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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를 잡을 수 없었던 하속들
요 7:45-53
45 아랫사람들이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로 오니 그들이 묻되 어찌하여 잡아오지 아니하였느냐
46 아랫사람들이 대답하되 그 사람이 말하는 것처럼 말한 사람은 이 때까지 없었나이다 하니
47 바리새인들이 대답하되 너희도 미혹되었느냐
48 당국자들이나 바리새인 중에 그를 믿는 자가 있느냐
49 율법을 알지 못하는 이 무리는 저주를 받은 자로다
50 그 중의 한 사람 곧 전에 예수께 왔던 니고데모가 그들에게 말하되
51 우리 율법은 사람의 말을 듣고 그 행한 것을 알기 전에 심판하느냐
52 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너도 갈릴리에서 왔느냐 찾아 보라 갈릴리에서는 선지자가 나지 못하느니라 하였더라
53 [다 각각 집으로 돌아가고
요 7:45-53 / [유대인 지도자들의 논란] 예수를 잡아 오라는 명령을 받고 갔던 성전 경비병들이 그냥 돌아오자 대제사장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은 `왜 그를 잡아 오지 않았느냐?' 하고 호통을 쳤다. 46) `그분의 말씀은 참으로 훌륭하였습니다. 우리는 한번도 그 같은 말씀을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하고 경비병들이 대답하자 47) 바리새파 사람들이 조롱하는 투로 말하였다. `그래서 너희들도 꾐에 빠져 버렸단 말이냐? 48) 우리 유대인 의회원들이나 바리새파 사람 중에는 그를 그리스도라고 믿는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다. 49) 그 어리석은 군중들이 무엇을 안단 말이냐? 율법을 알지 못하는 무리는 저주를 받을 것이다.' 50) 그때 전에 남몰래 예수를 찾아가 회견을 한 일이 있는 유대인 지도자 니고데모가 입을 열었다. 51) `사람을 심문해 보기도 전에 죄인으로 처단하는 것은 율법에 어긋나지 않소?' 52) 그러자 그들이 빈정거렸다. `당신도 그 무식한 갈릴리 사람과 한패요? 성경을 자세히 조사해 보시오. 갈릴리에서 예언자가 나온다는 말은 한군데도 없소.' 53) 그러고 나서 그들은 모두 집으로 돌아갔다.
아랫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뿐만아니라 니고데모도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복음의 밀알이 은밀하게 심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믿음이 사람들에게로 들어가기 시작했습니다.
너희도 미혹되었느냐(45-49) 아랫사람들은 로마인들이 아니라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관할 하에 있던 성전 경비일 가능성이 큽니다. 레위인 중 일부가 이 직무에 참여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비록 로마인들이 팔레스타인을 통치하고 있었지만, 그들은 유대 종교 지도자들에게 사소한 민사와 종교적인 사건들을 처리할 권한을 부여했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자기들의 아랫사람들을 지휘했고, 그 경비들에게 소란을 피우거나 의식법 중 어떤 것을 범하는 사람은 누구나 체포할 권력을 주었습니다. 이 아랫사람들은 예수님을 체포할 이유를 하나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증거를 찾으려고 예수님의 말에 귀를 기울이면서 그들은 그 분의 놀라운 말씀에 사로잡혔습니다. 체포하려던 자들이 영적으로 체포된 것입니다. 아랫사람들은 빈손으로 돌아왔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의 명령을 제대로 수행하지 않은 아랫사람들에게 무리와 마찬가지로 “너희도 미혹되었느냐”라고 물었습니다. 만일 예수님이 메시야라면 당국자들이나 바리새인 중에 적어도 몇 사람은 그분을 믿었을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무리가 그 분을 믿을지 모르나 무리는 ‘율법을 알지 못하는 자들’이며 ‘저주를 받은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무지하다고 가정하여 판단함으로, 종교 지도자들은 그들 자신을 판단하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에 대해 무지했으며, 하나님이 보내신 분을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너도 갈릴리에서 왔느냐(50-53) 그 자리에 전에 예수님께 왔던 니고데모란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동료 바리새인들에게 그들이 알고 있으며 또한 바르고 정당하게 행한다고 주장하는 율법을 고수할 수 있도록 노력했습니다. 신명기 1장 16절에 따르면 판결을 내리기 전에 고소당한 사람의 말을 들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니고데모가 이렇게 나선 것은 그가 은밀하게 제자가 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12:42). 하지만 바리새인들은 자기 동료 중 한 사람의 말조차도 들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니고데모를 조롱하듯이 말했습니다. “너도 갈릴리에서 왔느냐 찾아 보라 갈릴리에서는 선지자가 나지 못하였느니라” 하지만 이들의 주장은 틀렸습니다. 요나(왕하 14:25)와 엘리야(왕상 17:1)는 모두 갈릴리 출신이었기 때문입니다. 율법 교사였던 바리새인들이 정말 성경을 제대로 알고 있는지 의구심마저 들게 됩니다. 무슨 말을 해도 어떤 증거를 갖다 대어도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이미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했기 때문에 아무것도 소용없었습니다. 교만 때문에 그들은 합리적으로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옳은 것인지 생각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적용: 아랫사람들처럼, 니고데모처럼 예수님을 믿기 시작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분들의 간증을 들어 봅시다. 또한 믿어야 할 사람들을 위해 중보하며 기도합시다.
그리스도인들이 항상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할 일은 어떤 경우도 우리의 판단 기준은 자신의 경험, 지식, 많은 정보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믿는 우리는 하나님 말씀만이 우리의 판단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 설 교 >
말씀을 듣는 사람들
이규왕 목사
인간들이 사는 곳에는 다양한 종교가 있으나, 하나는 인간이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그에 상응하는 선을 행해야 할 것을 요구하는 적선종교와 또 다른 하나는 인간의 행위로는 구원을 얻을 수 없고 다만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하는 은혜의 종교입니다.
물론 우리가 믿는 기독교는 우리의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이 행하신 선한 일을 믿음으로 값없이 구원을 얻는 은혜의 종교입니다. 그러나 그 말은 하나님의 은혜가 값이 싸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세상에 그 무엇보다 고귀하지만 우리의 행위로는 그 은혜를 얻을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값없이 거저 주시지 않고서는 우리가 그 은혜를 받을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그 같이 고귀한 하나님의 은혜를 우리의 것이 되게 할 수 있을까요?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그 자녀인 우리를 위해 값없이 주시는 은혜의 말씀을 믿음으로 귀기울여 듣고, 믿고, 순종하므로 재충전을 받고 새 힘을 얻어 기쁨과 감사가 넘치는 믿음의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롬 10: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그것은 마치 부모가 자식을 위해 음식을 준비하는 일에 자식이 아무 것도 한 것이 없지만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맛있는 음식을 값없이 준비하여 주신 것을 자식이 구경만 하는 것이 아니라 수저를 들고 맛있게 먹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의 신앙 생활을 돌이켜 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얼마나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습니까? 만일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신앙 생활을 한다면 과연 얼마나 신앙을 잘 유지 할 수 있을 것인가 의문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우리는 어떤 자세로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할 것인지 오늘 성경 말씀을 통해서 깨닫는 시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1. 본질을 깨달은 사람들-참으로 그 선지자라
하나님의 말씀은 한 그루의 사과나무로 비유할 수 있습니다. 사과나무는 줄기와 가지와 잎과 꽃이 있지만 그 모든 것들은 열매를 잘 익게 하기 위해 존재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사과나무의 줄기나 가지나 잎은 아무런 존재가 의미가 없는 것이 아니라 빨갛게 잘 익은 사과 열매와 더불어 그 존재의 이유와 의미가 충분히 있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관점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보게되면 성경에 나오는 많은 인물들과 여러 장소에서 일어난 갖가지 사건들과 역사는 그 당대에 나름대로 교훈과 의미를 주지만 그것이 만일 그리스도와 무관한 것이라면 단지 도덕이나 윤리적인 교훈에 그치고 말게 됩니다.
