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종청소] 모나리자는 동이족을 대학살한 살인마 (이사벨라 여왕)
Isabella di Aragona as Mona Lisa. 모나리자는 아라곤 여왕이자 스페인 여왕인 이사벨이 모델. 이 여자가 모나리자가 아니라고 부인할 이는 없을 거라고 본다. 이사벨 여왕은 동이족을 대학살한 카톨릭 살인마다. (물론 배후의 지원세력은 늘 따로 있고 이 여왕은 꼭두각시 마담임.)
Rogo inquisizione iberica. 포르투갈 이단처형장.
Spanish Haarlem siege massacre. 스페인 이단처형장.
신대륙에 살고있던 아메리카 인디언들을 처리하는 모습. 얼마 전까지는 인디언 학살에 관련한 그림자료가 흔했는데 좀전에 찾아보니 다 사라지고 거의 남은 게 없다. 되려 인디언들이 백인(유태인)들을 잔인하게 죽였다는 그림들만 잔뜩 나와 있다. 개로 하여금 포로들을 뜯게 하는 건 오래 전부터 서양군인들이 즐겨 행하는 처형방식이다. 이 그림처럼 개한테 뜯기는 인디언들의 모습이 마치 유태인인 양 그려진 게 의아했었는데. 역시나 아메리카 원주민은 원래 유태인들이었다는 주장을 하려던 거였다.
이런 그림들을 몇 년전에 독일사이트 등지에서 많이 봤는데 설마 아메리카 인디언들을 그린 건 줄이야 몰랐었다. 'Native American conjuror in a 1590'(임진난 시기)라는 설명이 붙어 있다.
머리에 상투를 틀고 있고 활을 들고 있기에 동이족 인디언을 그린 거였나 했었는데 그게 아니었나 보다.
Aryan FOOLS talk and pray Jewish nonsense(?) 그림의 출처 제공자가 무슨 의미로 이런 말을 했는 지 잘 모르겠는데. 수난을 당하는 아리안(동이족) 바보들이 유태의 착각을 부르짖으며 기도한다는 얘기같다. 여기에서도 희생자 아리안(동이족)을 예수같은 유태인 얼굴로 묘사되었다. 또, 칼 휘두르는 측은 상투머리 고려인이라는 식이다.
모나리자는 동이족을 대학살한 살인마 (이사벨라 여왕)
유럽에서의 이단처형과 마녀처형이 신대륙에서의 인디언 학살과 동시대에 동일세력에 의해 행해졌다. 조선대륙에서의 임진왜란도 그와 동시대에 동일세력에 의해 행해졌다.
중세의 종교재판과 마녀사냥을 주도한 건 카톨릭 교황을 앞 세운 이사벨라 여왕과 페르난도 왕 부부인 걸로 알려졌는데. 교황이나 왕부부를 사주하고 지원한 세력은 따로 있다. 십자군 전쟁과 아메리카 인디언 학살과 중국 몽고 인도 러시아 조선 왕조의 멸망도 마찬가지다. 1.2차 세계대전도 마찬가지다.
여기에서 혼란스러운 점은 유태상인들과 유태교도들과는 별개라는 주장이 있다. 정통 유태교도들이 가짜 유태인들에 의해 탄압 받는다는 얘기도 나온다. 정통 유태교도들이 이스라엘의 시오니스트들과 자기들은 다른 족속들이라고 말한다고 한다. 사실여부에 대해 확인 할 길은 없어 보이지만 그럴 가능성도 전혀 없지는 않을지 모른다. 또한 그런 주장조차 꾸며낸 거짓일지 모름.
왜 콜럼부스가 신대륙 아메리카를 인도인 줄 빤히 알면서도 잘 못 알았다고 말했는지 그리고 영국이 왜 지금의 인도를 인도라는 납득하기 어려운 이상한 이름 붙였는지 알았다.
아메리카 대륙은 본래 백인 원주민이 살던 곳이었다는 역사를 꾸며서 후대에 남기려는 거였을 거였다. 아메리카 본토는 본래 '인도'였다. 그래서 원주민이 '인디언'인 거고요. 그들은 동이족이고 지금의 인도인들과 완전히 별개의 종족이다. 인도인들은 힌도인(신도인)이라 칭해야 옳다.
'미연방합중국'의 정확한 표기는 '고려연방합중국'이다.
우려했던 바대로 동이 인디언이 현지 인도인(힌도인)으로 둔갑되었다.
아메리카 인디언은 배달겨레 고려 동이족이다.
