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0719. 묵상글 ( 연중 제15주간 토요일. - 힘없어도 힘 있는. 등 )
죄송한 말씀을 드립니다. 다른 날보다 너무 늦게 일어나
다른 때보다 달리 노트북도 제대로 기능?이 ---
그러다 보니 조금전 6시 15분에서야 몇 분의 글 다 옮겼습니다
강론글, 묵상글 보시려고 일찍부터 이 곳에 들어오셨을 분들께 사과의 말씀을 올립니다.
6:20. 김 루도비꼬 드림,
----------------------------------------------------
250719. 연중 제15간 토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5.07.19 04:07
- 힘없어도 힘 있는
어제와 오늘 창세기는 마침내 이스라엘 민족이 이집트를 탈출하게 되는 얘깁니다.
지난 화요일 저는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일에 있어서
모세와 파라오를 각기 당신 도구로 쓰셨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욥기를 보면 하느님께서 천상 회의를 여시고는
욥을 단련시키는 악역으로 사탄이라는 패를 쓰셨지요.
우리는 편견을 가지고 있습니다.
천사만 하느님의 도구라는 편견 말입니다.
그런데 지난 화요일에 이미 말씀드렸듯이 우리가 이집트,
곧 이 세상을 떠나도록 하는 데는 파라오 곧 사탄보다
더 역할을 잘하는 것이 없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부귀영화를 누리는 사람이 그 좋은 것을 다 놔두고 억울해서
어떻게 떠나고 어떻게 천당을 갈 수 있겠습니까?
스스로 떠날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하느님이 그리고 하느님 나라가 얼마나 좋은지 맛보고 깨달은 사람만
스스로 떠날 텐데 하느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맛보고 깨닫는 것조차
스스로 맛보고 깨닫게 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맛이 얼마나 쓴지 하느님께서
맛보게 하셔야만 새로운 맛을 찾고 하느님 나라의 맛도 보게 되는 것입니다.
프란치스코에게서 이것을 우리는 잘 볼 수 있지요.
그러므로 세상을 애착하는 사람을 세상에서 쓴맛 보게 하는 사람,
이 세상에서 떠밀고 내모는 사람 곧 파라오와 사탄이 필요합니다.
어쨌거나 파라오의 악역 덕분에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떠날 수 있게 되었지만
이제부터 광야를 지나 가나안까지 그들을 건너가게 하는 것은 모세의 몫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이 광야를 지나 가나안까지 건너갈 동안
끝이 보이지 않는 시련 때문에 절망하고 건너가기(파스카)를
포기하려는 백성들을 수없이 달래며 희망을 제시해야 합니다.
오늘 복음은 주님께서 이스라엘을 영도하던 모세처럼
꺾이고 상처받은 우리에게 희망을 제시하는 분이라고 얘기합니다.
“그는 올바름을 승리로 이끌 때까지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니 민족들이 그의 이름에 희망을 걸리라.”
이것은 너무도 쉽게 포기하는 우리 인간을 포기하지 않으시는 사랑이며,
우리 인간으로선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절망 치유의 힘입니다.
우리는 부러진 갈대를 꼴 보기 싫어합니다.
싱싱한 젊은이를 보고 싶지 쭈글쭈글한 늙은이를 보고 싶지 않고
싱싱한 것을 보고 싶지 상처받고 골골하는 꼴은 보고 싶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치유할 수 없고 구해 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내가 치유하고 내가 구해 낼 수 있다면 덤벼들어 구할 텐데
그럴 수 없으니 그냥 외면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혜서의 말씀대로 하느님은 전능하시기에 자비로우시고,
당신이 창조한 피조물을 싫어하실 리 없고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당신께서는 모든 것을 하실 수 있기에 모든 사람에게 자비하시고
모든 것을 사랑하시며 당신께서 만드신 것을 하나도 혐오하지 않으십니다.
당신께서 지어 내신 것을 싫어하실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생명을 사랑하시는 주님은 모든 것이 당신 것이기에 모두 소중히 여기십니다.”
물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힘없는 분으로 계시고 힘없는 분으로 돌아가셨지만
전능하신 하느님의 이 사랑에 우리보다 먼저 희망을 두시고 의탁하신 분이셨으며,
그렇기에 힘이 없는 우리에게 희망 되시고 우리도 희망을 지닐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주님처럼 힘없어도 힘 있을 수 있습니다.
생명을 사랑하시고 모두를 소중히 여기시는 하느님에 힘입으면 됩니다.
그래서 우리 곁의 꺾인 갈대와 꺼져가는 심지들에게 희망이 되어야겠습니다.
----------------------------------------------------
250719. 연중 제15간 토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회개와 영적승리의 삶
“주님과 함께하는 파스카의 삶”
"새벽부터 일어나서, 도움을 빌며
당신의 말씀에 희망을 거나이다."(시편119,147)
폭우로 인해 전국적으로 피해가 참 많습니다. 큰비가 내리고 나니 불암산 계곡 흐르는 물소리가 요란하고 흐르는 물길 모습도 힘차서 좋습니다. 오래전 <혁명>이란 자작시가 생각납니다. 지금 저는 하느님의 생음악 빗소리를, 계곡물 흐르는 소리를 들으며 강론을 씁니다. 놀랍게도 바로 24년전 2001년 7월19일 오늘 시입니다. 하느님 눈에는 24년전이나 지금이나 '영원한 현재의 오늘'입니다.
“이런게 혁명이라면
가끔은 있었으면 좋겠다
꼭 큰 비가 내려야
맑게 흐르는 시내인가
비 없어도 늘 맑게 흐를 수는 없나
바짝 마른 바닥에 잡초와 오물들
대책없이 썩어 악취를 발하던 시내
폭우내리니
말끔히 씻겨 정리되고
하얀 모래에 맑게 흐르는 물
살아 노래하는 시내가 되었다
이런게 혁명이라면 가끔은 있었으면 좋겠다.”<2001.7.19.>
이런 혁명은 가능합니다. 바로 영적혁명, 내적혁명인 회개입니다. 어느 때 보다 생태적 회개가 절실한 때입니다. 인공지능 AI가 아닌 회개가 답입니다. 웬지 판도라의 상자가 열린 듯 인류의 미래에 대한 불길한 느낌도 듭니다. 어느 지인이 보내준 <AI;한없이 전기를 먹는 인류의 괴물 우상인가>라는 글입니다.
1.기계는 대답하고 지구는 타들어 간다.
2.기술은 진보하고 인간은 퇴보한다.
3.생명은 연산(演算)이 아니다.
4.우리는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정말 분별력의 지혜가 절실한 작금의 시대입니다. 참으로 실용과 더불어 그 이상으로 관상을 강조할 때입니다. 관상의 기초가 되는 끊임없는 회개를 통한 내적혁명의 삶, 영적승리의 삶, 주님과 함께 하는 파스카의 삶이 절실한 때입니다. 얼마전 레오 교황의 <생태적 위기는 관상적 시선을 요구한다>라는 주제의 강론에 전폭적으로 공감했습니다.
“우리는 교회 안팎의 많은 이들의 회개를 위해 기도해야 한다. 그들은 여전히 우리 공동의 집인 지구를 배려하는 일이 얼마나 긴급한 일인지 인정하지 않는다...오직 ‘관상적 시선’(contemplative gaze)만이 피조물과의 관계를 바꿀수 있고, 죄의 결과 야기된 관계의 파멸로 인한 생태적 위기로부터 우리를 이끌어 낼 수 있다.”
작금의 위기의 시대, 실용의 강조와 더불어 그 이상으로 강조되어야할 내적혁명의 회개라는 파스카의 삶, 관상적 삶입니다. 오늘 말씀 주제는 주님과 함께 하는 승리의 삶, 영적 승리의 삶입니다. 오늘 탈출기는 하느님의 도움으로 열째 재앙을 통해 이집트에 승리한 이스라엘 백성 60만명의 승리의 행군을 보여줍니다. 이집트의 압제하에서 430년이 끝나는 바로 그날 주님의 모든 부대가 이집트 땅에서 나옵니다. 탈출기의 마지막 구절은 파스카 승리의 밤에 대한 묘사입니다.
‘그날밤, 주님께서 그들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시려고 밤을 세우셨으므로, 이스라엘의 모든 자손도 대대로 주님을 위하여 이밤을 새우게 되었다.’
바로 여기서 유래한 우리 교회의 <파스카 성야>입니다. 아니 참으로 믿는 모든이에게 모든 밤은, 하루하루 날마다 동터오는 부활의 새벽을, 새날을 앞둔 파스카의 밤일 수 있습니다. 바로 여기서 깊이 묵상하고 배워야 할 내용은 파스카 예수님의 관상적 승리의 삶입니다.
바로 이사야의 ‘주님의 종의 노래’(이사42,1-4)에 바로 그 답이 있습니다. 이렇게 살 때 비로소 관상적 시선, 관상적 삶의 회복입니다. 예수님은 물론 시공을 초월하여 예수님을 따르는 모든 참된 제자들이 이렇게 살았고, 바로 오늘의 우리가 배워고 따라야 할 삶의 지침입니다.
“보아라, 내가 선택한 나의 종, 내가 사랑하는 이, 내 마음에 드는 이다. 내가 그에게 내 영을 주리니, 그는 민족들에게 올바름을 선포하리라. 그는 다투지도 않고 소리치지도 않으리니, 거리에서 아무도 그의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그는 올바름을 승리로 이끌 때까지,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연기나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니, 민족들이 그의 이름에 희망을 걸리라.”(마태12,18-21)
예수님은 결코 선동하는 시끄러운 분이 아니었습니다. 한없이 깊고 고요하며 인내하고 섬세하며 온유하고 겸손하며 자비롭고 지혜로운 분이셨습니다. AI이 아니라 이런 관상적 영적 승리의 삶이 인류의 미래이자 희망입니다.
실용에 앞서 끊임없는 내적혁명의 회개로 이런 1.“침묵과 경청, 온유와 겸손, 배려와 존중, 정의와 평화, 사랑과 인내”를 살아내는 관상적 영적 승리의 삶이, 2.최소한도 의식주의 단순소박한 삶으로 쓰레기를 덜 내는 삶이, 3.소유의 쾌락이 아닌 날로 비워감으로 존재의 기쁨을 사는 자발적 가난의 관상적 삶이 참으로 절실한 시절입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내적혁명의 관상적 회개의 삶에 참 좋은 도움을 주십니다.
"주님 좋으시다 찬미들 하라.
당신의 자비는 영원하시다."(시편107,1). 아멘.
----------------------------------------------------
250719. 연중 제15간 토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손 오그라든 병자를 낫게 하신 일에 대한 바리사이들과 군중들의 반응에 대하여 취하신 두 가지 처신을 들려줍니다. 한편으로는 당신을 죽이려고 모의를 꾸미는 바리사이들을 피하고, 또 한편으로는 당신을 따르는 군중들을 고쳐 주시면서 남에게 알리지 말라고 당부하십니다. 곧 예수님의 ‘온유하고 겸손하신 모습’과 측은히 여기며 ‘자비롭고 신실하신 모습’입니다.
이 사실에서, 마태오복음사가는 예언자 이사야의 말씀이 이루어졌음을 봅니다. 곧 예언자 이사야는 “야훼의 종의 첫째 노래”에서, 위의 두 가지를 메시아의 특징으로 말해줍니다.
“그는 다투지도 않고 소리치지도 않으리니, 거리에서 아무도 그의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그는 올바름을 승리로 이끌 때까지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라.”(마태 12,19-20)
이 말씀을 들으면,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신 주님의 ‘돌보심과 신실하심’과 ‘측은히 여기시는 마음’이 전해져 옵니다.
