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화상(自畵像)
서정주
애비는 종이었다. 밤이 깊어도 오지 않았다.
파뿌리같이 늙은 할머니와 대추꽃이 한 주 서 있을 뿐이었다.
어매는 달을 두고 풋살구가 꼭 하나만 먹고 싶다 하였으나...... 흙으로 바람벽 호롱불 밑에
손톱이 까만 애미의 아들
갑오년(甲午年)이라든가 바다에 나가서는 돌아오지 않는다 하는 외할아버지의 숱 많은
머리털과
그 커다란 눈이 나는 닮았다 한다.
스물새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할(八割)이 바람이다.
세상은 가도 가도 부끄럽기만 하더라
어떤 이는 내 눈에서 죄인(罪人)을 읽고 가고
어떤 이는 내 입에서 천치(天痴)를 읽고 가나
나는 아무 것도 뉘우치진 않을란다
찬란히 틔워 오는 어느 아침에도
이마 위에 얹힌 시(時)의 이슬에는
몇 방울의 피가 언제나 섞여 있어
볕이거나 그늘이거나 혓바닥 늘어뜨린
병든 수캐마냥 헐떡거리며 나는 왔다.
(『시건설』 7호, 1939. 10)
[어휘풀이]
※ 실제로 서정주의 아버지는 인촌 김성수 일가의 머슴살이를 했다.
-한 주 : 한 그루
-달을 두다 : 여자가 아이를 배다
-갑오년 :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난 해
[작품해설]
이 시는 미당이 스물 셋의 나이에서 자신이 살아온 지난 생애를 회고하는 내용이다. 그가 이 글에서 밝히고 있는 그의 가족사와 이력이 사실에 얼마나 부합되는가 하는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그러나 가능하다면 과장하거나 미화하려고 하는 것이 인지상정(人之常情)일 텐데, 도리어 그는 자상스럽지 못한, 부끄러워 감추려고 할 만한 자신의 과거를 솔직하게 밝히고 있어 읽는 이로 하여금 비상한 충격과 함께 신선한 감동을 자아낸다. 우리가 이 작품에서 얻어야 할 것은 (물론 무엇을 얻기 위해 시를 읽는 것은 아니지만) 한 인물의 생애가 지니고 있는 근원적 고통과 올랜 방황, 그리고 이로부터 나타나는 결연한 생명 의식이다.
1연은 ‘나’의 출생 배경을 할아버지 대(代)로부터 보여 주고 있다. 갑오농민전쟁에 나가 죽은 외할아버지, ‘파뿌리같이 늙은 할머니’와 주인을 위해 밤 깊도록 일만 하는 종인 ‘애비’, 그리고 동생을 임신한 몸이지만 ‘손톱이 까매’질 정도로 일을 하는 ‘어매’를 통하여 그의 집안은 유교적 봉건시대의 모순된 사회제도에 의해 고통 받으며 살아왔음을 알 수 있다. 또한 ‘흙으로 바람벽한’ 퇴락한 초가와 ‘대추꽃이 한 주 서 있을 뿐’인 그 집은 대대로 가난에 시달려 왔을 뿐 아니라, 동생을 임신한 ‘어매’가 ‘풋살구가 꼭 하나만 먹고 싶다 하였으나’, 그것 하나도 갖다 드릴 수 없을 정도로 궁색하기만 하다.
2연은 시상을 전환하여 화자의 지난 생애를 요약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종의 자실이라는 남들의 멸시, 그것으로 인한 끊임없는 방황과 부끄러움, 그리고 무지(無知) 등으로 힘겹게 살아온 자신의 지난 생애를 회상한 다음, 그는 괴로웠던 자신의 삶에 대해 후회하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삶의 시련과 고통이 오히려 그로 하여금 더욱 굳건한 생의 의지를 불러일으키는 힘이 된 것이다.
그리하여 그 강한 생의 의지로써 마침내 ‘몇 방울의 피가 언제나 섞여 있’는 진실 된 시가 됨을 3연에서 밝히는 한편, 자신의 고통스러운 삶에 대한 회상과 생의 강한 욕구를 ‘병든 수캐마냥 헐떡거리며 나는 왔다.’로 끝맺고 있다. 따라서 이 시는 이처럼 원색적으로 표현될 수밖에 없었던 화자의 개인적 생애와 더불어 험난했던 우리 근대사를 돌아보게 해 주는 계기가 되기에 충분할 것이다.
[작가소개]
서정주(徐廷柱)
미당(未堂), 궁발(窮髮)
1915년 전라북도 고창 출생
1929년 중앙고보 입학
1931년 고창고보에 편입학, 자퇴
193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벽」이 당선되어 등단
시 전문 동인지 『시인부락』 창간
1946년 조선청년문학가협회 결성, 시분과 위원장직을 맡음
1950년 종군 위문단 결성
1954년 예술원 종신 위원으로 추천되어 문학분과 위원장 역임
1955년 자유문학상 수상
1977년 한국문인협회 이사장
2000년 사망
시집 : 『화사집』(1941), 『귀촉도』(1948), 『흑호반』(1953), 『서정주시선』(1956), 『신라초』 (1961), 『동천』(1969), 『서정주문학전집』(1972), 『국화옆에서』(1975), 『질마재 신화』 (1975), 『떠돌이의 시』(1976), 『학이 울고간 날들의 시』(1982), 『미당서정주시선집』 (1983), 『안 잊히는 일들』(1983), 『노래』(1984), 『시와 시인의 말』(1986), 『이런 나
라를 아시나요』(1987), 『팔할이 바람』(1988), 『연꽃 만나고 가는 사람아』(1989), 『피
는 꽃』(1991), 『산시(山詩)』(1991), 『늙은 떠돌이의 시』(1993), 『민들레꽃』(1994), 『미당시전집』(1994), 『견우의 노래』(1997), 『80소년 떠돌이의 시』(1997),
첫댓글 우리 인생이 시 몇 줄이면 정리가 됩니다.
그기에 꾸밈과 가식이 함께 하기에는 우리 삶이 너무나 진지한 것이지요?
저도 늘 맑은 물에 송사리가 보이고 송사리의 뼈까지 보이는 맑은 시를 쓰고 싶어
전혀 어떤 것도 가미하지 않은 내면을 씁니다.
함께 공강하면 좋고
그러지 않을 지라도 저 혼자만의 독백이어서도 진실하면 되었습니다.^^
심미수 선생님 댓글 주심에
고맙습니다.
맑은 시, 많이 많이 쓰시기를 응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