그러나 그 같은 사건과 말씀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것일 때 그 것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되는 것이며, 그 말씀을 읽고 듣는 자들에게 그리스도를 만나게 해주며 생명과 변화를 가져다주는 능력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의 본질인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추수감사절인 초막절에 예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셔서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에 대한 설교 말씀을 하셨을 때 그 말씀을 많은 사람들이 들었습니다.
물론 똑같은 장소에서 여러 사람들이 똑같은 설교를 들었다면 그 느낌이나 깨달음이 똑같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상반된 두 가지 반응을 보였습니다.
그 중에 한 무리는 마치 목말라 죽어가던 사람이 시원한 냉수를 실컷 들이키고 나서 혼미하던 정신이 들고 눈이 열려 사람을 알아보는 것처럼, 예수님으로부터 생수의 말씀을 들은 사람들 가운데 영안이 열린 사람들이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그 실체를 알아보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예수님이 성경을 잘 가르치시는 것을 보고 랍비 곧 선생님이라고 불렀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의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요 1:38) 예수께서 돌이켜 그 좇는 것을 보시고 물어 가라사대 무엇을 구하느냐 가로되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 하니 (랍비는 번역하면 선생이라) (요 9:2) 제자들이 물어 가로되 랍비여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오니이까 자기오니이까 그 부모오니이까
그러나 예수님의 생수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 가운데 오늘 성경 말씀에 보면 예수님을 랍비로만 생각하는 사람들과 예수님을 다르게 보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요 7:40) 이 말씀을 들은 무리 중에서 혹은 이가 참으로 그 선지자라 하며 (요 7:41) 혹은 그리스도라 하며
여기서 예수님을 가리켜 ‘참으로 그 선지자’라고 하는 말은 구약 시대의 엘리사나 엘리야와 같은 선지자들 가운데 한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 어떤 선지자와 다른 특별한 선지자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또한 예수님을 가리켜 그리스도라고 한 것은 예수님이 바로 구약에 예언한 메시아 곧 구세주라는 말로 그 선지자라는 말과 같은 맥락의 고백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면 창세기를 기록한 모세를 비롯하여 맨 마지막 성경 말라기를 기록한 말라기 선지자까지 매 시대마다 하나님의 쓰시던 선지자들이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모세는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여 홍해를 건너 광야를 지나 하나님이 약속하신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직전 요단강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한 위대한 선지자였습니다.
그와 같은 모세는 자신의 죽음을 내다보며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될 새로운 세대를 향해 하나님의 말씀을 다시 정리하여 가르쳤는데 그것이 바로 신명기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그 모세를 통해서 언제가 먼 후일에 선지자 하나가 태어나 모세처럼 백성들을 구원해 낼 것이라고 예언을 하였습니다.
(신 18:15)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중 네 형제 중에서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너를 위하여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를 들을지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들이 가장 존경하는 모세의 그와 같은 예언의 말씀대로 모세와 같이 자기들을 고난 중에서 건져 낼 그 선지자를 기다려 왔는데 예수님이 바로 그 선지자라는 것입니다.
구약의 맨 마지막 책인 말라기를 기록한 말라기 선지자 이후 오랜 세월동안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보내주시지 않았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선지자에 대해서 목마르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 좋은 예가 바로 사람들이 예수님보다 여섯 달 먼저 태어나 세례 요한에게 던진 질문도 바로 모세가 예언한 그 선지자가 바로 당신이냐고 물은 것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요 1:25) 또 물어 가로되 네가 만일 그리스도도 아니요 엘리야도 아니요 그 선지자도 아닐진대 어찌하여 세례를 주느냐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가리켜 모세가 예언한 특별한 그 선지자로 알아 본 사람은 그렇게 많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제자가 된 빌립이 친구 나다나엘에게 찾아가서 예수님을 소개할 때 예수님이 바로 모세가 예언 그 선지자라고 하였으며, 수가 성 우물가에서 만난 남편이 다섯이나 되었던 여인이 예수님의 생수의 설교를 들은 여인의 고백이었습니다.
(요 1:45)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요 4:19) 여자가 가로되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성경에서 이름을 알 수 없으나 예수님을 가리켜 그 선지자 또는 그리스도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의 설교를 똑같이 들었지만 예수님의 말씀 중에서 성경의 핵심인 본질을 깨달은 사람들만의 고백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해야 하고, 열심히 성경을 읽어야 하고, 지속적으로 묵상하고 연구해야 하지 않곳 성경 말씀을 이해하고 깊은 진리를 깨달을 수 없습니다.
그러한 가운데 우리기 주목해야 할 것은 그것이 다가 아니라 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말씀의 본질을 얼마나 깊이 깨닫고 그 말씀을 통해서 그 선지자요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만나는가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의 본질을 깨달을 수 있을까요? 그것이 바로 말씀과 더불어 역사 하시는 성령의 은혜입니다. 그렇게 될 때 비로소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말씀 안에서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시 119:130) 주의 말씀을 열므로 우둔한 자에게 비취어 깨닫게 하나이다 (눅 24:45) 이에 저희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2. 피상적으로 이해하는 사람들-어찌 갈릴리에서 나오겠느냐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들 가운데 어떤 사람이 예수님이 바로 구약 성경에 예언된 그 선지자요, 그리스도라고 하였을 때 그 말에 다 공감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이 성경에 예언된 선지자요, 그리스도라는 말에 대해서 정면적으로 반박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과연 그 이유가 무엇이며 똑같은 예수님을 놓고 상반된 의견을 말하는 것일까요?
(요 7:41) 혹은 그리스도라 하며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가 어찌 갈릴리에서 나오겠느냐 (요 7:42) 성경에 이르기를 그리스도는 다윗의 씨로 또 다윗의 살던 촌 베들레헴에서 나오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며
그것은 예수님을 가리켜 그 선지자요, 그리스도라고 긍정적인 반응을 보인 사람들이 모세가 예언한 성경 말씀을 근거로 그렇게 말하였다면, 그것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사람들 역시 성경을 근거로 예수님이 메시아가 될 수 없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것은 구약에 예언된 그리스도는 다윗의 후손에서 태어나는 왕손이며, 다윗의 고향인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실 것이라고 성경에 예언되어있는데 자기들이 알기로 예수님은 나사렛 동네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그와 같은 사람이 어떻게 자기들이 고대하는 메시아가 될 수 있는가 하는 반박이었습니다.
