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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로 와서 마셔라
요 7:37-44
37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38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39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않으셨으므로 성령이 아직 그들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40 이 말씀을 들은 무리 중에서 어떤 사람은 이 사람이 참으로 그 선지자라 하며
41 어떤 사람은 그리스도라 하며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가 어찌 갈릴리에서 나오겠느냐
42 성경에 이르기를 그리스도는 다윗의 씨로 또 다윗이 살던 마을 베들레헴에서 나오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며
43 예수로 말미암아 무리 중에서 쟁론이 되니
44 그 중에는 그를 잡고자 하는 자들도 있으나 손을 대는 자가 없었더라
요 7:37-44 / [생명수 흐르는 강] 축제의 절정을 이루는 마지막 날에 예수께서는 군중들에게 외치셨다. `누구든지 목마른 사람은 다 내게 와서 마시라. 38) 나를 믿는 사람은 성경의 말씀대로 ㄱ) 그 속에서 생명수가 강같이 흘러 나올 것이다.' (ㄱ. 잠18:4) 39) 이것은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받을 성령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 그때는 아직 예수께서 하늘의 영광 가운데로 되돌아가시기 전이어서 성령이 사람들에게 임하시지 않고 있었다. 40) [메시야에 대한 견해들] 군중 가운데 몇 사람이 이 말씀을 듣고 말하였다. `이분은 우리가 기다리는 그 예언자임에 틀림이 없군.' 41-42) 그러자 어떤 사람들은 `아니, 이분이 바로 그리스도요' 라고 말하였고 또 다른 사람들은 `갈릴리에서 그리스도가 난답니까? 성경에 분명히 ㄱ) 그리스도가 다윗의 혈통을 받아 다윗이 살던 베들레헴에서 태어날 것이라고 하지 않았소?' 하고 떠들어댔다. (ㄱ. 미5:2) 43) 군중들은 예수를 두고 이렇게 의견이 여럿으로 갈라졌다. 44) 그때 그들 가운데 몇 사람이 예수를 잡아가려고 하였으나 손을 대지는 못하였다.
예수님은 “내게로 와서 마시라”고 하십니다. 초막절의 주인이신 예수님을 만나야 했습니다.
내게로 와서 마셔라(37-39) 명절 끝날 곧 큰 날은 8일째 되는 날입니다. 초막절 절기 동안, 유대인들은 그 조상들이 광야를 지나 약속의 땅까지 가는 동안, 하나님께서 그들의 길을 인도하시며 만나와 때로는 반석에서 나온 물을 공급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들을 보호하였는지 기억하며 기념합니다(출 17:1-7). 초막절 첫째 날에는 제사장이 스가랴 14장 8절을 낭독합니다. “그날에 생수가 예루살렘에서 솟아나리라” 마지막 날 하루를 제외하고는, 이 절기의 모든 날 동안 제사장은 물이 든 금 그릇을 들고 성전 앞에 서서 바위에 물을 붇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마실 물을 준 반석에서 흘러나온 그 물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명절 마지막 날에 서서 큰 소리로 외치셨습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예수님은 “내게로 와서 마시라”고 하십니다. 이스라엘 조상들이 출애굽하여 광야를 통과할 때 반석에서 물이 나왔듯이 예수님은 스스로를 반석으로 지칭하신 겁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생명수를 내심으로써 진정으로 내리침을 당한 반석이 되셨습니다.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고 합니다(39).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사 영광을 얻으신 후에 비로소 성령께서 모든 신자들에게 주어졌습니다.
예수로 말미암아(40-44) 사람들 안에 예수님에 대한 여러 가지 의견이 발생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가 참으로 그 선지자라고 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라고 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믿을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메시야가 갈릴리에서 나오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주장은 이러했습니다. “성경에 이르기를 그리스도는 다윗의 씨로 또 다윗의 살던 촌 베들레헴에서 나오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이들은 다윗의 자손인 메시야가 베들레헴에서 나와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런데 사실 예수님은 베들레헴에서 태어났습니다(눅 2:1-11). 그 분은 다윗의 후손이셨습니다(마 1:1-18). 하지만 출생 직후에, 예수님의 부모는 예수님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애굽으로 내려가야만 했습니다. 그 후 다시 갈릴리 나사렛으로 와서 그 곳에서 성장하셨습니다. 이런 이유로 인해 예수님은 갈릴리 사람으로 또는 나사렛 사람으로 알려졌습니다.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것과 차이가 있었던 것이지요. 예수님에 대해 자세히 정확하게 모르기 때문에 발생한 것입니다. 무리가 예수님에 대하여 쟁론을 벌이자 그 중에는 그를 잡고자 하는 자들도 있으나 손을 대는 자가 없었더라고 합니다. 이는 30절에 기록된 대로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적용: 예수님께 와서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은 모두 성령을 받았습니다. 당신은 진짜 성령을 받았습니까? 성령이 임하신 경험을 나누어 봅시다.
인간이 스스로의 지혜로 ‘하나님은 없다.’, ‘하나님을 알 수 없다.’는 말을 하는 사람들은 자기가 어리석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것뿐만 아니라 하나님에 대해서 아직 잘 알지 못하고, 한 번도 하나님을 만나보지 못한 사람입니다.
< 설 교 >
예수님 때문에
요 7:37-38 / 조용기 목사
<서론>
“예수님 때문에”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우리는 절박한 인생문제에 부딪힌 매일 매일의 생활에 예수님을 만나게 되고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께 화해되어 아름답게 변화되어 가는 스토리가 복음입니다. 제가 한참 부흥회 다닐 때 남단의 목포 어느 교회에 부흥회를 갔는데 하나님 말씀을 증거하고 헌금을 거두어서 앞에 가지고 나와 기도해 달라고 집사님이 헌금통을 들고 오는데 보니까 열손가락이 다 없어요. 몽당손 열 개로 헌금함을 들고 왔어요. 그래서 내가 저분 어떻게 열손가락이 다 나란히 잘려나갔습니까? 공장에서 일하다가 기계에 다쳤나요? 목사님이 나를 콕 찌르면서 사연이 기니까 나중에 말씀해 드리겠습니다. 그래서 예배를 필하고 그 집사님을 목사님 사무실에 불러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다른게 아니라 이 분은 도박에 미친 사람입니다. 하도 도박을 하고 온 집안을 못살게 구니까 형제간들이 모여와서 그를 남녀 형제간들이 묶어서 다시 도박 못하게 작두에 그 손을 밀어 넣게 해서 잘라버렸습니다. 형제간이 그렇게 했으니 그 도박은 형제까지 다 못살게 하는 도박을 했습니다. 그래서 손가락 열 개를 다 잘라버리면 도박을 안 하겠지 싶은데 아물기도 전에 붕대를 감은채 또 도박하러 가요. 하루는 자기 부인을 보고 돈을 안 모아온다고 돈 빌려 오라고 하는데 안 빌려 온다고 죽이겠다고 해서 부인이 도망을 쳤습니다. 산으로 도망을 치는데 끝까지 따라가서 부인을 잡아왔습니다. 돈을 모아올래? 내 손에 여기에서 죽을래? 나는 죽어도 이제는 돈 못 모아오겠습니다. 그러니 좋다. 바위 낭떠러지에 데리고 가서 눈 감으라 내가 너를 밀어서 오늘 죽이겠다. 그러니 부인이 나는 죽어도 좋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문제입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모시고 보혈로 씻음 받아서 희망찬 내일을 바라보고 하늘나라에 갑니다. 그러나 당신은 지옥으로 떨어집니다. 지옥이 그렇게 보통 쉽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열 손가락을 작두에 잘릴 때 기분 좋았습니까? 지옥은 천 배, 만 배 더하는 고통이 계속하는 곳입니다. 그러니까 그 남편이 하는 말이 내 걱정하지 말고 눈 감아라! 그러니까 내가 한번 당신 위해서 기도하고 죽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여, 이 사람에게 하나님 뜻이 있어 부부의 인연을 맺어서 같이 살아왔는데 이렇게 완악하게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고 죄를 짓고 살다가 죽으면 지옥가지 않겠습니까? 내가 마지막 하나님 앞에 간구하오니 이 사람의 영혼을 구원해 주시옵소서. 내가 죽더라도 이 영혼을 기억해 주시옵소서. 그리고 이제 준비되었으니 나를 미시오. 그런데 가만히 있으니까 흑흑 울음 소리가 들려요. 그래서 돌아보니까 땅에 꿇어 앉아서 통곡을 하고 울고 있어요. 왜 울고 있느냐. 당신이 날 울게 만들잖아. 보통 때 흉악하게 욕을 해도 안 울던 사람이 왜 우느냐. 내 가슴에 감동이 되고 내 슬픔이 다가왔다. 내가 졌다. 나도 예수 믿겠다. 그래서 교회 출석하기 시작한 사람이 집사가 되고 헌금위원이 되고 목사님 따라서 교회를 위해서 봉사하는데 그 이야기가 정말 거짓말 같아요. 하나님의 성령께서 이 무서운 죄인을 변화시키셔서 이와 같은 훌륭한 크리스챤이 되게 만들어 주신 이것이 우리가 말하는 복음인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말하기를 ‘지금까지 내가 여러 번 참고 용서했지만, 더 이상은 용서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이 문제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어느 날 베드로가 예수님께 나아와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용서해 주면 되겠습니까? 당시 유대인들은 세 번만 용서하면 된다고 말했습니다. 베드로는 큰 마음을 먹고 예수님께 일곱 번 용서해 주면 어떻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칭찬해 주실 줄 알고 어깨를 으쓱하면서 그리스도를 바라보는데 예수님께서 고개를 흔들면서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 번씩 용서해 줘야 한다. 일곱 번을 일흔번 계산하면 어떻게 됩니까? “7x70”이니까, 490번을 용서하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용서를 숫자로 계산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끝없이 용서해주라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4장 11절은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여러분, 하나님이 얼마나 여러분 용서해 주느냐. 하나님이 여러분을 예수 안에서 470번 용서해 주십니다. 하루종일 하나님 앞에 하나, 하나님 내 죄를 용서해 주시옵소서. 둘, 하나님 내 죄를 용서해 주시옵소서. 470번을 하나님께 용서해 달라고 하면 하나님이 내가 다 용서했다. 새로 또 시작하자. 그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 죄를 끝없이 용서해 주신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가 그와 같이 크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죄를 대신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 공로를 하나님께서 그렇게 높이 평가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는 사람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죄 용서함을 받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은혜인 것입니다.
1. 예수님 때문에 하나님과 화목하게 됨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될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배반하고 마귀를 쫓아 나오고 난 다음 하나님의 가슴속에 고통을 얼마나 가했는지 말로 다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원수 된 사이를 화목케 하셔서 다시 하나님 품에 안기게 되고 하나님을 향하여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된 것은 예수님 때문에 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모든 죄악을 다 담당해서 십자가에 몸 찢고 피 흘려서 죽으셨기 때문에 그 피가 부르짖는 곳에 하나님께서 응답하시고 우리를 용서하고 우리가 화목하게 되어서 하나님은 우리 아버지가 되고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고 버림받은 인생이 안 된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4장 1절로 7절에 보면 “내가 또 말하노니 유업을 이을 자가 모든 것의 주인이나 어렸을 동안에는 종과 다름이 없어서 그 아버지가 정한 때까지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에 있나니 이와 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 이 세상의 초등학문 아래에 있어서 종 노릇 하였더니“ 우리가 주를 모를 때 율법 하에 있었습니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한번 따라 말씀하세요. 아빠 아버지! 원수가 하루 아침에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렇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받을 자니라”
장차 천국을 유업으로 받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에 부모들이 남겨주는 조그마한 재산이 아니라 천지와 만물을 하나님이 다 우리에게 유업으로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이처럼 사랑하사 계산을 할 수 없는 사랑을 베풀어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때문에 우리는 이웃과도 화해해야 되는 것입니다.
2. 예수님 때문에 이웃과 화해할 수 있게 됨
하나님과 화해해 주셨는데 왜 우리 남편과 아내와 부모와 형제와 이웃과 화해할 수 없는 일이 있습니까?
에베소서 4장 32절에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끝없는 용서를 해주는 것처럼 우리도 이웃을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이웃을 불쌍히 여겨라! 동정하라는 것입니다. 서로 용서하기를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고 하셨으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정말 힘든 것을 주문하십니다. 여러분, 이웃을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하나님의 뜻을 우리가 이루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힘듭니다. 진짜로 힘듭니다. 우리는 이웃을 보고 저 암이 걸려서 안 죽냐? 목숨이 왜 저렇게 기냐? 하나님, 저 사람만은 용서할 수 없습니다. 원수를 갚아 주소서. 그런 기도를 저도 했습니다. 요사이는 또 하나님 그런 기도한 것을 용서해 주시옵소서. 잘못 기도했습니다. 참 용서한다는 것은 힘든 일이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힘든 일을 예수 그리스도 그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혀 피를 흘리게 하시므로 용서해 줄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은 우리들은 예수님으로 하여금 우리 속에 들어와서 사람과만 화해하지 말고 땅과 하늘에 있는 만물하고도 화해를 하라는 것입니다.
독일의 세계적인 신학자인 몰트만 박사가 튀빙겐대학교 종교학 교수로 있을 때 저를 상당히 비평했습니다. 제가 독일을 중심으로 해서 노르웨이, 덴마크, 스웨덴, 서구 일대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고 다닐 때 그는 저 미개한 한국 청년이 와서 뭐를 한다고 돌아다니느냐? 내가 다시 입을 못 열게 만들겠다. 그래서 나에게 도전장이 왔습니다. 당신의 신학에 대해서 나는 별로 좋게 생각 안한다. 당신은 용서를 해야 되는데 우리하고는 생각이 틀린다. 그러므로 내가 한국에 나갈테니까 한국에서 유명한 신문사를 동원해서 참석을 시키고 당신하고 나하고 토론을 하자. 당신이 그날 이후로 입을 열어서 우리 구라파에 와서 설교 못하게 할테니까. 그래서 아차 내가 이제는 갔구나. 세계적인 신학자하고 내가 상대를 해서 어떻게 이기겠느냐. 그래서 하나님께 기도를 많이 했습니다. 하나님, 나는 원래 공부도 많이하지 못한 촌놈인데 공부를 많이 한 사람처럼 행동하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내가 못났으니 못난 그대로 이 사람과 대화를 해서 토론을 하게 하옵소서. 그분이 자기 보좌관들을 데리고 와서 63빌딩에서 동아일보를 중심으로 해서 여러교회 신문기자들을 불러 모아서 저하고 토론을 시작했는데 아침 조찬을 하고 토론을 하는데 나는 입이 떨려서 밥이 입에 안 들어가요. 왜 그렇게 입이 떨리는지 모르겠어요. 좀 담대하게 해야 되는데 그 사람이 말을 하면 예~스. 부끄러워 못 견디겠어요. 그러니 신문기자들이 날 보고 동정을 했습니다. 조목사님 다투지 말고 어지간하면 손들어 버리십시오. 이 사람 너무나 유명한 사람인데 우리 한국의 저명한 신학자라도 이길 수 없습니다. 그래도 어떻게 대답 안할 수가 있습니까? 나에게 조용기 목사는 예수님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래서 어떻게 생각하기는요.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시지요. 하나님의 아들인 것 봤나? 당신, 예수님이 십자가에 보혈로써 모든 사람을 용서해 준다고 하는데 무엇으로 그렇게 증거하느냐? 그래서 내가 하는 말이 여보시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 사람으로 오셔서 사람만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은 하늘에 있는 것들도 구원하고 땅에 있는 개미새끼 한 마리도 그 구원과 사랑을 베푸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했는데 세상은 하늘과 땅과 그 사이에 있는 모든 것이 다 합쳐서 세상이니 사람만 세상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온 인생들을 다 구원할 뿐 아니라 천하에 있는 벌레 한 마리도 다 사랑하고 구원받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당신이 뭐라고 말해도 모든 인생들이 예수님의 보혈로 구원을 받고 벌레 한 마리도 무조건하고 죽이는 것 동의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이 뭐라고 말해도 당신도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사랑하고 구원해 주십니다. 그러니 이 사람 얼굴이 갑자기 달라지더니만 Go ahead. Go ahead. 자꾸 하라는 것입니다 나보고... 그러나 나는 너무 많이 말할 것도 없고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한다는 그대로 우리가 우리 동족만 사랑하지 말고 당신은 독일 사람이니까 한국 사람도 사랑하고 우리는 세계 모든 민족을 다 사랑하고 그 다음에 동물들도 사랑하고 나무들도 사랑하고 온 세계를 사랑으로 변화시키는 일을 함께 합시다. 사랑보다 더 위대한 힘이 어디 있습니까? 다른 것을 가지고 싸우는 것은 쓸데 없는 일입니다.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당신이 오늘 나를 미워해도 사랑합니다. 그러니까 벌떡 일어나더니 나를 껴안더니 토론할 것 없다. 당신이 맞았다. 한국에 이렇게 훌륭한 신학자가 있는 것을 처음 봤다. 한국의 신학자 두 사람 밖에 나는 인정을 안 한다. 한분 훌륭한 신학자 그 다음 조용기다. 우리 맛있게 점심이나 먹자. 그리고 독일로 가서 책을 썼는데 책마다 아시아에 훌륭한 신학자가 있는데 그 이름이 조용기다. 왜냐하면 그가 하나님을 인식하는 것을 내가 보통 사람에게는 발견하지 못했다.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라고만 들었는데 개미새끼 한 마디도 사랑한다는 말은 처음 들었다. 그래서 해마다 한국에 오면 나를 찾아옵니다. 안부라도 묻고 떠나갑니다. 그래서 그분이 책에 하도 제 이름을 적어서 그래서 구라파나 미국에 신학자들에게 알려진 바 되고 유명하지도 않은 놈이 하나님 덕분으로 유명해졌습니다. 예수님으로 얻은 화해는 지구와 자연도 포함되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1장 20절에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예수님 보혈을 통해서 천하만물이 하나님과 화목되고 하나님은 천하만물을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웃만 사랑할 뿐 아니라 우리 주변에 있는 산천초목도 다 사랑하게 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만물을 다 포함하는 것입니다.
3. 예수님 때문에 새로운 자화상을 갖게 됨
우리는 예수님 때문에 우리 자화상을 변화시켜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매일같이 거울보지 않습니까? 거울 볼 때 예수 믿기 전에 보던 자화상이 예수 믿고 난 이후의 자화상으로 바꿔져야 되는 것입니다. 죄와 허물의 종인 자화상, 고통과 괴로운 병을 가지고 있는 자화상, 가난과 절망의 저주의 포로가 된 자화상, 죽음과 무(無)의 공포로 떨고 있는 자화상, 지옥의 공포에서 괴로워하는 자화상. 이런 모든 자화상을 예수님 사랑 속에서 쫓아내 버리고 하나님 사랑의 아들 나라에 백성이 된 새로운 자화상을 가져야 합니다. 여러분 옛사람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되었으므로 새로운 자화상을 갖고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2장 16절에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법을 가지고서 대하면 율법에서 의롭다함을 입을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십계명 앞에 서더라도 십계명을 이겨나갈 사람 누가 있습니까? 내 앞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 우상에게 절하지 마라. 하나님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네 이웃을 거짓증거하지 말라. 네 이웃을 탐하지 말라. 이 십계명 앞에 우리를 세워 놓으면 죄 안 지은 사람이 한 사람도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나니. 그 십계명 이외에 하지 말라는 계명이 성경에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므로 율법의 계명 앞에 서면 우리는 다 죽은 사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으로 구원받을 사람이 아무도 없는데 우리는 당당히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죽었다 말입니다. 여러분 죽었다가 산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이 여러분의 모든 죄를 다 짊어지셨으므로 머리털 하나만한 죄도 다 예수님이 갚아버렸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죽고 장사지내고 그리스도 안에서 부활했으므로 여러분은 이제 의롭다함을 입게 된 것입니다. 의롭다는 하나님의 말씀의 의미는 이 세상에 태어나서 죄를 한번도 안 지은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한번도 죄를 안 지은 상태가 의로운 상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늘나라에 갈 때 마귀가 아무리 우리를 손가락질해도 예수님의 보혈을 의지하면 죄를 한번도 안 지은 사람이기 때문에 당당히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행위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보혈로써 선물로 주신 믿음으로 당당히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거울을 들여다 볼 때 야~ 이 죄인아! 그렇게 부르지 말아야 됩니다. 우리가 양심을 펼쳐놓고 거울을 들여다 보면 야~ 너 의로운 사람아! 그럴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야 너! 죄인이지! 혼자 가슴속에 숨겨 놓지 않았느냐. 그러나 이제는 거울이 아니라 그 무엇을 들여다 보아도 예수님의 피가 너는 죄가 없는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한번 따라 말씀하세요. 나는 이 세상에서 죄를 한번도 지은 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보혈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자화상속에 죄인의 자화상은 사라지고 의로운 자화상으로 빛나야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또한 죄만 사함 받은 것이 아니라 우리가 허물도 사함을 받았습니다. 우리 세상에 살면서 허물진 인생을 안 사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죄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죄요, 허물은 이 세상에서 나쁜 행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나쁜 행실이 없는 사람이 없지 않습니까?
히브리서 10장 10절에 보면 “이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허물이 없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거룩하고 장엄한 사람이 되었다.
베드로전서 1장 15절로 16절은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기록되었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
우리 힘으로 거룩하게 될 도리가 없습니다. 거룩함이 무엇인지 의미도 확실히 알 수 없습니다. 그렇게 장엄하고 거룩한 행실을 해야 되는데 우리는 못하잖아요. 그러나 예수님이 모든 허물을 다 짊어지고 죽음으로써 그 허물을 사하시고 거룩한 모습을 옷 입혀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거룩한 사람이 되었다고 하는 이 사실을 믿어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떠한 훌륭한 사람이 모인 자리에도 부끄럼 없이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거룩한 사람인 것입니다. 그 다음에 심신이 치료받은 사람인 것입니다. 우리는 마음도 병들고 육체도 병들고 생활도 병들고 이 세상에 병이 안 든 것이 없습니다. 참으로 요사이 마음이 병든 사람 많습니다. 어떻게 이 병을 다 이길 수 있습니까?
이사야 53장 5절에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예수님은 우리 위해서 사는 분이지 자기 위해서 사는 분이 아니었습니다. 자기는 하나님이니까. 하나님이 허물 지을 수가 없지요. 그가 사람이 되어 오셔서 우리와 똑같은 분위기와 똑같은 환경에서 살아서 우리의 잘못을 대신 청산한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찔림은 여러분 허물 때문이요 예수님이 상함은 여러분 죄악 때문이고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버림당하는 징계를 당하므로 평화를 누리게 되고 채찍에 맞음으로 나음을 얻게 된 것입니다. 이 복음은 여러분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나 때문에 예수님은 조용기 때문에만 죽은 것이 아니라 여러분 때문에 죽은 것입니다. 우리들 죄 때문에 죽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펄펄 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죄가 없어요. 예수님이 다 청산하셨으니까. 기막힌 은혜인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축복과 형통도 우리가 주 예수님 앞에서 얻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가난하고 헐벗고 굶주린 삶을 산다는 것 참 괴로운 것입니다.
요한삼서 1장 2절에 늘 우리가 부르는 것과 같이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이 참 좋은 말씀입니다. 저는 부르면 부를수록 뼈골이 저립니다. 너무 감사해서... 우리 영혼이 잘되기를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당연히 믿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일반 사람들도 다 종교는 영혼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한바탕 더 나가서 범사에 잘되고 세상 살아가는 동안에 하는 일마다 형통하고 잘되고 그리고 병들지 말고 건강하기를 내가 간구한다. 얼마나 놀라운 말씀인 것입니까?
요한복음 10장 10절에 주님께서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그냥 잘 사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항상 모든 것에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기를 원한다고 했습니다.
시편 1편 3절에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여러분, 그러므로 예수 믿는 사람은 고난을 받는 것이 축복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고난이 다가와도 예수님을 의지하면 모든 것이 합동하여 선을 이루기 때문에 축복이 되는 것입니다. 고난당하는 것이 나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왜, 우리는 말하기를 고난이 우리에게 다가온다면 고난을 통하여 훈련을 받아서 그릇을 크게 만들어서 더 큰 축복을 받기 위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요셉 보십시오. 17살에 형들에게 종으로 팔려 갔습니다. 그래서 종살이 하다가 억울한 누명쓰고 3년 동안 옥살이하는 죄인이 되었습니다. 고난 중에도 엄청난 고난당했습니다. 그런데 그 고난이 있었기 때문에 애굽의 바로 임금을 만날 수가 있었습니다. 어떻게 히브리 종이 임금님을 만납니까? 요셉이 꿈 해석을 잘하기 때문에 임금님이 꿈을 꾸고 꿈 해석을 전국에 내려도 아무도 못하는데 요셉이 감옥에 들어온 술 장관 꿈을 해석해 주고 술 장관이 복귀가 되어서 그것이 임금님에게 알려져 임금님이 요섭을 불러서 꿈 해석을 시켜서 감탄해서 이 지혜로운 사람을 어디에서 얻을 수 있느냐. 애굽의 국무총리로 만든 것입니다. 그가 고난 안 당했으면 국무총리 될 수 없었습니다. 술 장관을 만날 기회도 없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래나 저래나 우리 주님이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기를 간구한다고 했는데 범사에 잘되는 주님을 모시면 잘되면 좋고 안 되면 좋게 될 것이니 좋고 다 좋은 것입니다. 순복음 교인들은 좋은 하나님을 믿으십시오. 좋은 일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축복과 형통이 여러분에게 주어진 것을 알고 항상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부활영생 천국시민이 되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우리는 죽으면 부활해서 영생을 얻고 천국시민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죽음이 겁나지 않습니다. 죽음이 초행길이 되기 때문에 다 떨떠름합니다. 한번 왔다갔으면 좋겠는데 여러분 이 가운데 초행길 말고 죽음을 여러번 갔다온 사람 있으면 좀 이야기 해주십시오. 저도 좀 듣고 싶습니다. 그러나 죽음을 두 번 갔다왔다 하신 분이 유일하게 예수님이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죽었다가 부활하셨습니다. 초행이 아닌 분이 있기는 있는데... 그것은 바울선생이 말하기를 죽어서 갔다온 것인지 살아서 갔다오든지 그것을 모르겠다고해서 내가 증인으로 세울 수가 없습니다. 바울선생이 셋째 하늘에 올라가서 말로 다할 수 없는 말을 들었다고 했는데 그 다음에 뭐라고 했냐면 내가 죽어서 갔는지 살아서 갔는지 모르겠다. 그러니까 증인이 될 수 없지요. 나는 여러분이 죽어서라도 갔다오지 말고 초행길인데 다같이 갑시다. 나 혼자만 가면 섭섭하겠지만 다 가니까. 너도 가고 나도 가고 다 갑니다. 그런데 우리는 외롭지가 않은 것은 예수님이 죽음의 그 자리에 오셔서 우리 손잡고 걸어가기 때문에 외롭지 않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가는 것입니다. 부활영생 천국시민이 되어서 가는데 베드로전서 2장 9절에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줄만한 것은 주님이 다 주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 보혈을 믿고 나면 국민이 가지는 다섯 가지 기본권을 보장받을 수 있습니다.
헌법에 의하면, 우리나라 국민이라면 누구든지 다섯 가지 기본권을 보장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 국민이면 자유권이 있고, 평등권이 있고, 참정권이 있고, 청구권이 있고, 사회권이 있습니다. 여러분, 이 권한을 모두 다 사용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우리 대한민국 국민이면 누구든지 자유권, 평등권, 참정권, 청구권, 사회권이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라면 누구든지 똑같이 다섯 가지 특권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것이 오중복음입니다. 중생의 복음, 성령충만의 복음, 신유의 복음, 축복의 복음, 재림의 복음. 놀랍죠? 우리가 대한민국 국민이 대한민국 국민으로서의 다섯 가지 권한이 있는 것처럼 예수 믿는 사람은 십자가를 바라보고 그 밑에서 오중복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좀 더 배짱 있게 담대하십시오. 여러분에게 중생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한이 있고 성령충만 받을 권한이 있고 병고침 받을 권한이 있고 축복을 받을 권한이 있고 재림을 받을 권한이 있습니다.
골로새서 1장 13절은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하나님이 여러분을 마귀의 나라 백성에서 끄집어 내어서 하나님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신 것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우리의 국적이 바뀌어 이 세상 나라에서 하나님 나라로 옮겨졌기 때문에, 우리는 이 다섯 가지 복을 누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가장 좋은 것은 미래에 대한 희망이 있습니다. 장차 살아가면 더 어려워질 것이라고 생각하면 불안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은 2천 년 전의 하나님이 아니라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고 지금 우리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이 되시는 것입니다.
4. 예수님 때문에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갖게 됨
우리는 생각을 통하여, 꿈을 통하여, 믿음을 통하여, 말을 통하여 새로운 내일을 앙망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시편 37편 4절로 6절에 보면 “또 야훼를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네게 이루어 주시리로다 네 길을 야훼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 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 같이 하시리로다”
<결론>
우리는 좋은 하나님을 모시고 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우리가 말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학문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구주가 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 험한 곳을 살아가면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의지하고 있으면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므로 좋은 일은 좋아서 좋고, 나쁜 일은 좋아지게 될 것이니 좋고 항상 좋으신 하나님을 모시고 이 세상에서 살다가 천국에 올라가게 될 것인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항상 같이 계시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십니다. 아멘.
나에게로 와서 마셔라
요한복음서 7:37-39 / 이은규 목사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던 길을 장례의 대열에 참여했다가 가보게 되는 경우가 더러 있습니다. 육지와 대부를 잇는 시화방조제를 처음 건너게 된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습니다. 몇 주 전에 소개해드렸던 성역 30주년 삼겹살 파티를 열었던 선배 목사의 어머니가 오래 전에 세상을 떠나셨을 때의 일입니다. 병원에서 열리는 예배에만 참석을 하려 했는데... 그날 아침에 참석한 사람이 너무 적었고, 게다가 목사들 중에선 장지까지 가는 사람이 없어서 부랴부랴 다른 친구 목사와 함께 장지까지 가게 되었습니다. 마침 선배의 고향이 대부도여서 가는 길에 시화방조제를 처음 건너게 되었는데요... 그냥 입이 딱 벌어지고 말았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먼 거리를 막을 생각을 하였을까?
하지만, 처음 시화방조제가 완성되었을 때에는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모양입니다. 바다와는 완전히 차단 된 담수호였는데요... 제가 생각해보아도 그 거대한 호수가 오염될 것은 너무나 분명해 보였습니다. 아무리 정화시설을 통해서 잘 처리된 물이 흘러든다고 하여도, 가정이나 공장에서 흘러들어가는 물이라든지... 심지어는 목장에서 흘러드는 가축들의 폐수를 어떻게 감당할 수가 있는 것인지... 아무리 면적이 넓은 호수라도 오염이 되는 것은 시간문제처럼 보였습니다. 시회방조제가 완공된 것이 지난 1994년 초였는데요... 실제로 그런 일이 벌어지고 말았습니다. 불과 2년 만에 호수의 수질은 어떻게 손을 쓸 수가 없을 정도로 나빠지고 말았습니다.
하는 수 없이 1998년부터 막아 놓았던 해수 갑문을 열어서 오염된 물을 내보내고 부분적으로 바닷물을 받아들이기 시작하였고, 2000년부터는 아예 담수화를 포기하였다고 합니다. 이렇게 갇혀 있던 물이 흐르기 시작하면서 시화호의 수질이 다시금 좋아지기 시작하였다고 합니다. 오염되었을 때에는 마치 간장처럼 새카맣던 호수의 상태가 좋아져서 이제는 그곳에서 수영대회를 열어도 될 정도가 되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수질이 좋아지면서 얻게 된 소득 중의 하나는 시회호가 온갖 생명들이 서식하는 생태계의 보고가 된 것이지요. 무려 180여종의 철새들이 찾는 새들의 보금자리가 되었고, 참게라든지 숭어 같은 많은 고기들이 떼를 지어서 바다와 호수를 오르내리는 모습을 얼마든지 볼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깨닫는 것은 자연이 스스로 가지고 있는 충만한 생명력이라고 하겠습니다. 물이 한 곳에 갇혀 있을 때... 그곳이 흐르지 못하고 소통하지 못할 때... 그 물은 점점 죽어가게 되었지만... 이렇게 갇혀 있던 물이 흐르게 될 때... 호수에 있던 물은 바다로 흘러 들어가고... 바닷물은 호수까지 흘러가면서 물이 서로 소통할 때... 거기서 다시금 생명의 활동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지요. 그곳을 지난 20년 동안 관리하고 있는 한 공무원은 이렇게 이곳에서 일어난 현상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간섭으로 만들어진 곳이지만, 자연이 말 없이 자기의 영역으로 만들어 낸 곳’이 바로 점점 더 생명이 살만한 곳으로 회복되어 가고 있는 시화호라고 설명을 합니다.
