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북아일랜드 벨파스트 세인트 앤 성당
벨파스트 시가지 벽화를 보고 조금 더 내려가니 도로변에 높은 세인트 앤 성당이 있다. 웅장하고 장엄한 외형만으로도 그 위대함을 드러내고 있다. 성당의 크기에 따라서 이름이 다르다. 작은 손서로 1.채플, 2.처치, 3.아비, 4.캐시디럴, 5.처치캐시디럴이라 부른다. 우리가 스코틀랜드에서 본 로슬린 성당은 채플이었다. 처치 캐시디럴은 가장 큰 교회다. 벨파스트 시청 북쪽에 있다. 신교도 성당이다. 양식은 신로마네스크 양식의 건물이다. 세인트 앤성당의 동편은 Lagan 강이 있고, 그 강을 건너가면 타이타닉호를 만든 할랜드&울프 조선소가 있다. 서편은 산킬로드(Shankill road)가 있다. 신교와 구교의 거리가 있는데 산킬로드에는 주로 신교도들이 거주한다. 반대로 폴스(Falls road)에는 주로 구교도들이 거주한다. 이 두 거리는 신교도와 구교도 간의 대립되는 상황을 보여주는 상징성이 담겨 있다. 거리에는 신구교 분리장벽과 벽화도 있고 피스라인도 있다.
도시는 가톨릭 교도 아일랜드 민족주의자 구역과, 왕당파 개신교도 구역의 대조가 뚜렷하다. 서부 벨파스트에서는 주민의 90%가 가톨릭교도이며, 동부 벨파스트에서는 그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개신교도의 거주 집중도가 상당히 높다.두 구역 모두 각자를 상징하는 깃발, 정치적인 구호와
벽화가 장식되어 있다. 아일랜드(에이레)는 70.273km2의 면적에 489만 명(2015년 기준)의 인구가 거주하는 섬으로, 아일랜드 고유어인 게일어와 영어가 공용어로 쓰인다. 주민의 88%가 가톨릭 교도로, 이와 같은 종교적 배경은 아일랜드 분쟁의 핵심요소로 작용해왔다. 현재 아일랜드인의 대부분을 구성하고 있는 민족은 기원전 5세기경 이주한 켈트계로, 기원전 58년 시작된 카이사르의 침공을 통해 로마인의 압박을 받은 이후로 9세기 노르만족, 12세기 앵글로-색슨족의 침입을 꾸준히 받아왔다. 대륙의 켈트인들은 로마 압제에 굴복하여 상당히 동화되었으나, 섬에 있던 탓에 아일랜드의 켈트인들은 고유의 켈트문화를 간직할 수 있었다. 그 후 1171년 영국의 헨리 2세가 아일랜드를 침공하면서 13세기 중반까지 아일랜드의 3/4가 영국령에 속해졌다. 16세기 초 헨리 8세 시기에 영국 내에서 종교개혁이 단행되면서 아일랜드에 대한 영국의 지배는 매우 강화되었다. 아일랜드의 구교도들은 영국의 압제에 반란을 일으켰으며, 영국은 아일랜드 북부(얼스터 지방)에 개신교도들을 대거 이주시킴으로써 아일랜드 구교도들을 지배하고자 했다. 이때부터 북아일랜드 신교도 주민과 나머지 아일랜드 구교도들 간에는 갈등의 불씨가 생기기 시작했으며, 이 문제는 여전히 아일랜드 분쟁의 핵심으로 작용하고 있다.
세인트 앤 성당은 로마네스크 양식의 건축물이다. 벨파스트 대성당이라고도 하며, 도네갈가(Donegall St.)에 있다. 아일랜드 교회 소속의 성당으로서 보기 드물게 2개의 주교관구를 관할하고 있다. 성당은 1899년 9월 6일 착공하여 1904년 6월에 봉헌되었다. 1922~1924년 성가대석을 설치하였고, 1928년에는 세례당, 1932년에는 성령예배당을 추가로 지었다. 1941년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폭격으로 성당이 크게 파손되었으나, 1955년 성당 동쪽 끝에 있는 회랑 재건사업을 시작하여 1959년 완공하는 등 재건과 증축을 거듭하여 오늘날의 모습을 갖추었다. 2007년에는 ‘희망의 첨탑(Spire of Hope)’이라는 40m 높이의 스테인리스제 첨탑을 성당 꼭대기에 설치하였다. 성당 예배는 매일 행해지며, 기도는 월요일, 화요일, 목요일, 금요일, 토요일 오후 1시에 시작된다. 일요일에는 3차례의 본 예배가 열린다. 아침 이른 시간이어서 성당 주변이 고요하다. 결코 평화만이 깃든 종교건물은 아니기에 역사의 아픈 한 단면도 서려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