이 같은 주장은 앞서 예수님이 갈릴리 사람이요, 학벌이 없는 사람이라고 외형만을 가지고 예수님을 불신하던 사람들보다 훨씬 더 설득력있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그들은 누구보다 성경을 많이 읽고, 배우고, 연구하여 남을 가르칠 정도로 성경에 능통한 사람들로 그들의 주장처럼 하나님은 선지자들의 예언을 통하여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으로 베들레헴에서 태어날 것이라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미 5:2)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
이처럼 성경을 근거로 하여 반박을 할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승복을 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세상에 성경보다 더 이상 권위 있는 말씀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처럼 성경을 문자적으로 잘 안다고 해서 바른 신앙이라고만 할 수 없음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그 좋은 예가 예수님이 태어나실 때 동방박사들의 사건입니다. 동방박사들이 하늘에 별만을 보고 만왕의 왕이신 메시아의 탄생을 축하하기 위해 예루살렘의 헤롯 궁전까지 찾아왔으나 아기 예수를 만나지 못하였을 때 메시아가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실 것이라는 예언을 확실하게 알고 있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을 통해 헤롯왕도 메시아가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실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헤롯왕이 한 일은 베들레헴과 그 근방에서 태어난 두 살 미만의 사내아이를 다 죽이는 일을 하였습니다.
(마 2:16) 이에 헤롯이 박사들에게 속은 줄을 알고 심히 노하여 사람을 보내어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 안에 있는 사내 아이를 박사들에게 자세히 알아본 그 때를 표준하여 두 살부터 그 아래로 다 죽이니
오늘 성경에서 예수님이 그리스도가 될 수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바로 그들과 같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성경을 알되 그 것을 구실로 예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이 아니라 오히려 예수님을 배척하는 일에 사용을 하였습니다.
만일 그들이 성경을 몰랐었다면 그러한 일은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히려 성경을 알았기 때문에 예수님의 탄생을 훼방하는 일을 하였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이 왜 똑같은 성경을 가지고 어떤 사람은 예수님이 메시아라고 하고, 또 어떤 사람은 심지어 이단자를 가리켜 메시아라고 유혹하는 말에 현혹되기도 하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잘못된 선입견을 가지고 성경을 피상적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분명이 일점일획도 틀림이 없으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때로는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신 예수님을 보이지 않고 나사렛에서 자라나신 예수님만 보일 때가 있는 것입니다. 그럴 때는 성경을 좀더 깊이 살펴볼 때 예수님은 미가 선지의 예언대로 베들레헴 마구간의 구유 위에서 태어나신 분임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할 때 주일을 지키는 것은 성경적이고 아니며, 오늘날도 십계명에 기록된 대로 안식일을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토요일에 지켜는 것이 성경적이라는 주장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긍정적으로 받아드린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하시는 일들을 보고 만일 예수님이 그 선지자요, 메시아이심을 확신하게 된 것처럼, 비판적인 사람들이 갈릴리 출신 예수님이 과연 어디서 출생하셨는지를 마리아나 요셉에게 물어만 보았어도 그들의 생각은 바뀌었을 것입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이 성경을 깊이 보지 못하고 수박 겉 핥기 식으로 피상적으로 성경을 알고, 잘못된 선입감을 가지고 마음 문을 열지 않기 때문입니다.
3. 말씀을 품고 살아가는 사람- 전에 예수께 왔던 니고데모
한 분 예수님을 놓고 ‘예수가 그리스도다, 그리스도가 아니다’ 하는 상반된 주장이 팽팽하게 맞서 논쟁을 하고 있을 때 예수님을 시기하여 잡아죽이려는 당국자들이 하수인들을 보내어 예수님의 약점을 캐내어 잡아드릴 것을 명령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하수인들이 예수님께 나아와 말씀을 듣고, 하시는 일들을 보는 중에 오히려 자기들이 지금까지 예수님에게 가지고 있었던 선입감이 얼마나 잘못된 편견이었는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까닭없이 시기하는 당국자들이 시키는 대로 예수님을 잡으려고 성전에 갔다가 예수님으로부터 생수의 말씀을 듣고서 오히려 감동을 받고 예수님을 잡지 못한채 빈손으로 돌아와서 자기들이 본 예수님에 대해서 사실대로 말하였습니다.
(요 7:45) 하속들이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로 오니 저희가 묻되 어찌하여 잡아오지 아니하였느냐(요 7:46) 하속들이 대답하되 그 사람의 말하는 것처럼 말한 사람은 이 때까지 없었나이다 하니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라고 해서 예수님의 말씀을 다 깨닫고 은혜를 받은 것이 아닙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의 부르심을 직접 받은 열 두 제자로 누구보다 예수님의 말씀을 많이 들어온 사람이었습니다.
그에 비해 당국자들의 하속들은 예수님의 설교를 한 두 번 듣되 문제 의식을 가지고 비판적인 시각으로 들은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둘 중에 누가 더 예수님의 말씀을 잘 깨닫고, 순수하게 받아드리고, 은혜를 받아야 할 사람들입니까?
만일 가룟 유다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아 변화되었다면 결코 예수님을 배반하여 원수들에세 고작 은 삼십을 받고 팔아먹는 배은 망덕한 일은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무리 많이, 아무리 오래 예수님과 더불어 지내면서 말씀을 듣고, 하시는 일을 목격했으나 마지막까지 은혜를 받지 못하고 끝내는 예수님을 배반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오늘 성경에서 예수님을 체포하려고 갔던 하수인들은 고작 예수님의 말씀을 한 두 번 듣고서도 은혜를 받고 나니 누가 옳고 그른지를 알게 되었고, 아무 죄도 없으신 예수님을 무고히 잡아 갈 수가 없었습니다.
물론 자기들의 진급이나 포상을 위해 예수님을 모함하는 말을 할 수도 있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난 후 그들의 양심이 그것을 허락지 않았기 때문에 본대로, 들은 대로, 느낀 대로 정직하게 대답을 한 것입니다.
(요 7:46) 하속들이 대답하되 그 사람의 말하는 것처럼 말한 사람은 이 때까지 없었나이다 하니
물론 그렇게 말하면 자기들의 주인을 화나게 하는 것이며 결과적으로 자기들에게 불이익이 된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면서도 그들은 거짓말을 하거나, 숨기려고 하지 않고 사실대로 말하였습니다. 얼마나 용기 있는 사람들입니까?
오늘 우리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이유가 어디에 있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정직하며, 양심적이고, 용기가 있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보다 더 많이 배우고, 더 높은 지위에 있는 당국자들은 누가 더 옳고 그른 말을 하는가 아니라 오로지 내 편인가 아닌가에만 몰두하여 편가르기에 급급하였습니다.
그들은 오로지 예수님이 하시는 일은 하나부터 열까지 다 잘못된 것이며 반 율법적인 것으로 저주를 받아야 한다고 전제를 하고 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의 잘못된 선입감과 시기심과 질투심은 그들의 판단력과 양심을 흐리고 만들었으며 오로지 증오심만 가득한 사람들이 되고 말았습니다.
(요 7:47) 바리새인들이 대답하되 너희도 미혹되었느냐 (요 7:48) 당국자들이나 바리새인 중에 그를 믿는 이가 있느냐 (요 7:49) 율법을 알지 못하는 이 무리는 저주를 받은 자로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이나 당국자들이 모두 다 그와 같은 사람들만은 아니었습니다. 그들과 함께 살면서도 그들과 다른 생각과 가치관을 가지고 예수님의 달리 생각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가 바로 요한복음 3장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가서 예수님께 신앙 상담을 한 적이 있는 니고데모라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제자들과 달리 사회적인 높은 지위와 부와 권세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을 믿지 않을지라도 아쉬울 것이 하나도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같은 니고데모가 지금 예수님을 까닭없이 비방하고 모함하는 일당들과 동료가 되어 함께 살아가고 있습니다. 대다수의 동료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부정적이고 비판적이기 때문에 자기가 예수님을 긍정적으로 생각한다고 할지라도 그 분위기를 맞추기 위해서는 마음에 없는 말을 하거나 아니면 그들의 예수님에 대해서 어떤 악평을 할지라도 침묵하고 잠잠히 있기만 하면 손해 볼 것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당국자들이 율법을 빙자하여 예수님을 정죄하고 비방하고 저주하는 말을 할 때 그들의 잘못된 점을 지적하면서 예수님을 변호하는 말을 하였습니다.
