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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 마태복음 22:1-14
오늘 말씀은 구원을 받지 못하는 이유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오늘 말씀에는 인생들을 천국 잔치에 초청하시는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또 이 초청을 거절한 자들이 받게 될 심판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독생자를 허락하시기까지 우리를 위해 놀라운 구원의 잔치를 준비하시고 간절하고 안타까운 마음으로 우리를 초청하십니다. "내가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구원의 잔치에 오소서!" 그런데 왜 우리는 구원을 받지 못하는 것일까요? 이 시간 우리를 초청하시는 하나님의 초청을 알고 기쁨으로 받아들이고 응함으로 구원의 은혜를 받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첫째. 혼인 잔치에 청함을 거절하였기 때문입니다.(1-7)
예수께서 다시 비유로 대답하셨습니다. 이는 21장 말씀을 배경으로 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종교 지도자들의 완악한 마음을 깨우쳐 주시기 위해 포도원 농부의 비유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회개하지 않기로 결심을 했는지 여전히 완고하였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다시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2절을 보면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 옛날에 어떤 임금이 있었습니다. 이 임금은 백성을 끔찍이 사랑하는 성군이었습니다. 그의 영토는 온 땅을 덮을 만큼 넓었습니다. 그런데 이 임금에게는 사랑하는 외동아들이 있었습니다. 임금에게 이 아들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사랑스러웠습니다. 임금은 아들을 불면 날아갈 세라, 누르면 꺼질 세라, 애지중지 키웠습니다. 임금은 아들을 장차 이 나라를 이끌어가야 할 지도자로 세워야 했기에 모든 배려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우선 태권도를 비롯한 유도, 승마, 검도, 봉술 등 모든 무예를 닦게 하였습니다. 거기에다가 지략을 겸비하게 하기 위하여 전 세계의 전쟁사들을 연구하게 하고 영어와 예절을 배우게 하였습니다. 뛰어난 덕성과 인격을 갖추도록 훌륭한 스승아래서 성품도 공부하도록 하였습니다. 무엇보다 임금은 신앙교육을 중요시 하여 매주 제자반 과정을 공부하게 하고 새벽기도회에도 철저하게 참석하도록 하였습니다. 황태자는 자랄수록 믿음직스럽게 성장하였습니다. 황태자는 이제 나이가 차서 결혼할 때가 되었습니다.
우선 혼인식이 열릴 예식장은 수백평의 정원이 있는 야외예식장으로 정하였습니다. 그곳에는 넓게 펼쳐진 잔디밭 사이로 시냇물이 흐르고 산책로를 따라 꽃들이 만발하였습니다. 라일락, 목련화, 진달래, 백일홍등 이름도 모를 꽃들이 아름다운 향기와 자태를 뽐내고 있었습니다. 길목마다 부페식 식당이 차려지고 각종 음료수와 음식이 비치되었습니다. 세계 각국의 진기한 궁중 요리들이 산해진미로 준비되었습니다. 그리고 1년 전부터 세계 각국과 국내의 모든 귀빈들에게 초청장을 발송하였습니다. 황태자의 결혼식은 3일간 계속되고 결혼 주간은 특별 공휴일로 선포되었습니다. 아들을 결혼시키는 임금의 마음은 정말로 행복하였습니다. 3절을 보면 임금은 초청장을 송부 받은 모든 사람들에게 사람을 보내어 모시고 오도록 하였습니다. "그 종들을 보내어 그 청한 사람들을 혼인 잔치에 오라 하였더니" 당시 혼인 잔치에 초청하는 방식은 1년 전부터 초청장을 발부한 후 결혼식이 임박해서는 구체적인 날짜와 시간과 장소를 알리고 종들을 보내어 모셔왔습니다. '그 청함을 받은 사람들'은 선택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황태자의 혼인 잔치를 위해 특별히 선택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혼인 잔치에 참여하여 모든 축복을 마음껏 누릴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이들은 이 영광된 혼인 잔치에 오기를 싫어했습니다. "오기를 싫어하거늘" 그들이 왜 오기를 싫어했을까요? 축의금이 없어서 일까요? 하필이면 고시가 임박해서 입니까? 어쨌든 그들이 임금의 초청에 오지 않는 것은 고의적인 것으로 임금에 대한 모욕이었습니다. 임금의 초청을 거절하다니! 이는 용납될 수 없는 것입니다. 보통 임금이라면 노발대발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임금은 달랐습니다. 임금은 넓은 이해심과 아량으로 다시 초청하였습니다. 이번에는 더 친절한 종들을 보내어 정중하고도 간절하게 초청을 하였습니다. "내가 오찬을 준비하되 나의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혼인 잔치에 오소서!' 임금의 초청은 참으로 간절하였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 인격적으로 정중하게 초청하였습니다. 꼭 좀 참석해서 혼인 잔치의 기쁨을 누리도록 아쉬운 소리를 하였습니다. "내가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혼인 잔치에 오소서!" 임금은 어찌하든지 이들을 초청하여 이들이 마음으로부터 기뻐하고 축복된 잔치를 누릴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랐습니다. 이 혼인 잔치는 가서 먹고 즐기기만 하면 되는 잔치였습니다. 임금은 참으로 겸손하고 온유합니다. 무엇보다 은혜와 사랑이 풍성합니다.
