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라라봉사단 원문보기 글쓴이: 원시림
♡ 나를 철들게 한 나의 할머니 ♡ 다섯 살이던 저와 세 살이던 남동생은 시골에 계시던 할머니 손에 맡겨졌습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장 먼저 기억나는 어린 시절이 있겠지요. 제가 기억할 수 있는 가장 어린 시절은 할머니 손에 맡겨지고 1년이 지난, 여섯 살의 봄입니다.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날, 도시 생활을 하고 있던 친척들이 저와 제 동생 문제로 할머니 댁을 찾았습니다. 오갔습니다. 할머니는 계속해서 안 된다는 말씀만 반복하셨고, 친척들은 사는 게 힘들어서 도와 줄 수 없다는 말만 거듭 했습니다. 큰아버지는 저와 제 동생에게 새 옷을 입혀 주고, 새 신을 신겨 주며, 좋은 곳에 가게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울먹이시던 할머니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큰아버지는 저희 남매 손을 이끌고 문밖을 나섰습니다. 저희 남매를 끌어안고 우셨습니다. “안 된다. 절대 못 보낸다. 고아원에도, 아들 없는 집에도, 나는 못 보낸다. 죽은 내 아들 불쌍해서 이것들 못 보낸다. 니들 헌티 10원 한 푼 도와 달라구 안 헐라니까 보내지 마라. 그냥 내가 키우게 놔둬라.” 할머니는 그렇게 말씀하시며 목 놓아 우셨습니다. 그날 할머니가 아니었다면 지금의 저도, 제 남동생도 없었겠지요. 아들 없는 집에 보내지지 않은 것만으로도, 저희 남매는 할머니께 평생 갚아도 다 갚지 못할 은혜를 입은 것인데, 그게 얼마나 큰 은혜였는지 그때는 몰랐습니다. 받지 않고 저희 남매를 기르셨습니다. 지셔야 했는지, 그때는 너무 어려서 몰랐습니다. 불만이었고, 다른 아이들처럼 학용품을 넉넉하게 쓰지 못하는 것이 불만이었고, 마음 놓고 과자 한번 사 먹을 수 없는 것이 불만이었고, 소풍에 돈 한 푼 가져갈 수 없는 것이 불만이었고, 마음이 얼마나 아렸을지, 남의 집으로 옷을 얻으러 다니며 할머니가 얼마나 고개를 숙이셨을지, 넉넉하게 학용품을 사 주지 못하는 할머니 마음이 어땠을지... 소풍간다고 김밥 한번 싸주지 못하고 용돈 한 푼 주지 못하는 그 마음이 어땠을지, 다른 아이들은 운동회 때 엄마와 함께 하는 것을 나이 드신 당신 몸으로 해 주시느라 얼마나 진땀을 빼셨을지... 할머니는 저희 남매를 위해 자신을 포기하고 사셨습니다. 당신의 체면이나 얼굴을 모두 버리시고, 오로지 저희 남매를 위해 사셨습니다. 바빴지만, 할머니가 그렇게 사셨기 때문에 과자 한 봉지라도 얻어먹을 수 있었고, 이발소에서 공짜로 머리를 자를 수도 있었고, 새 연필 한 자루라도 얻어 쓸 수 있었습니다. 남의 집으로 일을 가시는 날에는 새참으로 나온 빵을 드시지 않고 집으로 가져오시는 분이셨고, 그어진 종아리에 약을 발라주시며 금세 눈물을 훔치시는 분이셨고, 맛있는 과자를 마음껏 못 사줘 미안하다며 문주를 부쳐주시고, 개떡을 쪄주시고, 가마솥 누룽지에 설탕을 발라주시는 분이셨고, 비가 아주 많이 오는 날에는 우산 대신 고추밭 씌우는 비닐로 온 몸을 둘러주시고 빨래집게로 여기저기 집어주시며, 학교에 가서 다른 아이들이 너는 우산도 없느냐고 놀리거든, 옷이 안 젖는다더라. 너도 니네 엄마한테 나처럼 해달라고 해봐.” 그렇게 말하라고 시키시던 분이셨습니다. 벌어야 했지만, 그래도 지금 생각해보면 할머니와 함께 했던 유년의 그 시간들이 스물아홉 제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습니다. 그때는 그게 행복이라는 걸 몰라서 할머니 가슴을 많이도 아프게 했지요. 