(요 7:50) 그 중에 한 사람 곧 전에 예수께 왔던 니고데모가 저희에게 말하되 (요 7:51) 우리 율법은 사람의 말을 듣고 그 행한 것을 알기 전에 판결하느냐
니고데모의 그같은 말은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말이 아닙니다. 이미 그 때 당국자들은 더 이상 예수님에게 민심이 쏠리지 않게 하기 위해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으면 그 들의 공동체에 내쫓을 것을 결의한 바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으려고 해도 드러내 놓고 말할 수 없었고,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표현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요 12:42) 그러나 관원 중에도 저를 믿는 자가 많되 바리새인들을 인하여 드러나게 말하지 못하니 이는 출회를 당할까 두려워함이라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변호하자 그 말을 들은 당국자들은 예상한대로 니고데모를 매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요 7:52) 저희가 대답하여 가로되 너도 갈릴리에서 왔느냐 상고하여 보라 갈릴리에서는 선지자가 나지 못하느니라 하였더라
그렇다면 니고데모는 왜 그와 같은 분위기를 잘 알면서 사람들이 까닭없이 예수님을 비난하는 현장에서 그들과 야합하거나, 침묵하지 않고 오히려 예수님을 변호하는 말을 하였을까요?
그것은 단 한번 예수님을 만나 신앙 상담을 하였을 때 예수님으로부터 칭찬대신 비난과 책망에 가까운 말씀을 들었으면서도 예수님의 말씀이 귀나 머리가 아니라 가슴 속 깊이 영혼에 파고들었기 때문입니다.
(요 3:10)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일을 알지 못하느냐 (요 3:11)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우리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거하노라 그러나 너희가 우리 증거를 받지 아니하는도다 (요 3:12)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
그렇습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이 자기의 겉모습만 보시고 높여주시고, 칭찬하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예수님께서 책망 조로 자기를 깨우쳐 주신 그 말씀들을 가슴 깊이 담고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결 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개인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읽으며, 예배시간마다 설교 말씀을 듣고 있으며, 제자훈련과 같은 성경공부 프로그램을 통해서 성경을 배우기도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말씀을 들을 때에 우리의 마음속에 어떤 반응이 일어나고 있습니까?
과연 우리는 성경의 본질, 교회의 본질, 신앙의 본질을 얼마나 잘 깨닫고 있습니까? 행여나 바리새인들처럼 누구보다 성경을 잘 알고, 설교를 많이 들었지만 오히려 그것이 나를 교만하게 하고, 비판적인 사람으로 만들어가고 있지 않습니까?
한 태양 아래 낮과 밤이 있고, 사막과 호수가 있으며, 한 밭에 알곡과 가라지가 함께 자라고 있는 것처럼 예나 지금이나 부정적으로 비판하고 거부하는 사람들과 긍정적인 신앙의 사람들이 둘 다 있습니다. 문제는 나는 어느 쪽인가 하는 것입니다.
예화: 하나님의 말씀은 마치 열대 과일 중에서 왕이라고 하는 두리안(DURIAN)으로 비유할 수 있습니다. 두리안은 그 유명세와 달리 겉모양이 마치 도깨비 방망이처럼 울툭불툭하게 생기고 거북선 등껍질처럼 뽀죽한 돌기로 뒤덥혀 있어서 아무나 그 껍질을 벗길 수 없기 때문에 반드시 과일가계 원주민 까주어야만 먹을 수 있습니다. 화장실 냄새가 나기 때문에 호텔 반입이 금지된 과일임에도 불구하고 옛날 처녀들이 시집을 가기를 원하는 총각은 두리안을 실컷 먹여 줄 수 있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는 말이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남아 사람들이 두리안을 과일의 제왕으로 부르는 것은 그 껍질을 벗기고 처음에는 역겨운 냄새가 나지만 억지라도 먹고, 또 먹다보면 나중에는 중독이 되어서 안 먹고는 못 배길 정도로 맛있는 과일로 평이 나있는 과일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도 그와 마찬가지입니다. 처음부터 깨달아지고, 감동이 되고, 믿어지는 말씀이라면 교회에 처음 나온 사람들이 모두 믿었을 것이고 교회마다 사람들로 가득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처음에는 잘 이해가 되지 않고 때로는 거부감이 들 때도 있지만, 인내심을 가지고 겸손한 마음과 진리를 사모하는 마음으로 말씀을 읽고, 설교를 듣고, 그것을 묵상하고, 깨달은 말씀을 마음에 품고, 신앙 양심을 속이지 말고 용감하고 정직하게 니고데모처럼 살아가는 사람은 세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만이 구세주이시며, 예수님보다 더 귀한 분도, 더 좋은 것도 없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벧후 1:19) 또 우리에게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 어두운 데 비취는 등불과 같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너희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가하니라 (벧후 1:20) 먼저 알 것은 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무법자들 - 율법을 알지 못하는 무지렁이들
이병일 목사
로마신화에서 정의의 여신인 유스티치아는 한 손에는 저울을 들고 다른 한 손에는 칼을 들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집니다. 죄의 무게를 정확하게 달아서 칼로써 응징하는 것이 정의임을 암시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죠. 유스티치아는 두 눈을 가린 모습을 하고 있는데, 아마도 눈앞에 놓인 상황에 따라서 마음이 흐려져 잘못된 판단을 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이겠죠.
그러나 눈을 가린 모습은 법과 정의가 왜곡된 현실 속에서 풍자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왼쪽 눈만을 가린 유스티치아는 법의 편파적인 적용을 풍자하고, 눈을 감은 유스티치아는 눈이 멀어서 현실적 상황을 전혀 볼 수 없는 모습으로 등장하기도 합니다. 실제로 현실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정의(유스티치아)는 사람들의 처지를 살피지 않고 기계처럼 칼을 휘두르게 됩니다. 결국 칼을 쥐고 있는 강자에 의해서 법은 언제든지 악용될 수 있고, 정의는 왜곡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법이 밥을 보장해 주지 않고 있는 밥그릇마저 빼앗은 세상이라면, 정의가 사람으로서의 권리와 생명을 누려야할 권리를 지켜주지 못하는 세상이라면, 그 법과 정의는 오히려 무지렁이 백성들을 억압하는 칼이 되어 왔습니다. 지난 주중에 우리는 비정규법의 미미한 보호조차도 무력화시키고 악용하고 있는 이랜드 자본을 비호하면서 비정규법의 악용을 합리화시키는 공권력의 횡포를 보았습니다. 최소한의 생존권을 지키기 위한 농성장에 경찰을 투입해서 강제 해산하고 노조 지도부를 강제연행한 것은 비정규법이 비정규직을 보호하기 위한 법이 아님을 단적으로 보여준 사례입니다.
기독교적 도덕경영을 표방하는 이랜드그룹은 노사문제에 대하여 강경한 자세를 취해왔습니다. 기업 인수합병(M&A)을 통해서 뉴코아와 까르푸(홈에버)를 인수한 이랜드는 뉴코아에서 비정규직 계산원 350명을 용역직원으로 전환하였고, 홈에버에서는 직무급제 도입과 계약해지 등을 강행했습니다. 게다가 그동안 비정규 노동자를 대상으로 ‘0개월 계약’ ‘백지계약서’ 등을 강요하였습니다.
