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두거리에서
불쾌한 이웃과 함께 살기
서울대총동창신문 제498호(2019.09.15)
정승민 (인류89-95, 49세) 전 서울신문 기자
/ 칼럼니스트
‘역사학이 핵물리학보다 위험하다’는 지적이 실감나는 요즘이다. 과거사 문제로 내연하던 한일 간 분쟁과 대립은 경제와 안보까지 확대일로를 걷고 있다. ‘일제’를 사지 말고 일본에 가지 말자는 국민적 열기 또한 거세다. 서로가 제3위의 무역 상대국이고 인적 왕래가 1,000만명을 넘는 국가 관계가 이렇게까지 악화되는 것은 ‘공존’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일깨워준다. 나라 사이도 어렵지만 우리 사회 내부의 공생도 결코 쉽지 않다. 근자에 여론은 한 장관 후보자를 두고 두 쪽으로 쫙 쪼개졌다. 한편은 언론의 보도 태도와 야당의 의혹 제기가 ‘팩트’에 기반하지 않은 비이성적이고 반지성적인 선전 선동이라는 입장이다. 다른 편은 가족을 둘러싼 교육, 재산 문제 등이 도덕적 시비를 넘어 범죄 혐의까지 있다며 비리 수사가 불가피하다는 주장까지 내놓았다. 서로를 가짜 뉴스로 몰아붙이는 여론전은 인터넷과 스마트폰 보급 이후 일상적으로 되풀이되는 광경이다. 치열한 공방을 통해 사회적 공감대가 어느 정도 형성될 수 있다는 측면에서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표현이나 추론도 관용할 필요가 있다. 나와 남의 다름을 인정하고 다수설을 취하지 않는 소수파의 생각도 존중하는 것이 현대 문명사회의 진면목이니까 말이다.
일러스트 소여정(디자인 09-13) 동문
그렇다. 공존과 공생은 양보할 수 없는 공동체의 기본 원칙이다. 의견이 맞지 않는 상대를 낙인 찍고 부정하는 것은 민주주의에 대한 배신이다. 그럼에도 최근 장관 후보에 대한 찬반은 논쟁의 수준을 지나쳐 지난 권위주의 정권 시절의 가혹한 흑백 논리까지 소생시키면서 사회적 갈등과 분열만 증폭시킨 듯하다. 사실 어느 누구도 믿고 싶은 뉴스와 사실만 선별적으로 골라서 편견을 더욱 강화시키는 ‘확증 편향’에서 벗어나기는 쉽지 않다. 가치관이 다르고 관점이 정반대인 개인, 혹은 조직끼리 소통하는 역지사지(易地思之)는 고전의 덕목이지 현실에서는 구두선에 불과할 수 있다. 뚜렷한 이념 없이 호오의 감정이나 이해의 관계로 뭉친 집단은 정체성을 형성하고 과시하는 차원에서 다른 무리들을 억누르려고 한다. 반대로 같은 이상을 공유하고 공동의 철학을 집단적으로 관철하려는 그룹도 소수에 너그럽지 못하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이곳을 함께 살아가는 동시대인이다. 끈끈한 유대감과 특별한 소속감을 공유할 것까지는 없어도 경쟁자이면서 파트너인 사이들이다. 한데 피아(彼我)구분이 생존의 첫걸음이라는 신조에만 충실하다 보니 다투면서도 함께 지낸다는 발상은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다. 무쪽 자르듯 편 나누기를 좋아하는 지금 사회 분위기도 분열과 갈등을 증폭하는 데 일조한다. 그러다 보니 ‘자기 중심주의’, ‘우리 중심주의’만 횡행하고 공동체의 문제도 승패의 관점에서만 재단하려고 한다. 군사 작전이나 스포츠 경기처럼 다른 사람들의 ‘머리’와 ‘심장’을 점령하려고만 든다.
귀족 출신의 스페인 철학자 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가 ‘대중의 반역’을 쓴 것은, 지중해의 멋진 호텔과 식당에 궁상맞은 노동자들이 등장하면서 자신의 특권이 침해될 때였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아무리 불쾌한 이웃이라고 하더라도 이들을 배제한다면 자신은 인간이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문명인은 공동생활을 하려는 의지를 가진 사람이며, 타인을 고려하지 않을수록 야만적이기 때문이다. 야만의 시대일수록 서로 분리되어 적의를 가진 집단들이 공동체를 분해하려고 하기에 문명인으로서 ‘나’는 타인이라는 적이 권리와 생명, 재산을 위협해도 공생하고 공존할 결의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무리 마음이 안 맞아도 한 배를 타고 한 시대를 건너가는 이상, ‘종북좌빨’과 ‘수구꼴통’ 사이에서 어떻게든 타협점을 찾아내는 것이 우리 모두의 책무다. 얼마 전 세상을 떠난 고 이용마 MBC 기자의 마지막 메시지도 같은 맥락이다. ‘암 덩어리를 근치하지 못한다면 번지지 않게 다독이면서 줄이려 애쓰며 함께 살아가야 한다’는 전언은 곳곳에 악성종양인, 서로를 암 덩어리로 적대하는 우리에게 인간으로서 가져야 할 위엄과 품격을 다시금 일깨워준다.
*정 동문은 모교 졸업 후 서강대에서 북한 정치를 주제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서울신문 기자, 국회의장 연설비서관 등을 거쳐 해박한 역사 지식을 바탕으로 교양 팟캐스트 및 유튜브 채널 ‘일당백’을 운영 중이다. 저서로 ‘역사 권력 인간’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