이렇게 올해로 만들어진지 20년이 된 시화호에 대한 기사를 읽다가 저는 에스겔서에 나오는 예언자 에스겔이 보았던 하나와 환상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성전의 회복에 대한 환상입니다. 제사장으로 사역을 하다가 바빌론으로 끌려간 에스겔은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이 이방인들에 의해서 어떤 수모를 당했는지를 똑똑히 보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에스겔서의 마지막 부분은 이렇게 이방인들에 의해서 처참하게 무너져버린 예루살렘성전이 다시 세워지는 환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을 데리고 가서 새롭게 세워진 성전의 구석구석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런데... 성전에 대한 환상의 마지막 부분에 아주 인상 깊은 장면이 나옵니다. 성전의 문지방 밑에서 물이 솟아 나와서 흐르기 시작합니다. 그 물은 성전과 제단 밑을 돌아서 세상으로 흐르는데요... 한 450미터쯤 흘러갔을 때, 그 물은 에스겔의 발목을 적시는 정도였습니다. 다시 그 정도를 내려가서 건너보니 이번에는 물이 그 무릎까지 올라옵니다. 다시그만큼을 갔더니 이번에는 허리까지 올라오고... 다시 한 번 그렇게 했더니... 물은 헤엄을 쳐서 건너야 할 정도로 깊어지고 풍성한 강으로 변해있습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물에서 올라오게 하셨는데요... 이미 강의 양쪽 언덕에는 많은 나무가 있었습니다. 그 때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물은 동쪽 지역으로 흘러 나가서, 아라바로 내려갔다가, 바다로 들어갈 것이다. 이 물이 바다로 흘러 들어가면, 죽은 물이 살아날 것이다. 이 강물이 흘러가는 모든 곳에서는 온갖 생물이 번성해서 살게 될 것이다.’(에스겔서42:8-9a) 성전에서 솟아나기 시작한 물... 그것이 바로 생명의 물입니다. 처음엔 그것은 아주 작은 것이지만... 점점 더 풍성하고 깊어져서 큰 강을 이루고... 그 물이 닿는 곳마다 생명들이 다시 살아나게 됩니다. 심지어는 죽음의 상징인 사해조차도 그 물이 흘러 들어가면 다시 살아나게 됩니다. ‘이 물이 사해로 흘러 들어가면, 그 물도 깨끗하게 고쳐질 것이므로, 그곳에도 아주 많은 물고기가 살게 될 것이다. 강물이 흘러가는 곳이면 어디에서나, 모든 것이 살 것이다.’(겔47:9b)
이렇듯 성소로부터 흘러나오는 물은 강 주변에서 자라나는 나무에게도 영향을 끼치고 생명을 공급하여 줍니다. ‘그 강가에는 이쪽이나 저쪽 언덕에 똑같이 온갖 종류의 먹을 과일 나무가 자라고, 그 모든 잎도 시들지 않고, 그 열매도 끊이지 않을 것이다. 나무들은 달마다 새로운 열매를 맺을 것인데, 그것은 그 강물이 성소에서부터 흘러 나오기 때문이다. 그 과일은 사람들이 먹고, 그 잎은 약재로 쓸 것이다.’(겔47:12) 마치 요한 계시록의 마지막 부분을 읽는 느낌입니다. 장차 회복될 성소에서부터 흐르는 물... 그것이 바로 세상을 치유하고 생명을 회복하게 하는 신비한 힘을 가지고 있어서... 그 물이 흐르는 곳마다 죽어 있던 것들이 다시 살아나게 되고 생명으로 충만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성령강림절을 맞이하였습니다. 주님께서 약속하셨던 성령님께서 오늘 우리가 모인 이 곳에... 그리고... 이렇게 주님을 찬양하며 예배를 드리는 여러분 마음 가운데 충만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아마 성령님 하면 여러분들에게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을 것입니다. 어쩌면 이것은 우리들 한국교회가 가진 공통적인 현상이라고 하겠는데요... 가장 먼저 생각하게 되는 것은 아마도 활활 타오르는 불과 같은 성령이 아닐까 합니다. 폭발적인 에너지를 우리들에게 부여하고... 우리의 가슴을 주체할 수 없는 열정으로 달아오르게 하시는 성령님... 이렇게 불처럼 활활 타오르는 성령님의 이미지가 우리들의 마음속엔 깊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옛날에 부흥회에 참여하면 어떤 목사님들은 일부러 분위기를 고조시키면서 불 받아라... 이렇게 외치셨고... 그런 성령님께서 우리들에게 임하셨을 때... 우리들은 정말 무서운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가하면 성령님을 생각할 때에 떠오르는 이미지는 마치 바람과도 같은 성령님입니다. 이것은 주님도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요한복음서3:8) 바람 같은 성령이란 그 정체를 알기 힘든 신비함에 감추어져 있기도 하고... 세상의 어느 것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함을 생각하게 하기도 하고요... 바람 자체가 우리들에게 생명을 부여하는 생기로 읽혀지기도 합니다. 바람과도 같은 성령은 우리에게 다시금 생명력을 부여 하여 주고 살아 있게 만드는 힘이라고 하겠습니다.
아마도 성령님을 물과 같은 이미지로 생각하는 경우는 그다지 많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오늘 말씀을 보면, 예수님은 성령님을 이렇게 물에다가 비유하여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목마른 사람은 다 나에게로 와서 마셔라. 나를 믿는 사람은, 그의 배에서 생수가 강물처럼 흘러나올 것이다.’(v.37-38)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는데요... 이 대목을 다시 풀어서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를 믿은 사람이 받게 될 성령을 가리켜서 하신 말씀이다.’(v.39) 여기에서 주님은 생수를 통해서 성령님을 우리에게 소개하고 느끼게 하고 계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주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곳은 예루살렘 성전이었고... 때는 유대인들의 중요한 절기 중의 하나인 초막절 축제가 그 절정에 다다른 날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이 곡식을 창고에 들이는 추수감사를 기념하는 이 절기는 그들의 광야생활을 연상하게 하는 부분도 있습니다. 이집트를 빠져나와서 가나안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조상은 광야에서 이렇게 초막을 치고 살았던 때를 기념하는 절기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초막절 행사에서 빠지지 않는 중요한 전통이 있는데요... 그것이 바로 물과 관련이 있었습니다. 축제기간동안 제사장들은 근처의 수로에서 아침마다 물을 길어다가 엄숙한 모습으로 그것을 지고 가서는 아침 번제를 드릴 때에 격식을 갖추어서 물도 함께 제단에 드리는 풍습이 있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살아가는 데에 있어서... 특별히 농사를 짓는 일에 있어서 물이 가지는 중요성을 염두에 두고 하는 행동이라고 합니다. 특히 초막절 축제가 끝나면 곧 우기가 시작됩니다. 이른바 늦은 비라고 하는데요... 이것은 그들의 농사에서 참 중요한 일입니다. 비가 많이 내려서 대지를 적셔 주어야만 그들은 농사를 지을 수가 있으니까요.
초막절에 예루살렘에 가신 예수님은 아마도 날마다 행하여지는 이런 물을 중심으로 한 예식을 지켜보셨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제 초막절 명절이 다 끝나가는 마지막 날... 사람들이 무엇인가를 하늘로부터 기대하는 중요한 날에 주님께서 그냥 지나치시지를 않으신 것이지요. ‘명절의 가장 중요한 날인 마지막 날에, 예수께서 일어서서 큰 소리로 말씀하셨다.’(v.37) 여러 면에서 참 의미심장한 표현입니다. 사실 예수님은 이번 초막절에 예루살렘에 오는 것을 두고 많이 망설이셨습니다. 주님의 형제들까지도 예루살렘같이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에 가야 자신을 잘 알릴 수 있을 거라고 충고하였지만, 주님은 ‘내 때가 아직 오지 않았다.’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완곡하게 거절하셨습니다. 예루살렘에 가면 여러 사람들에게 시달림을 받을 것이 분명하였던 것이지요.
그러다가 주님은 아무도 모르게 예루살렘으로 가셨습니다. 그리고 그가 성전에서 사람들에게 가르치시며 자신을 드러내셨을 때, 사람들은 예수에 대해서 여러 가지 말들을 하였습니다. 예수를 그리스도요 메시야로 받아들이려는 사람도 있었고, 노골적으로 적대적인 감정을 드러내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가 명절이 끝나는 중요한 날에 아주 큰 소리로 말씀하셨다는 것... 여기에는 어떤 깊은 주님의 의도와 생각이 담겨 있다는 것이지요. 간단히 말하면 믿을 사람은 믿고 생명을 얻든지... 아니면 믿지 못하는 사람들은 걸림돌에 걸려서 넘어져서 생명에 초대를 받지 못하든지...
이제는 그것이 주님 자신을 통해서 명백히 드러나야 할 때가 되었다고 주님은 판단하고 계신 것입니다. 더 이상 머뭇거릴 시간이 없습니다. 마냥 예수를 제 삼자의 입장에서 지켜보면서 탐색만하고... 예수를 다른 것이 좋은지 나쁜지... 나에게 어떤 이득이 있을지... 그것을 계산하고 있을 때는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예수는 비록 예루살렘에 들어 올 때는 조용하게 들어오셨지만... 이렇게 명절의 가장 중요한 날에...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무엇인가 주실 것이라는 기대감으로 충만한 시간에 큰 소리로 사람들에게 말씀을 하셨던 것이지요.
‘목마른 사람은 나에게로 와서 마셔라...’(v.37) 주님은 이렇게 말씀을 시작하셨습니다. 생각해보면 이것은 그곳에 모인 사람들에겐 커다란 충격이기도 하고 심각한 도전이기도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주님은 자신을 사람들에게 생수를 주는 분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전통적인 초막절 행사에 대한 심각한 도전이라고도 하겠습니다. 물이 얼마나 중요한지... 그것을 그들도 잘 알고 있습니다. 특별히 이렇게 초막절처럼 곡식을 거두어들이고 다음의 농사를 준비할 때...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적절한 때에 비를 내려주시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런 물에 대한 간절함이 축제 기간 동안에 물을 길어서 제단에 올리는 엄숙한 예식을 통해서 드러나는 것이지요.
주님은 이런 풍습을 마음에 두시면서 말씀을 하시는 것이지요. 과연 누가 물을 내리는가? 누가 비를 내려서 메마른 대지를 생명으로 적시고 농사를 짓게 하는가? 설혹... 이렇게 메마른 대지를 적시는 일은 이렇게 날마다 물을 길어서 제단에 바치는 예식을 통해서 해결된다고 하더라도... 이렇게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목마름... 우리가 세상을 살아오는 동안에 저마다가 느끼는 내면의 목마름... 그것은 도대체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곡식들에게 생기를 불어 넣는 비는 하늘에서 내리지만... 우리들의 메마른 가슴을 적시고... 우리의 삶에 생명의 기운이 넘치게 하는 일은 도대체 어떻게 가능한 것인지...
물론 전통도 참 중요합니다. 수로에서 물을 길어서 엄숙하게 운반하고... 그것을 제단에 바치는 일... 그것도 소홀히 할 수 없는 일이겠지만... 그것이 과연 축제에 참석한 이들에게... 내면의 목마름을 어찌할 수 없어 하는 이들에게 어떤 영향을 줄 수 있을까요? 예수는 이제 자신이 생명의 물을 주는 분이라고... 명절이 끝나는 가장 소중한 시간에... 이렇게 모든 일을 멈추고 축제여 참여 한 이들에게 내리시는 가장 소중한 하나님의 선물... 하나님의 축복 그것이 바로 예수님 자신이라고 주님은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나를 믿는 사람은...’(v.38a) 그렇기에 믿음... 특별히 나사렛 예수를 향한 믿음은 참 중요합니다. 누가 뭐라고 하더라도 나사렛 예수를 하나님께서 나에게 보내신 그리스도로 받아들이고 믿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만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새로운 생명의 대열에 참여 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모두에게 이런 믿음이 있기를 바랍니다. 나의 목마름을 해결하시는 분... 나에게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명의 물을 주시는 분은 오로지 주님뿐입니다. 이런 믿음이 우리들 모두에게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오늘이 아니더라도 이미 주님은 우리들에게 자신을 생명의 물을 주시는 분으로 드러내고 고백한 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수가성에서 홀로 물을 길으러 나왔던 사마리아의 여성을 만났던 때였습니다. 사실 그 때 주님은 참 힘들고 어려웠습니다. 긴 여행 끝에 지칠 대로 지쳐 있었습니다. 물을 좀 달라고 했다가 거절을 당한 것을 보면... 아마 몰골이 말이 아니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그녀에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알고, 또 너에게 물을 달라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았더라면, 도리어 네가 그에게 청하였을 것이고, 그는 너에게 생수를 주었을 것이다.’(요한4:10) 예수는 이렇게 자신을 물을 주는 분으로서... 그것도 영원히 목마르지 않게 하는 샘물을 주는 분으로서 자신을 그녀에게 소개하십니다.(요한4:14)
처음엔 그녀는 믿지 않았습니다. 생각해보면 참황당한 일이지요. ‘어떻게 저렇게 초라한 몰골을 한 사람이... 고작하게 자기의 목마름도 해결하지 못하고 자신에게 물을 좀 달라고 하던 궁색한 사람이 어떻게 나에게 물을 줄 수가 있을까? 저 사람은 물을 퍼 올릴 두레박도 가지고 있지 않은데...’ 예수를 향하여 사마리아 여성이 가진 생각이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주님과의 대화가 거듭 될수록... 그녀의 마음속에 있던 의심은 사라지고... 그녀는 다른 눈으로 주님을 바라보기 시작합니다. 마침내 그녀는 주님이 어떤 분인지 알게 됩니다. ‘너에게 말하고 있는 내가 그다.’(요한4:26) 나사렛 사람 예수! 그 분이 그녀가 막연하게나마 기다리던 메시아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그녀는 비로소 그녀가 원하던 바로 그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이제껏 그녀를 괴롭히던 목마름이 사라진 것은 말할 필요도 없는 것이지요.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들 모두에게 이러한 믿음이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우리 주님 나사렛 예수는 우리들에게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명의 물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누구든지 이러한 믿음을 가지고 주님께 나오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주님이 주시는 물을 통해서 생명이 회복되고 치유되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더 이상 목마름으로 시달리지 않아도 되는 것이지요.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믿는 사람은, 성경이 말한 바와 같이, 그의 배에서 생수가 강물처럼 흘러나올 것이다.’(v.38) 여기에서 ‘그의 배에서 생수가 강물처럼 흘러나올 것이다...’ 이 말씀이 좀 논란의 여지가 있습니다. 누구의 배를 말하는가? 물론 영어 성경을 보면 배를 지칭하기 보다는 가슴으로 번역이 되기도 하였는데요... 어떤 이들은 주님을 믿는 각자의 배나 가슴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렇게 말을 하기도 하고요... 다른 분들은 주님의 배나 가슴을 말하는 것이라고 설명을 하기도 합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생수가 우리의 내면을 흘러 적시는 현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을 어떤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우리들 각자의 배에서 생수가 흘러나오게 된다고 하더라도... 그 시작은 나사렛 예수라고 하는 것을 아무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주님을 믿고 의지하고 주님을 바라보게 될 때에... 그것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영원히 마르지 않는 생수의 근원에 연결되었다는 뜻이 여기엔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신비한 현상은 어떤 특정한 절기에만 엄숙한 예식을 통해서 제단에 물을 바치는 일에 비할 수 없이 생동적이고 피부로 우리에게 와 닿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주님은 언제 어디서든지... 우리가 목마름을 속에서 주님의 도우심을 갈망할 때면 항상 우리 곁에 다가오시며 우리의 목마름을 해결하여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목마름으로 목마름을 극복하려 하는 것... 이것이 오늘처럼 메마른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주님께서 주시는 지혜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목마른 사람은 다 나에게로 와서 마셔라...’ 주님이 찾고 도움을 주시려 하는 이들은 이렇게 목마름을 느끼는 사람들입니다. 수가 성에서 사마리아여인이 주님을 만나 것도 이런 목마름이 동기가 되었는데요... 중요한 것은 그 목마름이 어디를 향한 것인가에 있습니다. 수가성 사마리아 여성의 목마름은 처음에는 단지 육신적인 것이고, 세상적인 성공이나 즐거움에 있었습니다. 그런데요... 그녀의 경우에 나사렛 예수와 대화를 나누는 중에 그 목마름이 주님을 향한 목마름으로 서서히 달라집니다. 처음엔 예수는 관심에도 없었습니다. 우물에서 빨리 물이나 퍼가자... 그랬던 생각이 주님을 향한 관심으로 바뀌는 것이지요.
도대체 이 분은 누구일까? 처음엔 자기의 목마른 것도 해결하지 못하는 한심한 사람처럼 보였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생각이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이 우물을 팠던 우리 조상 야곱 같기도 하고... 자기의 과거를 알고 있는 것을 보면...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보내신 예언자처럼 보입니다. 그녀의 마음은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점점 더 주님을 향하여 집중됩니다. 이렇게 주님을 향한 목마름이 그녀의 마음속에서 생겨날 때... 그녀는 점점 세상을 향한 목마름으로부터 벗어나게 되었고... 마침내 세상의 모든 욕심이나 목마름으로부터 자유하게 되었습니다. 단지 유대인 남자라고 여기던 나사렛 사람 예수가 하나님께서 보내신 그리스도요 메시아라는 것을 알게 되는 순간... 그 순간이 그녀의 내면에서 생수의 샘물이 툭 터진 순간입니다.
‘하나님, 사슴이 시냇물 바닥에서 물을 찾아 헐떡이듯이, 내 영혼이 주님을 찾아 헐떡입니다.’(시42:1) 옛날 한 신앙인의 선배는 이렇게 주님을 향한 간절함을 고백한 적이 있습니다. 무엇이 그를 이렇게 목마르게 하였을까요? 이렇게 그로 하여금 간절히 하나님만을 바라보게 하고 하나님을 목말라하게 만들었던 까닭은 무엇일까요? 어쩌면 그는 사업이 망해서 어려움을 겪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제껏 잘 지내던 친구들이 등을 돌려서 배신감과 섭섭함으로 힘들어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가 이런 자기를 불편하고 힘들데 만드는 모든 것을 통해서 오로지 하나님만을 목말라하고... 하나님만을 그리워하고... 하나님을 통해서만 모든 갈증을 해결 하려고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어떻게 하나님께서 이런 사람을 그냥 지나칠 수가 있을까요? 그는 이렇게 마치 목마른 사슴처럼 헐떡거리며 하나님을 찾게 되었을 때... 어느샌가 가슴은 진정되었고 다시금 새로운 힘과 용기를 얻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그렇게 낙심하며, 어찌하여 그렇게 괴로워하느냐? 어는 하나님을 기다려라. 이제 내가 나의 구원자, 나의 하나님을 또다시 찬양하련다.’(시42:11) 이 사람은 목마름으로 목마름을 극복한 사람입니다. 세상에서 여러 참 고달프고 힘들게 살면서 얻은 목마름을 그는 하나님을 향한 목마름으로 바꾸었는데요... 어느덧 그의 근심과 걱정은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찬양으로 변하였습니다.
‘목마른 사람은 다 내게로 와서 마셔라...’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세상을 향한 끝없는 목마름들... 그것은 마치 바닷물을 마시는 것과 같아서 점점 더 그 정도가 심해가고 도저히 해결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목마름의 방향이 주님을 향할 때... 주님을 통해서 그 목마름을 해결하려고 할 때에... 주님은 나의 내면에 목마르지 않는 생수의 샘을 터뜨려 주십니다.
주님이 주시는 물이 생수인 것이지요. 그 물이 흘러가는 곳마다 다시 생명이 소생하게 되고... 나무들이 자라나게 되고 열매를 맺게 됩니다.
이러한 주님의 은혜가 우리들 모두에게 충만 하기를 바랍니다.
배에서 생수기 흘러넘치는 삶
요한복음 7:37-39 / 계강현 목사
유머작가인 ‘루코크’라는 사람은 현대판 성령강림의 사건을 다음과 같이 풍자해서 썼다. “예루살렘교회에서 ‘첫 예배를 드림’이라는 광고가 났다. 적어도 120여명은 모였어야 할 예배에 출석한 사람은 겨우 40여명이었다. 베드로는 최근 가족과 함께 구입한 갈릴리 호수의 별장으로 주말여행을 떠났고, 바돌로매는 집에 손님이 와있기 때문에 예배에 나오지 않았다. 빌립의 가족은 지난 밤 늦도록 계속된 파티의 후유증으로 자고 있으며, 안드레는 새 차를 구입하려고 모토쇼장에 갔다. 마태는 근무처인 세무서에 시간 외 근무를 나갔고, 요한은 사업차 골프를 치러 떠났다. 도마는 취직시험이 주일과 겹쳤으니 당연히 나올 수 없었다. 불길 같은 성령도 망설이다가 다락방 앞에서 되돌아갔다.”
‘데이비드 브라이언트’(국제 기도합주회 창시자)는 미국 교회를 진단하기를, “매주일 수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출석하고 있지만 그중에 50%는 구원의 확신이 없고, 그 중 95%의 신자는 성령의 인격과 사역의 내용도 모르고 있고, 또한 미국 신자의 2%만 전도하고 있다.”고 했다. 이 말은 성령의 역사를 모르는 신자는 신앙생활이 무엇인지 잘 모른다는 뜻이고, 성령의 역사를 모르면 전도도 불가능하다는 얘기다.
이것이 우리 이야기가 되지 않도록 경계해야 한다. 우리의 심령과 교회가 성령으로 충만하지 않으면 곧 시들해지고 삭막해지고, 여러 면에서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한다. 돌아가는 게 마치 기름칠이 안 된 기계를 돌리는 것과 같이 삐거덕거리게 된다. 부부사이에도 기쁨과 감사가 사라진다. 직장과 사업장에서 일하는 것도 재미가 없어진다. 목장과 교회 사역에도 확신도 약해지고 기쁨이 메말라간다. 우리 신앙생활에서 성령님이 안 계시면 처음부터 끝까지 아무 것도 안 되게 되어 있다. 여러분은 과연 이 성령님으로 충만하신가?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마치 전기 공급이 끊어진 것같은 신앙의 정전사태를 겪고 계실 것이다.
예수님은 초막절이라는 명절 끝날에 예루살렘에 모인 백성들에게 이렇게 외치셨다. 요 7:37-38,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이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그런데 그 다음 v39에서 설명하기를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고 했다. 목마른 자는 누구나 예수에게 나와 물을 마시라고 하시면서 그것은 뱃속에서 흘러나오는 생수의 강이라고 하셨는데, 그게 바로 성령이라고 하셨다. 여기 ‘배’라고 번역한 단어는 헬라어로 ‘κοίλία(코일리아)’인데, ‘사람의 깊숙한 내면’을 일컫는 말이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내면 깊숙한 데서 성령의 생수의 강이 솟구쳐 올라온다는 뜻이다. 오늘 우리도 이렇게 내면에서 성령의 생수가 강처럼 흘러넘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1.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에 영접할 때 성령의 샘물을 마시게 된다.
요 3:5-7,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 고전 12:3,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속에 영접할 때 영혼 깊은 곳에는 형언할 수 없는 변화가 일어난다. 예수님을 영접하는 순간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생수의 샘물인 성령을 우리 가운데 보내주시기 때문이다. 성령이 우리 가운데 오시면 마치 바람이 오는 것같이 언제 왔는지 모르지만, 부인할 수 없는 몇 가지 흔적이 남는다.
1) 우리의 영적인 눈이 열린다. 비록 한순간에 다 볼 수는 없지만, 마치 창문 틈새로 내다보듯 지금까지는 전혀 볼 수 없었던 영적인 세계를 보게 된다. 이전까지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손으로 느껴지는 감각적이고 물질적인 것에 의지하여 살았다. 또한 한 세상 살다 죽으면 한줌 흙밖에 무엇이 남겠는가 하고 허무감 속에 살았다. 하지만 예수님을 우리 마음속에 모셔 성령의 생수를 마시게 되면 영적인 세계가 열리기 시작한다. 성경 속에서 하나님의 지식과 지혜를 만나게 된다. 전에는 전혀 알지 못했던 하나님의 말씀이 마음속에서 깨달아지기 시작한다. 하나님의 지혜가 마음속에 들어와 삶의 모든 일에 새로운 세계가 전개된다. 천국과 지옥의 존재를 믿고 알게 된다.
2) 이제는 인생을 바라보는 가치관이 달라지기 시작한다. 이전에는 부귀, 영화, 공명을 최고의 가치로 알고 있었다면, 이제 생수를 마시자마자 하나님을 섬기는 것과 하나님을 즐겁게 하는 것과 이웃을 위한 삶을 살게 되고, 내세의 상 받는 일이 삶의 목표로 되는 가치관의 변화를 맛보게 된다. 생수의 샘을 마시면 우리의 가치관이 달라지면서 사람들이 나를 인정해도 좋고, 안 해도 좋고, 나를 칭찬해도 좋고, 손가락질해도 상관이 없어진다. 오직 우리의 가치관은 하늘나라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을 즐거워하고 그리스도를 인한 조롱과 핍박에 오히려 기쁨이 넘치게 된다.
3) 그뿐 아니라 매일 하나님과 함께 살려고 노력하게 된다. 이 샘물을 마신 사람마다 이제는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의 뜻을 앞세우게 된다. “이 사업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사업일까?”, “이 사람과 만나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실까?”, “이 일을 하는 것이 하나님을 즐겁게 해드리는 것일까?” 매일 매일의 생활을 하나님의 뜻과 연관시키고 자기의 생애 가운데 일어난 사건들을 하나님의 뜻에 따라 해석하려고 시도한다. “내게 이런 시련이 다가오는 것은 내가 무언가를 잘못했기에 하나님께서 나를 연단하기 위함인가 보다. 하나님께서 나를 꾸중하시는 것이 아닐까? 하나님께서 나에게 새로운 것을 가르치려고 지시하시는 것이 아닐까?” 이게 바로 영원토록 솟아나는 샘물이 우리 속에 들어오면 나타나는 변화다.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을 마음에 모시자, 심령 속에 영생토록 솟아오르는 생수가 들어가 그녀를 순간적으로 변화시켰다. 그 여인은 그 자리에서 물동이를 버려두고, 그토록 만나기 싫어하던 동네사람들에게 달려갔다. 관계를 단절하고 사람 만나기조차 싫었했던 이 여인에게 자신의 오픈이 이루어졌다. 스스로 좌절했던 여인의 가슴에 무언지 모르게 새로운 것이 솟구치면서 다시 한 번 살아보겠다는 의욕이 생겨났다. 삶에 새로운 가치를 발견한 것이다. 그녀는 그 즉시 전도자로 변화되어 이웃들을 전도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믿는 것은 철학이나 종교나 학문이 아니라, 영생토록 솟아나는 생수가 부어지는 실제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할 때 이런 거듭남의 변화, 영원한 생수의 역사가 시작되는 것이다.
2. 배에서 생명수가 흘러넘치는 성령충만을 받아야 한다.
요 7:37b-38,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이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주님은 우리가 목만 축일 정도로 성령의 생수를 조금 마시는 걸 원하지 않으신다. 생수의 샘물이 변하여 생수의 강이 되고, 나 혼자 마실 뿐만 아니라 넘쳐 흘러 주위 모든 사람에게 영향을 끼치기를 원하신다. 이것이 바로 성령충만이다.
그런데 v39b에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않으셨으므로 성령이 아직 그들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고 요한사도는 부연설명하고 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었지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시자 외롭고 힘들었다. 그러나 오순절날 성령님이 강림하실 때 생수의 강이 그들 속에서 넘쳐났다. 생수의 강이 넘쳐나자 그들 속에 있던 불안, 공포, 초조, 절망의 산들이 일순간에 사라지고 오직 믿음, 소망, 사랑의 강물이 흘러나와 베드로를 위시하여 모든 제자들이 밖으로 뛰쳐나가 외쳤다. 그때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와 말씀을 들었다. 거기서 외칠 때 하루에 삼천 명이 회개하고, 오천 명이 회개하고 예수 믿는 역사가 온 예루살렘에 일어났다.
그들은 우물을 더이상 자기들만 간직하고 있지 않았다. 생수의 강이 솟구치고 이 강물이 흘러가는 곳엔 아무도 견디지 못하였다. 강물이 흘러가는 곳엔 아무 것도 그 흐름을 막을 수가 없었다. 이와 같이 우리 속에 생수의 강이 흘러나기 시작하면 일생을 살아가는 동안 염려, 근심, 불안, 초조, 절망, 고통 이런 것들이 수없이 밀려와도 다 씻겨나고 만다. 그리고 우리 속에는 오직 믿음 소망 사랑만이 넘실거린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힘있게 살게 되고 담대하게 복음증거하게 된다. 이 때문에 우리 예수님이 우리에게 성령 충만함을 받으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바울사도는 엡 5:18-21,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고 말씀했다.
왜 여기서 성령 충만을 술 취함과 비교했을까? 이 세상에 타락의 역사가 계속되는 이상 술 취함은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은 인생을 살아갈 때 가슴속에 즐거움 즉 황홀감이 필요하다. 아무리 좋은 기계도 윤활유를 치지 않으면 망가지는 것과 같이 사람들에겐 가슴 속에 황홀감이 없으면 살 수가 없다. 밥만 먹고 옷만 입고는 살 수 없는 게 인생이다. 왜 가정주부들이 신경쇠약증에 걸리는 줄 아는가? 집에 들어앉아 매일 아침부터 저녁까지 같은 일을 반복하기 때문이다. 밥 짓고 설거지하고 집안 청소하고, 점심 짓고 설거지하고, 저녁이면 저녁밥 짓고 설거지한다. 그리고는 똑같은 남편 얼굴만 쳐다본다. 이런 세월이 반복되면 마음 속이 녹슬고 병이 든다. 뭔가 우리에게는 심장을 박동시키는 기쁨이 필요하다.
그러면 어디서 어떻게 이런 기쁨을 얻을 수 있나? 세상사람들은 술 취함에서, 마약에서, 음란방탕에서, 혹은 돈과 권력에서 이 기쁨을 얻으려 한다. 그런데 이런 것들은 일시적으로 콧노래를 부르게 한다. 술이 취하면 소심한 사람이 담대해져서 가슴을 펴고 고함도 친다. 그런 재미는 느낄 수 있을지 몰라도 잠깐일 뿐이다. 시간이 지나면 골치가 아프고 돈도 낭비하고 또한 도덕적인 방탕으로 자신의 파괴를 초래하게 되고, 가정의 불화를 일으키게 된다.
이렇게 바울사도가 술 취함과 성령 충만을 비교한 것은 사람마다 추구하는 그 황홀감을 성령 충만을 받으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기 때문이다. 성령이 충만하면 하나님의 살아계신 증거가 뚜렷해지기 때문에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하나님에게 내어맡겨 버리게 된다. 우리의 생활에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 없을 수는 없지만, 언제나 하나님에게 내어맡김으로 마음이 가벼워지고,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가 흘러나온다. 성령 충만한 사람치고 찬송하지 않는 사람을 본 적이 있는가? 왜냐하면 성령님이 우리 속에 들어오시면 우리 마음이 태연할 수가 없고 황홀감으로 기쁨이 가득해지기 때문이다. 엎드려 기도할 때 마음에 기쁨이 물밀듯 넘쳐온다. 이는 돈 들지 않는 기쁨이요, 골치 아픔이 없는 기쁨이요, 허랑 방탕을 갖다 주지 않는 기쁨이요, 우리에게 풍성한 생명을 부여하는 기쁨이다.
또한 성령 충만하면 술 먹고 얻게 되는 배짱과는 비교할 수 없는 큰 배짱이 생겨 홍해도 걸어 들어가고, 여리고성도 돌아 무너뜨리며, 물 위로도 걷기 위해 달려들고,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려고 달려드는 배짱이 생겨난다. 엡 3:16,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 성령을 통해 우리의 속사람인 영이 강건해지고 담대하게 된다. 우리는 이 배짱으로 환경을 두려워하지 않고 강하고 담대해진다. 믿을 백 하나도 없고, 내 앞길이 칠흙같이 어두워도 하나님의 말씀 위에 굳게 서서 믿음으로 주님과 함께 밀고 나가면 이 세상에서 이루어지지 못할 일들을 해내고 만다. 성령이 충만하면 진실로 이런 담력이 생기는 것이다. 이런 성령 충만함을 누리며 살자.
3. 왜 우리는 성령 충만함을 받지 못할까?