동시에, 이 말씀은 저희 자신을 들여다보게 합니다. 사실, 저희는 죄 있는 형제들에게 손을 뻗어 위로하기보다 돌팔매질하기를 자주 합니다. 형제들의 짐을 져주기보다 오히려 더 큰 짐을 얹어 짓누르기도 합니다. 또한 약한 형제를 못 본 척 홀로 두고서, 제 길을 가기에 바쁩니다. 형제를 존중하기보다 하찮게 여기며, 마치 없는 사람처럼 무시하고 업신여기기도 합니다. 그렇게 저희는 기 꺾인 이들을 짓밟고, 부러진 갈대는 꺾어버리고, 연기 나는 심지는 꺼버리기를 거리낌 없이 하곤 합니다.
그러나 당신은 그런 저희를 구해 주십니다. 당신께서는 저희가 음모를 꾸미고 악의를 품고 있을 때도, 넘어지고 부러져 있을 때도, 저희를 꺾어버리지 않으십니다. 저희가 무너지고 또 무너져도 저희에 대한 신뢰를 거두지 않으십니다. 저희가 당신을 배신하고 거부할 때마저도 결코 저희에게서 희망을 거두지 않으십니다. 저희를 따라다니며 뒤를 처리해주시고, 신실하심으로 저희를 이끄십니다.
주님께서는 저희 영혼이 병들어 말라 갈 때, 오히려 저희를 택하여 당신의 사람으로 만드시고 사랑을 쏟으십니다. 당신의 영을 부으시고 당신의 제자로 삼으십니다. 성소를 내팽개치고 달아날 때도 결코 저희에게서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십니다. 아니, 저희를 따라다니며 뒤를 처리해주십니다. 참으로 온유하고 겸손하신 모습으로 돌보아주십니다. 참으로 선하시고 자비하신 모습으로 신실하십니다. 그토록 신실하신 사랑, 그 지치지 않는 사랑과 연민으로 저희를 이끄십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그는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라.”(마태 12,20)
주님!
당신은 제가 무너지고 또 무너져도 저에 대한 신뢰를 저버리지 않으시고,
배신하고 또 배신하며 거부할 때에도 저에게서 희망을 거두지 않으셨습니다.
음모를 꾸미고 악의를 품고 있을 때도 부러진 갈대를 꺾어버리지 않으시고,
성소를 내팽개치고 달아날 때도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셨습니다.
도망질쳐도 언제나 동행하시고 제 영혼이 병들어 말라갈 때,
오히려 저를 택하시어 당신의 사람으로 만드시고 사랑을 쏟으셨습니다.
하오니, 주님!
이제는 제 갈 길을 가느라 약한 이를 홀로 두지 않게 하소서.
넘어진 이를 일으켜 세우고, 짐 진 이를 위로하게 하소서. 아멘.
----------------------------------------------------
250719. 연중 제15간 토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서울 대교구 사제 모임을 잘 마쳤습니다. 다양한 프로그램이 있었습니다. 언제나 미사가 중심에 있었고, 아름다운 자연을 볼 수 있는 산행이 있었습니다. 함께 걸으면서 선배 사제들은 경험을 나누었고, 후배 사제들은 신선한 생각을 나누었습니다. 무엇보다 감사하고 고마운 것은 본당 교우분들의 헌신과 수고였습니다. 형제님들은 차량 봉사를 해 주었고, 자매님들은 맛있는 음식을 준비해 주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만들어 주셨듯이, 자매님들은 매일 더 맛있는 음식을 마련해 주었습니다. 매일 미사에 많은 교우분이 함께 해 주시면서 사제들을 위해서 기도해 주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느님의 천사를 따뜻하게 맞이해서 100세의 나이에 아들을 얻었듯이, 사제들을 환대해 준 본당 공동체에도 하느님께서 축복을 주시기를 청하였습니다. 사람은 ‘착하게 살아야 한다.’라는 말을 실감했던 교구 사제 모임이었습니다. 본당 신부님은 같은 본당 출신이었고, 초등학교 동창이었습니다. 본당 수녀님은 제가 신학생 때 초등학생이었습니다. 친구는 사제가 되었고, 교리를 가르쳤던 학생은 수도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40년 세월이 흘러 다시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태초부터 마련해 주신 하느님의 뜻이라고 느껴졌습니다.
구약의 사건이 신약의 예수님을 통해서 완성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한 모습을 복음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이사야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 보아라, 내가 선택한 나의 종, 내가 사랑하는 이, 내 마음에 드는 이다. 내가 그에게 내 영을 주리니 그는 민족들에게 올바름을 선포하리라. 그는 다투지도 않고 소리치지도 않으리니 거리에서 아무도 그의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그는 올바름을 승리로 이끌 때까지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니 민족들이 그의 이름에 희망을 걸리라.” 하느님께서는 이집트에서 고통받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의 아픔을 아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약속의 땅으로 이끌어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누룩 없는 빵을 먹으면서 하느님을 찬미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와 죽음과 악의 유혹으로 방황하는 인간을 불쌍히 여기셔서 십자가를 통하여 영원한 생명으로 이끌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몸과 피를 내서 주셔서 우리에게 생명의 양식을 주셨습니다. 이 모든 것이 하느님께서 태초부터 마련해 주신 은총입니다.
이사야의 예언에서 등장하는 ‘부러진 갈대’와 ‘연기 나는 심지’는 고장나고, 꺼질 듯한 존재를 의미합니다. 연약하고, 깨어지고, 희망이 없어 보이는 사람들, 곧 우리 시대의 소외된 이들을 떠올리게 합니다. 현대사회에서 우리는 자주 경쟁과 효율성만을 기준으로 사람을 판단합니다. 실패한 이들, 늦은 이들, 상처 입은 이들은 자주 도태되고 외면당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사람들을 절대로 꺾지 않으십니다. 도리어 그 안에 있는 생명의 불씨를 지켜 주십니다. 희망은 언제나 작은 불씨에서 시작되고, 하느님의 은총은 가장 연약한 자리에서 자라납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방식이며, 우리가 닮아가야 할 사랑의 방식입니다. “사람은 착하게 살아야 한다.” 이 단순한 말이 지금 우리 사회에 던지는 울림은 매우 큽니다. 착하게 산다는 것은 단지 법 없이 산다는 뜻이 아닙니다. 남의 약점을 꺾지 않고, 내 마음의 불씨를 꺼뜨리지 않으며, 이웃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는 것, 그것이 진정한 착함입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우리 시대는 지나치게 성과 지향적이고 피로사회에 빠져 있다.” 이런 시대일수록 예수님의 가르침이 중요합니다. “소리 지르지 않고, 다투지 않고, 그저 진리를 걷는 조용한 길”이 얼마나 필요한지 깨닫게 됩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는 이집트 탈출의 마지막 밤, 하느님께서 친히 밤을 새우셨다고 합니다. “그날 밤, 주님께서 그들을 이집트에서 인도하시려고 밤을 새우셨으므로” 하느님은 밤을 새우시며 고통받는 이들을 지켜보시고, 그들을 인도하십니다. 이 밤은 단지 ‘과거’의 한순간이 아니라, 지금도 고통의 밤을 살아가는 이들과 함께 머무시는 하느님의 현재입니다. 그리고 그 섭리 속에서 우리는 때때로 놀라운 재회를 맞이합니다. 친구였던 이가 사제가 되고, 가르치던 아이가 수도자가 되는 것처럼, 하느님께서는 우리 삶의 인도자이십니다. 우리는 그분의 짜임 안에서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우리 삶의 여정에서 ‘착하게 산다’라는 것,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연기 나는 심지를 살리는 존재가 된다는 것, 그것은 세상의 기준이 아닌 하느님의 시선으로 사는 삶입니다. 기도와 헌신으로 함께 해 주신 교우 여러분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그는 올바름을 승리로 이끌 때까지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니 민족들이 그의 이름에 희망을 걸리라.”
----------------------------------------------------
250719. 연중 제15간 토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달빛에 의해 배우는 길!
하느님의 숨
2025.07.18. 17:41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 2025년 7월 18일 금요일 - 스물아홉 번째 주간 (호명환 번역): 어둠과 빛의 춤!
예수님은 어둠에 대해서나 더디게 성장하는 것에 대해 참을성 있게 지켜보아 주시는 분으로서, "달과 같은" 이미지를 더 많이 지니신 선생님이십니다.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매일 묵상은 그리스도교 관상 전통에 뿌리를 두고 리처드 로어와 CAC 운영진, 그리고 객원 교수들의 묵상 글을 제공해 주어 우리의 영적 수양을 심화시켜 주고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에서 동정(compassion)을 구현하도록 도와줍니다.
리처드 신부는 어떻게 해서 영적인 여정에 있어 앎과 알지 못함이 다 신뢰할 수 있는 길인지를 설명합니다:
우리는 각자가 앎과 알지 못함 사이에서 내면의 영적 균형을 잡기 위한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어쩌면 이 두 종류의 영적인 전통을 지칭하는 가장 보편적인 방식은 빛과 어두움일 것입니다. 이에 대해 신학에서 사용하는 공식적인 용어가 있습니다. 하나는 kataphatic(긍정적 방식) - 말과 개념과 이미지들을 적용하는 방식 - 이고, 다른 하나는 apophatic(부정적 방식) - 말과 개념을 넘어 침묵으로 향하는 방식으로서 이성적 앎을 넘어서는 것 - 입니다. 저는 이 두 가지 방식이 다 좋은 것이고 또 꼭 필요하다고 믿습니다. 이 둘은 함께 성서적 신앙이라고 하는 놀랍고도 더 높은 차원의 의식을 형성해 줍니다.
하지만 부정적 방식(apophatic way)은 신교 개혁과 계몽주의를 거치면서 덜 사용되었고, 덜 가르쳐졌으며, 덜 발전되었습니다. 사실, 서구인들은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 창피하게 생각하게 되었기에 이성적으로 이 무지를 타개해 나가려고 노력해 왔습니다. 이 때문에 수 세기 동안 서구에서의 그리스도교는 방어적인 자세, 즉 피포위 심리(siege mentality: 항상 적들에게 포위되어 있다고 믿는 강박관념)를 지니게 되었습니다. 이런 심리는 확실성과 명확성을 필요로하고, 알지 못하는 것이나 신비적인 전통을 위해서는 여지를 별로 주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오늘날도 여전히 종종 그런 퇴보적인 입장을 보입니다. 우리가 이 시대에 앎과 알지 못함의 두 줄기를 재-통합하는 일은 아주 중차대한 일입니다.
만일 우리가 빛에 대해서 말하려고 한다면 우리는 어둠에 대해서도 말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둘은 서로와의 관계 안에서만 그 의미를 지니기 때문입니다. 세계 미술품들 대부분을 보면 해와 달이 신정한 상징으로서 함께 그려져 있습니다. 태양빛이 눈부시게 빛나면 빛날수록 역설적으로 더 선명한 그림자를 만들어냅니다. 때로는 그 빛이 너무 밝고 뚜렷해서 역설적으로 보이는 것이 흐릿해지거나 보는 이의 눈이 멀기까지 합니다. 가부장적 종교들은 대개 "해"를 선호하고 불과 빛과 질서를 숭배합니다. 질서와 선명함은 좋은 것이긴 하지만 바로 그 질서와 선명함으로 인해 우리는 오만해지기도 합니다.
