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북아일랜드 벨파스트 시가지 벽화
호텔에서 앤 성당으로 가며 주택가의 벽면에서 기이한 형상의 벽화를 만났다. 청년이 비둘기를 들고 있는데 비둘기 가슴에 2개의 화살이 흉칙하게 박혀있다. 이런 벽화를 '뮬'이라고 한다. 즉 나는 전쟁준비가 되어 있다는 그림이다. 이런 종류의 벽화는 북아일랜드와 아일랜드 여정 곳곳에서 많이 보았다. 평범한 눈으로 보면 소슬한 그림이지만, 북아일랜드의 아픈 역사를 알면 저 그림이 무엇을 상징하는지 짐작이 간다. 과거에는 평화의 벽, 버려진 건물들과 정치성 짙은 벽화들, 차량제한구역, 보안검사와 무장경찰과 같은 무시무시한 현장을 벨파스트의 거리에서 흔히 보았단다. 지금은 옛날처럼 자주 만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저런 벽화를 만나면 서늘한 기운이 감돈다. 벨파스트는 무장군인 단체인 IRA의 테러 발생지역이다. 그 슬픈 역사는 여전히 종교분쟁에서 아일랜드가 두 도막으로 분리되면서 발생했다. 그것도 자국의 영향이 아닌 영국에 의해서 그렇게 갈라졌다고 하니 참으로 서글픈 일이다.
영국 종교역사와 그리고 아일랜드와의 관계를 살펴보면 저 벽화를 좀 더 자세히 이해할 수 있다. 17세기 중반 영국 내 신교인 청교도 혁명이 일어났다. 아일랜드 내에서도 영국의 종교 지배에 반대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영국 크롬웰 군대가 이를 제압했다. 1653년까지 아일랜드 전체는 영국의 식민지가 되었다. 아일랜드의 토지 소유가 영국인에게 넘어갔다. 가톨릭 교도들의 선거권과 피선거권도 박탈당했다. 아일랜드의 공직 진출도 배제시켰다. 재산소유 제한 등 영국의 아일랜드 탄압은 상당히 극심해졌다. 그 결과 아일랜드는 1801년 결국 영국에 합병되고, 1921년까지 영국령이 되었다. 19세기 영국의 탄압적 통치에 대한 아일랜드의 저항으로 가톨릭 교도들에 대한 제약의 일부는 완화되었다. 하지만 아일랜드 내 독립운동은 지속적으로 발생하였다.19세기 중반 아일랜드에 감자 대기근이 발생하면서 이러한 반영국 민족운동은 더욱 확산되었다. 반영국 운동의 핵심은 아일랜드공화국군(Ireland Republic Army; IRA)으로서 특히 IRA와 영국의 분쟁은 최근까지도 심각한 문제가 되어왔다. 1919년 아일랜드 수도인 더블린에서 제1회 아일랜드 국민의회를 개최하여 독립을 선언했는데, 영국이 독립은 인정하지 않자 전쟁으로 치달았다. 아일랜드 무장투쟁조직 IRA와 영국군은 치열하게 전투를 치렀으며, 드디어 1922년 아일랜드 국민의회와 영국은 조약을 맺게 되었다. 이 ‘영국-아일랜드 조약’으로 북부 얼스터 지방 6주는 영연방령으로 하되, 나머지 26개 주는 영국 자치령으로 하는 아일랜드 자유국이 성립하였다. 1949년 국가이름을 ‘아일랜드’로 개칭하였다. 영연방을 탈퇴함으로써 현재의 아일랜드공화국이 되었다. 그러나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했음에도 아일랜드 내에는 영국의 영향력이 미치는 신교도 지역 북아일랜드와 나머지 구교도들의 아일랜드의 마찰은 끊임없이 이어졌다. 이들의 대립은 영국과 아일랜드이자, 신교도와 구교도, 연방주의자와 민족주의자의 갈등이기도 하다. 특히 오랫동안 신교측 연방주의자들에 의한 구교측 민족주의자 차별과 억압이 갈등의 결정적인 원인이었다고 볼 수 있다. 1968년 런던-데리에서의 폭력사태로까지 이어졌고, 이 사태는 북아일랜드 분쟁의 본격적인 시작이었다.