엄연히 법을 어기고 있는 기업들의 행태에 대하여 정부는 방관하거나 용인해왔습니다. 게다가 정부는 노사의 자율교섭을 중재하기는커녕 이미 경찰을 투입해서 농성장을 고립시키고 일방적으로 사측의 입장만을 대변하면서 공권력을 집행하였습니다. 노동부는 노사교섭 때마다 회사 쪽과 먼저 노조가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든 중재안을 마련해 놓고, “노조가 받아들일 것”이라는 식의 언론플레이를 했습니다.
이랜드 비정규 노동자들의 저항은 ‘보호’라는 명목으로 숨겨진 비정규법의 속성을 낱낱이 드러내줍니다. 성질 나쁜 개별 자본가의 고집과 갈 곳 없는 비정규직 여성노동자들이 오기를 놓고 벌이는 싸움이 아닙니다. 자본과 노무현 정부는 비정규법의 정착을 빨리 마무리 하려고 합니다. 비정규법의 시행과 정착은 자본의 노동유연화 요구를 관철시키는 결정점이자, 동시에 한미FTA를 공모한 신자유주의지배연합의 안정된 정치적 재편을 보장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회의 갈등을 보면서 합법과 불법에 대해서 심각하게 고민하게 됩니다. 무엇이 합법적인 것이고, 무엇이 불법적인 것이냐? 합법과 불법의 차이는 무엇인가? 정의를 위한 공정한 법이라면, 누구에게나 정당하게 적용되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지금까지 역사 속에서 그런 적은 거의 없습니다.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행위자의 위치에 따라서 법의 적용은 천차만별입니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는 초본발급은 불법이라고 하면서 자진출두한 사람을 체포하고, 위장전입은 합법이라고 생각하는 듯합니다. 총리가 되려는 사람에게 위장전입은 중대한 결격사유가 되고, 대통령이 되려는 사람에게 위장전입을 절대 결격사유가 될 수 없다고 합니다. 대통령이 되려는 사람에게는 법정에서 위증이나 증인도피는 절대 결격사유가 될 수 없다고 합니다. 도덕이나 윤리의 잣대가 정치가에게나 자본가에게는 적용되어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유능한(?) 대통령이지 성인군자가 아니라’고 떠들어 댑니다.
오늘 본문(요한 7:40-53)을 봅시다. 예루살렘에 있던 무리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선포)에 대하여 의견이 분분하였습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을 예언자나 그리스도라고 하고, 어떤 사람들은 그런 의견에 대해서 반대 입장에 있었습니다. 대제사장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이 군인들을 보내서 예수님을 잡아오라고 했는데, 군인들이 그냥 돌아옵니다. 그러자 바리새파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는 사람들에 대하여 “율법을 알지 못하는 무지렁이들은 저주받은 사람들이다.”라고 폭언을 합니다. 이때에 니고데모가 오히려 그들의 불법적인 행동을 지적합니다. “우리의 율법으로는, 먼저 그 사람의 말을 들어보거나, 또 그가 하는 일을 알아보거나, 하지 않고서는 그를 심판하지 않는 것이 아니오?”
이 이야기에서 우리는 불법과 합법 사이에 있는 미묘한 현실적 관계를 엿볼 수 있습니다. 자기들 마음대로, 자기들 편한대로, 자기들의 입맛에 맞게, 자기들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법을 무시하는 사람들이 자기들의 뜻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을 무지렁이로 취급하면서 저주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나 앞에서 말씀드린 비정규 노동자들의 파업에서나, 대선 후보자들의 행적에서 보듯이 불법을 행하는 사람들이 누구인지는 분명합니다. 그런데 현실적인 권력에 따라서 불법과 합법의 관계는 뒤틀려 있습니다.
거기에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이 바로 유대인 최고 의회인 산헤드린의 의원인 니고데모라는 사람입니다. 니고데모의 말은 예수님을 지명수배하고 체포하려는 것은 불법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물론 복음서는 예수님의 체포와 재판과 십자가 처형의 모든 과정이 불법적이었음을 증언합니다. 즉 예수님은 당시에 법을 주무르는 권력자들에 의해서 사법살인을 당한 것입니다. <20051211주일예배 사법살인 당한 예수와 인권(마가 14:53-65)> 복음서에서 예수님의 체포와 재판과정에 대해서 자세하게 설명하는 것은 당시의 율법과 산헤드린 재판에 관한 법에도 그 과정이 불법적이었음을 증언하기 위한 것입니다.
니고데모의 모습에서 우리는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지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특히 어쩔 수 없이 예수님의 뜻과는 거리가 먼 자본주의적인 삶을 하고 있으면서 자본주의 사회에서 어떻게 예수님을 따를지를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니고데모의 삶은 한 가지 길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니고데모는 복음서 중에서 요한복음에만 세 번 등장합니다<3:1-21; 7:50-53; 19:38-42>. 요한복음 전체에 걸친 니고데모의 모습은 예수님의 진정한 제자가 되는 길과 그 삶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3장에서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만나는 것조차 알려지는 것이 두려워서 한 밤중에 남몰래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이는 예수님을 찾아와서 처음으로 만나고 경험하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과의 대화하면서 조용히 예수님의 말씀을 경청합니다. 니고데모의 질문은 자기의 존재를 버리고 거듭나는 과정을 통하여 예수님의 길이 진정으로 세상을 구원하기 위한 길임을 드러내는 단초가 됩니다. 다른 복음서에서 예수님을 찾아온 부자는 울상을 지으며 떠나갔지만, 요한복음에서 니고데모는 예수님의 말씀을 끝까지 듣고 있으며, 난처해하거나 떠나갔다는 말이 없습니다.
7:50에서 바리새인들에게 처음으로 도전장을 내미는 니고데모의 모습은 흔들리는 초보 단계의 신앙인에서 “예수님의 길에 대한 확실한 깨달음”을 가지고 이를 거부하는 세상과 부딪힐 용기를 품기 시작한 제자의 모델로 드러납니다. 물론 이때 니고데모에게 주어진 바리새인들의 대꾸는 그들의 변화에 대한 세상의 저항이 상당히 거셀 것임을 암시해 주는 것입니다. 이제 니고데모는 예수님의 입장에서 법과 정의의 올바른 적용이 무엇인지를 말하게 되었습니다.
