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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업장이 있습니다. 그 지역에선 가장 큰 규모의 사업장입니다. 수천 명의 직원이 근무하는 번듯한 회사입니다. 공장 근처에 사는 아이들의 아버지들은 대부분 그 사업장에 다니고 있습니다. 아이들은 같은 유치원을 나와 같은 초등학교를 마치고 지금은 같은 중학교에 다니고 있습니다. 같은 게임을 하고, 몸을 부딪치며 농구를 하고, 동네의 여자애들을 보면서 시시덕대곤 하였습니다. 그런데 회사가 어려움에 빠졌습니다. 경영진은 해결책으로 구조조정을 제시했고 절반 이상의 직원이 회사를 떠나야 했습니다. 그들 중 일부는 희망퇴직을 선택했지만, 적지 않은 수가 정리해고라는 운명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생각해 봅시다. 특별한 기술이 없는 40대의 노동자에게 해고는 그냥 두 글자 단어로 말하고 말 그런 간단한 일은 아닙니다. 직장은 많은 남자에게 자기 자신입니다. 가족을 책임지는 방식이고, 사람들에게 내세우는 얼굴입니다. 번듯한 직장을 다니는 사람들은 만나면 다들 명함을 내밉니다. 명함엔 이름보다 위에 직장이 쓰여 있습니다. 내밀 명함이 없더라도 어디 다닌다, 말할 수 있는 분들은 당당합니다. 이 사회에서 직장은 자기가 제법 괜찮은 사람이라고 스스로도 믿을 수 있는 근거가 됩니다.
그런 직장이 사라진 겁니다. 막막한데 위로해주는 사람도 없습니다. 이렇게 살면 된다고 도와주는 사람도 없습니다. 그냥 다 어쩔 수 없다고 합니다. 가족은 어떻게 먹여 살려야 할지 모르겠고 내가 다시 이제 번듯한 가장으로 식구들을 이끌 수 있을지, 사람들이 나라는 인간을 이제 어떻게 보게 될지 두렵습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공장을 못 떠나고 해고를 반대하는 투쟁을 하게 됩니다. 이게 공권력의 기준에서 보면 점거농성이란 불법적 행동입니다.
제가 정신과 의사로서 볼 때 사람은 기본적으로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합니다. 살림살이가 어려워지고 이해관계의 대립이 심해질수록 점점 더 그렇게 됩니다. 한 직장을 다니며 동료로 지내던 부모들이 이제 서로를 비난하기 시작합니다. 책임은 그들 중 누구에게도 없습니다. 하지만 사람 심리란 게 누군가에겐 책임을 돌려야 합니다. 그래서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상대를 비난하는 겁니다. 싸움이란 게 하다보면 점점 더 싸울 이유가 늘어납니다. 감정의 골이 깊어집니다.
이제 아이들도 둘로 갈라집니다. 죽고 못 살던 아이들끼리도 멀어집니다. 전엔 축구를 잘하는 영호, 야한 이야길 잘하는 민수였는데 이제 해고자 아빠를 둔 영호, 비해고자 아빠를 둔 민수가 되었습니다.
점거농성이 장기화되고 무노동무임금 원칙을 적용하니 비해고자들도 살림이 어려워졌습니다. 아이들은 다니던 학원을 끊어야 했고 용돈은 뭐 기대하기도 어렵죠. 비해고자 아이들은 끼리끼리 모여 해고자들 때문에 살기 어려워졌다고 말하곤 했습니다. 그저 부모에게 들은 이야기죠. 처음엔 비해고자 아이들끼리 있는 자리에서 조심스럽게 말했지만 뭐 교실이 얼마 넓습니까? 해고자 아이들도 듣지 않을 수 없죠. 오랜 친구였던 사이인데 이 말이 어떻겠습니까? 해고자 자녀들에겐 비수가 되었습니다. 처음엔 얼굴도 붉혔지만 나중엔 그냥 얼굴 안 보는 거죠. 10년 우정이 그냥 무너지는 겁니다.
