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In London
written by 새끼늑대
上
도착한 시간은 밤이었다.
히드로 공항엔 사람들이 바글거렸다. 난 쓴웃음을 지으며 사람들이 잔뜩 짊어지고 온 짐을 바라
보았다. 반면에 내 작은 가방 안엔 필수적인 것들조차 제대로 들어있지 않았다.
"삼성 여행사 분들은 2번 게이트로……."
목청 좋은 한 가이드의 외침에 나와 함께 비행기를 타고 왔던 스무명 남짓한 사람들을 포함해서
100명은 될법한 많은 사람들이 게이트 쪽으로 우루루 몰려갔다. 난 그 사람들 속에 섞여 걸어가
는 어떤 사람을 보게 되었다.
좋지 않았다. 난 문득 품속을 쓰다듬었다.
담배 생각이 간절해졌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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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랄하네. 나도 그쯤 했으면 다 했다고. 그런데 도대체 뭘 더 하라는거야, 뭘? 응? 개뿔이 지들
은 뭐가 그리 잘났길래 말이야……."
"야야, 그만하고 일단 먹자고. 고기 다 탄다."
"이 새꺄, 지금 고기가 목구멍에 넘어가냐? 벌써 2번째라고! 내가 뭘 잘못했다고 지들이 날 짜르
긴 짜르냔 말이냐고! 엉!"
"염병. 맨날 여자 뒤꽁무니나 쫓아다니니까 그러지."
"뭐라고? 야, 말 다했냐?"
분위기가 험악해진다. 골치가 아파온다. 빌어먹을 자식들. 한 5개월만에 만나서 같이 고기집에
온 것까진 좋았다. 그런데 한 녀석은 소주 반병이 뱃속에 들어가자마자 직장에서 잘렸다고 왈왈거
리질 않나, 또 한 녀석은 위로는 못해줄 망정 화만 돋우질 않나, 뭣보다도 이 중에서 가장 나쁜
녀석은……,
"야, 너 혼자 먹냐?"
혼자서 고기 먹는 놈. 그 놈은 <내가 먹겠다는데 니들이 왜?>하는 표정을 지어보임으로써 우리들
을 한숨짓게 만들었다.
"젠장. 더러워서."
"야야, 그만 참고 한 잔 받아라."
"혼자서 그만 좀 먹어 임마."
"너네들이 먹으면 되지. 고기 타면 아깝잖아."
우리들은 늘 이런 식이었지. 고등학교 때부터…… 등의 감상적인 생각따윈 하지 않았다. 어차피
이 녀석들이랑은 평생 볼 거니까. 그런데 한 녀석이 갑자기 날 보며 입을 열었다.
"야. 너 그 영국은 언제가냐?""응?"
"왜, 고등학교 때부터 맨날 말했잖아. 영국 간다고."
"아아…… 몰라 임마. 아직 군대도 안 갔는데."난 소주 한 잔을 들이켰다. 빈속에 술이 들어가자
당장 뱃속이 씁쓸해졌다. 도대체 저 녀석들은 대학 들어가서 공부는 안 하고 술만 마셨나? 어떻
게 저렇게 벌컥벌컥 잘만 마시지?
"이참에 런던 한 번 다녀오는 게 어떠냐? 3박 4일로."
"학비 대기도 빠듯해 임마. 그리고 3박 4일간 빠진 수업 보충은 어떻게 하고?"
"어라? 너 저번에 나랑 수업 3일 빠지고 같이 PC방 갔었잖아?"
"야야, 그땐 교양이고 그러니까 그다지 상관없었어도…… 전공과목 빼먹으면 내 학점은 니들이 책
임져 줄 거냐?"
내 말에 나랑 같이 PC방 갔던 녀석은(이 자식은 이런 것만 잘 기억해요) 그런가? 하는 표정으로
다시 옆에 녀석과 투닥거렸고, 나에게 여행을 권했던 녀석은 잠시 술잔을 쳐다보다가 조용히 입
을 열었다.
"너 첫사랑 보고 싶다며."
"……뭐?"
"걔 말이야 걔."
"야, 너 여기서 갑자기 왜 그 얘기를……."
"얼마 전에 봤어."
친구 놈들 사이엔 어느새 침묵이 흐르고 있었다. 다들 날 쳐다보고 있었다. 난 잠시 술잔을 만지
작거리다가 말했다.
"담배나 한 대 하고 올게."
"야 식전에 무슨……."
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웃옷을 들고 밖으로 나왔다. 1월의 찬바람이 내 뺨을 금세 붉게 만들었
다. 하지만 난 안으로 들어가고 싶지가 않았다. 그리고 난 담배 한 개비를 입에 물었다. 하지만
불은 붙이지 않았다.
"젠장. 금연 일주일짼데……."
.
.
.
"숙소는 2인실입니다. 혹시 다른 팀에 가족이 있으신 분들은 지금 말씀해 주시면 같이 묵으실 수
있으실 겁니다."
가이드의 말에 몇몇 사람들이 앞으로 나서서 가이드와 대화를 나눴다. 난 배낭을 바닥에 내려놓
고 벽에 기대섰다.
50분가량 지하철을 타고 런던의 중심부에 도착했다. 그리곤 총 세 팀 중 두 팀이 아담해 보이는
이 호텔에 묵게 되었다. 2인실이라…… 나는 모르는 사람이랑 같이 방을 써야 된다 이 말이군.
"3층 305호실입니다. 같이 배정받으신 분은…… 아, 저 분이네요."
가이드가 점잖게 보이는 한 노인과 함께 나에게 왔다. 아무래도 혼자 여행을 오신 건 아니신 것
같은데? 나와 같은 생각을 했는지 가이드가 입을 열었다.
"혹시 같이 여행오신 분이 계신다면 방을 바꿔드릴 수 있습니다만."
"아니, 난 혼자 왔습니다."
"그럼 학생분은?"
학생? 흠…… 대학생도 학생은 학생이니. 아무래도 또 고등학생처럼 보이는 건가?
"저도 혼자 왔는데요?"
"그래? 그럼 잘됐네. 자, 여기 키 있습니다. 3층 305호실. 자자, 다들 키 받으셨죠? 내일 8시 반
에 모닝콜 해드릴 테니까, 다들 일어나셔서 9시 10분까진 여기 프론트로 다 모여주세요. 늦게 일
어나신 분들은 아까 내린 지하철역 기억나시죠? 그리로 오시면 됩니다. 오셔서 일일 여행자 카드
발급 받구요, 그때부터 스케줄대로 움직이게 됩니다. 그럼 오늘 밤엔 푹들 주무시고, 필요하신
게 있으시면, 저랑 2팀 가이드가 2층 203호실에 묵을 테니 전화하시거나 오시면 됩니다. 그리고 2
시 이후론 호텔 입구가 봉쇄되니까, 정 필요한 일이 아니시면 밖으로 나가지 말아주시기 바랍니
다. 자, 그럼 짐들 챙기셔서 각자 방으로 가주세요."
사람들은 우루루 엘리베이터나 계단 앞으로 몰려들었다. 나랑 같은 방을 쓰게 된 노인은 커다란
트렁크 하나를 들고 계단으로 걸어가셨다.
"저기, 들어드릴게요."
"아니, 됐네. 이 정도도 못 들까봐서. 그런데 밖에 나갈 일 있나?"
"예? 아뇨. 바로 자려구요."
