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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고초려(三顧草廬)
유비(劉備)가 제갈공명(諸葛孔明)을 세 번이나 찾아가 군사(軍師)로 초빙한 데서 유래한 말로, ①임금의 두터운 사랑을 입다라는 뜻 ②인재를 맞기 위해 참을성 있게 힘씀을 이르는 말이다.
三 : 석 삼(一/2)
顧 : 돌아볼 고(頁/12)
草 : 풀 초(艹/6)
廬 : 농막집 려(广/16)
(유의어)
군신수어(君臣水魚)
수어지교(水魚之交)
수어지친(水魚之親)
어수지친(魚水之親)
유어유수(猶魚有水)
초려삼고(草廬三顧)
출전 : 삼국지(三國志)의 촉지(蜀志) 제갈량전(諸葛亮專)
중국 삼국시대(三國時代) 때 촉한(蜀漢)의 유비(劉備)가 제갈공명(諸葛孔明)을 모시기 위해 세 번이나 초옥으로 찾아가 정성을 다함으로써 마침내 성공한 이야기는 너무나 유명하다.
그래서 이 성어만큼 많은 사람이 알고 있지만 또 그만큼 실천이 잘 안되는지 비판을 많이 받는 일도 드물 것이다.
갓 한자에 입문한 초심자도 흥미있는 삼국지(三國志)의 얘기와 함께 인재를 맞아들이기 위하여 참을성 있게 노력한다는 뜻까지 아는데 의아할 따름이다.
유비는 관우(關羽), 장비(張飛)와 함께 한실(漢室) 부흥을 위해 도원결의(桃園結義)를 하고 군사를 일으켰으나 계책을 세워줄 군사(軍師)가 없어 초기 고전을 면치 못했다.
어느 날 사마휘(司馬徽)란 은사가 복룡(伏龍)과 봉추(鳳雛) 둘 중 한 사람을 구하라고 조언했다. 제갈량의 별명이 복룡이란 것을 알고 예를 갖춰 초옥을 찾았으나 출타하고 없었다.
두 번째도 허탕을 치자 장비, 관우의 불만을 달래고 세 번까지 찾아가 간곡히 부탁하자 제갈량이 마침내 받아들였다.
이후 적벽대전(赤壁大戰)에서 공을 세우고 위촉오(魏蜀吳)의 삼국으로 천하를 삼분하여 팽팽한 균형을 이루는데 공을 세웠다.
정사에선 이 사실을 간단히 거론하고 넘어갔는데 유비를 이은 유선(劉禪)에게 바친 출사표(出師表)에 이 성어가 사용됐다.
先帝不以臣卑鄙, 猥自枉屈, 三顧臣於草廬之中, 諮臣以當世之事.
선제께서 신을 낮고 천하다 여기시지 않고 외람되이 스스로 몸을 굽혀 신의 초옥으로 세 번이나 찾아 당세의 일을 자문하셨습니다.
由是感激, 遂許先帝以驅馳.
이로 인해 감격하여 선제를 위해 열심히 뛰어다닐 것을 결심했던 것입니다.
인재를 구하는 것이 만사라고 했다. 주공(周公)의 토포악발(吐哺握髮)과 함께 중요성을 강조하는 말은 많은데도 인사를 하는 지위에 있는 사람들은 아는 만큼 실천이 어려운 모양이다.
삼고초려(三顧草廬)
중국 삼국시대(三國時代)에, 촉한(蜀漢)의 유비(劉備)가 난양(南陽)에 은거하고 있던 제갈량(諸葛亮)의 초옥(草屋)으로 세번이나 찾아가 군사(軍師)로 초빙한데서 유래한 말이다.
인재를 맞아들이기 위하여 참을성 있게 노력해야 한다는 말이다. 또는 임금의 두터운 사랑을 입다라는 뜻도 있다.
삼국지(三國志)와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의 또 다른 주인공이기도 한 제갈량(諸葛亮)은 서기 181년에 낭야군(琅句郡) 양도현(陽都縣)에서 태어나 234년까지 산 사람으로 자(字)는 공명(孔明)이다.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어지러운 세파속에서 숙부를 따라 형주(荊州)의 양양(襄陽)으로 피난왔는데 숙부가 죽자, 양양의 서쪽에 있는 융중(隆中)에 정착하였다.