달빛은 훨씬 더 미묘하고 서서히 스며들며 간접적인 특징을 지니기 때문에 더 명료할 수 있고, 덜 위협적일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처음에 어둠에서 빛을 가르셨을 때 그것을 "좋다"고 하시지 않았습니다(창세 3,13). 태초부터 우리는 어둠으로부터 빛을 완전히 나눌 수 없다는 경고를 받은 겁니다. 이 두 개가 분리되면 어떤 의미도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창조된 세상 전체는 하나의 충만한 순환의 고리 안에서 존재하게 됩니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첫날이 지났다."(창세 1,5). 이 둘을 분리하는 것은 분명히 좋은 것이 아닙니다! 이 지상의 모든 것은 어둠과 빛의 혼합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저는 예수님이 어둠에 대해서나 더딘 성장에 대해 참을성 있게 기다리시는 분으로서, "달과 같은" 이미지를 더 많이 지니신 선생님이시라는 것을 우리 모두 인식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분은 말씀하십니다. "밤에 자고 낮에 일어나고 하는 사이에 씨는 싹이 터서 자라는데, 그 사람은 어떻게 그리되는지 모른다."(마르 4,27). 그분은 기꺼이 알지 못함과 더불어 사시고자 하시는 분이시며, 이로써 그분은 우주의 인내심과 하느님의 확실한 자유를 아주 잘 드러내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마침내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될 때 우리는 모든 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완벽하게 해낼 필요가 없다는 것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행복하게 일하며 살아갈 수 있고, 심지어는 자그만 "겨자씨들"(마르 4,31)만 갖고도 효과적을 일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 공동체 이야기
우리는 우리가 사랑하는 누런 래브라도 리트리버 머시(Mercy)를 하늘 나라로 보내 주기 위해 석양을 향해 가고 있었습니다. 깊은 슬픔에 한가운데서 저는 제가 태양을 바라보는 동안 제 눈물이 놀라운 색깔을 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순간 저는 그 찬란한 빛 속에서 하느님의 권능과 사랑이 저를 감싸 안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평화가 슬픔 한가운데서 저를 감싸 안고 있었던 겁니다.
—Ellen P.
References
Adapted from Richard Rohr, Things Hidden: Scripture as Spirituality, rev. ed. (Franciscan Media, 2022), 123–125.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Niko Tsviliov, untitled (detail), 2023, photo, Ukraine,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저 달이 자기 자신의 모습은 그대로 간직한 채 그림자와 빛과 더불어 춤을 추듯이, 우리도 저 달의 지혜의 리듬에 맞추어 그림자와 빛과 더불어 춤을 춥니다.
====================
숨영성 묵상글
주님의 이름에 희망을 걸리라!
하느님의 숨
2025.07.19. 05:53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를 보면 어린 왕자가 첫 번째 별에서 만남 임금을 기억하시지요?
그는 매우 고압적인 임금이었지만 오직 합리적인 명령만을 내리는 임금이었습니다. 그 임금이 어린 왕자에게 예를 들어 이런 말을 합니다. "내가 어느 장군에게 바다의 새가 되라고 명령을 내렸는데, 만일 그 장군이 내 명령에 복종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장군의 잘못이 아니라, 내 잘못이다."
자기가 합리적인 명령을 내리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이 말이 저는 참 마음에 와 닿습니다. 이 임금이 자기 자시에 심취해 있는 사람의 전형으로 묘사되기는 하지만, 어쩌면 우리 하느님께서 만드신 세상 안에서 하느님께서 성령을 통해 하시는 일을 순수하고 결연한 희망을 바라보게 해 주는 인물이기도 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어린 왕자가 해가 지는 것을 보고 싶다고 하며 임금에게 해가 지도록 명령해 달라고 하자, 이 임금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해가 지는 것을 볼 거야. 내가 명령을 내릴 거니까. 그러나 나의 통치 원리에 의하면 나는 조건이 좋아질 때까지 기다려야 해."
해가 지는 시간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해는 반드시 지게 되어 있습니다.
어제 CAC 매일 묵상에서 리처드 신부님은 예수님이 "어둠에 대해서나 더디게 성장하는 것에 대해 참을성 있게 지켜보아 주시는 분으로서, "달과 같은" 이미지를 더 많이 지니신 선생님"이시라는 점을 강조해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인내심 있게 기다려 주시면서 당신의 반드시 하시는 데, 우리 역시 이 기다림 안에서 삶을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희망을 갖고 말입니다.
얼마 전에 읽었던 글입니다.
어떤 할머니가 공원 벤치에 크게 낙담한 모습으로 앉아 있었습니다. 길을 지나던 어떤 사람이 할머니에게 물었습니다. "할머니,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아침부터 이렇게 침울한 모습으로 앉아 있으니 말입니다. 혹시 제 도움이 필요하시면 말씀하세요."
그러나 그 할머니가 그 사람을 올려다 보고는 이렇게 대답하더랍니다. "있잖아요. 나는 지금까지 많은 일에 대해 걱정하면서 살아왔어요. 그런데 그 걱정들 대부분은 일어나지 않았답니다!"
그 사람이 놀라서 할머니에게 "아니, 걱정했던 일들이 일어나지 않았다고요? 그런데 왜 지금 그렇게 근심에 빠져 계시나요?"
그러나 그 할머니가 근심스러운 표정으로 이렇게 대답하더랍니다. "지금은 내가 왜 그토록 쓸데없이 걱정하며 살아왔는지가 너무 후회스러워서 걱정하고 있는 거예요..."
우스운 이야기지요?!
그런데 우리도 때로는 이 할머니와 비슷하지 않나요?! 우리가 지긋하게 끝까지 기다려 주시는 예수님을 마음에 새기고 살 수 있다면 지금 이 순간이 바로 가장 중요한 순간이고 삶의 전환점인 것입니다. 지금까지 기다려 주셨다면 거기에는 실현될 그 무엇이 축적되어 있다는 말이기도 하겠지요?!
그러니 조급해할 필요가 없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어린 왕자에 등장하는 합리적인 명령을 내리는 임금의 지혜를 배울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합니다. 마태오 복음 저자는 이사야 예언서를 인용하면서 우리더러 예수님께 온 희망을 걸라고 권고해 줍니다.
"(이는) 이사야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 지려고 그리 된 것이다. '보아라. 내가 선택한 나의 종, 내가 사랑하는 이, 내 마음에 드는 이다. 그는 다투지도 않고 소리치지도 않으리니.... 그는 올바름을 승리로 이끌 때까지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연기 나는 시지를 끄지 않으리니 민족들이 그의 이름에 희망을 걸리라!"
자, 지금이 바로 그 희망을 온전히 걸 때입니다. 아무리 힘든 일이 목전에 있다 하더라도 주님께서는 우리의 기를 다시 세워 주시며 앞으로 나아가도록 힘을 불어넣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중국의 작가인 루쉰은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희망이란 있다고 할 수도, 없다고 할 수도 없다.
그것은 땅 위의 길과 같은 것이다.
원래 땅 위에는 길이 없었다.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것이 곧 길이 되는 것이다!"
오늘도 아무리 힘든 일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하더라도 더 큰 힘으로 이 힘듦을 넘어가게 해 주시는 주님 안에서 힘차게 희망하며 꿋꿋이 걸어갑시다!
----------------------------------------------------
250719. 연중 제15간 토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그는 다투지도 않고 소리치지도 않으리니 거리에서 아무도 그의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마태 12,19)
그는 소리치지도 않으리니
예언자는 구원자의 온유함과 그분의 형언할길 없는 권능올 미리 찬양했습니다. 그럼으로써 그는 다른 민족들에게 크고 효력 있는 문을 열었습니다. 이사야도 유대인들을 덮칠 병에 대해 예고했습니다. 그는 아들이 아버지와 하나이심을 알고 있었고, 그래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스라엘은 내가 선택한 이, 내 영혼이 받아들인 이,내가 그에게 나의 영혼을 주었으니"(이사 42,1 칠십인역).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넘어서시는 것은,율법을 주시는 분의 원수인 적수로서가 아니라 율법을 주시는 분과 한마음이며 한 목적을 가지고 계시는 분으로서 하시는 행동입니다. 그래서 이시야는 주님의 온유함을 찬양하며, “그는 외치지도 않고 목소리를 높이지도 않으며"(이사 42,2)라고 하였습니다. 그분의 참뜻은 그들이 보는 앞에서 치유해 주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그분을 밀어내므로, 그분은 반항하는 그들과 더 이상 싸우지 않으십니다.
-요한 크리소스토무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셋째 오솔길】
돌파하여 자기 하느님을 낳기
설교 21
세가지 탄생
우리의 탄생, 하느님의 탄생, 하느님 자녀인 우리의 탄생
평화로운 침묵이 온 세상을 덮고 밤이 달려서 한고비에 다다랐을 때(지혜 18,14).
먼저 다음 구절을 생각해 봅시다. “침묵의 한가운데에서 은밀한 말씀이 내게 선포되었다" 오, 주여, 이 침묵은 어디에 있으며, 이 말씀이 발설되는 곳은 어디입니까? 이미 말씀드린 바와 같이, 그것은 영혼의 가장 순수한 자리, 영혼의 터, 영혼의 본질, 영혼의 감추어진 곳에 있습니다. 거기에서는 수단들이 전혀 “통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어떠한 피조물도, 어떠한 상도 거기로 들어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곳에서 영혼은 행동하지도 않고, 인식하지도 않습니다. 그곳에서 영혼은 자기가 만든 것이든 아니면 다른 피조물에게서 온 것이든 간에 어떠한 상도 인식하지 않습니다.
혼이 성취한 모든 업적은 영혼의 기능에 의해 성취된 것일 따름입니다.
영혼이 알고 있는 것은 무엇이든 이성을 통해서 된 것이고, 영혼이 기억하고 있는 것은 무엇이든 기억에 의해 떠오른 것일 따름입니다. 영혼이 사랑한다면, 그것은 의지를 사용하여 그렇게 하는 것일 따름입니다. 이와같이 영혼은 자신의 기능들을 통하여 활동하지 본질을 통하여 활동하는 것이 아닙니다. 외부 세계에서 이루어지는 영혼의 모든 활동은 어떤 매개물에 의존하게 마련입니다. 보는 기능은 눈을 동해 효과를 발휘합니다. 눈이 없으면 영혼은 보이는 것을 써먹을 수도 전달할 수도 없습니다. 영혼은 다른 모든 감각을 동원하여 그런 식으로 활동합니다. 영혼은 매개물을 통해 자신의 모든 외부 활동을 완수합니다. 하지만 존재 안에는 어떠한 행위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영혼이 활용하는 기능들은 존재의 터에 근원을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터에서는 수단들이 전혀 통하지 않습니다.(429)
✝️ 토요일 이웃 종교(생태)의 날✝️
이름 없는 하느님, 김경재
종교다원론과 해석학적 이론들
일곱 가지 다양한 색깔이 모여 무지개를 이룬다.
종교 다원 현상을 이해하고 설명하는 담론에서 무지개를 은유로 사용한다는 것은 우선 생각만 해도 즐겁다. 도심의 매연에 찌든 생활을 하던 시민들은 어느 날 하늘 저편 창공에 떠오른 무지개를 바라보고 동심에 젖어든다. 무지개가 만들어지는 원리를 기억하든 않든, 각박한 현실과 경쟁적인 삶 속에서 잠시나마 이름다운 무지개를 바라볼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도시민은 감격 한다
종교 다원론 현상을 이해하는 데도 무지개 모델이 가지는 이유는 매우 감동적이고 큰 설득력을 준다. 이 은유를 가장 잘 설명한 이는 인도 태생의 가톨릭 신부 라이문도 파니카이다. 그는 존 힉과 함께 20세기 후반 기독교권 내의 대표적인 종교 다원론자이다. 인류가 갖고 있는 여러 가지의 서로 다른 종교적 전통은 선적 실채라는 순백의 광선이 인간 경험이라는 프리즘에 투과되어 나타나는 무수한 색깔과 같다. 그 광선은 셀 수 없이 많은 전통과 교리, 종교를 통해 굴절된다. 녹색이 황색이 아니듯 힌두교는 불교가 아니지만, 우리는 그 색상을 바라볼 때 어디서 황색이 끝나고 녹색이 시작되는지 그 경계를 알아낼 길이 없다. 그 경계를 임의적으로 설정해 놓지 않는다면 말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어떤 특수한 색깔, 다시 말해서 어떠한 종교를 통해서도 그 백광(白光)이라는 근원에 도달할 수 있다. 즉 인간의 전통을 따르는 사람들은 거기에 광선이 조금이라도 비치고 있는 한, 그들의 목적이다 완전함 또는 구원에 도달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116)
----------------------------------------------------
250719. 연중 제15간 토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어느 형제님에게 고민 하나가 생겼습니다. 이분은 집안 살림을 하고, 아내가 직장생활을 합니다. 솔직히 이 부부는 별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일반 가정과 조금 다르겠지만, 자기 잘하는 것을 하는 것이 옳다고 서로 합의했고 그래서 남편이 전업주부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남들의 시선이 곱지 못한 것입니다. 전업주부라고 자기를 소개하면, 곧바로 “왜?”라는 질문이 들어옵니다. 그리고 뒤이어 오는 말은 “아내가 힘들겠네.”라는 것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아무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사람들의 시선에 점점 힘들어졌습니다.