일부 선생님들도 공공연하게 교실에서 해고 노동자를 비난했습니다. 함께 살려면 누군가 희생해야 되는데 욕심을 부린다고 말하였습니다. 참 너무한 말입니다. 누군가 희생해야 한다는 말은 아무나 할 수 있는 말이 아닙니다. 배가 가라앉고 있어요. 구명보트가 모자라요. 그때 누군가 희생해야겠죠. 그런데 이미 구명보트에 타 있는 사람이 그런 말을 하면 안 되는 겁니다. 누군가 희생해야 한다는 말은 자기를 희생하고 배에 남는 사람이나 할 수 있는 말입니다. 자기는 먼저 구명보트 타놓고 이제 죽음 앞에 선 사람에게 누군가 희생해야 한다고, 그게 할 말입니까? 연민도 배려도 없는 말입니다.
그런데 아이들이 그런 말을 그냥 들어야 했던 것입니다. 해고자의 아이들은 방구석에 처박혔습니다. 밖에 나가면 모두 다 자길 손가락질 하는 듯 느껴지니까요. 뭐 돈도 없으니 할 것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집에 누가 있는 것도 아니죠. 아버지는 공장에서 점거 투쟁하고 어머니는 농성장에서 가족 투쟁합니다. 아이들은 방치된 채 혼자서 교사, 언론, 친구들, 회사 근처 문방구 아저씨, 집 앞 빵집 아저씨 말을 그냥 참아내야 하는 겁니다. 다 이렇게 말합니다. “해고자는 다 해고될 이유가 있지. 뭐 무능하거나 아님 과격해서 회사에 도움이 안 되는 거야. 그런데 자기들 욕심 부리느라 지금 남들 인생까지 망가뜨리고 있다니까.”
아이들의 아버지입니다. 자기 존재의 뿌리입니다. 그 뿌리가 그렇게 경멸의 대상이 된 겁니다. 한때는 너무나 친했던 친구들에게까지 그런 말을 듣게 된 겁니다. 이게 첫 번째 트라우마입니다.
이제 아이는 외롭습니다. 이제 친구도 없고 자기편도 없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도, 어머니도 아이들 곁에 없습니다. 공장과 가족대책위 농성장에 계시니까요. 가끔 오시긴 하는데 옷 갈아입고 나가시거나 지쳐서 잠만 주무십니다. 엄마는 밥은 차려주시는데 얘기 한 마디 나눌 그런 여유가 없습니다.
부모님들도 지쳐있지요. 그러다보니 아이들의 작은 잘못에도 짜증을 냅니다. 부모가 보기엔 애들이 철이 없습니다. 부모는 이렇게 힘든데 자기 할 일도 제대로 안 하고 왜 저렇게 생각 없이 사나 싶은 거죠. 애는 자기도 괴로워서 인상을 쓰는 건데 부모가 보기엔 부모 힘든 생각은 눈꼽만큼도 안 한다 생각이 들죠. 애는 자기 나름으론 참다가 허전한 마음을 달래려고 뭔가 갖고 싶다고 한번 말한 건데 부모가 보기엔 다 큰 게 가정 형편 다 알면서 철딱서니 없이 군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아이한테 소리를 지르고 야단을 칩니다. 이렇게 아이는 두 번째 트라우마를 받습니다.
이제 아이에게 부모는 정말로 나쁜 사람이 되었습니다. 자기 마음도 몰라주는 정말로 무능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밖에서 들리던 부모에 대한 무능하다는 비난이 아이가 봐도 사실이라고 믿기기 시작한 겁니다. 내 마음도 몰라주는 무능한 아빠, 돈도 못 벌면서 소리만 지르고 별 것도 아닌 걸로 손찌검도 하는 그런 아빠가 된 겁니다. 아직은 아이입니다. 중학생인 아이들이 부모의 사정을 다 이해할 의무는 없는 겁이다. 물론 장기간의 농성투쟁에 지친 부모의 잘못도 아닙니다. 화목했던 가족은 망가졌습니다. 다들 기억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쌍용차 정리해고 반대를 외치던 노동자들은 철저히 진압되었습니다. 수십 명이 감옥에 갔습니다. 모두 거리에 내몰렸습니다. 살림살이는 엉망이 되었습니다. 곳간이 차야 인심이 난다는 말이 있죠. 가족의 곳간은 몇 년째 텅 비어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서로에게 베풀 마음의 여유도 없습니다. 가족끼리 대화는 안 되고 그저 서로가 서로를 원망하였습니다.
