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W.A:son Grebst 는 스웨덴의 新聞記者다.
1904년 러일전쟁을 취재하기 위해 도쿄에 온 그렙스트는 일본이 한반도 취재를 금지하자, 영국인 貿易商으로 위장하여 입국했다.
1904-1905년초까지 한국을 여행한후 1912년 스웨덴에서 이 책을 펴냈다.
본명은 William Andersson Grebst이고 아손 그렙스트는 筆名이다.
2.
본문을 일부 요약한 내용이다.
코레아 海岸線부근의 모든 漁業이 수지가 맞는 만큼 고기잡이 어부들의 收入도 아주 좋은 편이다.---코레아에 풍부한 어장이 있는 것과 코레아인의 생선수요가 높은 것에 德을 보는것은 부지런한 中國人이나 日本人이다.
이 밖에도 맛좋고 영양가 높은 생선으로 상어와 오징어를 친다.
코레아 사람이 쌀을 얼마나 중요시하고 農夫를 얼마나 숭상하는지는 趙太后(신정왕후 조씨)의 가까운 친척이 되는 한 늙고 돈 많은 官吏에 관한 이야기로 짐작할 수 있다.
어느 날 손님 중 하나가, 그 官吏가 식사를 할때 밥 그릇속의 마지막 밥알 하나까지 남기지 않고 먹어치우는 것을 유심히 보고 다음과 같이 물었다.
"당신처럼 부자라면 밥알 하나 정도는 남겨도 괜찮지 않습니까?" 그러자 관리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옳지 않은 말씀이요. 이 밥알 하나를 위해 거의 모든 우리나라 사람이 1년중 7달을 땀 흘리고 있소. 우리가밥알 하나라도 소홀히 한다면 그들의 땀과 勞苦를 무시하는 처사가 아니겠소?“
코레아 사람들은 쌀 다음으로 주로 채소를 가꾸는 데 정성을 쏟는다.
콩 종류만 해도 20가지가 넘는데, 소위 잠두콩이 가장 많이 재배된다. 과일도 그 종류에 관계없이 대량으로소비된다.
그 다음으로 귀하게 쳐주는것이 옥수수인데, 그것을 빻아서 쓰거나 엿기름,설탕, 시럽 그리고 여러 종류의 약품에 대한 원료로 쓰인다.
純明孝皇后 閔氏 太子妃의 장례식은 어디다가 견줄데가 없을 만큼 화려하고 장엄했다. 서구인들로서는 감히 흉내도 낼 수없는 것이었다.
그때 내눈앞에 펼쳐진 한 폭의 그림은 아마 죽을때까지 잊을 수 없으리라. 아무리 비용이 많이 든 가면무도회라 할지라도 여기에는 비할 바가 못 되었다.한마디로 말해 웅장했다. 눈이 부셨다.
東洋의 찬란함이요, 아낌없는 풍성함이었다.
내 두눈을 도무지 믿을 수가 없어서 내가 혹시 꿈을 꾸고 있는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살아 생전에 이런 진경을 다시는 볼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뒤에 내시들이 따랐는데, 그 수가 500명을 넘었고 말을 타거나 걸어서 행진했다.
드디어 흰색과 빨간색으로 꾸며진 진짜 태자비의 관이 따랐다. 棺은 150명쯤 되는 장정들이 어깨에 메고 있는 상여 안에 놓여 있었다.----약60명의 壯丁이 밧줄을 어깨에 걸치고 喪輿를 운반해 나갔다.
3.
가장 많이 재배되었다는 잠두콩에 대해 알아보자.
잠두 Fava Bean
누에콩, 작두콩, 마마콩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는 잠두는 단백질과 식이섬유, 비타민과 무기질이 고루 들어있는 영양가 높은 콩류이다. 어린 잠두부터 완숙 종자까지 다양하게 활용할 수 있다.
잠두는 북아프리카와 남서 아시아가 원산지이다.
현재 전 세계 총생산량의 약 70%가 중국에서 생산되고 있다.
우리나라에는 1970년대 후반부터 제주도와 전남 남부 해안지역에서 재배되기 시작했으며, 1994년부터 남해와 사천지역에서 일본과의 계약재배를 계기로 점차 알려지고 있다. 어린 잠두는 주로 채소처럼 이용하며 완숙 종자는 제분, 제과, 통조림용으로 가공한다. 중국에서는 당면, 과자, 된장, 튀김용으로 사용하고 일본에서는 찜, 과자, 조림, 볶음 등으로 이용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작두콩[Sword bean]
열대아시아, 아프리카, 인도 열대지방 등을 원산으로 둔 콩과의 덩굴성 한해살이풀로 식용 및 약용으로 재배된다. 콩깍지의 생김새가 작두와 닮았다하여 작두콩이라 하며, 도두(刀豆)라고도 한다.
