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86 호 | 이금희 아나운서가 보고 싶다 | 박 원 재(강원대 삼척캠퍼스 강사) | 옛사람들이 평생에 걸쳐 쓴 저술을 한 데 모은 글 모음집인 문집을 보면 반드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정형화된 장르가 하나 있다. 문집 저자에 대한 일종의 전기에 해당하는 행장(行狀)이다. 일반적으로 문집의 끝부분에 위치하는 이 행장의 체재 또한 정형적이다. 보통 세 부분으로 이루어지는데, 저자의 간략한 전기가 가장 앞에 오고 다음에 그의 인품과 주요 행적이 오며 마지막에 배우자와 자손들의 계보가 나열된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이 야곱을 낳고 야곱이 유다를 낳고’ 하는 식으로 나열되는 마지막 계보 대목에는 이름이 없는 이들이 등장한다. 저자의 아내와 딸들이다. 그녀들은 이름 대신 두 가지 방식으로 지칭된다. 먼저 아내는 개인이 아니라 가문을 뜻하는 본관명으로 등장한다. ‘김해 허씨, 여흥 민씨’ 하는 식이다. 다음으로 딸은 남편의 이름으로 대칭(代稱)된다. ‘첫째 딸은 홍길동에게 시집갔고, 둘째 딸은 이몽룡에게 시집갔고’ 하는 식이다. 존재 자체가 설명되어야 하는 사람들 역사적으로 성(젠더) 문제의 본질은 곧 권력 문제라는 것을 아마 이보다 여실하게 보여주는 사례도 별로 없을 듯하다. 여성은 우월적 계층인 남성과의 관계 속에서만 자신을 인정받고, 그 관계 속으로 입장이 허용되었을 때만 존재증명서를 부여받는다. 이 과정에서 여성은 그 관계망 어디에 속하는지를 바로 그 관계망의 언어로 설명되어져야 한다. 누구의 어머니이고 누구의 아내이며 누구의 딸인가가 그 ‘누구’의 언어로 설명되어야 하는 것이다. 여기서 ‘누구’는 곧 남성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신사임당이 한 사람의 독립된 인격을 지닌 예술가나 문인으로서가 아니라 율곡이라는 한 남성의 어머니로 각색됨으로써 역사 속에 자신의 존재증명서를 발급받을 수 있었던 사실이 이를 잘 말해준다.
남성의 언어로 설명되어져야 하는 존재로서의 ‘여성’은 옛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지금도 작동되는 시스템이다. 현대에는 이것이 사회적 의미를 지니는 주류적인 명칭을 ‘남성’이 차지하는 데에서 발견된다. 이 구도에서 ‘여성’이 자신의 정체성을 나타내기 위해서는 그 남성적 명칭을 통해 자신을 다시 설명해야 한다. 이를 테면, 언어학에서 말하는 유표화(有表化: marked) 과정이다. 주류에 속하지 않는 존재는 그 주류를 지칭하는 언어에 특별한 표식 언어를 덧붙임으로써 자신의 정체성을 설명해야 하는 그런 방식이다. 이 상황에서 주류는 아무런 별도 표식없이 그 언어의 의미를 배타적으로 독점한다. 조금 딱딱하게 이야기한 감이 있지만, 간단하게 말하면 작가에 대한 ‘여류’작가, 배우에 대한 ‘여’배우, 학교에 대한 ‘여’학교가 그런 경우이다.
이런 구도 속에서는 자신을 나타내기 위해서 별도의 표식 언어를 필요로 하지 않는 계층과 이에 대한 유표화의 과정을 통해서만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계층이 ‘중심’과 ‘주변’의 관계에 놓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럴 때 후자는 주체로서 대우받지 못하고 전자에 의해 객체로서 ‘소비된다’. 근래 사회적으로 이슈가 되고 있는 ‘#미투(Me Too)’ 운동이 발생하게 되는 사회적 맥락이다. ‘여성’이 소비되는 방식 우리 사회에서 ‘주변’으로서 ‘여성’이 소비되는 양태는 다양하다. 그것은 여전히 너무나 일상화되어 평소에는 거의 의식되지 못할 정도이다. 윗사람에게 아내를 소개할 때 아직도 “제 집사람입니다”라고 해야 마치 겸손의 품덕을 갖춘 교양인인 듯 착각하는, 나를 포함한 우리 연배의 남자들이 지니고 있는 구태도 그중 하나다. 딱히 뭘 어쩌겠다는 생각 이전에 회식 자리의 상사 옆에는 당연히 여직원을 앉히는 것이 예의라고 생각하는, 이미 너무나 많이 지적된 마초문화의 폐습도 마찬가지이다.