여기에서 더 중요한건 아이 마음속의 상처입니다. 아이는 해고, 노동, 투쟁이란 말만 들어도 진저리가 쳐집니다. 이유는 모르겠는데 그냥 마음이 울컥하고 마구 어디로든 도망가고만 싶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아직도 그런 모임에 나가십니다. 그런 아버지는 피하고만 싶습니다. 며칠 전엔 아버지가 꺼내 입은 조끼에 쓰여 있는 ‘투쟁’이란 단어에 짜증이 나서 방문을 꽝 닫았습니다. 아버지는 그런 아이에게 버릇없다고 또 소리를 질렀습니다. 아이는 자기가 왜 그랬는지 설명할 수도 없습니다. 엄마는 해고자 모임에서 기획한 아이들 모임에 가보자고 합니다. 아이는 ‘해고자’란 단어가 들어간 이상 아무리 좋은 자리라도 가고 싶지 않습니다.
이 아이는 어떻게 자랄까요? 사람의 운명은 간단치 않으니까 예측한다는 것은 오만한 일일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이 아이들만큼 노동, 투쟁 이런 말에 심한 알레르기를 보이는 아이들도 없을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파시즘은 이처럼 상처받은 곳에서 자라났습니다.
이 아이들의 반대편에 있는 아이들도 마찬가집니다. 친구들과 친구 아버지를 비난하던 비해고자의 아이들도 마찬가집니다. 그 아이들도 계속 자기가 정당하다는 걸 증명해야 합니다. 자기가 정당하려면 해고자는 무능하고, 이기적이어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스스로가 얼마나 부끄럽겠습니까? 고작 게임 아이템 살 용돈 못 받았다고, 다니던 학원 못 다니게 됐다고 오랜 친구의 아버지를 욕한 거라면 자신이 용서가 되겠습니까? 이 아이들도 상처를 입고 조금 비뚤어졌습니다. 한 지역이, 한 지역의 아이들이 다같이 이렇게 되었습니다.
이 시대는 사람의 상처에 관심이 없습니다. 그래서인지 역설적으로 트라우마라는 말이 대유행입니다. 예전에는 정신과 의사나 심리학 전공자나 쓰던 말을 이제 드라마에서도 들을 수 있습니다. 올해 상반기 최고의 베스트셀러가 뭔지 아십니까? ‘아프니까 청춘이다’입니다. 백만 권이 넘게 팔렸다고 합니다. 안철수, 박경철 선생님이 하시는 희망콘서트는 하는 곳마다 수천 명이 모인다고 합니다. 이처럼 모두가 위로받고 싶어 합니다. 사실 상처를 주지 말아야 하는데 상처주는 것은 어쩌지 못하고 그저 위로만 주고 있습니다.
생각해 봅시다. 정말 불가피한 해고였다면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사람의 내면을 찌르고 강퍅하게 만들 일이 아니지요. 인간의 악한 부분을 흔들어 깨우면 어떻게 합니까? 한없이 약한 존재가 인간입니다. 긍정적인 면을 살려주면서 서로 긍정적인 면으로 연대해서 세상을 살아가도록 유도해야 합니다.
누군가를 해고시켜야 한다는 결정은 계산기를 두드려서 나올 결정은 아닙니다. 다른 방법은 없는지 더 깊이 고민해야 합니다. 만약 불가피하다면 충분한 시간을 들여 일자리를 구하도록 함께 고민해야 합니다. 회사뿐 아니라 국가와 지역사회가 함께 나서서 도와줘야 합니다. 무엇보다 그 과정에서 자존심의 상처를 입지 않고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도록 위로하고 존중해야 했습니다. 그랬다면 부모들이 그렇게 큰 상처를 받지 않았을 겁니다.