1) 나아가 사모하며 간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성령 충만함은 주님에게로 나아가 사모하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여러분도 누군가 여러분을 환영하지 않는 집에서 살려고 해보라. 눈칫밥 먹고 사는 게 얼마나 불편한 일인가? 성령 하나님이 우리 안에 오시어 장막을 정하셨는데, 우리가 별로 환영하지도 사모하지도 눈에 눈곱만큼도 발가락 사이에 낀 때만큼도 여기지 않는다면 어떻게 인격이신 성령 하나님이 우리를 기뻐하시겠는가? 그러므로 성령 하나님을 환영하고 사모하고 충만하여 지배하시기를 간구해야 한다. 가만히 있지 말고, 성령 충만함을 바라고 말로 표현하여 기도하라. 눅 11:11-13, “너희가 악할지라도 자녀에게 좋은 것을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나님은 성령을 주신다고 약속하셨다. 그러나 아무에게나 주는 것이 아니라, ‘구하는 자에게’ 주신다고 하셨다. 우리는 구해야 한다. 구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반드시 성령충만을 주신다.
2) 죄에 빠지기 때문이다. 초대 어떤 교부는 길을 다닐 때나 집에 있을 때나 무엇을 하더라도 언제나 마치 살얼음판을 걸어가듯 조용하고 조심스럽게 행동하였다. 주위 신자들은 이를 너무 지나치다고 생각하여 그에게 물었다. “답답하지도 않으십니까? 그렇게 조심스럽게 행동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러자 그 교부는 웃음을 띤 얼굴로 이렇게 말했다. “나는 하나님과 성령을 모신 몸일세. 내 몸은 곧 성전이란 말이네. 그러니 어떻게 조심하지 않을 수 있으며 깨끗하게 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성령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시다. 그런 분이 우리 마음속에 오셔서 장막을 짓고 사시는 것이다. 우리가 거룩하신 분을 모시고 살려면 우리도 거룩해야 한다. 하나님의 성전을 술 담배로 더럽혀놓고는 성령 충만할 수 없다. 거룩하다는 말은 하나님께 구별되었다는 뜻이다. 세속의 죄로부터 벗어난 정결한 삶을 추구해야 한다. 죄와 싸우는 삶을 살아야 한다. 혹시 죄에 넘어갔을지라도 빨리 죄를 자백해고 돌이켜야 한다. “우리가 만일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를 사하실 것이요. 우리를 모든 불의에게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9) 죄가 가득한 마음을 성령 하나님이 지배하실 수 없고 통치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분은 인격이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분은 절대 강제로 우리를 집행하지 않는다. 언제나 우리가 자발적으로 순종하기를 기다리신다. 날마다 순간마다 생각나는 죄를 다 내어놓고 자백하라. 그러면 다시 성령 충만하게 해주신다.
3) 내 자아를 꺾고 성령님에게 순종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흔히 하나님을 내 머리의 한계 속에 가둬두려고 한다. 내 이성의 한계 속에, 내 경험의 한계 속에, 내 신학의 한계 속에 가둬두려고 한다. 성령 하나님은 삼위 하나님이시고 인격체이시다. 보잘 것 없는 인간의 이성에 가둬둘 수 없는 하나님이시다. 성령을 소멸시키지 말아야 한다. 성령을 소멸시키는 것은 성령을 자꾸 제한하여서 훼방하는 것을 의미한다. 내가 하지 못하는 사역이라고, 내 은사가 아니라고 성령님이 일하시는 것을 방해해서는 안 된다. 이것이 영적인 교만이 된다.
그런 면에서 우리 자신이 성령의 강같은 역사를 가로막는 둑과 같다. 우리 고집과 불순종이 껶여지면 성령의 강물이 흘러넘치게 된다. 우리의 고집과 불순종과 자기 중심의 생각이 얼마나 강한지 아는가? 잘 모르면 가족들에게 한 번 물어보라. 가족이 제일 잘 안다. 우리 고집이 보통 고집이 아니라, 황소고집이다. 성령님께서 역사하고 싶으셔도 우리의 고집 때문에 아무 것도 못하신다. 나는 착하다, 성격이 유하다는 소리를 많이 듣는 사람이다. 그런데 이외로 착한 사람, 유한 사람이 영적으로 완고한 사람들이 많다. 성격 착한 것하고 순종하고는 별개의 문제다. 가정이 성령의 엄청나고 놀라운 역사를 경험하려면 여러분 자신의 강둑이 무너져야 한다. 그럴 때 성령의 강물이 가족들에게 흘러나가게 된다.
어느 목사님에게 거짓말하는 아들이 있었다. 이 분은 매우 엄격한 분이라 거짓말하는 아들에게 매를 대었는데, 매가 10대가 되고 점점 늘어나 100대까지 때렸단다. 약속은 지켜야 한다고 매 100대를 때리게 되었고 아이도 울고, 때린 아버지도 울었다. 하나님께 기도를 하는데 그렇게 물으시더란다. ‘너는 항상 잘했니?’ ‘아닙니다.’ ‘네가 잘못했을 때마다 네게 매를 댔다면 너는 어떻게 되었겠니?’ 그제서야 십자가 사랑과 용서의 복음이 마음 깊이 깨달아지더란다. 하나님 앞에 울면서 자신이 아들을 매로 다스린 것을 회개했다.
그런데 그 아들이 또 거짓말을 했다. 그때 탕자를 위하여 잔치를 베푼 아버지 비유가 생각났다. 그래서 온 집안에 풍선을 달고 장식을 하고 “웰컴”이라고 써붙이고 음식을 준비하고 파티를 해주었다. 아들은 오늘은 진짜 죽었다고 생각하며 집에 들어왔는데, 잔치 분위기에 눈이 휘둥그래졌다. 아버지는 아들을 안고 사랑한다고 하면서 울었다. 그때야 비로서 하나님 아버지 마음을 알겠더란다. 아들은 큰 충격을 받았지만 반신반의하는 것 같았다. 그래도 계속해서 사랑을 표현하고 고백하고 때린 것에 대하여 용서를 구했다. 그랬더니 아이가 변하더란다. 아들이 아버지에게 농담을 하던 날, 그 목사님은 비로서 이 아이가 자신을 아버지로 여김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 사랑을 모든 교인들에게 적용시키기 시작했다. 그랬더니 모든 문제가 다 풀리더란다. 모든 목회 전략, 목회 계획이 그 속에 있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일본에서 오랫동안 사역하시는 CCC 김성철 선교사님의 간증이다. 일본에서 선교하면서 한 번 크게 마음이 흔들렸던 때가 있었다고 한다. 바로 독도 문제로 한일간 갈등이 커졌을 때, 그렇게 일본 사람들이 밉고 용서가 안되더란다. 일본에 있다 보니 더욱 힘들어 일본 선교 자체를 포기하고 싶어졌다. 그때 필리핀에서 CCC 세계선교사 대회가 열렸는데, 저녁 기도회 시간에 눈물로 기도했다. 한국말로 울면서 “하나님! 도무지 용서가 안됩니다! 그들이 사랑해지지 않습니다!” 기도를 하는데, ‘나는 일본을 이미 용서하였는데 너는 왜 용서하지 못하느냐?’는 주님의 음성이 들렸다. 하지만 그래도 마음으로 용서와 사랑이 일어나지 않더란다. 그런데 그렇게 눈물로 기도하고 눈을 뜨니, 바로 앞에 일본인 목사님 한 분이 무릎을 꿇고 계셨다. 그리고 그 일본 목사님이 눈물을 흘리며 “김선교사님, 우리 일본을 용서해주세요!” 하더란다. 갑자기 마음이 뜨거워지며 일본에 대한 긍휼의 마음이 뜨겁게 일어났다. 그 일본인 목사님을 붙잡고 울었다. 주위에 있던 세계 선교사님들이 다 둥글게 모여서 같이 기도했다. 그날 이후로 일본 사람에 대한 미움이 사라졌다. 이후에 그들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한 번도 변한 적이 없었다고 한다.
우리의 문제는 여건이 어렵고 사람이 나쁜 것이 아니다. 어려운 환경 탓하지 마라. 나쁜 사람 만났다고 탓하지 마라. 성령님은 얼마든지 바꾸실 수 있다. 성령님을 주목하라. 지금 우리 안의 완고함이 꺾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성령님이 충만하게 역사하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가 성령님에게 완전히 복종하면 은혜의 강이 흘러 넘칠 것이다. 가정에서 남편, 아내, 부모, 자녀가 각기 자기 고집과 자기 생각을 꺽고 성령님께 완전히 복종한다면, 강둑이 터진 것 같은 은혜가 넘칠 것이다. 우리는 교회 안에서, 직장 안에서, 학교 안에서도 은혜의 강 둑이 터지기를 기도해야 한다.
“여러분은 지금 성령으로 충만한가?” 이런 질문을 받으면 우선 움찔한다. 그러나 회피하거나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자신 있게 대답하기 위해 성령 충만한 삶이 되도록 기도해야 한다. 성령 충만은 모든 기독교 생활의 기초이다. 힘의 원천이 되시는 성령님을 잊어버린 채 새벽부터 저녁까지 아무리 뛰며 돈을 벌어도 그것은 열매 없는 고통일 뿐이다. 우리 가정과 사업과 목장과 교회가 가솔린 없는 자동차처럼 성령 충만 없이 간다면 곧 멈춰서고 말 것이다. 반대로 가정과 목장과 교회가 학교와 일터가 성령 충만한 자들로 가득 찰 때 힘 있게 달려가게 된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요 7:27-38) 우리 모두 죄를 회개하고 성령 충만을 사모하고 기도하며 나를 꺾고 그분에게 순종하여 내면에서부터 흘러넘치는 성령의 생수의 강물이 가정과 사업과 목장과 교회에 넘쳐나기를 축원한다. 아멘.
근원적인 목마름
조용기 목사
저는 여러분과 더불어 “근원적인 목마름”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모든 사람은 마음속에 근원적인 목마름 즉, 고독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고독의 문제는 화려한 인기 있는 삶을 산 사람일수록 깊이 느끼는 허무감입니다. 원래 하나님이 사람을 지어 놓으셨을 때는 고독감 없이 살려고 지어놓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요, 사랑은 혼자서 있지 못하기 때문에 아담과 하와를 지어 놓으시고 함께 대화하며 사랑 속에서 행복을 누리려고 하셨습니다.
1. 아담의 범죄로 다가온 인간의 고독
그러므로 원래 아담과 하와는 고독이 그 인생에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마귀의 꾐에 빠져서 하나님이 먹지 말라는 선악과를 따먹고 죄를 지어서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버리고 만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짓밟고 자기들 마음대로 나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그 결과로 하나님이 짓지 아니한 고독이 저들의 영혼 속에 다가오게 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의 교통이 단절되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생명수의 근원에서 끊어졌습니다. 하나님과 서로 교제할 때 생명수가 하나님께서 흘러나와 그들 마음속에 기쁨과 만족을 누리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랑하고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서 대화를 하면 마음이 얼마나 밝고 맑고 환해지며 즐거운 행복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원수하고 만나 보십시오. 마음에 즐거움도 행복도 평안도 없는 것입니다. 생명수의 근원이 끊어졌기 때문인 것입니다. 믿음, 소망, 사랑, 의, 평강, 희락, 즐거움, 행복감 등에 목마른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사람들은 모두 다 자기 마음을 활짝 열어 놓으면 감춰 놓았던 마음의 실상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믿음, 소망, 사랑, 평강, 희락, 즐거움, 행복감 등 이러한 것들을 간절히 찾고 있습니다. 물질적인 세계 속에서 그런 것을 찾아 소유할 수가 없다는 절망이 있습니다.
창세기 3장 17절로 18절에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땅에 살아야 될 아담과 하와가 가는 곳마다 땅이 그들을 반발합니다. 가시와 엉겅퀴가 나옵니다. 가시와 엉겅퀴에 찔리면서 상처투성이가 되어 살아갑니다. 하나님과의 사랑관계가 끊어졌기 때문에 고독한 곳에 원수들이 그들을 공격해 오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땅에서 화평을 누릴 수가 없어요. 땅이 아담과 하와와 원수가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또 문제는 둘이가 함께 잘살아야 되는데 부부간에 갈등이 있습니다. 그들이 죄를 짓고 난 다음 하나님께서 말씀하기를 아내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아내를 다스리라고 말했었습니다. 그러니 아내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을 섬기려고 하니까 그것이 힘들거든요. 이상이 꽉 막고 참으로 같이 있어도 좋은 남편을 섬기는 것은 괜찮은데 그렇지 않은 괴씸하고 쥐어박고 싶은 남편에게 순종하고 섬기고 살려니까 별로 마음에 재미가 없어요. 그리고 남편은 아내를 다스리라고 했는데 여러분 남을 다스리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강아지도 다스리려면 달려드는데 아내를 보고 잔소리를 자꾸 하면 아내가 고분고분 받아들이나요? 며칠 전 텔레비 인터뷰하는 것을 들어보니까 남편들에게 아내하고 절대로 다투지 말라고 하면서 하는 말이 자기가 아는 경우에 있어서 아내와 말 다퉈 이기는 남자가 한 번도 못 찾아봤다고 했습니다. 남자들은 말을 할 줄 몰라요. 다투어 가지고서는 그 말의 천재인 아내에게 어떻게 이깁니까? 제비같이 재잘거리는데... 완전 집니다. 그러니 이상과 현실의 괴리가 있어 부부간의 갈등은 없어지지 않습니다. 아담도 하나님께 꾸짖음을 받았을 때 그는 그의 책임을 아내에게 다 짊어졌습니다. 내가 다 했습니다 그랬으면 좋았을텐데 그러지 않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한 나무의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고 하나님께서 물었을 때 아담이 이르시되 하나님이 내게 주셔서 나와 함께 있으라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아담은 이중변명을 했습니다. 그 선악과를 따먹은 첫째 이유는 하나님 당신에게 있습니다.
아내를 안 만들어 줬으면 괜찮았을것인데 언제 내가 만들어 달라고 했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아내를 만들어서 내게 준 하나님이 책임이 있고 또 그 아내가 나를 꾀기 때문에 그 꾀임에 내가 안 넘어갈 수 있습니까?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습니다. 그러니 변명을 하되 자기가 짐을 짊어지지 않고 하나님과 자기 아내에게 책임을 다 짊어졌으니까 그때로부터 시작해서 서로 논쟁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창세기 3장 16절에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참으로 여자는 어린 아기를 잉태하고 아기를 낳고 아기를 키우는 너무나 어렵고 무거운 책임을 짊어지고 있습니다. 저는 아홉 자녀 중에 맏아들로 태어났는데 우리 어머니에게 말씀은 안 드렸지만 내내 동생을 낳을 때마다 죽으면 어떻게 하나 싶어서 어머니가 죽을까 싶어서 걱정이 끊이지 않았었어요. 그리고 또 어머니가 꼭 말하기를 내가 너의 동생을 낳을 때 죽을지도 모르니까 내가 죽더라도 동생들 잘 돌보고 사랑해 주라고 하는데 그 말을 하시니까 내가 그 다음 어머니가 어린 아기만 가지면 아버지가 밉더라구요. 아기 그만 낳고 살면 좋겠는데 왜 죽음의 위험을 무릎서고라도 아기를 낳으려고 하느냐. 그것이 바로 범죄한 아담과 하와의 후손으로서 느낄 수 있는 슬픔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담과 하와는 부부간에 서로 정신적으로도 갈등이 있고 대화가 되지 아니하고 서로 잘했다 못했다 아웅다웅하고 싸우게 되어 있어서 가정에 평화가 없고 외로움이 있습니다. 부부간에 살면서도 서로 말을 이해하고 동정할 수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또 그 뿐 아니라 형제간의 시기와 질투가 있어 결국 살인에까지 이른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타락하고 난 다음에 하나님께 죄 때문에 그냥은 못나오고 죄 때문에 제사를 지내야 하나님께 나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재물을 드리고 제사를 드리고 하나님과 대화가 잠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죄지은 저들하고 만나기 위해서는 피를 흘려서 재물을 드려야 되는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사람이 피 흘림이 없은즉 죄사함이 없는데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 말미암아 짐승이 대신 피를 흘려 죽어야 하나님과 대화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 상징적으로 양이 죽임을 당하고 피를 흘려야 되는데 하나님께 제사 드릴 때 가인은 자기가 손써 농사지은 농작물을 가지고서 하나님께 나와서 제사를 지냈습니다. 하나님이 원치 않아요. 율법과 같습니다. 자기 힘으로 만든 것을 가지고서 제사를 드리니 하나님이 안 받아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의 동생 아벨은 어린 양을 잡아서 태워서 하나님께 재물로 드리니까 하나님이 어린양의 피를 보시고 그 향유를 맡으시고 기쁘게 받아 드리셨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아벨에게는 복을 주시고 가인에게는 복을 주지 않았기 때문에 가인이 화가 났습니다. 심사가 고약하게 돌아갔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왜 얼굴이 요사이 그 모양이냐? 얼굴이 좀 밝고 맑고 환하지 왜 그러냐? 그러니까 가인이 하는 말이 왜 내 동생에게 축복을 주시고 재물을 받으시고 내 재물은 안 받습니까? 네가 올바르게 했으면 왜 내가 재물을 안 받겠느냐? 네가 짐승을 잡아 피를 흘려서 내게 제사를 드렸었으면 내가 받았을 것인데 네 손으로 만든 농작물로써 내게 재물을 드리고 내가 안 받아들였지 않느냐. 오늘날 우리 한국 사람들이 제일 직선적인 일을 많이 합니다. 영국 사람들과 이야기 해보면 좀처럼 단도직입적으로 말을 안 해요. 예를 들면 우리 한국 사람은 동료를 만나면 오늘 얼굴이 왜 그래? 어디 아픈가? 감기 걸렸는가 보다. 꼭 그렇게 부정적으로 말을 합니다. 그러나 영국 사람은 만나면 너 얼굴이 왜 그래? 피곤해 보이는데. 절대 그 말 안 해요. 무슨 말을 하느냐. 요새 일이 많으니까 모두들 다 피곤해. 너만 피곤한 것이 아니라... 그러므로 일할 때 쉬어가면서 쉬엄쉬엄 해야지 너무 일하면서 안 돼. 꼭 빙 둘러 가면서 말하지 단도직입적으로 너 얼굴이 왜 그래? 영 보기가 흉한데... 저도 우리 성도들 만나면 제일 겁이 나는 것이 가까운 사람이 만나면 만나자마자 요사이 피곤한가봐요. 오늘 건강이 안 좋은 것 같은데? 어째요? 그러면 내 마음속에 진짜 건강이 안 좋은가보다. 사람들 보기에 이렇게 나쁘게 보이니 진짜 나빠질까보다. 기분이 좋지 않아요. 그러나 긍정적으로 말하는 사람은 만나자마자 야~ 요사이 얼굴에 광채가 나는데요. 참 보기 좋습니다. 건강하게 보이는데요. 그러면 내 마음속으로 건강해지는가보다 젊어지는가보다. 기분이 좋다구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가인에게 직설적으로 말했습니다. 네 얼굴이 왜 그러느냐? 왜 화를 내고 있느냐? 그래서 하나님께 꾸중을 듣고 난 다음 화가 나니까 들에서 아무도 없을 때 동생하고 입씨름을 하다가 돌을 들어서 동생을 쳐 죽여 버렸습니다. 그게 형제간에 미워하면 원수보다 더 무섭습니다. 동생을 쳐 죽인 일이 처음 가인과 아벨 사이에서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형제간에 사랑이 있고 이해와 동정이 있어야 되겠는데 질투가 있고 살인이 있는 것입니다. 부모들이 자식을 많이 낳아서 기르려거든 꼭 내 말 기억하십시오. 부자가 되지 마십시오. 재산을 갖지 않으면 자식들이 안 싸웁니다. 집이라도 한 두 채 가지고 있으면 누가 더 많이 가지는가 반드시 싸웁니다. 아브라함 링컨 미국 대통령이 자식을 길렀는데 자식 둘이 밤낮으로 싸워서 소문이 났어요. 어릴 때부터 싸웠는데 왜냐하면 과자를 사오면 과자를 나눠주는데 형에게 하나를 더 주면 자식이 자기 동생에게 자랑을 해서 동생이 형하고 싸우게 되고 반드시 공평하게 나눠야 되는데 공평하게 나눠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서로 다 탐욕이 있고 서로 더 잘살기를 원하기 때문에 시기와 질투가 꼭 따라오는 것입니다.
“야훼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창 4:6~8) 그렇게 말했었습니다.
그러니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도 원수가 되어 있지요. 부부간에도 서로 논쟁을 하고 아웅다웅 하지요. 자식을 낳아 놓으니 형과 아우가 싸워서 형이 아우를 죽이지요. 가인과 아벨이 이와 같은 슬픔을 가져왔으니 집안이 콩가루 집안인 것입니다. 평안할 곳이 없어요. 그러니 그 전통을 이어받은 우리 후손들이 정말로 평화를 가지고 사랑을 하고 이해와 동정을 가지고 고독을 뛰어넘어 살 수 있다는 것은 정말 힘든 것입니다. 그러면 대인관계는 좋습니까? 대인관계도 좋지 않습니다. 여러분 사람이 이웃과 사랑하고 이해하고 동정하면 좋겠는데 이웃과 관계 속에서 언제나 시기와 질투가 있습니다. 남이 나보다 잘 되는 것 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대인관계에는 언제나 투쟁이 있습니다. 어디에서 그런 것을 볼 수 있습니까? 쉽게 볼 수 있어요. 국회 가십시오 국회! 모였다하면 싸웁니다. 한번은 어부가 게를 잡아서 자기 바구니에 잡는데요. 배에 게를 잡아서 바구니에 넣는데 뚜껑을 안 닫습니다. 그냥 잡아서 넣고 잡아서 넣고 하는데 국회의원 두 사람이 산책을 하다가 그 옆을 지나가면서 자기들이 국회의원인 것을 말 안하고 어부를 보고 여보세요. 게를 잡아서 뚜껑이 없는 통에다 넣으면 기어나가버리면 어떻게 합니까? 그분이 가만히 쳐다보더니 국회에 가 보십시오. 국회의원들이 누구든지 좀 잘나가는 사람 귀를 잡아서 당기잖아요. 게는 뚜껑이 필요없어요. 잡아 넣어 놓으면 기어 올라오는 사람 밑에서 잡아 당겨가지고서 게는 절대로 나가지 못하게 합니다. 꼭 국회와 한가지입니다. 그 말을 하고서 국회의원 두 사람이 걸어오면서 입에서 쓰디쓴 침이 나오더라는 간증을 적어 놓은 것을 보았습니다. 사람은 서로 끄집어 당기고 싸우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 평안이 없습니다.
전도서 2장 22절로 23절에 “사람이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수고와 마음에 애쓰는 것이 무슨 소득이 있으랴 일평생에 근심하며 수고하는 것이 슬픔뿐이라 그의 마음이 밤에도 쉬지 못하나니 이것도 헛되도다”
해 아래 사는 사람은 삶이 다 수고롭고 애써 살아가는데 일평생에 근심과 수고만 있지 소득이 뭐냐는 것입니다.
시편 25편 16절로 17절은 더 비참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한번 따라 읽어 주십시오.
“주여 나는 외롭고 괴로우니 내게 돌이키사 나에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 마음의 근심이 많사오니 나를 고난에서 끌어내소서”
참말 아닙니까? 우리가 살아가면서 우리 생애를 살펴보면 외롭고 괴로운 일이 많고 마음에 근심이 떠나지 않습니다.
2. 모두가 느끼는 정신적 감기인 고독
고독은 모두가 느끼는 정신적인 감기입니다.
나는 고독하지 않다. 거짓말입니다. 나는 감기 안 걸린다. 감기 안 걸리는 사람 누가 있습니까? 감기는 다 걸립니다. 그런데 감기가 너무 세기 때문에 감기가 들리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면 면역성이 약해지면 감기가 쉽게 들리는 것입니다. 감기 균이 강한 것이 아니라 면역성이 약해지면 감기가 걸리는 것처럼 고독도 한가지입니다. 내가 마음속이 비어있으니까 쉽게 고독해지지 주위 사람들이 안 돌봐 주기 때문에 고독해지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우리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을 무의식중에 사모하는 목마름이 있습니다. 목이 마른데 무엇에 목이 마른지 알지 못하고 있어서 그렇지 결국 알고 보면 하나님을 찾는 간절한 마음이 그 목마름인 것입니다.
시편 42편 1절로 5절에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까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결국에 우리가 목마른 것은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지위나 명예나 권세나 돈을 찾지만 그 속에 만족을 얻지 못하는 것은 그것이 우리에게 해답이 아닌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과 교제하기 위해서 지음을 받았기 때문에 그 근본적인 영혼 속에 하나님을 찾는 갈급한 마음이 언제나 있습니다. 하나님 이외에는 마음의 갈급함을 채울 수가 없는 것입니다. 무엇을 하더라도 하나님 계셔야 만족하지 하나님 없이 만족하지 않습니다. 주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다고 사람이 하나님 없이 집을 짓고 가정을 이루어도 하나님이 안계시면 행복이 없습니다. 평안이 없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과 함께 하면서 살아야지 하나님 없이 인간 홀로 행하면 고독은 한없이 따라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모두다 마음속에 한없이 이해와 사랑과 동정을 받고 싶은 목마름이 있습니다. 어떻게 하든지 이해를 해주고 사랑해주고 동정해주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부부 사이에서도 그렇고, 부모 자식 사이에서도 그렇고, 인간 상호 간에서도 그와 같은 것입니다.
골로새서 3장 12절로 14절에 보면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처럼”
이것 보십시오. 여러분은 여러분이 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여러분을 택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사랑받게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자격이 없는데 내가 어쩌다가 교회 나오느냐. 하나님이 만세전에 나를 아시고 보시고 예정하사 택하여 주시고 거룩하게 하시고 사랑받는 자로 만들어 주셨으니 너도 이웃에 대해서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너는 하나님이 택해 주시고 거룩하게 만들고 사랑받는 것처럼 만들어 주었으니 너도 이제는 다른 사람에게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사랑을 베풀어 주라고 하는데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받는 것은 좋은데 이웃에게 그렇게 나누어 준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여러분, 이웃을 보고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가지고 돌보아 줄 수 있는 자신이 있습니까? 자신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에는 그렇게 하려고 노력을 하라는 것입니다. 부부 사이에서도 부모자식이나 인간 상호간 사이에서도 반드시 내가 먼저 이해하고 동정하고 사랑하려고 해야지 저 사람이 나를 이해하고 동정하고 사랑하면 그와 반대로 해주겠다는 생각을 가지면 절대로 이해하고 동정하고 사랑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람은 아담과 하와 때부터 선악과를 따먹었는데 선악과라는 것은 자기중심으로 좋고 나쁜 것을 결정하는 것입니다. 선악 가치평가를 자기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삶의 가치 판단에 갈등이 반드시 있습니다. 남편은 아내를 볼 때 남편 마음에 좋고 나쁘다를 결정해서 평판을 합니다. 아내는 아내대로 선악 판단을 합니다. 남편에게 남편과 똑같이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서로 이야기하게 되면 다투게 되지요. 다투게 되면 그것을 잘 정리 못하면 큰 사고가 나는 것입니다. 우리 개인 자신도 그렇습니다. 자기 마음으로는 원하되 육신으로는 안 되는 것이 우리 삶의 처지인 것입니다. 내가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갈등입니다. 자기 스스로 갈등을 다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 7장 21절로 24절에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우리 다 곤고한 사람입니다. 내 마음대로 안 됩니다. 마음에 선을 행하려고 해도 육체가 악을 행합니다. 마음에 사랑하려고 해도 육체로 미워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마음에 평안하고자 하는데 육체는 평안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갈등을 자기가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기 마음속에도 갈등이 있고 하나님과 자기 사이에도 갈등이 있고 부부간에도 서로 갈등이 있고 자식 간에도 갈등이 있고 이웃 간에도 갈등이 있고 인간존재는 어느 곳에 가나 갈등이 있고 갈등은 결국 대화가 잘 안되므로 고독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인간은 치명적인 병인 고독의 병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 고독의 병을 고치기 위해서는 하나님과 화목을 갖다 주는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지 않고는 절대로 절대로 마음속에 고독에서 해방될 수가 없습니다. 제일 첫째 인간은 하나님과 대화를 해야만 마음에 기쁨과 행복을 가지고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만들어질 때 하나님과 대화하기 위해서 만들어졌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대화를 하려면 죄악이 담을 치고 있는데 어떻게 합니까? 우리 대신 죄를 짊어지고 죽음으로써 청산해 주신 예수를 구주로 믿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어서 꼭 천당 가는 것만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 살 동안에 행복하려면 예수 믿고 난 다음에 무엇이든지 해야 행복한 것입니다. 예수 믿고 난 다음에 시집도 가고 장가도 가고 예수 믿고 난 다음에 자식을 낳고 기르고 예수 믿고 난 다음에 친구들 사귀고 예수 믿고 난 다음에 집도 짓고 성도 지키고 예수님이 우리 생활에 가장 근본적인 행복의 조건이 되는 것입니다. 꼭 죽어서 천당 가기 위해서 예수 믿는 것은 아닙니다. 이 땅에 있을 동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여러분 생명의 은총의 첫째가 되는 것입니다.
3. 영원한 생명수이신 사랑의 주님
영원한 생명수이신 예수님을 사랑하면 그 생명수를 통해서 여러분 인생에 참 기쁨을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7장 37절에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공짜로 마시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생명수가 뭡니까? 끝없는 사랑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한없이 사랑해 주기를 원하는데 끝없이 한없이 사랑해 줄 수가 있나요? 이 세상에는 대개 부모가 한없이 사랑해준다고 생각하지요. 그러나 부모도 자식을 한없이 사랑할 수 없을 때가 많이 있는 것입니다. 부부간에 서로 상호간 한없이 사랑해 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정말 자다가 꿈을 잘못 꾸는 것입니다. 한없이 사랑해주는 부부가 없어요. 부모 자식 간에도 한없이 사랑하느냐. 옛날에는 그랬다고 하는데 요사이는 안 그래요. 그러니 이웃 간에 서로 한없이 사랑한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지요. 그러므로 끝없이 주시는 한없는 사랑은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죄를 짓고 추악하고 버림을 받아야 마땅한 더러운 인간인데도 불구하고 우리를 끌어안고 십자가에 올라가서 우리 대신 죽어 주시는 분이 주님인 것입니다. 그 사랑은 우리 측량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한이 없는 이해와 동정과 용서와 사랑을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처럼 사랑하사... 설명을 할 수 없으니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십자가에 우리를 대신해서 죽어줄 정도로 사랑을 해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를 믿게 된 것은 영생을 하나님이 주시기 위해서 작정하셔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 한 것이라. 주님은 우리에게 생명과 풍성한 은혜를 주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다고 말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제자들과 사마리아로 건너가다가 수가성 우물가에 잠시 쉬는데 제자들은 먹을 것을 사러 시내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한 여자가 대낮에 물동이를 어깨에 매고 물 길러 왔습니다. 물은 아침에 길던지 저녁 해질쯤에 길르지 대낮에 물 길러 안 옵니다. 그런데 이 여자는 왜 대낮에 물 길러 왔느냐. 사람 만나기가 싫었어요. 나는 사람이 싫다. 사람 없을 때 물동이에 물 길러 온 것입니다. 왜 그러느냐. 이 여자는 남편을 다섯이나 두었는데 다 만족을 얻지 못했어요. 그래서 다섯 번째 남편을 발길로 차버리고 여섯 번째 한 사람 또 하나 갖다 놓았습니다. 내가 보기에는 이 여자 상당히 인물이 좋은 것 같습니다. 호박 같으면 어떻게 다섯이나 갈아치울 수 있습니까? 그리고 돈도 꽤 있는가 봐요. 남자들이 그 돈 보고 찾아왔으니까. 그러니 인물도 있고 돈도 있고 명망 있으나 이 세상에 자기가 마음에 만족을 느끼고 위로해주고 동정해 주고 사랑해 줄 남자를 찾지 못해서 여섯 번째 남편은 결혼도 안하고 오다 가다 만나서 데리고 삽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 여자의 마음을 다 알기 때문에 물 기르는데 물 좀 주시오 하니까 깜짝 놀라서 쳐다보면서 당신 유대인이요? 유대인들은 우리 사마리아인들을 개로 취급하는데 어떻게 대낮에 사마리아 여자에게 남자가 물 달라고 합니까? 예수님께서 허허 웃으시면서 물 달라 하는 그 사람이 누구인줄 당신이 알았으면 도리어 물을 좀 달라고 했을 것이며 그분이 생수를 주었을 것이다. 무슨 웃기는 소리합니까? 이 우물은 깊고 두레박도 없는데 당신이 무슨 생수를 내어준다 말입니까? 예수님께서 당신이 기르는 물은 다시 또 목마르지만 내가 주는 물을 마시면 영원토록 솟아나는 샘물이 된다고... 그러니까 그러면 그 생수 내게도 좀 주십시오.