그런데 그들의 반응이 어떻습니까? 5,6절을 보면 그들이 돌아보지도 않고 한 사람은 자기 밭으로, 한 사람은 자기 사업장으로 가 버렸습니다. 그들은 황태자의 혼인 잔치에 대해 무관심하였습니다. 그들의 관심은 오직 자기 밭을 일구고 자기 사업을 하여 돈을 많이 버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임금의 일에는 아무 관심도 없고 가치를 두지 않았지만 자기 일에는 무한대한 관심과 가치를 두었습니다. 그들은 황태자의 혼인 잔치에 참석하는 것은 쓸데없는 일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하루 일하면 돈이 얼만데, 남들 놀 때 한푼이라도 더 벌어야지! 그들은 황태자의 혼인 잔치에는 참석하지 않기로 결심을 하였습니다. 그 남은 자들은 갈 데도 없었지만 혼인 잔치에는 안 가고자 하였습니다. 자기 가족끼리 계곡으로 몰놀이 갈 계획이 있었기 때문이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임금이 보낸 종들이 자꾸 와서 혼인 잔치에 가자고 하자 그들은 화가 났습니다. 마침내 말다툼 끝에 종들을 모욕하고 죽였습니다.
이들은 아주 완악하였습니다. 이들이 왜 이렇게 된 것입니까? 이들이 이렇게 악을 행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임금을 우습게 여기는 교만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임금에 대해서 마땅히 가져야 할 존경심과 사랑하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마땅히 임금께 드려야 할 충성과 헌신을 드리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너무 인자하고 사랑이 많은 임금의 통치를 받다 보니 임금이 있는지 없는지조차 몰랐습니다. 그들은 임금이 하는 일없이 세금만 걷어가는 사람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리고 임금은 말만 임금이지 별 것 아니라고 무시하였습니다. 그들은 임금의 왕권을 인정치 않았습니다.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7절을 보면. 임금은 노하여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한 자들을 진멸하고 그 동네를 불살라 버렸습니다. 이를 볼 때 임금이 이때까지 참은 것은 힘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에 대한 지극한 사랑 때문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비유에서 임금은 하나님을, 황태자는 예수님을, 그 종들은 선지자들을, 청함 받은 자들은 유대인(성도들)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혼인 잔치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죄사함과 구원의 역사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첫사람 아담이 범죄하였을 때부터 구원자를 이 땅에 보내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때가 되자 약속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죽은 자가운데서 살리심으로 부활의 믿음을 심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가는 곳마다 천국의 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마침내 모든 인류의 죄짐을 지시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를 대속하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삼일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죽음의 권세를 파하시고 천국의 문을 여셨습니다. 이로써 인생들을 그토록 괴롭히던 죄와 죽음의 세력이 물러가고 각종 거짓과 우상과 미신이 타파되는 새 역사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곧 생명의 역사요, 빛의 역사요, 부활의 역사였습니다. 예수님이 전파되는 곳에는 어디든지 천국 잔치가 베풀어지게 되었습니다. 이 잔치에 참석한 자들은 이제 더 이상 죄의식으로 고통하지 않습니다. 더 이상 허무와 무의미와 같은 죽음의 요소에 시달리지도 않습니다. 더 이상 슬픈 운명에 눈물을 흘리지 않아도 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보배피를 흘리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와 허물과 실수와 운명을 담당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 예수님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셔서 우리의 능력이요, 소망이 되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안에는 결코 정죄함이 없습니다 예수님 안에는 슬픔이나 절망이 없습니다. 예수님 안에는 무의미나 허무가 없습니다. 예수님 안에는 죄사함의 은혜가 있고, 영원하신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이 있고 천국의 기쁨이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는 모든 것이 분명한 의미가 있고 목적이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는 영원한 생명이 있습니다.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입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천국의 잔치는 실로 모든 것이 준비된 은혜의 잔치요, 사랑의 잔치요, 구원의 잔치요, 생명의 잔치 입니다. 이 잔치는 죄사함의 잔치요, 소망의 잔치입니다.
