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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과 흑암의 역사 (성경연구, 프리메이슨, 일루미나티)
 
 
 
카페 게시글
진리 탐구 스크랩 [인종청소] 모나리자는 동이족을 대학살한 살인마 (이사벨라 여왕)
대한 추천 0 조회 752 16.09.24 14:00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인종청소] 모나리자는 동이족을 대학살한 살인마 (이사벨라 여왕) 




 

 

 Isabella di Aragona as Mona Lisa.

모나리자는 아라곤 여왕이자 스페인 여왕인 이사벨이 모델. 이 여자가 모나리자가 아니라고 부인할 이는 없을 거라고 본다.

이사벨 여왕은 동이족을 대학살한 카톨릭 살인마다. (물론 배후의 지원세력은 늘 따로 있고 이 여왕은 꼭두각시 마담임.)

 

Rogo inquisizione iberica. 포르투갈 이단처형장. 

 

Spanish Haarlem siege massacre. 스페인 이단처형장.

  

 

신대륙에 살고있던 아메리카 인디언들을 처리하는 모습. 얼마 전까지는 인디언 학살에 관련한 그림자료가 흔했는데

좀전에 찾아보니 다 사라지고 거의 남은 게 없다. 되려 인디언들이 백인(유태인)들을 잔인하게 죽였다는 그림들만 잔뜩 나와 있다. 

개로 하여금 포로들을 뜯게 하는 건 오래 전부터 서양군인들이 즐겨 행하는 처형방식이다. 이 그림처럼 개한테 뜯기는 인디언들의  

모습이 마치 유태인인 양 그려진 게 의아했었는데. 역시나 아메리카 원주민은 원래 유태인들이었다는 주장을 하려던 거였다.

 

이런 그림들을 몇 년전에 독일사이트 등지에서 많이 봤는데 설마 아메리카 인디언들을 그린 건 줄이야 몰랐었다.

'Native American conjuror in a 1590'(임진난 시기)라는 설명이 붙어 있다.

 

 

머리에 상투를 틀고 있고 활을 들고 있기에 동이족 인디언을 그린 거였나 했었는데 그게 아니었나 보다.

 

 

Aryan FOOLS talk and pray Jewish nonsense(?)  그림의 출처 제공자가 무슨 의미로 이런 말을 했는 지 잘 모르겠는데. 

수난을 당하는 아리안(동이족) 바보들이 유태의 착각을 부르짖으며 기도한다는 얘기같다.

여기에서도 희생자 아리안(동이족)을 예수같은 유태인 얼굴로 묘사되었다. 또, 칼 휘두르는 측은 상투머리 고려인이라는 식이다.

 

 

모나리자는 동이족을 대학살한 살인마 (이사벨라 여왕)

 

유럽에서의 이단처형과 마녀처형이 신대륙에서의 인디언 학살과 동시대에 동일세력에 의해 행해졌다.

조선대륙에서의 임진왜란도 그와 동시대에 동일세력에 의해 행해졌다.

 

중세의 종교재판과 마녀사냥을 주도한 건 카톨릭 교황을 앞 세운 이사벨라 여왕과 페르난도 왕 부부인 걸로 알려졌는데. 교황이나 왕부부를 사주하고 지원한 세력은 따로 있다. 십자군 전쟁과 아메리카 인디언 학살과 중국 몽고 인도 러시아 조선 왕조의 멸망도 마찬가지다. 1.2차 세계대전도 마찬가지다.

 

여기에서 혼란스러운 점은 유태상인들과 유태교도들과는 별개라는 주장이 있다. 정통 유태교도들이 가짜 유태인들에 의해 탄압 받는다는 얘기도 나온다. 정통 유태교도들이 이스라엘의 시오니스트들과 자기들은 다른 족속들이라고 말한다고 한다. 사실여부에 대해 확인 할 길은 없어 보이지만 그럴 가능성도 전혀 없지는 않을지 모른다. 또한 그런 주장조차 꾸며낸 거짓일지 모름.