저는 가난이 싫었습니다. 억척스러운 할머니가 싫었습니다. 그래서 반항적이었고, 미워서 버릇없이 굴기도 했습니다. 생각해 본적은 한번도 없었습니다. 할머니를 생각하며 몰래 눈물을 훔쳐본 적도 없었습니다.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철이 들 무렵에야 알았습니다. 진학해 자취 생활을 했습니다. 저희 남매는 주말마다 할머니가 계시는 집으로 내려갔는데, 할머니가 새참으로 나온 빵과 우유를 드시지 않고 집으로 가져오셔서 냉장고에 넣어놓으신 거였습니다. 먹지도 못하는 데 왜 그러셨냐고 화를 내면, ˝니덜이 목구멍에 걸려서 넘어가야 말이지. 니덜 오먼 줄라고 냉장고에다 느 놨는디, 날짜 지나서 못 먹으먼 워쩐다냐.”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간 적이 있었습니다. 한참을 두리번거린 후에 찾아낸 할머니는 반갑게 제 손을 잡으시며 이러구 서 있은 모양이여. 기다리다 배고파서 나 먼저 짜장면 한 그릇 먹었다. 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때문에 속상해 죽겄네.” 할머니는 화가 난 손녀딸의 눈치를 살피시며 들고 오신 가방 지퍼를 여셨습니다. 할머니가 들고 오신 큰 가방 속에는 김치 통 두 개가 들어있었고, 가방 안은 김치 통에서 흘러나온 빨간 김치 국물로 한 가득이었습니다. 오셔야지, 가방에다 김치 통을 통째로 넣어오면 국물이 안 넘친데?” 할머니는 금세 얼굴이 붉어지셨습니다. “이를 워쩌까. 국물이 다 새서 못 들고 가겠다. 내가 언능 수퍼 가서 봉다리 얻어올팅께 지달려라, 이?” 할머니는 터미널 안 슈퍼에서 검은 비닐봉지를 얻어 오셨습니다. 그리고 김치 통을 봉지 안에 넣어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가시네덜이 지덜언 짐치 안 먹구 사나, 노인네가 버스 안에서 김치 냄새 좀 풍겼기로서니, 그렇기 코를 막구 무안을 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작은 지퍼를 열고 꼬깃꼬깃 접은 1만 원 짜리 두 장을 제 손에 쥐어 주셨습니다. 할머니께서 건네주신 1만 원 짜리는 빨갛게 물들어서 김치 국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할머니를 배웅해 드렸습니다. 그날 자취방으로 돌아오는 시내버스 안에서 얼마나 소리 내어 울었는지 모릅니다. 할머니가 젖은 가방에서 꺼내 주셨던, 빨간 김치 국물이 뚝뚝 떨어지던 1만 원 짜리 두 장을 손에 꼭 쥐고, 사람들이 가득한 버스 안에서 그렇게 한참을 울었습니다.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벅찼습니다. 할머니가 아프시다고 하면 약재시장에 가서 좋다는 약재를 사다 보내 드리고, 할머니 생신이 다가오면 동네 할머니들과 식사라도 하시라고 용돈도 보내 드리고, 가서 돈가스도 사 드렸습니다. 처음 할머니를 모시고 레스토랑에 가서 돈가스를 먹던 날, 할머니는 돈가스 한 접시에 음료로 나온 사이다 한잔까지 쭉 비우신 뒤 말씀하셨습니다. 접시라두 먹겠다.” 저는 할머니의 그 말에 또 다시 눈물이 났습니다. 그까짓 돈가스가 얼마나 한다고 이제서야 사드리게 됐을까. 가슴이 아파서 고개도 들지 못하고 제가 먹던 접시를 할머니 앞에 내어 드렸습니다. '앞으로는 맛있는 것은 무엇이든 사 드리리라. 남들 먹는 거, 맛있다고 하는 거, 한번씩은 다 맛보여 드리리라. 좋은 옷도 입혀 드리고, 멋진 구경도 맘껏 시켜 드리리라.' 언젠가 할머니는 말씀하셨습니다. 보고 죽으먼 내가 소원이 없을 것인디.” 저는 할머니의 소원대로 좋은 사람을 만나 결혼을 했고, 다음 달이면 돌을 맞는 예쁜 딸아이도 낳았습니다.
