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소중한 삶을 놓아버리고 싶은 순간이 있다. 벼랑 위에서 등산화를 벗었는데 발톱이 엉망이라 뽑아야 했다. 악 비명을 지르며 몸부림을 쳤는데 그 바람에 등산화 한 짝이 데굴데굴 아래로 굴러간다.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등산화 다른 짝을 신고 다른 쪽은 등산양말 신은 채 벼랑 아래로 내려가 주워와야 할텐데 홀로 트레킹에 나선 거칠기 이를 데 없는 이 여성, 다른 한 짝을 벗더니 저멀리 벼랑 아래로 냅다 던져버린다.
2015년 해외에서 귀국하는 비행기 안에서 장 마크 발레 감독이 연출한 영화 '와일드'(2014)를 보고 깊은 인상을 받았는데 최근 넷플릭스에 올라와 다시 봤다. 비행기 안에서 봤을 때 우리말 번역 지원이 안돼 대충대충 이해했던 내용들을 정밀하게 돌아볼 수 있었다. 삶을 놓아버리고 싶었던 주인공의 사생활 등 거북한 장면은 여전히 거북스러웠다. 우리 정서에 와 닿지 않는 대목이 적지 않다는 점을 인정할 수 밖에 없다. 멕시코와 국경을 이루는 캘리포니아주 캄포를 시작으로 캐나다와의 국경에 이르는 4285km의 퍼시픽 크레스트 트레일(Pacific Crest Trail) 여정을 함께 하며 그 힘듦을 체감하는 듯한 착각을 안겨주는 것은 여전하며 강력한 매력이었다.
백두대간의 3분의 1쯤 마친 상태라 더욱 절절히 다가온다. 실제 셰릴의 여정은 모하비 사막부터 포틀랜드 근처까지니 전체 트레일의 3분의 2정도만 소화한 것으로 보인다.
우리말 자막을 통해 다시 보니 이 작품에 강하게 깃든 문학과 책의 향기가 진했다. 셰릴 스트레이드(Cheryl Strayed)의 자전 소설이 원작이다. 그는 미네소타 대학을 졸업한 뒤 시라큐스 대학에서 예술학 석사학위를 땄는데 2012년 3월 나오자마자 베스트셀러 차트를 석권했으며, 아마존 ‘올해의 책’으로 선정됐다. 오프라 윈프리가 ‘오프라 북클럽 2.0’을 다시 시작하면서 ‘올해의 첫 번째 책’으로 선정, 뉴욕 타임스 논픽션 부문 1위로 떠올랐다.
영화를 본 이들은 대체로 원작이 주는 감동에 못 미친다고 아쉬워한다. 한글본이 552쪽에 이른다. 상당한 분량이다. 영화 러닝타임은 115분이라 원작의 상당 부분을 덜어낼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성찰과 회한의 무게가 덜어질 수 밖에 없음은 불가피하다고 본다. 그렇게 실망한 이들은 원작을 접한 뒤 영화를 보라고 주문했다. 검색해보니 이미 번역본은 절판된 듯하다. 나중에 기회가 닿으면 중고 서점을 통해 구입해 읽어봐야겠다.
주인공 이름이 특이하다. 과거분사라니? 결혼 서류에 성을 쓰라고 해서 급조한 것이었다. '길 잃은'이란 뜻인데 당시 그가 꼭 그랬다. 갑작스럽게 인생의 모든 것을 송두리째 잃어버렸다. 아니 놓아버렸다는 표현이 더 적절하다. 아버지의 학대, 어머니의 죽음, 뿔뿔이 흩어진 가족에 상처받은 그의 영혼은 인생을 내팽개쳐 버렸다. 마약에 빠져들고 수많은 남성들과 성적 쾌락에 탐닉했다. 그리고 이혼까지, 위선이나 가식을 떨지 않고 너무 솔직해 그런 것이다 싶다.
영화는 결코 낭만적인 여행기가 아니다. 어쩔 수 없이 과거를 돌아보는 플래시백 기법이 자주 쓰이는데 발레 감독은 영리하게도 아주 짤막하게, 편린이 스쳐지나가는 것처럼 짧게 짧게끊어친다. 플래시백이 되풀이되면 관객은 지루해지게 되는데 머릿속에 떠올랐다 금세 사라지는 것처럼 주인공의 과거, 과거 인연들이 섬광 번쩍이듯 한다. 그러면서도 진한 문학적 향기가 배어나온다.
에세이스트 에이드리언 리치와 소설가 제임스 미치너가 나온다. 셰릴(리즈 위더스푼)은 리치를 좋아하고 어머니(로라 던)는 미치너가 좋다고 말한다. 그러다 어머니가 이런 말을 한다. "널 엄마보다 교양있게 키우고 싶었거든. 그게 이렇게 가끔씩 아플 줄은 몰랐네." 개인적으로 자동차 안에서 주고받는 모녀의 이 대화가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원작을 통해 그게 어떤 의미인지 정확히 이해하고 싶다.
셰릴이 트레킹 도중 쉬며 펼치는 책은 리치의 '공통 언어를 위한 꿈'(민음사)이다. 미치너의 책이 얼핏 나오는데 '소설'(열린 책들)이다. 그 밖에 에밀리 디킨슨, 로버트 프로스트, 월트 휘트먼, 플래너리 오코너 등의 문장이 인용된다.
이 작품은 내면의 상처를 딛고 일어나는 복원력을 그린 성장 소설이라거나 삶의 여러 문제들에 여성이 주체적, 능동적으로 맞서는 자세를 다룬 페미니즘 소설이라고 해석하는 이들도 있다. 어느 하나로 단순화할 수 없는 입체적인 작품으로 이해하는 것이 맞지 않나 생각한다.
길잃은 라마를 붙들어주자 꼬마가 묻지도 않았는데 그런다. "저에겐 낯선 이에게 말하지 못할 문제들이 있어요." 누구나 문제가 있단다, 라고 셰릴이 대꾸하자 그 꼬마는 "어떤 종류의 문제냐"고 묻는다. "그런데 문제들도 언젠가는 다른 걸로 변해" 그러자 꼬마는 엄마가 가수라 노래를 잘 불러주신다며 길 위에서 노래를 부른다. '레드 리버 밸리' 노래를 마친 꼬마는 집으로 돌아가고 셰릴은 힘없이 길 위에 주저앉아 울음을 터뜨린다. 엄마 너무 보고 싶어!!!
마지막 장면, 포틀랜드로 이어지는 '신들의 다리' 위에서 셰릴의 내레이션이 흘러나온다. 재혼해 아들과 딸 낳고 어엿한 가정을 꾸려 세월의 상처를 말끔히 씻어냈음을 들려준다. 그리고 가장 유명한 대사가 나온다. '내 인생도 모두의 인생처럼 신비롭고 돌이킬 수 없으며 고귀한 존재다. 진정으로 가깝고 진정 현재에 머물며 진정으로 내것인 인생, 흘러가게 둔 인생은 얼마나 야성적이었던가?'
셰릴이 길에 나선 것이 1995년 여름부터 가을 94일간이니 그 시절 명곡들이 많이 흘러나온다. 'El Condor Pasa'가 여러 모로 의미심장하게 쓰이는데 워낙 알려진 곡이라 팻 메스니와 안나 마리아 조펙이 호흡을 맞춘 'Are you going with me'를 골라봤다. 그 아래 'El Condor Pasa' .
Are You Going with Me? (youtube.com)
El Condor Pasa (If I Could) (youtub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