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화과를 먹으며
황정산(시인, 문학평론가)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과일은 무화과이다. 몇 년 전까지는 이 무화과 먹기가 쉽지 않았다. 저장성이 별로 좋지 않은 무화과의 특성 때문에 제철에 산지인 목포나 영암에 가야만 먹을 수 있었다. 그런데 최근에는 교통이 좋아지고 저장 기술이 발전하여 서울을 비롯한 전국 어디에서도 무화과를 사 먹을 수가 있다. 그래서 해마다 무화과 철인 8, 9월이 오면 이것을 먹을 수 있다는 기대가 삶에 소소한 행복을 선사한다.
외양으로만 보면 무화과는 볼품없는 과일이다. 사과처럼 우아한 모습과 빛깔을 가지고 있지 못하고 복숭아처럼 육감적이지도 또 딸기처럼 앙증맞지도 못하다. 조물주가 피곤해서 대충 아무렇게나 만든 것처럼 약간 찌그러진 타원형에 색깔마저 칙칙한 어두운 빛을 띠고 있고 질감마저 가죽처럼 보여 쉽게 거부감을 줄 수 있는 모습이다. 거기다 과육의 안쪽은 피를 연상시키는 선홍색을 띠고 있어 약간 기괴한 느낌을 주기까지 한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무화과의 모습을 보고 ‘악마의 아가리’라든가 ‘마녀의 바기나’라고 부르기도 한다.
하지만 무화과의 맛은 이러한 외모와는 달리 반전의 매력을 가지고 있다. 약간 질겨 보이는 껍질을 이빨이 살짝 뚫고 나면 과육의 질감이 입안에 가득 느껴진다. 아이스크림처럼 부드럽지만 아이스크림마냥 쉽게 사라지지 않고 입안에서 오래 남아 아주 고상한 단맛을 느끼게 해준다. 무화과의 단맛은 다른 과일의 단맛처럼 자극적이지 않고 은은해서 몸과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그런 단맛이다. 또한 향기 역시 야단스럽거나 진하지 않아 아주 멀리서 다가오는 아름다운 여인의 향기처럼 희미하면서 기품이 있다.
그런데 이 좋은 맛과 향기에 쉽게 다가가지 못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 무화과를 먹어보지 못한 많은 사람에게 먹어보기를 권했는데 그중 많은 사람이 쉽게 먹으려 하지 않았다. 어쩐지 거부감이 들어 먹기에 꺼림칙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사람들을 무화과를 먹는 사람과 먹지 않는 사람 두 부류로 나누곤 한다. 약간의 비약을 무릅쓰고 일반화하자면 무화과를 먹는 사람은 대체로 개방적이고 진취적이다. 새로운 것에 열려 있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 반대로 먹지 않는 사람들은 보수적이고 폐쇄적이다. 자신의 완고한 세계를 바꾸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무화과를 먹지 않는 이유는 사실 두려움 때문이다. 무화과를 먹을 수 없다는 어떤 이는 무화과 속에 들어 있는 수많은 꽃봉오리가 마치 벌레들처럼 느껴져 그렇다고 한다. 이처럼 알지 못하는 새로운 것이 자신에게 해를 입히거나 불편한 감정을 불러일으킬 것 같은 막연한 두려움이 쉽게 무화과에 입을 대기 어렵게 만든다.
나는 이런 두려움이 세상에 많은 문제를 만들어낸다고 생각한다. 두려움 때문에 나와 다른 사상을 가진 사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두려움 때문에 나와 다른 성적 정체성을 인정하지 못하고 두렵기 때문에 나와 다른 피부색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들이 나와 내 가족들에게 그리고 우리 사회에 해를 입힐 것 같기 때문이다. 이 막연한 두려움이 그들을 거부하게 만든다. 파시즘을 포함한 많은 독재 권력들은 이 두려움을 이용한다. 그리고 지금도 이 두려움이 세상 곳곳에서 분란을 일으키고 있다.
두려움이 무화과라는 새로운 맛의 경험을 하지 못하게 한다는 것은 개인적으로 불행한 일이다. 두려움 때문에 나와 다른 사람들을 거부한다는 것은 결국 그것이 폭력과 차별과 혐오를 만들기에 더 큰 사회적 불행이다.
시나 수필 같은 글을 쓴다는 것은 어쩌면 이 두려움에서 벗어나야 가능한 일이다. 그것은 항상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일이기 때문이다. 세상을 새롭게 다시 보고, 새로운 생각을 하고, 더 좋은 새로운 세상을 꿈꾸고, 또한 이 모두를 새로운 언어로 표현해야 한다. 이런 경험은 익숙한 일상의 세계에서 벗어나 나를 전혀 다른 곳에 위치시켜야 하는 일이므로 두려운 일이다. 하지만 이 두려움을 넘어서야 비로소 좋은 글을 쓸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