이 부부는 문제가 있는 것일까요? 없는 것일까요? 부부 금술도 너무 좋았고 자기 자리에 대한 만족도도 컸습니다. 그러나 남의 시선에 의해 문제 있는 가정, 문제 있는 남편이 되고 만 것입니다. 진짜 문제일까요?
이와 비슷한 경우를 이 세상에서 너무 쉽게 바라보게 됩니다. 아무런 문제도 없는데, 자기 생각과 다르면 엄청난 문제가 있는 것처럼 여깁니다. 단지 다를 뿐인데도 그것을 틀렸다고 하면서 함께할 수 없는 것처럼 만듭니다. 이런 상황에서 과연 사랑이 제대로 움터 나올 수 있을까요? 분열과 불의가 가득할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함께 사는 세상이기에 남의 말과 행동을 전혀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사랑에 기준을 맞춘다면, 또 함께 사는 것에 집중할 수 있다면 우리의 말과 행동을 더 조심하면서 주님 뜻에 맞게 살아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바리사이들이 나가서 예수님을 어떻게 없앨까 모의합니다. 바로 앞 절에는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한쪽 손이 오그라든 병자를 고치신 사건(12,9-13)이 나옵니다. 이를 통해 그들은 율법을 지키지 않는 예수님과 함께할 수 없다고, 죽여서 제거할 계획을 모의하는 것입니다. 그들의 생각은 한쪽 손이 오그라든 병자를 고쳐 주는 것은 굳이 안식일이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지요. 죽음이 임박한 상황도 아닌데, 굳이 안식일에 고친 것은 율법을 일부러 어기려는 나쁜 속셈을 가지고 있는 커다란 죄인이라고 단정한 것입니다.
율법의 근본정신은 사랑에 있습니다. 죽을병이 아니어도 지금 고통 속에 있는 사람을 가엾이 여기는 것이 사랑입니다. 그래서 종교적 비판받을 것을 뻔히 아시면서도 고쳐 주신 것입니다. 이런 죽음의 분위기라면 빨리 도망가야 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모든 사람을 고쳐 주십니다. 사랑 때문입니다.
우리 역시 이 사랑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나와 다름을 틀렸다고 말하기 전에, 주님 사랑의 기준에 맞는가를 따져야 합니다. 자기 생각과 다른 것을 말하기 전에, 이 역시 주님 사랑의 기준에 맞는가를 살펴야 합니다. 그때 주님 안에서 우리 모두 함께할 수 있습니다.
------------------------------------
오늘의 명언: 모든 사람을 얼마 동안 속일 수는 있다. 또 몇 사람을 영원히 속일 수도 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을 영원히 속일 수는 없다(에이브러햄 링컨).
----------------------------------------------------
250719. 연중 제15간 토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 절망에도 오직 단 하나인 그 희망의 끈만은 /
박윤식 [big-llight] 2025-07-18 ㅣNo.183535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넬슨 만델라 대통령,
그는 백인 정권의 인종 차별에 의연히 맞서 반역죄로 체포되어 종신형을 선고받고 27년간 옥살이를 했다.
그에게는 최악의 정치범이라는 죄명이 주어져
면회는 6개월에 단 한 번만 허용되었고 편지도 아주 엄격히 제한되었다.
바깥세상과 철저하게 단절되어, 어둠과 고독 속에서 한 인간이 겪을 수 있는 모든 무력감을 다 견디었다.
그는 이러한 상상할 수도 없는 지옥과 같은 상황에서도,
할아버지가 손자의 이름을 지어 주는 남아공의 오랜 관습에 따라
딸이 낳은 손자의 이름을 ‘희망’이라고 지었다나.
절망스러운 자신의 삶 속에서도, 이렇게 그는 결코 마지막 보루인 그 끈만은 놓지 않았던 게다.
결국 일흔이 넘은 백발에 석방되었고, 그가 꿈꾸었던 흑백 화합의 꿈을 안고는, 남아공의 대통령이 되셨다.
“보아라, 내가 택한 나의 종, 내가 사랑하는 이, 내 마음에 드는 이다.
내가 그에게 영을 주리니, 그는 민족들에게 올바름을 선포하리라.
그는 다투지도 않고 소리치지도 않으리니, 아무도 그의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그는 올바름을 승리로 이끌 때까지,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니,
민족들이 그의 이름에 희망을 걸리라.”
하느님의 공정과 정의, 곧 그분 의로움이란 하느님께서 당신 약속을 지키시는 것이리라.
그분께서는 예수님을 통하여 드디어 당신 백성을 찾아오시어 그들에게 영원한 나라,
곧 젖과 꿀이 당신 나라를 선사하신다.
이렇게 ‘주님의 종’으로 오신 예수님은 버림받은 이들을 안아 주시고,
아픔을 안은 이들의 상처를 꼭 싸매 주셨다.
또한 용기를 잃은 이들을 일으키시며,
죄인들을 사랑으로 맞아 주시어 그들이 새로운 인생을 살게 하셨다.
우리는 무슨 일을 하면 다른 이들이 은연중 알아주기를 바라지만 예수님은 그 반대이셨다.
그분은 약하고 병든 이들을 고치시면서도 자신만은 끝내 숨기기를 바라셨다.
그렇게 아무에게도 다투지도 소리치지도 않았기에, 아무도 그를 몰랐단다.
우리는 가끔 신앙 안에서 기적을 바란다.
기적은 하느님의 은총을 직접 체험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기회이기에.
예수님 시대에는 기적을 체험할 기회가 많았는데,
오늘날에도 그때처럼 기적이 많다면 하느님을 훨씬 더 잘 믿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그렇지만 그분께서는 부러진 갈대도 꺾지 않으시고 연기 나는 심지도 끄지 않으시며,
가난하고 병든 이들께는 희망이 되셨다.
모름지기 선한 이는 선한 것을 발견하고, 그렇지 못한 이는 선한 것에서도 불편함을 느낄 게다.
우리 신앙도 자신의 이러한 마음가짐에서 출발한다.
내가 좀 더 확고한 마음으로, 좀 더 정성스러운 기도로,
좀 더 희생하는 봉사의 자세로 나의 신앙을 이끌면,
하느님의 원대한 은총은 그에 적절히 어울리게 저절로 주어지리라.
그러기에 우리의 참된 구원을 위해 희생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념하는 미사 역시,
우리는 습관적으로 참여하고 있지는 않는지를 되돌아보자.
주님은 언제 어디서나 바람에 날리는 갈대마냥 사는 우리 아픔을 동여매 주신다.
깜박이는 등불처럼 가없이 사는 우리에게 빛 밝히는 등경의 기름을 가득 채워 주신다.
우리는 포기할지언정 그분은 결코 포기하지 않으신다.
가끔 우리가 정처 없는 삶을 살지라도, 그분은 희망을 결코 버리지 않으신다.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희망만은 두시기에, 우리도 시선을 그분께만 두어야 할게다.
우리의 마지막 눈물을 닦아 주실 분이시기에.
그분 말고는 어디에다 희망의 그 끈을?
----------------------------------------------------
==========================================================
이하 자료는 추가 안내 자료입니다
==========================================================
----------------------------------------------------
250716. 연중 제15간 수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서하
+++++++++++++++++<250719. 20:00 현재 게재아니됨> ---------------------
https://bbs.catholic.or.kr/bbs/bbs_view.asp?num=8&id=2116401&menu=4770
위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리스트에서 “서하”를 찿아 들어가세요.
늦게 올라오거나 다음날 또는 게재 아니될 수도 있습니다.
----------------------------------------------------
250716. 연중 제15간 수요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250719. 20:00 현재 게재아니됨> ---------------------
http://www.ofmkorea.org/ofmhomily
작은형제회 홈페이지– 나눔방– 말씀 나눔. 리스트에서 ‘김명겸요한’으로 들어가세요.
게재가 안되는 경우가 자주 있습니다. (오전 시간대?)
----------------------------------------------------
250716. 연중 제15간 수요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마태 12,14-21 “그는 올바름을 승리로 이끌 때까지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니 민족들이 그의 이름에 희망을 걸리라.”
오늘 복음은 눈엣가시 같은 예수님을 제거하기 위해 음모를 꾸미는 바리사이들의 모습으로 시작됩니다. 예수님의 말씀에서 드러나는 심오한 지혜와 그분께서 하느님의 뜻으로 발휘하시는 놀라운 능력에 압도당한 그들은, 자기들 능력으로는 그분을 당해낼 수 없음을 깨닫고 다른 방법으로 그분을 없애려고 모의하지요. 어떻게든 예수님을 고발할 구실을 찾으려고 말 한 마디, 행동 하나를 문제 삼아 트집도 잡아보고 모함도 해 보았지만, 오히려 그로 인해 자기들 마음 속에 숨은 시커먼 욕망이, 자기들이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당연한 듯 해왔던 일들이 지닌 여러 문제점과 부정들이 명백하게 드러나버려 종교 지도자로써의 체면이 영 말이 아니었습니다. 그런 상태가 계속 되다가는 자기들이 쌓아올린 명예와 위상이 무너지는 것은 물론, 율법을 도구 삼아 누리던 기득권까지 위태로워질 게 뻔했기에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겁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향한 시기와 질투, 미움과 배척, 모함과 박해에 같은 방식으로 맞대응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느님 뜻을 따른다는 올바름과 세상에 복음을 전한다는 명분으로 따지면 어느 것 하나 거칠 것이 없었지만, 그들이 잠시 멈추어 자신을 돌아볼 수 있도록 한 발 물러서는 모습을 보이신 겁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당신을 향한 많은 사람들의 다양한 생각들을 당신 안에 품어 안으시는 모습을 보여 주십니다. 시기 질투 같은 부정적 감정은 물론이고, 당신을 향한 기대와 바람까지도 적극적으로 품어 안으셨지요. 그래서 시비를 가리겠다고 다투거나 자기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해 큰 소리를 내지 않으시고, 힘겨운 세상살이에 지쳐 기가 꺾여 있는 이들을 자비로운 손길로 일으켜 세우셨습니다. 몸과 마음에 상처 입은 이들을 치유해주시고, 슬픔과 절망 속에 낙담한 이들의 마음 속에 참된 믿음과 희망의 불꽃을 다시 일으켜 주셨습니다. 하느님 뜻에 맞는 좋은 일들을 하시면서도 당신의 공적을 내세우지 않으시고, 언제나 아버지의 뜻에 철저히 순명하며 묵묵히 맡은 바 사명을 다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의 후반부에서 마태오 복음사가는 그런 예수님의 모습을 이사야 예언서에 나오는 하느님의 충실한 종의 모습에 빗대어 설명하는데, 그 중 가장 마지막 구절이 우리에게 큰 위로와 희망을 줍니다. “그는 올바름을 승리로 이끌 때까지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니 민족들이 그의 이름에 희망을 걸리라.” 이 세상에서 하느님이 뜻하시는 정의와 공정이 완전히 실현될 때까지, 즉 하느님 나라가 도래하여 심판이 이루어지기 전까지는 아무리 욕심과 집착에 휘둘려 개차반처럼 사는 사람이라도 구원받을 희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겠다는 의지가 고통과 시련이라는 거센 바람에 꺾여 부러졌다고 해도,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믿고 바라는 희망의 등불이 슬픔과 절망의 함지로 덮여 사그러들었다고 해도, 주님은 끝까지 우리를 포기하지 않고 어떻게든 구원하시기 위해 애쓰신다니 너무나 감사하고 가슴 벅찬 일이지요. 그러니 지금 쓰러져있다 해도 포기하지 말고 다시 일어서서 신앙의 길을 걸어야겠습니다. 주님께서 그 길을 끝까지 함께 걸으시며 힘을 주시고 도와주실 것입니다.