이제 정말 할머니가 되셨습니다. 허리도 구부러지셨고, 검은머리가 한 가닥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설탕을 뿌려 주시지도 못합니다. 뜨거운 밥에 올려 먹던 할머니의 얼짠지가 그렇게 맛있었는데, 이제는 그때 그 맛을 내시지도 못합니다. 할머니를 생각하면 자꾸만 눈물이 납니다. 못하고 지지리 고생만 하시며 살아오신 할머니, 이제 할머니가 제 곁에 함께하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느낍니다. 언제일지 모를 그날까지 제가 할머니의 은혜를 다 갚을 수 있을까요? 좋겠습니다. 가난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조금 불편한 것일 뿐이라는 걸 가르쳐 주신 할머니! 이제 저는 할머니의 사랑과 고생을 모두 이해할 수 있을 만큼 철이 들었습니다.
-이글은 MBC라디오 여성시대에서-
※ 저는 위 글을 읽으며 많은 눈물을 흘렸습니다. 윗글 할머니의 삶이 불쌍해서가 아니라, 고신극기하시며 인고의 삶을 살다 돌아가신 제 어머님 생각이 간절했기 때문입니다. 제 어머님은 악랄하게 빼앗아 가던 일본강점기에 태어나셔서 끝없이 배고픈 보릿고개와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가지 않으려고 18세에 송씨 가문에 시집왔는데, 지지리 복도 없어 (결혼 생활 1년 6개월만에)여순 사건때 남편을 저승으로 보내고, 일평생을 수절하시며 오직 외 아들 하나인 저를 사랑과 정성과 희생으로 키워주신 분입니다. 철 없는 이 놈은 살아생전에 효는 커녕 불효만 했으니, 어머님 사진 꺼내놓고 이제와 업드려 참회의 눈물 흘리고 있답니다. 카페회원 울님들은 부모님 살아 계시어든 효 많이 하소서~~~
|
첫댓글 눈에서 매운 눈물이 흐릅니다. 부모닌 생각에 가슴이 미어집니다. 엉엉 소리내어 울고 싶은데 밤늦은 이시간에 남편이 걱정하고 놀랠까봐 맘놓고 울지도 못합니다. 제가 8살때 돌아가신 외할머니 생각이 납니다. 매일아침 학교앞까지 데려다 주시며. 그당시 1원짜리 호떡을 사주시던 정많은 외할머니가 이밤에 눈물나도록 보고싶고 생각납니다.
성희님 운 댓글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성희님도 정 많으신 외할머니를 겁고 행복이 늘 가득하시길
보고파도 볼 수 없고, 그리워하는 안타까움이 저와 같은 동병상련의 심정이군요.
건강하시고
할머니의 기억이라면 나는 6.25피난시절 외갓집으로가서뵌 우리 외 할머니 생각이 난다. 그러나 지금은 내자신이 일곱명의
손주들의 할머니가 되어있다 공교롭게도 모두 외손주다 . 장성해서 외국에 유학가있는 녀석도 있고 아직 초등학교도 안 들어간 놈도 있다 .하나 같이 귀엽고 이쁘다. 그런 상황이라면 나는 글쎄 어땠을까.정말 가슴이 미어지는듯 아프다. 사랑은 내리사랑이라고 손주는 더 이쁘고 더 사랑스러운거 같다. 할머니의 남은인생 건강하시고 행복하시기 바라는 마음입니다.
순모님 정성어린 댓글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일곱명의 손주를 두셨으니 다복하신 분이군요. 감축드리면서
늘 건승과 행복이 가득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