 

 

백인 인디언 그림들이 돌고 있음.(가짜 아메리카 인디언들)

 

왜 콜럼부스가 신대륙 아메리카를 인도인 줄 빤히 알면서도 잘 못 알았다고 말했는지 그리고 영국이 왜 지금의 인도를 인도라는 납득하기 어려운 이상한 이름 붙였는지 알았다.

 

아메리카 대륙은 본래 백인 원주민이 살던 곳이었다는 역사를 꾸며서 후대에 남기려는 거였을 거였다.

아메리카 본토는 본래 '인도'였다. 그래서 원주민이 '인디언'인 거고요. 그들은 동이족이고 지금의 인도인들과 완전히 별개의 종족이다. 인도인들은 힌도인(신도인)이라 칭해야 옳다.

 

'미연방합중국'의 정확한 표기는 '고려연방합중국'이다.
http://blog.daum.net/sallyeojuseyo/4200441?srchid=BR1http%3A%2F%2Fblog.daum.net%2Fsallyeojuseyo%2F4200441

 

우려했던 바대로 동이 인디언이 현지 인도인(힌도인)으로 둔갑되었다.

http://blog.daum.net/sallyeojuseyo/4200463?srchid=BR1http%3A%2F%2Fblog.daum.net%2Fsallyeojuseyo%2F4200463

 

아메리카 인디언은 배달겨레 고려 동이족이다.

http://blog.daum.net/sallyeojuseyo/4200398?srchid=BR1http%3A%2F%2Fblog.daum.net%2Fsallyeojuseyo%2F4200398 

 

(잉카.인칸.인간.인감.잉크) 아메리카는 진짜 인도가 아니었을까?

http://blog.daum.net/sallyeojuseyo/4200426?srchid=BR1http%3A%2F%2Fblog.daum.net%2Fsallyeojuseyo%2F420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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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ko.wikipedia.org/wiki/%EC%9D%B4%EC%82%AC%EB%B2%A8_1%EC%84%B8 (출처 : 위키백과)

 

이사벨 1세(스페인어: Isabel I de Castilla, 1451년 4월 22일 - 1504년 11월 26일)는 트라스타마라 왕가 출신의 카스티야 여왕(재위 : 1474년 - 1504년)이다. 남편 페르난도 2세와 더불어 가톨릭왕으로 불린다.

 

이사벨 1세는 1451년 4월 22일 카스티야 왕국의 카스티야 마드리갈데라스 아틀라스토레스에서 카스티야의 후안 2세와 그의 두 번때 아내인 포르투갈의 이사벨 사이에 장녀로 태어났다. 이사벨이라는 이름은 어머니에서 딸에게로 계승되어 온 이름이며, 이사벨 1세는 7대째였다. 이사벨 공주가 태어나던 당시 카스티야 왕국은 부정부패의 온상인 루나 재상의 손에 썩어가고 있었고, 국왕은 재상의 그늘 아래에서 병들어가고 있었다. 이사벨 왕후는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국왕 후안 2세 대신에 사별한 전처의 아들인 엔리케 왕자와 함께 강인한 정치력을 발휘해 이사벨 공주가 두 살 되던 해에 정변을 일으켜 루나 재상을 사형에 처했다. 그 사이에 이사벨 왕후는 공주의 동생 알폰소 왕자를 국왕의 품에 안겨 주었지만, 아이가 돌도 되기 전에 국왕은 숨을 거두었다.[1]결국 이사벨의 이복오빠가 엔리케 4세로 즉위했다. 엔리케 4세에 의해 이사벨은 어머니와 남동생 알폰소와 함께 궁정에서 추방되어 아레발로에 도착햐였으나 이성을 잃은 이사벨 태후는 정신이상자가 되어버렸다. 이사벨은 어린 남동생과 실성한 어머니를 돌보는 이중고를 겪어야 했다. 궁중 생활이 뭔지도 모르는 어린 이사벨은 강인한 생활력을 평민들의 삶에서 보고 배웠다. 태후가 실성을 하자, 정치적인 불안감이 사라진 엔리케는 이사벨과 알폰소를 돌보기 시작했다. 엔리케는 살라망카대학의 유명 교수를 아레발로로 보내 이사벨을 공부시켰다.[1] 그 후, 엔리케 4세에게 딸 후아나가 태어났지만 아버지가 누구인가 하는 의혹이 제기되어 왕위를 계승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일부 가신들은 현 국왕의 이복 남매인 이사벨과 알폰소를 다음 국왕 자리에 앉히려고 마음먹었다.