(잉카.인칸.인간.인감.잉크) 아메리카는 진짜 인도가 아니었을까? http://blog.daum.net/sallyeojuseyo/4200426?srchid=BR1http%3A%2F%2Fblog.daum.net%2Fsallyeojuseyo%2F420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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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ko.wikipedia.org/wiki/%EC%9D%B4%EC%82%AC%EB%B2%A8_1%EC%84%B8 (출처 : 위키백과)
이사벨 1세(스페인어: Isabel I de Castilla, 1451년 4월 22일 - 1504년 11월 26일)는 트라스타마라 왕가 출신의 카스티야 여왕(재위 : 1474년 - 1504년)이다. 남편 페르난도 2세와 더불어 가톨릭왕으로 불린다.
이사벨 1세는 1451년 4월 22일 카스티야 왕국의 카스티야 마드리갈데라스 아틀라스토레스에서 카스티야의 후안 2세와 그의 두 번때 아내인 포르투갈의 이사벨 사이에 장녀로 태어났다. 이사벨이라는 이름은 어머니에서 딸에게로 계승되어 온 이름이며, 이사벨 1세는 7대째였다. 이사벨 공주가 태어나던 당시 카스티야 왕국은 부정부패의 온상인 루나 재상의 손에 썩어가고 있었고, 국왕은 재상의 그늘 아래에서 병들어가고 있었다. 이사벨 왕후는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국왕 후안 2세 대신에 사별한 전처의 아들인 엔리케 왕자와 함께 강인한 정치력을 발휘해 이사벨 공주가 두 살 되던 해에 정변을 일으켜 루나 재상을 사형에 처했다. 그 사이에 이사벨 왕후는 공주의 동생 알폰소 왕자를 국왕의 품에 안겨 주었지만, 아이가 돌도 되기 전에 국왕은 숨을 거두었다.[1]결국 이사벨의 이복오빠가 엔리케 4세로 즉위했다. 엔리케 4세에 의해 이사벨은 어머니와 남동생 알폰소와 함께 궁정에서 추방되어 아레발로에 도착햐였으나 이성을 잃은 이사벨 태후는 정신이상자가 되어버렸다. 이사벨은 어린 남동생과 실성한 어머니를 돌보는 이중고를 겪어야 했다. 궁중 생활이 뭔지도 모르는 어린 이사벨은 강인한 생활력을 평민들의 삶에서 보고 배웠다. 태후가 실성을 하자, 정치적인 불안감이 사라진 엔리케는 이사벨과 알폰소를 돌보기 시작했다. 엔리케는 살라망카대학의 유명 교수를 아레발로로 보내 이사벨을 공부시켰다.[1] 그 후, 엔리케 4세에게 딸 후아나가 태어났지만 아버지가 누구인가 하는 의혹이 제기되어 왕위를 계승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일부 가신들은 현 국왕의 이복 남매인 이사벨과 알폰소를 다음 국왕 자리에 앉히려고 마음먹었다.
1464년, 알폰소의 즉위식이 거행되었으나 한 나라에 왕이 두 명이나 있는 상황이었기에 심각한 국론 분열이 일어났다. 이 상태는 1467년에 알폰소가 죽음으로써 종지부를 맞는다. 알폰소의 지지자들은 이사벨을 다음 국왕으로 추대하려고 했지만, 이사벨은 “오라버니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왕의 자리에 오르지 않겠다.” 라는 식으로, 이복오빠의 친딸인지 불분명한 후아나보다는 자신이 왕위를 계승하기에 더 합당하다는 것을 은연중에 나타내보이는 식으로 거부를 했다. 그 덕분에 이사벨은 엔리케 4세의 눈에 들게 되어 1468년 9월 19일 토로스 데 귀산도 협정에 따라 왕위계승자로 인정받았다. 엔리케 4세는 이사벨을 포르투갈의 아폰수 5세와 혼인시키고자 하였으나 정작 이사벨은 선교사를 보내 알아본 다음, 동맹상대로서는 포르투갈보다는 지중해의 영해권을 소유한 아라곤 왕국이 제격이라 판단하고 자신의 결혼상대자로서 아라곤의 왕자 페르난도를 선택했다. 더군다나 아라곤의 카스티야는 민족도 거의 같고, 왕조도 같은 트라스타마라 왕조였다. 마침내 두 사람은 몰래 만나 1469년 바야돌리드에 있는 후데비베로 궁전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1474년에 엔리케 4세가 사망하자 이사벨이 그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여왕이 된 이사벨 1세는 우선은 후아나와 약혼한 후 카스티야의 왕위 계승 문제에 개입해 온 포르투갈의 아폰수 5세와 치열한 싸움을 벌여 1479년 2월 24일에 승리한 후, 카스티야 영내의 반(反)이사벨 기치를 내세운 친(親)후아나 세력을 북쪽에서부터 남쪽으로 토벌해가기 시작했다. 