때는 후한(後漢)의 헌제(獻帝) 건안(建安) 6년이 되던 해로 천하는 군웅들이 할거하던 때라, 그는 난세를 피해 이곳에서 은거하며, 독서로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훗날 제갈량이 군사(軍師)로 있게 되는 촉(蜀)의 유비(劉備)는 황건적(黃巾賊)의 난(亂)으로 어지러운 세상의 패권 다툼에서 위(魏)나라의 조조(曹操)를 공격했다가 실패하여, 형주(荊州)로 도망하여 유표(劉表)에게 의지하고 있었다.
유비는 재기하기 위하여 인재를 찾기 시작하였는데, 특히 군기를 잡고 계책을 세워 전군을 통솔할 군사(軍師)가 없어 늘 조조에게 고전을 면치 못했다.
그는 어느 날 형주(荊州)의 은사(隱士)인 사마휘(司馬徽)에게 인재를 천거해 줄 것을 청하면서, 시국에 대해 넌지시 묻자 사마휘는 “글만 읽는 저는 아무 것도 모릅니다. 그런것은 이곳에 계신 와룡(臥龍)과 봉추(鳳雛)가 잘 알고 있는데, 이들 중 한 사람만이라도 얻을 수 있다면 천하를 평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유비가 물었다. “대체 복룡은 누구고, 봉추는 누구입니까?” 그러나 사마휘는 말을 흐린 채 대답하지 않았다. 그 후 제갈량의 별명이 복룡이란 것을 알았다.
여기서 와룡(臥龍)은 제갈량이고, 봉추는 방통(龐統)을 두고 하는 말로 와룡은 곧 누워있는 용이라는 뜻이며, 봉추는 봉황의 병아리라는 뜻이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재주와 지혜가 탁월한 사람을 뜻하는 복룡봉추(伏龍鳳雛) 또는 와룡봉추(臥龍鳳雛)는 바로 이 두 사람에게서 유래한 말이라고 한다.
당시 제갈량은 양양(襄陽) 서쪽 이십리 되는 곳에서 농사를 지으며 초가집에 은거하고 있었다. 유비의 참모들도 제갈량이 걸출한 인재라는 소문을 듣고 있었다. 유비는 그를 초빙하여 자신의 천하 대업을 도와주기를 청하려고 하였다.
유비는 서기 207년, 수레에 많은 예물을 싣고 의형제를 맺은 장비(張飛)와 관우(關羽)를 데리고 직접 양양에 있는 제갈량의 초가집을 찾아갔다. 그러나 제갈량은 집에 없었다. 며칠 후 또 찾아갔으나 역시 출타하고 없었다.
마침내 동행했던 관우와 장비의 불평이 터지고 말았다. “저번에 다시 오겠다고 했는데. 이거, 너무 무례하지 않습니까? 듣자니 나이도 젊다던데!” “그까짓 제갈공명이 뭔데, 이젠 다시 찾아오지 마십시오.” “다음엔 너희들은 따라오지 말거라”
관우와 장비가 극구 만류하는데도 유비는 단념하지 않고 세 번째 제갈량을 찾았다. 그때 비로소 제갈량은 직접 뜰에 내려와 유비를 맞았다.
유비는 관우와 장비를 밖에 있게 하고, 제갈량과 함께 안으로 들어갔다. 유비와 제갈량은 천하의 형세를 이야기하며, 유비는 그에게 군사가 되어주기를 청하였다. 그 열의에 감동한 제갈량은 마침내 유비를 도와 천하 대사를 도모하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다.
여기서 이른바 초가집을 세 번 찾아간다는 뜻으로, 곧 사람을 맞이함에 있어 진심으로 예를 다함의 삼고지례(三顧之禮)와 윗사람으로부터 후히 대접을 받는다는 비유의 삼고초려(三顧草廬) 라는 말이 생겨났다. 이때의 유비는 47세, 제갈량은 27세였으니 유비가 인재를 얻음에 얼마나 성의를 다했는가를 엿볼 수 있는 사례로 전해진다.
훗날 제갈량의 뛰어난 지략으로 유비는 한실(漢室)의 맥을 잇는 촉한(蜀漢)을 세워 황제 소열제(昭烈帝)라 칭하며, 위(魏)나라의 조조(曹操), 오(吳)나라의 손권(孫權)과 더불어 천하를 삼분하고 적벽대전(赤壁大戰)에서 조조의 80만 대군을 격파하는 등 많은 전공을 세운다.