편을 나눠 비난하고, 나쁜 사람으로 만들고, 토끼몰이 하듯 진압하고 그래서 죽은 노동자가 14명입니다. 8명은 스스로 목숨을 끊고 6명은 심근경색으로 돌아가셨습니다. 부모들이 받은 상처가 그렇게 크니 아이들에게 상처가 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 사회는 사회적인 갈등을 모두 개인에게 떠넘깁니다. 개인과 개인의 대립으로 만들고 개인 내부의 투쟁으로 만듭니다. 그래서 자기 개발서가 유행이고 없는 사람들끼리 서로 다투고 있습니다. 함께 해결책을 찾아가며 배려하야 하는데 그런 모습을 찾기가 어렵습니다. 물론 경제가 어려울 수 있습니다. 외부 충격이 올 수 있습니다. 강의를 하는 오늘도 주가가 백 포인트 이상 빠지고 환율이 올해 들어 최고치를 경신하고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외부 변수가 안 좋다고 꼭 심각한 상처를 남기는 것은 아닙니다.
지진을 생각해봅시다. 큰 지진이 나면 물론 피해가 큽니다. 그런데 지진으로 죽거나 다치는 사람은 이유가 뭘까요? 땅이 흔들리고 갈라져서 거기 빠져 죽는 사람이 있을까요? 그런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지진이 나도 넓은 들판에 있으면 몸이 좀 흔들릴 뿐 별 피해는 없습니다.
지진으로 죽는 사람은 대부분 지진의 이차 피해 때문입니다. 지진으로 건물이 흔들리고 무너져서 깔려 죽는 겁니다. 외부에서 오는 큰 충격이 근본적 이유이긴 하지만 정작 피해를 입히는 건 나를 둘러싼 건물, 나를 둘러싼 사회, 나를 둘러싼 가족입니다. 해고가 상처를 입히는 건 대부분 회사의 대응방식 때문입니다. 아이가 상처를 입는 것도 대부분 부모의 잘못된 대응방식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 사회는 약한 곳을 먼저 배려해야 합니다. 저는 소아정신과 의사입니다. 가장 약한 존재인 아이들이 제가 돌보는 대상입니다. 아이들은 가족 내에서 가장 약한 존재입니다. 여기 계신 부모님들은 그런 경험을 다 해보셨을 겁니다. 회사에서 짜증이 나는 일이 있었다. 또는 친정에 안 좋은 일이 생겼다. 남편에게, 아내에게 뭔가 불만이 있다 그러면 그날따라 아이에게 더 화를 내지 않습니까? 아이들에게 화내기는 쉽습니다. 아이들은 끊임없이 부모가 화낼 소재거리는 제공하니까요. 원래 감정이란 높은데서 낮은 데로 흐르는 법입니다. 집안의 가장 낮은 곳, 감정의 하수구에 아이들이 존재합니다.
스트레스가 높은 부모는 아이들에게 화를 많이 냅니다. 부모가 불안을 많이 느끼면 아이를 재촉하고 못 기다려주고 위협을 합니다. 그래서 요즘 우리 아이들이 역사 상 가장 많은 관심을 받는 동시에 역사 상 가장 고생스러운 아동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부모가 불안하면 잔소리로, 부모가 화가 나면 폭력이나 폭언으로 아이에게 영향이 갑니다.