그러니 예수님께서 가만히 쳐다보시더니만 남편을 데리고 오세요. 그러니까 난 남편 없어요. 예수님이 맞았어.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는데 다 발길로 차버리고 지금 여섯째는 오다가다 만나 살고 있지 않느냐. 그러니까 아니 당신 내 사정을 어떻게 그렇게 잘 아오? 우리 사마리아에 있는 사람들은 이곳에서 예배를 드렸는데 당신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 가야 예배를 드린다고 하는데 예배가 여기서 보든 예루살렘에서 보든 상관이 없고 오늘날은 하나님이 특별한 장소에서 예배를 보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 보는 자를 찾는데 그 사람이 바로 메시아가 될 것이오. 그럼 나도 그런 사람을 만나서 생수를 얻게 해 주십시오. 내가 바로 그 사람이라고.. 이 여자의 속에 하나님의 성령이 역사하시매 순식간에 변했습니다. 아. 예수님이 메시아구나. 그러자 마자 그의 마음속에 삶의 의미와 가치를 순식간에 깨닫게 되었어요. 성령이 오시니까 물동이를 버려두고 대낮에 사마리아 시내로 뛰어 내려가서 내가 메시아를 만났다고 고함고함을 치는 전도자가 된 것입니다. 이 생수라는 것은 예수님께서 여러분 마음속에 들어오면 마음에 고독하고 외롭고 슬프고 고통스럽던 마음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마음에 평화와 기쁨과 소망이 채워지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요 4:13~14)
우리 마음속에 쓴물이 솟아오르지 않습니까? 미움, 좌절, 절망, 미운 쓴물이 솟아오르고 마음에 평안이 없을 때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속에 모시면 쓴물이 달아지고 마음속에 의와 평강이 충만하게 채워지는 것입니다. 가나의 혼인잔치에 가서 포도주가 떨어졌을 때 예수님께서 물을 항아리에 채우게 하시고 그 물을 포도주로 만들어서 잔칫상에 내놓았습니다. 예수님은 물로도 한 시간에 순식간에 포도주를 만드신 것입니다. 맹물은 향기가 나지 않아요. 그러나 예수님이 만든 포도주는 일등 포도주요, 향기가 났습니다. 오늘 예수를 믿으면 여러분의 생애에 변화가 다가와서 향기로울 뿐 아니라 취한다 말이에요. 취해. 포도주는 먹으면 취하지요. 많이 먹으면 정신을 잃는데 그래서 많이 마시면 안 됩니다. 그러나 구라파에 나가면 초청을 받아 식사를 하면 식탁에 꼭 포도주를 내놓습니다. 그래서 조금씩은 마시는데 저항력이 약한 사람이 마시면 조금만 마셔도 얼굴이 빨개지고 눈알이 팽팽 도는데 그 사람 중에 한 사람이 바로 저입니다. 저는 알콜이 조금 들어가면 눈앞이 팽팽 돌아요. 그래서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아주 좋은 포도주를 만들어서 주었는데 그것은 상징적으로 무슨 의미가 있느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포도주로 취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마음이 기분이 좋습니다. 기분 나쁜 사람도 한잔 들어가면 노래 부르면서 거늘거늘하지 않습니까? 예수를 믿으면 믿음, 소망, 의, 평강, 희락으로 취하는 것입니다. 많은 젊은 목사들이 제게 와서 설교를 얼마하지 아니하면 교인들이 졸고 또 일어나 나가고 하는데 어떻게 하면 졸지 않고 설교를 듣고 설교 중간에 안 나가게 만들 수 있습니까? 그래서 내가 언제나 쉽게 말합니다. 예수님이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맹물을 잔치상에 갖다 준 것이 아니라 포도주를 갖다 주고 그들이 포도주를 마시고 좋아했다고 했는데 그와 같이 당신 설교를 듣고 교인들이 취해야 된다. 좌우간 교회 앉아 있을 동안에는 세상 잊어버리고 세상만사 잊어버리고 입 딱 벌리고 말씀을 즐겨야 사람들이 신령한 은혜에 취하게 되고 끝까지 잘 듣고 나가지 어떻게 그렇게 합니까? 그러니까 당신이 기도를 많이 하고 성령에 먼저 취해야 된다. 당신이 성령에 취해가지고서 강단에 서서 설교를 하면 성령의 역사가 교인들에게 나가서 교인들도 취하고 은혜로운 예배가 될 수 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도 여러분이 저의 설교에 취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가 슬퍼하고 고통당하고 원망하고 탄식하고 살지 말고 삶의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받아 취하여 살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향기가 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힘으로는 안되지요. 예수님을 믿고 성령이 충만하면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사람들을 정죄하지 않고 비난하지 않는 사랑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의 극대치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여자를 건져주는 장면이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주님께서는 상한 갈대를 꺾지 않는다. 갈대가 상해있는 것은 손만 대면 꺾어지는데 안 꺾고 바로 세워주려고 합니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시고 촛불에 심지가 다 되어서 꺼질려고 팔락팔락하는데 훅하고 하면 꺼지지 않습니까? 저절로 꺼지게 내버려 놓지... 그 만큼 주님은 살리는 것이 목적입니다. 주님은 심판을 베풀고 죽이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살리는 것이 목적인 것입니다. 한번은 이른 새벽에 주님께서 성전 뜰에서 가르치시는데 한 여자를 사람들이 끌고 옵니다. 머리채를 휘어감고 신발도 벗어버리고 울면서 끌려와서 예수님 발 앞에서 군중들이 하는 말이 이 여자는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습니다. 성경에는 이런 자를 돌로써 쳐 죽이라고 말했는데 당신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당신 말 듣고서 처리하겠습니다. 자 예수님이 하늘나라에서 온 하나님 아들이라고 하는데 당신이 하늘나라에서 주신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면 어떻게 주의 종이 됩니까? 역습을 하려고 여자를 끌고 갔어요. 아주 동기가 나쁩니다. 간음하다가 현장에 잡혔으면 남자도 끌고와야 하는데 왜 여자만 끌고 옵니까? 벌써 동기가 나쁩니다. 예수님이 가만히 그들을 살펴보시다 말고 완전히 이 여자를 죽이려고 작정을 한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손에 돌을 들고 있어요. 예수님이 엎드려서 손가락으로 글을 씁니다. 틀림없이 예수님이 십계명을 적었을 것입니다. 내 앞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 우상에 절하지 말라.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지 마라. 안식일을 거룩히 지켜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쭉 적어 내려가니까 이 사람들이 기고만장해 가지고서 빨리 결정을 내리십시오. 당신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계명을 당신 적었는데 계명을 간음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간음한 자는 돌로 쳐 죽이라고 모세가 말했으니 돌로 쳐 죽여야지요. 주님이 한번 다시 고개를 들어서 쭈욱 보시고 난 다음에 한 사람 쳐다보고 글을 적습니다.
또 두사람 보고 글을 적습니다. 자기들의 숨은 죄가 예수님의 손가락 끝에서 다 적혀 나옵니다. 감추어 놓았는데 인터넷도 없던 시절에 어떻게 알아냈는지 예수님이 그들 속을 다 들여다보고 있는 것입니다. 야~ 이 여자에게 돌을 던졌다가는 예수님이 돌을 들어서 나를 치면 반드시 죽겠구나. 한 사람은 슬며시 보고 야, 짐승에게 물 줄 시간이 되었는데 나 먼저 간다. 다른 사람은 아침에 아침상을 차리고 나와야 되는데 아침상을 못 차리고 왔으니 빨리 가야 되겠다. 나는 간다. 다 변명을 말하고 도망을 쳤습니다. 한참 만에 예수님께서 마지막 글을 쓰고 고개를 들어보니 아무도 없거든요. 여자여, 깜짝 놀랬습니다. 고개를 들어 주위를 살펴보라. 그 여자가 눈이 퉁퉁 부어서 옆을 쳐다보니 아무도 없거든. 너를 죽이려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 정죄하는 사람이 있느냐. 아무도 없는데요. 그러니 예수님께서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한다. 집에 가서 다시 죄짓지 말라. 그 예수님의 용서와 사랑이 말로 다 할 수 없이 감동적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 여자를 당장 죽일 수가 있어요. 말 한마디로 돌로 쳐라 했으면 돌무더기에 쌓여서 죽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나는 너를 정죄하지 아니한다는 말은 오늘날 예수님이 우리에게 오신 것은 우리를 정죄에서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정죄를 벗겨주고 용서해주고 사랑해주기 위해서 온 것입니다. 정죄는 예수님이 받았어요. 여러분 우리가 지은 죄는 예수님이 내 죄라고 받아서 주님이 십자가에서 대신 못 박혀 죽었지 않습니까? 세상적으로 생각하면 얼마나 바보 같은 일 아닙니까? 자기가 짓지 않은 일 왜 자기가 책임지고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입니까? 그러나 자기가 끌어안고 십자가에 올라간 것입니다. 바로 이 여자의 죄도 예수님이 끌어안은 것입니다. 나중에 그 죄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것입니다. 이러므로 예수님만이 여러분 비난하지 아니하고 정죄하지 아니하고 끝까지 사랑해주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다 버려도 주님은 여러분 버리지 않고 끝까지 사랑해주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평안을 누릴 수 있고 행복을 누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종교가 아닙니다. 의식이 아닙니다. 살아가는 마음에 절실한 상태인 것입니다. 이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여자를 구출해준 것처럼 예수님은 그와 같은 사랑으로 여러분을 구출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절대로 버리지 않습니다.
요한복음 8장 10절로 11절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라”
여러분, 이와 같은 은혜를 입은 이 여자가 다시 범죄 할리가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변화시키는 능력을 이 여자에게 주신 것입니다.
이 시대의 지성이라 불리는 이어령 박사님 여러분 잘 아시지요? 이어령 박사님은 자신을 ‘평생 우물을 파는 사람’이었다고 말합니다. 뭔지는 모르지만 늘 무언가에 대한 갈증이 마음에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나는 이어령 박사님의 따님이 미국 남편하고 같이 사는 미국의 검사였습니다. 세상 뜨기 전에 그 남편하고 와서 저하고 오랫동안 대화를 했는데 신앙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어요. 그의 아버지 되시는 이어령 박사를 위해서도 그가 평생에 기도해 왔다고 그가 말을 했는데 나중에 보니 이 따님은 천국에 가시고 이어령 박사님이 예수님을 믿은 것을 볼 때 그 딸의 기도가 응답되었구나라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 이어령 박사가 자기가 예수 믿게 된 간증을 책에 기록해 놓았는데 뭔지 모르지만 무언가에 대한 갈증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자기 인생의 목마름에 대해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명예를 달라면서 글을 썼더니 명예가 생겼고, 돈을 벌려고 애쓰니까 돈이 생겼다. 또 병 때문에 병원에 다니니까 병이 나았다. 그런데 어느 날 너무도 외로워서 극장에 가서 영화를 보고 위로함을 받으려고 했는데 내가 좋아하는 글을 봐도, 마음이 채워지지 않고 ‘이 세상에 나 혼자구나’라고 느낌이 다가와서 절대고독을 느낄 때, 내 영혼이 목마를 때 어디로 가야 채울 수 있을까?” 온갖 것 다해도 목마름이 채워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 갈증이 바로 진리에 대한 갈증이요 창조주에 대한 목마름이었다는 것을 깨달아 알았습니다. 수없이 우물을 파며 고독한 영혼의 광야를 통과한 후, 비로소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샘물을 만났는데 바로 하나님이었습니다. 부귀, 영화, 공명을 다 체험해도 목마름이 안 채워졌다고 하는데 하나님을 알고보니 목마름이 채워졌다. 왜 근본적으로 여러분 만들어질 때 예수님과 대화하기 위해서 만들어 놓았거든요. 하나님 앞에 범죄해서 원수가 되어서 쫓겨났기 때문에 그 하나님을 알기 전에 그 목마름은 절대로 채워지지 않습니다. 내 말 믿으세요. 절대 하나님 이외에는 여러분 마음에 목마름을 채울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영혼의 목마름으로 세상에서 우물을 파던 그는 예수님을 만남으로 영원한 생명수를 얻게 된 것입니다. 영혼의 목마름을 느낄 때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합니까? 예수님입니다. 인간의 근원적인 목마름을 해결해 주실 분은 오직 예수님밖에 없다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삶의 처음과 나중을 책임져 주십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구주로 모시면 어머니 뱃속에서 태어난 그때로부터 시작해서 소급해서 내가 마지막 죽을 때까지 나의 일생을 주님은 책임져 주시는 것입니다. 교육과 훈련을 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여러분 전체를 책임져 주시는 것입니다. 과거의 잘못도 주님이 끌어안고 미래의 잘못도 주님이 끌어안고 그 대신 여러분에게 생수를 부어 주시고 은혜를 부어 주시고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풍성히 얻게 해주시는 분이 예수님이신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보배는 있을 수가 없습니다.
요한계시록 21장 6절로 7절에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을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상속으로 받으리라 나는 그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
알파는 헬라원어에 처음 ‘ㄱ''이고 처음이고 오메가는 ''ㅎ'' 아닙니까?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요 알파와 오메가가 된다. 그러므로 목마른 자에게 끝까지 대가를 요구하지 않고 생수를 준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구주로 모시고 여러분 마음이 답답하고 괴로울 때 주님께 목마름을 가지고 오면 채워주시는 것입니다. 쓴물이 달아지고 향기로운 생수로써 채워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는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고 있다는 것은 이 질그릇 속에 보배를 안고 있는 것입니다. 말할 수 없는 큰 보배를 여러분 갖고 있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뭐라고 말합니까?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무거운 짐을 네가 짊어지고 쓰러지지 말이라. 내가 대신 짊어져주마. 주님 십자가 밑에 우리가 들어가면 주님이 우리 짐을 당신께 옮기고 걸머지시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는 희망을 가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 28:20) 그러면 예수님 어디에 계시나요? 여러분 속에 계신 것입니다. 여러분 속에 계세요. 우리를 버리지 않고 여러분 우리를 떠나지 않는 것이 예수님인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 곁에 계십니다.
<결론>
이 세상에서 버림당하고 한없이 외롭고 고독해도 항상 변치 않으신 예수님의 사랑의 손길을 잡을 때 주님은 뿌리치지 않아요. 다른 사람이 다 날 뿌리쳐도 예수님은 나를 따라와서 나를 끌어안아 주세요. 왜냐하면 예수님이 그것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으니까. 예수님은 죄를 짓고 불의하고 추악하고 버림받아야 마땅한 사람들을 이 사람들을 찾아서 건져주시기 위해서 예수님이 오신 것입니다. 잘먹고 잘입고 잘살고 편안하다고 아무 사람 도움도 필요없다고 하는 사람 주님 찾아오지 않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 죄지은 자, 병든 자, 고통스러운 자, 버림받은 자. 이러한 사람들을 찾아와서 주님이 온전한 사람으로 만들어 주시는 것이 그의 하는 일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여러분이 못났다고 생각하고 도움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마음에 스스로 행복하지 못하다고 생각하면 바로 여러분이야말로 예수님이 와서 도와주려고 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많이 모였는데 예수님이 이곳에 안계시고 어디 계시겠습니까? 오늘 주님께서 우리 눈에 보이지 않지만 이곳에 계신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제일 고통스러운 것이 외로움입니다. 외로움에 목말라 살 희망조차 잃어버려도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에 생명수를 마시고 소생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미국의 유명한 소설가였던 헤밍웨이는 그 소설을 통해서 세계적으로 유명한 문학인이 되었지 않습니까? 노벨상을 탄 사람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사냥총으로 머리에 대놓고 방아쇠를 당겨서 자살했습니다. 자기는 말하기를 나는 전구의 전류의 흐름이 끊기고 필라멘트가 녹아버린 텅 빈 전등처럼 마음이 공허해서 살수가 없어서 죽는다. 돈도 있고 지위도 있고 명예도 있는데 마음이 전등불이 간 고장 난 전구같이 텅 비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자살을 했다. 외로움이란 무서운 것입니다. 여러분 외로움이 장난이 아닙니다. 오늘날 많은 나이 먹은 사람들이 자살하는 것도 고독해서 자살하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에 외로움을 가지고 있으면 세상에 아무것도 좋은 것이 없습니다. 외로워 본 사람은 외로움이 얼마나 무서운 고통인 것을 알 것입니다. 그 외로움을 치료할 수 있는 유일한 분이 예수님이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여러분의 자격을 묻지 않습니다. 있는 그대로 못난 그대로 넝마를 입은 그대로 진흙투성이가 된 그대로 와도 주님은 받아 주셔서 여러분 속에 생수의 근원이 되시는 것입니다. 그 자체가 생수의 근원입니다. 그 자체가 사랑인 것입니다. 그 자체가 은혜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고 나오면 주님은 여러분 삶에 들어오시며 그 들어온 자체가 구원이요 은혜요 사랑이요 생수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생명수를 마시고 소생되어 희망찬 삶을 살게 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한 번 기도 하십시다.
생수의 강
요한복음 7:37-39 / 김영규 목사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않으셨으므로 성령이 아직 그들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요한복음7:37-39)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명절 끝날 곧 큰 날에’(37) 초막절 절기의 마지막 날을 큰 날이라고 불렀습니다. 왜 큰 날이라고 불렀는지 그 내력을 좀 설명해야 하겠습니다. 유대 월력으로 7월은 명절의 달입니다. 7월 1일은 나팔절이고, 10일은 대속죄일입니다. 15일부터 21일까지 한주간은 초막절입니다.(신16:13,레23:36) 계절적으로 7월은 일 년 농사가 마감되는 결산의 달이기도 합니다. 솔로몬 성전이 7월에 봉헌된 것을 보면 유대인들에게 7월은 매우 의미가 큰 달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초막절을 지키는 의식도 매우 다양하고 화려했습니다.
우선 초막절이 되면 사람들은 버드나무, 종려나무, 화석류나무, 감람나무 등으로 일주일간 거처할 초막을 짓습니다.(레23:40,느8:13-18) 초막을 지음과 동시에 항상 손에 들고 다니는 나뭇가지 다발을 세 묶음 만듭니다. 이것을 LULAB라고 하는데 두 묶음은 버드나무 가지로 만들고 한 묶음은 종려나 야자 잎으로 만듭니다. LULAB는 행사 때마다 들고 다니면서 흔듭니다.
초막절 의식은 한 주간동안 매일같이 계속되는데 새벽과 낮과 밤에 계속됩니다. 새벽 의식은 매일같이 제사장들에 의해서 거행됩니다. 닭이 울 때 제사장들은 성전 동쪽 문으로 갑니다. 해가 뜨는 순간 서쪽을 향해 서서 성전을 마주 보면서 이런 귀절을 암송합니다. “우리 조상들은 이곳에 있을 때에 얼굴을 동쪽으로 돌려 동쪽 태양에 경배하였으나 우리의 눈은 주께로 향합니다.” 매일 밤에는 횃불 춤의 행사가 계속됩니다. 밤이 되면 성전에는 네 개의 횃불이 밝혀지는 데, 이 횃불은 제사장의 낡은 옷을 심지로 삼아 만듭니다. 사람들은 횃불 아래서 피리에 맞추어 춤을 추고, 레위인들은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시편 120편-134편)를 불렀습니다. 행렬은 ‘이스라엘인의 뜰’에서 ‘여인의 뜰’로 내려갑니다. 이 두 뜰 사이에는 15개의 계단이 있었는데 매 계단마다 노래 하나씩을 불렀습니다. 이러한 밤의 축제가 7일간 계속되었습니다.
초막절 행사 중에서 가장 의미 있는 행사는 매일 아침 물을 길어다가 제단에 붓는 헌수 의식이었습니다. 매일 아침 제사장들은 행렬을 지어 실로암 못에 물을 길러 내려갑니다. 그리고 아구가 좁은 금으로 만든 물통에 물을 담아서 제단 곁의 물통까지 가져옵니다. 이때에 성문에서는 나팔을 불고, 사람들은 손에손에 룰라브를 들고 흔들면서 제단을 돌며 춤을 추고 할레 시편을 불렀습니다.(시118편,18편) 제단을 다 돌고 나서 제사장은 제단 옆에 있는 통에 물을 부었는데, 이 물은 관을 통해서 제단 밑으로 옮겨졌습니다. 일곱째 날에는 제단을 일곱 번 돌았으며, 이 날은 제사장들이 행진할 때 버드나무 가지를 높이 흔드는 대신 땅을 쳐서 잎을 떨구었습니다. 왜냐하면 절기가 마쳐짐을 나타내기 위해서였습니다. 이 마지막 날에는 호산나를 높이 불렀으므로 ‘큰 호산나의 날’ 혹은 ‘버드나무의 날’이라고도 불렀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요한은 이날을 명절 끝날 곧 큰 날이라고 부릅니다. 이 날에 장엄한 행사가 절정에 달하고, 이 날만은 이방인을 위한 제사 없이 오직 유대인만을 위해 제사 드렸고, 노동을 삼가하고 거룩한 날로 지켰으며(레23:39), 이 날에 율법 읽는 의식을 마쳤고, 헌수 의식이 절정을 이루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주님은 이 큰 날에 성전에서 일어서서 큰 무리를 향해서 큰 소리로 외치고 계십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셔라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27) ‘큰 날’에 행하신 교훈의 핵심입니다. 이 말씀은 초막절 헌수 의식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 절기에 실로암 못에서 물을 길어다가 제단에 부었습니다. 왜 이런 의식을 거행 했을까요? 초막절은 광야 생활을 회고하며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광야 생활에서 잊을 수 없는 사건이 많습니다만, 그 가운데 대표적 사건이 반석에서 이적으로 물을 마셨던 사건입니다. 당시에 온 백성들은 여러 날 동안 물을 먹지 못하고 갈증으로 죽음에 직면했습니다. 백성들은 모세를 원망했고 모세는 하나님을 향하여 탄원했습니다. 하나님은 호렙산 앞에 백성을 모아 놓고 지팡이로 반석을 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모세가 반석을 두들기자마자 샘물이 터져 나왔습니다. 60만 장정과 가족들이 갈증을 해소하고 넘치도록 물을 마셨습니다. 반석의 물로 생명을 건진 사건입니다. 헌수 의식은 바로 이 사건을 재현하고 기념하는 의식입니다.
이 의식 속에는 물의 중요성이 들어있습니다. 물은 곧 생존 수단이며 생명입니다. 우리야 2급수 3급수 따지지만, 사막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흙탕물이라도 더 없이 귀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에덴동산을 설명할 때에도 네 개의 강물로 설명합니다. 아브라함도 이삭도 야곱도 우물을 잘 파서 좋은 족장이 되었습니다. 에스겔은 하늘 성전의 환상에서 물이 흘러나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물을 얻는 것은 축복과 승리를 의미했고, 물을 빼앗기는 것은 패배와 죽음을 의미했습니다. 사해 근처에 가면 ‘마사다’라고 하는 유적지가 있습니다. 과거 로마에게 정복당할 때에 최후의 한사람까지 남아서 항전하다가 장엄하게 죽었다는 역사의 현장입니다. 사방이 깎아 세운 듯이 절벽으로 둘러싸인 봉우리 위에 둘레가 수 킬로미터에 해당하는 평지가 얹혀있는 곳입니다.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없는 거기서 어떻게 여러 달을 버티면서 살았을까? 그들은 이곳에 요새를 만들면서 비가 내릴 때 모아서 저장하는 지하 저수조를 만들었습니다. 이스라엘은 물의 소중함을 아는 백성입니다. 6일 전쟁 때 이스라엘은 시리아로부터 골란 고원 지대를 빼앗아서 영토로 합병해버렸습니다. 시나이 반도는 내주면서 골란 고원은 사수했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의 물탱크라고 할 수 있는 갈릴리 호수를 내려다보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정신으로 그들은 초막절에 실로암 연못의 물을 성전 제단 곁에 길어다 부으면서 풍성한 물을 갈망했습니다. 아마 그들은 하늘에서 비가 펑펑 쏟아져서 마음껏 물을 마시기를 기도했을 겁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러한 사람들을 바라보시면서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셔라.” 이 구절에 두 가지 중요한 주제가 들어 있습니다. 첫 번째 주제는 목마름입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그 때에 사람들은 헌수 의식에 참여하면서 갈증을 느꼈을 겁니다. 타이밍이 묘하게 맞아떨어졌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말씀하신 목마름은 그 물의 갈증은 아닙니다. 사람들의 마음의 갈증, 즉 욕구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누구나 삶의 목마름이 있습니다. 수가성 여인은 남편에 대한 갈증을 느꼈습니다. 삭개오는 돈에 갈증을 느꼈습니다. 헤롯은 권력과 명예에 갈증을 느꼈습니다. 광야 시절 이스라엘은 양식의 갈증을 느꼈습니다. 우리 누구나 그런 갈증이 있습니다. 건강의 갈증, 지식의 갈증, 성취욕의 갈증, 애정의 갈증, 아름다움에 대한 갈증 등등.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목마름 속에 살아갑니다. 갈증을 느끼는 것은 곧 뭔가 충분하지 못하고 부족하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제아무리 많은 것을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여전히 만족은 없습니다. 매일 다시 길어다 부어야만 되는 물통과 같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다 목마르지 않느냐?”
그런데 여기서 주님이 말씀하신 목마름은 좀 더 근원적인 것입니다. 즉, 생명에 대한 갈증입니다. 모든 생명체마다 생존 본능이 있습니다. 우리 인생에게도 생명에 대한 욕망은 가장 큰 갈증입니다.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4:23) 영생 욕망! 참으로 큽니다. 나이 드신 분들이 늘 하시는 말씀이 “늙으면 죽어야지” 하십니다. 그러면서도 영양제 보약은 좋아라고 잡수십니다. 세상에서 제일 싫은 것이 죽는 것이요, 세상에서 제일 좋은 것이 생명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죽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죽음이 가까워지면 사람마다 자신의 삶을 보다 더 영원한 것으로 만들려고 노력합니다. 재계의 거물도, 인기 연예인도 죽음이 다가오면 당황합니다. 재물도 인기도 버리고 영원한 삶을 찾으려고 합니다. 주님은 오늘 이러한 생명의 목마름을 보시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생명에 갈한 자여 내게로 와서 마셔라”
두 번째 주제는 생수의 수여자, 예수님입니다. 생수는 예수님이 주십니다. “내게로 와서 마셔라” 내게 생수가 있다! 내가 준다! 내게로 와서 마셔라! 예수 자신이 갈증의 해소책입니다. 예수 자신이 생수십니다. 요한복음에는 구약에 나타난 여러 상징들이 곧 예수를 가리킨 것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주님 자신이 곧 참 성전입니다.(2장) 주님 자신이 곧 장대 위의 놋뱀이십니다.(3장) 주님 자신이 곧 참 양식이요 만나십니다.(6장) 본문 말씀처럼 주님 자신이 곧 물을 내는 반석이십니다. 주님 자신이 세상의 참 빛이요(8장), 참 유월절 양입니다.(19장) 과거 출애굽 당시에 이스라엘은 반석에서 나온 물로 육신적인 생명을 건졌습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영혼의 생명을 건져야합니다.
내게로 와서 마시라는 말씀은 비싼 돈을 주고 마시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거져 가져가라는 말씀입니다.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주며 배부르게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나를 청종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마음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 나와서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 영혼이 살리라.”(사55:1-3) 정말 귀중한 것은 돈으로 사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께 선물로 받을 뿐입니다. 왜냐하면 돈으로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매일 숨 쉬지 않으면 죽습니다. 그러나 산소를 돈으로 사지 않습니다. 우리는 매일 햇빛을 받아야만 살 수 있습니다. 햇빛은 돈으로 살 수 없습니다. 지구를 순환하는 물도 돈으로 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거저 공급하십니다. 다이아몬드나 황금은 돈으로 삽니다. 그러나 생수는 돈으로 살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거저 받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적 구원의 비결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돈으로 살 수 없으며, 메시야를 노력으로 만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선물로 거저 받을 뿐입니다. 사마리아 성에서 점치던 박수무당 시몬은 성령을 돈으로 사려고 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그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 주고 살 줄로 생각하였으니, 네 은과 네가 함께 망할지어다!”(행8:20) 예수님은 생명의 샘입니다. 감히 돈으로는 가치를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선물인줄 알고 거저 와서 마시기 바랍니다.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28) 생수의 강! 예수님에게서 생명이 흘러 나옵니다. 그런데 그 생명을 분량적으로 계산한다면 넘치고 넘치는 강물의 분량입니다. 주님은 일찍이 수가성 여인에게 자신이 주는 생명의 분량을 솟아나는 샘물에 비유하셨습니다.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4:14) 본문에서 생수는 강물입니다. 이 말씀은 구약 에스겔서를 배경으로 합니다. 에스겔 47장에 보면 하늘 성전의 모습이 나옵니다. 하늘 성전의 동쪽 문에서 샘물이 흘러나옵니다. 그 물은 처음에는 발목에 차더니 그 다음은 무릎에 오고 그 다음은 허리에 차고 나중에는 온몸이 잠겨버리도록 많아집니다. 샘물이 냇물이 되고 강물이 되고 나중에는 사람이 건너지 못할 바다가 됩니다. 그 물이 이르는 곳마다 수많은 생명이 소생합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생명은 샘물이요 강물이요 바다입니다.(사12:3,15,32:2,44:3, 사58:11,슥14:8,출17:6) 우리가 누리는 생명은 근근히 연명하는 정도가 아닙니다. 차고 넘치는 생명력입니다.
그런데 이런 생명의 물이 ‘그 배에서’ 솟아난다고 했습니다. 그 배에서! 즉, 믿는 사람의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옵니다. ‘배’(belly)는 인간의 가장 깊은 곳을 의미하는 성경적인 표현입니다. 요나가 사흘간 머물렀던 곳이 바로 물고기의 깊은 뱃속입니다.(마12:40) 구약 성경에 보면 뱃속을 인간의 깊은 마음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욥15:35,잠18:8,20:27,시40:8) 그래서 흠정역을 비롯한 많은 성경이 본문의 ‘배’라는 말을 ‘heart’란 말로 번역합니다.
그러면 배에서 어떻게 생수의 강이 흘러난다는 말입니까? 이 말은 인간의 내부에서 생수가 저절로 흘러난다는 뜻이 아닙니다. 마음 중심에 모시고 있는 예수님으로부터 생수가 흘러나온다는 뜻입니다. 생수의 발원지는 내가 아니라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입니다. 흘러난다는 것은, 이 생명이 넘쳐서 남에게까지 전달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성도들이 받을 축복을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너는 물 댄 동산 같겠고,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같을 것이라.”(사58:11) 진정한 성도라면 그가 받은 축복이 자신에게만 머물지 않고 많은 사람들에게로 흘러나갑니다.(겔47:1,욜3:18,슥13:1,14:8) 생명이 넘쳐나서 많은 사람들에게 전달됩니다. 한 사람의 신자로 말미암아 생명의 샘물이 그 온 가족에게 흘러납니다. 온 이웃에게, 만나는 사람마다 기쁨이 전달되고 소망이 전달되고 믿음이 전달됩니다.
오늘날은 독신의 시대입니다. 우리나라도 이제는 2인 이하 가족이 대세입니다. 신앙도 세속 흐름에 동조합니다. 많은 신자들이 자기 혼자만 독야청청하려고 합니다. 자기의 믿음만 홀로 지켜갑니다. 자기만 구원받으면 그만입니다. 남이야 굶든지, 병들든지, 갇히든지 유혹에 빠지든지, 슬픔을 당하든지, 상관 않습니다. 그러므로 남에게는 전혀 영향을 주지 못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바라시는 바가 아닙니다. 생수의 강물을 밖으로 흘리지 않는 사람은 자기조차 지켜가기가 힘듭니다. 사해 근처 쿰란에 에세네파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한 때 그들은 외부 세계와 철저히 단절하고 자신들끼리만 살았습니다. 그들은 오직 죄악 세상에서 떠나는 데만 주력했습니다. 기도하고 예배드리고 성경 읽고 연구하는 것을 업으로 삼았습니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들은 언제 없어졌는지도 모르게 자취를 감추고 말았습니다. 20세기에 들어와서 고고학자들이 발견하기 전까지는 그들이 있었는지 조차도 몰랐습니다. 그들이 사해 근처에 살았다는 것이 매우 시사하는 바가 많습니다. 사해는 물을 받아들이기만 하고 내어 놓을 줄을 모릅니다. 그래서 사해에서는 아무 생명체도 살 수가 없습니다. 오직 죽음뿐입니다. 에세네파는 독야청청하다가 사해처럼 죽음만 남기고 가벼렸습니다. 그런 것이 결코 기독교 신앙일 수는 없습니다.