"그거 잘 됐네. 원체 비행기에선 잠이 오질 않더구먼. 그럼 같이 올라 가세나."
"예."
역시 점잖으신 분이로군. 비행기에서도 시끄럽던 몇몇 사람들과 같은 방을 쓰게 될 까봐 내심 신
경 썼던 난 안심할 수 있었다. 그렇게 잠시 사람들에 휩쓸려 3층까지 올라왔다. 3층엔 그렇게 많
은 사람들이 묵지 않았다. 아마도 각자 여행 온 사람들끼리 묵게 하는 거겠지. 난 한숨을 내쉬며
문을 열었다.
방 내부는 꽤나 깔끔했다. 노인과 난 아무 말 없이 각자의 짐을 챙겼다. 아니, 나로썬 짐도 없었
다. 여벌옷 두 벌과 여권 등 잡다한 물품밖에 없었기에 옷만 갈아입고 씻고 나온 것이 다였다.
그 동안 노인은 트렁크에서 이것저것 꺼내어 짐을 정리하고 있었다.
"저 다 씻었어요."
"알겠네. 아, 미안한데 이 사진들 좀 이 위에 쭉 세워 주겠나?"
"아, 예."난 수건으로 머리를 털며 노인의 침대에 걸터앉아 트렁크를 뒤적였다. 노인은 회색 정장
과 중절모를 옷걸이에 걸고는 세면실로 들어갔다.
트렁크 안에는 몇 벌의 옷과 여러 가지 여행물품들이 있었다. 난 노인이 부탁한 사진을 꺼냈다.
세울 수 있는 작은 액자들 속에 담긴 사진들에는……,
"부인이신가?"
노인의 젊었던 적 모습인지, 군복을 입은 색 바랜 사진에 단아해 보이는 젊은 여성이 함께 웃고
있었다. 난 하나씩 스탠드 옆에 세우며 사진을 찬찬히 뜯어봤다. 그러다가 난 총 7개의 액자를 시
간별로 쭉 세워보았다. 교복을 입고, 역시 교복을 입은 여고생과 나란히 찍은 사진. 그리고 그 다
음이 군복, 그 다음은 대학생으로 보이는 모습. 그러다 30대 초반, 40대 초반, 50대 초반……, 노
인의 환갑잔치 때 나란히 앉아있는 모습. 그리고 마지막 모습은……,
숨이 콱 막히는 것 같았다. 그 사진엔 노인이 없고 대신 곱게 단장한 할머니의 모습만이 있었
다. 그리고 그 모습은 사진 속의 모습이었다. 영정 사진 속의.
"영정 사진을 찍은 걸세."
"아, 죄송합니다."
어느새 세면실에서 나온 노인이 내가 하는 양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입
을 열었다.
"해외여행 한 번 못 시켜줬다네. 그래서 이렇게 데리고 온 거야."
"아, 예."
난 머쓱해져서 내 침대로 넘어갔다. 내가 이불 속에 파묻힐 때쯤, 노인이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
네.
"난 그럼 먼저 자겠네."
"아, 예. 그럼 저도 불 끌게요."
그렇게 말하며 난 내 옆의 스탠드를 껐다. 그리고 몸을 돌렸을 때, 난 노인의 행동을 물끄러미
보게 되었다.
노인은 마지막 사진을 애틋하게 쓰다듬고 있었다. 희미한 스탠드의 조명 아래서 은백색으로 빛나
는 노인의 모습은 마치…….
틱. 불이 꺼졌다. 노인은 조용히 누웠고, 나도 침대 속에 몸을 깊숙이 파묻었다.
피곤한 밤이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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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보니 너 금연한다고 안 그랬냐?"
어느새 고기 한 판을 다 먹어버린(빌어먹을 녀석들) 친구놈들 중 한 명이 물었다. 그래서 난 짜
증을 잔뜩 내며 쏘아붙였다.
"너네들이 피게 하잖아. 하여튼."
"야야, 건들지 마. 괜히 자기 빼놓고 고기 구워먹었다고 저러는 거야."
"뭐라고?"
"진짠갑네. 푸하하하."
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고기 한 점을 집어 들었다. 그렇게 녀석들과 한참을 떠들며 먹고 마
시다가 마침내 조용히 술잔을 기울이게 됐을 때, 한 녀석이 웅얼거리듯 입을 열었다.
"삼성 여행사에서 일하더라. 아는 형이 이번에 자기 마누라랑 해외여행 가는데, 왜 너희들도 보쌈
집하는 최 형 알지? 그 형이 당최 어리숙해서 말이야. 마누라가 꽤 잘나가던 학원 강사였는데, 어
쩌다 결혼해선 마누라한테 쩔쩔 매면서 사는데, 이번에도 마누라 때문에 런던에 여행을 간다는 거
야. 그런데 그 형이랑 같이 런던에 갈 담당 가이드가 걔더라구."
난 조용히 소주만 들이켰다. 꽤나 얼큰하게 취한 상태였지만, 왠지 취하지 않은 것 같다.
"나야 한 눈에 알아봤지. 그런데 난 모르는 눈치더라구. 하긴, 이런 말 하긴 뭣해도 걔한테 너나
우리들은 다 기억할 필요도 없고, 기억 날 일도 없었잖아. 그런데 이게 참 운명의 장난인지, 여행
권 한 장이 남는다는 거야. 그 비싼 게 말이야. 글쎄 여행을 가야 할 사람이 갑자기 모친상을 당
해서 정신이 없던 모양이라구. 그 비싼 걸 환불도 안하고 그냥 아무나 주라고 한 것 같더라. 걔
가 솔직히 한 장이 남는데 같이 갈 사람이 있으면 같이 가라고 하는데, 최 형이 나보고 가라면서
한 장 주더라고. 그런데 내가 갈 시간이 어디 있냐? 그리고 비행기 티켓 값은 따로 또 지불해야
하고, 더군다나 나야 여행이지만 너한텐 색다른 의미가 있을 것 같아서."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난 아무런 생각도 없이 텅 빈 눈으로 술잔만 응시했다. 마셔야 하나, 말
아야 하나? 내가 멍하니 있을 때, 한 녀석이 입을 열었다.
"쉽게 말해서 공짜니까 준다 이 말 아니야?"
"뭐라고? 이 자식이!"
"푸하하하, 그거 맞네. 어쩐지 이 짠돌이 자식이…… 뭐야, 난 또 첫사랑 한 번 만나라고 그 비
싼 여행권 자기 돈 주고 사온 줄 알았잖아?"
"야 임마, 내가 그럴 돈이 어딨냐? 그런 의미에서 오늘 밥값은 난 못 낸다."
"뭐야? 이이, 미친 놈! 공짜 밥이 세상에 어딨냐?"
"야야, 공평하게 4등분 해, 4등분!"
녀석들은 금세 시끌벅적 해졌다. 후, 이놈들은 조금이라도 진지해질 틈을 안주는구만. 난 고개
를 절레절레 흔들다 탁자를 두드리며 말했다.
"좀 닥쳐라 이것들아."
"뭐라고? 그럼 니가 밥값 낼 거야?"
"미쳤냐? 늘 하던 대로 하면 되지 뭔 잔말이 많아."
내 말에 친구놈들은 잠시 서로를 쳐다보다가, 씨익 웃곤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러다가 한 놈
이 외쳤다.
"안 내면 돈 낸다, 가위 바위-"
"보!"
"보!"