제가 쌍용차 해고자 가족들을 만나보니 이런 경우가 너무 많았습니다. 부모들도 너무 힘들고, 그러다보니 아이들에게 화가 가고, 아이들은 그런 부모가 싫어지고 부모는 또 아이들이 야속하고, 그러는 자기 자신도 싫고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는 이런 분들을 너무 많이 보았습니다. 그 출발은 사람을 존중하지 않는 해고의 방식, 우리 사회의 사람 대하는 방식에 있습니다. 부모도 존중받아야 아이를 존중할 수 있는데 존중을 못 받으니 아이도 존중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비단 쌍용차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그곳에서, 한진중공업이든 유성기업이든 이런 곳에서 가장 극단적으로 나타날 뿐 우리 사회 전반에서 나타나는 문제입니다. 해고가 아니어도 사람을 함부로 대하고, 지나치게 밀어붙이고, 인격을 존중하지 않고, 상시적인 위협 속에서 생산성을 쥐어짭니다. 그러다보니 부모들이 우리 아이들에게 스트레스를 또 넘기고 있습니다. 이런 사회적 상황은 분명 바꿔야 합니다. 물론 사회가 바뀔 때까지 그냥 기다릴 수만은 없죠. 그와 더불어 가장 약한 존재인 아이들을 위해서 우리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을 지금 당장 해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그런 부모가 될까요? 참 어렵습니다. 지금의 사회는 잠시도 쉬지 않고 달리라고 요구합니다. 우리 인생에서 뭐가 중요한지 생각할 틈은 아예 주지 않습니다. 달리고, 달리고, 잠시 쉴 때도 금방 왔다 금방 사라지는 수많은 정보를 접하게 합니다. TV 프로그램을 이리저리 돌리며 시간을 보냅니다. TV 프로그램들도 모두 달립니다. 런닝맨도 달리고, 무한도전도 달리고, 1박2일도 달립니다. 모두 급하고 바쁘게 달리고만 있습니다.
여기에 브레이크를 밟아야 합니다. 왜 달리는지도 모르고 달리는 이 상태를 멈춰야 합니다. 그래서 제가 권하는 방법은 하루 15분의 자기를 구하는 시간을 갖는 것입니다. 우리 이제 잠시 멈춰 서서 내가 제대로 가고 있나 생각해야 합니다. 그냥 달리면 다가 아니라 한번 사는 인생인데 무엇이 가치 있는 일인지 생각해 봐야 합니다.
하루에 15분, 아무 때라도 좋습니다. 아침도 좋고 자기 전도 좋습니다. 점심시간도 좋습니다. 혼자서 조용한 시간을 보내보십시오. 자기 내면에 말을 걸고 소중한 사람들에게 어떻게 대할지도 고민해 보십시오. 자신이 어제 했던 행동을 돌아보십시오. 후회하라는 말은 아닙니다. 다음에는 어떻게 할까, 더 나은 방법은 없을까 궁리해 보십시오. 잡생각만 떠오르고 별 진전이 없다 싶으면 처음에는 인생과 철학, 아이 키우기에 대한 책을 한두 장 정도 읽고 그것을 재료로 고민해 보십시오.
멀리 있는 나무까지 바닥에 막대기로 줄을 긋는 것을 상상해 보십시오. 자주 나무를 확인하지 않으면 엉뚱한 방향으로 가기 쉽습니다. 나 스스로 잘 하고 있는지, 내가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을 중요하게 다루고 있는지 계속 살펴야 합니다. 뭔가 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마구 앞으로 내달린다고 잘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달리다 점점 안드로메다로 가고 있는 나라 꼴이 요즘 상황입니다.
사회는 인간의 존엄성을 지킬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인간은 자기 스스로를 인간 이하의 존재로 만들어 갑니다. 인간으로선 할 수 없는 일을 하고 맙니다. 아이들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존중받지 못하면 자기를 존중하지 못하는 사람으로, 남도 결코 존중하지 않는 사람으로 커갑니다.
부모는 힘든 순간, 스트레스를 받는 순간에 꼭 기억해야 합니다. 자기가 어떻게 하는지에 따라 아이에게 더 크고 깊은 상처를 줄 수도 있고 아이가 사랑 속에 자랄 수도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회가 부모에게 대하듯, 부모가 아이에게 대해서는 안 됩니다. 사회는 우리들 마음을 읽어주지도 않고 대화도 나누려 하지 않지만 우리는 아이 마음을 읽어주고 아이와 대화해야 합니다. 그래야 시간이 지난 후 힘들지 않습니다. 상처가 있더라도 깊지 않아 다시 일어나기 쉽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상처를 주고, 그걸 더 깊게 만들고, 그러면서 모두가 위로를 원합니다. 이제 할 일은 상처를 최소한으로 주려고 모두가 노력하는 겁니다. 만약 상처가 났다면 빨리 치유해 주는 겁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