고려시대의 왕실에서 약재와 식품으로 활용되었으나, 6·25 전쟁 이후로는 볼 수 없었던 식물이다.
이러한 작두콩이 국내에서 다시 재배된 것은 1990년대 말로 충청북도가 중국 헤이룽장성과 맺은 자매결연을 통해 작두콩을 선물 받으면서 국내에 종자가 보급된 것이 계기였다. 이후 국내에서 본격적으로 작두콩 재배를 시작하였으며, 최근 그 효능이 국내에 알려지면서 점차 재배가 활성화 되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현 반도에서는 1990년 넘어서 알려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1904년 조선에 왔던 아손 크렙스트 기자는 당시 대륙조선에 엄청나게 생산,소비되던 잠두콩을 보고 기록으로 남겨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1904년의 조선은 대륙에 있었던 것임을 반증해 주는 것이다.
4.
純明孝皇后 閔氏 太子妃(순명효황후 민씨 태자비)의 장례식에 따라간 내시 숫자가 500명이라 기록하고 있다.
經國大典(경국대전)의 당시 내반원의 내시는 140명으로 기록하고 있다. 조선사 편수회는 경국대전을 이렇게 교열한 것이다.
大典通編(대전통편)은 정조때 편찬된 것으로 당시 출입번 내시가 총 154명이라 기록하고 있고, 장기간 궁궐에 머물며 근무하는 장번내시는 정해진 수가 없다고 했다.
장례식에 따라간 내시가 500명이상이면, 궁궐에 남아 있는 皇帝(황제)를 모시고 있던 내시는 몇 명이었을까? 상식적으로 1천명~1천5백명정도였음을 미루어 유추할 수가 있을 것이다.
구한말 이방인들의 기록은 우리가 백두산을 찾을수 있게 해주었고, 조선이 정확히 1926년이전 대륙에 존재했었음을 가장 명확히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대륙조선의 반도강제이주의 역사는 비교고증과 논증을 통해 정밀하게 분석해 가야 하는 것이다.
스웨덴기자,아손100년전 한국을 가다
출판사 :책과함께
출판년도 :2005년
2019.05.15. 松溪(송계)
첫댓글 근현대사에서 바라보는 옛 조선의 모습을 담은 사진이나 기록을 볼 때마다 늘 불행한 "조선"의 모습이 안타깝게 느껴지곤 합니다.
비록 늦었지만 그 진실의 모습이 하나 하나 밝혀지는데 조금이나마 위안을 갖곤 합니다.
좋은 내용과
알지 못했던 여러 정보들을 게재해 주시는 "송계"님께 감사드립니다.
개인적인 일이 있어 며칠동안 카페에 자주 접속치 못했습니다.
감사드리며, 늘 건강하시길 빕니다.
구한말 조선을 다녀간, 헐버트나 알렌,그리고 조선미술사라는 통사를 세계최초로 발간한 독일인 신부 에카르트의 기록은 1926년까지 조선이 대륙에 명확히 존재했음을 기록으로 남기고 있습니다. 특히 에카르트는 순종(혹은 고종)의 능의 봉분높이가 12-15m에 이르렀음을 기록으로 남기고 있으며, 알렌은 민비의 陵크기가 120만평에 봉분높이가 또한 12-15m에 이른다고 기록해 우리에게 알리고 있습니다. 분명 반도에는 존재하지 않고 있는 것이며, 이를 통해 1926년1월1일 조선총독부가 반도광화문에 준공됨으로서 조선이라는 정치체제가 완벽히 반도로 옮겨졌음을 명확히 알수가 있는것 같습니다.
이러한 분위기는 1918년 토지조사사업이 완료된 시점부터 무르익었고, 1차 이주의시작과 더불어, 한용운의 님의침묵,김소월의 초혼, 박종화의 사의 찬미, 이원수의 고향의 봄., 이은상의 가고파 등등의 슬픔이 터져나오면서 조국을 잃고 반도로 쫒겨오는 비애를 시로 남겨놓은것으로 보입니다. 노산선생이 다시는 갈수없는 대륙 장강가의 고향 마산을 그리워한 가고파의 내막을 아는 이 ..이 반도땅에 몇이나 있을런지 가슴이 쓰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