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월 16일 월요일 두 분의 원로 교장선생님과 아산시 소재 문화재 탐방에 나셨다.
대한민국 4대 윤보선 전임 대통령이 이 댁에서 태어나셔서 5살 까지 살았던 주택.
문화재 탐방은 월요일과 화요일은 피하는 것이 좋다고 합니다....왜냐하면? 월 화는 휴관하는 곳이 많아서
윤보선 전임대통령 생가도 월요일이어서 굳게 대문이 잡겨져 있어서 들어가 볼 수 없어서 아쉬웠습니다.
---참고로 대하 축제 방향으로 가려다가 거리가 멀고 또 겨울철이라 일조시간도 짦아 할 수 없이 아산시로 방향을 전환하게 되었음을 알림니다.---

아산에서 둔포 가는 (45번국도)에를 이용하여 현충사 가는 길의 충무교를 건너 직진하면 둔포 가는 길인데 이 길로 계속가면 충무유원지를 지나면서 우측에 윤보선 전 대통령의 묘소 가는 길의 이정표가 있다. 이곳을 지나쳐 계속가면 이충무공 묘소 입구와 음봉면 소재지가 나온다. 계속 둔포 방면으로 직진하여 계속가면 봉재 저수지가 나오며 이곳에서 2Km정도가면 대성 강판의 회사 간판이 보이는데 윤보선 대통령 생가란 이정표를 따라가면 된다.
아산시 둔포면 신항리 143 윤보선 전 대통령 생가는 ‘ㄴ’자형 행랑채, 뒤쪽에 ‘ㄱ’자형 안채와 ‘ㄴ’자형 안사랑채가 안마당을 둘러싸고 행랑마당 오른쪽에 ‘ㄴ’자형 바깥사랑채가 자리잡고 있어 전체적으로 ‘파(巴)’자형의 평면구조를 하고 있는 전형적인 중부지방의 건축물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생가의 99칸 저택 중 현재 남아 있는 사랑채, 안채, 문간채, 행랑채 등은 지난 84년 12월 24일 국가지정 중요민속자료 196호로 지정됐으며 주변에 윤씨일가 3가구의 사랑채, 아래채, 안채, 광채, 문간채 등도 충남도 민속자료 12, 13, 15호로 함께 지정돼 보존되고 있다
# 윤보선 전임 대통령 생가에 있는 사랑채

# 윤보선 전임 대통령 생가 안내문( 사진이 잘 안 나왔네요)

===윤보선 전임 대통령===
1897. 8. 26 충남 아산~1990. 7. 18 서울.
정치가, 제4대 대통령.
호는 해위(海葦). 1912년 일출소학교를 졸업한 후 일본 도쿄[東京]로 건너가 게이오 의숙[慶應義塾] 의학부에서 공부하다가, 세이소쿠[正則] 영어학교로 옮겼지만, 2년이 채 못 되어 중퇴하고 귀국했다. 20세 되던 해에 독립운동을 위해 여운형을 따라 중국 상하이[上海]로 건너갔다. 1919년 3·1운동 이후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해오라는 이승만의 지시에 따라 일본 도쿄에 잠입하여 그곳에 체류중인 동생 윤완선을 시켜 고국에서 자금을 가져오도록 했다. 도쿄에 머무르는 동안 백관수·김도연 등과 함께 이월회(二月會)를 조직하여 독립운동을 계획했고, 상하이로 돌아온 후 최연소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으로 피선되었다. 1921년 6월 영국 유학길에 올랐다.
1945년 해방과 더불어 정계에 투신, 미군정청 농상국 고문으로 임명되었다. 1946년 민중일보사 사장과 미군정청 경기도지사 고문직을 맡았다. 1948년 5·10총선거 때 고향인 아산에서 제헌국회의원에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정부수립과 함께 초대 서울시장에 임명되었으며, 1949~50년 상공부장관, 한영협회(韓英協會) 회장직을 맡았다. 같은 해 금융통화운영위원회 정위원, 대한적십자사 총재, 1951년 상이군인신생회 회장, 1952년 한정협회(韓丁協會) 회장 등을 지냈다. 1952년 5월 부산정치파동 이후 이승만 대통령과 결별하고 야당의 대열에 들어서 1954년 제3대 민의원(종로갑, 민주국민당), 같은 해 민주당 중앙위원, 1957년 민주당 중앙위원회 의장, 1958~60년 제4·5대 민의원(종로갑, 민주당), 1959년 민주당 최고위원 등을 거치면서 야당 지도자로서의 지위를 굳혔다.
1960년 4·19혁명으로 자유당정권이 붕괴된 후 제4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첫댓글 풍산 윤보선 전대통령의 집은 서울에서 태어난 줄로만 알고 있었는데 아산에 생가가 있는것은 풍산의 관광 기행으로 알게 되었네요 풍산 감사 해요
아산은 내 이모네가 살았던 곳이고 그 음봉면 이란 곳은 어렸을 때 육이오 피난 갔던 곳입니다.더 안전할 것도 없는 거기가 거기인 곳으로 피난을 갔던 거죠...다들 피난 가니까 우리 어른신들도 피난 간 것이었는지...윤보선 전 대통령 네는 부자 였던가 봅니다...그당시는 대부분 땅 가지고 부자가 되었을 겁니다...무슨 공장이나 무역회사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그래서 세 교장 선생님들,대하 맛은 못 봤겠습니다...서봉
서봉...그래요 대하 맛은 못 보았지면 좋은 시골밥상집에서 대접 잘 받았습니다..........풍산
이 분의 장례를 가족장으로 치뤘다고 하는데... 이 분의 훌륭한 성품이 돋보입니다. 잘 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