"젠장. 이번에 보 냈으면 대박인데."
"남자면 주먹이야 임마."
"시끄러. 참고로 밥값 10만원 넘어가는 것만 알고 있어라."
그 말에 우리들의 눈에서 안광이 번뜩였다. 한순간 살기까지 흐르는 것 같았다. 무슨 무협지냐?
난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야야, 더러워서 내가 낸다."
"어라, 진짜다?"
"이놈이 미쳤나? 왠일로 순순히 지가 밥값을 낸데?"
"내주겠다는데 잔말 말고 얼른 일어나. 맘 바뀌기 전에."
녀석들이 마치 내가 당장이라도 바지춤을 붙잡을까봐 두렵다는 듯이 황급히 자신의 웃옷을 챙겼
다. 난 그런 녀석들에게 조용히 말했다.
"대신에 그 여행권 나 주라."
녀석들은 모두 주춤하더니 날 바라보았다. 난 계속해서 조용히 말했다.
"잔말 말고 그냥 주라."
"학교는?"
"사정해봤자 안 될 테니까 그냥 아팠다는 핑계로 다녀오지 뭐."
"비행기 티켓 살 돈이랑 가서 쓸 돈은 있냐?"
"이번 학비 깨고 몇 달 죽자고 아르바이트 하면 되."
녀석들은 모두들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러다 난 나지막이 말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가장 중요한건?"
"방금 말했듯이 나 돈 없으니까, 그 여행권 나한테 돈 받고 팔려고 하면 죽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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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햇살이 내 눈꺼풀을 두드렸다. 난 고개를 휘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어났는가?"
"아, 예. 지금 몇 시죠?"
"아직 8시 10분일세. 모닝콜도 안 왔어."
"그런데 일찍 일어나셨네요?"
노인은 어느새 어제 입었던 정장을 입고 있었다. 그리고 스탠드 옆에 있던 사진들이 보이지 않
는 것을 보아 아마도 짐도 다 챙겼으리라.
"이 나이엔 잠이 별로 없어서 말일세."
"아, 예. 그럼 저 씻고 올게요."
"그러게나."
난 자리에서 일어섰다. 푹 자서 그런지 꽤나 상쾌한 기분. 내가 대충 샤워를 하고 나왔을 땐 노
인이 모닝콜을 받고 있었다. 곧이어 나도 준비를 모두 끝내자 시간은 대충 9시.
"먼저 나가서 기다리세나."
"예."노인은 어느새 내 잠자리까지 깔끔하게 정돈해 놓았었다. 난 머쓱해짐을 느끼며 가방을 매
고 밖으로 나왔다.
프론트에는 이미 꽤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그렇게 이리저리 몸을 푸는 동안 많은 사람들
이 왔고, 마침내 우리팀 가이드와 2팀 가이드가 밖으로 나왔다.
"자, 인원 점검을 좀 하겠습니다. 잠시만 이리로 모여주세요."
인원점검을 하고 사람들은 또다시 우루루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일일 여행자 카드를 발급받고는
다시 호텔에 와서 아침식사를 한다. 그리고 난 나도 모르게 어느새 노인과 함께 행동하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나도 모르게 식사도 노인과 같이 했고 또 행동도 노인과 같이했다. 정작 노인과 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는데 말이다.
왜 이렇게 신경 쓰이지?
난 나도 모르게 계속 노인을 신경 쓰고 있었다. 어젯밤 일 때문인가? 하지만 그건 그냥 이 노인
의 사정일 뿐……, 아니, 어쩌면 나도 비슷한 처지로군.
난 노인의 트렁크를 물끄러미 쳐다보며 생각했다. 저 노인은 사진을 트렁크 속에 고이 간직하고
있지. 그리고 난……,
트렁크 대신, 가슴 속에 담고 있을 뿐이잖아?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는가?"
"아, 아닙니다."
"아 어제 사진 말인가? 그건 그저 늙은이 주책이니 신경 쓸 일 없다네. 이 나이 돼서도 애처가라
니, 허허."
"뭘요. 보기 좋으셨습니다."
"허허허."
노인과 난 웨스트엔드로 향하고 있었다. 이 여행의 테마가 뭐였더라? <뮤지컬+미술관과 함께하
는 런던 여행> 이었던가? 하여튼 첫날인 어제는(어제를 하루로 치다니. 와서 잠 밖에 더 잤냐고)
아무 것도 안 했고, 오늘과 내일은 뮤지컬과 미술관 등 각종 문화를 즐기고 마지막 날은 몇 시간
가량 런던에서 마지막 오후를 보내곤 다시 밤 비행기로 한국으로 떠난다. 그러기 위해선 우선 오
늘과 내일에 볼 뮤지컬 티켓을 구입해야하는데, 지금 우리들은 레스터 스퀘어에서 뮤지컬 티켓을
구입하러 가는 중이었다.
그리 오래 걷지 않은 것 같았는데 어느새 사람들에 휩쓸려 레스터 스퀘어의 티켓 부스들 앞에 도
착했다. 가이드 두 명이 다시 사람들을 모우기 시작했다.
"자 다들 이리로 모여 주세요! 지금부터 오후에 볼 뮤지컬 티켓을 예매할 겁니다. 우선 영어를 상
당히 잘하시는 분이 아니라면 여기 뮤지컬의 내용을 이해하기 힘드실 겁니다. 그러니 왠만하면 평
소에 한번쯤 봤거나 내용을 알고 있는 뮤지컬을 보는 게 더 좋을 겁니다. 그리고 대부분 런던 초
행이시니, 추천드릴 뮤지컬로는 <오페라의 유령>과 <레 미제라블>, 혹은 <빌리 엘리어트>나 <라이
온 킹>등이 있습니다. 이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이 오페라의 유령인데, 이미 봤고 내용을 알고 계
시더라도 뮤지컬로 보면 전혀 재미가 반감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왠만하면 다들 오페라의 유령
을 예매하시길 바랍니다. 여기서부턴 3팀과 합류해서 움직일 겁니다. 그러니까 만약 여기 계신
1, 2팀 고객님들 중에서 3팀과 합류해 움직이고 싶으신 분들은 미리 말씀해 주세요. 자, 그럼 저
기 보이는 티켓 부스로 가셔서 예매를 하시고, 3팀과 합류하실 분들은…… 아, 지금 명단을 작성
하는 게 편리할 것 같으니 지금 말씀해 주세요."
난 머뭇거렸다. 어떡하지? 내가 그렇게 머뭇거리고 있을 때, 노인이 입을 열었다.
"왜 그러나? 아아, 3팀에 친구라도 있는가?"
"예? 아…… 아뇨."
"그럼 어서 예약하러 가세나. 내가 영어는 도통 몰라서 말일세. 좀 도와줬으면 하는데."
"아, 예."
난 그렇게 노인과 함께 티켓 부스 쪽으로 다가갔다. 바로 그 때였다.
"다들 이리로 모여주세요! 아직 1, 2팀 쪽으로 가지 마시구요! 일단 합류는 티켓 예약 다 하고나
서 할 거니까, 거기 고객님!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자 지금부터 볼 뮤지컬을 예약해야 하는데
요……."
내 발걸음을 붙잡는 목소리. 이상하다. 왜 이렇게 익숙할까?
"왜 그러나?"
"아…… 저 잠시만요."
난 빨리 우리팀 가이드에게로 뛰어갔다. 빌어먹을, 이건 아니야. 먼발치에서만 보기로 했잖아. 도
대체 내가 뭘……,
"저도 3팀에서 갈게요."