19:39에서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님의 장례를 위해서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거나 자기의 자리에 연연하지 않고 침향을 섞은 몰약을 가져옵니다. 향유를 가져옴으로써 자신을 드러낸 니고데모는 자기의 “행위가 드러나는 것”(3:20)을 두려워하지 않고 “하느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는”(3:21) 성숙한 제자의 모델입니다. 이런 이미지는 요한이 설정한 니고데모라는 이름에도 드러나는데, 니고데모라는 이름의 뜻은 “백성을 이김”이라는 뜻입니다. 이는 고별설교에서 제자들에게 남긴 예수님의 말씀을 떠올리게 합니다. “너희는 세상에서 환난을 당할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 16:33)
니고데모는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한 물음과 그 말씀에 대한 경청으로 시작해서, 불법을 저지르는 지도자들을 향해서 당당하게 예수님을 변호하였고, 결국에는 예수님의 시신을 아리마대 요셉과 함께 장례를 치름으로써 예수님의 길을 따랐습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자본주의적 삶 속에서도 할 수 있는 일이 있지 않을까요? 법은 언제나 권력과 자본을 가진 강자의 편이었습니다. 그런데 법학자 김욱 서남대 교수가 쓴 󰡔교양으로 읽는 법 이야기󰡕에서 ‘법과 정의는 언제나 강자의 편이기만 한가?’ 하는 물음을 던지고 그 물음에 답하려고 합니다. 그는 법은 필요악, 즉 사악하지만 꼭 필요한 것이라고 하면서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반드시 법이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특히 불법이냐 합법이냐 하는 표면적인 모순 보다는 법에 내장된 ‘권력관계’가 더 근원적인 모순입니다. 권력자의 의지가 만들어낸 법을 ‘권력의 법’이라고 하고 민중의 의지가 만들어낸 법을 ‘민중의 법’이라고 한다면, 현실의 법은 권력의 법과 민중의 법 사이 어딘가에 있습니다. 법은 권력자와 민중의 대립과 투쟁의 산물입니다. 민중의 힘이 약하다면 법의 권력자의 의지에 기울 것이고, 반대로 민중의 힘이 강하다면 법을 민중의 편으로 끌어올 수 있습니다.
김 욱 교수는 “법이란 모순 없이 하늘나라에서 뚝 떨어진 추상적 규범이 아니다. 법은 ‘권력의 법’과 ‘민중의 법’이라는 대립물의 통일이며, 법 실현 과정을 통해 끊임없이 발현되고 지양되는, 살아 숨 쉬는 모순적인 규범이다.”라고 말합니다. 즉 법은 쟁취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기회에 우리는 지난 몇 년 동안 접근했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현실적으로 힘이 부족함을 느낍니다. 법을 만드는 이들이나 집행하고 판결하는 이들 모두가 민중의 편이 아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힘을 모아서 할 수 있는 일들이 더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길에 동조하는 니고데모와 같은 사람들이 더 많아질수록 법 없이도 모든 사람들이 함께 살아 갈 수 있는 그날은 가까울 것입니다. 그날은 법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나 법을 모르는 무지렁이들이나 차별 없이 함께 살 수 있는 날입니다. 그날의 희망을 품고 악한 세상을 이기신 예수님처럼 용감하고 당당하게 살아갑시다. 자본과 권력에 울부짖는 비정규 노동자들의 눈물이 씻겨 지고 평화의 미소를 지을 수 있도록. 500일이 넘게 싸워오면서 20일 동안 단식하고 있는 KTX 승무원들이 승리함으로써 이 땅의 약자들, 무지렁이들도 희망의 빛을 품을 수 있도록.
너희도 미혹되었느냐
요한복음 7:40-52 / 김영규 목사
이 말씀을 들은 무리 중에서 어떤 사람은 이 사람이 참으로 그 선지자라 하며, 어떤 사람은 그리스도라 하며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가 어찌 갈릴리에서 나오겠느냐, 성경에 이르기를 그리스도는 다윗의 씨로 또 다윗이 살던 마을 베들레헴에서 나오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며, 예수로 말미암아 무리 중에서 쟁론이 되니, 그 중에는 그를 잡고자 하는 자들도 있으나 손을 대는 자가 없었더라.(40-44) 아랫사람들이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로 오니 그들이 묻되 어찌하여 잡아오지 아니하였느냐? 아랫사람들이 대답하되 그 사람이 말하는 것처럼 말한 사람은 이 때까지 없었나이다 하니, 바리새인들이 대답하되 너희도 미혹되었느냐? 당국자들이나 바리새인 중에 그를 믿는 자가 있느냐? 율법을 알지 못하는 이 무리는 저주를 받은 자로다.(45-49) 그 중의 한 사람 곧 전에 예수께 왔던 니고데모가 그들에게 말하되, 우리 율법은 사람의 말을 듣고 그 행한 것을 알기 전에 심판하느냐?(50-51) 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너도 갈릴리에서 왔느냐 찾아 보라 갈릴리에서는 선지자가 나지 못하느니라 하였더라.(52)
예수에 대한 찬반 토론
초막절에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무리들은 여러 반응을 일으켰습니다. “이 말씀을 들은 무리 중에서 어떤 사람은 이 사람이 참으로 그 선지자라 하며, 어떤 사람은 그리스도라 하며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가 어찌 갈릴리에서 나오겠느냐, 성경에 이르기를 그리스도는 다윗의 씨로 또 다윗이 살던 마을 베들레헴에서 나오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며, 예수로 말미암아 무리 중에서 쟁론이 되니, 그 중에는 그를 잡고자 하는 자들도 있으나 손을 대는 자가 없었더라.”(40-44) 찬성파와 반대파, 찬성파도 선지자로 보는 사람과 메시아로 보는 사람, 반대파 중에도 이론적 반대파와 무조건적 반대파들로 나뉘었습니다. 이들의 성향은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를 대하는 사람들과 전혀 다를 바 없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를 어떻게 대할까? 본문을 보면 대체적인 그림이 나옵니다. 누구든지 이들 중에 하나입니다. 나는 어디에 속한 사람일까요?
종교적 반대자들
첫째는 종교적인 반대자들입니다.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가 어찌 갈릴리에서 나오겠느냐, 성경에 이르기를 그리스도는 다윗의 씨로 또 다윗이 살던 마을 베들레헴에서 나오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며, 예수로 말미암아 무리 중에서 쟁론이 되니,”(41-43) 이들은 성경을 근거로 예수를 배척했습니다. “메시야가 과연 갈릴리 땅에서 나올수 있느냐? 갈릴리에서는 메시아는커녕 선지자도 나올 수 없다. 그러니 갈릴리 출신인 예수를 어찌 메시아로 믿겠는가?” 예수의 출신을 문제삼으면서 구약의 예언을 들먹였습니다. ‘성경에 이르기를...’(42) 구약에 보면 메시야와 관련하여 두 가지 사실을 예언했습니다. 첫째는 메시아가 다윗의 계보 가운데 나오리라는 예언입니다.(삼상20:6,삼하7:12,시89:3) 둘째는 메시아가 다윗의 고향인 유대 베들레헴에 나신다는 예언입니다.(미5:2) 예수의 반대자들은 이 두 가지를 내세워서 예수가 메시아이심을 부인했습니다. 나사렛 출신인 예수는 결코 메시아가 될 수 없다!
이런 주장을 한 사람들은 주로 예루살렘 출신의 바리새인들입니다. 그러나 실상 이들은 오해를 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다윗의 자손이고, 유대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습니다. 마태는 이 사실을 그의 복음서 초두에 기록합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마1:1) 또한 예수님은 유대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셨습니다. 예수의 부친이 갈릴리 나사렛에 거주한 것은 사실이지만 나사렛이 원 고향은 아닙니다. 요셉은 분명히 다윗의 지파에 속하였기 때문에 베들레헴에 호적하러 갔었으며, 거기에서 예수님은 탄생하셨습니다. 마태는 이 사실을 주목하면서 이것은 구약의 예언이 성취된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마2:6) 신기한 것은 이러한 사실이 많은 사람들에게 숨겨져서 드러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동방 박사들이 알고, 들의 목자들이 알고, 성전에서 기도하던 여선지자 안나가 알고, 세례 요한이 알고, 사도들이 알았습니다. 다만 이런 사실이 예루살렘의 바리새인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것 뿐입니다. 이유 불문하고 오해한 자가 잘못입니다. 사실을 확인하지 않고 오해를 근거로 예수를 배척한 것이 잘못입니다.