거의 대부분의 방송에서 5·60대 아저씨와 2·30대 젊은 여성을 조합으로 앵커진을 짜는 관성도 우리 사회가 어떻게 ‘여성’을 소비하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것은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모든 언론이 묵시적으로 의기투합하여 일치를 보이는 부분이다. 일전에 일부 공중파 방송이 장기간 파업을 했을 때, 나이든 여성 앵커가 대타로 나서 진행하던 뉴스 화면이 얼마나 낯설었던가를 기억한다. 우리가 뉴스를 소비하는 방식 가운데 중요한 하나의 요소인 젊은 여성 앵커가 부재하는 데에서 느꼈던 낯섦이다. 김동완 통보관이 구수한 입담과 전문적인 식견으로 날씨를 전하던 자리 또한 하나같이 미인대회 출신 뺨치는 젊은 여성 캐스터들로 점령된 지 오래다. 그들이 진행하는 날씨 코너에서 우리는 기상 정보를 얻는 것이 아니라 젊은 여성의 이미지를 소비한다. 이 때문에 똑같이 데스크에 앉아 뉴스를 진행하지만 남성 앵커와 여성 앵커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 하나가 발생한다. 남성 앵커의 자리에는 시간이 흐르지만 여성 앵커의 자리는 시간이 정지되는 것이다. 남성 앵커의 경험은 시간과 함께 관록과 노하우라는 이름으로 쌓이고 평가되지만 여성 앵커는 ‘유통 기한’이 끝나면 폐기되고 새로운 상품으로 대체된다. 이른바 ‘유리 천장’의 문제는 여성에게는 시간이 축적되는 것을 허용하지 않으려는 우리 사회 남성 중심 문화가 만들어낸 미필적 고의의 산물이다.
한 번의 대형사고가 발생하는 과정에는 앞서 29회의 경미하지만 비슷한 사고가 있고 또 그에 앞서 300회 이상의 아주 사소한 이상 현상이 반드시 먼저 있다는 하이인리 법칙은 사건사고 분야에만 적용되지 않는다. 하나의 심각한 사회적 불평등 혹은 폭력이 발생하는 과정에는 그에 앞서 수많은 경미하지만 유사한 불평등 혹은 폭력이 먼저 있고, 또 그에 앞서 그 자체로 생활화된, 따라서 일상에서는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강고한 불평등 혹은 폭력의 구조가 배경으로 놓여 있다. 나무가 건강하려면 숲도 건강해야 무슨 일이 일어났을 때 근본적인 차원의 문제부터 이야기하는 이런 식의 논의 방식을 달가워하지 않는 시선들이 있음을 안다. 말은 맞을지라도 논의 방향을 분산시켜 눈앞의 사태에 화력을 집중시키는 것을 방해한다는, 이를테면 전략이 아닌 전술적 차원의 문제제기이다. 맞는 주장이다. 허나 그렇다 하더라도 그 핀 포인트 폭격이 궁극적으로 무엇을 위한 것인가를 함께 계속 물어나가지 않는다면 전투에서는 이기고 전쟁에서는 지는 우를 범할 수도 있다.
얼어붙은 유신의 한복판을 지나던 시절 서울의 한 유명 사립대학교 총장은 당시 학생들의 시위에 대해 이유 있는 동요라고 평가하면서, 전면적인 공해 속에서 대학의 하늘에만 맑은 공기가 솟아오르기를 기대한다는 것은 무리라고 일갈한 적이 있다. 나무가 건강하려면 숲도 건강해야 한다는 것은 상식이다. 솔잎혹파리에 대처하는 최선의 방법은 감염된 소나무들을 신속히 제거하는 것과 동시에 해당 소나무숲 전체의 면역력을 강화하는 것이다.
하여, 사람 좋은 미소와 편안한 목소리로 아침 컨디션을 책임져 주던 이금희 아나운서를 TV 화면에서 다시 보고 싶다. ‘그녀’를 다큐멘터리 내레이터로 가두어놓는 것은 우리 사회가 아나운서로서 ‘그녀’가 축적해온 삶의 시간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것이다. 그렇게 하는 것은 ‘그녀’를 하나의 전문 인격체로서가 아니라 상품으로 바라보며, 유통 기한이 지난 부분은 폐기하고 아직 남아있는, 아니 남아있다고 여기는 부분만 알뜰히 소비하려는 행태이다. 우리 사회가 이렇듯 ‘여성’이 축적해온 삶의 시간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 한 유감스럽게도 ‘#미투’ 운동은 어떤 형태로든 반복될 것이다. | ▶ 글쓴이의 다른 글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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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박원재 | · 강원대(삼척캠퍼스) 강사 · 전 한국국학진흥원 수석연구위원 · 중국철학
· 저서 〈유학은 어떻게 현실과 만났는가〉예문서원, 2001 〈철학, 죽음을 말하다〉 산해, 2004 (공저) 〈근현대 영남 유학자들의 현실인식과 대응양상〉 한국국학진흥원, 2009 (공저) 〈500년 공동체를 움직인 유교의 힘〉글항아리, 2013 (공저)
· 역서 〈중국철학사1〉간디서원, 20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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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날카로운 글입니다.
이것이야말로 그 어느 면보다 여성들이 ‘me too’ 해야할 부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