----------------------------------------------------
================================================
================================================
아래 1. 은 박 베드로 형제님이 보내주신 자료입니다.
## 공유하신 분께서 강론글이나 묵상글 수합과정에서 과년도의 자료를
사용하신 것도 있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 1. ================================================
♣복음말씀의 향기♣ No4289
7월19일 [연중 제15주간 토요일]
--------------------------------
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
**cpbc방송미사**
[서울대교구 류호영 안토니오(등촌1동(지)성당 부주임) 신부님 집전]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나약하고 초라해 보이는 메시아의 모습!>
가난하고 고통받는 백성들을 향해서는 더없이 따뜻하고 자상한 예수님이셨지만, 유다 지도층 인사들을 향한 그분의 시선과 질타는 얼마나 날카로운 것인지 모릅니다. 헤로데를 포함한 대사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에게 그분은 존재 자체로 스트레스의 근원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구세자의 전면에 부상하신 예수님께서는 공개석상에서 그들이 그렇게 소중히 여겼던 안식일 규정을 비롯한 율법을 깡그리 무시하는 발언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틈만 나면 신성모독죄, 성전모독죄를 반복했습니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바리사이들은 마침내 중요한 결정을 하나 내렸습니다. 어떻게든 빌미를 만들고 올가미를 씌워 예수님을 처단하기로.
이 얼마나 큰 배은망덕이요 천부당만부당한 일입니까? 자신들을 구원하고 영원한 생명을 선물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메시아 예수님께, 백번 천번 감사 인사를 드려도 부족할 터인데, 그분을 없애버리려고 작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예수님 같았으면, 노발대발했을 것입니다. 중상모략하며 활개를 치는 악인들을 한데 모아 불벼락을 내려 단번에 싹 쓸어버렸을 것입니다. 사실 그분은 말씀 한 마디로 그렇게 하실 능력을 소유하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악행과 권모술수에 즉각적인 대응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폭력에 폭력으로 맞서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의 계략을 아시고 그곳에서 물러가셨습니다.
이 대목에서 사람들은 예수님의 처신에 대해 의구심을 품습니다. 왜 물러나시지? 왜 능력을 발휘하지 않으시는가? 반대 세력이 워낙 강력하다 보니 포기하시는 건가?
이 부분에 대해 마태오 복음 사가는 이사야 예언서 몇 구절을 나열하며 메시아의 운명과 그분을 이해할 수 있는 열쇠를 소개합니다.
“보아라, 내가 선택한 나의 종, 내가 사랑하는 이, 내 마음에 드는 이다. 내가 그에게 내 영을 주리니, 그는 민족들에게 올바름을 선포하리라. 그는 다투지도 않고 소리치지도 않으리니, 거리에서 아무도 그의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그는 올바름을 승리로 이끌 때까지,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연기나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니, 민족들이 그의 이름에 희망을 걸리라.”
인류 구원을 위해 강림하신 메시아의 모습치고는 꽤 나약하고 초라해 보이는 모습 같기도 합니다. 그러나 인류 역사 안에 강력한 군사력으로 무장한 폭군들의 말로를 보면, 예수님께서 취한 비폭력 노선이 정답인 듯합니다.
예수님은 강력한 군사력으로 무장한 세상의 왕과는 180도 다른 길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분께서는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스럽고 착한 종으로서의 행보를 지속했습니다. 그분은 결코 볼썽 사납게 다투거나 큰 소리를 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소명은 조심스럽고 자비로운 손길로 버림받은 사람들을 일으켜 세우고, 상처입은 사람들을 치유시켜 주며, 낙담한 자들에게 용기를 건네고,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았던 죄인들을 찾아가는 일이었습니다.
=====================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이미’ 용서하신 하느님>
어린 소년 쟈니는 조부모님을 방문하고 선물로 새총을 받았습니다. 그는 새총 쏘는 연습을 하다가 그만 실수로 할머니의 애완 오리를 죽게 했습니다.
그는 두려운 마음이 생겨 아무도 보지 않을 때 오리를 장작더미 속에 감추었습니다. 그러나 눈을 들어보니 여동생 샐리가 자기가 하고 있는 모든 행동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샐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점심 식사가 끝나고 할머니는 “샐리야, 설거지하는 것 좀 도와줄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샐리는 “오늘은 쟈니가 부엌일을 도와 드리고 싶다고 했어요. 그렇지 쟈니?”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샐리는 쟈니에게 작은 소리로 속삭였습니다.
“오리를 기억하지?”
그래서 쟈니는 설거지를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잠시 후 할아버지께서 낚시하러 가지 않겠느냐고 물으셨습니다. 할머니는 “샐리는 저녁 준비하는 것을 좀 도와 주어야 해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샐리는 씩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할머니, 쟈니가 저녁 준비를 돕고 싶다고 했어요.” 또 한 번 샐리는 그에게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습니다.
“오리를 기억하지?”
샐리는 할아버지와 낚시하러 갔지만 쟈니는 집에 남아서 저녁 준비를 도왔습니다. 쟈니는 며칠 동안 이런 식으로 샐리의 일까지 힘겹게 하면서 더 이상 견딜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할머니에게 자신의 잘못을 자백했습니다. 그러자 할머니가 말씀하셨습니다.
“쟈니야, 다 알고 있었단다. 나는 이미 너를 용서했단다. 다만 샐리가 너를 노예로 삼는 것을 네가 얼마나 견디는지 두고 보았을 뿐이야.”
복음은 기쁜 소식입니다. 그런데 유다 지도자들은 율법을 강조하여 구원받기 매우 어려운 것처럼 만들어버렸습니다. 613개조 율법을 완전히 지킬 수 있는 자신들과 같은 성인들만이 하느님의 백성이 될 자격이 있다고 가르쳤던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이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것이었습니다. “보아라, 내가 선택한 나의 종 내가 사랑하는 이, 내 마음에 드는 이다. 내가 그에게 내 영을 주리니 그는 민족들에게 올바름을 선포하리라.”
이것은 마태오 사도가 이사야 예언서를 인용한 것입니다. 여기서 ‘올바름’으로 번역한 것은 ‘심판(crisis: 판결)’으로 번역하는 것이 더 타당합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 백성, 특별히 바리사이-율법학자들이 잘못 생각하는 ‘심판’에 대해 올바른 시각을 제시해 주시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하느님의 심판은 무자비한 심판이 아니라 아버지의 심판이란 것입니다. 마치 이사악이 야곱을 심판할 때, 야곱이 ‘에사우’라고만 해도 에사우가 받을 상속권을 주는 것처럼,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는 것이 곧 심판에 관한 기쁜 소식인 것입니다.
“오리를 기억하지?”
하느님의 자비를 믿기만 하면 이런 죄책감의 노예가 될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은 이미 다 용서해 주셨습니다. 하느님은 인간의 모든 죄를 아드님께 지우고 십자가에 죽게 하심으로써 우리 죄를 없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믿지 못하니 계속 아담처럼 뒷걸음을 치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매달려 있어도 믿기만 하면 지금 당장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희망을 갖지 못하던 이들이 희망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당시 바리사이-율법학자들이나 사제들 정도나 구원받을 수 있다고 여겼던 관념을 예수님은 뒤집어놓으신 것입니다. 너무나 혁신적인 하느님 자비에 관한 소식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올바름을 승리로 이끌 때까지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니 민족들이 그의 이름에 희망을 걸리라.”
이 기쁜 소식이 너무나 단순하고 쉬워서 바리사이나 율법학자들은 믿으려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쉽게 구원을 받는다면 내가 지금까지 율법을 지키느라고 고생한 건 뭐야?’ 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노력으로 구원받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야 율법을 열심히 지키느라 수고했던 자신들에게 영광이 돌아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믿기만 하면 구원된다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이 실망스러울 수밖에 없었고 죽일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시이 도오기찌라는 범죄자의 이야기입니다. 이시이는 현대 범죄 역사상 유례없는 범죄자로서 남자, 여자, 어린아이 할 것 없이 가장 잔인한 방법으로 살인을 했으며 방해하는 자는 무자비하게 죽였습니다.
그는 형무소에서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동안 두 사람의 캐나다 부인이 그를 방문하고 창살을 통해 그에게 복음을 전하려 했지만 그는 완강하게 거부했습니다. 결국 그들은 이를 포기하고 성경 한 권을 주고 떠났습니다.
이시이는 무심코 그것을 읽기 시작했는데 이상하게 멈출 수가 없었습니다. 계속 읽다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 이야기가 있는 곳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말씀을 읽었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 23,34) 이 말씀이 그의 마음을 녹였습니다. 그는 고백했습니다.
“나는 읽는 것을 그만 두었다. 마치 5인치나 되는 못으로 꿰뚫린 것처럼 내 마음은 찔렸다. 그것을 그리스도의 사랑이라고 불러야 하는가? 단지 알 수 있는 것은 내가 믿었다는 것과 그리고 굳어 버렸던 내 마음이 변화되었다는 사실이다.”
후에 간수가 이 사나이를 교수대에 데려가려고 왔을 때 그가 그곳에서 본 것은 험상궂은 얼굴이 아니라 미소로 빛나는 환한 얼굴이었습니다.
복음은 하느님은 자비하시다는 소식입니다. 이미 우리 죄를 다 용서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선포하신 심판의 진실입니다. 믿기만 하고 다가온다면 주님은 받아주시겠지만, 그것을 믿지 못하여 죄책감에서 스스로의 힘으로 벗어나려 한다면 구원될 수 없습니다.
무자비한 사람만이 하느님을 무자비하게 여깁니다.
그러나 복음은 가장 절망적인 사람이라도 희망할 수 있는 기쁜 소식입니다. 가장 큰 죄인이라도 지금 당장 마음만 바꾸면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소식이기 때문입니다.
=====================
[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서울대교구 사제 모임을 잘 마쳤습니다. 다양한 프로그램이 있었습니다. 언제나 미사가 중심에 있었고, 아름다운 자연을 볼 수 있는 산행이 있었습니다. 함께 걸으면서 선배 사제들은 경험을 나누었고, 후배 사제들은 신선한 생각을 나누었습니다. 무엇보다 감사하고 고마운 것은 본당 교우분들의 헌신과 수고였습니다. 형제님들은 차량 봉사를 해 주었고, 자매님들은 맛있는 음식을 준비해 주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만들어 주셨듯이, 자매님들은 매일 더 맛있는 음식을 마련해 주었습니다. 매일 미사에 많은 교우분이 함께 해 주시면서 사제들을 위해서 기도해 주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느님의 천사를 따뜻하게 맞이해서 100세의 나이에 아들을 얻었듯이, 사제들을 환대해 준 본당 공동체에도 하느님께서 축복을 주시기를 청하였습니다. 사람은 ‘착하게 살아야 한다.’라는 말을 실감했던 교구 사제 모임이었습니다. 본당 신부님은 같은 본당 출신이었고, 초등학교 동창이었습니다. 본당 수녀님은 제가 신학생 때 초등학생이었습니다. 친구는 사제가 되었고, 교리를 가르쳤던 학생은 수도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40년 세월이 흘러 다시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태초부터 마련해 주신 하느님의 뜻이라고 느껴졌습니다.
구약의 사건이 신약의 예수님을 통해서 완성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한 모습을 복음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이사야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 보아라, 내가 선택한 나의 종, 내가 사랑하는 이, 내 마음에 드는 이다. 내가 그에게 내 영을 주리니 그는 민족들에게 올바름을 선포하리라. 그는 다투지도 않고 소리치지도 않으리니 거리에서 아무도 그의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그는 올바름을 승리로 이끌 때까지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니 민족들이 그의 이름에 희망을 걸리라.” 하느님께서는 이집트에서 고통받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의 아픔을 아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약속의 땅으로 이끌어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누룩 없는 빵을 먹으면서 하느님을 찬미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와 죽음과 악의 유혹으로 방황하는 인간을 불쌍히 여기셔서 십자가를 통하여 영원한 생명으로 이끌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몸과 피를 내서 주셔서 우리에게 생명의 양식을 주셨습니다. 이 모든 것이 하느님께서 태초부터 마련해 주신 은총입니다.