"그래? 알았어."
난 다시 노인에게로 뛰어왔다. 노인은 미심쩍은 표정으로 물었다.
"아까 일행이 없다고 하지 않았나?"
"예? 아, 예. 일행은 없는데요, 그냥 친구가 아는 형님이 계셔서요. 인사도 드리고 뭐 친분도 좀
쌓을 겸……."
"아, 그런가? 알겠네. 자, 그럼 무슨 뮤지컬을 봐야하지?"
"아까 가이드의 설명대로 잘 아는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이 어떨까요?"
"그래? 그럼 내 것까지 좀 부탁하네."
"예."
난 그렇게 말하며 티켓 부스로 뛰어 들어갔다. 뒤통수가 근질거렸다. 지금 당장이라도 뒤돌아보
고 싶었다. 그런데……,
고개를 돌리기가 왠지 두려웠다.
「야, 잘 갔다 와라」
"알겠다 임마."
「그건 그렇고, 만나서 무슨 얘기 하려고?」
"……니가 그건 알아서 뭐 하게?"
「그냥. 임마, 괜히 쫄지 말고. 우리 깡다구 정 안되면 냅다 납치해서 거기서 살아라」
"미쳤냐? 인생 망치라고?"
「옛날에 안 그랬냐? 너 대학 못 들어가도 걔만 잡으면 인생 성공한 거라고」
"……내가 그랬었냐?"
「까먹은 척 하지마 임마. 기억력도 좋은 녀석이. 그럼 귀국하면 연락해라. 애들 모아서 술 한
잔 해야지」
"하여튼 이놈들은 맨날 술이네. 야, 근데 다른 애들은 다 뭐하길래 이 몸이 생전 처음으로 해외
여행 가시는데 연락도 안하냐?"
「몰라. 임마. 빨리 끊어 나 일 들어가야 되」
"나 참. 알겠다. 그럼 잘 다녀올게."
「그래. 아 그리고……」
"응? 뭐?"
수화기에선 잠시 침묵이 흘렀다. 곧이어 친구녀석의 예의 그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녀와서 후회 안하도록…… 무슨 말인 줄 알지?」
"……알겠다. 고맙다."
「뭘. 그럼 잘 다녀와라」
탁. 난 수화기를 내려놓고 공중전화에서 나와 게이트 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후회…… 라."
늘 후회만 하고 살았지. 4년 전, 18살 때. 그 철없던 시절 이후로. 난 게이트를 빠져나와 생전 처
음 타는 비행기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여행사를 이용해 같이 여행을 갈 사람들이 비행기 앞에
우루루 몰려있었다.
"어디 보자, 난 1팀이고…… 1, 2팀은 함께 행동하고 3팀만 따로 행동하다 나중에 런던에서 합류
라……."
난 피식 웃으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은, 시리도록 푸르렀다. 무단결석으로 인해 날아가 버
릴 학점이나 비행기 티켓 값으로 나간 한 학기분 등록금 따윈 생각나지도 않았다.
"가자, 런던으로."
그래. 런던으로 가자. 네가 가고 싶어 했던 곳. 그랬기에 나도 가고 싶었던 그 곳. 그리고 널 볼
수 있을 런던으로.
.
.
.
下
"자, 뮤지컬 예약 티켓은 모두 챙기셨죠? 이제 3팀과 합류한다고 하신 분들은 모두 3팀 쪽으로
가 주시길 바랍니다."
그 말에 사람들은 우루루 움직였다. 난 잠시 한숨을 내쉰 다음 노인에게 인사를 건내었다.
"저, 그럼 이제 3팀 쪽으로 가 볼게요."
"그래. 그럼 나중에 뮤지컬 볼 때 보세나."
"예. 그럼 어르신, 혹시 모르니 티켓 안 잃어버리도록 조심하세요."
"허허허. 고맙네."
난 그렇게 말하곤 몸을 돌렸다.
3팀은 1, 2팀에 비해 사람들이 적었다. 1, 2팀에서 갈라져 나온 사람들만 모인 것이다. 사실 1,
2팀에서 3팀으로 합류한 사람보다 3팀에서 1, 2팀으로 간 사람들이 더 많았다. 어쨌든 여기서 이
렇게 다시 팀을 구성하니 애초에 혼자 여행 온 사람이 아니라면 다들 일행과 같이 있게 되었다.
더군다나 3팀은 나를 제외하곤 다들 같이 여행 온 사람이 있는 것 같았다.
"자, 그럼 지금부터 인원점검을 시작합니다! 다들 각자 팀 가이드 앞으로 모여주세요!"
그러자 사람들이 다시 이리저리 뭉치기 시작했다. 역시나 1, 2팀 사람들이 많았고 3팀 사람은 나
를 포함해 고작 열댓명이 다였다. 그리고 그 때였다.
"자, 그럼 인원점검 시작하겠습니다. 다들 일행분과 같이 서주세요."
그렇게 말하며 3팀 가이드가 나와서 사람 수를 체크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 명 씩 헤아리며 이
름이 적힌 목걸이를 보며 명단을 체크했다. 그러다 마지막으로 남은 한 사람에게 다가왔다. 그리
고 그 한 사람은 바로……,
"3팀 맞으시죠?"
"어, 예."
내 대답에 3팀 가이드는 내 목걸이를 보고는 명단을 체크했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얼굴이 붉어진
다. 왜 이러지? 난 고개를 숙이고 명단을 정리하는 가이드를 쳐다보았다. 보이는 건 새카만 머리
와 새하얀 뺨. 손끝이 떨려왔다. 숨이 가빠온다. 왜 이러지? 심장은 미칠 듯이 쿵쾅거리고, 제발
이 미친 심장 녀석아, 그만 좀 뛰어라.
"자, 그럼 이제 다들 잠시 여기 레스터 스퀘어 주위를 둘러본 다음에 11시까지 다시 여기로 모여
주세요."
그 말에 사람들은 여기저기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가이드는 계속해서 고개를 숙이고 명
단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난 멍하니 서서 그 가이드를 바라보고 있었다. 갑자기, 뭔가 울컥하는
느낌이 들었다.
이렇게 가까이 있는데. 그리고 날 그렇게 가까이서 봤는데.
"실망…… 안 할 줄 알았는데……."
난 조용히 몸을 돌렸다. 그리곤 아무 곳으로나 걸어가기 시작했다. 왜 이러지? 가이드는 수많은
사람들을 대해야 한다. 그 많은 사람들을 일일이 기억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더군다나, 4년 전 잠시 봤던 사람을 기억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왠지 발걸음이 무거웠다. 더 걷기가 힘들어 난 근처 벤치에 앉았다. 가이드는 계속 그대로 서 있
었다. 오고가는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그렇게 그녀는, 날 알아보지 못했다.
.
.
.
난 우울한 표정으로 한쪽 벽면에 걸린 시계를 쳐다보았다. 어느새 1시였다. 10분 후면 식사를 마
치고 밖으로 나가 내셔널 갤러리로 가야한다. 맥도널드엔 사람들이 무수히 붐비고 있었다. 점심시
간이라 그렇겠지. 난 햄버거의 마지막 조각을 입에 털어놓곤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곤 화장실
로 향했다.
화장실엔 아무도 없었다. 난 물을 틀어 얼굴을 대충 훔치곤 거울을 쳐다보았다. 곧이어 난 날 마
주보게 되었다.
