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사(花蛇)
서정주
사향(麝香) 박하(薄荷)의 뒤안길이다.
아름다운 배암......
얼마나 커다란 슬픔으로 태어났기에, 저리도 징그러운 몸뚱아리냐
꽃대님 같다.
너의 할아버지가 이브를 꼬여내던 달변(達辯)의 혓바닥이
소리 잃은 채 날름거리는 붉은 아가리로
푸른 하늘이다....... 물어뜯어라, 원통히 물어뜯어,
달아나거라, 저 놈의 대가리!
돌팔매를 쏘면서, 쏘면서, 사향 방초(芳草)길
저 놈의 뒤를 따르는 것ㅇ,s
우리 할아버지의 아내가 이브라서 그러는 게 아니라
석유 먹은 듯...... 석유 먹은 듯...... 가쁜 슴결이야
바늘에 꼬여 두를까보다. 꽃대님보다도 아름다운 빛......
클레오파트라의 피 먹은 양 붉게 타오르는
고운 입술이다...... 스며라, 배암!
우리 순네는 스물 난 색시, 고양이같이 고운 입술......
스며라, 배암!
(『시인부락』 2호, 1936.12)
[어휘풀이]
-사향 : 사향노루의 사향샘을 건조하여 얻는 향료
-박하 : 꿀풀과의 여러해살이풀로, 한방에서는 잎을 약용하고 향기가 좋아 향료, 음료,
사탕제조에도 쓴다.
-꽃대님 : 색대님. 고운 색과 무늬가 있는 천으로 만든 대님. 대님은 한복 바지의 발목을
졸라매는 끈을 말함.
-클레오파트라 : 로마시대 이집트의 여왕. 뱀에 물려 자살한 것으로 알려져 있음
[작품해설]
이 시는 첫 시집 『화사집』의 표제시로서 미당의 초기 시 세계를 대표하는 작품이다. 그의 초기 시는 자연보다는 인간을, 선보다는 악을, 이성보다는 감성을 선택함으로써 자연과 선의 세계를 주된 주제와 소재로 다루었던 우리의 전통 시가에 대해 반기를 들게 되었다. 이 시는 원초적 생명력의 상징적 존재로 서의 ‘배암’을 통해 소위 ‘악마적’이고 ‘원색적’인 초기 시 세계의 문을 연 작품이다. 『화사집』은 ‘보들레르’의 퇴폐적 관능미와 저항 정신이 미당의 토속적 원생주의(原生主義)와 결합됨으로써 탄생한, 한국시사에서 일찍이 찾아볼 수 없었던 미적(美的) 세계의 확대와 구축이었다.
먼저 이 시의 핵심적 이미지가 되는 ‘화사’는 꽃뱀을 뜻한다. 흔히 뱀은 그 징그럽고 꿈틀거히는 생김새로 인해 ‘악(惡)’을 상징하는 존재로 생각된다. 그렇지만 이 시에서는 여기에 ‘꽃’이 결합된 꽃뱀이므로 뱀의 일반적인 의미로만 생각해서는 안 된다. 다시 말해, ‘화사’는 표면적으로는 꽃처럼 아름다운 빛깔과 무늬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내면적으로는 징그럽고 꿈틀거리는 모습을 지니고 있는 양면성의 존재, 모순의 존재인 것이다.
이 작품은 얼핏 보아서는 구약성서 창세기에 등장하는 ‘유혹의 뱀’에 대한 증오와 적개심을 그리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이 시에서는 뱀을 원시적 생명의 대상으로 보아 인간이 타락하기 전의 원초적 생명에 대한 외경(畏敬)을 추구하고 있으며, 때 묻지 않은 생명의 신비를 탐구하고 있다. 1연은 아담과 이브의 이야기에서 보듯이 ‘배암’은 인간의 증오의 대상으로 태어난 슬픔 때문에 징그러운 몸뚱이를 갖고 있다는 뱀의 운명을 말하고 있다. 사향 냄새가 나는 향기로운 풀숲 길에서 발견한 ‘아름다운 배암’을 ‘징그러운 몸뚱아리’로 인식하는 데서 ‘화사’의 이중성이 드러난다. 2연은 징그러우면서도 매혹적인 이율배반의 ‘배암’의 모습을 ‘꽃대님’으로 제시하고 있다. ‘대님’은 한복 바지를 입운 뒤, 바짓가랑이 끝을 접어서 졸라매는 끈을 뜻한다. 뱀의 길이와 비슷할 뿐 아니라, 우리와 친숙한 소재이므로 화사를 ‘꽃대님 같다’로 표현한 것은 지극히 자연스럽다. 이러한 아름다움은 3연에서 ‘달변의 혓바닥이/ 소리 잃은 채 날름거리는 붉은 아가리’로 변화한다. ‘이브를 꼬여 내던 달변의 혓바닥’은 소리를 잃어버리고, 남은 것은 다만 ‘날름거리는 아가리’뿐이다. 옛날의 달변과 지금의 실어(失語)로 대비되는 ‘배암’의 슬픈 운명을 보며 화자는 ‘푸른 하늘이다.......물어뜯어라, 원통히 물어뜯어라’라며 뱀을 부추긴다. 그러므로 이 구절에는 존재이ㅡ 원죄적 모순성에 대한 화자의 강한 저주와 증오가 담겨져 있음을 알 수 있다.