오늘 여러분은 어떻게 믿고 계십니까? 홀로만 독야청청하려고 하십니까? 그것은 주님의 뜻이 아닙니다. 주님의 뜻은 그 받은 생수가 내면에서 강물처럼 넘쳐나고, 그 물이 많은 사람에게로 흘러 나가기를 원하십니다. 많은 사람에게 생수의 강을 흘려보내시기 바랍니다. 나 때문에 주변 사람들이 살아나는 생물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성령을 받으라
그러면 우리의 깊은 곳에서 흘러나는 생수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39) 생수가 육체를 살리듯이 영혼은 성령이 살립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에게 성령을 주십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영접하면 성령이 그 마음에 오셔서 함께 거하십니다. 마음 깊은 곳에 계시면서 솟아나는 샘물처럼 생명을 공급하십니다. 온갖 영혼에 필요한 것들을 공급하십니다. 기쁨을 공급합니다. 사랑을 공급합니다. 지혜를 공급합니다. 능력을 공급합니다.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이 바로 생수입니다.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롬8:11) 한 알의 씨앗 속에 고유한 생명이 숨어 있습니다. 그 유전자 속에 온갖 생명의 특성과 각양 능력들이 들어 있습니다. 그와 같이 오늘 예수 그리스도를 모신 사람마다 성령이 계셔서 영원한 생명과 각양의 은사들을 공급하십니다.
성령은 모든 신자들 속에 평등하게 임하십니다. 누구에게나 차별이 없습니다. 어떤 사람 속에는 충분히 거하시고 어떤 사람 속에는 대충 거하심이 없습니다. 본래 인간의 마음은 하나님의 영이 계셔서 하나님과 교통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던 것이 아담의 범죄 이후로 하나님의 영은 인간의 마음에서 떠나버리시고 인간은 영적 흑암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인간 세상을 홍수로 심판하시기 전에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창6:3) ‘하나님의 신’, 즉 성령이 사람들 마음에서 떠나버림으로 인간은 죄에 방치되고 개선의 여지가 사라졌고 죽음에 굴복 당했습니다. 그 후에 성령은 왕이나 제사장이나 선지자 같은 일부 사람들에게 임하기도 했습니다만, 보편적인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나마 범죄에 빠질 때에는 성령은 떠나버렸습니다. 다윗은 범죄 후에 기도하기를 하나님의 신, 즉 성령을 자기에게서 거두어 가지 말아달라고 탄원했습니다.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시51:11) 사울 속에 성령이 거할 때에는 좋은 임금이었으나 성령이 떠날 때에는 악신이 와서 그를 사로잡았고, 포악한 인생이 되고 말았습니다. 엘리 제사장의 집에서 성령이 떠나버리니까 제사장 직분은 빼앗기고, 집안은 몰락하고, 나라는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대패합니다. 여기서 생겨난 말이 그 유명한 ‘이가봇’입니다. 영광이 떠났도다! 구약 시대의 성령은 이와 같이 특정한 사람에게만 임하였고, 그나마 죄에 빠지게 될 때에는 떠나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 보면 ‘누구든지’입니다. 남녀노소 빈부귀천 제한 없이 누구나 예수를 믿으면 성령을 받습니다. 일찍이 요엘 선지자는 이렇게 예언한바 있습니다. “그 후에 내가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욜2:28-31) 이 약속 그대로 최초의 교회로 모인 오순절 회중 위에 성령이 강림하셨습니다.(행2:1) 남녀노소 신분 차별 않고 예수 안에 모인 모든 사람에게 성령이 임하셨습니다. 이 성령은 구약 시대처럼 잠시 잠간 강림하신 것이 아닙니다. 모든 믿는 자들 속에 영원히 거하시기 위해서 강림하셨습니다. 아담 이후로 인간을 떠난 성령이 비로소 다시 인간과 함께 하시기 위해서 영원히 강림하신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 사건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행2:33)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성도들에게 제한 없이 임하십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속죄가 인간으로 하여금 성령을 받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 속죄를 떠나서는 성령 강림도 있을 수 없습니다. 오늘 말씀에 예수께서 영광을 받으신 후에 성령이 강림하신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속죄, 그리고 부활과 승천이 다 성령 강림의 계기가 되고 있음을 말씀한 것입니다. 예수 믿고 성령 받으세요!
예수 믿고 생수의 강이 흘러나게 하세요
초막절에 모인 회중들은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물을 길어다 제단에 붓는 헌수 의식에 몰두했습니다. 룰라브를 흔들면서 호산나를 외쳤습다. 인생들에게 진정 필요한 물은 육신의 음료수가 아니라 바로 영생을 주는 물입니다. 이 물은 실로암 못의 물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물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서 외치고 계신 예수 그리스도가 진정한 생명의 근원입니다.
생명에 목마른 인생들, 무엇이든 만족 없이 갈증 속에 사는 인생들 앞에 예수님은 서 계십니다. 과거 호렙산 반석에서 나는 물을 먹고 이스라엘은 살아났습니다. 이제 우리는 반석이신 예수 앞에 서 있습니다.(고전10:4) 예수님으로부터 영생의 물이 나옵니다.
우리는 이 예수를 믿음으로 모실 수 있습니다. 생수를 마시는 방법은 오직 한 가지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 나의 하나님으로 믿는 것입니다. “나를 믿는 자는...” 예수님을 믿고 마음에 영접하세요. 기쁨으로 환영하시고 내 인생의 주인으로 모셔 들이세요. 율법을 지킴으로써가 아닙니다. 선을 행함으로써도 아닙니다. 하나님께 잘 보여서도 아닙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믿음만이 우리의 깊은 배에 생수의 샘을 두는 길입니다. 예수 믿으세요! 마음 깊은 곳에 생명의 샘이 터집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사람 속에는 성령이 거하십니다. 성령은 생명을 줍니다. 성령은 능력을 줍니다. 소망, 기쁨, 지혜, 용기, 결단, 의지, 인내, 비전, 모든 것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서 솟아납니다.
생수의 강을 흘러나게 하세요. 믿는 자에게서는 생수가 흘러납니다. 나만 사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에게로 생명이 흘러나갑니다. 나로 말미암아 남편이 살고, 아내가 살고, 자녀들이 살고, 이웃이 삽니다. 영혼만 잘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영혼이 잘 됨같이 법사에 잘되며 강건해집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아멘! 할렐루야 !
목마른 자
요 7:37-38 / 남 호 목사
본문에 ‘명절 끝날’이란 말은 요7:2에 나오는 초막절을 말합니다.
초막절은 두 가지 의미가 있는데, 첫 번째 의미는 홍해를 건넌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의 땅 가나안에 정착하기 전 38년간 광야에서 방황하며 고생했던 것을 기념하기 위함입니다. 이 절기에는 7일 동안 시가지나 집, 성전, 뜰 안 등에 초막을 지어놓고 생활했기에 장막절이라고도 합니다.
두 번째 의미는 추수한 것에 대해 감사하기 위함이며, 맥추절 또는 수장절이라고도 부릅니다.
초막절 행사시에는 7일 동안 매일같이 종려가지와 버들가지를 들고와서 제단 주위를 돌았으며, 동시에 금으로 만든 물 주전자를 가지고 실로암 못가에 가서 물을 떠다가 제단 위에 쏟게 했습니다. 이런 의식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방랑생활을 했을 때, 모세가 반석을 쳐 물이 솟게 함으로 갈증에 시달리던 백성을 마시게 했던 것과, 명절 끝날 백성들이 여리고 성을 일곱 번 돈 다음 여리고성을 점령했던 것을 기념하기 위해 행해졌습니다.
이렇게 초막절은 초막을 상기하는 것과 추수를 감사하는 것을 하나로 묶어 “기쁨의 시간”으로 표현되었습니다. 계속되는 계절 가운데 수확을 주시고, 또한 조상들로 하여금 역사의 시련 가운데서도 살아남게 하셨던 하나님에 대한 믿음에서 진정한 기쁨의 감사로 표현한 것입니다.
이러한 절기가 끝나는 날 즉‘명절 끝날’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목마른 자’란 어떤 사람일까요? 목마른 자란 육적인 갈증을 가진 자가 아니고 은혜에 목마른 자, 은혜를 사모하는 자를 말합니다.
‘목마른 자’다시 말해, 은혜를 사모하는 자는 어떤 사람일까요?
❦ 변화되기를 간절히 소원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육적이 사람, 자기가 주인이 되어서 자기 생각대로 자기의 삶을 살아갑니다. 이런 사람은 주님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간혹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 중에도 육적인 삶을 사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사람들을 향하여 다 자기에게로 오라고 말씀합니다. 육적인 사람이었지만 영적인 사람으로 변화되기를 간절히 사모한다면 그 문제를 해결해 주시겠다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그냥 갈증을 해소해 주시겠다는 말씀이 아니라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도록 하겠다고 말씀합니다. 일시적인 문제해결이 아니라 영원토록 해결해 주시겠다는 축복의 말씀입니다.
어떻게 변해야 될까요?
1. 구원의 감격이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물에 빠져서 죽어가던 사람이 타인에 의해서 건짐을 받아 살아났으면 얼마나 감사하고 감격스럽겠습니까? 영원한 고통이 있는 곳으로 가던 사람이 영원히 복을 누리면서 사는 곳으로 옮김을 받았으니 얼마나 감사하고 감격스럽겠습니까?
우리는 모두가 다 죗값으로 영원히 형벌을 받아야 하는데,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므로 우리의 죄를 대신 져 주셨습니다.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영원히 형벌 받아야 될 죄가 사라지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영생복락을 누리는 천국을 소유하게 된 것입니다. 죄의 형벌을 받는 고통이 얼마나 큰지 성경은 다음과 같이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눅16:19- 부자와 나사로에 대한 말씀입니다. 부자는 날마다 호화롭게 살았지만 나사로는 그 부잣집에서 나오는 찌꺼기를 얻어먹고 사는 거러지였습니다. 두 사람이 모두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부자는 음부에 가고, 나사로는 아브라함의 품에 안겼습니다. 부자가 아브라함에게 목이 마르니 나사로를 시켜 손가락에 물 한 방울 찍어다가 혀를 서늘케 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러나 거절당했습니다. 나와 너의 사이에는 큰 구렁이 있어 오고 갈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저 세상에 형제 다섯이 살고 있는데 나사로를 보내어 그들만은 내가 있는 곳에 오지 않게 해달라고 다시 부탁했습니다. 그들이 사는 세상에는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즉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어야 한다고 말하며 그들의 말을 듣지 않으면 여기 있는 사람이 가서 말한다 해도 듣지 않을 것이라며 또다시 거절했습니다.
부자가 얼마나 비참했겠습니까? 얼마나 자존심이 상했겠습니까? 자기 집 대문간에서 얻어먹던 사람은 편안히 살고 있는데 자기는 물 한 모금이 없어 목말라하고, 부탁을 해도 모두 거절당하니 세상에서 살았던 자신의 삶이 얼마나 후회스러웠겠습니까?
사66:24 벌레가 죽지 않는 곳
계20:10 밤낮 괴로움을 당하는 곳
계20:14 꺼지지 않는 불못
우리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은 언제나 구원의 감격 속에서 살아야 합니다.
2. 사랑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첫째는 하나님의 영광을 받으시기 위함이었고, 둘째로는 인간을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위해 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도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창조하신 것을 보면 사람을 사랑하심이고,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심도 하나님의 사랑이요, 복을 주심도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충만하고 다스리고 정복하는 복은 인간 스스로 일구어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들을 사랑하셔서 주신 복입니다. 율법에 종노릇하던 사람들을 불쌍히 여겨서 하나님이 육신의 모형을 입으로 이 곳에 오셔서 십자가형을 받으신 것도 말로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요, 사랑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가운데 만들어지고 살게 되었으니 평생 이 은혜 이 사랑 갚을 길이 없습니다. 다만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이 땅에 사는 동안 사랑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사랑은 받는 사랑보다 주는 사랑이 더욱 자신을 복되게 하고 자신을 만족케 합니다.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받는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는 루즈벨트 대통령의 부인 엘레나입니다. 20살에 결혼하여 11년 동안 여섯 자녀를 낳았는데, 그 중 한 자녀가 죽었을 때, 친구가 찾아와 위로와 격려의 말을 해주었습니다. 하지만 엘레나는 나에게는 내가 사랑하는 남편이 있고, 나의 사랑을 필요로 하는 다섯 명의 아이가 남아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녀의 남편 루즈벨트는 젊고 패기 있는 장래가 촉망되는 남자였습니다. 그러나 뜻하지 않는 관절염으로 서서히 다리가 말라 버리는 불치의 병에 걸려 쇠붙이를 다리에 달고 고정시킨 채 휠체어를 타고 다니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루즈벨트는 자기 아내에게 불구자가 되었는데도 자신을 사랑하는지 물었습니다. 엘레나는 내가 그동안 당신의 다리만 사랑한줄 아느냐며 내가 사랑한 것은 당신의 인격과 당신의 삶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이 말은 불구가 된 뒤 열등의식과 패배의식에 사로잡혀 있던 루즈벨트에게 새로운 용기를 주었습니다.
결국1932년 다리불구임에도 미국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1936년에 재선, 1940년 3선에, 1944년 4선까지 당선되어 미국 역사상 전무후무한 4선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불구의 남편에게 용기와 희망과 활력을 불어넣어 주었던 엘레나는 어려움에 처해있던 남편을 4선의 대통령으로 만들었습니다.
사랑이란 위기를 극복케 할 뿐 아니라 전무후무한 사람으로 만드는 위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3. 말씀을 사모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성경말씀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당부하신 말씀입니다. 부모가 자식에게 잘되라고 타이르듯이 하는 말과 똑같습니다.
딤후3:16-17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 책망,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하며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하는 말씀입니다. 성경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바로 알게 하고, 바르게 살아가도록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에 바르게 살아가게 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육적인 삶이 인간을 행복케 하는 줄 알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전2:1- “내가 어떻게 하여야 내 마음을 지혜로 다스리면서 술로 내 육신을 즐겁게 할까 또 내가 어떻게 하여야 천하의 인생들이 그들의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 어떤 것이 선한 일인지를 알아볼 때까지 내 어리석음을 꼭 붙잡아 둘까 하여 나의 사업을 크게 하였노라 내가 나를 위하여 집들을 짓고 포도원을 일구며 여러 동산과 과원을 만들고 그 가운데에 각종 과목을 심었으며 나를 위하여 수목을 기르는 삼림에 물을 주기 위하여 못들을 팠으며 남녀 노비들을 사기도 하였고 나를 위하여 집에서 종들을 낳기도 하였으며 나보다 먼저 예루살렘에 있던 모든 자들보다도 내가 소와 양 떼의 소유를 더 많이 가졌으며 은 금과 왕들이 소유한 보배와 여러 지방의 보배를 나를 위하여 쌓고 또 노래하는 남녀들과 인생들이 기뻐하는 처첩들을 많이 두었노라 내가 이같이 창성하여 나보다 먼저 예루살렘에 있던 모든 자들보다 더 창성하니 내 지혜도 내게 여전하도다 무엇이든지 내 눈이 원하는 것을 내가 금하지 아니하며 무엇이든지 내 마음이 즐거워하는 것을 내가 막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나의 모든 수고를 내 마음이 기뻐하였음이라 이것이 나의 모든 수고로 말미암아 얻은 몫이로다 그 후에 내가 생각해 본즉 내 손으로 한 모든 일과 내가 수고한 모든 것이 다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며 해 아래에서 무익한 것이로다”
세상 것을 소유케 한 것은 하나님을 더 잘 섬기게 하기 위해 준 것이지 이런 것을 가지고 자신의 쾌락을 위해 사용하라는 것이 아님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독일의 신학자 알프레드 텔프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빵은 중요하다. 자유는 더 중요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 대한 신앙이다.”
하나님이 없는 자유는 방종, 방탕, 탈선에 이르게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물질은 선한 물질이 되게 하고, 자유를 참 자유되게 하고, 지식을 선하게 만들고, 권력을 봉사의 수단이 되도록 합니다.
보비 번스라는 작가는 ‘코테네 집의 토요일 밤’이라는 작품에서 훌륭한 가정, 행복한 가정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겸손한 셀러리 맨 아버지가 집에 돌아오면 가족으로부터 따뜻한 인사를 받는다. 저녁식사가 끝나면 온 식구는 낡은 오르간 옆에 둘러앉아 시온의 찬송을 부른다. 아버지는 성경을 들고 성구 한 장을 봉독한 후, 경건하게 무릎을 꿇는다. 하나님의 축복을 간구하는 경건한 토요일 밤의 기도하는 이 시간이 온 가족을 행복하게 만든다.”
행복한 가정이란 사람이 중심한 가정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모시고 사는 가정임을 강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신30:15-16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나니 곧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모든 길로 행하며 그의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하는 것이라 그리하면 네가 생존하며 번성할 것이요 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가서 차지할 땅에서 네게 복을 주실 것임이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며 살아가는 성도들이 은혜를 사모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우리를 향해 “목마른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고 말씀하십니다. 다시 말해, 이 세상에 은혜를 사모하는 자들아 다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성령 충만해서 어떠한 세상의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 가운데 살 수 있다라고 우리에게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요 7:37-39 / 이규왕 목사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인간의 몸은 70 %가 수분이며, 지구 표면의 70 %를 물로 덮으셨고 그 양이 무려 13억 8천 5백 톤이나 된다지만 그 중에 97.5 %가 바닷물이요, 나머지 2.5 %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그 민물조차도 지하수, 대기 중에 있는 수분, 빙하와 만년설을 제외하고 인간이 활용할 수 있는 물은 지구 전체의 물에서 고작 0.0075%에 불과하며, 2025년에는 전 세계가 심각한 물 부족 현상에 직면하게 될 것이라는 유엔의 환경보고서가 경고를 하고 있습니다.
이제 그와 같은 물 문제는 남의 나라의 이야기가 아니라 금수강산이라고 자랑하던 우리나라가 시급히 해결해야 할 과제이며, 많은 사람들이 돈을 주면서 오염되지 않은 생수를 찾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인간이 생존을 위해서 절대로 필요한 몇 가지를 손꼽는다면 일용할 양식과 호흡에 필요한 공기와 마셔야 할 물입니다.
그 가운데 물은 내장의 움직임을 매끄럽게 하고, 체내에 들어간 음식물을 소화하여 흡수하게 하며, 그 과정에서 생긴 불필요한 찌꺼기를 몸밖으로 밀어내고, 체내에서 생긴 열을 조절하여 적정의 체온을 유지시켜주는 일을 바로 물이 한다면 물의 중요성을 실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인간의 육신을 위해 오염되지 않은 생수가 필요한 것처럼 인간의 영혼을 위해서도 신령한 생수가 없어서는 안됨을 예수께서 오늘 성경을 통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눈에 보이는 육체적인 것에 대해서는 잘 아는 것 같으나,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부분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그 같은 인간의 영적인 부분의 중요성을 눈에 보이는 물질적인 것으로 비유하거나 비교하여 깨우쳐 주시는데 그 중에 하나가 바로 오늘 성경의 생수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 모두 신령한 생수로 갈한 영혼이 흡족함을 얻는 축복된 시간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1. 목말라 하는 인생들
예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신 때는 우리 민족의 추석 명절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장 대중적인 명절인 초막절 중반이었으며, 예수님은 초막절에 성전에 올라가셔서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에 대한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초막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일년 농사를 마친 후 한 주간 들판에다 초막을 짓고 생활을 하면서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의 제사를 드리며 지난날 그의 조상들이 어떻게 광야에서 사십 년 동안 하나님이 어떻게 은혜를 베풀어 주셨는지를 깨닫고 자손 대대로 기억하게 하기 위한 명절이었습니다.
(레 23:43) 이는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때에 초막에 거하게 한 줄을 너희 대대로 알게 함이니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거쳐 온 광야는 먹을 것도, 마실 것도 구할 수 없는 황량한 사막 지대일 뿐 아니라, 낮에는 살인적인 무더위, 밤에는 뼈 속 깊이 스며드는 추위 때문에 사십 년은커녕 사일 동안도 견뎌내기 어려운 곳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광야에서 사일이나 넉 달이 아니라 사십 년을 견디면서 육십 만의 자녀들을 생산하기까지 한 것은 하나님께서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더위를 식혀주시고, 밤에는 불기둥으로 냉기를 데워주시고, 물이 없는 곳에서는 오아시스를, 물이 써서 먹을 수 없는 곳에서는 나무 가지를 넣어 단물로 변하게 하심으로 사십 년 동안 목마르지 않게 하셨습니다.
때로는 도저히 물을 구할 수 없는 바위투성이의 광야에 이르게 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물이 없다고 모세를 향해 원망 불평을 터뜨렸습니다. 하나님은 그와 같은 백성들에게 모세를 통해 반석을 처서 생수가 솟아나게 하심으로 그들의 목마름을 해결해 주셨습니다.
(출 17:6) 내가 거기서 호렙 산 반석 위에 너를 대하여 서리니 너는 반석을 치라 그것에서 물이 나리니 백성이 마시리라 모세가 이스라엘 장로들의 목전에서 그대로 행하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초막절에 하나님이 그의 조상들에게 반석에서 생수를 솟게 하여 주신 은혜를 생각하며 초막절이면, 황금 주전자를 들고 행렬을 지어 실로암 연못가에 가서 물을 길어다가 성전의 제단에 그 물을 붓는 의식을 거행하였습니다.
그 때마다 사람들은 피리를 불며 불렀던 노래가 바로 시편 113편에서 118 편의 말씀입니다.
(시 114:8) 저가 반석을 변하여 못이 되게 하시며 차돌로 샘물이 되게 하셨도다 (시 115:1) 여호와여 영광을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오직 주의 인자하심과 진실하심을 인하여 주의 이름에 돌리소서 (시 116:12)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처럼 생존조차 불가능한 광야에서 하나님이 만나를 내려주시고, 반석에서 생수가 솟게 하신 것은, 사람이 사는 것은 땅에서 나는 것 만으로가 아니라 하나님이 위에서 공급해주시는 신령한 것들로 살 수 있음을 깨우쳐 주시는데 그 목적이 있으셨습니다.
(신 8:3)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러나 그 같은 만나와 생수를 먹고 마신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보다 도리어 원망과 불평을 일삼다가 광야에서 다 죽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범죄한 인생들에게는 땅위에 것만 가지고는 살수 없으며, 또 다른 만나와 생수가 요구되었습니다.
아무리 하늘에서 내리는 만나를 먹고, 반석에서 솟은 생수를 마신다고 할지라도 영원히 살수 없는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영혼을 살리는 신령한 만나와 생수를 얻기 전에는 하나님을 불신앙하고 여전히 주리고, 목마른 자로 평생을 살다가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이 가고 오는 모든 인생들의 실상인 것입니다.
(시 78:16) 또 반석에서 시내를 내사 물이 강같이 흐르게 하셨으나(시 78:15) 광야에서 반석을 쪼개시고 깊은 수원에서 나는 것같이 저희에게 물을 흡족히 마시우셨으며 (시 78:16) 또 반석에서 시내를 내사 물이 강같이 흐르게 하셨으나 (시 78:17) 저희는 계속하여 하나님께 범죄하여 황야에서 지존자를 배반하였도다
인간은 아무리 육신적으로 좋은 것을 먹고 마실지라도 결국 늙고, 병들어 죽게되며, 잠시 세상을 사는 동안 마치 전쟁터에서 죽어 가는 병사가 물을 찾는 것처럼 인간이 마지막 죽을 때까지 돈과 명예와 권세에 목말라하고, 사랑과 생명에 목말라 하다가 결국은 죽을 수 밖에 없는 것이 가고 오는 모든 인생의 실존입니다.
그 보다 더 절망적인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목마름에 대한 해결책이나 대안이 인간 자신은 물론 세상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와 같은 인생은 어디에서 가서, 어떻게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구할 수 있을까요?
2. 반석되시는 예수님
하늘에서 만나를 내리시고 반석에서 생수를 솟게 하신 하나님에게는 그 답이 있으셨으며, 또한 하나님은 목말라하는 인생들에게 생수를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으며 또한 선지자들을 통해 부르셨습니다.
(사 55:1)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그와 같은 인생들이 겪고 있는 영적인 목마름의 근본 원인은 오직 하나 죄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인생들이 목말라하는 것은 당연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와 같은 인생을 버리지 않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사 41:17) 가련하고 빈핍한 자가 물을 구하되 물이 없어서 갈증으로 그들의 혀가 마를 때에 나 여호와가 그들에게 응답하겠고 나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그들을 버리지 아니할 것이라
인생들은 목말라 하면서도 그 같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듣지 못하거나, 듣고서도 깨닫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이 여기신 하나님께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독생자를 친히 광야와 같은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예수께서 당신 자신이 보냄을 받은 이라고 여러 번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광야같이 목마른 세상에 오신 예수께서 하신 일이 바로 목말라 고통스러워하는 인생들에게 생수를 주시는 일이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이미 살펴본 요한복음 4 장에 나오는 수가성에 있는 야곱의 우물가에서 물을 길러 나온 여인에게 생수를 주신 일입니다.
(요 4:1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요 4:14)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요 4:15) 여자가 가로되 주여 이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이 영적으로 목말라하는 그 여인에게 주신 생수가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곧 예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이었습니다.
대낮에 물을 길러 우물에 온 여인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신령한 생수인 말씀의 은혜를 받고 나자 가지고 왔던 물동이를 버려 두고 먼저 동네로 가서 자기가 바로 그리스도를 만났다고 간증하여 온 동네 사람들에게 예수님 앞으로 인도할 수 있었던 놀라운 힘은 바로 예수께로부터 값없이 주시는 생수를 얻어 마셨기 때문입니다.
(요 4:28)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 두고 동네에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요 4:29) 나의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 (요 4:30) 저희가 동네에서 나와 예수께로 오더라
바로 그 예수님께서 초막절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과거 그의 조상들이 반석에서 솟은 생수를 마신 것을 기념하면서 실로암 못에 가서 물을 길어다가 제단에 부으며 노래하면서도 실상 영적인 목마름을 해결하지 못한 채 죽어가고 있는 인생들을 보시면서 그들에게 외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요 7:37) 명절 끝 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이처럼 영적으로 목말라 영원한 생수가 필요한 사람은 구약 시대나 예수님 당시 사람들만이 아니라 오늘도 죄와 고통으로 죽어 가는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도 예외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을 향해 내게로 오라고 부르신 말씀이 오늘 우리도 예외가 아니라면 오늘 성경에서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는 주님의 부르심이 바로 오늘 목마른 세상을 숨가쁘게 살아가고 있는 우리를 향한 부르심입니다.
3.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육신적으로 목마른 사람에게 물 외에 다른 무엇으로도 그 갈증을 시원하게 할 수 있는 것이 세상에는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영적인 목마름을 해결해 줄 수 있는 생수 역시 예수님 외에 다른 것이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목이 마른 자는 우물가로 가야만 물을 마실 수 있는 것처럼, 광야에서 목이 말랐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반석 앞으로 나아가야만 생수를 마실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얻기 위해서는 어디로 가야만 할까요? 다른 이가 아닌 반석되신 예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롬 9:33) 기록된 바 보라 내가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 (고전 10:4)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광야에서 목이 말라 죽어가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반석 앞으로 나아갔을 때 모세가 지팡이로 그 반석을 치니 그 반석이 쪼개지면서 생수가 솟구쳐 나온 것처럼 예수님은 우리에게 생수를 주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당신의 몸을 찢으셨습니다.
아무 죄도 없으신 예수께서 살인 강도와 같은 흉악범이나 달려야 하는 십자가에 달려 못 박히시고, 옆구리를 로마 병정의 창에 찔려 물과 피를 다 쏟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반석에서 생수가 솟구쳐서 목마른 사람들을 살린 것처럼, 예수님의 그 보혈이 바로 죄로 죽어 가는 목마른 인생들의 죄를 대속해 주시고 영원히 살게 하는 생수인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복음이라고 합니다. 누구든지 목마른 심령들이 그 복음을 믿음으로 받아 마시기만 하면 그 복음이 생수가 되어 겨우 목만 적시는 것이 아니라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고 하셨습니다.
(요 7:38)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여기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는 말씀은 무엇을 뜻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까?
(요 7:39)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님에게서 생수의 강이 흘러난다는 말씀은 쉽게 이해가 되지만 예수님을 믿는 자의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는 말씀은 과연 무슨 뜻입니까? 더구나 그와 같은 약속의 말씀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 12:3) 그러므로 너희가 기쁨으로 구원의 우물들에서 물을 길으리이다 (사 58:11) 너는 물댄 동산 같겠고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같을 것이라 (슥 13:1)그 날에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다윗의 족속과 예루살렘 거민을 위하여 열리리라"
바로 이 말씀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는 전통적인 지도자들과 생수의 근원이 되시는 예수님과의 본질적인 차이를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떤 종교적인 행사를 치르더라도 그들의 영혼은 마치 광야에서 맛본 반석의 물처럼 그들을 여전히 목마르게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신령한 반석되신 예수님이 주시는 생수는 마신 자만 목마르지 않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을 통해서 또 다른 여러 사람에게 연이어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공급해주는 복된 자들이 되게 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사람들이 그 말씀을 잘 이해하지 못했지만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신 후 말세 남종과 여종에게 약속하신 성령을 오순절에 사람들이 충만히 받음으로 시작된 예루살렘 교회로부터 생수의 복음이 성령 받은 사람들을 통해서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을 향해 계속적으로 확산되어 가면서 생수의 복음을 마시는 개인마다 구원을 받아 마음에 기쁨과 평화를 얻고 그 가정과 사회와 국가가 변화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겔 47:1) 그가 나를 데리고 전 문에 이르시니 전의 전면이 동을 향하였는데 그 문지방 밑에서 물이 나와서 동으로 흐르다가 전 우편 제단 남편으로 흘러내리더라
결 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육신적으로도 영적으로도 물이 부족한 목마른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세상에서 지금 나의 영혼은 목마르지 않습니까?
(암 8:11)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그와 같은 인생들을 향해 생수의 근원이신 주님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나아오라”고 부르고 계십니다. 오늘의 인생들이 형편은 어떠합니까? 마치 오염된 물을 마시고 점점 몸이 썩어가는 것과 같은 삶을 살고 있지 않습니까?
(갈 5:19)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갈 5:20)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갈 5:21)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정말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마시기를 원한다면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1) 무엇보다 먼저 자신이 얼마나 목마른 자임을 알아야 하고,
2) 몸만 아니라 갈급한 심령으로 예수님께 나아와야 하고,
3) 십자가 달려 생수의 근원이 되어주신 예수님이 나의 구세주 되심을 마음 중심으로 믿으면 됩니다.
그렇게 할 때 그 주님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은 생수가 되어 지금까지 나를 추하게 하고, 병들게 하고, 결국은 영원한 죽음의 길로 몰아넣는 죄악을 깨끗이 씻어주시는 회개를 맛보게 됩니다.
그 때 비로소 지금까지 그 무엇으로도 해갈되지 못했던 영적 갈증은 마치 여름날 시원한 냉수를 마신 것처럼 깨끗이 사라지게되고, 마음 속 깊은 곳에서부터 하나님이 주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기쁨과 감사가 샘이 터지게 될 것입니다.
(갈 5: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갈 5:23)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 5:24)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이미 그 생수의 강은 반석되신 예수님의 십자가에서부터 발원하여 오늘 우리에게까지 이르게 되었고, 이제 그 생수는 우리들만이 아니라 다시 우리에게서부터 저 목마른 영혼들이 생수를 구하는 광야와 같은 복음의 불모지를 향해 계속 선교되어져 나가야만 합니다.
그렇게 될 때 그들도 우리처럼 그 복음을 듣고 믿은 사람들이 우리들처럼 생수를 마시고 구원을 받게되고, 그들의 가정과 사회와 민족과 국가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게 될 것이고, 그들은 다시 다른 나라를 향해 생수를 전달하는 선교를 이어가게 될 것입니다. 그 때 비로소 온 세계는 너무나 아름다운 세상이 될 것입니다.