 

1464년, 알폰소의 즉위식이 거행되었으나 한 나라에 왕이 두 명이나 있는 상황이었기에 심각한 국론 분열이 일어났다. 이 상태는 1467년에 알폰소가 죽음으로써 종지부를 맞는다. 알폰소의 지지자들은 이사벨을 다음 국왕으로 추대하려고 했지만, 이사벨은 “오라버니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왕의 자리에 오르지 않겠다.” 라는 식으로, 이복오빠의 친딸인지 불분명한 후아나보다는 자신이 왕위를 계승하기에 더 합당하다는 것을 은연중에 나타내보이는 식으로 거부를 했다. 그 덕분에 이사벨은 엔리케 4세의 눈에 들게 되어 1468년 9월 19일 토로스 데 귀산도 협정에 따라 왕위계승자로 인정받았다. 엔리케 4세는 이사벨을 포르투갈의 아폰수 5세와 혼인시키고자 하였으나 정작 이사벨은 선교사를 보내 알아본 다음, 동맹상대로서는 포르투갈보다는 지중해의 영해권을 소유한 아라곤 왕국이 제격이라 판단하고 자신의 결혼상대자로서 아라곤의 왕자 페르난도를 선택했다. 더군다나 아라곤의 카스티야는 민족도 거의 같고, 왕조도 같은 트라스타마라 왕조였다. 마침내 두 사람은 몰래 만나 1469년 바야돌리드에 있는 후데비베로 궁전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1474년에 엔리케 4세가 사망하자 이사벨이 그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여왕이 된 이사벨 1세는 우선은 후아나와 약혼한 후 카스티야의 왕위 계승 문제에 개입해 온 포르투갈의 아폰수 5세와 치열한 싸움을 벌여 1479년 2월 24일에 승리한 후, 카스티야 영내의 반(反)이사벨 기치를 내세운 친(親)후아나 세력을 북쪽에서부터 남쪽으로 토벌해가기 시작했다. 같은 해 남편 페르난도가 죽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아라곤의 왕위를 계승하자 1492년 카스티야-아라곤 연합 왕국, 즉 스페인(에스파냐) 왕국이 탄생하였다. 그러나 이 당시 스페인은 아직 하나의 나라가 아니라 군주끼리 결혼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는 이사벨과 페르난도 두 군주의 공동통치제 성향을 띠고 있었다. 그래서 카스티야와 아라곤은 아직도 제각기 두 군주의 통치를 받았다. 이는 훗날 이사벨이 죽은 후에 상속 문제가 일어나게 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이사벨은 자신은 왕비가 아니라 여왕이며, 페르난도보다 더 연상이라는 사실을 항상 잊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그라나다 함락: 백마에 탄 여인이 이사벨1492년 1월, 이베리아 반도 남부에 아직 남아있던 이슬람 국가인 그라나다 왕국을 제압, 마침내 800년에 걸친 레콩키스타를 마무리 지었다. 당시 무슬림과의 전쟁에 관심을 기울였던 이사벨은 전장을 누비는 남편을 위해 군자금과 물자 조달 등에 국력을 쏟아부었다고 한다. 그 위업 덕분에 1496년 교황 알렉산데르 6세로부터 칭송받은 두 사람은 가톨릭 부부왕(Los Reyes Cat?licos)이라는 칭호를 하사받게 된다. 이후 이사벨은 ‘가톨릭교도 이사벨’(Isabel la Cat?lica)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게 된다. 또한 이사벨은 콜럼버스의 신대륙 진출을 돕기 위해 재정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 덕분에 스페인에 해외 식민지 개척시대가 도래하였으며, 이사벨과 페르난도의 치세를 스페인의 황금시대로 정의하는 사람들이 많다. 콜럼버스를 시작으로 수많은 모험가들에 의해 신대륙이 발견되어 그 곳으로부터 얻은 수많은 재물을 통해 스페인은 매우 부유해졌다. 경건한 가톨릭 신자였던 이사벨은 훗날 원주민들에 대한 잔혹한 처사에 매우 마음 아파했다고 알려져 있다. 1504년 11월 26일 메디나델캄포에서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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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ko.wikipedia.org/wiki/%EC%A2%85%EA%B5%90_%EC%9E%AC%ED%8C%90 (출처 : 위키백과)