정치적 반대자들
둘째는 정치적 반대자들입니다. 주로 지도층 인사들, 공회원들입니다. 이들의 논리는 오직 하나 뿐입니다. 예수가 옳든지 그르든지 관심이 없었습니다. 단지 자신들의 체제에 도전했기 때문에 반대했을 뿐입니다. 이들은 오직 예수를 제거하는 것만을 목표로 삼았습니다. “아랫사람들이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로 오니 그들이 묻되 어찌하여 잡아오지 아니하였느냐?”(45) 무조건 잡아들여라! 하속들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예수를 잡아오기는커녕 엉뚱한 소리를 했습니다. “아랫사람들이 대답하되 그 사람이 말하는 것처럼 말한 사람은 이때까지 없었나이다 하니,”(46) 하속들은 예수를 붙잡아 오라는 명령을 받고 갔는데 모두 맨손으로 돌아 왔습니다. 아마 이 때에 체포 명령은 절대적인 것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상황을 보면서 잡아오라고 한 것 같습니다. 당국자들이 볼 때에 예수를 붙잡는 것보다 폭동이 일어나는 것은 더욱 골치 아픈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속들은 예수를 잡아 오기는커녕 오히려 호감을 가지고 돌아왔습니다. 주석가 렌스키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권위와 위엄과 능력에 놀라서 굴복당했다.” 하속들은 오히려 현실적이고 실증적입니다. 그들은 예수에게 대한 솔직한 심정을 털어놓았습니다. “그 사람의 말하는 것처럼 말한 사람은 이때까지 없었나이다”(46) 예수의 교훈을 유심히 들어보니 전에 없이 훌륭한 가르침입니다.
당국자들은 화가 났습니다. 잡아 오라고 했더니 오히려 예수를 두둔하는 자들이 돼서 돌아 왔어요! 감히 공회원들 앞에서 예수를 인정하는 발언까지 하니 어이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반박했습니다. “너희도 미혹되었느냐?” 너희 ‘역시’ 미혹되었느냐?(Are you led astray, you also?) ‘역시’라는 말이 강조적입니다. 다른 사람들이라면 몰라도 성전에서 일하는 너희까지 예수에게 물들었느냐? “바리새인들이 대답하되 너희도 미혹되었느냐? 당국자들이나 바리새인 중에 그를 믿는 자가 있느냐? 율법을 알지 못하는 이 무리는 저주를 받은 자로다.”(47-49) 이들이 예수를 반대하는 논리를 두 가지입니다.
첫째, 당국자들이나 바리새인들 가운데 예수를 인정한 자가 없다. “당국자들이나 바리새인 중에 그를 믿는 이가 있느냐?”(요7:48) 당국자란 사두개파 제사장들을 의미합니다. 사두개파는 주로 고위 권력층 인사들이요, 바리새파는 주로 서민 계층을 발판으로 하는 종파였습니다. 당대의 주도권을 가진 두 종파가 공히 예수를 인정치 않았는데 어찌 너희 경비병들이 인정할 수가 있느냐는 말입니다. 요즘 말로 한다면, 고위층도 안 믿고, 지식층도 안 믿고, 대중들도 안 믿는데 노인네들이나 어린 아이들이나 무식쟁이들이 뭘 안다고 믿느냐는 말입니다. 어느 계층에 속하였기 때문에, 혹은 어느 종교나 종파에 속하였기 때문에 영원히 그 자리를 고수해야만 한다는 것은 설득력이 없는 말입니다. 신앙은 외적인 굴레로 묶어 놓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중심의 깨달음, 영적이 자각이 있을 때에 비로소 긍정할 수 있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어디에 속하여 있기 때문에 예수를 믿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을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영혼의 진정한 자유를 보장합니다.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있는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하리라.” 이 자유함은 종파를 초월합니다. ‘나는 장로교인이니까’ 혹은 ‘나는 침례교인이니까’ 이 모든 생각도 예수 안에서는 허물어집니다. 참 신앙은 높은 사람이 믿건 천한 사람이 믿건 진리요, 부자가 믿건 가난한 사람이 믿건 진리입니다. 결코 어떤 사람들이 믿으니까 믿고, 어떤 사람들이 믿지 않으니까 거부해야 될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친구 따라 강남가지 마세요! 배경보고 믿지 마세요! 옳거든 믿으시기 바랍니다.
둘째, “율법을 알지 못하는 이 무리는 저주를 받은 자로다.” 했습니다. 바리새파는 율법을 613개 조항으로 세분하여 지키라고 했습니다. 바리새파는 말하기를 자신들을 율법을 지키는 백성이라고 자부하여 ‘땅의 백성’이라고 불렀습니다. “암 하아레쯔!” 그들은 하늘 아래 자신들만이 율법에 가장 충실한 사람들이라고 자부했습니다. 그래서 경비병들이 예수를 인정하게 된 것은 순전히 그들이 율법에 무식하기 때문이라고 단정한 것입니다. 그들은 거기서 머물지 않고 율법을 모르는 사람들은 저주를 받은 자들이라고 극언했습니다. 바리새파 교인들을 뺀 모든 사람들은 그들만 못하며, 이방인들은 율법을 모르기 때문에 완전히 저주받은 자들이라는 생각입니다.
이러한 바리새파 사람들의 발언에 대하여 니고데모가 즉각 반발하고 나섰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당국자들이나 바리새파 가운데는 예수를 따르는 자가 없다고 단정했습니다. 그러나 니고데모는 바로 바리새파 사람이요 공회원이었습니다. 니고데모는 일찍이 예수를 찾아 와서 구원의 길을 물었던 사람이요, 예수를 마음으로 인정하고 따르던 사람입니다. 니고데모는 율법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저주를 받는다는 바리새인들의 말을 반박했습니다. 사실상 율법을 알지 못해서 저주를 받지는 않습니다. 신명기 27:26의 말씀에 보면, “이 율법의 말씀을 실행치 아니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할지니라.” 고 했습니다. 알고 모르는 것은 문제가 아닙니다. 행함이 문젭니다. 바리새파는 율법을 지키면 구원받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지킴으로 구원 받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갈5:4) 더구나 그들이 말한 율법이란 성경 말씀 자체가 아니라 바리새파가 만든 새로운 조항들입니다. 613개 조항과 거기에 덧붙인 구전법들입니다. 거기에는 지키기 힘든 멍에들이 걸려 있었습니다. 아무튼지 그들은 율법을 제대로 지키지도 않으면서 율법을 들먹인 것입니다. 율법에 의하면 사람을 정죄할 때에는 반드시 두세 증인이 있어야 하며, 거기에 본인의 진술이 반드시 필요했습니다. 바리새파가 아끼는 탈무드에 보면 랍비 R. Eleazar의 이런 말이 있습니다. “죽을 죄인이라도 자기변명을 할 수 있는 탄원을 듣지 못하면 결코 처단할 수 없다.” 그래서 니고데모는 말합니다. 우리 율법은 사람의 말을 직접 듣지도 않고 판결하라고 했는가? “그 중의 한 사람 곧 전에 예수께 왔던 니고데모가 그들에게 말하되, 우리 율법은 사람의 말을 듣고 그 행한 것을 알기 전에 심판하느냐?”(50-51) 진정 율법을 지키는 자들이라면 그런 소리는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율법을 아는 것이 축복이 아니라, 율법을 지키는 것이 축복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 율법도 제대로 지키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차라리 이 모든 율법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지만 허물을 용서받는 사람이 더 복이 있습니다.(갈3:1-14,참고) 바로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바요, 예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신 선물입니다. 율법의 복을 받기는 불가능합니다. 예수 믿고 용서받고 구원받는 축복은 쉽습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습니다. 내가 남보다 의롭다고 자랑할 것이 못됩니다. 내가 남보다 법을 많이 지켰다고 자랑할 것도 없습니다. 모두가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분량에 이르지 못하기는 마찬가집니다. 차라리 율법의 완성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세요. 그리고 하나님께 인정받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주님이 요구하시는 바는 바로 우리가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여 모든 허물을 용서받는 일입니다. 예수를 구주로 믿으셔서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예수를 지지하는 사람들
다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지지하는 사람들입니다. 비록 숫적 열세이기는 해도 분명히 예수에게 호감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 말씀을 들은 무리 중에서 어떤 사람은 이 사람이 참으로 그 선지자라 하며, 어떤 사람은 그리스도라 하며”(40,41) 이들 중에도 두 가지 의견으로 나뉘었습니다.
