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하인드 스토리] 왕희지 편: 제3회 즉흥적으로 <난정집서>를 쓰다
(사진설명: 왕희지의 작품)
제3회 즉흥적으로 <난정집서>를 쓰다
왕헌지가 신안(新安) 공주와 혼인하면서 왕씨 가문은 황실의 친척이 되었다. 하지만 왕희지가 더는 벼슬을 하지 않겠다고 맹세한 원인으로 조정은 왕희지에게 벼슬을 주지 않았다. 왕희지는 그로부터 오군(吳郡), 회계군의 명사들과 함께 산천을 유람하고 현학을 담론하며 가끔 그물로 새를 잡거나 낚시로 물고기를 낚기도 하며 여유롭고 만족스러운 삶을 이어갔다.
그러던 어느 날, 왕희지는 “산음(山陰)의 길을 걸으니 아름다운 산천이 앞다투어 다가와 미처 보지 못하겠더라구요”하던 아들 헌지의 말을 상기하고 홀로 산음현에 가서 난정(蘭亭)을 둘러보았다. 난저산(蘭渚山)은 여전히 푸르고 그림처럼 밝았으며 산 기슭의 난정을 감싸고 흐르는 시냇물은 여전히 굽이지며 맑았다. 또 바람도 여전히 시냇물 기슭의 소나무 숲과 대숲을 스쳐 지나며 노래를 불렀다. 왕희지는 저도 모르게 몇 년 전에 여러 지인들과 이 곳 물가에서 제를 올리고 곡수유상(曲水流觴)을 즐기며 술을 마시고 시를 짓던 즐거운 그 때를 떠올렸다…
3월 상사일(上巳日)에 나는 사안(謝安)과 사만(謝萬), 손작(孫綽) 등 지인들, 그리고 나의 몇몇 아들들과 교외의 난정(蘭亭)에서 모임을 가지기로 약속했다. 물가에서 제를 올리고 풀에 물을 묻혀 몸에 뿌리고 아들들은 시냇물에 머리를 감고 얼굴을 씻으며 봄날을 만끽하고자 하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다. 이렇게 하면 신령의 보우를 받아 한 해 동안 건강하며 1년의 불길함을 피할 수 있다. 이는 해마다 상사일에 반드시 행하는 의식이 아닌가.
그날 날씨가 유난히 좋았다. 봄바람이 산들산들 불어오고 봄볕이 따스했다. 모임에 참석하러 온 지인들이 아주 많아 내 아들들인 헌지(獻之)와 응지(凝之), 환지(渙之), 현지(玄之)까지 합치니 도합 41명이나 되었다. 물가에서 제를 올린 후 모두들 꼬불꼬불한 시냇물의 양쪽에 줄지어 앉았다. 서동(書童)이 유칠(油漆)한 술잔, 즉 우상(羽觴)을 시냇물에 띄워 물결을 따라 흐르게 했다. 우상이라고 하는 그 술잔이 누구의 앞에 멈추면 그 사람이 시를 지어야 하고 시를 짓지 못하면 벌주 세 잔을 마셔야 했다. 문인들의 좋아하는 모임인 곡수유상(曲水流觴)은 참으로 고귀하고 우아해서 모두들 술잔을 들거나 시를 읊거나 하며 신나게 즐겼다.
헌지는 임기응변의 재치가 없어서 시를 짓지 못해 벌주 세 잔을 마셨다. 손작이 이를 웃었다.
“오의항의 도련님이 시를 짓지 못하다니.”
헌지가 불복했다.
“저는 어리잖아요. 어르신들도 시를 짓지 못한 분이 열 분이 넘는데요.”
헌지의 말에 모두들 통쾌하게 웃었다. 벌주를 마신 명사들은 술에 취한 체하며 들어도 못 들은 척 했으나 얼굴은 술을 마셨을 때보다도 더 붉어졌다.
헌지가 한 말은 사실이었다. 모임에 참석한 41명 중 11명이 시 2수를 지었고 15명이 시 1수를 지었으며 헌지를 망라해 나머지 사람들은 시를 짓지 못해 대신 술을 많이 마셨다.
곡수유상 시회(詩會)가 끝난 후 나는 모두를 위해 난정에서 연회를 마련했으며 37수의 시를 모아 <난정집(蘭亭集)>이라는 시집을 펴낼 생각을 했다.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입을 모았다.