4연은 ‘달아나거라, 저놈의 대가리!’라는 하나의 시행으로, ‘물어뜯어’라며 부치기던 시행과 관련되어 더욱 심한 저주와 증오를 드러낸다. 5연은 원죄적 숙명을 극복하려는 운명과의 대결 자세를 보여 준다. ‘돌팔매를 쏘면서, 쏘면서’라는 표현은 화자의 공격적 행위를 의미하지만, 화자는 곧바로 뱀과의 대립에서 오는 긴장을 풀며, 뱀에게로 향했던 시선을 자신의 내보루 옮기는 반성적 성찰의 계기를 마련하고 있다. 돌을 던지며 뱀을 뒤쫓는 화자의 행위는 뱀에 의해서 우리가 원죄를 얻게 된 데 대한 복수심 때문이 아니라, ‘석유 먹은 듯’ 불타는 ‘가쁜 숨결’로 인한 것임을 밝히며 그간의 저주와 증오를 완화하는 태도를 갖게 된다. ‘가쁜 숨결’이란 뱀을 뒤쫓는 데서 오는 숨 가쁨이 아니라, 관능적인 숨 가뿜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화자에게서 우리는, 기독교에서 말하는 원죄 의식을 부정하면서 인간의 원초적인 관능의 세계를 추구하는 시인의 태도를 엿볼 수 있다. 또한 ‘석유 먹은 듯’의 반복과 생략 부호의 반복은 바로 ‘가쁜 숨결’의 이미지를 강화시키는 표현이다. 4연의 ‘대가리’는 남성의 성기를 충동적으로 느낀 뱀의 원형적 심상으로, 5연의 ‘석유~ 가쁜 숨결’로 이어져 8연의 ‘순네’와 연결되고 ‘스물 난 색시’의 관능으로 확대된다.
6연은 ‘꽃대님보다도 아름다운 빛’으로 나타난 뱀을 두르고 싶다는 소유욕을 말하며, 7연에서는 ‘피 먹은 양 붉게 타오르는’ 클레오파트라의 고운 입술로 나타난 뱀의 입술이 화자에게 스며들기를 바라는 관능적 욕망을 보여 준다. 8연은 관능과 생명력이 고조된 연으로 스무 살 ‘순네’의 고운 입술을 뱀의 입술로 인식하는 화자는 마침내 ‘순네’가 뱀이 되어 자신의 몸속으로 스며들기를 바란다. 결국 이 시는 인간의 원시적 생명력과 욕망에 오는 악마적 전율과 예찬을 통해 서구적 발상과 토속적 사고의 융합을 교묘하게 실현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작가소개]
서정주(徐廷柱)
미당(未堂), 궁발(窮髮)
1915년 전라북도 고창 출생
1929년 중앙고보 입학
1931년 고창고보에 편입학, 자퇴
193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벽」이 당선되어 등단
시 전문 동인지 『시인부락』 창간
1946년 조선청년문학가협회 결성, 시분과 위원장직을 맡음
1950년 종군 위문단 결성
1954년 예술원 종신 위원으로 추천되어 문학분과 위원장 역임
1955년 자유문학상 수상
1977년 한국문인협회 이사장
2000년 사망
시집 : 『화사집』(1941), 『귀촉도』(1948), 『흑호반』(1953), 『서정주시선』(1956), 『신라초』 (1961), 『동천』(1969), 『서정주문학전집』(1972), 『국화옆에서』(1975), 『질마재 신화』 (1975), 『떠돌이의 시』(1976), 『학이 울고간 날들의 시』(1982), 『미당서정주시선집』 (1983), 『안 잊히는 일들』(1983), 『노래』(1984), 『시와 시인의 말』(1986), 『이런 나
라를 아시나요』(1987), 『팔할이 바람』(1988), 『연꽃 만나고 가는 사람아』(1989), 『피
는 꽃』(1991), 『산시(山詩)』(1991), 『늙은 떠돌이의 시』(1993), 『민들레꽃』(1994), 『미당시전집』(1994), 『견우의 노래』(1997), 『80소년 떠돌이의 시』(19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