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생의 진짜 1등급
임준수 ㆍ전 중앙일보 편집국장 대리
나이가 들면서 내가 자랑스럽게 여기는 것 중의 하나는 시골에서 중고교를 나온 것이다. 대학에 다닐 때와 직장생활을 할 때는 무명의 시골학교 출신이라는 것에 열등의식을 느낀 적도 있으나 사회활동을 접은 뒤부터는 그 반대 방향으로 생각이 바뀌었다. 도회의 명문학교 출신들이 누릴 수 없는 즐거움--즉, 출세와 성공을 떠벌이지 않으며 소박하게 늙어가는 빨가숭이 옛 동무들을 만나서 허심탄회하게 담소하는 정겨움이 크기 때문이다.
소시적 밤 서리의 추억을 더듬어 아내와 함께 청양에 있는 한 농가의 밤 밭을 찾았다. 주운 밤 한 아름과 함께 선물로 받은 몇 꾸러미의 밤을 차에 싣고 의기양양하게 귀로에 오른 나는 중도에 있는 한 동창생의 집을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이미 해는 기울어 있었지만, 10여년 전 화재로 집을 잃고 어렵게 산다는 K친구에게 밤 한꾸러미를 선사하고 곧장 떠날 참이었다.
그러나 86-87세 노 부부는 우리 내외를 그냥 보내주지 않았다. 집안에 있는 먹을 것 모두를 꺼내놓는 접대에 그치지 않고 밤 길 운전을 하게 할 수 없다며 한사코 자기집에서 묵으라 한다. 일부러 먼 길을 찾아준 배려가 더 없이 고맙다며--. 그 요청과 바람이 너무 집요하고 간곡하여 생각지도 않게 가깝지도 않은 동문의 집에서 하룻밤을 보내게 되었다.
가산을 팔아 불탄 자리에 지었다는 새 집은 방 두 칸짜리 작은 양옥이었다. 정갈하게 치운 방에 이불도 푹신했지만 잠이 쉽게 오지 않았다. K를 홀대했던 학창시절의 잘못이 떠 올랐기 때문이다. 인구 1만명 안팎의 작은 읍내에서 하나밖에 없던 고교를 다니면서 뭐가 그리 잘났다고 고작 100명 뿐인 동급생간에 파벌을 만들어 계층 대결을 했다 싶으니 까마득한 소시적 일이지만 창피하고 부끄럽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다닌 중고교의 재학생간에는 보이지 않는 9개 계층이 있었다. 학업성적, 거주지(통학거리), 키 크기 등으로 나누어진 3개 그룹이 다시 상 중 하로 분류돼 서로 반목하거나 질시했다. 나는 중키에다 성적이 괜찮은 편이고 친 형님이 수학교사라는 든든한 '백' 덕분에 2-3 등급에 올라 있었으나 키가 작고 10km 먼길을 통학하는 깡촌(?) 출신에다가 성적도 시원치 않았던 K는 만년 9급에 머물러 그 설움이 만만치 않았다. 약간 거만해 보이는 그는 주먹깨나 쓰는 읍내의 부유 집안 출신들에게 알맞은 주먹다짐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온갖 과일과 과자 음료로 융숭한 대접을 받으며 K부부가 살아온 내력을 듣자하니 문뜩 학창시철의 등급이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앞섰다. 인생의 성패는 관 뚜껑을 덮은 뒤에야 결판난다는 옛말을 적용한다면 고무신을 신고 20리가 넘는 길을 걸어서 등교했고, 장가를 가서는 일곱 자녀를 성공적으로 키운 고무신족 K야 말로 일찍부터 구두족을 밀어내고 1등급 자리에 올랐어야 했다.
초가집 한 채와 논 네 마지기가 전 재산이었던 빈농의 아들 K에게로 시집온 부인이 들려준 2남 5녀를 키운 이야기는 가히 눈물겨운 스토리였다.
"맏며느리로 들어와 독립운동가인 시할아버지 내외와 시부모을 모시며 남편과 배다른 시동생 셋까지 돌보자니 고생이 막심했어요. 첫 아들 후 딸만 내리 다섯을 낳은 것이 죄스러워 마지막 시도로 낳은 아들이 서울대학을 나와 교수가 된 막내예요."
논 농사로는 어림도 없어 소와 닭 등 가축 사육으로 일곱 자녀의 학비를 댔다는 부인은 세 딸에게는 학사모를 못 씌워주었다며 못내 아쉬워했다. 나와 성씨가 같아 친근감을 더해주는 부인에게 '한국의 억척 어머니' 표상으로 평택임씨 족보에 올리겠다고 농담을 했더니 진담인줄 알고 손사래를 저으며 아들이 몇달 전 인하대학 정교수 발령을 받은 사실을 공지해달라고 주문했다.
과묵한 내친구 K는 말이 없다가 슬며시 작은 인쇄물 하나를 보여준다. 그가 다니는 노인복지관에서 기획한 자서전 쓰기의 결과물이었다. 읽어보니 아내에 대한 감사의 말이 여러 군데서 나온다. 임 여사의 말 인즉 자신에게 고맙다는 말을 해본 적이 한번도 없다고 하기에 "글로 쓴 이 말이 남편의 진심"이라고 설명했더니 싫지 않은 기색으로 환한 미소를 지었다.
이제는 내가 반성할 차례다. 학과 공부보다 교실 청소를 더 열심히 했던 K를 나와 동열에 두지 않고 간격을 두었던 학창시절의 죄업이 그 대상이다. 다음 동창모임에 나가면 K를 우리 동창중의 최고 인물로 추대할 것이다. 그리고 지금도 내 귓전에서 감도는8 그의 말을 전할 것이다.
"살아봉께 산다는 게 별것 아니여"
첫댓글 나도 2학년 때 천안고등학교에서 전학와서 따돌림을 받은 경험이 있다.
그때는 후회 많이햇지만 지금은 그때 그 친구들이 좋아.
임준수 친구야, 이런 글 자주 보내다오. 광천이 그립고 돛배가 그리우며 오서산에 오르고 싶다.
우리는 대한민국의 피끓는 호국대 학도호국대 아니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