 

종교 재판

종교재판 또는 이단 심문(異端審問, 라틴어: Inquisitio)은 중세 이후 로마 가톨릭에서 정통 신앙에 반하는 가르침(이단)을 전파하는 혐의를 받은 사람을 재판하기 위해 설치한 제도이다. 종교재판을 실시하는 시설은 ‘종교재판소’, 종교재판을 실행에 옮기는 사람은 ‘종교재판관’이라고 부른다. 종교재판이라고 해도 중세 초기의 종교재판, 에스파냐 종교재판, 로마 종교재판 이 세 가지로 분류되며 각각 시대 배경과 성격이 판이하게 다르다.

덧붙여 마녀 재판은 종교재판의 형식을 일부 차용하고 있지만, 그 성격(이단은 그리스도인이지만 잘못된 신앙을 갖고 있는 사람인 데 반해, 마녀나 마법사는 원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완전히 다르다)이나 실시된 지역과 시대에 현격한 차이가 나기 때문에, 종교재판과는 별도의 것으로 분류하는 것이 적절하다.

 

중세의 종교재판
중세의 종교재판이라고 불리는 최초의 종교재판이 시작된 것은, 12세기 프랑스 남부에서 카타리파가 그 영향력을 확대하는 것이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이단 문제는 다분히 정치 문제이며, 지역 영주들이 치안을 어지럽힌다고 하여 개별적으로 지역 내의 카타리파를 체포하거나 재판을 실시하고 있었지만, 이러한 종래의 방법을 정리한 형태로 1184년의 교황 회칙에 의해서 교회의 공식적인 종교재판법이 나왔다. 그에 따르면, 이단으로 판별된 사람은 각 지역 교구의 주교의 관할로 넘겨져 심문을 받게 되었다. 주교들은 정기적으로 자기 소속의 교구를 돌아보며 이단자가 없는지를 확인해야 했다.

 
화형에 처해진 이단자.교회에는 일반적인 사법권이나 처벌권이 없었기 때문에 이 제도가 그만큼 엄밀하게 적용되지 않았지만, 세속 영주들이 교회의 종교재판을 보조하는 형태로 종교재판에서 유죄 판결을 받은 죄수를 인수하여 처벌하는 양상으로 변했다. 특히 신성 로마 제국의 프리드리히 2세는 제4차 라테라노 공의회에서 체결한 종교재판 제도를 제국법에 추가하여 법제화해, 최고로 사형까지 판결할 수 있도록 했다. 1230년대에 들어오면서 종래의 주교들이 심문을 실시하는 형태로 바뀌고, 교황이 직접 임명한 종교재판관이 각지를 돌며 종교재판을 엄중하게 실시하게 되었다. 이러한 형식을 정돈한 것은 당시의 교황 그레고리오 9세이며, 종교재판관은 당시 학식이 뛰어난 수도회로 알려진 도미니코회원이 맡는 경우가 많았다. 당시의 종교재판이 어떻게 행해지고 있었는가는 1307년부터 1323년까지 툴루즈의 종교재판관으로 근무한 베르나르 기가 저술한 종교재판의 수속 등에서 알 수 있다.