위(魏)나라의 조조는 백성들 위에 군림하는 독재자가 되어 천년의 오명을 남기는 사악한, 공포의 상징이었다면, 촉(蜀)나라의 유비를 도운 제갈량은 선견지명(先見之明)과 주도면밀(周到綿密)함으로 경외의 대상이 되었다.
인류의 역사는 곧 인재들의 연결 고리이다. 나타나고 소멸되며 이어지는 인물들의 반복이다. 과거도 그랬고, 지금도 인재가 역사를 써간다.
훌륭한 인재가 얼마나 많은가가 한 나라의 부흥을 좌우하기도 한다. 그러나 인재가 많다고 해서 반드시 다 잘되는 것은 아니다. 적재적소(適材適所), 필요한 자리에 얼마나 적절한 인물이 위치하느냐가 더 중요하다.
우리나라에도 각 분야마다 그 누구도 따라오지 못하는 걸출한 인재들이 많다. 한류 열풍의 신화를 창조한 배우와 가수들, 일본과 미국 프로야구선수로, 유럽의 프로축구선수로 두각을 나타내며 국익에 일조를 하고 있는 선수들, 모두가 한 분야의 뛰어난 제갈량들이다.
이런 인재가 다른 분야에 진출했다면 그들이 어찌 되었을까? 인재를 발굴하고 육성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런 인재들이 자기 자리를 찾을 수 있도록 하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 인재를 발굴하고 적재적소 활용하는 것이 곧 국가 경영이다.
유비가 삼고초려한 후 제갈량을 얻었고 젊은 그를 나라의 재상에 앉혀 국정을 도모케 한 것은 선견지명으로 인재를 알아보고 그 그릇에 맞추어 자리를 안배한 것으로 오늘날 우리의 정치판에서 깊이 헤아려, 새겨봄직한 일이다.
삼고초려(三顧草廬)
유비가 제갈량을 초막으로 세 번 찾아가 모심으로 인재를 영입하기 위해 거듭 간청함을 이르는 말이다.
삼국지(三國志)
위·촉·오 삼국시대 문턱 무렵, 유비는 자신의 뜻을 펼치기 위해 인재를 모으고 있었다. 그 중 한 명이 서서(徐庶)다. 비범한 지혜에 탄복한 유비는 서서를 군사(軍師)로 임명했다.
어느 날 서서가 유비에게 말했다. “융중(隆中)이라는 마을에 천하에 보기 드문 선비가 있습니다. 성은 제갈(諸葛), 이름은 양(亮), 자는 공명(孔明)입니다. 세인들은 그를 와룡(臥龍)이라고 부릅니다. 주공은 왜 그분을 청해오지 않으십니까.”
이튿날, 유비는 관우 장비와 함께 융중으로 떠났다. 초라한 초가집(草廬)이었다. 유비가 사립문 밖에서 인기척을 내자 동자가 문을 열어줬다. “선생님은 아침 일찍 나가셨습니다.”
며칠 후 제갈량이 집으로 돌아왔다는 소식을 들은 유비는 말을 달려 다시 융중을 찾았다. 한겨울 찬바람이 살을 에는 듯했다. 이번에도 제갈량은 집에 없었다.
세 번째 융중을 찾았을 때는 예를 갖추기 위해 제갈량 초가집에서 반 리나 떨어진 데서부터 말에서 내려서 걸었다.
자신의 초가집으로 몸소 세 번이나 찾아온(三顧草廬) 정성에 감동한 제갈량은 그 순간부터 재능과 지혜, 마음을 다해 유비를 보좌했다.
후에 제갈량은 ‘출사표(出師表)’에 그때의 심정을 담았다. “신은 본래 밭갈이하며 구차히 목숨이나 보존하려 했을 뿐, 세상에 이름이 알려지기를 바라지 않았습니다. 선제(先帝·유비)가 신을 천하다 생각지 않으시고, 황공하게도 스스로 몸을 굽히시어 세 번이나 초막으로 찾아오셔서 신에게 세상일을 물으시는지라 이에 감격해 선제를 좇아다닐 결심을 하게 된 것입니다(…).” 삼국지(三國志)에 나오는 얘기다.