(겔 47:9) 이 강물이 이르는 곳마다 번성하는 모든 생물이 살고 또 고기가 심히 많으리니 이 물이 흘러 들어가므로 바닷물이 소성함을 얻겠고 이 강이 이르는 각처에 모든 것이 살 것이며 (겔 47:12) 강 좌우 가에는 각종 먹을 실과나무가 자라서 그 잎이 시들지 아니하며 실과가 끊치지 아니하고 달마다 새 실과를 맺으리니 그 물이 성소로 말미암아 나옴이라 그 실과는 먹을 만하고 그 잎사귀는 약 재료가 되리라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요 7:37-39 / 이규왕 목사
하나님이 창조하신 지구 표면은 70 % 가 물로 덮여있고,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심 받은 인간의 몸은 70%가 물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위해 준비해주신 에덴 동산에는 네 강이 발원을 하였으며, 인간의 문명 역시 4대 강을 근원으로 발생되었습니다. 이처럼 물은 인간의 생존과 번영에 있어서 절대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세계 인구가 증가하고 과학의 발달은 이상기후와 더불어 물의 오염의 가속화로 인해 물은 많으나 마실 물이 점차 줄어 들어가고 있는 실정이며 2025년에는 지구에 물 고갈 시대가 올 것이라고 환경학자들이 한결같이 우려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인간은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의 떡으로 사는 것처럼, 육신의 물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영혼을 해갈해주는 생명의 물이 절대로 필요한 존재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갈수록 세계 방방곡곡에 교회는 많아져가고 있지만 인간의 영혼을 만족케 하는 생명수는 메말라가고 있지 않은지 오늘 말씀을 통해서 돌이켜보아야 하겠습니다.
1. 목마른 인생
하나님이 창조하신 처음 세상은 참으로 아름답고 모든 좋은 것들이 풍족한 상태로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좋은 세상이었습니다(창 1:31). 그러나 인류의 조상 아담이 그것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고 범죄 함으로 모든 생태계와 더불어 영적 세계에도 큰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그러한 인간이 아무리 육신적으로 좋은 것들을 다 소유할지라도 죄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영적 목마름을 해결하지 못하는 가련한 인생들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자유와 해방을 얻었으나 메마른 사십 년 동안 광야에서 유리방황 할 때 마실 물이 없으므로 모세를 원망하던 상황과도 같은 것입니다.
(민 20:2) 회중이 물이 없으므로 모여서 모세와 아론을 공박하니라
하나님은 그 같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반석에서 샘물이 솟게 하시는 기적을 통해서 가장 깨끗하고 순수한 암반수로 목말라 고통스러워하는 자들을 흡족하게 마시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같은 생수를 마시고도 만족해하지 않고 여전히 원망과 불평을 그 생수를 마신 입으로 쏟아내었습니다.
(시 78:16) 또 반석에서 시내를 내사 물이 강같이 흐르게 하셨으나(시 78:15) 광야에서 반석을 쪼개시고 깊은 수원에서 나는 것같이 저희에게 물을 흡족히 마시우셨으며 (시 78:16) 또 반석에서 시내를 내사 물이 강같이 흐르게 하셨으나 (시 78:17) 저희는 계속하여 하나님께 범죄하여 황야에서 지존자를 배반하였도다
그 것은 인생의 영적 목마름은 반석에서 나는 생수를 마실지라도 해갈되어질 수 없는 것임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영적인 목마름은 오늘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도 예외가 아님을 갈수록 죄와 고통과 죽음이 더해지는 현실 세계에서 반복되고 있습니다.
2. 부르시는 예수님
인생들이 겪고 있는 영적인 목마름의 근본 원인도 인간의 죄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목말라 고통하는 인생들을 버리시지 않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사 41:17) 가련하고 빈핍한 자가 물을 구하되 물이 없어서 갈증으로 그들의 혀가 마를 때에 나 여호와가 그들에게 응답하겠고 나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그들을 버리지 아니할 것이라
하나님은 인생들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외면하고 여전히 죄 가운데 목말라 고통 하는 것을 보시고 때가 되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생수의 근원으로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예수님을 영접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초막절이 되면 과거 그들이 조상들이 광야에서 초막을 짓고 생활하던 것을 기념하기 위해 한 주간 동안 예루살렘 성전에 명절을 지켰습니다. 그 명절 끝 날에는 사람들이 행렬을 지어 실로암 우물에 가서 물을 길어다가 성전 문에 부었는데 그 의미는 그 조상들이 광야에서 지낼 때 반석에서 솟아 난 물을 마신 것을 기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해마다 그 같은 초막절을 지키고 있지만 로마 제국의 식민지 치하에서 그들은 여전히 목말라 고통하고 있었으며 예수님은 그들을 오늘 성경 말씀처럼 부르셨습니다.
(요 7:37) 명절 끝 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통해 약속하신 생수의 근원으로 오신 분이었습니다.
(사 55:1)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3.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반석에서 솟아난 생수를 마시고 죽지 않은 것처럼 ,예수님은 자신이 반석이 되어 그 몸을 찢어 거기서 생수를 솟아나게 하려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우리 인생들을 목마르게 하는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 달리셔서 몸을 찢어 물과 피를 쏟아 주신 일입니다.
(요 19:34) 그 중 한 군병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
그 예수님께서 영적으로 목말라하는 인생들을 향해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고 하셨을 뿐 아니라 그 예수님을 믿는 자는 마치 반석에서 생수가 쏟아져 나오는 것처럼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요 7:38)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그렇게 하실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통해서 약속하신 메시아뿐이십니다. 예수님이 바로 인생들의 목마름을 해결하시기 위해 세상에 오신 메시아이며, 그 예수님만이 모든 인류의 영적 갈증을 해결하실 수 있는 유일한 구세주이신 것입니다.
(요 4:14)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는 무엇보다 목마른 시대입니다. 이러한 세상에서 과연 오늘 나는 목마르지 않습니까?
(암 8:11)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에 영적으로 목마르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목마른 자는 누구든지 생수로 오신 예수님께 나아와 믿기만 하면 목마르지 않을 뿐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반석에서 솟구치는 물을 배부르게 마신 것처럼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고 약속하신 것처럼 그 심령이 성령으로 충만케 되는 축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생수의 강
요 7:37-39 / 안양준 목사
초막절기에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갔습니다. 예수님이 공생애 처음으로 예루살렘에 가서는 성전을 청결하게 하셨습니다(2:13-19). 두 번째 올라가서는 예루살렘 양문 곁에 있는 베데스다 연못가에 38년 동안 누워 있는 앉은뱅이를 고쳤습니다(5:6-8). 이제 세 번째 예루살렘에 올라갑니다.
초막절 마지막 날에 예루살렘 성전에서 무리들을 향해 성령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본문의 예수님의 말씀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초막절에 대해서 더 깊이 알 필요가 있습니다. 지난 주에도 초막절에 대해 말씀을 드렸는데 자세한 것은 레 23:에 기록되어 있다고 했습니다.
초막절은 이스라엘 조상들이 애굽에서 나와서 광야에서 지내는 동안 고생을 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지키는 절기입니다. 이스라엘 종교력으로 7월 15일부터 7일 동안 계속되는데 그때에는 흩어져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루살렘으로 모인다고 했습니다.
초막절에 치루어지는 여러가지 의식이 있지만 특별히 조상들이 광야 생활을 할 때 가장 중요했던 것이 물이었습니다. 물이 없으면 결국 광야에서 죽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물이 없어 목말라 죽어갈 때 하나님이 어떻게 하셨습니까? 반석을 쳐서 물이 나게 하셨습니다.
초막절이 되면 이 사건을 기억하기 위해 물에 관한 의식을 행하는데 제사장은 일주일동안 매일같이 실로암 못에서 물을 길어다가 성전 제단에 쏟아 부었습니다. 그리고 사 12:3에 있는 “기쁨으로 구원의 우물들에서 물을 길으리로다”라는 말씀을 외칩니다. 이 의식을 통해 광야에서 마실 물을 주신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에 대해 감사하는 것입니다.
겔 47:에 보면 성전 문지방 밑에서 물이 나오는데 처음에는 물이 발목에 오르더니, 얼마 후에 무릎에 오르고, 허리에 오르고, 건너지 못할 강이 되는데, 강물이 동방으로 흘러 아라바로 내려가 바다에 이르리니 흘러내리는 물로 바다의 물이 소성함을 얻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강 좌우에는 각종 나무가 자라 잎이 시들지 않고, 달마다 새 실과를 맺고, 잎사귀는 약 재료가 되었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에스겔 선지자에게 보게하신 환상인데 그 의미가 무엇입니까? 성전에서 나와 흘러가는 곳마다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성령입니다. 초막절에 가장 중요한 것은 물이고 그 물은 바로 성령에 관한 것입니다.
14절을 보면 예수님이 명절 중간 쯤되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십니다. 예수님이 초막절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성령에 관한 것을 말씀하시기 위함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초막절이 초막절 되게 하기 위함입니다.
지난 주에 형제들이 예수님께 초막절에 올라가서 이름을 떨치자는 식으로 권유를 하는 것을 보았는데 형제들이라도 예수님에 대해서 알지 못했고, 믿음이 없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무엇입니까? 너희 조상들이 반석에서 나오는 생수를 마시고 살았지만 이제는 내가 주는 물을 마시라는 것입니다. 고전 10:4은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목마를 때 반석을 치니 반석에서 물이 나왔는데 그 반석이 바로 예수님을 상징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신 32:15을 보면 “네가 살찌고 부대하고 윤택하매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을 버리며 자기를 구원하신 반석을 경홀히 여겼도다”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반석’에 대해서는 성경에 75번 기록이 되어 있는데 마 7:24에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마 16:18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이해가 되십니까? 반석은 예수님을 상징하는 단어입니다.
37절에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셔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의 흘러나리라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반석은 예수님을 상징하는 것이요, 물은 성령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오시는 성령의 역사가 있을 때에만이 인생의 참된 만족을 얻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요 4:에 사마리아 여인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이 여인은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으나 어떤 이유인지 다 헤어지고 지금 있는 자는 네 남편이 아니라고 하니 법적으로 혼인신고를 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그녀가 옳다 그르다를 말하려는것이 아닙니다. 어떤 여자가 한 남편과 행복하게 살고 싶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인생의 바람이 그렇게 살도록 놔두지 않았고 그래도 행복을 얻기 위해 다른 남편들을 얻었지만 그때마다 실패한 것입니다. 얼마나 기구한 운명입니까? 그렇게 해서라도 인생의 만족을 얻었으면 좋았을텐데 그러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남들이 뜨거워서 나오지 않는 대낮에 자신의 마른 목을 축이기 위해 우물가로 나왔다가 주님을 만났습니다.
주님이 그녀에게 하시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 4:13)
이 여인만 인생의 목마름이 있는 것입니까? 이 여인만 기구한 운명이라 그렇고 나머지 세상 모든 사람들은 만족하게 행복하게 살아갑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의 인생은 우물가의 여인처럼 끊임없이 물을 길러 다녀야 하는 목마름의 연속입니다. 물질적인 목마름, 이성적인 목마름, 정신적인 목마름, 영적인 목마름….
이런 것들을 얻기 위해서 힘쓰며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아니하고 차지해도 결국 눅 16:에 나오는 부자처럼 나사로의 손가락에 찍은 물 한방울로 혀를 서늘하게 해 달라는 주문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바로 목이 말라버리기 때문입니다.
렘 2:13을 보면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생수의 근원 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물을 주지 못할 터진 웅덩이라”
인간들은 어리석어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버리고 자기 스스로 노력해서 모든 것을 이루려고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물을 주지 못할 터진 웅덩이라고 했습니다. 제가 인천에 있을 때 어느 집사님의 남편이 있었는데 그 사람이 얼마나 교만한지 모릅니다. 세상에 자기보다 높은 사람이 없습니다.
은행에서 30년 가까이 일을 했으니 높은 자리에 올랐지요. 또 은행에 다니는 사람들이 얼마나 차갑습니까? 그리고 사고가 고정되어 있지요. 또 사람이 잘났습니다. 정말 키도 크고 얼굴도 잘 생겼어요. 또 스포츠를 좋아해서 이곳저곳 다니는 곳도 많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IMF가 터졌습니다. 그리고 명퇴를 당했습니다. 그 잘난 사람이 7개월 동안을 일없이 집에 있으니 그때부터 달라집니다. 예전에는 집에 가도 말붙일 시간도 없더니 먼저 말을 붙입니다. 결국 자기 인생의 목마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자신이 잘난 줄 알았는데 아니더라는 이야기입니다.
터진 웅덩이라는 것이 그런 것입니다. 언제 터진 웅덩이가 될지 모르는 것이 우리 인생입니다. 꼭 IMF가 아니더라도, 꼭 명예퇴직이 아니더라도 사람이 교만해지면 낮추시는 것이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아무리 좋은 집에 살고, 맛있는 음식을 먹고, 권세와 영광을 누려도 공허한 것이 인생입니다. 자신도 모르게 찾아오는 공허함. 행복한 줄 알았는데 행복하지 않습니다. 돈이 있고, 명예가 있고, 좋은 집과 차가 있고, 인기가 있고, 사람들이 인정해주면 행복할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가지면 가질수록 더 공허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안정이 되면 될수록 무엇엔가 빠지려고 하고 무엇엔가 집착하게 되는 것입니다. 취미 생활에 빠지고, 어떤 일엔가 미치고, 쾌락에 자신을 몰아넣어도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이 있습니다.
그러나 내 안에 성령이 오셔서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삶을 살면 환경에 관계없이 행복함을 얻을 수 있습니다.
제가 며칠 전에 저의 집사람에게 들었는데 수준이 높은 사람일수록 상황과 자신을 구분할 수 잇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준이 낮은 사람은 상황이 어려워지면 그것 때문에 인생이 불행해지는데 수준이 높은 사람은 상황은 어려워졌어도 상황이 어려워졌을뿐 내 인생이 실패한 것은 아니지 않느냐 하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자신이 그렇게 지켜가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으로 당연히 수준 높은 삶을 살게 되는 것 아닙니까?
하나님이 우리 인생에 대해 분명한 계획을 갖고 계시다면 우리를 그냥 버려두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게획대로 행하실 것이라는 믿음이지요. 여러분들 자녀 교육을 하셨겠지만 아이를 제일 안좋게 교육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냥 자기 하고 싶은대로 하도록 내버려두는 것입니다. 저는 남의 아이가 와도 버릇이 없으면 뭐라고 야단을 하는데 그게 목사들이 갖는 공통점이라고 합니다.
며칠전에 제가 잘 아는 부부가 저희 집에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그집 막내가 7살쯤된 것 같아요. 그런데 엄마가 식사를 하는데 화장실에서 변을 다봤다고 닦아달라는 겁니다. 제가 어떻게 하겠습니까? 터져나올 것 같은 화를 참느라고 얼마나 노력했는지 모릅니다.
남의 아이를 보고 뭐라고 할 수는 없지만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실 때에도 우리가 잘못된 길로 가는 것을 절대로 보고 그냥 두시는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을 성경이 가르쳐주지 않습니까?
히 12:7에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하나님이 여러분이 잘못된 길을 가고 있는데도 그냥 내버려두시면 여러분을 자녀로 취급하지 않으신다는 말과 같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이 우리의 상황을 어렵게 만드셔도 “아버지가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어렵게 하시는구나” “아빠가 혼낼 때는 아빠가 나를 싫어해서 나를 혼내시는구나”가 아니라 “아빠가 날 사랑해서 날 혼내시는구나”하는 것은 어린 아이라도 다 알고 있습니다. 우리 지호도 그 정도의 지식은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부모의 뜻에 따라 살면 그 부모가 어떻게 합니까? 말 잘 듣는 아이 때리는 부모 있습니까? 뭐든지 좋은 것으로 주려고 하지요. 그럴 때는 가정이 행복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면 행복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목마르지 않는 삶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자는 늘 성령이 충만한 삶을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생략했는데 12절을 보면 사람들이 예수님께 대하여 수군거리며 어떤 사람들은 ‘좋은 사람이라’고 하고, 어떤 사람들은 ‘아니다. 사람들을 미혹하게 하는 자’라고 합니다. 그리고 지도자들 사이에서도 이 사람이 ‘그리스도냐? 아니냐?’하는 논란이 일어납니다.
예수님이 누구십니까? 사람들의 평가와 상관없이 그 분은 그리스도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베드로와 같은 신앙의 고백이 여러분들에게도 있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 사람들을 그를 알지 못했습니다.
이제 명절 끝날 다시 말하면 초막절은 1주일 동안 게속된다고 했는데 1주일의 마지막 날입니다.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누구든지 목마른 자는 오라고 하시는 주님의 초청입니다. 38절에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난다”고 하십니다. 주님이 주시는 물은 목만 축이는 것이 아니라 뱃 속 깊은데서부터 흘러나는 것이기에 언제나 목마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밖에 꽂아놓은 ‘들풀’이란 책에 보면 인생을 살아가면서 겪은 여러가지 상황을 신앙의 힘으로 이겨낸 신앙 수기이지요. 참 따뜻한 글들이 많습니다. 거기에 보면 한 여자가 공군사관학교에 다니는 남자를 만나 결혼을 하는데 남자의 집이 너무 가난한 겁니다. 그래서 남편도 돈을 더 벌기 위해 남들보다 더 많이 일하고, 여자도 부업같은 것도 하고 해서 집도 마련하고 그랬는데 남편이 몰던 비행기가 사고로 인해 폭파되고 말았습니다. 그때까지 알뜰하다고 칭찬하던 시어머니가 보상금 때문에 싸우는 겁니다. 그때부터 서로 원수처럼 지냈는데 친구의 소개로 교회에 다니게 되었는데 처음 교회에 들어가는 순간 그렇게 포근할 수가 없더라는 겁니다. 그래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그러다보니 시어머니에 대한 생각이 자꾸만 나더라는 겁니다. 결국 10년만에 시어머니를 찾아 가는데 예전처럼 문전박대를 당하지 않을까 하고 고민하며 찾아갔는데 뛰쳐나오면서 맞이하더라는 겁니다. 그것도 하나님의 은혜라고 글에 쓴 것을 보았습니다.
사실 인생에 목마른 자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리고 주님은 그런 자들을 초청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목마른 자들이 주님을 만나기만 하면 다시 목마르지 않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육체의 갈증은 물로 해결되지만, 인생의 목마름은 입으로 들어가는 물로 해결되지 않습니다. 인생의 깊은 갈증은 우리의 심령 속에서 나오는 주님이 공급하시는 생수로만 해결할 수 있습니다.
내게로 와서 마시라
요 7:37-39 / 피종진 목사
본문에 보면 예수님께서 초막절의 마지막 날에 무리들을 향해 자신이 생수의 근원이신 것을 선포하시고 초청하는 설교를 하셨습니다. 이는 유대인들의 초막절 의식을 배경으로 한 것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초막절 절기 동안 매일 실로암 연못에서 물을 길어다가 제단의 서편에 붓는 의식을 거행하였습니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생활을 할 때 하나님께서 반석에서 물을 내신 일(출 17:6,7)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 반석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고전 10:4).
예수님께서 모든 인생들을 향하여 ‘목마른 인생’이라고 통칭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생수를 마시고 삽니다. 그런데도 왜 인생의 목마름이 있을까요?
첫째, 불신앙과 불순종 때문입니다.
“네가 모든 것이 풍족하여도 기쁨과 즐거운 마음으로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지 아니함을 인하여 네가 주리고 목마르고 헐벗고 모든 것이 핍절한 중에서 여호와께서 보내사 너를 치게 하실 대적을 섬기게 될 것이니, 그가 철 멍에를 네 목에 메워서 필경 너를 멸할 것이라”(신 28:47,48) 모든 것이 풍족하여도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고 섬기지 아니하면 참 기쁨과 만족이 없고 영혼의 갈증이 있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대 사람들은 여러 가지로 하나님이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는 과학 기계 문명, 전자 시스템 그리고 편리한 교통, 전파망, 건강과 지혜를 다 주셨습니다. 사실 우리가 이것을 악용하면 얼마든지 지능범, 사기꾼도 될 수 있고, 국제 밀수꾼도 될 수 있고, 큰 악명 높은 범죄 두목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런 것을 하나님을 위해서 사용하면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할 수가 있습니다. 풍족할수록 하나님을 더 잘 섬기고 하나님께 순종하면 그 주신 것이 점점 더 창대해지고, 점점 더 부유해지고, 점점 더 강건해지고, 점점 더 넘치는 하나님의 축복을 채워주실 줄 믿습니다.
인간의 특징 중에 하나는 어려울 때는 하나님을 잘 찾습니다. 위험할 때는 간절히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그리고 역부족이고 쇠약할 때는 하나님께 맡깁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재물과 명예, 권세, 건강을 주시고, 모든 일을 평탄하게 해주시며, 좋은 여건을 조성해주시면 그 때부터는 신앙이 해이해지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울부짖고 부르짖던 기도소리가 줄어들기 시작합니다. 하나님만 생각하던 마음이 세상으로 기울어지기 시작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생명을 바쳐서 살던 신앙이 해이해지고 나태해집니다. 우리는 어려울 때일수록 하나님을 의지해야 되고, 또 잘될 때일수록 더 하나님을 잘 섬겨야 합니다.
둘째, 세상에서 방황하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4:4이하에 보면 수가성 여인이 나옵니다. 이 여인은 대단한 여자입니다. 그 당시는 준엄한 율법시대였습니다. 범죄하면 당장에 돌에 맞아 죽습니다. 이러한 시대에 수가성 여인은 남자를 다섯 명이나 숨겨두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이 여자에게 기쁨이 있었습니까? 만족이 있었습니까? 남은 것은 목마름밖에 없었습니다. 우물가에 왜 물을 길러 왔습니까? 견딜 수 없는 갈증 때문이었습니다. 사실 육신의 목마름 때문만은 아닙니다. 영적으로 견딜 수 없는 갈증을 참지 못해서 그가 물을 길러 왔다가 주님을 만나서 대화하는 중에 주님을 발견했습니다.
주님은 그 여인에게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 4:13,14)고 말씀했습니다. 우리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이 세상은 그렇게 쉽게 풀려져가는 세상은 아닙니다. 가도 가도 끝없는 험산 준령이요 사막입니다. 어쩌면 우리 인생은 장애물 경주장과 같습니다. 이러한 인생을 살아갈 때에 우리는 절대로 세상에서 방황하는 자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세상에 살고 있기 때문에 때로는 실족했다 하더라도 툭툭 털고 빨리 일어서면 됩니다. 회개하면 됩니다. 주님 붙잡으면 됩니다.
우물가에서 주님을 만난 이 여인은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리로 뛰어가서 예수님을 전파하여 많은 사람을 데려왔습니다. 주님을 만난 순간에 그의 삶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셋째, 영혼이 피곤하기 때문입니다.
“주리고 목마름으로 그 영혼이 속에서 피곤하였도다”(시 107:5) 외로움이란 있을 것이 없을 때 오는 심적인 감정입니다. 연약함이란 있어야 될 에너지가 소모되었을 때 오는 것입니다. 영혼의 피곤은 있어야 될 하나님의 말씀이 없을 때, 있어야 될 주님이 곁에 안 계실 때, 있어야 될 믿음, 사랑, 의, 거룩함, 선이 없을 때 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착하고 의로운 일을 하고, 경건하게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말씀 붙잡고 맡은 일에 충성하며 헌신하고 살 때는 누가 몰라주어도 영혼에 찬송이 있습니다. 감사가 있습니다. 삶의 보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날마다 우리의 삶 속에 영혼의 만족을 위해서는 늘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를 바라보아야 됩니다(히 12:2).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내 영혼이 배불러져서 ‘내 아버지 주시는 생명 양식, 다 배불리 먹고 영생하라’(찬송 167장 4절)는 가사 대로 성경을 읽고, 듣고, 전하며 항상 가까이해야 됩니다. 성경 말씀을 접하면 영혼에 힘이 생깁니다. 믿음이 강해집니다. 그리고 비전이 가슴 속에서 불타게 되고, 하나님께 구한 대로 하나님이 역사하실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힘이 있을 때 승리할 수 있습니다.
말씀이 없으니까 영혼에 피곤이 있고, 예배 즉 하나님을 경외함이 없으니까 영혼에 피곤이 있는 것입니다. 예배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릅니다. 예배는 하나님께로부터 인간의 모든 기본 보장을 받게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러한 목마름에서 우리가 해갈을 받기 위해서는
① 예수님께로 나아가야 합니다.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사 55:1)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요 7:37) 영혼의 갈증은 하나님과의 관계의 단절에서 오는 은혜의 결핍 상태를 말합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존재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가까이 하여 은혜를 받아야만 만족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밤의 범죄 이후 인간과 하나님의 영적인 관계는 단절되고 말았습니다. 따라서 영혼의 갈증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영혼의 갈증을 해소시켜주시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화목제물로 죽으심으로써 단절되었던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회복시켜주셨습니다(엡 2:16,17). 오늘 이 땅에 목마른 인생들이 그 갈증을 해결하기 위하여 얼마나 애쓰고 발버둥치며 방황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예수님을 영접하지 못한 자가 계신다면 오늘 주님께로 나아오십시오. 주님께서 여러분의 갈증을 해소시켜 주십니다.
② 성령을 받아야 됩니다.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요 7:38,39) 성령은 바로 우리의 갈한 목을 축여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성령은 속에서부터 흐르는 생수의 강이 되어 인간의 영적 갈증을 근원적으로 해소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고 성령을 마음속에 모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성령께서 생수의 강처럼 역사하셔서 참된 기쁨과 만족을 누리게 하십니다.
성령이 충만한 사람은 신앙이 연약하여 넘어지거나, 시험에 들어서 상처 받거나, 사명을 감당하다가 도망치거나, 하나님의 일에 권태를 느끼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성령이 없으니까 상처 받고, 혈기 부리고, 변질되는 것입니다. 성령은 변질되지 않습니다. 성령이 충만한 사람은 낙심하지 않습니다. 변질되지 않습니다. 좌절하지 않습니다. 성령이 충만한 사람은 항상 평안하고 소망이 넘치고 기쁨이 넘치고 의욕이 있습니다. 일하고 싶어서 견딜 수 없는 사명감에 불타게 됩니다.
영혼의 갈증을 느끼는 분이 있습니까? 생수의 근원되신 예수님께로 나아가 성령을 받음으로 영혼의 갈증이 해소되고 참된 기쁨과 만족을 누리며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예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생수의 강이 흘러넘쳐야
요 7:37-39 / 조상호 목사
월남전에 종군했던 어느 미국 군목은 월남군의 총에 맞아 숨지는 젊은 병사들의 마지막을 지켜보면서, 그 병사들의 마지막 절규를 잊을 수 없었다고 합니다. 특히 숨을 거두는 병사들이 마지막으로 찾는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Oh my God!(오 하나님)이라는 말과 Oh water!(물)이라는 두 가지 말이었다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가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인간은 죽으면서까지 물을 필요로 하고 있으며 물을 달라고 아우성친다는 것입니다. 사실 인간은 물을 떠나서는 살 수 없습니다. 인간의 모든 문화는 물과 관계가 있습니다. 물이 있는 곳에 사람이 모이고, 물이 있는 곳에 문화가 발달되고, 물이 있는 곳에 도시가 형성됩니다. 그래서 고대 4대문명의 발상지도 알고 보면 다 강을 끼고 형성되었습니다. 오늘날의 대부분의 큰 도시들인 미국의 뉴욕, 프랑스의 파리, 영국의 런던, 한국의 서울 등은 다 물이 가깝게 있습니다. 호주도 보면, 시드니, 멜본, 퍼스, 아델레이드 등이 다 물에 가깝습니다. 뉴질랜드의 오클랜드, 와이카토, 웰링톤, 더니든, 인버카길, 그리고 우리가 사는 크라이스트처치를 보아도 바다가 가깝든지, 강이 가깝든지, 호수가 가깝든지, 아무튼지 물이 가까이에 있습니다. 사람은 물과 깊은 관계가 있도록 하나님이 만드셨습니다. 사람은 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우리의 몸의 80%가 물이고 물이 없으면 살 수 없을 정도로 하나님께서 만드셨습니다. 어떠한 생명이든지 물을 원합니다. 물과 생명은 관계가 있습니다. 물이 있는 곳에 생명이 소성함을 입는 것에 반해, 물이 없으면 생명이 살 수 없고 결국에는 메마른 사막이 되어 버리고 맙니다. 물은 우리 일상생활에서 대단히 중요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이처럼 우리 삶에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물에 대한 말씀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본문의 배경은 유대명절 중의 하나인 초막절입니다. 이 초막절은 지난주에 이미 말씀드린 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온 후 광야에서 40년 동안 생활한 것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40년을 지내는 동안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물이었습니다. 광야에서 물이 없으면 그들은 모두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먹을 양식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물이었습니다. 그들에게 물이 없어 다 죽어 갈 때 하나님께서는 모세로 하여금 반석을 치게 하여 생수를 마시게 해 주셨습니다. 반석에서 나온 생수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살린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매년 초막절 때에 이것을 기념했습니다. 그들은 초막절이 되면 예루살렘 가까이에 있는 실로암 못에서 물을 떠와 제단에 부으며, 하나님의 구원에 감사했습니다. 그들은 출애굽 한 이후 1300년 가까운 세월동안 초막절 때마다, 구원의 물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이번 초막절에서는 실로암 못에서 길어온 물을 제단에 붓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예수님께서 이렇게 외칩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37절) 우리의 목마름을 해결할 수 있는 분이 누구입니까?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만이 우리 인간의 목마름을 해갈시킬 수 있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이미 요한복음 4장에서 살펴보았지만, 예수님께서는 수가성 우물가에서 만난 한 여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4:13~14) 세상의 방법으로는 우리의 갈증을 해소시키지 못하지만, 주님만이 우리의 갈증을 해소시킬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세상의 것으로는 다시 목마르게 되지만, 주님이 주시는 생수는 영원히 목마르지 않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세상의 방법으로 자신들의 갈증을 해소하려고 합니다. 돈이나 명예나 인기나 권력, 등의 세상적인 방법으로 자신의 갈증을 해소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러면 그럴수록 더 갈증만 납니다.
그리스 신화 중에 탄타루스 왕 이야기가 있습니다. 탄타루스 왕은 먹으면 늙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다고 하는 제우스신의 음식을 훔쳐 먹었다가 발각되었습니다. 결국 그는 그 죄로 인하여 평생 동안 배고프고 목마른 형벌을 받게 되었습니다. 물이 마시고 싶어 눈앞에 있는 물 컵을 잡으려고 손을 내밀면 물 컵이 뒤로 쓱 물러나버립니다. 너무나 배가 고파 나무에 달린 열매를 따먹으려고 하면 그 열매가 하늘로 휙 올라 버립니다. 이처럼 마시고 싶고 먹고 싶은 것을 하나도 입에 넣을 수 없는 고통을 평생 동안 겪어야 했습니다. 이러한 탄타루스 왕의 신화에서 ‘텐터라이징(Tantalizing)'이라는 영어 단어가 생겼는데, 이 단어는 ‘감질 나는, 애 간장 태우는’ 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열심히 손을 뻗어 붙잡은 줄 알았는데, 그만 손에서 빠져 나갑니다. 조금 얻은 줄 알고 기뻐하려고 하는데, 그만 저만치 날아가 버리고 맙니다. 내 입으로 들어갔다고 생각했는데, 저 만치 멀어져 가버리고 맙니다. 오히려 그 일로 인해 더 갈증만 생깁니다. 사실 시대가 발전하면 발전할수록 현대인들이 가장 고민하고 있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이 갈증의 문제입니다. 문화수준이 발달하여 이제는 만족하고 살 것 같은데, 그게 아닙니다. 만족은커녕, 답답함과 목마름이 더해집니다. 저는 구약성경 전도서 1장 8절을 보면서 다시 한번 이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만물의 피곤함을 사람이 말로 다 할 수 없나니,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차지 아니하는 도다.” 무슨 말입니까? 인간은 만족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눈이나 귀는 만족이 없다는 것입니다.
처음 뉴질랜드에 오는 분들을 보면 상긋한 풀 냄새, 손에 잡힐 듯 하는 새파란 하늘, 녹색으로 그려놓은 것 같은 초지 등을 보며 감탄을 합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그러한 감격이 사라져 버립니다. 제가 몇 주 전 공항에서 아주머니들로 구성된 한국 단체 관광객들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저도 다른 분을 기다리는 통에 시간이 있었고 그분들도 안내하시는 분이 수속을 밟느라 마침 시간이 좀 남아 있어서 함께 자리에 앉게 되었습니다. 제가 먼저 그 아주머니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접근하려고 “관광 오셨습니까?”라고 한마디 건넸습니다. 그랬더니 갑자기 수많은 아주머니들이 말씀하기 시작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곳에 이민을 왔어요? 이곳에 이민 오려면 어떻게 해야 해요? 뉴질랜드 자연이 너무 아름다워요, 나도 이민을 오고 싶어요, 아저씨!(저를 그렇게 불렀다) 아저씨는 천당에 사니까 좋겠어요?’는 등의 말씀을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말씀을 나누는 중에 그분들은 탑승 시간이 되어 비행기 탑승구로 들어가시고 저는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그 분들이 하신 ‘아저씨는 천당에 사니까 좋겠어요’라고 하신 말씀이 잊혀지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처음 뉴질랜드에 도착했을 때, 내가 뉴질랜드에 얼마나 감동을 했나? 뉴질랜드가 지구상의 마지막 남은 천당이라고 감동을 하며 삶을 시작했는데, 지금은 어떤가를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제 마음 가운데 처음 먹었던 그 감동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저는 저의 이 모습을 보면서 ‘사람의 눈은 절대로 만족하지 않는다’라는 다시 한번 깨달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의 눈이 이렇게 간사합니다. 왕자님 같은 남자와 결혼했을 때, 공주님 같은 여자와 결혼을 했을 때는 뛸 듯이 기뻐 감동하다가도 시간이 흐르면서 그 감동이 사라집니다. 처음에 벤츠를 사서 타고 다닐 때에는 너무 기쁘지만, 시간이 흐르면 감동이 사라집니다. 큰 정원과 수영장 딸린 집으로 처음 이사 갔을 때는 밤잠 설치며 감동했다가도 시간이 흐르면서 그 감동이 사라집니다.