"멍청한 놈."
왜 이렇게 기분이 나쁠까?
"걔가 날 기억할 리가 없잖아."
이미 알고 있던 사실.
"그런데…… 도대체 왜?"
도대체 왜?
"왜 내가 이렇게 실망하는…… 거냐고……."
쿵. 세면대를 후려친 주먹에선 물기가 뚝뚝 흘러나왔다. 난 고개를 숙였다. 가슴이 답답하다. 그
렇게 쉽게, 어설프게 보고 싶진 않았다. 그래, 사실은 나도 나 자신을 조금은 속였다. 난 그녀가
날 기억할 거라고, 최소한 날 보고 어디서 본 사람 같다고 고개라도 갸우뚱 할 줄 알았다. 3팀 가
이드라는, 그런 이름으로 불려왔던 사람. 그 사람이 바로……,
'그녀'였기에.
"후우-"
한숨을 내쉬었다. 비행기 안에서 내내 다짐하던 생각들이 떠올랐다. 보기만 하자. 날 알아보든,
못 알아보든 실망하지 말고. 그냥 원 없이, 멀쩡한 모습 바라보고 오자. 사람들 사이에서 소리치
고 여기저길 돌아다니는, 꿈속에서가 아닌, 4년 전과 같은 모습을 찾으려고 하지도 말고 그냥 바
라만 보고 오자. 그러면 후회는 없을 테니까.
그러면 후회는 없을까?
"병신……."
꽉 움켜쥔 주먹이 새하얗게 변했다. 핏줄이 도드라져 보인다. 그 위에 영글어지는 물방울. 하얀
조명 아래서 그 물방울의 되튀김. 난 고개를 휘젓곤 밖으로 나왔다.
괴로웠다. 멀쩡히 그녀를 쳐다봐야 한다는 게. 그녀가 아닌, 3팀 가이드로 여기고 따라야 한다
는 것이.
"여보게나."
"아, 어르신. 1, 2팀은 먼저 떠나지 않았나요?"
"화장실이 급해서 말일세."
화장실 입구에서 1팀에서 만났던 노인과 마주치게 되었다. 그는 곧이어 내 얼굴을 보곤 의아해하
며 물었다.
"무슨 안 좋은 일 있나?"
"예?"
"얼굴이 많이 안 좋아 보이는구먼."
"아…… 방금 먹은 게 체해서요. 너무 급하게 먹었나 보네요."
"그런가? 쯧쯧. 너무 조급해하며 살지 말게나. 세상이 아무리 빨라져도 사람은 천천히 살아야 되
는 걸세."
"아, 예."
그렇게 말하고 노인은 화장실 안으로 들어섰다. 난 발걸음을 옮기려다가 곧이어 멈춰섰다. 노인
의 말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래…… 아직 이틀이나 남았어."
난 노인에게 감사하며 밖으로 나왔다. 그때 식당 안에서 한 사람이 고함을 질렀다.
"자, 이제 3팀은 다들 밖으로 나와 주세요. 이제 출발할 시간입니다."
3팀 가이드…… 아니, 그녀의 말에 사람들이 모두 자리에서 일어났다. 난 머뭇거렸다. 곧이어 난
피식 웃은 다음, 사람들과 함께 맥도날드 밖으로 빠져나왔다. 그녀는 사람들을 입구에 모은 뒤 말
했다.
"이제 내셔널 갤러리로 가게 될 겁니다. 다들 길 잃지 않도록 조심 하시구요, 팜플렛과 입장료가
공짜이니 부담 없이 가셔서 보시면 됩니다. 뮤지컬이 7시에 시작하니 가는 시간과 도착해서 준비
할 시간까지 고려해서 적어도 6시까지는 감상을 마치셔야 합니다. 자세한 사항은 거기 도착해서
말씀 드릴 테니 우선 내셔널 갤러리로 이동하도록 하죠."
그녀는 그렇게 말하곤 앞서 걸어갔다. 난, 잠시 고민하다가 사람들의 맨 뒤에서 걸음을 옮겼다.
조급할 필요는 없다. 난 주위를 천천히 둘러보았다. 런던. 매혹적인 곳이다.
기다려라 런던. 지금은 너 대신 그녀를 보기 위해 왔지만, 언젠가 널 보기 위해 올 테니.
.
.
.
"6시까지 여기로 모여주세요. 그럼 이제 마음껏 감상하세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곤 정작 안으로 들어가진 않았다. 다른 팀 가이드들과 그렇게 밖으로 나가고
사람들은 내셔널 갤러리 안으로 들어섰다. 난 잠시 망설이다 밖으로 나왔다.
"아직까진 별 문제 없어요."
"그래도 힘들 텐데. 런던에 가이드로 오긴 이번이 4번째지?"
1팀 가이드의 물음에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곧이어 2팀 가이드가 말했다. 1, 2팀 가이드는 모
두 30대 후반으로 보이는 남자들이었다.
"이제 슬슬 질릴 때도 되지 않았어?"
2팀 가이드의 물음에 그녀는 웃으며 대답했다.
"설마요. 런던이 질릴까봐서요. 아마 다 늙어서도 늘 설렐걸요."
"하긴. 그래도 우리처럼 똑같은 코스만 수 십 번 돌아다니면 질릴 거야."
"그래도…… 뭐 런던만 오란 법 있나요? 유럽 대륙은 넓잖아요."
"우리 여행사가 다 돌아다닐 수 있는 곳이 아니잖아? 하하하."
가이드들끼리 모여서 그렇게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그러다 잠시 후, 1팀 가이드가 날 발견했다.
"이봐, 저 학생 3팀으로 갔었지? 왜 밖에 나와 있지?"
그 말에 그녀가 고개를 돌려 날 쳐다보았다. 난 당황했다. 괜히 밖으로 나왔나? 내가 막 몸을 돌
리려 했을 때, 그녀가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세요?"
여기서 대답을 안 하면 더 이상해질 것 같았다. 그래, 태연하게 말하자. 침착하게.
"그냥…… 답답해서요."
내 말에 1팀 가이드가 말했다.
"내셔널 갤러리에 와본 적이 있나? 처음 와봤으면 왠만하면 구경하는게 후회 안 할 거야."
"아…… 아직 시간이 있으니까요. 조금 있다 보죠 뭐."
내 말에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곤 몸을 돌렸다. 난 나도 모르게 그녀의 이름을 부르려 했다. 그러
나 난 필사적으로 입을 다물었다. 곧이어 난 몸을 돌려 내셔널 갤러리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내셔널 갤러리 내부는 환상적이라고 표현 할 수 있는 곳이다. 아무리 미술에 관심이 없다 하더라
도 그림의 강렬함에 자신도 모르게 빨려 들어갈 것이다. 하지만 난 그럴 수가 없었다. 난 고개를
푹 숙였다. 아무래도 참기가 힘들었다.
태연하게, 날 전혀 모르는 사람으로 대하는 그녀의 모습.
.
.
.
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모르겠다. 어느새 런던 퀸스 극장 입구에 모인 사람들은 다들 뮤지
컬을 볼 때의 주의점과 나와서 호텔로 돌아가 저녁식사를 한다는 안내를 받고 있었다. 난 묵묵히
서서 그녀의 목소리를 들었다. 설명의 내용은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마치 새의 지저귐을
듣듯이. 4년 전, 중간고사 기간에 부모님 몰래 이불을 뒤집어쓰고 통화했던 기억들. 난 쓴웃음을
지었다. 그래봤자 그녀는 날 기억 하지도 못하는 걸. 가슴 한 구석이 시려왔다. 몸에 힘이 하나
도 없었다.