같은 해 남편 페르난도가 죽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아라곤의 왕위를 계승하자 1492년 카스티야-아라곤 연합 왕국, 즉 스페인(에스파냐) 왕국이 탄생하였다. 그러나 이 당시 스페인은 아직 하나의 나라가 아니라 군주끼리 결혼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는 이사벨과 페르난도 두 군주의 공동통치제 성향을 띠고 있었다. 그래서 카스티야와 아라곤은 아직도 제각기 두 군주의 통치를 받았다. 이는 훗날 이사벨이 죽은 후에 상속 문제가 일어나게 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이사벨은 자신은 왕비가 아니라 여왕이며, 페르난도보다 더 연상이라는 사실을 항상 잊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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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ko.wikipedia.org/wiki/%EC%A2%85%EA%B5%90_%EC%9E%AC%ED%8C%90 (출처 : 위키백과)
종교 재판 종교재판 또는 이단 심문(異端審問, 라틴어: Inquisitio)은 중세 이후 로마 가톨릭에서 정통 신앙에 반하는 가르침(이단)을 전파하는 혐의를 받은 사람을 재판하기 위해 설치한 제도이다. 종교재판을 실시하는 시설은 ‘종교재판소’, 종교재판을 실행에 옮기는 사람은 ‘종교재판관’이라고 부른다. 종교재판이라고 해도 중세 초기의 종교재판, 에스파냐 종교재판, 로마 종교재판 이 세 가지로 분류되며 각각 시대 배경과 성격이 판이하게 다르다. 덧붙여 마녀 재판은 종교재판의 형식을 일부 차용하고 있지만, 그 성격(이단은 그리스도인이지만 잘못된 신앙을 갖고 있는 사람인 데 반해, 마녀나 마법사는 원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완전히 다르다)이나 실시된 지역과 시대에 현격한 차이가 나기 때문에, 종교재판과는 별도의 것으로 분류하는 것이 적절하다.
중세의 종교재판 이런 종류의 종교재판 제도는 독일이나 스칸디나비아 반도 등 북유럽으로도 확대해 갔지만, 거의 정착되지 않고 장소에 따라서는 온건한 형태의 것으로 변용해 갔다. 또, 잉글랜드에서는 종교재판이 거의 행해지지 않았다. 중세의 종교재판이 어느 정도의 규모로 행해졌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가 없지만, 오늘날 사람들이 흔히 상상하는 것만큼 빈번히 행해졌다고는 생각하기 어렵다. 기록에 의하면, 중세 종교재판이 가장 활발하게 행해진 1233년에 프랑스 남부의 종교재판관으로 임명된 로베르 르 푸티는 수백 명에게 화형을 선고했지만 교황청에서는 형벌이 너무 가혹하다는 이유로 그를 1년간 해임하였다. 유명한 베르나르 드 기는 이단심문관을 16년간이나 근무했지만, 사형을 선고한 것은 40건에 지나지 않았다.
에스파냐의 종교재판 이것이 교황의 간섭에서 벗어난 독자적인 종교재판인 데다가, 종교재판이 정치적으로 이용될 위험성을 꿰뚫어 보고 있던 교황은 불가의 입장을 고수하였으나, 페르난도 왕의 정치적 공세에 의해 결국 승인을 받는 데 성공했다. 그 결과 에스파냐 종교재판은 수많은 처형자가 속출했으며, 종교재판의 어두운 이미지를 부각시켜 그리스도교에 어두운 역사가 드리우게 되었다.
당초엔 검사성성은 조르다노 브르노 같은 케이스만 취급했었지만, 이윽고 개인의 단죄보다 저작물을 중심으로 한 사상의 심의를 다루게 되면서 그에 따라 금서 목록을 작성하기에 이른다. 발족 이래, 로마의 종교재판소인 검사성성의 결정이 미치는 범위는 이탈리아 국내에 한정되어 있어 국외에 대해서는 금서 목록의 송부나 결정 사항의 연락 이상의 영향력을 미치지 않았다. 검사성성이 취급한 사안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은 뭐니뭐니해도 17세기의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저작에 관한 사안(이른바 갈릴레이 재판)이라 할 수 있다. 금서 목록은 폐지된 지 오래이지만, 검사성성 자체는 신앙교리성으로 개칭하여 오늘날까지 존속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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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any의 블로그 원문보기 글쓴이: han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