첫째로, 예수를 그 선지자로 보는 사람들입니다. 40절의 말씀에 보면 이 사람들은 예수를 ‘참으로 그 선지자라’고 했습니다. 정관사가 붙은 ‘그 선지자’란 바로 신명기 18:15에 예언된 그 선지자를 말합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중 네 형제 중에서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너를 위하여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를 들을 지니라.” 요한복음 1:21,25에서 사람들은 세례 요한을 보고 ‘그 선지자냐’고 물었습니다. 6:14에서는 예수의 표적을 보면서 예수를 ‘그 선지자’라고 불렀습니다. 오늘 말씀에 도 사람들은 예수의 가르침을 듣고 나서 ‘그 선지자’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6장에 나오는 사람들은 예수의 표적을 보고 선지자로 인정했습니다만, 오늘 말씀의 주인공들은 예수의 교훈을 듣고 선지자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표적에 근거한 것 보다는 말씀에 근거한 신앙이 한 단계 나은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들도 여전히 예수를 한 인간으로만 알았다는 점에서 아직도 진정한 신앙에 도달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제아무리 예수에게 호의를 가지고 대한다 할지라도, 예수를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아, 구주로 받아들이지 않는 한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어떤 분들은 이런 말씀들을 하십니다. “나는 비록 믿지 않지만, 가족들에게는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하도록 권장하고 있습니다. 나중에 하나님께서 조금은 정상을 참작해 주시겠지요?” 과연 그럴까요? 하나님을 긍정하고 섬기지 않는 사람이나, 하나님을 부정하고 섬기지 않는 사람이나 섬기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조금도 차이가 없습니다. 기독교에 대해서 호감을 가진다고 해서 그것이 곧 신앙은 아닙니다. 교회나 교인들에게 선행을 베풀었다고 해서 그것이 곧 신앙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 나의 하나님으로 모셔 들여야만 비로소 참 성도로 인정됩니다.
둘째로,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은 사람들입니다. 세례 요한의 제자였던 안드레와 요한은 처음부터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고 따랐습니다.(1:41) 마찬가지로 초막절에 모인 군중들 가운데 처음부터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뭐라 하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보고 들은 대로 확신한 사람들은 구원을 받습니다.
예수를 지지하는 사람들의 관점
예수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반대자들과 관점이 다릅니다. 적어도 그들은 선입견으로 예수를 대하지 않았습니다. 정직하게 보이는 대로 판단했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으려면 우선 선입견이 없어야 됩니다. 이런 가정을 해 봅니다. 만일 반대자들에게 예수의 출생증명서를 제출했다면 믿었을까요? “자 보시오. 나는 다윗의 후손이요, 몇 년 몇 월 며칠에 베들레헴에서 출생한 출생 신고서가 여기 있소!” 믿기는커녕 오히려 더 많은 증거를 대라고 떠들었을 겁니다. 예수의 메시야성은 그의 행동과 가르침 속에 충분히 드러나 있습니다. 우리가 좀 더 솔직하고 진지하게 예수님을 관찰한다면 그가 과연 메시야라는 사실을 쉽게 알 수가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는 예수를 잡으러 갔던 하속들이 오히려 솔직합니다. 지도층 인사들은 예수가 무슨 행동을 하고 무슨 말을 하든지 전혀 듣기를 거부했습니다. 예수가 누구이든 상관없이 무조건 없애려고만 했습니다. 그 오직 한 가지는 자신의 지위를 지키는 것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경비병들은 본래 지위가 낮은 사람들입니다. 더 이상 낮아질 것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솔직히 예수를 바라보고 평가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점을 유의해야합니다. 예수를 선입견이나 이해 상관에 매여서 바라본다면 우리는 예수를 바로 믿을 수가 없습니다. 진실 된 마음으로 바라 보아야합니다. 예수 믿는 것 때문에 지위가 흔들릴까 겁나는 사람은 영원히 신앙을 외면할 수 밖에 없습니다. 예수 믿는 것 때문에 명예에 손상이 가고, 물질적 손해가 올까봐 염려하는 사람은 결코 예수를 바로 믿을 수 없습니다. 예수 믿는 것 때문에 체면이 손상되고 삶의 틀이 깨어질까 염려하는 사람도 결코 예수를 믿을 수 없습니다. 어차피 예수는 사람들을 거듭나게 하려고 오신 분입니다. 죄악 된 삶의 틀을 고수하러 오신 분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예수가 옳다면 자신의 모든 삶을 뜯어 고칠 준비를 하세요. 그런 사람들만이 예수를 구주로 영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선입견은 바른 판단의 장애물입니다. 52절에 보면 바리새인들은 니고데모에게 악착같이 주장하기를 갈릴리에서는 선지자가 나오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메시아는커녕 선지자도 못나온다는 말입니다. 이 또한 얼마나 큰 선입견입니까? 과연 갈릴리 출신 선지자가 없나요? 구약의 선지자 요나는 바로 갈릴리 출신입니다. 요나는 여로보암 2세 때에 북왕국에서 활동한 선지자였습니다. 선지자는 지역의 제약을 받지 않습니다. 탈무드에도 말하기를 “이스라엘 지파 중에 선지자가 나지 못할 지파는 없다”(랍비 r. elieezer) 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원하시면 어디서나 선지자를 일으키실 수 있습니다. 더구나 메시야는 땅 위의 지방색이나 출신으로 따지는 것 자체가 무의미합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께로서 나셨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나를 알고 내가 어디서 온 것도 알거니와 , 내가 스스로 온 것이 아니로라. 나를 보내신 이는 참이시니 너희는 그를 알지 못하나 나는 아노니, 이는 내가 그에게서 났고 그가 나를 보내셨음니니라.”(28-29절)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예수가 인간으로 유대 땅에 태어났다는 사실 때문에 예수의 신성을 믿지 못합니다. 인간은 신의 소생입니다. 그것은 세상 사람들이 무의식중에라도 믿어온 바요, 원시인이나 문명인이나 똑같이 느끼고 있는 바입니다. 철학을 좋아하는 그리스 사람들도 그렇게 믿었고(행17:28-29), 유대인들도 그렇게 믿었습니다. 우리가 신의 소생이라면 메시야가 비록 인간의 모습으로 왔다고 해서 신성을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인간 예수를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예수도 함께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신앙입니다.
예수를 구주로 믿는 이 신앙으로 우리는 구원 받습니다. 거듭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영생합니다. 천국에 들어갑니다. 모두가 다 이 믿음에 도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할렐루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