이사야의 예언에서 등장하는 ‘부러진 갈대’와 ‘연기 나는 심지’는 고장나고, 꺼질 듯한 존재를 의미합니다. 연약하고, 깨어지고, 희망이 없어 보이는 사람들, 곧 우리 시대의 소외된 이들을 떠올리게 합니다. 현대사회에서 우리는 자주 경쟁과 효율성만을 기준으로 사람을 판단합니다. 실패한 이들, 늦은 이들, 상처 입은 이들은 자주 도태되고 외면당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사람들을 절대로 꺾지 않으십니다. 도리어 그 안에 있는 생명의 불씨를 지켜 주십니다. 희망은 언제나 작은 불씨에서 시작되고, 하느님의 은총은 가장 연약한 자리에서 자라납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방식이며, 우리가 닮아가야 할 사랑의 방식입니다. “사람은 착하게 살아야 한다.” 이 단순한 말이 지금 우리 사회에 던지는 울림은 매우 큽니다. 착하게 산다는 것은 단지 법 없이 산다는 뜻이 아닙니다. 남의 약점을 꺾지 않고, 내 마음의 불씨를 꺼뜨리지 않으며, 이웃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는 것, 그것이 진정한 착함입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우리 시대는 지나치게 성과 지향적이고 피로사회에 빠져 있다.” 이런 시대일수록 예수님의 가르침이 중요합니다. “소리 지르지 않고, 다투지 않고, 그저 진리를 걷는 조용한 길”이 얼마나 필요한지 깨닫게 됩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는 이집트 탈출의 마지막 밤, 하느님께서 친히 밤을 새우셨다고 합니다. “그날 밤, 주님께서 그들을 이집트에서 인도하시려고 밤을 새우셨으므로” 하느님은 밤을 새우시며 고통받는 이들을 지켜보시고, 그들을 인도하십니다. 이 밤은 단지 ‘과거’의 한순간이 아니라, 지금도 고통의 밤을 살아가는 이들과 함께 머무시는 하느님의 현재입니다. 그리고 그 섭리 속에서 우리는 때때로 놀라운 재회를 맞이합니다. 친구였던 이가 사제가 되고, 가르치던 아이가 수도자가 되는 것처럼, 하느님께서는 우리 삶의 인도자이십니다. 우리는 그분의 짜임 안에서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우리 삶의 여정에서 ‘착하게 산다’라는 것,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연기 나는 심지를 살리는 존재가 된다는 것, 그것은 세상의 기준이 아닌 하느님의 시선으로 사는 삶입니다. 기도와 헌신으로 함께 해 주신 교우 여러분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그는 올바름을 승리로 이끌 때까지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니 민족들이 그의 이름에 희망을 걸리라.”
=====================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성 바오로수도회 김태훈 리푸죠 신부님]
마태오 복음사가는 예수님을 이사야서 42장 1-4절에 나타난 ‘주님의 종’에 관한 말씀이 이루어진 것이라고 봅니다. 여기서 드러나는 예수님의 사목 대상은 갈대처럼 약하면서 그중에서도 으깨지고 부서지고 짓눌린 이들,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소외된 이방인들(‘민족’이라는 낱말은 ‘이방인’으로 번역할 수도 있음)입니다. 그분께서는 짓눌린 이들, 소외된 이들을 받아들이셨고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벌을 받은 자로 여겨졌던 병자들도 받아들이셨습니다.
“부러진 갈대”, “연기 나는 심지”(마태 12,20)에서 우리는 부러졌다는 사실과 불이 거의 꺼졌다는 사실에 집중하지만, 그분께서는 아직 잘려 나가지는 않았다는 것, 아직 불기가 조금은 남아서 연기라도 난다는 사실에 마음을 두십니다. 그분께서는 아주 작은 것을 소홀히 하시지 않고 그것이 자라서 커다란 무엇이 될 수 있다는 믿음과 희망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렇게 만들 수 있다는 확신과 자신감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래서 인내하며 기다리실 수 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먼저 믿고 희망을 두셨기에 그 갈대와 심지, 곧 이방인들도 희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우리를 보실 때 우리의 부족함과 죄보다는 아직 부러지지 않았음을, 아직 꺼지지 않았음을 보십니다. 나를 믿으시고 나에게 희망을 걸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나 자신, 내 이웃을 향하는 나의 시선은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의 결점에 있습니까, 아니면 가능성에 있습니까? 나를 믿어 주시고 희망을 두시는 그분의 시선을 바라보고 느낄 때, 자신과 이웃에 대한 우리의 시선도 그분의 것처럼 바뀔 것입니다. 우리도 희망으로 기다릴 수 있을 것입니다. “민족들이 그의 이름에 희망을 걸리라.”(12,21) 아멘.
=====================
[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12,14-21: 하느님께서 택하신 종 예수 그리스도
예수께서는 안식일에 회당에서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쳐주신다. 바리사이들은 예수께서 안식일에 그 사람의 손을 다른 손처럼 건강하게 해 주신 것을 보고 어떻게 예수님을 없앨까 모의를 했다고 한다. 이것을 아신 예수께서는 다른 곳으로 물러가셨다. 그것은 그들의 모의가 무서워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고쳐주시며 악을 없애기 위한 것이다. 이어서 이사 42,1-4의 말씀을 이루신다. 그들 안에 있는 부러진 갈대나 연기 나는 심지와 같은 연약한 모습이라도 파멸하지 않도록 하시려는 뜻이다. 그들이 언제나 당신께로 회개할 수 있도록 끈기 있게 참아주신다. 예수께서는 밀과 가라지를 추수 때까지 그대로 두도록 하라고 하신 분이다. 우리 자신도 그렇게 참아주시는 분이다. “그는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라.”(이사 42,3)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크신 온유함을 뜻한다. 그러나 언제까지 이렇게 참아주실 수 있는가? 이는 밀과 가라지가 추수 때까지 참아주셨듯이, 그분의 구원업적이 이루어질 때까지 그렇게 하실 것이다.
이사야는 이것을 “그는 정의를 승리로 이끌리라.”(이사 42,3) 그리하여 “다른 민족들이 그의 이름을 신뢰하게 되리라.”(이사 42,4)라고 한다. “정의를 승리로 이끌리라.”(이사 42,3)라는 말은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구원업적을 다 이루시면, 믿지 않는 사람들을 마지막으로 심판하신다는 의미이다. 그때는 터무니없고 모순되는 논리를 그대로 두지 않으시고 그들이 하느님의 영광을 알게 될 것이다. 이제 하느님의 섭리는 믿지 않는 이들을 심판하는 데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민족을 위한 것이므로 “다른 민족들이 그의 이름을 신뢰하게 되리라.”(이사 42,4) 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바로 “내가 사랑하는 이, 내 마음에 드는 이다.”(18절) 하느님으로부터 사랑받는 분은 당신을 사랑하시는 분의 뜻에 따라서 이 모든 것을 이루실 것이다. 하느님의 뜻을, 아버지의 뜻을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언제나 우리도 하느님의 말씀을, 하느님의 일을,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그래서 우리도 “내가 사랑하는 이, 내 마음에 드는 이다.”라는 선언을 들어야 할 것이다.
=====================
[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살맛나는 사람세상>
마태오 12,14-21 (주님의 종 예수님)
그때에 바리사이들은 나가서 예수님을 어떻게 없앨까 모의를 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 일을 아시고 그곳에서 물러가셨다. 그런데도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랐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모두 고쳐 주시면서도, 당신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엄중히 이르셨다. 이사야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
“보아라, 내가 선택한 나의 종, 내가 사랑하는 이, 내 마음에 드는 이다. 내가 그에게 내 영을 주리니, 그는 민족들에게 올바름을 선포하리라. 그는 다투지도 않고 소리치지도 않으리니, 거리에서 아무도 그의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그는 올바름을 승리로 이끌 때까지,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니, 민족들이 그의 이름에 희망을 걸리라.”
<살맛나는 사람세상>
“예수님께서는 그 일을 아시고 그곳에서 물러가셨다. 그런데도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랐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모두 고쳐 주시면서도, 당신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엄중히 으셨다.”(마태 12,15-16)
믿는 이를
믿는 이들이 따르니
믿는 이가
믿는 이들을 믿는다
희망하는 이를
희망하는 이들이 따르니
희망하는 이가
희망하는 이들을 희망한다
사랑하는 이를
사랑하는 이들이 따르니
사랑하는 이가
사랑하는 이들을 사랑한다
작은 이를
작은 이들이 따르니
작은 이가
작은 이들을 키운다
낮은 이를
낮은 이들이 따르니
낮은 이가
낮은 이들을 높인다
아픈 이를
아픈 이들이 따르니
아픈 이가
아픈 이들을 고친다
슬픈 이를
슬픈 이들이 따르니
슬픈 이가
슬픈 이들을 안는다
쫓겨난 이를
쫓겨난 이들이 따르니
쫓겨난 이가
쫓겨난 이들을 거둔다
외로운 이를
외로운 이들이 따르니
외로운 이가
외로운 이들을 품는다
서러운 이를
서러운 이들이 따르니
서러운 이가
서러운 이들을 다독인다
버림받은 이를
버림받은 이들이 따르니
버림받은 이가
버림받은 이들을 보듬는다
보잘것없는 이를
보잘것없는 이들이 따르니
보잘것없는 이가
보잘것없는 이들을 보살핀다
=====================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메시아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려고 오신 분입니다.>
“바리사이들은 나가서 예수님을 어떻게 없앨까 모의를 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 일을 아시고 그곳에서 물러가셨다. 그런데도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랐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모두 고쳐 주시면서도, 당신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엄중히 이르셨다. 이사야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 ‘보아라, 내가 선택한 나의 종, 내가 사랑하는 이, 내 마음에 드는 이다. 내가 그에게 내 영을 주리니, 그는 민족들에게 올바름을 선포하리라. 그는 다투지도 않고 소리치지도 않으리니, 거리에서 아무도 그의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그는 올바름을 승리로 이끌 때까지,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니, 민족들이 그의 이름에 희망을 걸리라.’"(마태 12,14-21)
1) 18절과 21절에 있는 ‘민족들’은, 여기서는 온 세상의 모든 민족들을, 즉 ‘모든 사람’을 뜻하는 말입니다. <원래는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들을 뜻하는 말로 사용되는 단어인데, 여기서는 ‘모든 사람’을 뜻합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려고 오신 메시아시기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인간 구원 활동에는 차별도 없고 역차별도 없습니다. 구원받기를 원하고, 구원받으려고 노력하면, 누구든지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여기서 ‘부러진 갈대’와 ‘연기 나는 심지’는, 죄와 죽음의 억압을 받고 있는 인간들을, 즉 메시아께서 오시기 전의 인류를 상징합니다. “어둠 속에 앉아 있는 백성이 큰 빛을 보았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고장에 앉아 있는 이들에게 빛이 떠올랐다."(마태 4,16)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니”는, 메시아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한 사람도 빠짐없이’ 구원하려고 애를 쓰신다는 뜻입니다. ‘부러진 갈대’와 ‘연기 나는 심지’를 소외계층 사람들, 사회에서 죄인 취급을 받고 있는 사람들, 이방인들로만 생각하는 이들이 있는데,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글자에 매여서 글 전체를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만 사랑하신 것으로 오해하는 이들이 있는데, 그것은 정말로 오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똑같이 사랑하셨습니다. 다만 그 사랑의 표현이 사람마다 조금씩 다르긴 했습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의 경우에는 그들의 위선을 꾸짖는 것으로 그들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드러내셨고, 세리들의 경우에는 가르치고 타이르는 것으로 당신의 사랑을 드러내셨습니다.>
2) 예수님의 구원은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무제한’인데, 그러나 ‘무조건’은 아닙니다.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회개’입니다.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아무나 무조건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니고, 스스로, 또 진심으로 회개해야만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회개 없이는 구원도 없습니다.