런던-데리 폭력사태로 시작된 북아일랜드 분쟁은 내재되어 있던 북아일랜드 구교도들의 불만과 반영국 감정은 1972년 1월 30일 ‘피의 일요일(Bloody Sunday)'이라는 유혈 폭력사태로 터져 나왔다. 북아일랜드 신교계 얼스터 의용군(UVF)과 IRA의 무장투쟁은 격렬했다. 1972년 1년 동안의 테러로 인해 발생한 사망자는 468명에 이른다. 1980년대 들어서면서 영국은 아일랜드 정부와 분쟁을 해결하기 위한 협상에 적극성을 보였다. 이는 1981년 투옥된 IRA 죄수들이 정치범 처우 개선을 위한 단식투쟁을 벌이는 과정에서 10여 명의 죄수들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던 것이 원인이다. 즉, 이 사건으로 IRA는 국제적인 약자 이미지를, 또 영국은 탄압자의 이미지를 갖게 됨에 따라 영국 측이 협상을 서두르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 때 협상은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종결되었다. 1990년대는 북아일랜드 내 테러가 정점을 치닫게 되는 시기이자 양측의 평화를 위한 협의도 활발해지는 시기였다. 이 시기 IRA의 테러는 물론 신교도들의 테러도 정점을 치달았다. 신교도들의 테러로 희생된 사상자가 더 많아졌다.따라서 영국 정부는 신교도 군대인 얼스터 방위연합(UDA)도 IRA처럼 불법단체로 규정하기에 이른다. 그러던 중 1993년 북아일랜드의 아일랜드 귀속여부를 주민들의 뜻에 맡기는 한편 IRA의 무장투쟁 포기를 주요 내용으로 하는 ‘다우닝가 선언’이 발표되면서 북아일랜드 분쟁은 해결의 실마리를 찾는 듯 했다. 1994년 IRA가 휴전을 선언함으로써 분쟁해결의 가능성이 보이기도 했다. 또한 1995년 영국-아일랜드 양국 정부는 ‘북아일랜드 평화안’을 도출, 분쟁해결의 기본틀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영국 측의 ‘先 무장해제 後 협상개시’ 조건과 북아일랜드 내 신교도들의 평화회담에 대한 불신으로 평화협상은 무산되었다. 1996년 IRA는 테러를 재개했다. 이에 영국의 토니 블레어(Tony Blair) 수상은 평화회담 제의하여 1997년 7월 IRA는 다시 휴전을 선언하게 되었다. 이 평화협상은 같은 해 12월 북아일랜드 유혈사태로 결렬될 위기를 맞이했으나, 1998년 다자회담을 통한 북아일랜드 평화협정인 ‘굿프라이데이 협정(聖 금요일협정)’이 최종 타결됨으로써 북아일랜드 분쟁은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그리고 1999년 자치정부 구성을 통해 평화협정 합의안이 수용·이행됨에 따라 북아일랜드는 영국 정부로부터 기본 자치권을 이양 받았으나, 경찰과 사법 분야는 영국 정부의 관할로 남겨져 있어 분쟁은 완전히 해결되지 못하였다.
북아일랜드 분쟁의 주요행위자는 ① 북아일랜드 신교도 연합주의자들과 ② 북아일랜드 구교도 민족주의자들, ③ 영국 정부, ④ 아일랜드 정부이다. 연합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연합은 북아일랜드와 영국 정부의 연합이고, 민족주의자들이 원하는 것은 북아일랜드와 아일랜드 정부가 하나의 국가가 되는 것이다. 즉, 북아일랜드 분쟁은 영국과 아일랜드 간의 분쟁과 북아일랜드 내부 연합주의자(영국 편향)와 민족주의자(아일랜드 편향) 간의 분쟁이 복합적으로 얽혀있는 분쟁이다. 지난 30여 년에 걸친 IRA 무장투쟁의 과정에서 발생한 사망자는 3,700여 명에 이르며, 그 외에도 이들의 충돌로 희생된 사람들이 상당히 많다. 1999년 북아일랜드 자치정부가 출범했지만, IRA는 무기반납을 거부했고, 이듬해 2월 얼스터연합당은 자치정부에서 탈퇴했다. 이에 영국 정부는 북아일랜드 자치권을 박탈했다가 다시 돌려주는 등 북아일랜드 상황은 여전히 불안했다. 2001년 10월~2002년 4월까지 IRA가 무기폐기 및 무장해제를 발표하기도 했다. 하지만 신교측과의 마찰과 추가적 무장해제에 대한 명확성 결여로 북아일랜드 평화협정은 다시 난항을 겪게 되었다. 이어 2004년에 발생한 아일랜드 벨파스트의 노던 은행 강도사건에 IRA가 연루된 정황이 드러나자 양측의 관계는 악화되었다. 이후 2005년까지 관계의 진전이 없는 교착상태에 이르게 되었다. 그러나 상황은 2005년 IRA가 무장 투쟁을 완전히 포기하겠다고 선언함으로써 해빙기를 맞이하였다. 이는 2007년 5월 구교·신교 연합의 북아일랜드 공동자치 정부 출범과 2009년 6월 신교측의 얼스터의용군과 얼스터방위군의 완전한 무장해제로 이어졌다.