“일소(逸少) 형은 이번 난정 모임을 주도했고 또 서예가이니 이 <난정집>에 손수 서문을 써서 우리의 이번 모임을 기록하여 기념해야지 않겠소.”
그 말에 나도 이 일이 당연하게 나의 책임이라고 여겨 주흥을 빌어 잠란지를 펴놓은 다음 헌지가 내미는 붓을 받아 즉석에서 일필휘지하여 도합 324자의 <난정집서(蘭亭集序)>를 썼다. 당시 시흥이 도도하고 열정이 넘쳐서인지 나는 거침 없이 써내려 갔다. 서문 중에 스무 개가 넘는 갈 지(之)자가 있었는데 모두 모양이 달라 똑 같이 쓴 지(之)자가 하나도 없었다. 이 서문은 모두의 칭찬을 받았다. 그 후 나는 몇 차례나 이 서문을 다시 썼는데 아무리 해도 당시의 기개와 힘을 보여줄 수 없었다. 그리고 이 몇 년 동안 쓴 작품들 중에도 이 <난정집서>를 초과한 작품이 하나도 없다. 아마 이 서문은 그 번 난정모임에서 내가 얻은 가장 큰 수확이리라. 많은 사람들은 그 서문이 용이 천문(天門)을 날아 넘는 듯 날렵하고, 호랑이가 엎드려 있고 봉황이 깃을 튼 듯 고요하다고 말했다. 또 이 서문의 서체는 예서(隸書)체를 벗어나 아름답고 화려하며 변화 많고 거침 없는 새로운 서체를 만들었다고도 말했지…
지난 날을 떠올리며 왕희지는 더없이 흐뭇해서 자신이 <난정집서>와 같은 행서(行書) 서체의 작품을 남겼으니 조상과 부모에게 부끄럽지 않다고 생각했다.
아마도 왕희지는 이 <난정집서>가 시간이 흐를수록 명성이 더욱 자자하게 되리라는 것을 몰랐을 것이다. 후세에 이 작품은 필법이 극히 완벽하고 붓이 닿는 곳마다 용이 구름 속을 날아 다니는 듯 아름답고 거침이 없어 “천하 제일의 행서”서체라는 높은 평가를 받았다. 당태종(唐太宗)은 특히 이 작품이 완벽하다고 여기며 생명처럼 아꼈다. 그는 심지어 자신의 사후 이 <난정집서>를 함께 무덤에 묻으라는 유언까지 남겼다. 그리고 그 뒤에, 물론 뒷이야기지만 이 희세의 보물은 소릉(昭陵)에 묻혀 역사적으로 가장 유명한 제왕의 부장품이 되었다.
왕희지가 난정을 내려와 도관(道觀)을 지나는데 갑자기 어디선가 거위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가 평생 가장 좋아하는 동물이 바로 하얀 거위이다. 그것은 거위의 모양이 우아하고 고귀하며 물에서 헤엄치는 모양이 여유롭고 자유스럽기 때문이다. 왕희지가 보기에 거위가 빨간 두 발로 물을 가르는 모양은 글을 쓸 때 붓을 힘있게 움직이는 것과 같았다. 그리고 거위의 울음소리도 노래하는 듯 유난히 듣기 좋았다.
왕희지가 서두르며 도관에 들어서니 한 쌍의 하얀 거위가 마당에서 물놀이를 하며 가끔 긴 목을 펴서 하늘을 바라보며 노래도 부르는 모양이 심히 사랑스러웠다. 왕희지가 경당(經堂)에 들어서니 한 도사(道士)가 노자(老子)의 <도덕경(道德經)>을 필사하고 있었다.
왕희지가 읍하고 말했다.
“도사님, 저는 회계의 왕희지입니다. 마당에 있는 저 거위 두 마리를 사고 싶은데 얼마 드리면 되겠습니까?”
왕희지가 찾아온 뜻밖의 기쁨에 그 도사는 급히 대답했다.
“나리께서 저를 도와 <도덕경>을 필사해주시면 저 거위 두 마리를 선물로 드리겠습니다!”
도사의 말에 왕희지는 두말 않고 종이를 가져다가 펴놓고 흔연히 붓을 날리기 시작했다. 왕희자가 <도덕경> 필사를 마치니 하늘에는 벌써 석양이 비꼈다. 왕희지는 수종더러 거위를 마차에 싣게 하고 즐거운 심정으로 집으로 향했다.
(다음 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