<“나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이다.” 라고 자처하는 위선자들과 “나는 구원 같은 것에는 관심 없다. 그냥 살던 대로 살겠다.”고 고집부리는 자들처럼 회개하기를 거부하는 자들은, 자신들이 거부해서 구원받지 못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구원을 안 하시거나 못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자들이 안 받으려고 해서 못 받는 것입니다.>
3) 종말과 심판에 관해서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어떤 이들은 미루신다고 생각하지만 주님께서는 약속을 미루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여러분을 위하여 참고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하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날은 도둑처럼 올 것입니다."(2베드 3,9-10ㄱ)
사람들이 모두 회개하기를 바라면서 기다리시는 ‘주님의 기다림’은 ‘무한정’이 아닙니다. 그 기다림은, 아버지 하느님께서 정하신 ‘그날’이 되기 ‘직전까지만’입니다. 종말의 날이, 즉 심판의 날이 닥치면, 그때까지도 회개하지 않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더 이상의 기회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날이 언제인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오늘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회개는 오늘 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무한정 기다리시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오늘’이라는 시간은, ‘회개’하라고 주신 ‘마지막 시간’입니다.(히브 4,7) ‘내일’의 일은 아무도 모릅니다.(야고 4,14)
4) “그는 민족들에게 올바름을 선포하리라.”는, 메시아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을 위해서, 또 ‘모든 사람’을 향해서 ‘구원의 복음’을 선포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는 다투지도 않고 소리치지도 않으리니, 거리에서 아무도 그의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는, 예수님의 인간 구원 활동은 세속의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방식은, 많은 열매를 맺기 위해서 스스로 땅에 떨어져 죽는 밀알 하나의 방식입니다(요한 12,24). 세속의 사고방식으로는 그 방식을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올바름을 승리로 이끌 때까지”는, “구원사업이 마무리되고 하느님 나라가 완성될 때까지”입니다. “민족들이 그의 이름에 희망을 걸리라.”는, “예수님은 모든 사람의 희망이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예수님의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가면서 좋은 일을 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복을 받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복을 받기 때문에 좋은 일을 끊임없이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좋은 일을 한다고 해서 반드시 환영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시기와 질투의 대상이 되고 미움을 사기도 합니다. 아무리 어진 사람도 미워하는 무리가 있는 법입니다. 선한 일을 하는데도 선망의 대상이 되기보다는 견제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봄비가 기름 같지만, 행인은 그 진창길을 싫어하고 가을 달은 밝고 아름답지만, 도둑은 그 밝게 비추는 것을 싫어합니다.” 자기에게 득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되면 싫어하고 시기 질투하며 심지어 미워합니다. 봄비처럼 꼭 필요한 것일지라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사람은 언제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고통받는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리시고 병을 고쳐주시며 당신의 소명에 충실하셨습니다. 그런데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을 어떻게 없앨까를 모의하였습니다. 지금 있는 그대로를 봐주면 좋으련마는 눈엣가시로 보았습니다. 그들은 기득권을 잃을까 두려워하는 사람, 사촌이 땅을 사면 배를 앓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반대에 대응하지 않으시고 한발 물러서는 지혜와 인내를 보여주셨습니다. 막무가내로 대드는 사람에게는 한숨 쉬게 하는 것이 좋습니다. 우리도 인내를 가지고 기다리며 모두를 품을 수 있는 넉넉함을 키웠으면 좋겠습니다. 용수철을 누르듯 참는 것은 참는 것이 아니라 벼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사람의 다양한 생각들을 품으셨습니다. 다투거나 큰 소리를 내지 않으시고 자비로운 손길로 버림을 받은 사람들을 일으켜 세우셨습니다. 상처받은 사람들을 치유해 주시고 낙담한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시며 구원해 주셨습니다. 병을 고쳐주면서도 스스로 내세우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 공을 감추시고 결코 기적을 위한 기적을 행하시는 것이 아님을 확인해 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언제나 철저히 아버지 하느님의 뜻 안에서 구원사업을 이루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무슨 좋은 일을 해 놓고는 생색을 내다가 그 공을 다 잃고 맙니다. 선한 지향을 갖다가도 이내 시기와 질투심에 그 좋은 뜻을 놓치기도 합니다. 주님께서 “너희는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의로운 일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그러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에게서 상을 받지 못한다”(마태6,1).고 하셨건만 그 말씀을 잊고 살아갈 때가 많습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숨은 일도 보시는 아버지께서 갚아주실 것을 믿고, 하늘을 바라보고 살아갈 수 있는 은총이 함께하기를 서로 기도해 주시길 희망합니다. 나의 능력을 자랑하고 싶을 때 침묵의 가치를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올바름을 승리로 이끌 때까지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니, 민족들이 그의 이름에 희망을 걸리라" 는 말씀에 귀를 기울여 보십시오. 예수님께서는 어딘가 상하고 깨져서 할 일을 하지 못한다 생각하는 이들을 결코, 소홀히 하지 않으셨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성공에로 부름을 받은 것이 아니라 최선에로 부름을 받았습니다"(마더 데레사).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시작한 하느님의 나라는 사람에 대한 희망을 잃지 않는 세상, 무엇을 이루었는가보다 어떻게 살았는지를 더 소중하게 여기는 세상입니다.
하느님의 소리는 영혼의 울림으로 들려옵니다. 그래서 거리에서는 하느님의 소리가 들리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소리를 듣고 예수님의 마음을 간직할 수 있는 은혜를 간절히 청합니다. 마음을 다하여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광주대교구 최종훈 토마스 신부님]
우리는 살면서 많은 사람을 만납니다. 그리고 자신의 상황과 삶의 경험치에 따라 누군가의 행동을 판단하고 평가합니다. 그러한 판단이 반드시 잘못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그 기준이 무엇인지 고민해 보았으면 합니다.
자신의 욕심과 이기심을 채워 주는지가 기준이라면 그러한 판단은 보류해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는 오랜 친구나 사랑하는 이를 쉽게 판단하지 않습니다. 한 번 더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그 사람의 처지에서 왜 그런 행동을 하였는지 고민해 볼 것입니다. 함부로 내린 판단이 우리를 미움과 오해의 길로 이끌어 갈 수 있으니까요.
오늘 복음에서도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판단합니다.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을, 안식일을 어기고 하느님의 율법을 무시하며, 그동안 율법을 통하여 얻었던 자신들의 부와 명예를 빼앗아 가려는 사람으로 판단하고 ‘없앨 모의’를 합니다.
군중들 또한 자신의 기준으로 예수님을 ‘좋은 사람’ 또는 ‘필요한 사람’으로 판단합니다.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릅니다. 그렇게 그들은 쉽게 열광하지만, 그 필요성이 사라지면 그들의 마음은 순식간에 돌아설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의 저자는 쉽게 판단하고 결정하지 말 것을 ‘함구령’을 통해서 이야기합니다.
또한 마태오 복음사가는 이사야 예언서에 기록된 ‘주님의 종’에 대한 말씀을 들려줌으로써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알려 줍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어떻게 판단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을 원망해 본 적이 있습니다. 내 기도만 들어주시지 않는 것 같고, 행복보다는 불행과 아픔을 주시는 것 같았습니다.
신앙생활이 무거운 짐으로 다가올 때, 절망과 함께 예수님에 대한 원망만이 남기도 하였습니다. 그런 때일수록 쉽게 판단해 버리는 나의 생각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합니다.
예수님의 뜻과 가치, 사랑이 무엇인지 고민합니다. 원망이 아닌 희망으로 그 시련과 아픔을 받아들이고자 노력합니다. 오늘도 그렇게 주님 안에서 고민하고 아파하고 노력하며 하루를 살아갑니다.
=====================
[부산교구 염철호 요한 신부님]
제1독서에서 이스라엘 자손들은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이집트를 탈출합니다. 누룩을 넣어 반죽을 부풀릴 시간조차 없이 황급히 이집트를 떠나야 하였습니다. 머뭇거릴 수 없어 양식도 장만하지 못한 채 그들은 이집트 땅을 빠져나와야 하였습니다. 이제 그들은 뒤로 돌아설 수 없습니다. 오직 약속된 땅을 향하여 앞으로 나아갈 뿐입니다.
그러나 그들 앞에 펼쳐진 것은 광야였습니다. 그리고 이집트는 끊임없이 그들이 나아가는 길을 방해할 것입니다. 물리적으로 방해하는 파라오도 있지만, 이스라엘 스스로 이집트에서 먹던 고기를 잊지 못하며 끊임없이 하느님께 한탄을 쏟아 낼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러한 모든 방해물을 제거하시고 이스라엘을 결국 젖과 꿀이 흐르는 곳으로 데려가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에게 그것을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을 없애려고 모의합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종 메시아가 백성에게 올바름, 곧 하느님의 정의를 선포하리라고 예언한 바 있습니다.
하느님의 정의, 곧 하느님의 의로움이란 하느님께서 당신 약속을 지키시는 것을 말합니다. 이렇게 보니 오늘 복음은 예수님을 통하여 이사야의 예언이 이루어졌음을, 드디어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찾아오시어 그들에게 영원한 나라, 곧 젖과 꿀이 영원히 흐르는 하느님 나라를 선사하셨음을 선포하는 대목입니다.
그런데 이 나라에 들어가려면 어린양의 피가 필요합니다. 문설주 상인방에 발라 이스라엘의 첫째 아들만 살려 주던 그 어린양의 피가 아니라, 모든 이를 구원할 어린양의 피가 필요합니다. 그 피는 바로 예수님의 피입니다.
바리사이들은 자신들이 흘리게 할 예수님의 피가 결국 온 세상을 구원하게 되리라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려 합니다. 이렇게 보니 바리사이들은 자신들도 모르게 하느님께서 당신의 약속을 이루시는 데 쓰이는 도구가 됩니다.
=====================
[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어느 형제님에게 고민 하나가 생겼습니다. 이분은 집안 살림을 하고, 아내가 직장생활을 합니다. 솔직히 이 부부는 별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일반 가정과 조금 다르겠지만, 자기 잘하는 것을 하는 것이 옳다고 서로 합의했고 그래서 남편이 전업주부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남들의 시선이 곱지 못한 것입니다. 전업주부라고 자기를 소개하면, 곧바로 “왜?”라는 질문이 들어옵니다. 그리고 뒤이어 오는 말은 “아내가 힘들겠네.”라는 것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아무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사람들의 시선에 점점 힘들어졌습니다.
이 부부는 문제가 있는 것일까요? 없는 것일까요? 부부 금술도 너무 좋았고 자기 자리에 대한 만족도도 컸습니다. 그러나 남의 시선에 의해 문제 있는 가정, 문제 있는 남편이 되고 만 것입니다. 진짜 문제일까요?
이와 비슷한 경우를 이 세상에서 너무 쉽게 바라보게 됩니다. 아무런 문제도 없는데, 자기 생각과 다르면 엄청난 문제가 있는 것처럼 여깁니다. 단지 다를 뿐인데도 그것을 틀렸다고 하면서 함께할 수 없는 것처럼 만듭니다. 이런 상황에서 과연 사랑이 제대로 움터 나올 수 있을까요? 분열과 불의가 가득할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함께 사는 세상이기에 남의 말과 행동을 전혀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사랑에 기준을 맞춘다면, 또 함께 사는 것에 집중할 수 있다면 우리의 말과 행동을 더 조심하면서 주님 뜻에 맞게 살아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바리사이들이 나가서 예수님을 어떻게 없앨까 모의합니다. 바로 앞 절에는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한쪽 손이 오그라든 병자를 고치신 사건(12,9-13)이 나옵니다. 이를 통해 그들은 율법을 지키지 않는 예수님과 함께할 수 없다고, 죽여서 제거할 계획을 모의하는 것입니다. 그들의 생각은 한쪽 손이 오그라든 병자를 고쳐 주는 것은 굳이 안식일이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지요. 죽음이 임박한 상황도 아닌데, 굳이 안식일에 고친 것은 율법을 일부러 어기려는 나쁜 속셈을 가지고 있는 커다란 죄인이라고 단정한 것입니다.