"그럼 다들 안으로 들어가 주세요."
사람들이 극장 입구로 들어갔다. 난 터벅터벅 1팀 가이드에게로 걸어갔다.
"저기요."
"왜 그래, 학생?"
"죄송한데 몸이 안 좋아서요. 뮤지컬을 못 볼 것 같은데요."
"그래? 어디가 안 좋은데?"
"그냥 머리도 아프고…… 사람들 많은데서 앉아있으면 더 아플 것 같아서요. 죄송한데 먼저 호텔
에 돌아가 있으면 안 될까요?"
"그래? 학생 3팀이지?"
"예. 그런데요……?"
1팀 가이드가 갑자기 그녀를 불렀다. 난 황급히 고개를 돌려 그녀를 외면했다. 1팀 가이드는 날
가리키며 말했다.
"이 학생이 몸이 많이 아파서 먼저 호텔에 돌아가 있겠다는데? 자네 팀이니까 자네가 데리고 가.
우리는 밤에 야참거리나 사서 천천히 들어갈테니까."
"예."
아마도 가이드들은 뮤지컬을 안 보고 호텔에 있다가 사람들이 나올 때 쯤 다시 오나보다. 제기
랄. 난 나 혼자서도 갈 수 있다고 말하려고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그러다가 그녀와 눈이 마주쳐
버렸다.
짧은 침묵. 난 나도 모르게 몸을 확 돌렸다. 다시, 미친 듯이 뛰기 시작하는 심장. 생각해보니
난 그녀를 똑바로 쳐다보지 않았다. 그렇게 서있는 내 등 뒤에서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많이 아프세요? 호텔에 기본적인 약이 있으니까 일단 호텔로 가죠."
"아, 예."
곧이어 그녀는 택시를 불렀다. 앞좌석에 탄 그녀가 영어로 뭐라고 말했다. 곧이어 이어지는 택시
기사와의 대화. 난 멍하니 영어로 대화하며 웃는 그녀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렇게 15분쯤 지났을
까. 처음 묵었던 호텔의 입구에 도착했다. 내가 먼저 내리고 그녀가 택시 요금을 치뤘다. 곧이어
그녀가 말했다.
"음…… 방 배정은 나중에 할 예정이니까…… 그리고 저녁식사도 문제네. 그럼 일단 제 방으로 가
죠. 그런데 많이 아프세요? 병원에 가 보실래요?"
"아, 아뇨."
그녀는 호텔 프론트에 뭐라고 말하곤 걸음을 옮겼다. 난 계속 멍하니 그녀의 뒤를 따라갔다. 곧이
어 난 그녀의 방 앞에 서게 되었다.
"잠시만요."
그렇게 말하고 그녀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난 한동안 밖에 서 있었다. 빌어먹을. 어떻게
하지? 지금 이대로 들어가면……,
그녀와 나, 단 둘이잖아.
"들어오세요."
"아, 예."
그녀의 말에 난 나도 모르게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곧이어 스스로 문을 닫으며, 한숨을 내쉬었
다.
버티기 힘들지도 모른다. 많은 사람들 속에서가 아닌, 단 둘이서 보는 그녀…….
.
.
.
난 잠깐 화장실을 사용하겠다고 말하곤 재빨리 화장실 안에 틀어박혔다. 그리곤 우선 찬 물로 세
수를 하곤 다시 거울을 쳐다보았다. 거울 속의 내 얼굴은 생기가 없었다.
어떡하지?
막막했다. 나가서 태연히 그녀를 쳐다보기도, 계속해서 모르는 사람처럼 그렇게 말하기도 힘들었
다. 난 내가 지금까지 크나큰 착각을 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런던으로 와서 난 내 스스로가 쿨
하게, 그냥 그녀를 바라만보고 런던을 즐기곤 그냥 돌아올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전혀 아니
었다. 런던은 중요하지 않았다. 오로지 그녀. 바라보는 것만으론 만족 할 수 없는……,
한참 후에야 난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그녀는 침대에 기대어 잠들어 있었다. 난 나도 모르게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손엔 나
에게 주려고 했는지 아스피린 통이 쥐어져 있었다.
짧은, 그러나 나에겐 영원 같은 시간이 지나고, 난 어느새 그녀에게 다가갔다. 반쯤 숙여진 고
개. 난 천천히,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게 한쪽 무릎을 굽혔다.
난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새하얀 얼굴. 눈은 감겨져있다. 웃음이 나올 것 같다. 그리고 동시에 눈물도 나올 것 같다. 변
한 것은 없었다. 세월의 흔적은 그녀에게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은 것 같았다. 더 성숙해진 것 같
기도 했지만 같이 성숙해진 나에겐 똑같은 것 같았다. 그대로였다. 사람들을 불러 모우고 가이드
로써 여기저기 관광명소를 설명하던 그 모습. 나를 전혀 알아보지 모르며 태연히 행동하던 모습
이 아니었다. 지금 내 앞에서, 피곤함에 잠시 잠들어 있는 그녀는 4년 전 그녀였다.
생선을 싫어하고 허리가 가늘었고 자주 아팠던, 지금 생각하면 어처구니없었고 부끄러운 짓을 서
슴없이 했던 18살의 그 모습을 간직한, 그 때의 그녀였다.
내 첫사랑이었다.
눈에는 눈물이 핑 돌고 입가엔 웃음이 맺힌다. 보고 싶었다. 정말 보고 싶었다. 지금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어쩌다 만났고 어쩌다 연락을 하지 않게 되었는지.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이
순간, 4년이 지난, 22살 대학생이 되어서 무작정 런던을 찾아올 만큼 난 그녀를 <보고 싶었다.>
"일어나지 마."
난 조용히 속삭였다. 그녀는 그대로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다. 조용한 그녀의 숨소리. 난 눈을 감
았다. 하지만 닫힌 눈꺼풀과 망막 사이엔 그녀의 모습이 이미 맺혀있었다.
"정말……,"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 걸까. 하지만 난 용기를 내었다. 그렇다. 난 겁쟁이였다. 그녀를 보려면
벌써 볼 수 있었다. 여행사로 찾아가서 그녀를 찾으면 되었다. 하지만 난 먼발치에서조차 그녀를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곤, 여기 런던까지 찾아와서도 그녀에게 말 한마디 걸지 못했다. 더군다나
아닌 척 했지만 내심 그녀가 날 기억해줄거란 기대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곤 현실을 직시하게 되
고선 나도 모르게 실망해버렸다. 난 겁쟁이였고 한심한 놈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정말, 정말 보고 싶었어."
그렇게 말하고 난 어느새 눈물이 맺힌 눈을 떴다.
그리고 난 날 바라보고 있는, 날 바라보는 그녀의 눈을 마주보게 되었다.
긴 침묵이 흘렀다.
난 그대로 얼어붙어 버렸다. 얼굴이 화끈거리는 게 느껴졌다. 난 아무런 행동도, 심지어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머릿속이 새하얘지는 듯했다. 어떡하지? 무슨 말을 할까? 그녀에게 난 생
판 모르는 사람일 것이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갑자기……,
"뭐야, 그거였어?"
뭐라고?