누군가를 ‘내 사람’으로 만들고 싶다면 나의 진심으로 상대의 진심을 움직여야 한다. 진심은 통한다. 청춘의 꿈도 삼고초려의 마음가짐으로 두드리고 또 두드려야 한다. 그럼 그 꿈이 열린다.
▶️ 三(석 삼)은 ❶지사문자로 弎(삼)은 고자(古字)이다. 세 손가락을 옆으로 펴거나 나무 젓가락 셋을 옆으로 뉘어 놓은 모양을 나타내어 셋을 뜻한다. 옛 모양은 같은 길이의 선을 셋 썼지만 나중에 모양을 갖추어서 각각의 길이나 뻗은 모양으로 바꾸었다. ❷상형문자로 三자는 ‘셋’이나 ‘세 번’, ‘거듭’이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三자는 나무막대기 3개를 늘어놓은 모습을 그린 것이다. 고대에는 대나무나 나무막대기를 늘어놓은 방식으로 숫자를 표기했다. 이렇게 수를 세는 것을 ‘산가지(算木)’라 한다. 三자는 막대기 3개를 늘어놓은 모습을 그린 것이기 때문에 숫자 3을 뜻하게 되었다. 누군가의 호의를 덥석 받는 것은 중국식 예법에 맞지 않는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최소한 3번은 거절한 후에 상대의 호의를 받아들이는 문화가 있다. 三자가 ‘자주’나 ‘거듭’이라는 뜻으로 쓰이는 것도 이러한 문화적 배경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三(삼)은 셋의 뜻으로 ①석, 셋 ②자주 ③거듭 ④세 번 ⑤재삼, 여러 번, 몇 번이고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석 삼(叁)이다. 용례로는 세 해의 가을 즉 삼년의 세월을 일컫는 삼추(三秋), 세 개의 바퀴를 삼륜(三輪), 세 번 옮김을 삼천(三遷), 아버지와 아들과 손자의 세 대를 삼대(三代), 한 해 가운데 셋째 되는 달을 삼월(三月), 스물한 살을 달리 일컫는 말을 삼칠(三七), 세 째 아들을 삼남(三男), 여기저기 몇몇씩 흩어져 있는 모양을 삼삼오오(三三五五), 한 달에 아홉 번 밥을 먹는다는 삼순구식(三旬九食), 오직 한가지 일에만 마음을 집중시키는 경지를 삼매경(三昧境), 유교 도덕의 바탕이 되는 세 가지 강령과 다섯 가지의 인륜을 삼강오륜(三綱五倫), 날마다 세 번씩 내 몸을 살핀다는 삼성오신(三省吾身), 서른 살이 되어 자립한다는 삼십이립(三十而立) 등에 쓰인다.
▶️ 顧(돌아볼 고)는 ❶형성문자로 顾(고)는 간자(簡字)이다. 뜻을 나타내는 머리 혈(頁;머리)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雇(고)로 이루어졌다. ❷회의문자로 顧자는 ‘(지난날을)돌아보다’나 ‘방문하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顧자는 雇(품 팔 고)자와 頁(머리 혈)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雇자는 戶(지게 호)자와 隹(새 추)자가 결합한 것으로 ‘품을 팔다’라는 뜻을 갖고 있다. 雇자는 문지방 위로 제비가 날아드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제비는 봄에 찾아오기 때문에 옛날에는 제비가 날아드는 것을 보고 농사일이 시작됐음을 알았다고 한다. 이렇게 제비가 다시 방문하는 것을 뜻하는 雇자에 頁자가 더해진 顧자는 제비가 다시 방문하듯이 사람이나 생각을 다시 되돌아본다는 뜻이다. 그래서 顧(고)는 ①돌아보다 ②지난날을 생각하다 ③돌보다 ④당기다 ⑤돌아가다 ⑥품을 사다(雇) ⑦다만 ⑧생각컨대 ⑨도리어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곁눈질할 면(眄), 돌볼 권(眷)이다. 용례로는 물건을 항상 사러 오는 손님을 고객(顧客), 어떤 분야에 대하여 전문적인 지식과 풍부한 경험을 가지고 자문에 응하여 의견을 제시하는 직책 또는 그 사람을 고문(顧問), 임금이 신하에게 유언으로 뒷일을 부탁함을 고명(顧命), 부모가 자식들을 양육함을 고복(顧復), 생각하여 주고 도와 줌을 고조(顧助), 뒷일을 염려하고 꺼림을 고기(顧忌), 다시 돌이켜 헤아림을 고려(顧慮), 돌보아 보호함을 고호(顧護), 돌아다 봄이나 돌이켜 봄을 고면(顧眄), 두루 돌아 봄을 고첨(顧瞻), 돌이켜 뒤를 봄을 고견(顧見), 보살펴 줌이나 남의 허물을 덮음 또는 되돌아보아 생각함을 고념(顧念), 둘러보거나 되돌아 봄이나 이것저것 생각하고 망설임을 고망(顧望), 이미 지난 일을 못 잊어서 그 뒤를 돌아보거나 살핌을 고후(顧後), 마음에 맺히어 잊지 못함을 고련(顧戀), 명예를 돌아보고 의를 생각함을 고명사의(顧名思義), 고명을 받은 신하를 고명지신(顧命之臣), 편지의 회답도 자세히 살펴 써야 함을 고답심상(顧答審詳), 음악을 잘못 연주하면 주랑이 곧 알아 차리고 돌아본다는 뜻으로 음악에 조예가 깊은 사람을 고곡주랑(顧曲周郞) 등에 쓰인다.
