 자리로 찾아가지 못했다.
맹 선생님은 그 학교를 마지막으로 정년 퇴임하실 분이었다. 예순이 넘으셨는데도 가르치고 배우는 데 열정이 넘쳤다. 그 무렵에 개인용 컴퓨터가 보급되고 인터넷을 쓸 수 있었다. 맹 선생님은 컴퓨터를 잘했다. 전 근무지에서 몰라서 물어 보면 친절하게 대답해 주지 않는 젊은 교사 때문에 속상해서 혼자 공부했다고 하면서 우리에게는 자청해서 가르쳐 주려고 하셨다. 컴퓨터와 같은 시기에 등장한 것이 디지털카메라였다. 맹 선생님은 그것을 발 빠르게 준비해서 학생의 활동 장면, 수업 결과물 등을 담았다. 학부모와 이야기하다가, 아이들과 놀고 있다가, 동료들과 어울리다가 나도 모르게 찍힌 사진을 불쑥 내밀곤 했다.
휴대전화의 카메라 기능이 좋아지면서 수업이나 학급 운영에 사진을 활용하는 선생님이 많다. 어제 간 체험 학습 장소에서 아이들은 가을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풍경 사진을 열심히 찾아 찍어서 자랑삼아 보여 주었다. 다섯 장을 준비하는 게 미술 선생님이 내준 숙제라고 했다. 부지런한 담임들은 1년 동안 사진을 모아서 학년말에 사진첩을 만들어 주기도 한다. 나는 이런 일에 재주가 없다. 천성이 둔해서 좋은 장면에도 감탄만 하고 있지 얼른 움직여 찍을 생각을 못한다. 거기다 게으르다. 여행 가서 사진을 찍어와도 정리하는 것을 차일피일하다 그대로 방치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다. 시간이 지나면 어디에서 찍은 것인지 기억도 희미하다. 그래서 사진 찍는 데 신경 쓰지 말고 그 순간 잘 보고 느끼는 데 집중하기로 했다.
그런데 올해는 내 재능이나 의지와 상관없이 열심히 사진을 찍어야 할 처지에 놓였다. 졸업 앨범을 만드는 것도 3학년 담임이 할 일이다. 다른 학교에서는 사진관을 선정하고 협조만 해 주면 된다. 사진관에서 찍는 상반신 인물 사진, 개인 전신사진, 모둠 사진, 학급 단체 사진에다가 학교 행사 사진 몇 장이면 한 권이 된다. 우리는 학생 수가 적어 그런 것만으로는 지면을 몇 장밖에 못 채운다. 또 우리 학교의 특색인 다양한 체험 학습에서 열심히 활동한 모습을 남겨 줘야 한다. 올해의 담임 업무 중에서 가장 부담스러운 일이다. 어떤 때는 구경만 하다가 잊어버려서 때를 놓친다. 활동하는 자연스러운 모습을 찍어야 하는데 그 순간을 잡기가 어렵다. 사춘기 아이들은 얼굴을 돌리거나 가리면서 잘 도와주지를 않는다. 이래저래 힘이 든다. 그래도 열심히 해야 한다. 되는 대로 찍어 놓아 같은 장면도 많으니 골라야 한다. 할 일이 많다.
오늘은 독서 동아리 아이들과 함께 목포 독립 서점 순례를 했다. 두 곳의 작은 책방에서 책장을 넘기며 살펴 고르고, 군데군데 놓인 작은 의자에 앉거나 벽에 기대 읽고 있는 모습이 예쁘다. 책상에 앉아 그림을 그리고 색칠하며 자신만의 엽서를 만들고 있는 것도 놓칠 수 없다. 카페에서 차 마시며 책 읽고 이야기 나누는 아름다운 아이들을 휴대전화에 들여놓았다. 오늘은 숙제를 조금 잘한 것 같다.
첫댓글 책날개에 넣을 사진까지 찍어 두고서는 여즉 책을 안 내시다니요?
그건직무유기네요.
학생들에게 의미 있는 졸업 사진을 만들어 줄 수 있겠네요. 하지만 선생님들의 부담이 많겠어요. 사진 고르는 작업도 만만치 않을 텐데요.
책 날개가 어떻게 쓰여질지 궁금합니다. 언능 보여 주세요.
아이들에게 좋은 추억이 담긴 앨범이 되겠네요. 이렇게 글로도 남겨 두셔서 사진에 감정이 담길 듯 하네요.
박선애 선생님을 담임으로 만난 건 아이들의 행운일 것입니다.
하하. '천성이 둔해서'라는 말이 너무 와닿네요. 저도 그러거든요. 저도 후딱 몸을 못 움직여요. 사진도 잘 안 찍고요.
제자들 사진을 모아 두었다가 학년말에 동영상을 만들어 주면 좋을 것 같아요.
어플을 이용하면 쉽게 만들 수 있거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