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통문 Ⅲ-66]무명의 시인이 읊은 ‘오수개’(2)
얼마 전, 생각지도 않았는데 <이야기 연구소> 출범식에서 깜짝 자작시를 낭송하여 여러 사람에게 감동을 준 친구가 또 한 편의 시를 메일로 보내왔다. <컹컹컹>이라는 제목부터가 몹시 섹시했다. 서울에서 중견시인이 오수 연작시를 썼는데, 시 전문지(애지)에 첫 번째 시를 발표했다고 하지를 않나? 80여명이 있는 오수개연구소 단톡방에 삼계의 어느 시인(오병섭)이 오수개 시를 올리지 않나? 근래에 오수 관련한 ‘시 풍년’이 들었기에 “오수에 시바람이 불어오고 있다”고 한 것인데, ‘시 풍년’이라는 조어도 섹시하기는 마찬가지. 물론 이는 무조건 좋은 일이다. 이런 현상은 어디에서 왜 오는 것일까? ‘반려문화’라는 말이 ‘1도’ 어색하지 않게 된 세상의 흐름 때문인지도 모르지만, 어쩌면 AI세상에 사는 우리가 인간 덕목 중 둘째가라면 섭섭할 ‘의리’(義理)에 대해 어떤 갈증이나 목마름을 느껴서가 아닐까? 주인을 위해 제 몸을 불사른 의로운 개 이야기(특히 의견의 원조격인 오수의 실화)에 새삼 감동하면서, 뇌리에 떠오르는 게 ‘개와 같다(개같은 놈)’거나 ‘개보다 못한 사람들(의리없는 놈)’이 득시글득시글한 세상에 일종의 경종을 울리려는 것은 아닐까? 아무튼, 오수가 명실공히 세계적인 반려동물의 성지로 우뚝서는 해애 ‘오수와 오수개 시 (詩) 공모전’를 벌여도 좋겠다는 생각이다.
무명의 시인의 ‘오수개 시’ 제2탄을 감상하며 3탄, 4탄도 기대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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컹컹컹
어디서 개 한 마리 짖고 있다.
짙은 어둠 속에서
어둠을 물어뜯듯 개 한 마리 짖고 있다.
오수라는 고을에는
그 울음이 천지 사방 백여 있어
돋는 풀잎에서도
지는 낙엽에서도
뒹구는 돌멩이에서도
컹컹컹
컹컹컹
바라보는 눈 끝에서
만지는 손끝에서
걸어가는 발끝에서
그 울음이 살아나온다.
그러므로 오수에서는
잡것들에게 생각 없이 눈길 줄 수 없고
내 것 아닌데 슬그머니 집어 담을 수 없고
길이 아니면 함부로 나아갈 수 없다.
컹컹컹
칼 든 놈이 집에 들거든
아무리 그 놈 몸채가 바위 같더라도
뒷발도 버티고 허연 이빨로 덤벼야 한다.
컹컹컹
누군가 던져주는 기름진 고깃 덩어리를 보거든
침 흘리고 입맛 다시기 전에
먹어도 되는 것인지 먹으면 안되는 것인지
두 눈 부릅뜨고 먼저 살피어야 한다.
컹컹컹
어린 것 함부로 하는 놈이나
힘없는 자 막 대하는 놈이나
어리숙하다고 업수이 여기는 놈들은
왈칵 다가가 모질게 뒷꿈치를 물어 뜯어야 한다.
밥 주고 거둔 주인이 누구인지
과자부스러기 던져주며 손가락 입에 대고 짖지 말라는
도둑이 누구인지 모른다면
그것은 개도 아니다.
물어뜯어야 할 놈
꼬리를 흔들어야 할 사람을 구분할 수 없다면
그것은 개만도 못한 놈이다.
컹컹컹
오수에 오시거든
옷깃 여미고
되돌아 보시라.
저 늙은 느티나무 아래 누운
천 년 전의 개 앞에서
그대 과연
부끄럽지 않으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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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은 <오수에 오시거든/옷깃 여미고/되돌아보시라>한다. 문득 이원규 시인의 <행여 지리산에 오시려거든/천왕봉 일출을 보러 오시라/삼대째 내리 적선한 사람만 볼 수 있으니/아무나 오지 마시고>라는 시도 생각났다(가수 안치환이 부른 이 노래를 들으신 적이 있는가. 들어보시라). <늙은 느티나무 아래 누운/천 년 전의 개 앞에서/그대 과연/부끄럽지 않으신지> 자문해 보라 한다. 옷깃을 여미고 되돌아 보자. 단군 할아버지보다 더 오래 살고 있는 1천 살도 더 먹은 오수개에게 자신이 진정으로 누구에게 무엇으로나 부끄러운 일을 한 적이 없는지를 말이다. 그리고 시에는 없지만, 오수개의 컹컹컹 짖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지 귀를 기울여보자고 보자고 한다. 이 ‘개나무 골’에는 ‘천지사방’ 그 어디에도(이를테면 돋는 풀잎에도/지는 낙엽에도/뒹구는 돌멩이에도) 컹컹컹, 그 울음이 백여(박혀) 있으니 '귀가 있는 자'라면 충분히 듣고도 남음이 있다고 말하는 듯하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