하나님은 이 천국 잔치를 준비하시고 유대인들을 택하여 이 잔치에 초청하셨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천국 잔치에 특별히 초대된 VIP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이 잔치에 참여할 은혜와 특권을 받은 자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들을 잊지 않고 이 천국 잔치에 오도록 여러 선지자들을 보내어 초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 잔치에 오는 것을 거부하였습니다. 그들은 비유에서 임금의 잔치에 대해 무관심한 사람처럼 예수님의 역사에 대해 무관심하였습니다. 그들은 열심히 하나님을 섬기는 것 같았지만 실상은 자기 이익에만 바쁜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주의 종들을 죽이고 또 예수님도 십자가에 못 박는 큰 악을 행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심으로 생명의 잔치는 계속 되었습니다. 그 잔치는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더욱 풍성해지고 소망이 넘치는 부활의 잔치요, 생명의 잔치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예수님을 받아 들이지 않던 사람은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A.D. 70년 로마 군대를 보내어 이스라엘을 완전히 멸망시켜 버렸습니다. 그들의 동네인 예루살렘은 철저히 파괴되었습니다. 그 후로 이스라엘은 1948년 독립하기까지 약1900년간 세계 각 나라에 흩어져서 온갖 조롱과 멸시와 천대를 받았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초청을 거절한 자에게 임한 진노의 심판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은혜와 자비가 풍성하시고 오래 참으시는 분이시지만 언제까지 참으시는 분은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죄를 심판하시는 공의로운 분이십니다.
둘째. 혼인 예복을 입지 않았기 때문입니다.(8-14)
초청받은 사람들의 거절로 인해 즐거워야 할 혼인 잔치가 심판의 잔치가 되어 버렸습니다. 혼인 잔치가 더 이상 이루어질 수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임금은 잔치를 포기하거나 연기할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임금은 잔치를 결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인간은 불신으로 인해 실패했으나 하나님은 실패치 않으셨습니다. 8,9절을 보면 임금은 종들에게 새로운 방향을 주었습니다. "혼인 잔치는 준비 되었으나 청한 사람들은 합당하지 아니하니 네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너라." 이 말씀에는 어찌하든지 혼인 잔치를 이루고자 하시는 포기치 않는 임금의 마음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사거리 길에 있는 자들은 VIP들이 아닙니다. 이들은 황태자의 혼인 잔치에 들어 올 자격이 없는 비천한 자들입니다. 대개 사거리 길에 있는 자들은 할 일이 없어 서성대는 실업자들과 또 죄를 짓고 밤거리를 헤매는 죄인들입니다. 임금은 이런 자들을 데려오라고 명하였습니다. 눅4;23절에서는 “사람들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고 명하였습니다. 임금은 잔칫집을 손님들로 가득 채워서 혼인 잔치를 성대하게 이루기를 원하였습니다.
여기서 '네거리 길'은 믿지않는 이방인들을 가리킵니다. 택한 백성 유대인들이 예수님믿기를 거절함으로써 구원의 축복이 이방인들에게로 넘어갔습니다. 이로써 구원의 문이 활짝 열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도 복음을 허락하시고 구원의 은혜를 누리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과거 사거리 길에서 갈 길 몰라 방황하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일방적으로 부르심으로 구원의 잔치에 참여하게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도 네거리길에서 방황하는 자들였으나 불러주셔서 구원의 복음을 전하는 복된 사명인의 인생을 살게 하셨습니다.
10절을 보면 "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 혼인잔치에 손님들이 가득한지라." 종들은 만나는 대로 무차별 초청하였습니다. 도덕적으로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부자나, 가난한 자나, 지위가 높은 자나 천한 자나, 백인이나 흑인이나, 정상인이나 장애자나 누구든지 초청하였습니다. 초청받은 자들 중에는 세리, 창기, 돌싱, 실업자, 생각이 복잡한 사람등등 각종 죄인들이 있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종들로부터 배울 것이 있습니다. 이는 임금의 명령에 대한 그들의 절대적인 충성심입니다. 그들이 사거리 길에 가서 시커먼 죄인들을 혼인 잔치에 초대한다는 것은 마음 내키지 않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 나름대로 생각하지 않고 임금의 명령에 절대적으로 순종했습니다. 그들은 자기 생각을 버리고, 자존심을 버리고, 또 쉬고 싶다는 생각을 버리고 임금에게 충성했습니다. 그들의 충성으로 말미암아 혼인 잔치가 이루어 질 수 있었습니다. 그들이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임금을 사랑하고 임금의 마음을 잘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한 사람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고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잘 알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충성된 동역자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이런 자들을 통해 이루어 집니다.
