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과 우정
1988년 11월 늦가을 해가 일찍 저물었다. 서울 연희동 사저에서 전두환이 청와대 주인 노태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대통령에게 직접 확인하고 싶네. 나를 백담사로 보내는 게 이녁의 뜻이 맞는가?" 노태우가 말했다. "신변을 지켜주지 못해 부끄럽네. 어쩔 수 없는 상황이니 잠시 고생하면 원상으로 돌리겠네." 이튿날 전두환은 비리를 속죄하고 재산을 헌납한다는 성명서를 읽었다. 그리고 집 앞에서 백담사행 서울 2두 6759 승용차에 몸을 실었다.
인제군 용대리 52연대에서 군 복무하던 시절이 떠오른다. 백담사 수색 정찰을 3년 다녔다. 비포장 버스길에서 다시 좁은 흙길을 구불구불 이십리쯤 들어가야 했다. 전깃불은 고사하고 변변한 화장실·목욕실도 없던 곳이다. 거기서 전두환은 와신상담, 섶에 눕고 쓸개를 씹듯 한마디를 남겼다. "우리 집안에 제사 지낼 사람이 하나도 남지 않고 다 갇혀버렸어." 노태우는 "가슴이 쓰라렸다"고 했다. 그러나 둘 사이는 결정적으로 틀어진 뒤였다.
노태우는 금이 간 우정을 안타까워했지만 회고록엔 명확히 썼다. '그가 동생 전경환을 새마을운동 회장에 앉힌 것은 잘못됐다. 장인 이규동 옹에게 대한노인회 회장을 맡긴 것도 현명하지 못했다.' 전·노 둘은 육사 동기다. 함께 군문(軍門)에 발을 들였고, 노 대위 결혼식 땐 전 대위가 사회를 봤다. 미국 특수전 유학을 갔을 때도 둘은 샤워실·화장실을 같이 썼다. 그러나 올림픽이 끝나고 몰아친 '5공 청산' 바람이 한 사람을 백담사로 내몰았다.
둘은 이제 팔십을 훌쩍 넘긴 노인이 됐다. 엊그제 전 전 대통령이 투병 중인 노 전 대통령을 이틀이나 찾아가 문병했다. 걸어서 5분도 안 걸리는 한동네에 살았지만 친구가 친구 집을 들르기까지 또 다른 세월 한 토막이 필요했다. 병을 앓는 친구는 친구가 찾아와도 침대에서 몸을 세우지도 못했다. 친구가 말을 걸었다. "이 사람아, 날 알아보시겠는가." 병상의 친구는 부인이 말 심부름을 하자 겨우 눈꺼풀을 깜박였다.
'대리석과 권력은 차갑고, 딱딱하고, 매끄럽다.' 중국 속담이다. '5공 전두환'은 "왜 나를 백담사로 내쫓았나?" 묻고, '6공 노태우'는 "세상이 변해 대통령도 어쩔 수 없었다네" 했을까. 신파극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를 두 사람 버전으로 바꾸면 '권력에 취하고 우정에 울고'다. 권력이라는 대리석은 우정이라는 공을 차갑게 튕겨낸다. 병상에 누운 친구의 눈꺼풀이 말했을 것 같다. "이 사람아, 권력의 비정함을 이제 알겠는가."
한강의 '인어공주'
스웨덴 연수 시절 이웃 나라 덴마크를 여행했다. 열 살 아들은 걸리고, 20개월 된 딸은 유모차에 태워 레고랜드가 있는 빌룬트, 안데르센 고향인 오덴세를 거쳐 수도 코펜하겐까지 기차와 버스를 갈아타며 돌았다. 아이들은 수백만 개 레고 조각이 꿈의 동산을 이룬 레고랜드에 열광했지만, 동화작가가 꿈인 기자 엄마는 안데르센이 살았던 오덴세에 매료됐다. 매부리코 안데르센 동상이 손님을 맞는 호텔, 육필 원고와 책상, 여행 가방이 놓여 있던 박물관도 좋았지만 그가 곤궁한 유년기를 보낸 생가(生家), 구두 수선공 아버지의 손때가 아직 남아 있는 연장들 앞에서 가슴이 뭉클했다.
코펜하겐에서는 인어공주 동상부터 찾았다. 안데르센 대표작 인어공주를 표현한 조형물이다. 키 80㎝밖에 안 되는 이 동상을 보려고 한 해 150만 명 관광객이 몰려온다고 했다. 코펜하겐 중앙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외스터포트역에 내린 뒤 동상이 있는 해변까지 걷고 또 걸었다. 길 물을 때마다 사람들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바닷가에 도착하고서야 그 이유를 알았다. 바다에 인어공주가 없었다. '2010 중국 상하이 엑스포'에 초청돼 '잠시 출타 중'이라고 했다. 허탈해 눈물이 다 났다.
그날 못 본 인어공주를 서울 한강에서 보게 됐다. 인어공주를 그대로 본뜬 동상을 코펜하겐시(市)가 제작해 서울시로 보낸단다. 서울시는 보신각 종이나 신문고로 보답할 계획이다. 안데르센 공원도 조성된다. 덴마크 전문가가 설계한 안데르센 동상과 캐릭터 조형물, 놀이기구가 들어선단다. 아이들과 가볼 곳이 늘어 우선은 반갑다.
'한강의 인어공주'는 과연 감동을 줄까. 서울숲에 선 안데르센 동상에서 아우라가 느껴질까. 이런 걱정이 없지는 않다. 사실 우리에게도 동화마을로 조성하기 딱 좋은 소재들이 많다. 멀게는 강소천의 '꿈을 찍는 사진관', 가깝게는 권정생의 '강아지똥'이 있다. 애니메이션으로도 제작돼 크게 성공한 황선미의 '마당을 나온 암탉'도 떠오른다.
스웨덴 빔메르비엔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공원이 있다. 린드그렌은 '말괄량이 삐삐' '에밀은 사고뭉치'로 유명한 이 나라 국민 작가다. 공원은 동화 속 주인공들과 배경 마을을 실물로 재현해 마치 동화 나라를 걷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에버랜드나 디즈니랜드처럼 요란한 놀이기구 하나 없지만, 수도 스톡홀름에서 기차로 4시간 떨어진 이 시골 마을은 아이를 동반한 유럽 관광객들의 필수 여행 코스가 됐다. 우리는 언제쯤 세계인이 몰려오는 한국 고유의 동화 마을을 만들 수 있을까.
- 조선일보 만물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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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잘 읽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