▶️ 草(풀 초)는 ❶형성문자로 뜻을 나타내는 초두머리(艹=艸; 풀, 풀의 싹)部와 음을 나타내는 早(조, 초)가 합하여 이루어졌다. 풀의 뜻으로는 처음에는 艸(초)라고 썼지만 나중에 음을 나타내는 早(조, 초)를 곁들여 草(초)로 쓰게 되었다. ❷형성문자로 草자는 ‘풀’이나 ‘황야’, ‘초고’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草자는 艹(풀 초)자와 早(일찍 조)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이미 풀을 뜻하는 글자로는 艸(풀 초)자가 있지만 주로 부수 역할로만 쓰이고 草자는 단독으로 ‘풀’을 뜻할 때 사용되고 있다. 草자에 쓰인 早자는 뜻과는 관계없이 ‘조, 초’로의 발음 역할만을 한다. 草자가 흔해 빠진 ‘풀’을 뜻하다 보니 ‘엉성하다’나 ‘보잘것없다’라는 뜻도 파생되어 있다. 그래서 草(초)는 (1)기초(超草) (2)초서(草書) (3)건초(乾草) (4)갈초 등의 뜻으로 ①풀 ②거친 풀, 잡초(雜草) ③황야(荒野) ④풀숲, 초원(草原) ⑤시초(始初) ⑥초고(草稿), 초안(草案) ⑦초서(草書: 서체의 하나) ⑧암컷 ⑨풀을 베다 ⑩시작하다, 창조하다 ⑪엉성하다, 거칠다 ⑫초고(草稿)를 쓰다 ⑬천하다, 미천하다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풀이 나 있는 땅을 초지(草地), 풀이 난 들을 초원(草原), 사업을 일으켜 시작함을 초창(草創), 볏짚이나 밀짚 또는 갈대 등으로 지붕을 인 집을 초가(草家), 풀과 나무를 초목(草木), 서체의 하나인 초서(草書), 문장이나 시 따위를 초잡음을 초안(草案), 시문의 초벌로 쓴 원고를 초고(草稿), 녹색보다 조금 더 푸른색을 띤 색깔인 초록(草綠), 푸성귀로만 만든 음식을 초식(草食), 풀과 티끌이라는 초개(草芥), 꽃이 피는 풀과 나무를 화초(花草), 무덤에 떼를 입히고 다듬음을 사초(莎草), 무덤의 잡초를 베는 일을 벌초(伐草), 바다 속에서 나는 풀을 통틀어 일컫는 말을 해초(海草), 약이 되는 풀을 약초(藥草), 베어서 말린 풀을 건초(乾草), 시들어 마른 풀을 고초(苦草), 백성을 달리 일컫는 말로 민초(民草), 세 칸짜리 초가라는 뜻으로 아주 보잘것없는 초가를 이르는 말을 초가삼간(草家三間), 풀 사이 곧 민간에서 삶을 구한다는 뜻으로 욕되게 한갓 삶을 탐냄을 이르는 말을 초간구활(草間求活), 풀뿌리와 나무 껍질이란 뜻으로 곡식이 없어 산나물 따위로 만든 험한 음식을 이르는 말을 초근목피(草根木皮), 풀잎 끝의 이슬 같은 천자라는 뜻으로 덧없는 대장으로 강도의 수령을 이르는 말을 초두천자(草頭天子), 인재를 맞아들이기 위해 참을성 있게 마음 씀을 이르는 말을 초려삼고(草廬三顧), 초목과 함께 썩어 없어진다는 뜻으로 해야 할 일을 못 하거나 이름을 남기지 못하고 죽음을 이르는 말을 초목동부(草木同腐), 초목의 잎이 