세상의 그 어떠한 것으로도 인간은 만족할 수 없습니다. 문화수준이 발달하면 만족할 것 같은데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문화수준이 발달하면 발달할수록 만족은커녕, 답답함과 목마름만 더해집니다. 직장인들이 퇴근하자마자 코가 삐뚤어지도록 술을 마시는 이유가 하루 종일 직장에서 상사 눈치를 보다가, 퇴근을 하면 그 동안 쌓인 답답함을 해결하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청소년들이 미친 듯이 몸을 흔들며 춤을 추는 이유도 알고 보면 갈증을 해결하려고 하는 몸부림이라고 합니다. 돈 벌려는 목적으로 도박장을 출입하는 사람들도 더러 있기는 하지만, 도박장에 가는 대부분의 목적은 돈 때문이 아니라 목마름 때문이라고 합니다. 타는 목마름 때문에 사람들은 가산을 다 탕진할 때까지 도박을 하고, 날이 새도록 술을 마시고, 격렬하게 몸을 흔들고 광란을 벌입니다. 현대인들이 갈급하기 때문에 복싱, 레슬링, 럭비 등의 격렬한 스포츠를 좋아합니다. 그런다고 만족을 느끼며 내면의 갈급함을 해결할 수 있습니까? 세상적인 방법으로는 만족할 수도 없고 갈증을 해소할 수도 없습니다. 세상적인 방법으로는 인생의 갈증과 목마름을 진정으로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오늘 주님의 음성을 들으십시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37~38절) 그런데 여기에서 눈여겨보아야 할 단어가 있습니다. ‘누구든지’라는 단어입니다. 제한이 없습니다. 주님은 조건을 달지 않고 누구나 환영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예수님께 나아가는 자는 누구나 할 것 없이 마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예수님이 주시는 생수를 마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생수가 무엇을 가리키고 있습니까? 39절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무엇을 가리킨다고요? 생수는 성령을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는 자는 다 성령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믿으면 성령을 받는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을 자신의 구세주와 주인으로 시인하면 그 때부터 그리스도의 사람이 됩니다(고전12:3). 하나님의 백성이 됩니다. 그리고 그 사람 안에 성령께서 거하십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로마서 8장 9절에서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의 사람 안에는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께서 거하신다는 것입니다. 또 같은 장 15절과 16절에서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라고 말씀하시며 성령께서 하나님의 백성임을 증거 해 주신다고 하십니다. 또 고린도전서 3장 16절에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고 하시며 성령이 거하시는 주의 백성들의 몸은 주님의 성전이 된다는 사실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생수이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하면, 그 때부터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그리스도의 사람이 됩니다. 그리고 우리 속에는 성령께서 내주하시며 친히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명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세주와 주님으로 영접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성령을 모신 사람들입니다. 성령님과 동행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아직까지 예수님을 믿지 않는 분들은 예수님을 여러분들의 구세주와 주님으로 영접하여 구원 받아 새로운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세상에서 갈증을 해소하지 못한 분들은 예수를 믿는 자에게 약속하신 성령의 생수를 마시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한 가지 딜레마가 있습니다. 분명히 예수님을 영접함으로 성령의 생수를 받아 마셨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갈증 나는 삶을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지난 97년 말, 김영삼 대통령의 정권 막바지에 이르러 우리 한국에 엄청난 경제적인 위기의 바람이 불어 닥친 적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어느 날 생전 들어보지도 못한 한 단어를 접하게 되었습니다. 이름 하여 IMF라는 단어입니다. 이 IMF라는 용어는 시골 사람들 뿐만 아니라, 어린아이들까지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 때 사오정 시리즈처럼 세상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던 한 조크가 있습니다. IMF에 돌입하기 직전, 참모 하나가 대통령에게 보고를 했답니다. “각하, 이제는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습니다. IMF로 진입해야 할 것 같습니다.” 대통령이 이렇게 물었습니다. “IMF가 뭐꼬?” “각하, IMF는 국제통화기금의 약자입니다.” 그러자 김영삼 대통령은 “우짜려고 국민들이 그렇게 ‘국제통화’를 많이 했는고?”라고 하더랍니다.
웃기지요.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한 나라를 다스리는 대통령이 대통령답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웃음 뒤에 결코 웃어 넘길 수 없는 진리가 그 속에 숨어 있는 것을 우리는 발견합니다. 이러한 비극이 우리 교회 안에서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성도가 성도답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신분에 걸 맞는 삶을 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 7장 18절과 19절에서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바 악은 행하는도다.”라고 고백한 것처럼, 나에게 원함은 있으나 선을 행하지 못하는데 고민이 있습니다. 원하지 않는 악만 자꾸 행하는데 고민이 있습니다. 이사야 37장 3절에서 “오늘은 환난과 책벌과 능욕의 날이라. 아이를 낳으려 하나 해산할 힘이 없음 같도다.” 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나에게 전혀 힘이 없습니다. 힘을 주어야 아기를 낳을 수 있는데, 힘이 없습니다. 산모도 죽고 아기도 죽을 위기에 빠졌습니다. 내가 하나님 말씀을 듣고 그 말씀대로 살려고 하지만, 내 속에는 능력이 없음을 깨닫습니다. 교회에 와서 찬양을 드리고, 기도를 하고, 말씀을 들을 때는 앞에 놓여있는 태산도 뽑을 것 같고, 어떤 원수라도 사랑으로 용서할 것 같고, 어떤 경우에서도 인내할 것 같고, 무슨 일이 있어도 주신 말씀대로 순종할 것 같은데, 막상 교회 문 밖에 나가면 내 속에 능력 없음을 깨닫습니다. 이기기는 해야겠는데 힘이 없습니다. 말씀을 들을 때는 집에 가자마자 전화통 붙잡고 한국에 있는 남편에게 사랑한다고 고백하기로 결심했는데, 막상 전화기를 들면 사랑의 말은커녕, 짜증과 투정만 부리다가 멀리 떨어져 있는 남편 기분을 팍팍 상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교회당에서는 자녀를 양육하며 가정을 돌보느라 젖은 손이 마를 날이 없는 아내의 손을 한번 잡아주려고 결심을 했지만, 막상 집에 돌아가서는 아내의 가슴에 못을 박아 버립니다. 매월 5월 달 어버이 주일을 맞이하면 오늘부터 진짜로 아빠 엄마에게 잘해 드리고 부모님 말씀에 순종해야겠다고 결심하지만, 그게 뜻대로 되지 않습니다. 이영수장로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잡사가 되지 않기 위해서 내일부터 새벽기도를 나와야겠다고 결심하지만, 첫날부터 늦잠을 자버려 계획대로 되지 않습니다. 그러다보니 좌절감, 낭패감, 패배감 등의 감 종류란 종류는 다 듭니다. 결국 한심하고 불쌍한 자기 자신을 바라보면서 스스로 심한 자괴감에 빠집니다. 무엇이 문제입니까? 생수이신 예수님께 나아가 이미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의지하며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믿음으로 내가 이미 성령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왜 이렇게 힘이 없습니까? 왜 나에게 말씀대로 살아갈 능력이 없습니까? 무엇이 문제입니까? 그것은 1단계에서 멈추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는 자에게 약속하신 성령의 생수를 받아 마셨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1단계에 지나지 않습니다. 예수를 믿고 그 다음 단계로 나아가야 합니다. 무슨 단계입니까? 성령이 자기 안에서 흘러넘치는 단계입니다.
생수의 강이 흘러넘쳐야
우리는 성령의 생수의 강이 넘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생수의 강이 흘러넘치는 것은 경험하지 못하고 생수만 겨우 맛보고 만족해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이것을 사랑의 교회의 옥한흠 목사님께서는 전체 요리인 에피타이저와 주 요리인 메인 메뉴 두 가지를 가지고 설명한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 궁전에 초대받은 우리가 에피타이저만 먹고 일어나는 경우가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어느 레스토랑을 가면 에피타지어만 먹어도 배가 불러 메인 메뉴는 그냥 남겨 놓는 경우도 있지만, 사실 레스토랑에서는 메인 메뉴가 중요합니다. 에피타이저는 보조 요리사도 만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메인 메뉴는 아무나 만들어내지 못하고 일급 요리사가 만들어냅니다. 레스토랑에서 전체 요리인 에피타이저가 아닌 메인 메뉴가 중요한 것처럼, 성령의 생수를 맛보는 것보다 성령의 생수가 우리 삶 속에서 강물처럼 흐르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38절과 39절을 다시 한번 보겠습니다.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 고로 성령이 아직 저희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성령의 생수의 강이 흐르는 삶을 살 수 있는 사람은 특별한 사람이 아닙니다. ‘나를 믿는 자’,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세주와 주인으로 모신 사람이 체험할 수 있는 은혜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은(엡1:7) 에베소 교회 성도들에게 에베소서 5장 18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이미 구원받아 성령의 생수를 맛본 사람은 성령의 충만한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한번 체험하고 끝내버리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날마다 순간마다 충만해야 됩니다.
조용기목사님께서 개척한 순복음중앙교회가 부흥에 부흥을 하다가 갑자기 멈추게 되었습니다. 조목사님은 답답했습니다. 부흥이 멈춘 특별한 이유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새벽기도 시간에 예배당 구석에 앉아 간절히 기도를 하는데 갑자기 주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내 아들아 너는 성령을 알고는 있지만, 교제한 적이 없었단다.” 주님의 음성을 들은 조목사님께서는 “주여, 저는 거듭났습니다. 성령은 제 안에 임재 해 계십니다. 저는 이미 성령 충만을 이미 경험한 바 있습니다. 그런데 더 이상 무엇이 필요합니까?”라고 하자, 주님께서는 “그렇다. 너는 성령을 하나의 체험으로 대하였다. 그러나 네게 말하노니 성령은 하나의 인격체이다. 인격체를 결코 경험으로 취급해서는 안 된다. 너는 성령님을 한 인격체로 인정하고 믿고 환영하고 의지해야 한다”라고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결국 조목사님께서는 무릎을 끓고 “사랑하는 성령님, 저는 성령님을 알고 있었지만, 성령님을 슬프게 하고 있었습니다. 지금에서야 성령님을 믿고 환영하고 의지합니다.” 그 때 이후 조목사님께서는 성령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강대상에 올라갈 때도 “성령님, 제가 이제 올라갑니다. 같이 가시지요”라고 하시며, 설교할 때도 ”성령님, 이제 말씀 하시지요“라고 하시며, 기도하실 때에도 “성령님, 인정하고 의미하고 모셔 들이고 의지 합니다”라고 하시며 항상 성령님과 동행하며 생수가 넘치는 삶을 살자, 교회가 폭발적으로 부흥하여 결국은 세계 최대교회가 되었다는 이야기는 너무나도 잘 알려진 이야기입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성령의 생수가 넘쳐야 될 줄로 믿습니다. 날마다 성령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야 될 줄로 믿습니다. 이것이 풍성한 삶을 누리는 비결입니다. 구약 에스겔서 47장 1절부터 12절까지를 보면 물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여기에서 물은 성령을 의미합니다. 성전 문지방 밑에서 흘러나온 물이 강으로 흘러가자, 강 좌우편에 나무가 심히 많게 되고, 그 나무들이 무성하게 자라 많은 열매를 맺었습니다. 또 강물에는 수많은 고기들이 뛰놀고 있었습니다. 물이 흘러가는 곳에는 모든 것이 살아나고 모든 것이 풍족하고 모든 것이 풍성했습니다. 이처럼 성령의 생수가 흐르는 곳에는 풍성한 삶이 주어지는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성령의 생수로 충만하면 감히 세상이 넘볼 수 없는 줄로 믿습니다.
지난 8월9일자 신문에 “관람객, 사고로 상어 수족관에 빠져”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습니다. 미국 루이지애나주의 뉴올리언스 소재, 한 수족관에서 어린이 4명을 포함한 10여명의 관람객들이 상어를 키우고 있는 수족관 위의 좁은 통로를 지나가다, 통로가 갑자기 붕괴되는 바람에 상어 24마리가 들어있는 6미터 깊이의 수족관에 빠졌다고 합니다. 사고로 물 속에 빠진 10명의 관람객들은 수족관이 미끄러운 유리로 만들어진데다 수면과 수족관 윗부분까지의 거리가 1m 정도나 되기 때문에 스스로 나오지 못하고 무려 15분 동안 수족관에 빠져 있다가, 수족관 측에서 임시 사다리를 만들어 관람객을 가까스로 구조되었지만, 15분 동안 24마리의 상어와 같이 있었지만, 단 한 사람도 상어의 밥이 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상어가 배부른 상태에 있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사고가 나기 바로 전에 상어들이 먹이를 배가 터지도록 먹어 상어들이 배부른 상태에 있다보니 아무리 좋은 먹이감이 눈앞에 있어도 잡아먹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신문기사를 읽으면서 크게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안에 가득 차 있으면 더 이상 먹지 않는 상어처럼, 우리 안에 가득 채우면 된다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충만하면 세상의 것들이 들어오지 못합니다. 들어 올 공간이 없는데 어딜 들어옵니까? 그런데 우리가 충만하지 않기 때문에 세상의 더러운 영향력이 밀어닥쳐 우리를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성도는 죄악적인 요소를 제거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충만함을 받는 일에 더욱 힘써야 합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5장 17절에서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소욕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육체의 소욕을 이루지 않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성령을 좇아 행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생수가 우리 안에 충만하면 우리는 성령의 능력으로 육체의 소욕을 다스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믿은 지 1년이 지나도, 5년이 지나고, 10년이 지나도 왜 이 모양, 이 꼴입니까?“라고 말하기 전에 먼저 성령을 좇아 행하시기 바랍니다. 1년이 가고, 10년이 가도 특별한 변화와 성숙이 되지 않은 것에 부끄러워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생수의 강이 넘치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짜내는 인생을 살지 말고 흘러넘치는 인생을 사시기 바랍니다. 목마름이 능력입니다. 음악에 대한 목마름에 잇는 사람이 음악의 대가가 됩니다. 미술에 대한 목마름이 있는 사람이 음악의 대가가 됩니다. 목마른 사람이 성공합니다. 마찬가지로 영적으로도 목말라하는 사람이 은혜를 경험합니다. 여러분! 배부른 사람이 식당에 가는 사람 보았습니까? 배부른 사람은 한사코 식당에 가는 것을 거절합니다. 마찬가지로 배부른 사람은 주님 앞에 가지 않습니다. 목마른 자가 갑니다. 배고픈 사람이 갑니다. 목마른 사람을 하나님께서는 해갈시켜 주시고, 배고픈 사람을 하나님께서는 배부르게 해 주십니다. 마태복음 5장 6절을 보면,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먹어도 배고프고 마셔도 목마르기만 한 것에 매달리지 말고,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령에 주린 사람, 생수에 목말라 하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한 사람들마다 심령 깊은 곳으로부터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게 될 줄로 믿습니다. 성령님을 사모하며 목말라하는 사람들마다 성령께서 성령의 생수로 충만하게 해주실 줄로 믿습니다.
은혜를 사모하자
요 7:37-39 / 김태복 목사
여름은 일반적으로 휴식의 계절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산과 강과 바다로 휴가를 떠납니다. 그러나 교회에서는 교육의 계절이요, 우리 교우들에게는 은혜를 받는 계절입니다. 전반기에서 맡겨 주신 일을 마치고 후반기의 사역이 시작되기 전에 다시금 심령을 가다듬고 새 은혜, 새 능력을 받아서 후반기를 성공적으로 시작할 수 있도록 준비하는 기간입니다.
그러므로 이번 여름 동안 우리 교우들은 육신적으로 산과 강, 바다에 나가서 자연과 함께 한껏 휴식을 함으로 심신의 피로를 씻는 기간이 될 뿐 아니라, 기도원이나 조용한 산에 가서나, 혹은 교회에서 특별히 시간들을 정하고 간절히 기도함으로 새 은혜, 새 능력을 받은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특별히 우리가 은혜를 더욱 사모할 이유는 지금은 마지막 때의 끝에 와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말세에 일어날 징조는 무엇입니까? 첫째, 마 24:14에 보면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전파되는 것입니다. 이제는 모든 세계에 복음이 전파되고 오직 이스람 권만 남았습니다. 둘째,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력의 징조들입니다. 과거에는 세계가 민주주의와 공산주의로 나누었지만, 지금은 아랍권과 반아랍권으로 나누었습니다. 아랍권의 세력이 얼마나 무서운지 유럽의 기독교권까지 강하게 침투하면서 잠식하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전세계는 마지막 영적대결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귀한 믿음의 형제와 자매들이 지금 아프카니스탄에 억류되어 있는 것도 이런 영적전쟁의 일환으로, 그들은 모든 기독교인들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있는 것입니다. 텔레반이 순수한 마음으로 봉사를 갔던 젊은이들을 억류하고 두 명이나 살해하는 끔찍한 일을 하자 이스람교의 지도자들이 ‘이것은 잘못된 처사다. 회교인으로 너무나 부끄럽다.’고 개탄하고 있습니다.
이는 이스람권이 근본적으로 무너지고 있다는 징후인 것입니다. 세 번 째로 말세의 징조는 전쟁과 지진과 기근이 극에 달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말세지말인 요즈음 전세계으로 기근이 얼마나 심한지 인구의 3분지 1정도로 굶주림으로 고통 받고 있고, 민족 간의 전쟁, 홍수와 기근 및 지진의 자연 재해, 불치의 질병이 만연되어 있습니다. 이런 마지막 때를 당하면서 하나님은 한 사람의 영혼이라도 더 구원하시기 위해서 많은 주의 종들에게 성령님의 능력을 더 부어 주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농부들은 추수 때에 벼 이삭 하나라도 더 줍기 위해 애쓰듯이 농부이신 하나님도 이제 최후의 시기가 가까운 줄 아시고 마지막 이삭줍기에 여념이 없으십니다. 마찬가지로 마귀도 제 때가 얼마 남지 않은 줄 알고 우는 사자처럼 두루 다니며 한 영혼이라도 자기의 것을 만들기 위해 총력을 기우리는 것입니다. 마귀에게도 마지막 이삭줍기가 시작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성령님으로 충만하여 무장하므로 전신갑주를 입지 않으면 어느 사이에 마귀의 올무에 빠질지 모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지금 은혜가 충만한 생활을 하고 있습니까? 은혜가 충만하지 않은 상태는 왜인지 신앙생활에 힘이 없습니다. 곧잘 낙심이 되고 만족과 기쁨이 없습니다. 찬송하기도 싫고 기도할 힘이 안 나며 충성에 대한 열심이 점점 사라지고 있습니다. 그런 성도들은 약해지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대로 방치하면 마침내 신앙의 병이 듭니다. 나중에는 마귀의 먹이 감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런 분은 은혜를 받지 않으면 안 됩니다. 성령님의 능력을 받아야 합니다.
1. 그러면 성도들이 은혜를 받고 나면 어떻게 달라집니까?
엡 5:19-21절에서 보면 세 가지의 삶으로 변화되는 것을 배울 수가 있습니다.
(1)기쁨과 찬송의 마음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19절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라고 했습니다. 어제까지 낙심과 회의, 절망 가운데 빠졌던 자라도 성령님의 은혜의 기름이 그 속에 차고 넘치니까, 기쁨의 빛이 환하게 비취기 시작합니다. 찬송이 절로 그 입에서 나타납니다.
(2)은혜가 충만하면 감사의 빛이 가득 찹니다.
20절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라 했습니다. 우리의 심령에 성령님의 기름이 가득차면 감사의 빛이 밝아지기 시작합니다. 어제까지는 매사가 짜증이 나고 불평불만으로 보이던 것이 온통 감사하다는 마음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3)은혜가 충만하면 사랑의 빛이 넘치게 됩니다.
21절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고 했습니다. 성령님의 은혜가 충만해지면 누구를 보든지 사랑으로 대하고 그들을 섬기고 싶은 마음으로 가득 찹니다. 때로 허물이 많은 사람을 만난다 할지라도 저들을 측은히 여기게 되고 도와 주고 싶은 마음으로 가득 찹니다. 이와 같이 아무리 부족한 인간이라도 성령님의 은혜가 충만해지면 기쁨과 찬송, 감사, 사랑의 빛이 넘치므로 많은 사람에게 비추게 되므로 가정이 환해지고 교회까지도 환해지게 만듭니다.
「다락방」이라는 잡지에는 풀로리다 감리교 목사인 빌리 류터의 감동적인 글을 싣고 있습니다. 1930년 대공황 때 먹을 것이 없어서 어머니와 세 남매는 구세군 급식소에서 연명하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그의 아버지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알콜 중독에다가 도박 생활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것도 부족하여 자기가 여섯 살일 때는 가출했습니다. 그리고 도박하다가 진 빚을 갚기 위해 도둑질을 하다가 감옥에 들어가기를 자주했습니다. 어느 날 어머니가 보니 아버지가 자살하려고 합니다.
어머니는 눈물을 흘리며 함께 교회 나갈 것을 애원했습니다. 아버지는 교회를 나가는 때부터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밑바닥 인생, 쓰레기 같은 인생이 예수님을 믿고 자기의 남은 생애를 하나님께 바친다고 고백했고 완전히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초등학교를 2년 밖에 다니지 않은 무식한 자였으나 성경 말씀을 5백 구절을 암송하고 매일 저녁, 유치장, 교도소, 병원을 방문하여 전도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가정은 여전히 가난했으나 언제나 찬송과 감사가 넘치는 곳이 되었습니다. 그런 은혜의 빛 속에서 아들은 성장하여 미국의 대교회의 목회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 목사님은 간증하기를 “이것은 오직 기적이다. 성령님의 능력이 아니고는 설명할 길이 없다.”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이여. 우리는 더 큰 은혜를 사모함으로 우리의 삶 속에서 그리스도의 빛인 찬송과 기쁨, 감사와 사랑의 빛을 비추는 자들이 다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 자, 그러면 어떻게 해야 성령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는가?
(1)성령님이 어떠한 분인가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성령님은 우리를 철저히 돕기 위해서 오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돕기 위해서 오신 것처럼 성령님의 오신 목적도 우리를 돕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살던 제자들은 참으로 행복했을 것입니다. 무슨 문제든지 예수님께 가지고 가면 다 해결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양식이 없어도, 풍랑이 일어도, 건강이 나빠져도 다 주님이 해결해 주십니다. 그런데 그 주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셔야 한다니까, 제자들은 깊은 시름에 잠기게 되었습니다.
‘만일 주님이 떠나가시면 누가 우리를 인도하시며, 가르쳐 주시며, 그 큰 사랑으로 감싸주실까?’라면서 큰 근심과 슬픔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 때에 주님은 시름에 잠긴 제자들을 향해서 말씀하시기를 요 14장에서는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내가 떠나가면 너희를 고아처럼 버려두지 않고 다른 보혜사가 너희에게 보내 주리라. 그가 와서 너희를 보호하고 가르치고 너희를 바른 곳으로 인도하여 주리라.”고 하셨습니다. 과연, 그 성령님이 오셨을 때, 그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으나 예수님의 약속대로 저들의 삶을 붙들어 주시며 보호하시고 인도하시며 능력을 주시는 것을 체험하게 된 것입니다.
성령님은 이처럼 우리를 철저히 도우시기 위해서 오신 분이십니다. 성령님은 영어로는 ‘컴퍼터(comforter)’라고 표현함으로 ‘위로자’라는 뜻이며, 한문으로는 ‘보혜사(保惠師)’로 표현함으로 ‘보호하시며 은혜를 주시며 가르치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헬라어로는 ‘파라클라토스’라는 말로 표현했는데 그 뜻은 ‘어떤 사람의 긴급한 필요에 의하여 그이 옆에 불러 세움을 받은 분’입니다.
‘파라클레토스’의 어원은 옛날 그리스 법정의 변호인에서 나온 말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이제 억울하게 감옥에 가려고 할 때나 누구인가에 사기를 당해서 파산 직전에 있을 때에 변호사가 나타나서 모든 것을 해결해 주면 얼마나 고맙습니까? 그처럼 성령님은 우리를 도우시려고 예수님 대신 오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육신을 가지셨기 때문에 그가 계신 곳에 있는 사람들만 도우실 수 있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령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공기처럼 계셔서 세계 어느 곳에 어떤 위치에 있든지 원하는 자는 다 도우실 수 있는 것입니다. 성령님께서는 예수님과 똑같은 능력을 가지신 분이십니다. 다만, 예수님과 성령님의 다르신 점은 한분은 육신으로 나타나셨고 한 분은 영으로만 나타나셨다는 점입니다. 그러므로 성령님님은 예수님과 똑같이 인격을 가지시고 우리를 도우십니다.
인격이란 지식․ 감정․ 의지가 있다는 말입니다. 성령님은 고전 2-11절에 보면 지식을 가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외에는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또한 성령님님은 감정을 가지셨음을 롬 8:26절에서 알 수가 있습니다. “오직 성령님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그리고 성령님은 의지도 가지셨음을 고전 12:11절에서 알 수가 있습니다.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시느니라.” 이와 같이 예수님의 인격과 능력을 똑같이 가지신 분이 공기처럼 우리 가까이 계시면서 우리를 도우시고 계시다는 것은 너무나 감격적인 일입니다. 여러분이여. 여러분이 무슨 곤란을 당하거나 능력이 심히 부족할 때, 여러 가지 유혹이나 시험에 빠졌을 때 여러분 가까이 계셔서 도와주시기를 원하시는 성령님께 구하십시오.
그 보혜사 성령님을 부르시고 온갖 사정을 고하고 여러분의 모든 것을 그에게 다 맡기면 성령님께서는 여러분의 문제를 능력 있게 해결해 주실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오신 것처럼 성령님이 오신 목적도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시려는데 있습니다. 즉, 성령님은 그리스도께 영광을 돌리고 그리스도 예수님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려는 데 있는 것입니다. 요16:14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령님의 능력을 받으려는 목적도 삼위일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여야 합니다. 그런데 어느 분은 성령님의 능력을 받으려는 목적이 자기의 이름을 높이는 데 두고 있습니다. 자기의 명예나 자기의 이름을 높이기 위해서 구합니다. 그런 목적을 가지고 아무리 구해 보십시오. 성령님은 임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그런 정욕으로 잘못 구하는 자는 성령님 대신에 악령이 임하기가 쉬운 것입니다.
만약, 어느 사람이 성령님의 은사를 받았다고 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아니하고 자기의 자랑과 자기의 높음만 내세우거나 은사를 빙자하여 헌금을 많이 받아 챙기는 데만 둔다면 그는 성령님을 받은 사람이라고 볼 수 없고, 혹 그럴지라도 곧 성령님은 떠나시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이여, 성령님의 은혜를 받기를 원하시면 이렇게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여, 저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기를 원하나 능력이 부족하오니 능력을 허락하여 주옵소서.”라고 하십시오. 하나님은 이러한 기도를 가장 기뻐하사 저에게 성령님의 은혜를 주실 줄 믿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우리가 성령의 은혜를 받으려면 철저히 회개하여야 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말씀, 행2:38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라고 했는데 여기서 ‘회개한다’는 말은 헬라어로는 ‘메타노에사테’인데 그 뜻은 ‘마음을 바꾼다.’입니다. 그러면 무엇에 대해 마음을 바꿉니까? 세상 욕심을 향하던 마음에서 하나님을 향한 마음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또한 죄를 사랑하던 마음에서 죄에서 돌아서는 마음으로 바꾸는 것을 말합니다.
한문의 표현은 더 구체적입니다. 회개는 한문으로 ‘뉘우칠 회(回)’자와 ‘고칠 개(改)’자를 쓰는 데, 이는 뉘우치고 고치는 것을 말합니다. 죄를 뉘우치기만 하고 그 죄를 고치지 않으면 그것은 진정한 회개가 아닙니다. 어느 성도는 기도원에서나 부흥회 때, 얼마나 울면서 죄를 뉘우치기를 잘하는지요. 그러나 그 죄는 고치려고 하지 않습니다. 한 편으로는 죄를 끌어안고 한 편으로는 눈물로 뉘우칩니다. 그것은 진정한 회개의 모습이 아닙니다.
진정한 회개는 탕자의 모습에서 나타납니다. 탕자는 세상을 향하던 마음, 죄를 사랑하던 마음을 바꾸어 아버지를 향하는 마음이 되었고 죄를 뉘우치기만 한 것뿐 아니라 세상과 죄에서 돌아 서서 아버지의 품을 사모하여 집으로 갔습니다. 품꾼의 하나가 되더라도 아버지의 집에 사는 것을 기뻐하여 돌아간 것입니다. 성령님은 거룩한 영이기 때문에 죄와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을 바꾸지 않는 더러운 심령에 임하실 수가 없습니다.
열두 제자에게 성령을 주시마 약속을 하셨지만 그냥 주시지 않으셨습니다. 10일 동안 철저히 회개하게 한 후에 오순절 날 성령의 충만을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성령을 받기 위해서는 회개할 것을 특별히 강조하였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이여. 성령의 은혜를 받기를 원하십니까? 죄와 세상을 사랑하던 마음을 바꾸어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자들이 다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간절히 성령을 갈망하여야 합니다.
오늘 37절-39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 고로 성령이 아직 저희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은 7일간 계속되는 초막절이 끝나는 마지막 날에 외치신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초막절 제사를 실로암 연못에서 물을 길어다가 성전 제단의 서편에 붓는 의식을 거행하였는데 바로 이러한 점을 비유로 하여 ‘생수’에 대한 말씀을 하셨던 것 같습니다. 즉, 누구든지 은혜를 간절히 목말라 하는 자에게는 ‘그 배에서 생수가 흘러나리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배에서 생수가 흘러나는 것’이 바로 성령님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왜 하필이면 성령님을 ‘배에서 흘러나는 생수’로 표현했습니까?
배는 ‘사람의 심층부’로 ‘사람의 양심’이나 ‘전인격’을 비유하는 것이고, ‘생수의 강’은 ‘성령 충만’을 말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지금까지는 예수님이 제자들의 밖에 계시므로 예수님이 떠나계시면 그를 찾아가야 은혜도 받고 능력으로 양식이나 병 고침이나 풍랑이 잔잔해지는 기적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떠나시고 예수님과 똑같이 능력이 많으신 또 다른 보혜사, 성령이 임하실 때는 이제는 그 심령 속에 계십니다.
그리고 언제든지 함께 거하고 함께 역사하는 동거 동행하는 삶과 마치 샘에서 생수가 솟아나는 것처럼 그 심령에서 주님의 능력이 샘처럼 솟아나겠다는 약속입니다. 과연, 제자들이 오순절 날 성령을 받은 뒤에는 예수님의 능력이 자기들에게서 나타나는 것을 체험합니다. 그들이 설교한 즉 수천 명이 회개합니다. 앉은뱅이가 일어납니다. 기도하니까 옥문이 열립니다. 죽은 자가 삽니다. 너무나 놀라운 일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그 때야 예수님이 성령을 통해서 자기들 속에 게시면서 역사하시고 계신 것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도 예수님과 똑같으신 성령님을 여러분의 심령에 모시고 살기를 원하십니까? 갈급히 사모하십시오. 성령님은 원하지 않는 자에게 오시지 않습니다. 예수님도 갈급히 사모하지 않는 자에게는 역사하지 않으셨습니다. 간절히 사모하는 백부장의 종, 문둥병자들, 장님들, 혈루증 앓는 여인, 간질 걸린 자녀를 둔 아버지의 갈망을 보시고서야 능력을 나타내셨습니다.