이런 종류의 종교재판 제도는 독일이나 스칸디나비아 반도 등 북유럽으로도 확대해 갔지만, 거의 정착되지 않고 장소에 따라서는 온건한 형태의 것으로 변용해 갔다. 또, 잉글랜드에서는 종교재판이 거의 행해지지 않았다. 중세의 종교재판이 어느 정도의 규모로 행해졌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가 없지만, 오늘날 사람들이 흔히 상상하는 것만큼 빈번히 행해졌다고는 생각하기 어렵다. 기록에 의하면, 중세 종교재판이 가장 활발하게 행해진 1233년에 프랑스 남부의 종교재판관으로 임명된 로베르 르 푸티는 수백 명에게 화형을 선고했지만 교황청에서는 형벌이 너무 가혹하다는 이유로 그를 1년간 해임하였다. 유명한 베르나르 드 기는 이단심문관을 16년간이나 근무했지만, 사형을 선고한 것은 40건에 지나지 않았다.

 

에스파냐의 종교재판
이 부분의 본문은 에스파냐 종교재판입니다.  
성 도미니코의 알비파 종교재판(1475년).종교재판의 역사에서 특출나는 에스파냐 종교재판은 중세의 종교재판과는 또 다른 성격을 갖고 있었다. 15세기가 끝나면서, 아라곤의 페르난도 2세와 카스티야의 이사벨 1세의 결혼을 통해 에스파냐 연합 왕국이 탄생했다. 당시 에스파냐에는 로마 가톨릭으로 개종한 무슬림이나 유대인이 많았는데, 이들을 국내 통일과 안정을 저해하는 요소로 인식한 왕은 교황에게 에스파냐 국내에서의 독자적인 종교재판 기관의 설치를 허가해 줄 것을 청원하였다.

이것이 교황의 간섭에서 벗어난 독자적인 종교재판인 데다가, 종교재판이 정치적으로 이용될 위험성을 꿰뚫어 보고 있던 교황은 불가의 입장을 고수하였으나, 페르난도 왕의 정치적 공세에 의해 결국 승인을 받는 데 성공했다. 그 결과 에스파냐 종교재판은 수많은 처형자가 속출했으며, 종교재판의 어두운 이미지를 부각시켜 그리스도교에 어두운 역사가 드리우게 되었다.


[편집] 로마의 종교재판
1542년, 교황 바오로 3세에 의해 설치된 종교재판소는 종래와 같이 교황에 의해 소수의 종교재판관이 임명되는 형식을 중지하고, 신학자나 학식이 높고 명예 있는 추기경들로 구성된 위원회가 특정 교설이나 저작을 검토하여 이단성이 있는지 없는지를 심의하는 것과 동시에, 각국에서 행해지는 종교재판에 문제가 없도록 감독하는 것을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로마의 종교재판소를 훗날 검사성성으로 개칭되어 교황청의 정부 부처로서 기능하게 되었다. 검사성성은 각국의 신학자, 철학자, 교회법 전문가들을 대거 거느리고 있었으며 그들의 의견에 따라 심의를 실시하고 있었다.

당초엔 검사성성은 조르다노 브르노 같은 케이스만 취급했었지만, 이윽고 개인의 단죄보다 저작물을 중심으로 한 사상의 심의를 다루게 되면서 그에 따라 금서 목록을 작성하기에 이른다. 발족 이래, 로마의 종교재판소인 검사성성의 결정이 미치는 범위는 이탈리아 국내에 한정되어 있어 국외에 대해서는 금서 목록의 송부나 결정 사항의 연락 이상의 영향력을 미치지 않았다. 검사성성이 취급한 사안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은 뭐니뭐니해도 17세기의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저작에 관한 사안(이른바 갈릴레이 재판)이라 할 수 있다. 금서 목록은 폐지된 지 오래이지만, 검사성성 자체는 신앙교리성으로 개칭하여 오늘날까지 존속하고 있다.


[편집] 그 외
에스파냐에서의 종교재판 폐지는 1834년이었지만, 종교재판이라고 하는 말은 오늘날까지 부정적인 이미지를 가진 말로 인식되어 있다. 위의 글 이외의 다른 종교재판에 대해 보충하자면, 16세기 인도의 고아에는 포르투갈 정부에 의해 설치된 종교재판소가 있었다. 인도의 전통과 로마 가톨릭을 융합시키려고 한 예수회원 노비리 등의 운동은 이 종교재판소로부터 규탄을 받았다.

 

 

가져온 곳 : 
블로그 >군대 무기 게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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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irjdjrjd|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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