누렇게 물들어 떨어진다는 뜻으로 가을철을 이르는 말을 초목황락(草木黃落), 길 없는 초원을 걷고 들에서 잠잔다는 뜻으로 산야에서 노숙하면서 여행함을 이르는 말을 초행노숙(草行露宿), 풀빛과 녹색은 같은 빛깔이란 뜻으로 같은 처지의 사람과 어울리거나 기우는 것을 이르는 말을 초록동색(草綠同色), 온 산의 풀과 나무까지도 모두 적병으로 보인다는 뜻으로 적의 힘을 두려워한 나머지 하찮은 것에도 겁냄을 이르는 말을 초목개병(草木皆兵), 풀을 베고 뿌리를 캐내다는 뜻으로 즉 미리 폐단의 근본을 없애 버린다는 말을 전초제근(剪草除根), 나무가 푸르게 우거진 그늘과 꽃다운 풀이라는 뜻으로 여름의 아름다운 경치를 이르는 말을 녹음방초(綠陰芳草), 풀을 쳐서 뱀을 놀라게 한다는 뜻으로 乙을 징계하여 甲을 경계함을 이르는 말을 타초경사(打草驚蛇) 등에 쓰인다.
▶️ 廬(농막집 려/여, 창 자루 로/노)는 형성문자로 庐(려)의 본자(本字), 庐(려)는 간자(簡字)이다. 뜻을 나타내는 엄 호(广; 집)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盧(로)가 합(合)하여 이루어졌다. 그래서 廬(려, 로)는 ①농막집(논밭 가운데 간단히 지은 집) ②주막 ③여인숙 ④숙직실 ⑤오두막집 그리고 ⓐ창(槍) 자루(끝에 달린 손잡이)(로) 따위의 뜻이 있다.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암자 암(庵)이다. 용례로는 민가가 모여 있음을 여락(廬落), 무덤 가에 지은 초가로 상제가 상이 끝날 때까지 거처하는 곳을 여막(廬幕), 오두막집이나 움막집을 여사(廬舍), 상제에게 편지를 할 때 겉봉에 공경하는 뜻으로 받는 이의 이름 아래에 쓰는 말을 여사(廬史), 상중에 있는 사람에게 하는 편지에서 상주가 거처하는 집을 이르는 말을 여소(廬所), 생각 밖을 여외(廬外), 지붕을 짚이나 풀로 인 작은 집을 초려(草廬), 살림집을 옥려(屋廬), 승려가 사는 암자를 승려(僧廬), 달팽이의 껍질처럼 작다는 뜻으로 작게 지은 누추한 집의 비유로 자기 집을 겸손하게 이르는 말을 와려(蝸廬), 임금이 국상을 당하였을 때 거처하는 여막을 엄려(嚴廬), 대자리로 둘러 쳐서 지은 집을 거려(籧廬), 상제가 거처하는 여막을 점려(苫廬), 여막을 지음 또는 집을 지음을 결려(結廬), 선조 대대로 살아 오는 집을 선려(先廬), 밭으로 에워싸여 있는 집을 전려(田廬), 상제가 거처하는 곳을 효려(孝廬), 상제 된 사람이 여막에서 거처함을 거려(居廬), 허술하게 지은 집이나 가난한 집을 궁려(窮廬), 유비가 제갈공명을 세 번이나 찾아가 군사로 초빙한 데서 유래한 말로 인재를 맞기 위해 참을성 있게 힘씀을 삼고초려(三顧草廬), 인재를 맞아들이기 위해 참을성 있게 마음 씀을 이르는 말로 삼고초려라고도 함을 초려삼고(草廬三顧), 너무도 깊고 그윽하여 그 진면목을 알 수 없음을 여산진면목(廬山眞面目) 등에 쓰인다.