그녀는 조용히 날 쳐다보고 있었다. 그렇게 그녀는 침대에 기대어, 난 한쪽 무릎을 꿇은 채로 시
간이 흘러갔다. 그녀는 다시 입을 열었다.
"왜 나 모르는 척 했어?"
"뭐…… 라고?"
"처음 봤을 때. 솔직히 내가 먼저 아는 척하긴 좀 그렇잖아. 그리고 날 기억할 지도 의문이고. 어
쨌든 나나 넌 아무런 사이도 아니었으니까."
"……."
"난 그냥 그러려니 하면서 있었어. 그런데 좀 이상하더라. 혼자 여행 온 사람들은 다 원래 자기
팀에 있었고 우리팀은 다 각각 일행이 있는 사람들인데, 넌 일행도 없는데 여기로 옮겨온 거. 그
리고 내셔널 갤러리 앞에서도 좀 그렇고. 계속 나 피하는 것도 그렇고. 너무 티 나더라."
"……."
"황당하긴 하다. 그런데 또 미안해지네."그 말에 난 간신히 나 자신을 추스를 수 있었다. 난 조용
히 몸을 일으켰다.
"아니. 그런 건 됐어."
그녀는 내 말에 차분히 웃었다. 왠지 가슴이 아팠다. 난 나도 모르게 말했다.
"내가…… 먼저 아는 척, 하기 힘들어서."
"내가 먼저 연락 끊으니까 다시는 연락 안하더니."
난 할 말이 없었다. 사실 연락을 하긴 했다. 하지만……,
"번호 없는 문자나 발신표시 제한된 전화나…… 솔직히 티가 너무 나. 넌 개성이 너무 강해서."
"그랬나?"
"응. 진심인 것도 알겠고 그랬는데 그땐……,"
"아니, 그때 얘긴 됐어."
내 말에 그녀는 피식 웃었다. 난 잠시 그녀를 쳐다보지 못했고 내 시선은 방황하다 그녀의 옆 침
대에 머물렀다. 난 그 침대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런 날 보며 그녀가 말했다.
"보고…… 싶었어?"
"……응."
"왜 연락 안했어? 나 연락처 그대론데……."
"글쎄. 솔직히 말하면, 용기가 없었다고나 할까."
"런던엔 무슨 일이야?"
"……너 보러."
"나 보러?"
그녀는 놀란 표정이 되어 물었다.
"그럼 애초에 내가 여기 올 줄 알고 온 거야?"
"응. 사실은 여기 3팀에 내 친구가 아는 형님이 있는데, 내가 이번에 사용하게 된 여행권이 남는
다고 너한테 받았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그 친구도 나 아는 사람이었어?"
"응."
그녀는 잠시 자신의 뺨을 만지작거리다 말했다.
"전화할 용기도 없었다면서, 런던까지 온 거야? 단순히 나 때문에? 그 비싼 돈 들여가면서?"
"……응."
"왜? 그냥 거기서 봐도 됐었잖아. 솔직히 나 이러는 거 이해가 안 돼."
그 말에 난 고개를 들어 그녀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난, 그러고 힘들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나도 이런 내가 잘 이해가 안 돼."
"……그래?"
"응. 그런데, 몇 가지 이유…… 아니, 변명은 할 수 있을 것 같아."
"뭔데?"
"런던…… 네가 가보고 싶었다고 한 이후로, 나도 가보고 싶었었거든. 그래서 한 번쯤 와 보고 싶
었어."
"결국은 다 나 때문이네."
"응."
내 조용한 대답에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곧이어 그녀는 왠지 힘없이 들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 그렇게 대단한 사람 아닌데."
"알아."
"……그래 이제 기억난다. 넌 무슨 말이든 늘 태연하게 말했어. 나 좋아 한다는 말도, 뭐 나보다
예쁜 여자 많은데도 나 좋아한다고. 너무 태연하게 말해서 진심으로 들리지가 않았어."
"그럴 거라고 생각했어."
"그런데 넌 늘 나한테 보챘어. 자기 말이 진심이라고 꼭 믿어 달라고……."
"귀찮았지?"
"음, 사실은. 그런데 그래도 너랑 처음 통화하는 건 좋았어. 난생 처음 안 남자애가 갑자기 통화
하고…… 우리 그때 얼마나 했었지?"
"한 2주 정도? 밤새도록 했었지. 새벽 4시까지. 할 말, 못할 말 다 해가면서."
"그땐 나름대로 그런 게 멋있었다고 생각했었나봐. 하여튼 나도 그땐 어렸으니까."
그녀의 말에 난 쓴웃음을 지었다. 많이 변했다. 그 때의 그녀는, 자신이 충분히 예쁘고 인기 있다
고 생각했고 그런 18세 소녀들이 흔히 그러듯 약간의 허영심과 자신감이 있었고 늘 사람들 앞에
서 당당했었다. 그리고 난 그런 그녀에게 어울리는 18세 소년은 아니었다. 시내로 놀러나가는 것
보단 서점에, 친구들과 잔뜩 차려입고 어디론가 우루루 몰려가는 것 보다는 신발끈을 꽉 매고 농
구코트로 달려 나가곤 했었다.
"그런데 너 말…… 이젠 진짜 진심인 것 같아. 여기 와서, 이렇게 있으니까."
난 또 씁쓸히 웃을 수밖에 없었다.
"이제 서야 믿는 거구나. 4년이나 지나서."
"미안해."
"아니, 미안하다는 말은 됐어. 사실 나도 알고 있으니까."
내 말에 그녀는 고개를 숙여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왼쪽 손으로 오른쪽 손을 만지작 거리던 그
녀가 불현듯 입을 열었다.
"요즘 어떻게 지내? 여전히…… 글도 쓰고, 농구도 하고 그래?"
"응. 난 별로 바뀐 게 없어. 넌?"
"난…… 글쎄. 보다시피 여기저기 가이드 하러 다니고 있지."
"대학은?"
"음…… 다니다가 휴학내고 이거 하는 중이야. 언제 다시 갈 지는 모르겠어."
"그래……."
"그런데 머리 안 아파?"
"아, 괜찮아."
난 그렇게 말하곤 팔을 뒤로 뻗어 상체를 비스듬히 젖혔다. 그렇게 편한 자세로, 어느새 난 두려
움이나 어떤 부담도 없이 그녀를 마주보았다. 그러다 난 그녀를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사실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었는데."
"뭔데?"
"사실은 아까 전에 다 했어."
"……보고 싶었다는 말?"
"응."
"아직도 내가 좋아?"
"응."
"첫사랑…… 이라고 했었지?"
"응."
"그럼 두 번째 사랑은?"
난 조용히 웃었다. 아주 조용히.
"없어. 사실 나 이러다 평생 독신으로 살 까봐서. 억울하잖아. 나도 그럴 듯한 추억은 있어야겠
고, 그래서 처음이자 앞으로 다신 없을 것 같은, 마지막 사랑 찾아서 온 거야."
"내가 처음이자 마지막이라고?"
"응."
"하아……."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숙였다. 피곤해보였다. 아니, 사실 피곤할 것이다. 그 많은 사람들
을 관리해야 하니까. 그래서일까, 이젠 확연히 알아차릴 수 있는 그녀의 힘없는 목소리가 가슴 아
프게 들려왔다.
"나 정말, 뭐랄까. 그렇게 예쁘고 똑똑하고…… 그런 여자 아니야."