율법의 근본정신은 사랑에 있습니다. 죽을병이 아니어도 지금 고통 속에 있는 사람을 가엾이 여기는 것이 사랑입니다. 그래서 종교적 비판받을 것을 뻔히 아시면서도 고쳐 주신 것입니다. 이런 죽음의 분위기라면 빨리 도망가야 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모든 사람을 고쳐 주십니다. 사랑 때문입니다.
우리 역시 이 사랑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나와 다름을 틀렸다고 말하기 전에, 주님 사랑의 기준에 맞는가를 따져야 합니다. 자기 생각과 다른 것을 말하기 전에, 이 역시 주님 사랑의 기준에 맞는가를 살펴야 합니다. 그때 주님 안에서 우리 모두 함께할 수 있습니다.
=====================
[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영적 승리의 삶>
-“주님과 함께하는 파스카의 삶”-
폭우로 인해 전국적으로 피해가 참 많습니다.
큰비가 내리고 나니 불암산 계곡 흐르는 물소리가 요란하고 흐르는 물길 모습도 힘차서 좋습니다.
오래전 <혁명>이란 자작시가 생각납니다.
지금 저는 하느님의 생음악 빗소리를, 계곡물 흐르는 소리를 들으며 강론을 씁니다.
“이런게 혁명이라면
가끔은 있었으면 좋겠다
꼭 큰 비가 내려야
맑게 흐르는 시내인가
비 없어도 늘 맑게 흐를 수는
없나
바짝 마른 바닥에 잡초와
오물들
대책없이 썩어 악취를 발하던
시내
폭우내리니
말끔히 씻겨 정리되고
하얀 모래에 맑게 흐르는 물
살아 노래하는 시내가 되었다
이런게 혁명이라면 가끔은
있었으면 좋겠다.” <2001.7.19.>
놀랍게도 바로 24년전 2001년 7월19일 오늘 시입니다. 이런 혁명은 가능합니다. 바로 영적혁명, 내적혁명인 회개입니다. 어느 때 보다 생태적 회개가 절실한 때입니다. 인공지능 AI가 아닌 회개가 답입니다. 웬지 판도라의 상자가 열린 듯 인류의 미래에 대한 불길한 느낌도 듭니다. 어느 지인이 보내준 <AI;한없이 전기를 먹는 인류의 괴물 우상인가>라는 글입니다.
1.기계는 대답하고 지구는 타들어 간다.
2.기술은 진보하고 인간은 퇴보한다.
3.생명은 연산(演算)이 아니다.
4.우리는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정말 분별력의 지혜가 절실한 작금의 시대입니다.
참으로 실용과 더불어 그 이상으로 관상을 강조할 때입니다. 관상의 기초가 되는 끊임없는 회개를 통한 내적혁명의 삶, 영적승리의 삶, 주님과 함께 하는 파스카의 삶이 절실한 때입니다. 얼마전 레오 교황의 <생태적 위기는 관상적 시선을 요구한다>라는 주제의 강론에 전폭적으로 공감했습니다.
“우리는 교회 안팎의 많은 이들의 회개를 위해 기도해야 한다. 그들은 여전히 우리 공동의 집인 지구를 배려하는 일이 얼마나 긴급한 일인지 인정하지 않는다...오직 ‘관상적 시선’(contemplative gaze)만이 피조물과의 관계를 바꿀수 있고, 죄의 결과 야기된 관계의 파멸로 인한 생태적 위기로부터 우리를 이끌어 낼 수 있다.”
작금의 위기의 시대, 실용의 강조와 더불어 그 이상으로 강조되어야할 내적혁명의 회개라는 파스카의 삶, 관상적 삶입니다.
오늘 말씀 주제는 주님과 함께 하는 승리의 삶, 영적 승리의 삶입니다. 오늘 탈출기는 하느님의 도움으로 열째 재앙을 통해 이집트에 승리한 이스라엘 백성 60만명의 승리의 행군을 보여줍니다. 이집트의 압제하에서 430년이 끝나는 바로 그날 주님의 모든 부대가 이집트 땅에서 나옵니다. 탈출기의 마지막 구절은 파스카 승리의 밤에 대한 묘사입니다.
‘그날밤, 주님께서 그들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시려고 밤을 세우셨으므로, 이스라엘의 모든 자손도 대대로 주님을 위하여 이밤을 새우게 되었다.’
바로 여기서 유래한 우리 교회의 <파스카 성야>입니다. 아니 참으로 믿는 모든이에게 모든 밤은, 하루하루 날마다 동터오는 부활의 새벽을, 새날을 앞둔 파스카의 밤일 수 있습니다. 바로 여기서 깊이 묵상하고 배워야 할 내용은 파스카 예수님의 관상적 승리의 삶입니다.
바로 이사야의 ‘주님의 종의 노래’(이사42,1-4)에 바로 그 답이 있습니다. 이렇게 살 때 비로소 관상적 시선, 관상적 삶의 회복입니다. 예수님은 물론 시공을 초월하여 예수님을 따르는 모든 참된 제자들이 이렇게 살았고, 바로 오늘의 우리가 배워고 따라야 할 삶의 지침입니다.
“보아라, 내가 선택한 나의 종, 내가 사랑하는 이, 내 마음에 드는 이다. 내가 그에게 내 영을 주리니, 그는 민족들에게 올바름을 선포하리라. 그는 다투지도 않고 소리치지도 않으리니, 거리에서 아무도 그의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그는 올바름을 승리로 이끌 때까지,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연기나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니, 민족들이 그의 이름에 희망을 걸리라.”(마태12,18-21)
예수님은 결코 선동하는 시끄러운 분이 아니었습니다. 한없이 깊고 고요하며 인내하고 섬세하며 온유하고 겸손하며 자비롭고 지혜로운 분이셨습니다. AI이 아니라 이런 관상적 영적 승리의 삶이 인류의 미래이자 희망입니다.
실용에 앞서 끊임없는 내적혁명의 회개로 이런
1.“침묵과 경청, 온유와 겸손, 배려와 존중, 정의와 평화, 사랑과 인내”를 살아내는 관상적 영적 승리의 삶이, 2.최소한도 의식주의 단순소박한 삶으로 쓰레기를 덜 내는 삶이, 3.소유의 쾌락이 아닌 날로 비워감으로 존재의 기쁨을 사는 자발적 가난의 관상적 삶이 참으로 절실한 시절입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내적혁명의 관상적 회개의 삶에 참 좋은 도움을 주십니다. 아멘.
=====================
[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힘없어도 힘 있는>
어제와 오늘 창세기는 마침내 이스라엘 민족이 이집트를 탈출하게 되는 얘깁니다. 지난 화요일 저는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일에 있어서 모세와 파라오를 각기 당신 도구로 쓰셨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욥기를 보면 하느님께서 천상 회의를 여시고는 욥을 단련시키는 악역으로 사탄이라는 패를 쓰셨지요.
우리는 편견을 가지고 있습니다. 천사만 하느님의 도구라는 편견 말입니다.
그런데 지난 화요일에 이미 말씀드렸듯이 우리가 이집트, 곧 이 세상을 떠나도록 하는 데는 파라오 곧 사탄보다 더 역할을 잘하는 것이 없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부귀영화를 누리는 사람이 그 좋은 것을 다 놔두고 억울해서 어떻게 떠나고 어떻게 천당을 갈 수 있겠습니까?
스스로 떠날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하느님이 그리고 하느님 나라가 얼마나 좋은지 맛보고 깨달은 사람만 스스로 떠날 텐데 하느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맛보고 깨닫는 것조차 스스로 맛보고 깨닫게 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맛이 얼마나 쓴지 하느님께서 맛보게 하셔야만 새로운 맛을 찾고 하느님 나라의 맛도 보게 되는 것입니다.
프란치스코에게서 이것을 우리는 잘 볼 수 있지요. 그러므로 세상을 애착하는 사람을 세상에서 쓴맛 보게 하는 사람, 이 세상에서 떠밀고 내모는 사람 곧 파라오와 사탄이 필요합니다.
어쨌거나 파라오의 악역 덕분에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떠날 수 있게 되었지만 이제부터 광야를 지나 가나안까지 그들을 건너가게 하는 것은 모세의 몫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이 광야를 지나 가나안까지 건너갈 동안끝이 보이지 않는 시련 때문에 절망하고 건너가기(파스카)를 포기하려는 백성들을 수없이 달래며 희망을 제시해야 합니다.
오늘 복음은 주님께서 이스라엘을 영도하던 모세처럼
꺾이고 상처받은 우리에게 희망을 제시하는 분이라고 얘기합니다.
“그는 올바름을 승리로 이끌 때까지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니 민족들이 그의 이름에 희망을 걸리라.”
이것은 너무도 쉽게 포기하는 우리 인간을 포기하지 않으시는 사랑이며, 우리 인간으로선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절망 치유의 힘입니다.
우리는 부러진 갈대를 꼴 보기 싫어합니다. 싱싱한 젊은이를 보고 싶지 쭈글쭈글한 늙은이를 보고 싶지 않고 싱싱한 것을 보고 싶지 상처받고 골골하는 꼴은 보고 싶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치유할 수 없고 구해 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내가 치유하고 내가 구해 낼 수 있다면 덤벼들어 구할 텐데 그럴 수 없으니 그냥 외면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혜서의 말씀대로 하느님은 전능하시기에 자비로우시고, 당신이 창조한 피조물을 싫어하실 리 없고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당신께서는 모든 것을 하실 수 있기에 모든 사람에게 자비하시고 모든 것을 사랑하시며 당신께서 만드신 것을 하나도 혐오하지 않으십니다. 당신께서 지어 내신 것을 싫어하실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생명을 사랑하시는 주님은 모든 것이 당신 것이기에 모두 소중히 여기십니다.”
물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힘없는 분으로 계시고 힘없는 분으로 돌아가셨지만 전능하신 하느님의 이 사랑에 우리보다 먼저 희망을 두시고 의탁하신 분이셨으며, 그렇기에 힘이 없는 우리에게 희망 되시고 우리도 희망을 지닐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주님처럼 힘없어도 힘 있을 수 있습니다. 생명을 사랑하시고 모두를 소중히 여기시는 하느님에 힘입으면 됩니다.
그래서 우리 곁의 꺾인 갈대와 꺼져가는 심지들에게 희망이 되어야겠습니다.
=====================
[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민족들이 그의 이름에 희망을 걸리라."(마태 12,21)
이제는 그만
비가 멈추고
햇살같은
희망이
피어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이름이란
단순한
호칭이 아니라
존재의 본질과
그의 삶 전체를
담은 상징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은
사랑과 용서
낮아짐과 치유
연대와 정의를
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단지
유다 민족의
메시아가 아니라
모든 이들의
구원자가 되십니다.
이렇듯
예수님의 이름은
다른 이름과
다릅니다.
예수님의
이름은
치유이며
정의이며
무엇보다도
희망의
이름입니다.
그 이름은
고통과 죽음을
안고 넘어선 이름
무력함 속에서도
참된 힘을 보여준
역설의 이름입니다.
그 누구도
제외되지 않는
포용과 사랑의
보편적
구원입니다.
예수님의 구원은
부러진 자리에서
다시 시작하는
희망입니다.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음은
참는 것이 아니라
품는 것입니다.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않음은
포기하지
않음이 아니라
끝까지 믿는
사랑입니다.
그분의
이름 안에
우리의 생명을
온전히 맡기는
신뢰이며
사랑입니다.
그분의
이름 안에서
비로소
우리 존재를
완성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며
하루를 시작하고
그 이름 안에
우리의 이름을
맡기며 오늘을
살아갑니다.
이것이
오늘을 사는
우리의
희망입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