성령님께서도 갈망하는 자의 심령에 임하십니다. 왜냐하면 사모하지 않는 자에게 성령의 능력을 주시면 혹 잘못해서 진주를 돼지에게 던지는 꼴이 되기 때문입니다. 얼마만큼 갈망합니까? 목마른 자가 물을 찾듯이 갈망해야 합니다. 더운 여름날에 목이 마르면 얼마나 안타깝습니가? 온 몸에서 물, 물, 물을 소리칩니다. 그러다가 어느 바위 밑에서 샘물을 찾으면 얼마나 기쁜지 얼굴을 처박고 꿀꺽 꿀꺽 마십니다.
우리가 성령님의 은혜를 사모할 때 이런 정도가 되어야 합니다. 성령님의 은혜에 너무나 갈급해한 나머지 ‘성령님, 성려님, 성령님을 부르짖어야 성령의 능력이 임합니다. 우리가 주님의 일을 하려는데 아무 열매가 없습니다. 교사나 구역장의 열심히 하는 데도 내 반 아이들이 점점 비뚤어집니다. 구역식구들이 점점 열심히 사라집니다. 너무나 속이 상하여 밥맛도 없고 잠도 잘 오지 않습니다. 바로 이때가 성령님의 은혜를 갈망해야 할 때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와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높이 들고 목마른 자가 ‘물, 물, 물’하고 소리치듯이, ‘성령의 은혜, 성령의 은혜, 성령의 은혜’를 갈망하여야 합니다. 그러면 갈망하는 자에게 반드시 약속대로 성령이 그 심령에 임하시고 생수의 강, 성령의 능력이 흘러넘치게 만들어 주십니다. 베드로와 열두 제자들은 예수님이 떠나고 나니까, 자기들은 완전히 무력한 것을 발견했습니다. 자기들 스스로를 아무리 보아도 비겁쟁이요, 아무 능력이 없음을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약속만 믿고 성령을 받지 않고는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기로 하고 모든 것을 전폐하고 오직 ‘성령, 성령, 성령’을 부르짖으면서 기도한 결과 10일 만에 강력한 성령의 은혜를 받은 것입니다. 저도 과거 은혜를 받기 위해 전력을 다한 때가 있었습니다. 제가 자주 가던 기도원이 한얼산기도원이었는데, 어느 여름인가 교우들과 함께 갔는데 얼마나 사람이 많은지 자리가 없어서 밤에는 잣나무 밑에 비닐을 깔고 자야했습니다.
한참 자다 보니 머리에 무엇인가 묵직한 것이 누르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여러분 양해하고 들으시기를 바랍니다. 깨서 보니 어느 중년부인의 커다란 엉덩이였습니다. 얼마나 황당한지, 아마 기자들이 이렇게 남녀가 엉켜서 자는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서 신문에 냈다면 기독교는 완전히 무도덕한 집단으로 낙인 찍혔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나 모든 교인들은 오직 은혜 받기 위해서라면 이런 불편이나 황당한 일들도 극복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황지 예수원의 원장인 대천덕 신부님의 할아버지요, 무디의 수제자인 R.A. 토레이 목사님이 쓴「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라는 책자에는 이런 예화가 나옵니다. 토레이 목사님이 미국 노드필드에서 집회하는 데 어느 목사님이 찾아와서 말하기를 “목사님, 나는 성령을 받기 위해서 이곳에 왔습니다. 성령을 받지 않고는 제 교회에 돌아갈 수가 없습니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죽는 것이 나을 겁니다.”라고 했습니다.
아마, 목회를 하다 보니, 너무나 열매가 없고 교회가 부흥이 안 되니까, 속이 상할 대로 상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살든지 죽든지 매달리면서 ‘성령의 능력을 주시든지 차라리 모든 것을 끝내 주시든지 하시라.’는 심정이 된 것 같습니다. 그래서 토레이 목사님은 대답하기를 “형제여, 당신은 지금 성령을 받고 있습니다.”라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 안타깝고 갈급한 심령, 그 자체가 성령이 임하고 있다는 증거로 보았던 것입니다.
다음 날은 일찍 그 목사님이 토레이 목사님을 찾아와서 말하기를 “저는 아침, 기차로 떠나야 하겠습니다. 가기 전에 제가 성령을 받았다는 것을 말씀 드리려 왔습니다.”고 하더랍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이여. 우리의 지식, 우리의 열심, 우리의 경험을 통해서 하는 주님의 일은 한계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해야 열매가 있습니다. 이번 여름 동안 집중적으로 성령의 은혜를 갈망하므로 새 은혜를 받아 후반기를 성령의 능력으로 일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마지막 날에
요 7:37-39 / 김상복 목사
2006년 마지막 날, 여기까지 오시느라 수고들 많이 하셨습니다. 어떻게 보면 짧은 시간이고 어떻게 보면 멀고 먼 시간인데 고생 많으셨습니다. 금년은 한국이 세계적으로 아주 유명해진 한 해였습니다. 홍콩의 한 영자신문은 올해 아시아 최악의 인물로 김정일을, 최고의 인물로 반기문 UN사무총장을 꼽았습니다. 대단한 나라지요. 이쪽 끝과 저쪽 끝을 우리가 모두 가지고 있어요. 세계를 놀라게 한 귀한 해입니다.
또 우리 국민은 대통령 때문에 수고를 많이 했어요. 그분도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제가 생각해 봤어요. 제가 아이들을 키울 때 다섯 식구 돌보느라 아빠로서 가장으로서 참 힘들었습니다. 한 교회를 인도하고 섬기기도 그리 쉽지 않은데 대통령은 각각 독특한 자기주장을 가진 많은 사람들과 나라를 다스리느라 얼마나 고생을 했겠어요? 앞으로 임기가 1년 2개월 남았는데 우리가 대통령을 위해서 열심히 기도해야겠습니다. 1년도 긴데 1년 2개월은 더 길잖아요. 여러분이 좋아하던지 안 좋아하던지 이유를 막론하고 우리나라 대통령은 한 명밖에 없으니 그 분이 앞으로 최선을 다해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일하도록 그분을 위해서 기도해야 됩니다. 우리 기독교인이 아니면 누가 기도를 합니까? 우리나라를 잘 되게 하기 위해 기도할 사람이 하나님 믿는 사람들 아닙니까? 그분을 통해서 앞으로 1년 2개월 동안 우리나라가 더 발전하고 전진하도록 기도해야 되겠습니다. 가끔 불평하더라도 기도해야 합니다. 그 분이 편하게 일을 잘 하도록 해서 화를 안낼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해요.
참 힘든 한 해였지만 우리 모두가 여기까지 잘 왔습니다. 금년에는 3600억불의 수출을 했습니다. 한국역사상 들어 보지도 못한 엄청난 수출을 했습니다. 국가가 부강해지는 길입니다.
본문에는 예수님께서 초막절 마지막 날, 아주 중요한 날에 행하신 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지막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 앞에 모인 그 수많은 사람들을 향하여 소리를 지르면서 큰 소리로 말씀하셨다.” 초막절은 7일 동안 축제를 하는 날입니다. 초막절이 되면 모든 유대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 와야 됩니다. 먹을 것도 가져가는데 끓여서 먹지 못하니까 구운 것과 마른 빵들을 조금씩 가져가고 일주일 동안 살 초막집을 지을 나뭇잎도 가져가야 합니다. 집이라고 할 수도 없고 그저 야외에다 초막을 만들어 놓고 머리 넣고 자는 척 하는 것이죠.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집트에서 구원해주셔서 40년 동안 광야생활을 할 때 제대로 잘 곳이나 있었겠습니까? 저녁이 되면 나뭇잎이나 풀 같은 것을 뽑아 자리를 만들어 자곤 했어요. 초막절은 그 때를 상기하는 절기입니다. “우리가 그런 시대가 있었다. 이 집의 지붕은 언젠가는 없어질 지붕이요 우리의 진정한 지붕은 하나님이시다.” 나뭇잎 사이로 하늘을 쳐다보고 달을 바라보며 하나님이 우리의 지붕이요 이 땅의 초막들은 아무것도 아님을 알고 하나님을 생각하는 일주일입니다.
예루살렘에 모인 사람들은 초막을 만들어 자고, 먹을 것이라고는 집에서 가져온 마른 빵 덩어리를 뜯어서 가족들과 나누어 먹었습니다. 예루살렘 밑에 있는 실로암 못에 가서 물을 떠다가 한 모금씩 먹었으니 일주일 동안 배도 고프고 자지도 못하고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팔레스타인 지역은 밤에는 차고 낮에는 뜨겁습니다. 40년 동안의 광야 길을 인도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지만 몸은 참 피곤합니다. 이런 상태에 있던 사람들이 이제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 되었습니다.
옛날 예루살렘 성전의 그림을 보면 계단이 여러 개 있습니다. 뒤쪽에는 성전 뜰 안이 있고 양 밑에는 긴 계단이 쭉 있고 계단 밑으로 사람들이 모여섭니다. 마치 지금 여러분의 모습과 비슷해요. 명절 마지막 날, 거기서 예수님께서 집에 돌아가기 전, 배고프고 목마르고 피곤한 사람들을 향하여 말씀하십니다. 예수님도 일주일동안 거기서 같이 지내시지 않았습니까? 사람들의 얼굴을 보고 대화를 해보니 그들은 몸이 피곤할 뿐 아니라 인생이 힘들어요. 지금이나 옛날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누구든지 배고픈 자, 나에게 와서 내가 주는 양식을 먹고 배부르게 하라.” 그렇게 큰 소리로 외쳤다고 했습니다. 지금 저는 소곤소곤 말해도 여러분이 이 마이크를 통해 잘 들을 수 있으니 얼마나 감사한지요. 마이크로 이야기를 해도 제가 목이 쉬어서 감당을 못하는데 예수님께서는 마이크도 없는 광장에서 그 많은 사람들을 향하여 말을 해야 하니까 힘과 열정을 다해서 소리를 질렀습니다. “누구든지 배고프고 목마른 자들은 다 내게 와서 마셔라. 마지막 날, 길을 떠나면서 나에게 와서 내가 주는 떡을 먹고 내가 주는 물을 마셔야 인생에 목이 마르지 않다.”
인생은 목이 마릅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을 만났을 때, 아침 일찍 떠나서 점심때까지 4시간을 걸어서 사마리아에 도착하셨어요. 얼마나 피곤하고 목이 마르시겠어요. 그래서 그 여인에게 “내가 목이 마르니 물 한 컵만 주시오” 하니까 “당신 유대인이 언제는 우리를 이상하게 보더니 이제 와서 왜 나에게 물을 달라고 합니까?” 합니다. 그 말을 들은 예수님께서는 “네가 만약 내가 누군지 알고 또 내가 주는 하나님의 선물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네가 나를 보고 물을 달라고 했을 텐데. 이 우물물을 퍼서 마시는 자는 또 목이 마르다. 매일 와야 되고 매일 마셔야 하나 늘 목이 마르다. 그런데 내가 주는 물을 마시면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다. 이 샘에 와서 이 샘물을 마시라. 생명의 물을 마시라”고 하셨습니다. “주여, 그게 무슨 물입니까? 저에게 그 물 좀 주십시오.” 예수님께서는 자기를 두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이 한 해의 마지막 날에 지난 365일을 돌이켜 보면 여러분의 인생은 어땠습니까? 오늘 아침에 일어나 보니 목이 말랐습니까? 아니면 마음껏 먹었고 마음껏 마셨으며 인생이 행복하고 편안하고 건강하고 살만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인생은 목이 마릅니다. 여러분 가운데 어떤 분들은 사업을 하십니다. 작은 가게도 있을 것이고 큰 공장, 대기업도 있을 것입니다. 사업의 물을 1년 동안 마셨습니다. 참 힘드셨지요. 제가 종종 사업하시는 분들을 대하면 1년 내내 “목사님, 요즘 참 힘듭니다.” 하시더라고요. 힘들지요. 우리가 사업하는 이 분들을 위해 열심히 기도하고 격려해야 됩니다.
사실 이 나라가 여기까지 오게 된 것도 사업하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좋은 아이디어가 있었고 능력이 있었고 판매할 상품이 있었습니다. 최소한 5명, 10명, 또는 100명의 직원들과 함께 일하면서 그 가족들을 먹여 살리고 나라의 경제를 살리는 사람들이 기업하는 사람들입니다. 기업인들을 나라가 소중하게 여겨야 됩니다. 기업인이 없으면 노동할 곳, 직장이 없지 않습니까. 누군가 식당을 해야 식당 종업원 한 사람이 생깁니다. 공장을 시작해야 공장 직원 한 사람을 고용하지요. 무역업을 시작해야 그 일을 할 사람들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타이프 치는 사람은 집에서 혼자 일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에요. 일할 곳이 있어야 됩니다. 공헌할 곳이 있어야 됩니다. 이런 것들은 기업하는 사람들이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기업을 하는 사람들과 그냥 직장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차이가 있어요. 어떤 사람들은 그냥 직장생활하고 싶어 하지 기업을 하고 싶어 하지 않아요. 아침 8시에 출근했다가 저녁 5시에 퇴근해서 집에 와서 TV보고 싶지요. 집에까지 와서 ‘내일 우리 직원들 월급을 어떻게 줄까?’ 고민하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기업하는 사람들은 그런 고민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기업하는 사람들을 낙심시키면 안 돼요.
정부도 기업하는 사람들이 마음껏 자신 있게 일 할 수 있도록 자유를 주고 마음껏 창의적으로 기업의 능력을 발휘하도록 분위기를 만들어 가야 되지요. 기업을 하나 만들려고 하는데 필요한 서류가 너무 많아서 해보려고 노력하다가 지쳐서 그만 둡니다. 해보지도 못하고 힘들어서 그만 두는 나라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정치하는 사람들이 국민들이 하고 싶은 것을 자유롭게 마음껏 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 줘야 됩니다. 제가 대통령은 아니지만, 나라의 지도자들이 이렇게 만들어 줘야 합니다. 그들이 열심히 일하도록 격려를 해 줘야 되요. 그들이 열심히 직장에 충실할 때 직장이 더 좋아지고 더 많은 상품이 나오고 나라가 잘 되는 것이지요.
그렇게 열심히 일을 하려니 참 피곤하고 힘이 듭니다. 제가 대화를 통해서 많은 것을 듣는데 모두들 참 힘이 들어요. 돈을 벌려니 목이 말라요. 직장 생활하는 사람들도 힘들어요. 제가 미국에서 30년 있다가 처음 한국에 와서 큰 회사에 가봤습니다. 그 때 저는 ‘야, 한국 사람들 직장 생활하느라고 참 고생하는구나!’ 생각했습니다. 저는 대학을 졸업하고 바로 미국에 갔으니까 한국 실정을 잘 몰랐지요. 미국은 참 자유스럽잖아요. 서로 관계도 자유스럽지요. 제가 젊었을 때 어느 연세 든 분을 “핀델 박사님!”하고 불렀는데 그 분이 “그냥 존이라고 불러요”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미국 사람들은 그렇게 해도 한국 사람들은 그렇게 못합니다. 우리는 어른을 그렇게 불러야 됩니다.” 했더니 “그러지 말게. 자네가 나를 싫어하면 핀델 박사님이라고 부르게”하셨어요. “아니요. 저는 당신을 좋아합니다.” “그러면 존이라고 부르게.” 이렇게 관계가 편안한 곳에서 수십 년을 살다가 오니까 한국은 전부 다 “차렷”이에요. 제가 손님으로 간 직장에서도 모두들 제 앞에서도 차렷이에요. ‘왜 이렇게 힘들게 그러나. 군사정부가 30년을 지배하더니 한국을 군대로 만들어 놓았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윗사람, 아랫사람이 서로 힘들고, 나이가 조금 적다고, 계급이 하나 밑이라고 말을 함부로 하고 그런 것을 보고 한국 남자들 고생 많이 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도 다음날 아침이면 다시 직장에 나가야지요. 그래야 먹고 살잖아요.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 목이 말라요. 그것이 인생이에요. 기업을 경영하는 사람이나 직장생활을 하는 사람이나 모두 먹고 살기 위해서 일들을 하는데 그 일이라는 것이 인생에 큰 만족을 주는 것도 아니고 해야 되니까 하는 겁니다. 이런 말이 있지요. “어릴 때는 시키는 대로 하고, 어른이 되면 해야 하니까 하고, 은퇴한 후에는 하고 싶은 것을 한다.” 하지만 은퇴할 때까지 시간이 걸리잖아요. 인생은 목이 말라요. 누구나 마찬가지입니다.
공부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공부하는 것도 얼마나 목이 마릅니까? 학생들이 얼마나 고생을 합니까? 조금 전에도 어느 유학생이 제게 와서 공부가 힘들다고 합니다. 안 힘든 공부가 있습니까? 저도 오래 공부해 봤죠. 힘들어요. 열심히 공부해서 학자들이 배출됩니다. 제가 어느 학자가 발표하는 것을 듣고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릅니다. 자기 전공분야를 정연하게 조직해서 그 지식을 정연하게 발표하는 것을 보고 ‘세상에는 지식의 은사를 받은 사람들이 꼭 있어야겠구나! 학자들이 참 귀하다. 학자가 소수는 꼭 있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열심히 연구하고 책을 썼는데 주위에서 표절했다고 합니다. 자기 학생과 같이 써서 공동저자를 했는데 표절했다고 지금 어느 총장님 한분이 애를 먹고 있지요. 전에도 교육부 장관하려다 표절했다고 그만둔 적이 있었어요. 다들 목이 말라요. 총장하기도, 교수하기도 힘들어요. 인생이 목이 말라요. 365일 동안 여러분이 여기까지 온 것, 고생 많이 하셨어요. 사는 게 그렇지요.
가정도 목이 마릅니다. 인생이 목이 마르니 집에 가서라도 목이 시원하면 좋겠는데 더 말라요. 여러분 가운데에도 아내와 남편의 목을 더 마르게 하는 사람들이 있겠지요. 자식을 낳았더니 목이 말라요. 힘이 듭니다. 이 세상이 주는 물은 아무리 마셔도 목이 마릅니다. ‘이 물을 마시면 내 인생의 목이 축여지겠지! 해갈이 되겠지! 배가 부르겠지!’ 기대는 하는데 기대처럼 그렇게 시원하진 않아요. 여전히 목이 마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인생의 목이 마르니까 세상의 쾌락을 추구해 봅니다. ‘모르겠다. 멋대로 살아보자’하고 나갔더니 집안에 문제만 생기고 더 큰 고통과 죄의식이 생기고 방황하게 됩니다. 이것도 안 되고 저것도 안 되고 자식한테까지 말을 듣습니다. 어느 사람은 자식이 “아버지, 회개하세요!” 했답니다. 아들한테 야단맞고 나니까 인생이 너무 기가 막혀요. 정신없이 쾌락을 추구하면서 가정 밖에 나가서 인생의 목을 좀 축여보겠다고 발버둥을 쳤는데 그것도 아니에요. 더 목이 말라요. 더 힘들어요. 자기 자신만 그런 것이 아니라 온 가족 모두 목마르게 만듭니다. 그래서 제가 처음에 365일 동안, 2006년 오늘까지 오느라고 수고하셨다고 그런 것입니다. 수고하셨어요.
육신도 연약해져서 여기도 아프고 저기도 아픕니다. 오늘 아침에도 한 분이 기도해 달라고 하는데 기도 제목을 말하지 않아서 그저 그 분을 위해 기도를 했습니다. 기도를 다 마치고 나니까 “몸속에 혹이 생겨서 내일 아침에 수술하러 갑니다.” 하며 눈물을 쫙 흘려요. 인생은 너무 목이 마릅니다.
이와 같은 사람들을 예수님께서 보신 것입니다. 그 예루살렘 성전 마당에 그 사람들을 볼 때 “누구든지 목마른 자들아, 내게로 오라”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 안에서만 인생의 목을 축일 수 있지 이 땅 어디를 돌아다녀도 목을 축일 수가 없습니다. 잠시 물을 마셔 보지만 금방 목이 마릅니다.
여러분, 연말을 맞이해서 뒤돌아본 지난 1년 동안의 인생이 어땠습니까? 어디에서 여러분의 인생의 목을 축이려고 노력했습니까? 올 한 해 목이 말랐다면 해답은 하나 밖에 없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이여, 다 내게로 오라.” 주님과 여러분의 거리가 어느 정도인지 모르겠지만 모두 다 예수님께로 오시기 바랍니다. 가까이 오십시오. 한 발정도 가까이 오세요. 인생의 마지막 목을 축일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 그 분에게 다가 올 때, 가까이 오면 올수록 여러분의 인생의 목은 축여질 것입니다. “내게로 와서 내가 주는 물을 마시라.”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를 여러분의 구주로 영접하면 그 시간에 하나님께서 성령을 주십니다.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 고로 성령이 아직 저희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38․39절)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심으로 여러분의 죄를 완전히 씻었습니다. “다 이루었다”고 하신 순간에 여러분과 저의 모든 죄를 다 덮어 주셔서 죄에 의해서 목마른 인생, 죄 때문에 애타는 인생이 죄 사함을 받고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내 가슴속, 여러분의 가슴속, 예수를 믿는 사람들의 가슴속에는 성령이 있습니다.
아직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지 않은 분들, 오늘 2006년 마지막 날이 가기 전에 마음의 문을 열고 여러분 안에서 영원히 솟아날 샘물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을 모셔 들이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인생을 새롭게 출발하십시오. 예수를 믿었지만 세상의 물로, 세상의 것들로 배를 채워보려는 탕자처럼 살면서 아버지와 멀어진 사람들이 있으면 아버지께로 오십시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이여,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에게 쉼을 주리라.”
여러분이 주님과 가까워질수록 참된 쉼이 있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멀리 가면 멀리 갈수록 더 배가 고프고 멀리 하면 멀리 할수록 더 목이 마른 것이 인생입니다. 인생이 주는 돼지먹이, 쥐엄열매로 내 영적인 갈증을 채울 수가 없고 배고픔을 채울 수가 없어요. 하늘로부터 내려온 살아있는 생명의 떡, 예수 그리스도, 하늘로부터 우리에게 주신 성령 충만한 내 가슴 속의 은총, 이것들이 여러분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이제 오늘이 지나고 새해가 올 때는 예수님과 함께 거닐면서 예수님으로부터 받는 그 떡을 먹고 생수를 마셔서 다음 해는 참 만족스러운 한 해가 꼭 되시기를 바랍니다.
살아 뛰는 물, 거룩한 영
요 7:37-39 / 이병일 목사
복음서에서 성령, 거룩한 영은 자주 물에 비유됩니다. 특히 요한복음에서는 물과 성령은 긴밀한 관련을 맺고 있습니다. 밤에 은밀하게 찾아온 니고데모에게 예수님은 물과 성령으로 다시 나야 한다고 말하고, 사마리아의 수가라는 마을의 우물가에서 예수님은 한 여인에게 생명의 물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물 중에서 성령과 비유할 수 있는 것은 생수, 즉 살아 있는 물입니다.
똑같은 물이지만 우리는 물에는 살아 있는 물과 죽은 물, 혹은 우리 몸에 이로운 물과 해로운 물을 쉽게 구별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건강을 최대의 관심거리로 삼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있어서 물의 효용과 사용방법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어떤 것이 있죠?> 특히 수돗물에 대하여 일말의 불신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그 역작용으로 생수에 대한 신뢰가 있습니다. 그래서 요즘은 어디를 가나 생수를 갖고 다니는 사람을 흔히 볼 수 있고, 비싼 돈을 주고 사는 생수를 마셔야 안심이 되는 강박증이 자기도 모르게 생겼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생수라고 하면서 마시는 물은 말 그대로 살아 있는 물이 아니라 자연적인 생수를 살균 처리한 “먹는 샘물”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먹는 샘물을 돈 주고 사먹기 시작한 것은 88올림픽 이후의 일입니다. 지금은 전국에 물이 좋다고 소문난 곳이면 어김없이 생수 공장이 몇 개씩 들어서고, 심지어는 명품 생수라는 딱지를 붙이고 외국의 물을 수입하여 판매하고 사먹는 실정에 되었습니다.
판매하는 샘물을 가격으로 따져보면 굉장히 다양합니다. 국산 샘물은 500㎖에 500원이라면 수입산 샘물은 1,000원에서 20,000원이나 되는 데도 불티나게 팔립니다. <에비양 1,000원, 피지워터 1,800원, 마린파워 5,000원, 버치샘 19,000원> 현재 우리는 샘물을 소비할 뿐만 아니라 생수가 쏟아내는 이미지에 파묻혀 살고 있습니다. 좋은 물을 마시고 건강하게 살기 위한 인간들의 욕구가 만들어낸 결과입니다.
오늘 본문은 시간적 배경은 초막절입니다. 장막절이라고도 하는 이 명절은 유대인의 3대 명절 중의 하나입니다. <유월절, 칠칠절, 초막절>초막이나 장막이라는 말을 좀더 쉽게 설명하면 ‘천막’입니다. 천막 절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초막절은 두 가지 중요한 의미를 띠고 있습니다.
첫째,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를 탈출해 광야에서 40년 동안 방황했습니다. 그들은 약속된 축복의 땅에 들어가기 위해 40년 동안 광야 생활을 해야만 했습니다. 광야에는 안정되게 주거할 수 있는 집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40년 동안 사막에서 천막 생활을 했습니다. 광야에는 먹을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만나를 내려 주셔서 먹는 문제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광야에는 마실 물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반석에서 생수를 내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40년 동안의 장막 생활을 하면서 하나님께서 주신 만나, 생수, 은혜 등을 기억하며 7일 동안 대축제를 열었습니다. 그것이 초막절입니다. 일종의 민족 축제와 같은 것입니다.
둘째, 이스라엘 백성들은 한해에 세 번 추수를 하는데 마지막 추수 때가 초막 절기입니다. 레위기 23장 39-43절의 말씀대로 첫날에는 아름다운 실과와 종려 나뭇가지와 시내버들을 들고 춤추며 축제를 열었습니다. 지금의 추수감사절과 같은 것입니다. 일년 중 마지막 추수 때, 그동안 하나님께서 비를 주셔서 농사를 잘 짓게 하시고 풍성케 하신 것을 감사하며 일주일간 하나님 앞에서 제물을 바치며 축제를 갖습니다. 제단에 제물을 올려놓고 그 제물에 포도주를 붓는 것이 일반적인 데, 초막절에는 물을 붓습니다. 제사장은 많은 사람들과 함께 실로암 연못에 가서 물을 떠다가 수장문(Water Gate)을 거쳐 제단으로 와서 물을 붓습니다. 물을 부을 때, 그들은 이사야서와 시편의 말씀을 낭송하면서 축제를 즐깁니다. ‘풍성한 비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내년에도 풍성한 비를 주셔서 농사가 잘 되게 해 주십시오’하는 의미로 물을 붓습니다.
축제는 칠 일 동안 계속 되는데 특히 마지막 날은 큰 날로 절정에 해당합니다. 이날을 하나님의 사죄의 날로 선언하고, 실로암 연못에서 떠온 물을 계속 제단에 붓고 나팔을 불며 종려 나뭇가지를 흔들고 환호하며 춤을 춥니다. 이 의식은 바위에서 물이 나온 것을 상기시켜 주는 것이다(민 20:8-11; 시 78:15-16). 물어 대한 소중함과 그만큼 감격적인 하느님의 은혜를 기억하는 바로 그 시간에 예수님은 물과 성령에 대하여 큰 소리로 말씀하셨습니다.
“목마른 사람은 다 나에게로 와서 마셔라. 나를 믿는 사람은, 성경이 말한 바와 같이, 그의 배에서 생수가 강물처럼 흘러나올 것이다.” 요한 4:14에서 예수님이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라고 말씀하신 것과 그 의미를 같이 합니다. 그리고 그 물은 성령이라고 합니다. 왜? 성령을 물에 비유했을까요? 유대인들이 초막절을 지키는 의미와 연결시켜서 생각해 본다면, 광야(사막)에서 하느님이 사람들을 구원하고 살리시는 방편이 바로 물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물과 성령의 유비에 대해서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는 말이 도덕경 8장에서 노자가 도(道)에 비유한 ‘상선약수(上善若水)’라는 말입니다.
“최상의 선은 물과 같다.
물은 만물을 이롭게 하면서도 다투지 않고,
뭇사람들이 싫어하는 곳에 처한다.
그러므로 도에 가깝다.
거하는 곳이 좋은 땅이며
마음은 깊은 연못이고
주는 것은 어진 것이고
말은 믿음으로 하며
다스림은 선으로 하고
일은 능히 하며
움직임은 제 때에 하며
오직 다투지 않기에 허물이 없다.”
<上善若水(상선약수) 水善利萬物而不爭(수선리만물이부쟁) 處衆人之所惡(처중인지소오) 故幾於道(고기어도) 居善地(거선지) 心善淵(심선연) 與善仁(여선인) 言善信(언선신) 政善治(정선치) 事善能(사선능) 動善時(동선시) 夫唯不爭, 故無尤(부유부쟁 고무우)>
여기에서 물의 모습은 만물에게 혜택을 주지만 다투는 일이 없고 사람들이 싫어하는 낮은 곳에 위치하는 것입니다. 물의 위대함은 만물에 순응해 다투지 않음에 있다. 다투지 않음으로 실수도 잘못도 범하지 않게 되니 도를 체득한 성인의 모습도 이 물과 같습니다. 물줄기가 커지면 커질수록 점점 더 낮은 곳으로 흐릅니다. 물은 이 세상 만물의 형태를 갖추게 하기 위해 공기에도, 돌에도, 심지어 쇳조각에도 존재합니다. 물은 스스로 깨끗하며 더러운 것을 씻어 주고 모두 수용하는 너그러움이 있습니다. 그리고 물은 썩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흐르거나 움직이며 늘 새로운 것으로 채우며 자신을 정화시킵니다. <또>
물의 덕은 씻어내는 공덕과 만물을 키워주는 것, 그러면서 겸양하는 덕입니다. 물은 정성스럽다는 것입니다. 한 방울씩 떨어지는 물이 힘이 없는듯하지만 돌도 뚫는 것은 끊임없는 정성의 힘입니다. 또한 부드러운 물의 성품은 물이 담기는 그릇에 따라 형체를 자유로이 할 수 있게 합니다. 그런가 하면 서로 합할 줄 알아서 천 갈래 만 갈래로 흩어져 있던 물줄기들이 언젠가는 하나가 되어 바다를 이루게 된다는 사실 앞에서 모두가 하나의 세계에 살고 있다는 열린 마음으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또한 물은 멈춰 있을 줄 압니다. 비가 많이 올 때는 방죽이나 저수지에 담겨 있다가 필요할 때 쓰입니다.
이러한 물의 모습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생명의 근원”입니다. 살아 있는 모든 것에는 물이 있고, 그 물이 있어야할 만큼 있지 않으면 그 생명은 끝이 납니다. 하느님의 입김, 하느님의 기운인 성령이 바로 모든 생명을 살리는 근원입니다. 또한 그 물은 만물을 소통하게 하는 근원이기도 합니다. 물은 살아 있는 생명체들뿐만 아니라 모든 사물에 존재합니다. 물은 모든 생명이 자신의 형태를 유지하면서 살아 있게 하고, 만물이 서로 소통하게 하여 남이 아니라(둘이 아니라) 하나임을 알게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물로 유비되는 성령의 기운을 받음으로써 살아 있고, 그 성령의 기운을 공유함으로써 서로 소통할 수 있습니다. 물의 한 형태인 비는 하늘과 땅을 만나게 합니다. 하늘과 땅을 잇게 하여, 하늘의 기운을 땅에 있는 모든 생명들에게 전해줍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그 배(속)에서 살아 있는 물이 강물처럼 흘러나온다고 하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사람에게 성령의 기운이 부족하면 갈증을 느끼고, 성령의 기운이 없으면 죽은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 예수님의 길을 따르면 함께 걷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 물과 같은 존재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물과 같은 성령의 기운을 그 속에 간직하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그 속에서 흘러나오는 물로 모든 생명을 살리고 만물을 소통하게 합니다. 그리고 저마다 자기가 있는 그 자리에서 없어서는 안 될 꼭 필요한 존재입니다. 밤의 기운을 모아서 이슬로 맺혔다가 사람의 정성을 하늘에 전하는 정화수(井華水)같은 존재, 여름이나 겨울이나 변함없이 온도를 유지하고 있다가 약을 달이는 데에 쓰이는 한천수(寒泉水)같은 존재입니다.
그런 존재로 살기 위해서는 먼저 자기 속에 살아 있는 물을 간직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살아 있는 물이나 성령을 소유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흘러 넘쳐 세상으로 흐르게 하기 위함입니다. 자기 속에 충만하게 간직함으로써 넘쳐서 생명을 살리고 소통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을 믿는 의미, 따름의 큰 의미입니다. 내 속에 우리 속에 성령의 기운으로 충만하면 강같이 흘러넘치게 될 것입니다. 바로 그 사람이 하느님의 놀라운 일을 세상에 펼치는 사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