그렇다고 해서 북아일랜드 분쟁이 종결된 것은 아니다. 양측이 화해를 모색하고 있던 2009년에도 구교측 사회복지분야 종사자인 케빈 맥데이드 사망사건이 발생했다. 스코틀랜드 리그 축구경기 마지막 날에 경쟁관계에 있는 조직패들이 신교측과 구교측이 석여 사는 지역 헤이츠에서 아일랜드 국기를 게양한 사건으로 충돌했다. 그때 맥데이드가 신교측 폭도에 의해서 살해되었다. 맥데이드의 사망 사건은 영국정부의 많은 노력과 유럽연합의 막대한 재정지원에도 불구하고 북아일랜드 평화프로세스가 아직 파급되지 못하여 화해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상부구조인 정치권 협력 및 해외로부터의 지원과 하부구조인 서민들의 의식 사이에 아직 괴리가 존재한다. 이러한 괴리가 해소되고 평화프로세스가 완전히 정착되기까지는 다소 시간이 걸릴 것으로 전망된다. 이후로도 폭력적 충돌사건은 끊이지 않고 있다. 아직 잔존하는 IRA 분파들도 영국을 대상으로 테러를 감행하고 있다. 실례로 2010년과 2011년에는 IRA 분파조직들이 영국을 대상으로 폭발사건을 일으켰다. 뿐만 아니라 2011년 신교도 청년과 구교도 청년들 700여 명이 거리에서 충돌한 사건도 일어났다. 2012년 5월 영국 여왕이 북아일랜드를 방문했다. 2013년 2월 영국 정부의 ‘피의 일요일’ 사건으로 희생된 시위대 유가족 보상금 지급 결정, 동년 6월 벨파스트 평화담장 철거 발표 등 영국 측이 북아일랜드에 유화적 제스쳐를 보내고 있다. 그러나 북아일랜드 분쟁의 해결은 아직 완전하지 않다. 2013년 6월에는 흩어져있던 IRA 분파(4개중 3개)가 연합하여 ‘새 IRA'를 조직했을 뿐 아니라 동년 8월에는 북아일랜드 독립에 반대하는 폭력시위 및 IRA 추모행사 관련 폭력시위가 발생하는 등 북아일랜드 분쟁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뿌리 깊은 신, 구교도 간 갈등과 영국, 아일랜드 간의 갈등은 끊임없이 지속되고 있다. 분쟁 주요행위자들의 뿌리 깊은 반목과 오랜 분쟁으로 인해 심화된 상부 정치권력 구조와 하부 서민들 간의 양극화·괴리가 해소되기 전에는 평화 프로세스의 정착은 쉽지 않을 전망이다. 아울러 수차례 평화협정과 과격단체의 무장해제 선언이 있었음에도 이러한 평화적 언행이 번복되고 있는 상황도 북아일랜드 분쟁의 종결 실현성을 희박하게 하고 있다. 2014년에도 이러한 분위기는 계속 이어지는 추세다. 아직도 남아있는 IRA 분파 무장세력들은 탈레반으로부터 최신 무기기술을 도입해 테러의 강도를 높이는 실정이다. 한편 영국 지방선거에서는 극우성향의 영국독립당(UKIP)이 약진함으로써 영국과 북아일랜드, 북아일랜드 내 신, 구교도의 갈등이 고조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아직도 북아일랜드 무력 충돌 상황 발생은 배제할 수 없다. 이런 실정에 놓인 북아일랜드와 아일랜드와 영국의 관계를 알고나면 단순한 벽화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피맺힌 절규의 그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