"알아. 18살 때 가졌던 막연한 환상이라던가 그런건 없어."
"그런데 왜……,"
"나도 몰라. 그런데 한 가진 확실해. 사실이라는 거…… 진심이라는 거. 4년 동안 그걸 느꼈으니
까."
"그거?"
난 천장을 올려다보며 나직히 말했다.
"애끓는 그리움…… 보고 싶다는 마음…… 여자는 이런 거 느낄까 항상 궁금했는데, 항상 무슨 일
을 하다가 문득 <아, 내가 이 여자를 정말 사랑하는가 보다. 안 그럼 내 가슴이 이렇게 안 아프겠
지>하면서 가슴 안 구석이 무섭게 답답해지는 느낌 있잖아. 난 4년 전 이후로 쭉 그랬어. 몸은 하
나도 안 아픈데도 신기하게 정말 가슴이 정말 아프더라."
"……."
"솔직히 말해서 난 너한테 바라는 게 아무 것도 없어. 한국에 돌아가서 계속 연락할지 어떻게 할
지…… 그냥 막연히 보고 싶었어. 정말 보고 싶었고, 그래서 이렇게 마주앉아서 이야기하고……
이걸로도 난 충분히 만족해. 아니, 솔직히 행복해. 아마 한국에 돌아가서 헤어지고 나선 또 어떻
게 될 지도 몰라. 하지만 확실한 건, 내가 널 좋아하고 사랑한다는 게 진심이라는 거고, 내 사랑
은 너랑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거야."
"나랑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그래. 난 날 사랑해주길 원해서 널 사랑하는 게 아니라, 널 사랑하기에 그냥 사랑하는 거니까.
그게 내가 4년 동안,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얻은 내 사랑에 대한 해답이야. 난 이걸로 만족해."
그녀는 아무런 말없이 계속 손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그렇게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고 그녀는 여전히 침묵하고 있었다. 그 고요함 속에서, 갑자기 그녀가 입을 열었다.
"많이 생각 했구나. 사실 난 사랑이니 뭐니, 그런 거 생각 할 여유도 없었는데. 사실 너만 아니
라 특별히 다른 남자를 생각한 것도 아니야. 그냥…… 사랑과는 무관하게 살았어. 지금 나한텐 그
게 사치라고 생각했거든. 그리고 그러면서 별 문제없이 살아왔어."
"……그래."
"그리고 앞으로도 그럴 것 같아."
난 가슴 한 구석이 아려옴을 느꼈다. 눈물이, 눈물이 또 눈꺼풀을 비집고 나오려고 했다. 난 필사
적으로 떨리는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말했다.
"그러…… 려고?"
"응. 미안해."난 힘들게 미소 지었다. 그녀는 또 미안하다는 말을 했다. 그리고 내가 그녀에게서
들을 수 있는 대답이 그게 다였다. 하지만, 친구 녀석의 말이 내 귓가에 맴돌았다. 후회는 없어야
한다…… 난 조용히 일어나 그녀의 앞에 다가가 아까 전처럼 한쪽 무릎을 꿇은 뒤 말했다.
"믿어 줘…… 니가 날 사랑 안하고 생각 안하고, 아무런 관심이 없더라도…… 난 너 사랑하고 있
을 거야. 언젠가, 내가 엄청난 고민 끝에 너에게 청첩장을 날릴 날이 올 지도 몰라. 하지만……
아, 아하하. 미안.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네."
어느새 눈물은 내 뺨을 타고 흐르고 있었다. 그녀는 고개를 조금 들어 날 바라보았다. 난 눈물을
보이고 싶지 않아 얼른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손이 천천히 움직여 내 뺨을 흐르는 눈물을 훔쳐갔
다. 그녀의 손가락에 맺힌 온기가 내 뺨 위에 남아있는 것 같았다.
"미안 하다는 말은…… 하지 말아줘. 나 그냥…… 내일 돌아갈게."
"그래도……,"
"아니, 괜찮아."
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곤 몸을 돌렸다. 그리고 한동안 이를 악물고 있던 난, 간신히 입
을 열었다.
"안녕."그리고 난 도망치듯 방 밖으로 빠져나왔다.
.
.
.
"괜찮아…… 그래, 이걸로 된 거야."
난 웃었다. 눈물이 흘렀지만 웃었다. 달라진 건 없었다. 난 이대로 돌아가서 또 학점 때문에, 등
록비 때문에 고민할 것이다. 군대도 가야겠지. 그리고 취직도 해야 할 테고.
그리고 사랑이 사치인 한 여자를 계속 사랑하겠지.
"하, 하하하…… 하하하하……."
힘없는 웃음이 내 입을 비집고 흘러나왔다. 난 어딘지도 모르는 런던 거리로 뛰쳐나왔다. 눈에
선 눈물이, 입에선 웃음이 새어나왔다.
런던에서의 마지막 밤은 그렇게 지나가버렸다.
.
.
.
<이번 여행에서 난 나 스스로를 수없이 속였다. 사실 난 그녀가 날 알아봐주길, 그녀와 내 관계
가 특별해지길 바랐었다. 하지만 난 애써 그걸 부인했다. 얕은 자존심 때문이었다. 하지만 난 그
녀가 날 알아봤을 때, 너무나도 기뻤고 그래서 난 또 다시 깨달았다. 내가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
한다는 것을. 그리고 앞으로도 난 쭉 그럴 것이다. 비록 그녀는 날 사랑하거나 날 좋아하거나 나
와 지속적인 관계를 약속하진 않았고, 그 것이 힘들 것이라 말했다. 그리고 그 사실에 슬펐지만
난 그 슬픔이 기뻤다. 난 마지막으로 깨달았다. 난, 사랑을 사치라 생각하는 그녀를 진심으로 사
랑한다는 것을.>
.
.
.
..
정확히 34분만에 완성한 글이로군요.
음악을 듣다가 갑자기 쓴 글인데다, 이제 고3이라 글쓰는 것을 오랫동안 쉬었더니
글솜씨가 말이 아니군요. 제가 봐도 난잡합니다. 더군다나 농구 5시간 이후 지쳐서
몽롱한 정신상태로 썼으니.... 고3이라지만 방학이라 학교에서 5시에 맞치니,
집에 와서 틈틈히 쓴, 제대로 된 글로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카페 게시글
인소닷단편소설
[단편]
[새끼늑대] In London
새끼늑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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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153
07.02.05 03:28
댓글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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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아...여자 만나러 런던 까지 갔는데 ㅠㅠ 우아항 ㅠㅠ 친구들도 착하네요 그비싼 티켓을 ㅎ
친구는 공짜로 얻어서 준겁니다ㅋ
이것이 정녕...34분만에 쓴 글?? 에헤라 디여~ 좋습니다^^ 글 읽으면서 '남자가 썼나..'하는 생각 했습니다. 연재하셔도 무리 없으실 것 같아요. 길었지만 그만큼 재미있었습니다. 특히, 전 대화에 약한 편이라..매끄럽게 흘러가는 대화가 인상적이었어요. 건필하세요^^
연재는 다른 글을 생각하고 있구요; 하여튼 건필하겠습니다ㅎ
이야~진짜 34분만에 쓰신것같지 않아요...놀랍워요.....ㅜ_ㅜ...오오...
감사합니다;ㅎ
우오우오. 멋진 단편이군요!
감사합니다~ㅎㅎㅎ
오멋잇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