그런데 천국 잔치를 누리는 데에는 한 가지 요구되는 조건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예복을 입는 것이었습니다. 바티칸 성당이나 나사렛에 있는 교회당에 들어 가려면 반드시 긴 바지나 긴 치마를 입어야 한다고 합니다. 짧은 반바지나 미니스커트를 입은 자는 쫓겨납니다. 당시 결혼식장에도 반드시 예복을 입어야 했습니다.
11절을 보면. 혼인 자리에 손님이 가득 찼을 때 임금이 손을 보러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다 예복을 입었는데 이 사람은 혼자 예비군복을 입고 발에는 슬리퍼를 신고 있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풍습에는 혼인 예식을 경건하게 거행하기 위하여 입장할 때 모든 손님들에게 예복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왜 예복을 입지 않았을까요? 그는 자기 옷이 예복보다 더 좋다고 생각했는지 모릅니다. 아니면 예복을 입는 것이 귀찮았는지 모릅니다. 아니면 먹는 데만 집중하다보니 예복으로 갈아입는 것을 깜박했는지 모릅니다. 어쨌든 그가 예복을 입지 않은 것은 임금에 대한 경외심이 없는 것이요, 황태자의 혼인 잔치를 가볍게 여긴 것입니다. 이는 임금에 대한 실례요, 불순종이었습니다.
12절을 보면. 임금이 그 사람에게 물었습니다.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그러자 그가 유구무언이었습니다. 이는 입이 있지만 할 말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가 말을 못한 것을 보면 그도 잔치에 예복을 입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고의적으로 예복을 입지 않았습니다. 임금은 사환들에게 명했습니다. "그 손발을 결박하여 바깥 어두운데에 내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그는 결국 천국 잔치에서 쫓겨나 슬퍼하며 이를 갈게 되었습니다. 그는 산해진미로 차려진 음식은 못먹고 이빨만 갈게 되었습니다. 이를 볼 때 천국 잔치에 참석하려면 예복이 매우 중요함을 알 수 있습니다. 임금은 그 사람이 과거 어떤 생활을 했는가 그의 과거를 묻지 않았습니다. 임금은 그의 선악을 문제 삼지 않으시고 그가 예복을 입고 있는가 안 입고 있는가만 문제 삼으셨습니다.
그러면 예복은 무엇을 가리킵니까?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되는 것이요 중생하는 것을 의미합니다(갈2:16). 곧 예수 그리스도의 옷, 믿음의 옷을 가리킵니다(롬13:14). 우리는 이 의의 옷을 입어야만 천국에 들어가서 구원의 잔치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이 옷을 입으려면 우리에게 유익하게 여기던 것을 해로 여겨야 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희생을 본받아 십자가를 지고 전도, 양육, 섬김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때 우리는 예수님의 피의 은혜를 받게 됨으로 그분을 깊이 알게 되고 구원을 얻게 됩니다. 그 때 우리는 주님의 정결한 신부가 되어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참여하여 천국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계19:7,8)
14절을 보면 예수님은 결론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예복을 입지 않은 자는 교회는 다니지만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 종교 활동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천국 잔치에 초청을 받는 자는 많지만 구원을 받는 자는 소수입니다.
예수님은 믿음을 통하여 의의 옷을 입는 자들을 가리켜 택함을 받은 자라고 하셨습니다. 의의 옷을 입는 자들은 현재적으로 내면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됩니다. 신앙생활 하면서도 의의 옷을 입지 않으면 결코 천국의 잔치에 참여할 수 없습니다. 현재적으로 신앙생활 하는 것이 이상하게 짜증스럽고 부담스럽고 불평과 원망이 솟아납니다. 왠지 슬퍼집니다. 그러다 마지막 날에 정말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예복을 입었는가 안 입었는가는 구원과 심판이 달린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무슨 일을 많이 하고자 하기보다 먼저 의의 옷을 입고자 힘써야 겠습니다. 단순히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으면 되는 것입니다. 이 시간 우리 모두가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천국잔치에 참여하여 구원의 기쁨을 누릴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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